소설리스트

11화 (11/72)

“빵 더 줄까?”

발터가 이야기를 잠시 멈춘 후, 빈 접시를 꽉 붙잡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혜미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돼요?”

혜미가 눈을 반짝거렸다. 호밀 빵은 막 구워 낸 듯 따뜻했다. 부드러운 식빵, 혹은 쫄깃한 바게트를 떠올리고 있던 그녀의 기대와는 달랐지만 씹는 식감이 꽤나 좋았다. 중간중간 들어간 굵직한 밤은 달콤했고 버터는 향이 진하고 풍부했다.

“계속 이야기했는데, 배 안 고파요?”

“빵보다 다른 걸 먹고 싶긴 해.”

“뭐요?”

“너.”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면 어떻게 하란 말인지. 예고도 없이 원 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발터의 직접적인 표현에 혜미는 어쩔 줄을 몰라 그저 눈동자만 굴렸다.

“농담이었어.”

“…아, 하하하. 참 재밌다.”

혜미가 로봇처럼 경직되어 웃는 사이 발터가 그녀의 접시에 자신의 빵을 나눠 주었다.

“…고맙습니다.”

혜미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자, 발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발터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혜미는 계속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말은 계속 그런 식으로 할 거야?”

“네?”

“내게 계속 말을 높일 거냐고.”

“…무슨 문제라도?”

혜미가 빵의 중앙을 익숙하게 가르며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문제 있어.”

발터가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넌 황가의 직계야, 이든.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내게 쓰는 말투부터 고치는 게 좋아.”

동갑인 발터에게 말을 놓을 타이밍을 재고 있던 그녀에게는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혜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알았도다.”

“…장난치지 말고.”

“알겠노라?”

“그만해.”

발터가 결국 쿡,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혜미 역시 그를 보며 어깨를 얕게 들썩이며 웃었다.

“알았어. 그럼 진짜… 말 편하게 한다…?”

“욕은 하지 마라.”

발터가 키득거리는 그녀를 보며 벅찬 흥분을 애써 감추었다. 깨어난 이든을 보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해 허기가 지지도 않았다. 기억만 하지 못할 뿐, 그녀의 행동은 과거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근데 이런 말을 직접 하긴 좀 그런데….”

“그냥 해.”

“아무래도 나, 좀 허당이었지?”

혜미가 빵에 버터를 듬뿍 야무지게 올린 후, 크게 베어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누군가 음식을 들여보내기 전까지는, 발터가 해 주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배가 고픈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깊은 새벽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허기진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혜미는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세기의 절단 신공을 벌인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궁금해 그녀를 살려 두었다던 폭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일라는 세드릭을 좋아하고 있는 게 백 프로 확실한 것 같은데. 어떻게 옆에서 보면서 그걸 눈치를 못 챘을 수가 있지…?”

목이 메는 그녀의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 붉은 과실주를 주르륵 따라 내밀며 발터가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넌 내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도 15년간 눈치채지 못했어.”

발터의 두 번째 펀치는 조금 더 강력했다. 그녀는 이제껏 누군가에게 대놓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직접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얼굴은 농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진지했다.

장난으로 넘기는 것조차 미안해지는, 뜨거운 애정이 담긴 표정.

“마셔. 몸이 따뜻해진다고 네가 좋아했던 술이야.”

발터가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말을 덧붙였다. 혜미는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해 붉은 와인을 꿀꺽꿀꺽 물처럼 들이켰다. 처음 마셔보는 술인데 놀랍게도 맛이 너무나 익숙했다. 그녀가 와인 잔을 단번에 비운 후, 애써 화제를 돌렸다.

“흠. 그래서 세드릭은 결국 아일라랑 잘된 거 맞지?”

비록 실전 연애 경험은 없지만 이론은 꽉 잡고 있는 그녀였다. 딱 봐도 둘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까칠한 도련님 같은 예민한 성격의 세드릭과 그런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아일라. 기억을 잃기 전의 이든이 조금만 눈치가 빨랐어도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럴 기회가 없었어.”

“왜?”

발터의 애매한 대답에 혜미가 눈을 끔뻑였다. 지금까지 이야기로만 들었을 때는 아일라가 빵 굽는 화덕 앞에서 당장 고백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첫눈까지 날리는 로맨틱한 날이지 않았던가.

“그날 밤. 아일라가 사라졌으니까.”

“…사라지다니?”

의문 어린 표정을 한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아일라가 사라진 건, 성주인 발트리가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소식을 들고 돌아온 밤이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소식. 혜미는 발터의 무거운 표정을 보고 그게 뭔지를 직감했다.

“…내가 황가의 사람이라는 걸, 모두 다 그때 알게 된 거구나.”

“그래.”

“혹시 그게… 나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거야?”

발터의 턱이 경직하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그가 쓴 약을 내뱉듯 짧게 답했다.

“맞아.”

듣고 싶지 않았지만 꼭 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혜미는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달콤한 와인의 끝에 쌉쌀함이 감돌았다.

***

발트리가 세르노티성으로 돌아온 것은, 첫눈이 함박눈처럼 내리던 늦은 겨울밤이었다. 발트리는 한 달에 걸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자려고 누운 스무 명의 정예 훈련생 모두를 그의 탑으로 집합시켰다.

“아까 아일라랑 화덕 앞에서 그 이야기 하느라고 늦었던 거야. 무슨 네 욕이라도 한 줄 알았냐?”

“흠…. 빵 개수가 세 개나 모자랐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야. 넌 지금 아일라한테 우리 사이를 들킨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해?”

“어차피 다들 알게 될 일이잖아. 뭐가 문제라는 거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거랑 그딴 식으로 들키는 거랑은 뭔가 기분 자체가 다르잖아!”

반시계방향으로 이어지는 나선계단을 오르며 이든과 발터가 목소리를 낮추어 티격태격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아.”

“너 그럴 때마다 진짜 무식해 보이는 거 알아?”

“내려가서 키스하고 오자. 입 맞추고 싶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죽을래?”

“왜. 8층에서 뛰어내릴 자신이 없어? 안고 뛰어줄까?”

“자신이 없긴 누가 없대…!”

발터에게 소리를 낮추며 눈을 부라리는 이든의 뒤에서 길게 줄을 늘어선 다른 훈련생들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불평했다.

“그런데 성주님은 이렇게 늦은 밤, 꼭 소집을 하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잘 시간이 훨씬 넘었잖아.”

“추워 죽겠는데 뭐든 빨리 좀 하고 끝났으면 좋겠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긴 것은 맨 앞에서 선두로 걷는 세드릭과 불안한 표정으로 줄의 끄트머리를 뒤따르는 아일라뿐이었다.

“다들 모인 건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발트리는 눈이 쑥 들어가 피로해 보였다. 원래도 마른 얼굴이 조금 더 핼쑥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두 눈동자만은 형형했다.

“지금 너희들 눈앞에 있는 것이 뭔지 아느냐?”

어두운 천에 싸여 있었지만 길이로 보나, 그 크기나 형태로 봤을 때 딱 봐도 검이었다.

“성주님…. 지금 설마 새로 산 칼 자랑 하려고 우릴 부른 건 아니겠지?”

이든이 옆자리에 앉은 발터를 향해 고개를 기울여 소곤거렸다. 발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쓸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던 탓이었다.

“풀어라, 세드릭.”

예사롭지 않은 발트리의 태도에 긴장한 것은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성주의 옆에 서 있던 그가 망설인 것도 잠시였다. 그가 탁자에 놓인 검을 조심스레 집어 들고 깔끔한 손놀림으로 천을 풀어냈다. 부드러운 천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자 검집에 든 장검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점점 더 번쩍거리는 빛을 발하는 보석을 보며 발트리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든이 물기 어린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낮게 내뱉었다.

“저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위치였고, 앞으로도 똑같을 거예요.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이든이에요.”

그녀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이 혼란을 담고 흔들렸다. 낯선 사람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이든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왜 나를 그렇게 보지? 왜 다들 나를 모르는 사람 보듯 낯설게 보는 거지?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악을 쓰듯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세드릭! 토비아스! 크리스토프! 아일라!”

함께 훈련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웃었다. 수년 동안이나 희로애락을 같이 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는 이든은 눈물을 죽어라 참고 있었다.

“빈센트! 파비안! 알리시아! 리나! 페터! 막심!”

이름이 불린 이들이 모두 그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니콜라스! 얀! 필릭스! 율리안! 리온!”

이든은 스무 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이름을 모두 호명한 후,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발터 세르노티.”

핏발이 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는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역시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지켜야 할 주군 따위가 아니야…. 나도… 나도, 세르노티라고.”

발터를 향한 그녀의 눈동자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그의 얼굴을 계속 보면 터지는 눈물을 참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든은 애써 세드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함께 먹고, 자고, 훈련한 동료잖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뀌는 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렇지, 세드릭.”

매 순간 그녀의 말을 받아치던 냉정한 세드릭마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말이 맞잖아, 세드릭. 그렇다고 말 좀 해 봐. 응?”

무릎을 꿇은 이든이 고개를 돌리며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애써 웃었지만 세드릭은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부탁이야. 제발… 제발… 누가 말 좀 해 줘….”

바닥에 얼굴이 닿도록 고개를 숙인 채,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발터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꽉 쥔 주먹에 핏줄이 툭툭 돋았다.

그는 다리가 부서져 앞을 가린 테이블을 한 손으로 거칠게 걷어 냈다.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꽉 잡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 이든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이든.”

이든의 입술에서 마침내 서러운 흐느낌이 터졌다. 발터는 오열하는 그녀를 품에 강하게 끌어안았다.

“으흑….”

굵은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넌 우리의 동료고, 가족이야.”

그리고 나의 연인이다. 발터가 그녀의 귀에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이든이 그에게 안긴 채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의 이름 따위… 흑… 원한 적 없어. 너희들의 충성 따위… 그딴 거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알아….”

뜨거운 눈물이 발터의 어깨를 끊임없이 적셨다.

“내 이름은 이든이야…. 흑….”

“그래. 넌 그냥, 이든이다.”

발터가 뜨거운 숨을 삼키며 그녀에게 몇 번이나 중얼거렸을 때였다.

“그의 말이 맞아. 그녀는 그냥 이든이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발터를 시작으로 기사들이 그녀의 주위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둘러싼 원이 점점 그 크기를 늘렸다.

“괜찮아, 이든.”

“그래! 괜찮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니잖아!”

“울보냐?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지 마!”

“네가 변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똑같다고…!”

이든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둘러싼 기사들의 중심에서 그녀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지금 들은 건 다들 기억에서 지우는 거야. 내 말 알아듣지?”

이든이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추었다.

“다들 그래 줄 거지? 날 위해… 그래 줄 수 있지? 난 죽어도 세르노티를 떠나고 싶지 않아.”

기사들이 그녀를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의 눈빛에는 간절한 진심이 있었다. 애원하듯 호소하는 그녀를 외면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직 어렸다. 실감이 나지 않는 황실의 이야기보다는, 소중한 동료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욱 컸다.

“…흐음….”

발트리의 입술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모두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손임을 증명하는 대마법사의 보석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주님! 이번 일은 무엇보다 이든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든이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이든이 행복하지 않다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일은 무덤에까지 가져가겠습니다!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그녀를 보호하듯 둘러싼 세르노티의 기사들의 중심에서 이든이 눈물을 단 채 빛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을 끌어모아 제게로 동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죽은 황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든은 제국의 주인으로 적합한 이였다.

***

동굴 안에서 촛불이 일렁였다. 탑에서의 일이 있은 지 이틀째였다. 발터는 발트리의 탑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손을 잡고 숲으로 향했다. 이든과 함께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는 말에 세드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을 잘 달래 줘. 성주님과는 내가 대화를 해 보겠다.”

훈련생들은 이미 이든과 그의 관계를 눈치챈 지 오래였다. 같이 밥을 먹은 지가 어느덧 수년째인데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했던 것이다.

“후회해…?”

발터가 이든의 맨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추운지 이든이 그에게 더욱 바싹 붙어오며 속삭였다.

“뭐가?”

“그냥. 다.”

발터가 묵직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그녀를 나직하게 내뱉었다. 이든은 단단한 그의 가슴에 뺨을 포갰다. 쿵. 쿵. 강한 심장 박동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황제 같은 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발터.”

이든은 눈을 감은 채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모두와 함께, 이곳 세르노티에서 영원히 함께 살고 싶다.”

발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스르륵, 풀렸다 감기는 느낌은 눈이 감길 만큼 편안했다. 이든은 이 일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크리스티앙 폐하는 황제가 될 거야. 그가 성군이 되지 않아도, 되어도 상관없는 일이잖아. 어차피 우린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댕그랑.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이든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지?”

이든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발터가 미간을 모았다. 그의 귀에도 똑똑하게 들렸다. 탑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성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녀의 목소리에 염려가 깃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터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성주가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는 모양이군.”

“…왠지 마음이 안 좋다.”

이든이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트리가 자신의 가문과 황실에 대해 얼마만큼 소속감을 느끼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 봐야겠어. 보고 말씀이나 들어 드릴래.”

“그냥 무시해.”

“그래도….”

“내가 갈게, 그럼.”

발터는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든이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럴래? 어쩜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아마 성주님은 지금 내 꼴도 보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

몸에 튜닉을 걸친 후, 가죽신을 신는 그의 등 뒤에서 이든이 그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아버지를 이해해 줘, 발터.”

발터가 입술을 슬쩍 깨문 채, 말없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를 끌어안고 이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이잖아. 난 솔직히 성주님께 미안하기도 한걸.”

“그럴 것 없어.”

“…발터.”

발터가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동시에 기다란 입술이 그녀에게 포개졌다. 발터의 체온이 그녀에게 옮겨 갔다. 그의 마음까지도 전달되는 기분.

“사랑해.”

입술을 간신히 떨어뜨린 발터가 그녀의 눈을 보며 낮게 내뱉었다. 톤이 낮아 부드러운 목소리 끝이 긴장에 가늘게 떨린다. 발터 세르노티를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널 사랑한다. 이든.”

모두가 눈물을 터뜨렸던 지옥 같은 훈련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이의 눈동자를 축축하게 적실 수 있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내 전부는 너야.”

이든은 붉게 젖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느리게 웃었다. 그의 한마디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춥.

이든이 발터의 입술에 느리게 제 입술을 가져갔다 뗐다. 너에게 내 진심이 전달되기를.

“나도.”

“…….”

“나도 그래, 발터.”

***

숲속을 달리는 발터의 머리칼이 바람에 거칠게 날렸다.

“빨리 돌아와라.”

수줍게 속삭이던 이든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속도가 더 빨라졌다. 열기 오른 뺨에 바람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않았지만 춥지도 않았다.

‘네가 아무것도 잃지 않게 만들어 줄게.’

발터는 이든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댕그랑.

탑의 종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발트리가 받았을 충격을 그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일생을 황가를 위해 충성하며 살았던 그에게 목표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지만 그에게도 목표가 생겼다.

‘난 널 위해 살 거야, 이든.’

아무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제국력 175년 겨울.

아일라 실종 2일째 밤.

댕그랑.

무거운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성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리며 발터를 괴롭히고 있었다.

“흐으….”

발터는 이를 악물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본인도 혼란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성주를 염려하고 있는 이든을 떠올리자 속도에 더욱 힘이 붙었다.

가서 발트리에게 확실하게 말하리라. 그와 이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말아 달라고. 이곳 세르노티에서 지금껏 그래 왔듯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그는 성주를 향해 협박이든 애원이든 모두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파비안.”

성에 도착한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발터가 그 자리에서 흠칫 발을 멈추었다.

“파비안!!!”

성문 앞에서 목을 뚫린 파비안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채였다. 저항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얼어붙은 검은 눈동자에 사망 당시의 충격이 그대로 담겨 있을 뿐이었다.

“…이, 이게… 대체….”

발터는 피범벅이 된 파비안의 눈을 감겨 준 후, 어두운 막사를 향해 내달렸다. 불빛 한 점 없는 막사는 아비규환이었다.

“발터…!”

모두들 잠에서 깬 상태 그대로 공격을 받았음을 보여 주듯, 공간은 엉망진창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막사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발터는 시커먼 옷으로 둘러싸고 있는 시체 하나의 머리에서 후드를 벗겨 냈다. 영지 사람은 아니었다.

“기척이 나서 눈을 떠 보니… 갑자기… 모르는 녀석들이 공격을….”

리온이 벽에 등을 기댄 채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창가 바로 옆에 위치한 리온의 침구는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리온은 훈련생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소리에 예민한 이였다. 인기척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심장으로 들어오는 일격을 간신히 막았지만 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말하지 마라, 리온.”

발터는 힘겹게 입을 떼는 리온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곤 그를 지혈하고 있는 빈센트에게 대신 물었다.

“세드릭은…? 세드릭은 어딨지?”

불안한 예감에 정수리가 서늘했다. 빈센트가 옷을 찢어 리온의 어깨를 단단히 묶었다. 리온이 이를 꽉 물고 신음을 참아 냈다. 빈센트가 팔에 힘을 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놈들을 쫓아서 탑으로 갔어. 성주님이 위험할지도 몰라. 여긴 우리가 수습할 테니 어서 가 봐라, 발터.”

“리온을 부탁해. 마을에서 의사를 불러와.”

“알았으니 어서!”

발터는 그의 침상 위에 놓여 있던 칼을 들고 창문을 뛰어넘었다. 불안한 피가 심장에서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탁탁탁!

반시계 방향의 나선계단을 단번에 오르는 그의 발걸음이 올라갈수록 점점 빨라졌다. 시커먼 옷을 입은 시체가 한 층마다 한 명씩 쓰러져 있었다. 그들을 뒤에서 쫓았을 세드릭의 움직임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휘잉.

맨 꼭대기 탑의 문은 열려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는 검은 그림자. 그리고 쓰러진 발트리를 붙들고 외치는 세드릭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주, 정신을 차리십시오…!”

발터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져 고개를 한 번 털어 내야 했다. 피투성이가 된 세드릭이 그를 발견하고 소리를 쳤지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발터!”

늘 강하게만 보이던 고집스러운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광경은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그의 곁에서 피투성이가 된 검이 나뒹굴었다.

“아… 아버지…?”

발터가 미간을 모은 채 넋을 잃은 표정으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들을 본 발트리가 감기려는 눈을 애써 떴다.

“…이 …든을….”

그의 입술에서 피가 울컥 터져 나왔다.

“…폐하를 지켜야 한… 크흑….”

발트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손이 검에 닿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발터! 정신 차려라! 이든은 어디 있어?”

세드릭의 외침에 흐릿해지던 발터의 눈이 빛을 찾았다. 공간의 소음이 한꺼번에 귀에 휙 빨려 들어왔다.

이든.

세드릭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놈들은 이든을 찾고 있어. 빨리 그녀에게로 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틀거리던 발터가 검을 꽉 쥐었다.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어서 떠나라고!!!”

그는 이를 꽉 물었다. 순식간에 세드릭과 발트리를 지나쳐 탑의 꼭대기의 창에서 몸을 날렸다.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턱이 덜덜 떨렸다.

쿵.

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눈동자에 열이 몰려 뜨거웠다.

“하아….”

발터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길게 내뿜어졌다. 정신 차리자.

어릴 적 발트리가 그에게 수없이 강조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라. 발터.”

할 수 있는 것.

그가 바짝 마른 입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세게 털어냈다. 뜨겁게 젖어 흐려지는 눈으로 시야를 집중했다. 밤새 하얗게 쌓인 눈밭에 어지러운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발자국은 성문을 넘어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파비안, 리온 그리고 피를 토하며 눈을 감던 발트리의 잔상에 이든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 목이 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발터의 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든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하…. 하아…!”

그는 단숨에 성안을 벗어났다. 이든과 함께 경쟁하며 매일 달리던 숲길이 너무나 길었다. 차가운 눈발이 날려 그의 얼굴에 마구 달라붙었다.

“빨리 돌아와, 발터.”

그에게 속삭이던 이든의 마지막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신발 두 짝이 어느새 모두 벗겨져 있었지만 발터는 알아채지도 못했다. 얼어붙어 가는 차가운 돌과 흙, 뾰족한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든이 홀로 있는 동굴을 향해 이를 악물고 달렸다.

“…발터!”

정신없이 달리던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적을 뒤쫓던 페터였다. 페터의 앞에 있던 놈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발터의 검이 그의 허리를 두 동강으로 잘라 냈다.

“발터! 이, 이든을…!”

페터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발터는 동굴을 향해 다시금 내달렸다. 철퍽. 철퍽. 이끼가 낀 샘물이 그의 발을 차갑게 얼렸지만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하게 옥죄는 심장이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하아…! 하아…!”

놈들이 결국 숲까지 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이든에게는 칼 한 자루도 없었다.

“사랑해, 발터.”

발트리가 폭탄 같은 말을 내뱉은 이틀 전, 그는 이든의 손을 이끌며 도망치듯 성을 빠져나왔다. 혼란한 감정을 참아 내지 못해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빠르게 걷던 자신. 그리고 그런 그를 불러 세운 채, 달래듯 속삭이던 이든의 목소리.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눈물을 단 채 웃던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오직 그의 손뿐. 그만큼 서둘렀던 자신의 탓이었다. 잘 때도 검을 베개 삼아야 했던 본분을 망각하고, 눈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이 멍청하게 굴었던 스스로의 잘못이었다.

만약 그것 때문에 이든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안 돼.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발터는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그 누구도, 이든의 머리카락 한 올도 손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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