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72)
  • “조금만, 흣, 더….”

    애원하듯 속삭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림과 동시에 이든은 벗은 몸이 갑자기 민망해지고 부끄러웠다. 발터의 손에 붙들렸던 가슴과 엉덩이가 홧홧했다. 그녀가 민망함을 없애려 일부러 어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갑자기 네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서 엄청 놀랐잖아…! 하하…!”

    “미안하다.”

    고요한 수면을 노려보던 발터가 쓴 약을 뱉어 내듯 낮게 중얼거리자 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미안한데?”

    “…그냥 다.”

    발터가 손으로 제 이마를 꽉 짚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직도 흥분의 잔여가 남아 있는 커다란 흉부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사과를 하라고 했을 때는 입 다물고 모른 척한 주제에 정작 원하지도 않는 때에 사과하는 발터를 보자 이든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야 이 새끼야, 대체 뭐가 미안하냐고!”

    이든은 결국 발터에게 손을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고도 반격조차 없는 그를 보니 더욱 화가 났다.

    “입이 붙었어? 왜 아무 말도 안 해! 어?”

    “…더 때리고 싶으면 더 때려.”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발터가 다시 제 입술을 세게 깨물며 괴로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흠씬 두들겨 패도 상관없어.”

    기운이 쭉 빠졌다. 상대에게 덤벼든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는데, 이건 마치 발터만 그녀에게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모양새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지금의 상황을 몹시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됐어. 꼴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버려.”

    그녀가 발터를 노려보며 손으로 수면을 팟, 하고 거칠게 튕겼다. 그러자 발터가 주저하지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간다.”

    얼씨구. 마치 훈련할 때와 같은 속도로 전투적으로 수영하는 발터의 모습을 보니 이든은 더욱 기가 찼다. 누가 저를 잡아 죽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참 나…. 뭐야, 진짜…!”

    이든은 첨벙, 소리를 내며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아까만 해도 기분 좋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원했던 호숫물이 순식간에 미지근하게 변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미안하다고? 대체 뭐가? 미안할 짓을 왜 해, 그럼! 변태 새끼가!”

    불그스름한 둥근 달에 시커먼 녀석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이든의 입에서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망할! 뭐 예쁜 게 있다고!”

    이든이 물 젖은 손으로 제 얼굴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물가의 버드나무에서 떨어진 나무이파리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더니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안착했다.

    기다란 갈색 이파리를 보니, 그녀의 혀를 진하게 물고 빤 후 떨어지던 발터의 기다란 입술이 생각났다. 이제 봤더니 녀석은 입술이 잘생겼다. 윗입술은 하트 모양이고 입꼬리는 살짝 길었다. 입술만 잘생긴 게 아니라 잘 빠진 눈도 보기 좋고 고집스레 우뚝 선 콧대도 근사하다. 돌로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몸집은 솔직히 말하면 감탄이 일 정도로 매력적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대체.”

    이든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손으로 들고 있던 나뭇잎을 휙 던졌다. 젖은 손에 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는 탓에 물속에서 손을 탈탈 털었다.

    “아아. 진짜….”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란 발터에게 갑자기 특별한 느낌이 든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었다.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세드릭이 혹여나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그 성격에 얼마나 그녀를 비웃을까.

    “헉. 절대 안 돼. 미쳤어. 정신 차리자, 이든.”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든은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래. 그들이 방금 전에 한 짓은 입맞춤이라 할 수도 없는 행위였다. 발터 역시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 사이에 입술을 부비든 가랑이를 부비든 상관없지 않느냐고.

    닥치듯 손에 잡히는 대로 싸우던 그들이 이번에는 입술과 혀로 싸운 것뿐이다. 그럴 거면 녀석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휘젓고 다닐 때 확 깨물어 주는 건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

    방금 전의 상황을 되짚으며 패인을 분석하려 했지만 그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키스할 때를 떠올리자 이든의 콧잔등이 슬며시 붉어졌다. 혀가 뒤섞이며 서로의 돌기를 샅샅이 매만지던 느낌, 발터가 타액을 핥으며 허스키하게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가 뇌리에 꽉 박힌 듯 사라지지가 않았다.

    발터와의 신체적 접촉은 늘 있는 일이었다. 관절을 아프게 꺾거나 목을 조르며 공격하는 것은 매일같이 반복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유방과 엉덩이를 쥐어짜듯 움켜쥐고, 갈빗대를 뜨겁게 마찰하듯 어루만지던 손의 느낌은 분명 평소와는 달랐다. 생각하는 순간 그의 손가락 마디 사이에서 짓뭉개지던 젖꼭지가 꼿꼿하게 서고 아랫배가 짜릿짜릿하며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발터가 그렇게 뜨겁게 손을 놀릴 줄 아는 녀석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미치겠네, 그만 생각해!”

    이든은 물에 젖은 손으로 다시 철썩, 제 뺨을 때린 후 깊이 잠영을 했다. 그리고 발터의 흔적도 없는 호숫가로 걸어 나왔다. 더 이상 생각을 해 봤자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막사로 돌아가 잠이나 자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벗어 둔 옷을 걸어둔 곳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던 이든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개자식.”

    분명 나뭇가지에 걸어 둔 그녀의 옷이 흔적도 없이 몽땅 사라져 있었다. 이든은 방금 전까지 붉은 달을 보며 떠올렸던 그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취소했다. 발터 세르노티는 구제 불능의 무식한 멍청이일 뿐이었다.

    “죽여 버린다, 발터 세르노티!!!”

    산이 떠나가라 크게 소리를 지르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산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밤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팔랑.

    팔랑.

    발터의 입술을 닮은 기다란 낙엽이 사방에 흩날렸다.

    ***

    이든이 벌거벗은 몸에 나뭇잎을 잔뜩 붙이고 성으로 돌아왔던 밤 이후에도, 그녀와 발터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식탁 위에서는 서로 더 먹겠다고 피 튀기는 싸움을 했으며, 하루에 먹고 자는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서로 녹초가 될 때까지 훈련을 하며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함께 강가에서 멱을 감지도, 벌거벗고 온몸에 기름칠을 한 채 육탄 공격을 하듯 싸우지도 않았다. 그들이 내외 아닌 내외를 하는 이유는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다만 이든은 보름달이 찾아오는 밤이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분 나쁜 기억에, 제 머리를 퍽퍽 때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이든?”

    커다란 빵을 손가락 두 마디 크기로 정확하게 자르고 있던 세드릭이 이든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이든이 양손으로 제 머리통을 꽉 붙잡은 채 퉁명스레 대꾸했다. 훈련생들이 다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대응접실. 벽에 뚫린 창문에 둥그런 달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꽉 찬 보름달이 오늘따라 몹시도 교활하게 보이는 까닭은 바로 그 달빛 아래에서 태연하게 수프를 들이켜고 있는 녀석, 발터 세르노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뜨겁지도 않은지, 그릇째 원샷을 때리고 있다. 야만적인 놈. 나쁜 놈.

    “밥 먹다 말고 왜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죽어라 내려치는 거냐고 묻고 있어. 혹시 이상한 버섯 같은 걸 먹은 건 아니겠지.”

    세드릭이 그녀를 보며 잿빛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이든이 그를 보며 눈동자를 위로 홉떴다.

    “아니거든. 그냥 재수 없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그래.”

    “흐음. 난 또. 드디어 진짜로 머리가 돌아 버렸나 했네.”

    혼잣말하듯 중얼대는 세드릭의 얼굴도 재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한층 더 기분 나쁜 목소리가 저편에서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내가 도와줄까?”

    주인공은 물론 발터 세르노티였다. 얄미운 녀석이 그녀를 향해 태연하게 주먹을 치켜들었다.

    “한 이틀 기절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후려쳐 줄 수 있는데.”

    식탁 끝에 앉아 있던 막내 아일라가 커다란 푸른 눈을 소리 없이 깜빡였다. 아일라의 머리통만 한 발터의 주먹으로 한 방만 맞으면 정말 눈앞에 별이 핑핑 돌 게 분명했다.

    “됐거든?”

    이든이 전투적으로 빵을 씹으며 대각선에 앉은 발터를 노려보았다.

    “넌 요즘 오지랖이 넓어졌는지 쓸데없는 데서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더라?”

    “…그럼 네가 눈앞에서 사람 거슬리게 하지를 마.”

    발터가 그녀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가느스름해진 눈동자에 담긴 못마땅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뭐가 또 맘에 안 드는지 삐딱하게 비틀린 그의 입술을 보자 이든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하아….”

    그놈의 기다란 입술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든의 머릿속에서 삭제하고만 싶은 그날 밤의 사건이 또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오, 진짜!”

    퍽, 하고 다시 제 머리통을 아프게 때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귓불이 뜨끈거리며 목덜미에서 뺨까지 열이 오르고 있었다.

    “내가 때려 준다니까?”

    발터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놀렸다. 그를 계속 의식한다면 마치 사랑에라도 빠진 소녀처럼 얼굴 전체가 홍당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세드릭!”

    이든은 한숨을 탁, 터뜨리며 구원을 청하듯 옆을 보았다. 평소에 잔소리라면 발트리 만만치 않은 세드릭은 오늘따라 도움도 안 되는 중이었다. 그는 여전히 접시 위 자신의 빵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6등분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왜.”

    “네 조카인지 멍청인지 좀 닥치게 해 줄 수 없어?”

    “식사시간에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둘 다 조용히 해라. 너희 둘이 싸우는 걸 보면 너무 유치해서 짜증이 다 나니까.”

    이든은 역시나 정 떨어지게 행동하는 세드릭의 팔을 붙잡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저 자식이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세드릭이 이든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내 옷에 손 닦는 거냐?”

    “야,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 으악!”

    깔끔을 떨기로는 세르노티 안에서 세드릭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정색하며 고개를 슬쩍 뒤로 물리는 세드릭이 얄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든은 한번 당해 보라는 심정으로 그의 가슴팍에 마구 손을 문댔다.

    “그놈의 결벽증은 내가 없애 줄게.”

    “그만. 그만…!”

    기겁을 하며 몸을 뒤트는 세드릭을 보니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다. 자신이 날카롭고 이성적이다 자부하는 세드릭은 이상한 데서 예민한 부분이 있었다. 이든이 그를 놀리는 재미에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아!”

    어딘가에서 씹던 빵이 휙 날아와 그녀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떨어졌다.

    “뭐야?”

    이든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과녁을 정확히 조준한 발터가 시비를 걸었다. 짙은 눈썹이 험상궂게 휘어 더욱 사납게 보였다.

    “숨어서 조잘거리지 말고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지?”

    이든이 입을 딱 벌리며 세드릭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와. 방금 다들 봤지? 세드릭. 저 자식 지금 음식 던졌어. 빨리 헛간에 처넣어. 응?”

    세드릭에게는 다른 문제가 훨씬 심각했다. 그가 오만상을 확 찌푸리며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든을 노려보았다.

    “야! 너 내 옷에 잼 묻은 거 어쩔 거야. 너부터 헛간에 처넣어 줘야 정신을 차릴 거지?”

    “잼 안 묻었거든? 그리고 이 정도는 보이지도 않아!”

    “이게 안 보인다고? 눈이 처멀었군.”

    “벗어라 벗어! 당장 빨아 주면 될 거 아냐?”

    “지금 어디다 손을 대는 거야!”

    이든이 세드릭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세드릭이 그녀의 머리통을 손으로 밀어내며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쿵! 하는 육중한 소음과 함께 나무 식탁에 놓인 수많은 식기가 동시에 파들거렸다.

    “식탁 날려 버리기 전에 세드릭에게서 떨어져라.”

    주먹을 꽉 쥔 발터가 이든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내뱉었다. 막내 아일라가 조용히 스푼을 내려놓은 후, 식탁 끄트머리를 슬그머니 붙잡았다. 이든이 세드릭과 소곤댈 때마다 발터의 팔뚝에서 푸른 핏줄이 툭툭 일어서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식탁이 공중에 날아가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아니, 저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자그마한 스툴이 반동에 뒤로 굴렀다. 세드릭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를 저지했다.

    “이든!”

    씩씩 숨을 내뱉는 그녀의 옆에서 세드릭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발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너희 몇 살이야? 이제 둘 다 철부지처럼 장난이나 칠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하는 거냐?”

    세드릭이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다시 헛간에 처박아 줘? 발트리가 돌아오면 이번 일 그대로 보고할 거니까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알아들어?”

    세드릭은 그들과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나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발터 어머니의 막냇동생이었으므로, 촌수로 따지자면 발터의 외숙부였다. 지금처럼 성주인 발트리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성 내의 모든 책임이 그에게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황제 폐하의 충실한 파수꾼이 될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해도 모자랄 이 판국에 별 쓸데없는 걸로 싸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세드릭이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장대한 설교를 이어갔다.

    “너희들이 구제 불능의 돌머리라는 것은 익히 겪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힘이 그 정도로 남아돈다면, 그 힘으로 차라리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그래. 말 잘했어, 세드릭.”

    날아온 빵을 세 입 만에 우걱우걱 다 먹어 치우고 수프까지 다 마셔 버린 후, 이든이 제 접시를 들고 자리를 떴다.

    “난 훈련이나 해야겠다. 또 알아? 크리스티앙 폐하가 즉위식을 치르면 갑자기 우리를 찾으실지. 지금이라면 누구든 다 벨 수 있을 기분이거든.”

    기세 좋게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세드릭의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뜻이었다. 꼴 보기 싫은 발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는 더더욱 열불이 났다.

    막사에 돌아가 그의 옆 침대를 쓰는 것도 곤혹이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발터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면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입맞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심각하게 두근거리고, 몸에 열이 올라 더웠다.

    새벽녘 겨우 잠이 들었던 며칠 전에는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민망한 꿈까지 꿨다. 발터와 호숫가에서 부둥켜안은 채 키스하는 꿈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동갑인 페터에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했지만, 순순히 승낙하던 그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결정을 번복했다.

    “발터 몽유병 있어서 밤에 자다가 갑자기 주먹질을 한다며. 그런 애 옆에서 괜히 고생하고 싶지 않아.”

    “응? 무슨 소리야? 걔 그런 거 없어.”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찝찝한 표정을 짓는 페터는 이미 마음이 떠난 후였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다 비슷했다.

    “발터는 자기 전에 복숭아 냄새를 맡으면 구토할 것 같다던데? 미안해, 이든. 난 복숭아 펀치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거 알잖아.”(레나)

    “발터가 평소엔 괜찮다가도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자면 악몽을 꾼다고 하더군. 어릴 때 탑에서 유령을 본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어쩔 수 없지.”(빈센트)

    “발터가 요즘 이갈이를 시작한 것 같다던데 내가 소리에 예민해서….”(리온)

    “다들 됐어!”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며 모든 이들이 그녀와 자리를 바꾸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오늘 밤도 아마 발터의 옆에서 뜬눈으로 꼬박 밤을 새우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불면의 밤이 지난 후, 훈련 때마다 번번이 실수를 연발하는 자신의 상태였다.

    “야, 이든. 아직 내 말 안 끝났는데 어딜…?”

    이든은 어느새 바람처럼 바깥으로 사라진 후였다. 발터는 혀를 차는 세드릭의 옆에서 묵묵히 접시를 다 비우고 난 후, 모든 이들이 막사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에야 성을 나섰다.

    “이야!!!”

    이든은 세르노티 영지에서 가장 높은 평원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보름달이 언덕 위에 걸린 깊은 밤. 나이가 몇 살인지 궁금한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휙휙 날아다니며 빠르게 움직였다.

    “하아!”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바람처럼 달려나갈 때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나무 기둥이 조각조각 깔끔히 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저녁 식사 이후, 몇 시간 동안이나 혼자 훈련에 정진했다는 것을 보여 주듯 그녀의 온몸은 온통 땀에 절어 있었다.

    실제로 이든의 목표도 녹초가 될 때까지 몸을 움직이는 거였다. 그러면 피곤해서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쩍도 안 하는 나무토막을 상대하는 것보단, 역시 움직이는 내 쪽이 더 즐겁지 않겠냐?”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든이 그를 흘깃 보며 이를 갈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당장 꺼져라.”

    검은 하늘에 보름달이 찬란했다. 발터가 천천히 걸어와 나무 기둥 하나를 가로막고 그녀의 앞에 섰다. 휘잉, 하고 바람이 불자 짙은 발터의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흩날렸다.

    머리가 복잡한 것은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달 전, 붉은 달이 오묘한 빛을 뿜어내던 밤, 욕망에 굴복해 허겁지겁 혀로 맛보았던 이든의 입술 맛이 머릿속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가 이든에게 즉시 사과했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든의 호승심을 이용해 끝까지 제 욕심을 채웠던 자신은 비겁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든은 오히려 사과하는 그에게 화를 냈다. 그에게는 세상이 달라지는 큰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도망치듯 자리를 뜨면서도, 그 사실에 열이 받아 그녀의 옷을 가지고 돌아와 버렸다. 이든의 체취가 남은 옷 속에 코를 처박고 달렸던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속 좁은 수컷에 불과했다.

    그날 이후, 발터는 그 밤의 사건을 잊으려 죽어라 애를 쓰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든이 눈에 띄게 자신을 피하고, 이제는 잠자리까지 바꾸려 들자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잘못한 게 그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 놓고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형벌을 내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너야말로 사람 짜증 나게 하지 좀 마.”

    발터가 갈라진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까마득하게 오래전부터 이든은 그와 함께였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처음 성으로 왔던 여자아이가 졸린 눈을 천천히 떴을 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발터에게서 숨듯이 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묻었을 때부터 그녀가 신경 쓰였다.

    “발터…! 발터…!”

    목검을 휘두르는 발터에게 줄 빵을 들고 달려오던 그녀가 나무 작대기에 머리를 맞았을 때, 발터는 아마 그녀와의 기나긴 악연을 직감했을지도 몰랐다.

    “신경 쓰는 것도 귀찮아 죽겠으니까.”

    이든에게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다. 성의 주인인 아버지 발트리는 장자이자 외아들인 발터에게 가문의 장래를 약속한 적이 없었다. 죽은 선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그가, 차기 성주 자리에 핏줄이 아닌 실력을 내세울 거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발트리의 혹독한 훈련과 시험을 통과한 훈련생 여럿 가운데, 이든은 발터가 경계해야 할 확실한 실력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켜 버리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그녀에게 이기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더욱 커질 줄은 몰랐다. 그가 아닌 다른 이를 보고 웃는 그녀를 보며 미칠 것 같은 질투심이 생길 줄은 몰랐다.

    “뭐라고?”

    “…죽여 버리고 싶어진다고.”

    이든이 잘못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억울한 듯 커지는 눈동자에 제 눈을 가까이 맞추고 싶었다. 작은 주름이 진 콧잔등을 이로 아프지 않게 깨물고, 삐죽거리는 아랫입술을 혀로 비집어 그녀의 혓바닥을 개처럼 핥고 싶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너를 보면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검은 불길이 일었던 것은.

    “하하. 저 개자식이 진짜….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헛웃음을 지으며 이든이 동그란 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이든에게서 서운함과 분노가 함께 느껴졌다.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은 정작 따로 있었다.

    이든. 난 너를 원해.

    그 무엇도 필요 없이, 오직 너만이 내 것이 되기를 원한다.

    “이든.”

    “왜 이 나쁜 놈아.”

    “한 판 붙을까?”

    발터는 속엣말을 내뱉는 대신 그녀를 보며 늘 하던 대로 올가미를 던졌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리고 이든은 늘 그렇듯 그를 의심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는 사람이 뭘 요구하든 받아들이기. 어때?”

    “해.”

    이든은 역시나 망설이지도 않고 내뱉었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발터가 제 입술을 핥으며 설핏 웃었다.

    내가 만약 너를 원한다면 말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이든.

    “뭐든 상관없어. 해.”

    화가 난 이든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칼을 잡고 자세를 취한 채, 발터를 향해 열기 오른 숨을 내뿜었다.

    “넌 나한테 절대 못 이길 테니까.”

    “과연 그럴까?”

    “나도 너한테 원하는 게 있거든. 나중에 지고 나서 딴소리나 하지 마라!”

    이든이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왔다. 발터는 처음부터 강하게 공격하는 이든을 막아 내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산등성이 위, 두 개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일 줄을 몰랐다.

    ***

    “하아, 하아….”

    녹초가 된 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평원 위는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연습용으로 박아 놓은 나무 기둥은 토막이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그와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옷도 여기저기 찢겨 엉망이었다.

    퍽!

    발터의 위로 올라간 이든이 그에게 힘겹게 주먹을 날린 후,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네가 진 거다.”

    피하지도 않고 맞은 채 발터가 낮게 웃었다. 입술이 따끔하며 피가 터졌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지간히 이기고 싶은가 보네.”

    “그래.”

    “대체 원하는 게 뭐길래.”

    발터는 이든의 생각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의 사고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이 뭐가 있을까. 늘 코를 잡고 기겁을 하는 축사 청소 정도일까.

    “먼저 항복해.”

    이든이 대자로 뻗은 그의 위에서 멱살을 틀어쥐었다. 발터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부터 정해진 승부였다. 그는 이든을 이길 수 없었다. 아마도 영원히.

    “내가 졌어.”

    발터가 순순히 내뱉자 이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멱살을 쥔 그녀의 손에 슬며시 땀이 솟아났다.

    “진작 그럴 것이지.”

    “뭘 원해?”

    이든이 잠시 그를 보며 호흡을 골랐다. 신중해 보이는 예쁜 입술이 대답을 조금 망설였다.

    “뭐든 다 들어줄 테니까 말만 해라.”

    한 번만 더, 너와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너에게 절연을 당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발터는 진심을 꾹 눌러 심장 밑바닥에 밀어 넣었다.

    “축사 청소건 식사 당번이건. 뭐든 상관없다고.”

    그가 가볍게 미소 지었을 때였다.

    “너.”

    이든이 시린 한숨을 뱉듯 짧게 내뱉었다.

    “…뭐?”

    잠시 침묵하던 발터가 잘 못 들었다는 듯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발터….”

    이든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말을 잇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너를 원해.”

    토해 내듯 뱉은 고백이었다. 틈만 나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해서 그녀를 곤란하게 했던 진심을 마침내 털어놓는 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발터의 멱살을 붙잡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희뿌연 달빛을 뒤로 한 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든의 숨결이 뜨거웠다.

    “머리가 돌아 버린 것 같아. 매 순간 너를 가지고 싶어서… 뭐라도 붙잡고 휘두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고.”

    순간 바람이 불었고 그들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어깨 위로 잘린 이든의 머리카락이 발터의 뺨을 간질였다. 둘 사이의 시간이 멈추었다.

    쿵. 쿵.

    마주 닿은 가슴 안쪽에서 두 개의 심장이 터질 듯 강하게 박동했다.

    “…이든.”

    얼어붙은 듯 침묵을 지키던 발터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이… 이게 진짜….”

    이든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의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결국 발터의 멱살을 세게 틀어쥐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귀먹었어? 이 눈치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주제에 덩치만 커다란 멍청한 자식아! 내가 지금 너한테 고백하고 있는 거, 모르겠냐고…!”

    마침내 그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섬세하게 한 올 한 올 짙은 갈색 눈썹이 서서히 일그러지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이제야 상황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세드릭이 말한 대로 발터 세르노티는 구제불능, 돌대가리가 틀림없었다.

    “나는… 나는…! 지금 널… 내 것으로 하고 싶다고… 너라는 녀석의 전부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하아… 됐다, 꺼져 버려. 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놈이… 흡…!”

    피 터진 발터의 입술이 그녀를 집어삼켰으므로 흥분한 이든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발터의 옷깃을 틀어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하아…!”

    이든의 양손이 그를 뜨겁게 끌어안는 순간 몸이 뒤집혔다. 순식간에 이든의 몸을 아래에 깔고서 발터가 그녀의 입술을 진하게 빨았다. 혓바닥을 휘감고 뿌리 끝에서 샘솟는 타액을 허겁지겁 삼킨 후에야 겨우 떨어진 그가 이든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너 지금 본인이 무슨 말 하는지, 확실히 알고 지껄이는 거야?”

    뜨겁게 달구어진 바위가 진동하면 이런 느낌일까. 이든의 양손이 발터의 뺨에 닿았다. 꿈틀거리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에 손끝에 생생했다.

    떨리는 혀로 발터의 아랫입술을 조심스레 핥자, 발터의 성대에서 뒤틀린 신음 같은 한숨이 샜다. 이든이 그를 보며 붉어진 얼굴로 간신히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알아듣겠냐, 이 멍청아?”

    “젠장….”

    길게 자라난 풀을 꽉 틀어쥔 그의 손등에 핏줄이 일었다. 뭐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옷을 당장이라도 찢어발긴 후 가슴을 움켜쥐고 싶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팬티를 내리고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은 후, 그토록 궁금했던 그녀의 체취를 개처럼 킁킁대며 음부를 핥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발터가 했던 수없이 많은 나쁜 상상 속의 주인공이었던 이든은 그런 그의 시커먼 마음을 알지도 못했다. 비틀린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며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말을 잇는 걸 보면 확실했다.

    “붉은 달이 떴던 날 이후 계속 네 생각만 났어.”

    “무슨 생각. 날 죽이고 싶다는 생각?”

    “그래, 비슷해.”

    이든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그에게 박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는 건데. 그랬다면 우리는 키스하지 않았을 테고, 그 뒤로 네 얼굴만 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이런 개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 건데…. 흐응…!”

    이든의 입술 새를 비집고, 여릿한 붉은 혀를 강하게 빨아 당기며 발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몸속의 피가 한 곳으로 내리쏠렸다. 이든의 손이 발터의 숱 많은 머리칼을 헤집어 그녀에게 강하게 끌어당기자 둘의 결합이 더욱 깊어졌다.

    그날.

    달의 기운에 홀린 듯 일어난 발터가 몸을 씻으러 가는 이든의 뒤를 몰래 쫒고, 내기를 빙자해 그녀의 입술을 훔친 날이었다. 꾹꾹 눌러 온 욕정을 참지 못해 짐승처럼 그녀의 아랫배에 제 성기를 비벼 댄 것도 모자라 분출하기까지 해 버린 밤이었다.

    “정말이네.”

    그녀의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고 떨어지며 발터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허스키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네 얼굴이… 사과처럼 붉다, 이든.”

    “…시뻘게져 엉망인 건 네 얼굴도 마찬가지야.”

    “그날 밤 내가 네게 했던 짓… 용서하는 건가?”

    괴로웠던 것은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든을 떠올리며 수음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혔던 수많은 밤을 알지도 못하는 그녀가 그를 보며 가쁜 숨을 헐떡였다.

    “그딴 건 잘 모르겠고….”

    이든이 허리를 바짝 치켜들며 그에게 애원하듯 속삭였다.

    “난 지금 당장 널 가지고 싶어.”

    발터가 그녀를 보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상관없다. 이든이 그를 원한다는 말을 들은 이상,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줄게.”

    그의 커다란 손이 칼날에 찢긴 이든의 윗옷을 쭈욱 잡아 뜯었다. 맨 살결이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봉긋하게 솟아 탐스럽게 흔들리는 가슴을 손안에 틀어쥐자 이든이 흣, 하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다 줄게.”

    발터가 거친 숨을 내뿜으며 꼿꼿하고 선 그녀의 예민한 유두를 잇새로 꽉 물었다. 아찔한 고통, 뒤이어 부드러운 표피에 뜨끈하게 빨리는 느낌에 이든의 입술에서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갔다.

    “하아, 발터…!”

    날카로운 발터의 콧날이 부드럽고 푹신한 이든의 가슴에 짓눌렸다. 그가 유륜과 유두를 강하게 빨며 손으로는 그녀의 다른 쪽 가슴을 터뜨릴 듯 움켜쥐었다. 허리가 저절로 뒤틀리는 쾌감이었다.

    “흐, 으응…!”

    바람이 쏴아 불며 키가 자라난 수풀을 스치고 지나갔다. 발터의 입술이 닿는 이든의 살갗이 열기로 펄펄 끓었다.

    “더 해 줘…. 하읏….”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든이 발터를 향해 양다리를 쳐들었다. 통나무 같은 그의 허리를 양 허벅지로 꽉 휘어 감자 발터가 괴롭게 신음하며 그녀의 가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든…. 하아…. 이든….”

    옷 속에서 멋대로 발기한 성기를 그녀의 아랫도리에 꾹꾹 누르며 문지르자 이든이 먹이를 보고 흥분한 작은 새처럼 파닥였다.

    “아흣…. 발터!”

    “이걸… 흣, 네 여기에 넣을 거야.”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앞에서 흥분하는 몸 상태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헐렁한 바지춤이 높이 들릴 정도로 거대해진 발터의 성기가 이든의 외음부를 마구 짓눌렀다. 발터가 그녀의 빗장뼈 부근을 짙게 빨아 잇자국을 남기며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카트리나 아주머니와 프랑크 아저씨가 했던 것처럼, 널 끌어안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아 키스하고, 그 안에 내 걸 박아 넣고 흔들 거야. 그래도 좋아?”

    얼마나 그러고 싶었던가. 내가 얼마만큼 너와 섹스하고 싶었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 해.

    잔뜩 부푼 클리토리스가 꾹꾹 눌리는 느낌에 이든이 탁하게 신음을 터뜨렸다.

    “아, 발터…! 좋아! 해 줘…. 흐응…. 해 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허리춤이 풀리고 속옷이 공중에 날아갔다. 제 옷도 찢어발기듯 벗어 낸 발터가 그녀의 양 허벅지를 단단히 결박하듯 끌어안은 후, 탄탄한 양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는 순간 발터는 뜨거운 숨을 터뜨리며 옅은 갈색의 음모를 혀로 헤집었다.

    “아아앙!”

    춥. 쭈웁! 발터의 뜨끈한 혓바닥이 음핵을 핥고 강하게 빨아들이자 이든이 비명 같은 신음을 지르며 종아리를 버둥거렸다. 그녀의 발뒤꿈치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찍었지만 발터는 꿈쩍도 하지 않고, 더욱 농밀하게 혀를 꿈틀거릴 뿐이었다.

    발터는 그녀의 몸을 열기 위해 동물적인 본능으로 움직였다. 어릴 적, 사냥을 나갔다가 들개들이 짝짓기하는 광경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암캐가 낑낑거리며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이든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아…. 이든…. 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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