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72)
  • 입을 떼지 못하는 세드릭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건지, 아일라는 천천히 말을 반복하기까지 했다.

    “…예쁜 이름이구나. 아일라.”

    마침내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눈을 맞춘 세드릭이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줄곧 네 이름이 궁금했어. 말해 줘서 고맙다.”

    칭찬에 인색한 세드릭이 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다정한 말투와 미소였다.

    나중에 이 일을 말했을 때 발터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다.

    “진짜라니까! 나도 소름 끼쳐 죽는 줄 알았어!”

    이든이 발터의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똑같은 반응이었겠지만 옆에서 직접 두 귀로 들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세드릭 말이야. 널 볼 때마다 얼마나 자랑스럽겠어? 꼬질꼬질한 고양이 새끼 같았던 널 데려와서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 낸 게 아마 제 덕이라고 생각하면서 잘난 척하고 있을걸?”

    “…….”

    “말은 안 해도 밤마다 네 생각하면서 히죽거릴 게 분명하다고.”

    아일라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시선을 스윽 돌렸다. 어. 설마 꼬질꼬질한 고양이라고 표현해서 기분이 상했던 걸까. 성격도 세드릭을 점점 닮아 가는 아일라는 의외로 자존심이 강했다. 키가 작고 마른 그녀를 꼬맹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페터를 들어 메치기로 광장에 메다꽂은 적도 있었다.

    “아. 빵.”

    작지만 무서운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며 화덕을 바라보았다. 반죽된 빵이 한가득 놓인 무거운 트레이를 차례로 뒤집는 폼이 능숙했다.

    “근데 성주님은 어딜 가신 걸까요.”

    아일라가 화제를 바꾸자 이든이 속으로 안도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나야 모르지. 세드릭한테도 정확하게 말을 하지 않은 눈치던데. 아마, 돌산의 마법사에게로 가지 않았을까? 1년에 한 번씩 그러시잖아. 이번엔 주기가 좀 짧았지만.”

    “…금방 돌아오시겠죠?”

    아일라가 작게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럴 거야. 조금 늦어지더라도 문제는 없지 뭐. 너도 알다시피 잔소리쟁이 세드릭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세드릭 님이 하는 말 중, 필요하지 않은 건 없어요. 그는 안전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이든이 그를 대변하듯 목소리를 조금 높이는 아일라가 귀여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세르노티 성안은 천하무적이야. 자나 깨나 안전제일인 세드릭이 있잖아.”

    “…….”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아일라.”

    이든은 그녀를 보며 조용히 덧붙였다. 아일라는 아직도 세드릭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녀가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다른 사람과의 깊은 교류를 차단하고, 훈련이 없는 날이면 늘 홀로 숲에 처박혀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그녀의 과거가 그만큼 혹독했기 때문일 것이다.

    “넌 영원히, 세르노티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 돼.”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요?”

    “당연하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늙어죽을 때까지 우리랑 같이. 응?”

    아일라가 이든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바짝 올라간 숱 많은 황금색 속눈썹이 푸른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를 감쌌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이든을 응시하던 아일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든.”

    “응.”

    “그저께… 저녁 식사 후에요.”

    이든은 마치 핑크 장미 꽃잎 같은 아일라의 입술을 보며 속으로 또다시 감탄했다. 아. 정말 얘는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 예쁘단 말이야.

    “응.”

    “발터와 둘이서 탑 뒤 헛간에 있는 거 봤어요.”

    헉! 기분 좋게 와인을 홀짝이던 이든이 눈이 번쩍 뜨였다.

    “뭐, 뭐라고?”

    내 이럴 줄 알았지. 시도 때도 없이 아랫도리를 들이대는 발터 녀석 때문에 언젠가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

    “아, 아일라. 그, 그게 내가 발터와 함께 청소를 하려고….”

    “추운데 왜 옷을 발가벗고 청소를 하나요?”

    당황해서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던 이든이 입을 딱 다물었다. 망했다. 확실히 들킨 게 틀림없었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 앞에서 아일라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짓말할 필요 없어요. 이든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발터한테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잖아요.”

    “으응?”

    어째 이야기가 조금 이상한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아일라의 말에 이든은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처음에는… 이든이 위험에 빠진 줄 알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발터가 이든을 강제로 범하려는 줄 알고.”

    “하하, 아일라. 발터 그 녀석이 좀 거친 면이 있긴 하지만 여자를 함부로 가질 놈은 절대 아니야.”

    이든이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확실히 발터를 옹호했다. 까딱했다간 아일라가 발터를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그건 제가 알 바 아니죠.”

    아일라가 농담 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삭막한 얼굴로 건조하게 받아쳤다.

    “남자들이란 세드릭 님을 빼고는 다 똑같은 짐승이니까요.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 주위에 보는 눈이 있건 말건 저만 꼴리면 침을 뚝뚝 흘리며 아랫도리를 치켜세우고 달려드는… 더럽고 냄새나는 미친 종자들에 불과하니까.”

    얼어붙은 호수를 연상시키는 파란 눈동자에 찬바람이 쌩쌩 날리고 그녀의 말투는 표독스럽게까지 들렸다. 이든은 목덜미가 오싹할 지경이었다.

    세드릭 이 자식. 도대체 아일라에게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급하게 머릿속을 비집는 의문점은 뒤로한 채, 이든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일라. 전혀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발터를 원했다고. 넌 내가 설마 가만히 당하고 있을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 그래서 조금 지켜보자 싶어서 살펴봤더니, 제가 오해한 것 같더라고요.”

    꿀꺽. 이든은 벌을 받는 심정으로 아일라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긴 채 어색하게 웃었다.

    “아일라, 너 대체 어, 어디까지 봤어…? 하하….”

    “이든이 발터의 몸 위에 올라타서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것까지 보고 자리를 떴어요.”

    아일라가 깔끔하게 말을 끝내고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든은 때가 겨울인 게 무색하게도 옆구리에 땀이 솟는 기분이었다. 트레이에서 다 구워진 빵을 집게로 꺼낸 후, 등나무로 짠 바구니에 휙휙 쌓는 아일라의 손길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아일라…. 정말 미안해.”

    “미안하긴 뭐가요.”

    “그, 그게 너한테 못 보일 꼴을 보여서.”

    이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카트리나 아줌마와 프랑크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제일 막내인 아일라에게 정사 현장을 들킨 것은 더했다. 민망함과 동시에 왠지 모를 미안함이 솟구쳐 올랐다.

    “전 그냥 신기했을 뿐이에요.”

    그랬겠지. 매일 잡아먹을 듯이 싸워 대는 그와 그녀가 붙어 있는 꼴을 보았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걸 하면서 그렇게 좋을 수 있는 건지, 하고.”

    마치 먼 곳을 보듯 초점 흐린 시선으로 불길을 바라보며 아일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목소리는 약간 낮아져 잠겨 있었다.

    “이든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거든요. 죽을 것 같다고 했지만… 정말 죽고 싶은 거랑은 거리가 멀어 보였어요.”

    죽을 것 같다고 발터의 위에 올라타 헐떡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든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화덕에라도 기어들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나 부끄러워 아일라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세드릭 님이 헛간 근처로 오려는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뭐라고!”

    이든이 눈을 부릅뜨고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된다. 세드릭에게 발터와의 현장을 들켜서 죽을 때까지 놀림을 받느니 차라리 우물에 빠져 죽는 게 나았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그녀와 발터를 보는 세드릭의 가느다란 시선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세드릭 걔는 왜 그 시간에 잠을 안 자고 돌아다니는 거지!”

    똑같은 질문을 아일라에게는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이든이 얼굴을 구겼다. 순식간에 빵을 산처럼 쌓아 올린 후, 아일라가 집게를 꽉 쥔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냈다.

    “겨울에 들짐승이 가끔 들어오나 싶어서 보러 왔을 거예요. 세드릭 님은 그런 사람이니까. 보이는 데서나 보이지 않는 데서나 똑같이 성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잖아요. 헛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이든은 긴장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으로 아일라를 바라보았다. 설마 원치도 않는 관객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것일까.

    “제가 미리 둘러봤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세드릭 님이….”

    “그 의심 많은 자식이 못 믿고 헛간으로 왔지? 그랬구나!”

    “아뇨. 잘했다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요.”

    세드릭에게 칭찬을 받은 아일라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아아, 다행이다.”

    이든은 커다랗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마터면 세드릭에게 들킬 뻔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했다.

    “진짜 고맙다, 아일라.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야…!”

    세드릭이라면 이미 둘 사이를 눈치채고도 남았을 거라는 사실을 말하는 대신, 아일라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이든.”

    “응.”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그녀가 과연 무슨 질문을 할지 괜히 겁이 나서 이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발터를 사랑해요?”

    다행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해지는 질문은 아니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는 질문에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이든은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이제는 연인으로서 그를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이든을 바라보며 질문을 이어가는 아일라의 눈빛은 진지했다. 적어도 세드릭처럼 그녀를 놀리는 투는 아니었다.

    이든은 트레이에서 빵을 하나 집어 들고 한 입 크게 베어 문 후, 우물우물 씹었다. 금방 구워진 따뜻한 빵이 이에 씹히는 식감이 좋았다.

    “음, 나는 있잖아….”

    잠시 고민하던 이든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씩 웃었다.

    “발터가 위험에 빠진다면, 그를 위해 대신 죽어도 좋을 것 같아.”

    아일라가 파란 눈동자를 소리 없이 깜빡였다.

    “…극단적인 답이네요.”

    “내가 그렇지 뭐.”

    이든이 어깨를 으쓱하며 빵을 다시 뜯었다. 안에 밤이 들어간 빵은 발터 녀석이 좋아하는 메뉴였다. 하나 숨겨 놨다가 몰래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말이 없던 아일라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해요.”

    “그래?”

    이든이 반색하자 아일라가 눈을 빛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중에 저도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그를 위해 죽는다면… 상대는 내 진심을 알아 줄까요?”

    “야. 아일라. 그거야말로 좀 너무 극단적이다. 하하. 고백과 동시에 죽어 버리면 너무 아쉽잖아!”

    “어떤 사람한테는 백 마디 말보다 한마디 행동이 더욱 진심으로 다가올 수도 있잖아요?”

    “애늙은이 같은 소리도 좀 그만해라. 네가 그럴 때마다 자꾸만 세드릭 생각나는 거 아니?”

    “…그래요?”

    타박을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아일라는 칭찬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숱 많은 황금색 속눈썹을 내리깔고 보일 듯 말 듯 배시시 미소 지었다. 이제 봤더니 아일라는 웃으니까 훨씬 귀여웠다. 이든은 왠지 그녀와 한 뼘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든.”

    “응?”

    “언젠가는 세드릭 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말을 잇던 아일라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꾹 다물었다. 굳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든이 고개를 갸웃함과 동시에 세드릭의 모습이 나타났다.

    “뭐야. 넌 왜 갑자기 온 거야?”

    훈련생들이 기본적으로 받는 교육 중 하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기술이었고, 그중에서도 세드릭은 단연 일등이었다. 화덕을 마주하고 뒤돌아 있던 아일라가 대체 그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이든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식사 시간이 코앞인데 오래 걸리는 게 이상해서 또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닌가 싶어 왔다. 이든. 너 또 아일라를 붙잡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

    나타나자마자 잔소리를 퍼붓던 세드릭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움찔하는 이든에 손에 걸린 잔을 보자, 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너 아일라한테 술 먹였어?”

    “어? 아, 응. 좀 추워하는 것 같아서 그러긴 했는데….”

    “아일라가 너처럼 술고래인 줄 알아?”

    “…저기요?”

    싸늘하게 내뱉는 세드릭을 향해 이든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난히 햇살이 뜨거웠던 지난여름. 마을 축제 때 광장에서 열렸던 맥주 마시기 대회에서 이든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아일라였다.

    우승자의 부상은 철제 갑옷이었는데, 대장장이 구스 할아범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일생의 대작이라고 했다. 매번 만들어 내는 물품마다 똑같은 타이틀을 붙이는 할아범의 말버릇을 아일라가 채 알지 못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반짝거리는 눈을 갑옷에서 떼지 못하던 아일라가 기다란 테이블 구석에 조용히 의자를 빼고 앉을 때까지만 해도, 이든은 자신이 질 거라는 상상을 하지도 않았다. 말술인 발터 세르노티를 어르고 협박해 올해에는 참석을 못 하게 만들어 놨으므로 우승은 그녀가 따놨다고 생각했었는데.

    “어. 불곰이다. 딸꾹. 아니, 늑댄가?”

    “아휴…. 이 멍청이가. 빨리 일어나, 이든.”

    “근데 너 발터 닮았네. 후후. 이놈 참 자알 생겼다.”

    “…너 진짜, 입 안 다물지.”

    눈이 풀려 해롱대며 발터에게 업혀 나간 이든을 꺾고 아일라는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구스 할아범에게 받은 갑옷을 소중하게 들고 아일라가 향한 곳은 세드릭이 홀로 시간을 보내는 숲이었다.

    떠들썩한 축제를 즐길 성격도 못 되어 그 시간에도 혼자 검을 연습하던 세드릭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일라에게 불같이 화를 냈고, 결국 그녀가 눈물을 떨구며 성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세드릭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세르노티 성지 안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술이 센 아일라를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이나 마시는 사과주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세드릭의 폭풍 같은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아일라. 겨울에 술을 마시면 몸이 따뜻해진다는 착각이 들어서 계속 술을 마시게 되고, 그러면 결국 주량을 훨씬 넘어서게 된다. 그게 얼마나 건강에 좋지 않은 건지 알아?”

    이든은 슬며시 빵 바구니를 들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일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기나긴 설교를 감내하고 있었다.

    불쌍한 아일라.

    ‘나 먼저 간다.’

    이든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그러운 아일라가 눈짓하며 고개를 까딱거리자 세드릭이 혀를 차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일라…. 지금 너 추워서 떠는 거지?”

    “네…. 네?”

    “이럴 줄 알았다. 바람이 차가워서 얼굴이 새빨개졌잖아. 이리 와. 내 망토를 주마.”

    세드릭이 자신이 두르고 있던 기다란 망토를 휘릭, 풀어내자 아일라가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저, 전 괜찮은데….”

    “내 손이 닿는 게 싫어서 그런 거면 네가 직접….”

    “아뇨! 좋아욧!”

    세드릭의 잔소리에 아일라가 땅을 울릴 기세로 버럭 소리치듯 대답했다.

    “…뭐?”

    “아뇨! 좋… 좋은 게 아니라… 아니, 아니… 싫은 건 더더욱 아니고….”

    “흠. 끈이 좀 길겠는데. 리본은 이단으로 매 줄까, 삼단으로 매 줄까?”

    “네? 아 그게… 흣, 그, 그러니까….”

    세드릭의 기에 눌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일라를 뒤로하고 이든은 조용히 자리를 뜨기로 했다. 좀 심할 정도로 강박이 있는 세드릭이 그녀의 망토 리본을 풀리지 않게 단단히 매려면 아마 5분은 기다려야 할 게 뻔했다. 아일라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세드릭의 잔소리를 감당하고 기다리기엔 이든은 너무나 배가 고팠다.

    “아…. 춥다….”

    갓 구운 빵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들고 성을 향해 빠르게 걷던 이든의 뺨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가 사르르 녹았다. 빵 조각을 들고 맛있게 씹던 이든은 문득 그 자리에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팔랑.

    겨울을 알리는 신호였다. 회색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온 세상을 순백의 색으로 하얗게 뒤덮는 세르노티의 겨울은 이든이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뭐 해! 빨리 안 오냐, 바보야!”

    커다랗게 뚫린 막사의 창문을 통해 쩌렁쩌렁 소리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입가에 양손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발터를 보며 이든이 하얗게 웃었다.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어!”

    메아리쳐 되돌아온 그녀의 말을 들은 발터가 슬쩍 웃더니, 2층 막사 창문에서 몸을 휙 날려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든이 하하 웃었다.

    그녀를 향해 질주하는 발터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눈송이가 날리는 공간. 그녀를 향해 질주하는 발터의 웃는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나는 네가 좋다. 발터.

    “하아…. 하아….”

    그녀는 빵 바구니를 꽉 안아 들고 반대편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던 발터가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다리 아프다며!”

    “하하, 그걸 믿었어? 멍청이. 으아악!”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발터의 손길을 피해 달리는 이든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를 향해 달리려다 방향을 돌린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를 끌어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질 것 같았다.

    망토를 뒤집어쓴 아일라와 함께 나란히 걸어오며 여전히 무어라 잔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세드릭이 보든 말든, 저녁 식사를 위해 우르르 건물을 빠져나오고 있는 훈련생들이 그들을 보든 말든 발터를 끌어안고 얼굴에 키스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가 소리 없이 굵어졌다. 빠르게 달리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속도로 크게 뛰었다. 막사 바깥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컹컹 짖으며 달려 나와 날리는 눈을 잡으려 뛰어올랐다.

    세르노티의 이번 겨울은 특별히 더 아름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빵 더 줄까?”

    발터가 이야기를 잠시 멈춘 후, 빈 접시를 꽉 붙잡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혜미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돼요?”

    혜미가 눈을 반짝거렸다. 호밀 빵은 막 구워 낸 듯 따뜻했다. 부드러운 식빵, 혹은 쫄깃한 바게트를 떠올리고 있던 그녀의 기대와는 달랐지만 씹는 식감이 꽤나 좋았다. 중간중간 들어간 굵직한 밤은 달콤했고 버터는 향이 진하고 풍부했다.

    “계속 이야기했는데, 배 안 고파요?”

    “빵보다 다른 걸 먹고 싶긴 해.”

    “뭐요?”

    “너.”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면 어떻게 하란 말인지. 예고도 없이 원 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발터의 직접적인 표현에 혜미는 어쩔 줄을 몰라 그저 눈동자만 굴렸다.

    “농담이었어.”

    “…아, 하하하. 참 재밌다.”

    혜미가 로봇처럼 경직되어 웃는 사이 발터가 그녀의 접시에 자신의 빵을 나눠 주었다.

    “…고맙습니다.”

    혜미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자, 발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발터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혜미는 계속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말은 계속 그런 식으로 할 거야?”

    “네?”

    “내게 계속 말을 높일 거냐고.”

    “…무슨 문제라도?”

    혜미가 빵의 중앙을 익숙하게 가르며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문제 있어.”

    발터가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넌 황가의 직계야, 이든.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내게 쓰는 말투부터 고치는 게 좋아.”

    동갑인 발터에게 말을 놓을 타이밍을 재고 있던 그녀에게는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혜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알았도다.”

    “…장난치지 말고.”

    “알겠노라?”

    “그만해.”

    발터가 결국 쿡,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혜미 역시 그를 보며 어깨를 얕게 들썩이며 웃었다.

    “알았어. 그럼 진짜… 말 편하게 한다…?”

    “욕은 하지 마라.”

    발터가 키득거리는 그녀를 보며 벅찬 흥분을 애써 감추었다. 깨어난 이든을 보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해 허기가 지지도 않았다. 기억만 하지 못할 뿐, 그녀의 행동은 과거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근데 이런 말을 직접 하긴 좀 그런데….”

    “그냥 해.”

    “아무래도 나, 좀 허당이었지?”

    혜미가 빵에 버터를 듬뿍 야무지게 올린 후, 크게 베어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누군가 음식을 들여보내기 전까지는, 발터가 해 주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배가 고픈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깊은 새벽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허기진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혜미는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세기의 절단 신공을 벌인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궁금해 그녀를 살려 두었다던 폭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일라는 세드릭을 좋아하고 있는 게 백 프로 확실한 것 같은데. 어떻게 옆에서 보면서 그걸 눈치를 못 챘을 수가 있지…?”

    목이 메는 그녀의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 붉은 과실주를 주르륵 따라 내밀며 발터가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넌 내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도 15년간 눈치채지 못했어.”

    발터의 두 번째 펀치는 조금 더 강력했다. 그녀는 이제껏 누군가에게 대놓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직접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얼굴은 농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진지했다.

    장난으로 넘기는 것조차 미안해지는, 뜨거운 애정이 담긴 표정.

    “마셔. 몸이 따뜻해진다고 네가 좋아했던 술이야.”

    발터가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말을 덧붙였다. 혜미는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해 붉은 와인을 꿀꺽꿀꺽 물처럼 들이켰다. 처음 마셔보는 술인데 놀랍게도 맛이 너무나 익숙했다. 그녀가 와인 잔을 단번에 비운 후, 애써 화제를 돌렸다.

    “흠. 그래서 세드릭은 결국 아일라랑 잘된 거 맞지?”

    비록 실전 연애 경험은 없지만 이론은 꽉 잡고 있는 그녀였다. 딱 봐도 둘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까칠한 도련님 같은 예민한 성격의 세드릭과 그런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아일라. 기억을 잃기 전의 이든이 조금만 눈치가 빨랐어도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럴 기회가 없었어.”

    “왜?”

    발터의 애매한 대답에 혜미가 눈을 끔뻑였다. 지금까지 이야기로만 들었을 때는 아일라가 빵 굽는 화덕 앞에서 당장 고백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첫눈까지 날리는 로맨틱한 날이지 않았던가.

    “그날 밤. 아일라가 사라졌으니까.”

    “…사라지다니?”

    의문 어린 표정을 한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아일라가 사라진 건, 성주인 발트리가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소식을 들고 돌아온 밤이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소식. 혜미는 발터의 무거운 표정을 보고 그게 뭔지를 직감했다.

    “…내가 황가의 사람이라는 걸, 모두 다 그때 알게 된 거구나.”

    “그래.”

    “혹시 그게… 나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거야?”

    발터의 턱이 경직하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그가 쓴 약을 내뱉듯 짧게 답했다.

    “맞아.”

    듣고 싶지 않았지만 꼭 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혜미는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달콤한 와인의 끝에 쌉쌀함이 감돌았다.

    ***

    발트리가 세르노티성으로 돌아온 것은, 첫눈이 함박눈처럼 내리던 늦은 겨울밤이었다. 발트리는 한 달에 걸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자려고 누운 스무 명의 정예 훈련생 모두를 그의 탑으로 집합시켰다.

    “아까 아일라랑 화덕 앞에서 그 이야기 하느라고 늦었던 거야. 무슨 네 욕이라도 한 줄 알았냐?”

    “흠…. 빵 개수가 세 개나 모자랐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야. 넌 지금 아일라한테 우리 사이를 들킨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해?”

    “어차피 다들 알게 될 일이잖아. 뭐가 문제라는 거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거랑 그딴 식으로 들키는 거랑은 뭔가 기분 자체가 다르잖아!”

    반시계방향으로 이어지는 나선계단을 오르며 이든과 발터가 목소리를 낮추어 티격태격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아.”

    “너 그럴 때마다 진짜 무식해 보이는 거 알아?”

    “내려가서 키스하고 오자. 입 맞추고 싶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죽을래?”

    “왜. 8층에서 뛰어내릴 자신이 없어? 안고 뛰어줄까?”

    “자신이 없긴 누가 없대…!”

    발터에게 소리를 낮추며 눈을 부라리는 이든의 뒤에서 길게 줄을 늘어선 다른 훈련생들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불평했다.

    “그런데 성주님은 이렇게 늦은 밤, 꼭 소집을 하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잘 시간이 훨씬 넘었잖아.”

    “추워 죽겠는데 뭐든 빨리 좀 하고 끝났으면 좋겠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긴 것은 맨 앞에서 선두로 걷는 세드릭과 불안한 표정으로 줄의 끄트머리를 뒤따르는 아일라뿐이었다.

    “다들 모인 건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발트리는 눈이 쑥 들어가 피로해 보였다. 원래도 마른 얼굴이 조금 더 핼쑥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두 눈동자만은 형형했다.

    “지금 너희들 눈앞에 있는 것이 뭔지 아느냐?”

    어두운 천에 싸여 있었지만 길이로 보나, 그 크기나 형태로 봤을 때 딱 봐도 검이었다.

    “성주님…. 지금 설마 새로 산 칼 자랑 하려고 우릴 부른 건 아니겠지?”

    이든이 옆자리에 앉은 발터를 향해 고개를 기울여 소곤거렸다. 발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쓸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던 탓이었다.

    “풀어라, 세드릭.”

    예사롭지 않은 발트리의 태도에 긴장한 것은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성주의 옆에 서 있던 그가 망설인 것도 잠시였다. 그가 탁자에 놓인 검을 조심스레 집어 들고 깔끔한 손놀림으로 천을 풀어냈다. 부드러운 천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자 검집에 든 장검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뭐?”

    “아뇨! 좋… 좋은 게 아니라… 아니, 아니… 싫은 건 더더욱 아니고….”

    “흠. 끈이 좀 길겠는데. 리본은 이단으로 매 줄까, 삼단으로 매 줄까?”

    “네? 아 그게… 흣, 그, 그러니까….”

    세드릭의 기에 눌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일라를 뒤로하고 이든은 조용히 자리를 뜨기로 했다. 좀 심할 정도로 강박이 있는 세드릭이 그녀의 망토 리본을 풀리지 않게 단단히 매려면 아마 5분은 기다려야 할 게 뻔했다. 아일라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세드릭의 잔소리를 감당하고 기다리기엔 이든은 너무나 배가 고팠다.

    “아…. 춥다….”

    갓 구운 빵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들고 성을 향해 빠르게 걷던 이든의 뺨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가 사르르 녹았다. 빵 조각을 들고 맛있게 씹던 이든은 문득 그 자리에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팔랑.

    겨울을 알리는 신호였다. 회색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온 세상을 순백의 색으로 하얗게 뒤덮는 세르노티의 겨울은 이든이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뭐 해! 빨리 안 오냐, 바보야!”

    커다랗게 뚫린 막사의 창문을 통해 쩌렁쩌렁 소리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입가에 양손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발터를 보며 이든이 하얗게 웃었다.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어!”

    메아리쳐 되돌아온 그녀의 말을 들은 발터가 슬쩍 웃더니, 2층 막사 창문에서 몸을 휙 날려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든이 하하 웃었다.

    그녀를 향해 질주하는 발터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눈송이가 날리는 공간. 그녀를 향해 질주하는 발터의 웃는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나는 네가 좋다. 발터.

    “하아…. 하아….”

    그녀는 빵 바구니를 꽉 안아 들고 반대편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던 발터가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다리 아프다며!”

    “하하, 그걸 믿었어? 멍청이. 으아악!”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발터의 손길을 피해 달리는 이든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를 향해 달리려다 방향을 돌린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를 끌어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질 것 같았다.

    망토를 뒤집어쓴 아일라와 함께 나란히 걸어오며 여전히 무어라 잔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세드릭이 보든 말든, 저녁 식사를 위해 우르르 건물을 빠져나오고 있는 훈련생들이 그들을 보든 말든 발터를 끌어안고 얼굴에 키스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가 소리 없이 굵어졌다. 빠르게 달리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속도로 크게 뛰었다. 막사 바깥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컹컹 짖으며 달려 나와 날리는 눈을 잡으려 뛰어올랐다.

    세르노티의 이번 겨울은 특별히 더 아름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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