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72)

이든은 해가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땀에 젖어 초라한 기사 복식을 걸치고 있어도 그녀가 소리 내어 웃을 때면 주변에서 빛이 반짝거렸다.

제 키만 한 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르고,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동작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훈련생들과 같이 땀 흘리며 웃는 그녀를 볼 때마다, 발트리는 그녀가 만약 궁에서 자랐다면 이렇게 환하게 웃을 기회가 있었을까, 생각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죄의식을 희석시켰다.

급격하게 성장한 것은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정에 늘 솔직한 이든의 마음 또한 그와 같았다면, 그녀에게는 발터를 거부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만약 발터의 어미가 살아 있었다면 조금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쓸 수 있었을까. 성안에 안주인이 없는 상황이 이 정도로 아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발트리는 이 같은 상황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책임지지 못할 일이라면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성주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고요.”

탑의 꼭대기에 난 창문을 통해 환한 아침 햇살이 결의에 찬 발터의 옆얼굴을 시리게 비추었다.

“반대하셔도 소용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든은? 이든 역시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뜻이더냐?”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든과 저는 지난밤, 한 몸이 되었습니다.”

발트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폐하. 부디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그의 아들인 발터는 지금, 이든과의 관계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상기된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말을 잇는 발터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는 남자의 표정이었다. 온 세상에 자신의 여자를 확인시키고 싶어 하는 수컷의 본능을 그 역시 알고 있기에 발터를 비난할 수조차 없었다.

“이든의 성격을 모르십니까? 그게 과연, 저 혼자 독단적으로 밀어붙여서 가능한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발터의 말 그대로였다. 아무리 발터가 강하다 한들, 이든 역시 세르노티 성안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이 중 하나였다. 아들 녀석이 설사 눈이 돌아 달려들었다고 한들, 그녀가 만약 거부했다면 둘 중 하나는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갔을 것이 분명했다.

“이든은 지금 어디 있느냐.”

발터가 마른침을 삼킨 후, 꽉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잠이 들었습니다. 지금쯤 깨어나서 저를 찾을지도 모르죠.”

오늘은 달에 두 번, 모처럼 훈련이 없는 날이었다. 툭 튀어나온 발터의 목울대가 느리게 일렁였다.

“…그녀에게 빨리 돌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고집스러움을 나타내듯 툭 불거져 높다란 발터의 콧등에 주름이 졌다.

“지금은 이든과…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습니다.”

입술을 깨물며 낮게 내뱉는 그의 귓불이 서서히 붉어졌다. 목덜미에서부터 번지는 열기가 그의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씨를 받아 무뚝뚝하기가 짝이 없는 아들이었다. 흠모하듯 쳐다보는 마을 처녀들의 은근한 눈빛에는 한 톨의 관심도 두지 않던 녀석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들의 표정을 보며, 발트리는 주사위가 이미 던져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타는 별궁에서 이든을 구해 내고, 황명을 받아 그녀를 세르노티성에 처음 데려왔을 때에 발트리가 걱정했던 점은 따로 있었다. 황가의 피를 받은 그녀가 과연 세르노티성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그의 아들 발터가 혹여나 그녀와 갈등을 겪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든이 자라나며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문을 품기라도 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던 발트리의 염려를 극복하고 둘은 잘 자라났다.

“…발터.”

늘 앙숙처럼 싸웠지만 친형제보다도 가까이 지내는 그들을 보며 마음속 깊이 안심했었다. 이든과 발터의 실력이 이 정도까지 일취월장한 것도 그들이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음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발트리가 세드릭에게 명령해, 일부러라도 그들을 붙여 놓는 시간을 늘리라고 지시한 이유 역시도 그 때문이다.

“이든은 지금,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 거냐.”

마침내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시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발터.”

발터가 추궁하듯 묻는 제 아버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거운 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불안한 예감이 솟구쳤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가문의 명예에 비정상적이라 느껴질 만큼 집착하는 발트리였다. 수년 전, 그에게 입을 한 번 잘못 열었다는 이유로 무섭게 체벌을 당하던 이든을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찾아내어 벌을 주시려는 거라면 마음을 바꾸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든도, 저도,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이든에게 다시 한번 손대신다면 저는 참지 않겠습니다.”

수줍어하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짙어진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타올랐다. 발톱을 드러낸 맹수같이 구는 발터의 눈을 보며 발트리는 한편으로 안심했다. 아비에게 대적하겠다고 말하는 발터는 지금, 진심이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발트리가 낮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머리를 괬다. 올해가 지나면 황태자 크리스티앙은 18세가 되어 즉위식을 치르게 된다. 발트리의 계획은 그 전에 세르노티의 정예 기사들과 이든을 데리고 함께 궁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발트리가 정한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그가 젊은 기사들을 훈련생이라는 이름하에 혹독할 정도로 교육시켰던 이유도 바로 그때를 위해서였다. 빛의 그림자라 불리는 세르노티 가문의 존재 이유는 제국의 차기 황제를 어떠한 위험에서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세르노티의 다음 성주로서 마땅한 이를 찾으라면 선택지는 적지 않았다. 뛰어난 검술사이자 교육자인 세드릭은 물론이고, 그가 수년 동안 훈련시킨 이들 중 제비뽑기로 아무나만 뽑아도 보통 이상을 해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발터가 이든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주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사랑하는 이와 충성해야 할 이가 같다면 어떻게 될까. 세르노티 가문의 수장으로 가장 어울리는 자는, 바로 그의 아들이 된다는 뜻이었다. 발터는 그의 인생을 걸고 이든을 지킬 테니까. 그의 사랑은 주군을 향한 충성심을 뒷받침하는 강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발트리는 허락을 받지 않으면 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기세로 버티고 서 있는 그의 아들을 잠시 응시했다. 영지의 다른 기사들도 그러하듯, 발터는 걷기 시작할 때 이미 목검을 들었고 유년기를 지나자마자 날이 선 검을 가지고 놀았다.

언제 이렇게 성장했을까 싶을 정도로 건장하게 자란 발터의 얼굴에 그가 모르던 표정이 가득했다. 기대와 긴장. 두근거림과 흥분. 거친 욕망을 간신히 절제하고 있음을 보여 주듯 뜨겁게 빛나는 두 눈동자.

“저는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계속.”

그의 아들 역시 딱딱한 표정 아래 뜨거운 심장을 감춘 한 사내였음을 발트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심장이 미미하게 욱신거린다.

“…이든을 사랑하느냐? 세르노티의 이름을 버리게 된다고 해도, 이든을 선택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냐?”

“세르노티의 성주가 되는 것이든, 황제 폐하의 그림자가 되는 일이든 이든이 곁에 없으면 제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실망하셨다고 해도 그게 제 진심입니다.”

그의 대답으로 인해 발트리의 망설임은 완전히 끝이 났다. 그는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미뤄 왔던 일을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울 것이다.”

“이든과는 해가 가기 전에 결혼식을 치르고 싶습니다.”

발터의 의지는 굳건했다. 떠나기 전에 확답을 주고 가라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세르노티 영지인의 결혼은 모두 성주인 발트리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내 아들아.”

성주인 발트리가 발터를 아들로 칭하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나 가끔 있던 일이었다. 발터가 마른침을 삼킨 후, 조용히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 우리… 세르노티 가문 전체가 관련된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이든도.”

이든의 이름을 마지막에 덧붙이며 발트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하나뿐인 그의 아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자 가슴 깊숙한 곳이 저릿하게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섬겨야 할 이를 사랑하고 만 발터는 아마도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세르노티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터는 이제 영원히 황제의 그림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왕이 살아 있는 한, 발터가 죽을 때까지.

“그게 뭡니까.”

“다녀와서 모두 이야기를 해 주겠다. 너와 이든의 일은 그때까지 모두에게 함구하도록.”

“아버지.”

“성주로서의 명령이다, 발터.”

발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발트리의 표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엄숙한 결의에 차 있었다. 아버지의 낯선 얼굴을 본 발터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지만 곧 떨쳐 내고 탑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오늘은 날 때부터 함께 자란 이든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외사랑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난밤 이든은 그녀 역시도 그를 원한다고 말했다. 환한 달빛 아래에서 몇 번이나 몸을 섞으며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두 눈동자에 서로를 담고, 뜨거운 호흡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가졌다.

지금도 꿈같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녀만 곁에 있다면 하늘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빈털터리로 성에서 내쫓긴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든이 그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터는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

***

날이 싸늘해지면 아무도 찾지 않는 헛간이었다. 훈련생들이 벌을 받을 때면 갇히는 창고 같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발길이 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삐걱.

문에 빗장을 걸어 잠그자마자 발터가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바, 발터…. 흣…. 천천히….”

발트리가 거주하는 탑의 뒤편. 오래되어 녹이 슬고 부러진 무기들을 쌓아둔 헛간에서 희미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흐응….”

“아까 훈련하는 내내 이러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발터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주무르며 잠긴 목소리로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하필 오늘 오후의 훈련 내용이 레슬링이었던 게 문제였다.

발트리는 검을 쓰는 훈련뿐만이 아니라 맨몸으로 싸우는 격투도 중요하게 여겼다. 암살자들은 대련만큼이나 급습이 중요했고, 최소한의 무기만 들고 이동해야 할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무기를 압수당한 채 감금되는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자, 모두들 잘 보도록. 뒤에서 목에 초크를 걸 때는 이렇게 적의 하체를 꽉 눌러 몸을 뒤집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켁… 사, 사람을 진짜 죽일 셈이야!”

세드릭이 이든의 몸을 뒤에서 결박하는 시범을 보이는 것을 보며, 발터는 끓어오르는 열을 주체할 수가 없어 혼이 났다. 하필이면 왜 이든이 제비뽑기에 걸렸는지, 운도 지지리 없었다.

“이렇게 입을 나불거린다는 건, 아직 힘이 남아돈다는 증거지. 그럴 때는 적의 양다리를 꼬듯이 걸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체를 뒤로 딱, 움직일 틈이 없이 붙인 다음 팔을 이용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목을 조이는 것이 포인트로….”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훈련이었지만, 이미 소년에서 남자가 된 발터의 눈에는 자꾸만 성행위가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런 자세에서 발기하지 않고 참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게다가 상대가 이든인데? 놀랍도록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뒤에서 박아 흔들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견뎌 낼 수가 있지? 세드릭은 재수가 없을 뿐, 페니스가 없지는 않을 텐데?

답을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이 발터의 머릿속을 비집었다.

“나 죽어! 사람 살려요!”

한 겹 두꺼운 장막이 쓰인 발터의 눈에 이미 이든은 존재만으로 수컷을 흥분시키는 여왕벌로 보였다. 머릿속에서 뜨끈뜨끈 김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세드릭!”

참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난 후였다.

“발터. 뭐 문제 있어?”

이든과 엉겨 붙어 신나게 설명을 이어 나가던 세드릭이 휙, 고개를 돌려 눈썹을 치켜올렸다.

“흠. 격투 시범은 내가 대신할까? 요즘 줄곧 일해서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헛기침을 하며 둘러댔지만 허사였다. 세드릭이 애타는 남의 속도 모르고 엄한 표정으로 검지를 치켜세웠다.

“발터, 성주님이 자리를 비운 기회를 잡아 이든을 흠뻑 쥐어패고 싶은 네 맘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네 잔혹한 사심을 이런 데다 풀면 곤란해.”

발터는 좌우로 얄밉게 움직이는 세드릭의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연하지. 절대 안 돼! 저 녀석 이두박근 다들 보이지? 저 팔뚝에 목 졸리면 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차라리 나무 작대기 같은 세드릭이 나아!”

게다가 이든까지도 난리를 치며 세드릭과 쌍으로 눈치 없이 구는 탓에, 발터는 어쩔 수 없이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하아. 넌 제발 눈치 좀 있어라.”

발터가 귓불을 쭉 빨아들이자 이든이 작게 신음을 토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젯밤에도 자는데 멋대로 집어넣어 놓고서, 그게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흐읏….”

지난밤, 막사에서 자다가 갑자기 발터가 그녀의 침대로 넘어오는 바람에 이든은 하마터면 깜짝 놀라서 소리를 꽥 지를 뻔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쉿.”

뒤에서 끌어안으며 이든의 바지를 아래로 내리는 발터는 막무가내였다. 세드릭은 성주인 발트리가 없으면 훈련의 강도를 배로 높이는 경향이 있었다. 힘든 훈련에 녹초가 된 동기들이 아무리 코를 골며 곯아떨어져 있다고 해도, 장소는 함께 훈련하는 이들의 침대가 다닥다닥 붙은 막사 안이었다.

“그냥 안에 넣고만 있자.”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정신 나간 자식이 진짜…!”

“좆이 시려서 그래. 네가 따뜻하게 데워 줘.”

발터가 능청스럽게도 그녀의 귀에 미친 소리를 속삭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그를 저지하려 엎치락뒤치락했다가는 다른 이들의 잠이 깰까 두려웠다.

“……!”

발터의 움직임은 자연스럽고 빨랐다. 그녀의 옷깃을 소리 없이 헤치는 동시에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를 회음부에 문질렀다.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손가락으로 유두를 꼬집듯 애무하자, 긴장에 좀처럼 열리지 않던 그녀의 질구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발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몸에 자신을 쑤욱 들이밀었다. 입구를 벌리고 밀려든 성기가 내벽에 꽉 들어차자 이든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몸 안이 뜨겁다, 이든.”

“…흣….”

소리를 참지 못해 이를 꽉 깨물려 했지만 발터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 안을 헤집었다. 교성을 지르지 않으려면 그의 손가락을 쭉 빠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발터의 손이 유두를 만지고, 아래로 내려와 음핵을 간질였다. 첫 경험부터 그녀의 몸을 샅샅이 탐구한 발터는 이든의 성감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피가 통통하게 몰려 부푼 음핵을 느리게 짓누르며 마찰하자 안에서 애액이 꿀렁거리며 솟았다. 그의 성기를 꽉 죄고 있는 질벽이 경련하듯 수축하며 저절로 반응했다.

“하아….”

결국엔 쾌감을 견디지 못한 이든이 허리를 움찔거린 것이 시작이었다. 발터는 기다렸다는 듯 느리게 그녀의 안을 왕복했다. 드르렁거리며 훈련생들이 코를 골고 있는 막사 안. 맨 끄트머리에서 찔걱거리는 소음이 희미하게 번져 나갔다.

“발터, 소리… 흐읏…. 내지, 마….”

“하아…. 네가 젖어서, 저절로 나는 거야.”

쉽게 사정하지 않는 발터 덕분에 이든은 아찔한 절정을 몇 번이나 느끼며 소리가 새지 않게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발터가 허리를 박아 올 때마다 작은 소리로 삐걱, 삐걱, 울리는 침대 다리를 부여잡아야 했던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느낌이 너무 좋아.”

발터가 마치 지난밤처럼 뜨거운 호흡을 뱉으며 잘근잘근 이든의 연한 귓바퀴를 씹었다. 이든이 짜릿한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그녀는 귀를 핥는 자극에 특히나 약했다.

“그런데 성주님, 대체 어디… 흣, 가신 거야? 벌써 열흘째인데….”

“몰라. 상관없어.”

그녀의 뒤에서 몸을 겹치고 애무하던 발터가 설핏 인상을 쓰며 내뱉었다. 아버지가 이든과의 관계를 반가워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대놓고 못마땅함을 내비쳤던 발트리에게 은근히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지식한 아버지 때문에 이든과의 관계를 그만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영지를 떠나게 되는 일이 있어도 이든과 함께라면 상관없었다. 빌어먹을 세르노티의 이름 따위, 버려도 상관없어.

“이제 하자, 이든.”

발터가 이든의 바지를 내리고 여릿한 음모 사이를 성급하게 더듬었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음모와 그 안에 감춰진 부드러운 여린 핵을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응. 빨리….”

오래된 선반을 잡고 선 이든이 다른 한 손으로 발터의 목을 감싸며 숨을 헐떡였다. 클리토리스에는 이미 피가 몰려 통통했고, 지난 열흘 동안 발터와의 섹스에 이미 익숙해진 질에서는 미끈한 애액이 줄줄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완전히 젖은 그녀의 몸을 확인한 발터가 제 바지춤을 확 내리며 낮게 내뱉었다.

“넣는다.”

“응…. 아흣…!”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쑤욱, 들어오는 발터의 몸을 느끼며 이든이 소리를 낮추어 신음했다. 그녀를 꽉 끌어안고 발터가 몸을 조금 떨었다.

“젠장, 안에 느낌이 너무 좋아….”

“발터.”

“하아…. 왜….”

발터가 춥, 하고 그녀의 어깨에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든의 몸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몸속에서 뜨거운 것이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하며 절로 떨려 온다.

“너 나 이렇게 좋아해서 그동안 어떻게, 흣, 참았냐?”

그 역시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번 터진 감정은 터진 강둑에서 흘러나온 물처럼 추슬러 담을 수가 없었다.

이든과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훈련시간도 아까웠고 식사시간도 아쉬웠다. 그 상대가 누구든, 이든이 다른 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데리고 어디로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아… 글쎄.”

발터가 뒤에서 허리를 강하게 움직여 박아 오는 통에 이든은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야…! 흣…! 갑자기 그러면… 흐응…!”

“내가… 좋아서, 참은 줄, 아는 모양인데….”

발터가 보란 듯이 허리를 격하게 움직였다. 고환이 덜렁이며 그녀의 회음부에 세게 부딪혔다. 애액으로 뜨끈하게 젖은 질이 발터의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삼킬 때마다, 남녀의 육체가 낼 수 있는 가장 야한 소음이 공간에 번졌다.

“난 늘 이러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흣, 너무 세게 하면… 아응! 소리, 앗, 참기, 흣! 힘들어…! 하응!”

“내가 그동안 참은 만큼 너도 한 번 참아 봐.”

발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음핵을 강하게 마찰하자 이든이 달아오른 얼굴을 가로저으며 쾌감에 몸부림쳤다.

“흣, 발터, 하앗! 누가 듣기라도 하면… 아… 으으응!”

발터 역시 다른 훈련생 동기들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은 악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들킨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어차피 성주가 돌아온 직후, 그녀와 그는 공식적으로 맺어질 테니까.

“거기 느낌, 아흣…! 너무, 좋아… 흐응! 하! 흡!”

쾌감을 이기지 못한 이든이 지난밤처럼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묘한 가학심이 든 발터가 그녀의 팔을 뒤로 잡아당겨 저지했다. 몰아치듯 박아 대자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리며 뒤로 꺾인다.

“소리 내, 이든.”

퍽! 퍽! 젖은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희미한 교성이 점점 크게 좁은 공간을 잠식했다.

너와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마. 우리가 이어졌다는 걸, 모든 이들이 다 알게 하고 싶어.

“더 크게… 소리 내 줘.”

그녀가 느끼는 내벽을 집중해서 거칠게 박아 대자 꽉 다문 이든의 입술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윽…. 으으응…!”

탄력적인 엉덩이가 마찰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바짝 올라붙어 벌게진 곳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싶었다. 발터는 제 손이 두 개뿐인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 이든…. 흣!”

발터에게 뒤로 박히며 흔들리던 이든이 발터의 손목을 역으로 잡아끌었다.

“가슴 만져 줘.”

그의 몸이 그녀에게로 겹쳐졌다. 발터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바짝 솟은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꼬집듯 문지르며 흥분에 꽉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만지면, 젖꼭지 빨고 싶어지는데.”

“싫어. 하아, 자세 바꾸지 마. 빼지 말고 계속, 하응! 계속 움직여 줘…. 으응!”

“그럼… 흣… 이대로, 쌀 때까지 박는다.”

발터가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묻으며 습한 숨을 헐떡였다. 그가 슬쩍, 느리게 빠져나가자 불안한 예감에 이든이 쾌락에 젖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곧이어 퍽, 하고 내벽을 짓쑤시는 동작에 배로 힘이 붙었다. 발터가 그녀의 목덜미를 쭉 빨아들이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한 번 섹스 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몸에 엉망진창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은 발터의 악취미였다.

“아흥, 무… 물지 마…. 너, 물면…. 흣!”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서, 발터가 이든의 목에 송곳니를 세게 박았다. 사슴을 공격하는 늑대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강하게 허리를 처박았다. 훅훅거리는 발터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어깨에 뿜어졌다. 애액을 뒤집어쓴 페니스가 이든의 내벽을 빠른 속도로 거칠게 박아 댔다.

“아아! 아응! 흐응! 하응! 흣! 읏! 하아아앙!!!”

이든은 참아 내지 못했다. 살갗이 물리는 아찔한 고통과 절정을 동시에 느끼며 이든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너… 죽었어…. 진짜….”

몸 안에 퍼지는 절정의 여운을 느끼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든이 아직도 헉헉거리고 있는 그를 휙 밀쳤다.

“이든… 아아!”

그녀의 몸에서 튕기듯 빠져나온 발터의 페니스에서 흰 사정액이 공중에 흩뿌려지며 지푸라기에 후두둑 떨어졌다.

“하아…. 네 안에 싸고 싶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인상을 쓰는 발터를 보며 이든이 눈을 흘겼다.

“누워. 이번엔 나도 하면서 너 물어뜯을 거니까. 어디 한 번 물어 뜯기면서 안에 실컷 싸 봐.”

“너랑 할 때마다 정신이 나가는 걸 어떻게 하라고.”

“변명 그만하고 빨리. 나, 또 하고 싶단 말이야. 이번엔 좀 천천히….”

발터는 이든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바닥에 잽싸게 드러누웠다. 그녀가 그의 몸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발터의 성기를 잡고 천천히 주저앉으며 이든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음했다. 커다란 물건을 스스로 집어삼키며 쾌감에 허벅지를 가늘게 떠는 이든을 보며, 발터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터.”

“하…. 왜….”

“나, 이러다 아이라도 가지면 어쩌지…. 으응?”

발터가 대답 대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흡사 제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말없이 그녀의 골반을 꽉 잡은 채 그녀를 느리게 흔들자 이든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상체를 붙이며 다시 물었다. 찌걱, 찌걱. 접붙은 비부에서 애액과 선액이 뒤엉켜 흘러나왔다.

“아이 가지면 어떡하냐고…. 하응….”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발터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내뱉었다. 이든을 향한 뜨거운 눈에 소유욕과 열망이 뚝뚝 떨어진다.

“아이 키우면서 나랑 평생 사는 거지. 첫 아이는 널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그 아이의 머리를 매일 빗기고 예쁘게 땋아 주겠지.”

이든이 그를 보며 흰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커다란 몸집의 발터가 자그마한 아이의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다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그럼 힘든 일 네가 다 하는 거다. 알았지?”

“알았어.”

발터가 자신의 성기를 오물오물 삼키는 이든의 질구를 만지작거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녀와 평생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영지의 모든 노동을 책임져도 상관없었다.

“약속한 거야. 응?”

“그래. 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뭘?”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하자.”

제 물건을 깊숙하게 박은 채, 발터가 그녀의 엉덩이를 꽉 주무르며 속삭였다.

“내 신부가 돼라, 이든. 평생 널 지킬게.”

내벽이 자극되자 이든이 달콤한 신음과 함께 투정을 내뱉었다.

“흐응, 이딴 식의 프러포즈는 들어 본 적도 없거든? 넌 기사 되기는 글렀다, 발터.”

“별로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하긴. 키득거리는 이든의 입술이 미소 짓는 발터에게 진하게 먹혔다. 헛간 바깥에서 차가운 바람이 휘잉 소리가 나게 불며 나무로 된 문이 덜컹거렸다. 어느덧 초겨울이었지만, 시작되는 연인들이 숨어든 낡은 헛간 안의 공기는 뜨겁게 달아올라 식을 줄을 몰랐다.

***

“아흐…. 좋다.”

이든이 계피를 넣어 끓인 와인을 홀짝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빵 굽기 당번을 맡으면 화덕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꽤나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 대신 갓 구워진 따끈따끈한 빵을 누구보다 빨리 선점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뭐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든은 단순히 생각했다.

“좀 마실래?”

“…아뇨.”

아일라가 불을 확인하며 그녀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안 추워?”

“네. 불 앞이라.”

역시나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든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일라의 뺨에 와인이 든 잔을 쓱 가져다 댔다.

“…….”

초록색과 푸른색이 절묘하게 섞인 커다란 눈동자가 슬쩍 커지며 이든을 보았다. 와. 얘는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게 생겼단 말이야. 이든이 속으로 감탄하며 미소 지었다.

“마셔. 독 안 들었으니까. 컵 색깔 똑같은 거 안 보여?”

“…은으로 만든 컵도 아니잖아요.”

“방금 내가 마시다 줬잖아.”

아일라가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웃음을 감추는 이든에게서 잔을 받아 들었다. 후후 불어서 마시는 모습이 마치 인형 같았다. 차가운 바람에 살짝 상기된 핑크빛 뺨도 사랑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언뜻 봐서는 마치 성안에 사는 공주님이 허름한 옷을 입은 채 변장이라도 하고 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작은 얼굴에 어떻게 다 들어가 있나 싶을 정도로 또렷한 이목구비, 건드리면 깨질 것같이 여린 체구로 연약해 보이는 아일라가 실은 엄청난 실력자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이든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세드릭이 널 보면 아마 이런 기분인가 보다. 아주 보고만 있어도 예뻐 죽겠지?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거야. 걔가 입 짧은 건 아마 너 때문이 아닐까?”

“…쿨럭! 쿨럭!”

이든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데, 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던 아일라가 갑자기 사례라도 들린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어라? 괜찮아, 아일라?”

탁, 하고 그녀의 손을 쳐 내는 아일라의 손길이 매서웠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아야, 아파라.”

이든이 호들갑을 떨며 엄살을 피우자 아일라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미안해요.”

“아냐. 함부로 만져서 내가 미안. 많이 놀랐어?”

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싱긋 웃었다. 사실 사냥을 나갔던 세드릭이 흙투성이였던 아일라를 처음 숲에서 발견해 데려왔을 때에 비하면 이 정도도 엄청난 변화였다.

“근방의 노예들이 산을 넘어 탈주하면서 버리고 간 듯해. 아마도… 말을 못 하는 것 같다.”

세르노티성의 사람들이 어린 소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온몸에 가득한 매질 흔적을 보고 아름다운 소녀의 과거가 녹록지 않았음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건드리지도 못하겠어요. 조그맣게 보이지만 악다구니가 보통이 아니에요.”

헝겊 인형처럼 조용한 아일라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변할 때는 누군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댈 때였다.

“이곳에서 널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상처를 치료하려는 것뿐이야. 단지 그것뿐이다.”

그녀가 그나마 잠잠하게 굴 때는 자신을 처음 발견해 성에 데려온 세드릭을 대할 때뿐이었다. 어릴 적, 자신의 바로 아래 여동생을 열병으로 잃었다던 세드릭은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 듯했다. 성주인 발트리를 설득해 그녀를 세르노티 성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위험해, 피해!”

성안에서 빨래와 요리 등 잡일을 담당하던 아일라의 자질을 세드릭이 처음 알아본 것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온 화살을 손으로 휙 낚아채 잡았을 때였다.

“너…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세드릭이 그렇게 당황한 적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어지간해선 피부색의 변화도 없는 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사색이 되었을 정도였으니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널 다치게 하려고 그러는 게 절대 아니었어. 너, 괜찮은 거지? 괜찮으면 고개만 끄덕여 봐. 응?”

“알아요.”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지?”

숨을 몰아쉬며 뛰어온 세드릭의 회색 동공이 커다래졌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것은 그와 옥신각신하다 달려온 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드릭이 숲에 버려진 소녀를 데리고 세르노티성에 온 지 반년이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녀가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 세드릭이 나를 다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안다고요.”

그녀가 처음 입을 연 상대는 역시나 세드릭이었다. 세드릭은 무릎을 짚은 채, 잠시 바닥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이름은… 아일라예요.”

“…….”

“내 이름. 아일라,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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