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2)
  • “그럼, 이거나 드세요.”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녀를 보며 본능적인 예감에 발터가 재빨리 허리를 뒤로 꺾었을 때였다.

    휘릭!

    그녀의 손에서 육각형으로 날카롭게 세공된 표창이 날았다. 옷깃에 감춰 두었던 게 분명했다.

    “젠장!”

    발터가 낮게 욕설을 터뜨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하마터면 귀가 잘릴 뻔했다. 그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간 표창이 발터의 뒤에 있던 나무에 꽂혔다. 뺨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더니 작은 핏방울이 뚝, 흘렀다.

    “하하…! 꼴좋다.”

    이든은 어느새 나무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주저 없이 그에게 휙휙 표창을 날려 대고 있는 중이었다.

    “너, 잡히면 진짜 가만 안 둬.”

    이번에 바빠진 것은 발터였다. 그가 이리저리 몸을 날려 표창을 피하며 으르렁거렸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마치 곡예를 벌이듯 움직이는 그를 보며 이든이 깔깔거렸다. 이든에게 허가되지 않은 위험한 무기를 몰래 만들어 준 것이 누구인지는 안 봐도 훤했다. 한쪽 귀가 먼 대장장이 구스 할아범을 감언이설로 구워삶은 게 분명했다.

    “어! 멧돼지다. 엄청 큰데? 지금 잔뜩 열 받았어!”

    “네가 지금… 내 손에 진심으로 죽고 싶구나…?”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이든을 향해 발터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녀가 매달려 있는 나무를 향해 달려가자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 진짜라고! 너 말고! 네 뒤에!!!”

    발터의 짙은 눈썹이 위로 휘었다. 휙, 뒤를 돌아보니 성난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잔뜩 치솟은 뿔은 날카롭고 뾰족했다. 멧돼지 중에서도 가장 몸집이 큰 야생류다. 발터의 눈이 시커멓게 어두워져 빛났다.

    “발터! 저거 내 거야! 내가 죽인다. 저리 비켜!”

    나오라고 소리치는 이든을 놀리듯 발터가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돼지 목에 이름이라도 써 놨어?”

    발터는 들고 있던 검을 이든이 앉아 있는 나무 꼭대기로 날렸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양 손뼉을 세게 한 번 친 후, 돌진하는 멧돼지를 향해 마주 달리기 시작했다.

    “먼저 목 따는 사람이 임자지!”

    안 그래도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 몸이 몹시도 근질근질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푸륵! 푸륵! 푸르르륵!

    “야! 발터!”

    달려드는 커다란 짐승과 정면으로 맞붙는 발터를 보며 이든이 나무 위에서 발을 탕탕 굴렀다.

    “아오 저 무식한 놈이 진짜…!”

    오늘 저녁 고기 파티의 수혜자가 되어 양껏 뻐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다니. 이든은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멧돼지의 뿔을 움켜잡고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 발터를 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으아아아!!!”

    발터가 포효하며 단단한 통나무 같은 팔뚝으로 짐승의 머리를 압박해 조였다. 구릿빛 살갗에 푸른 핏줄이 툭툭 터질 듯 솟아올랐다.

    안 그래도 굵은 발터의 이두박근에 피가 잔뜩 몰리자 그의 팔뚝은 이제 이든의 허벅지만 해져 있었다. 얼핏 봐서는 짐승 두 마리가 얽혀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꼭 저따위로 굴어야 직성이 풀리지.”

    이든이 혀를 쯧쯧 차며 제 키의 세 배는 되는 커다란 나무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하여튼 성격 진짜 이상하다니까.”

    세르노티 성안에서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꼽는다면 가문의 주인이자 성의 주인이기도 한 발트리의 장자인 발터 세르노티, 그러니까 지금 콧김을 씩씩 뿜고 있는 멧돼지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있는 녀석이었다. 이든은 편하게 가도 될 일을 굳이 돌아서 가는 발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힘 그만 빼고 나오라고!”

    “누구처럼 비실거리는 녀석이랑은 달리, 흣, 난 힘이 남아돌아서.”

    끼루룩! 기릭! 끼륵!

    숨이 한계에 몰린 멧돼지가 나 살려라 소리를 치며 네 발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산에서 내려와 영지 사람들의 농작물을 파괴하는 주범인 야생 멧돼지에게 연민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편히 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꿀꿀아. 오늘 저녁 잘 부탁한다?”

    휙!

    이든의 손에서 마지막 남은 표창이 공중을 날았다.

    “죽여 버린다, 이든!”

    멧돼지와 뒤엉켜 있는데 갑자기 날아드는 표창을 보며 발터가 흠칫 놀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팔 잘릴 뻔했잖아!”

    “진짜 팔 잘리기 싫으면 빨리 비키는 게 좋을걸.”

    발터는 허리에 차고 있던 작은 단검을 뽑아 드는 이든을 보며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 이든의 눈초리가 사악한 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위험신호였다.

    프르릉!

    그의 손에서 풀려난 멧돼지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겨우 정신을 차렸다. 힘이 빠진 짐승은 발터를 공격하는 대신 줄행랑을 선택했다. 잠시 바닥을 긁으며 비틀거리다 네 발에 힘을 주어 들판을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지는 멧돼지를 조준하며 이든이 숨을 멈추었다.

    “빨리 안 던지면 놓칠 텐데.”

    “입 다물고 누님 실력이나 감상하세요.”

    낮게 중얼거린 이든의 눈동자에 초점이 또렷해진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단검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날았다.

    휙!

    수십 미터를 날아간 작은 칼은 정통으로 멧돼지의 경동맥에 내리꽂혔다. 커다란 짐승이 풀썩, 바닥에 쓰러지자 모래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바람에 풀밭에서 총총거리던 작은 새들이 놀라서 후드득 공중으로 도망갔다.

    즉사였다.

    “봤지? 내가 죽인 거다. 앞다리 두 개 다 내 거.”

    이든이 그제야 방정을 떨며 하하 웃었다. 발터는 멧돼지의 발길질에 이리저리 찢긴 옷을 툭툭 털며 윽박지르듯 목소리를 버럭 높였다.

    “힘 다 빼 놓은 건 나거든!”

    “뭐든 결과가 중요한 거지.”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발터가 휙 달려들어 이든을 붙잡은 후, 그녀가 채 방어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목을 세게 휘어 감았다. 달리기라면 이든 역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세르노티가의 사람들은 모두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데 능통했다. 발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멧돼지는 누가 잡았다고?”

    “당연히, 내가 잡… 켁…!”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발터의 팔에 힘이 더욱 꽉 들어갔다. 목을 조르는 기술에 걸렸을 때는 상대의 다리를 걸어 자빠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만약 발터가 반격한다면 다리 관절이 뒤틀릴 가능성이 더욱 컸다.

    “그냥 항복하지? 모가지 부러지기 전에. 오빠가 도와준 덕입니다, 한 번 하면 봐준다.”

    “오… 빠가 같은 소리 하네!”

    이든은 이를 꽉 문 후, 강철 같은 발터의 팔뚝을 지렛대 삼아 몸을 뒤로 휙 날렸다. 척추의 엄청난 근력을 요구하는 백플립이었다. 가죽신을 신은 발이 발터의 이마를 뻑, 하고 걷어차자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흣…!

    “머리 괜찮지? 워낙 단단해서.”

    발터의 손에 힘이 빠진 틈을 타 사뿐하게 빠져나온 이든이 실실 웃으며 그를 놀렸다. 발터가 벌게진 얼굴로 너덜거리는 윗옷을 벗어 던졌다.

    “그래. 오늘 너 어디 한 번 나랑 해 보자.”

    맨몸으로 붙어보자는 소리였다. 햇볕에 잔뜩 그을린 구릿빛 피부 아래, 땀에 젖은 성난 근육이 불끈거렸다.

    “야. 옷 벗으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이든 또한 몸을 낮추며 격투 자세를 취했다. 몸싸움이라면 어릴 때부터 넌덜머리가 나도록 해 왔다. 물론 그녀와 가장 많이 붙은 상대는 발터였다. 점점 체격이 커지는 녀석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면 조금 힘이 빠지긴 했지만, 격투기는 힘과 기술이 모두 필요한 분야였다. 이든 역시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와 봐. 어디 한번.”

    “지금 한 말 후회나 하지 마.”

    발터의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여 그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탁, 하고 손목을 쳐 낸 이든이 쏜살같이 몸을 돌려 그의 팔 관절을 뒤로 꺾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가 더 빨랐다. 발터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번쩍 머리 위로 쳐들었던 것이다. 상대를 무자비하게 바닥에 내리꽂기 직전의 자세였다.

    “항복해.”

    “항복? 그게 뭐야? 먹는 건가?”

    공중에서 이든이 여유를 부리자 발터가 코웃음을 쳤다.

    “기회를 줬는데 걷어찬다면 어쩔 수 없지.”

    발터가 그녀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려는 순간, 이든이 순식간에 그의 상체를 일으킨 후 양 허벅지로 그의 얼굴을 꽉 조였다. 멀리서 보면 이든이 발터의 어깨 위에 목마를 탄 모양새였다. 다만 그 방향이 반대라는 게 문제였다.

    “이, 이든…. 흣…!”

    “너야말로 대가리 깨지기 전에 항복하는 게 좋을걸?”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에 고개가 처박힌 발터를 향해 이든이 의기양양하게 내뱉었다. 발터는 팔뚝 근육만으로 수박을 깨부순 적도 있지만, 허벅지 힘이라면 그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커다란 녀석이 비틀거리는 걸 보니 아마도 목조르기 공격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라, 참을 만한가 봐? 이래도?”

    이든이 허벅지 사이에 힘을 더 꽉 주었다. 발터의 거친 숨결이 바지 천을 비집고 들어와 아랫도리가 뜨거웠다.

    아무리 시야가 가려져 있다고 해도 몸이라도 뒤틀어 그녀를 떨어뜨릴 만도 한데, 발터는 이든의 양 허벅지 사이에 고개가 낀 채, 아무 반격도 취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가려진 그의 얼굴 아래, 굵은 목덜미에서 어깨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봤더니 상박 전체가 뻘건 것도 같았다.

    “야, 발터 너 괜찮…. 으악…!”

    혹시 정말로 질식한 거 아닌가 싶어 이든이 슬쩍, 허벅지에 힘을 뺀 순간이었다.

    “…죽여 버린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발터가 흡사 짐승처럼 포효하며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며 몸을 덮쳤다.

    아. 젠장.

    녀석에게 깔리면 게임 끝인데. 빌어먹을 체격 차이가 서러워지는 것은 이럴 때였다.

    “하아, 너… 진짜….”

    그녀를 깔아뭉갠 발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의 얼굴은 잔뜩 열이 받아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보였다.

    당장 주먹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발터는 쉽사리 공격을 날리지 않았다.

    “그런 건 반칙이야, 이든.”

    발터의 거친 숨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주먹을 날리려 해도 양 손목이 그에게 꽉 잡힌 탓에 쉽지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반칙 쓴 게 한두 번이야? 그리고 그게 무슨 반칙이냐? 공격을 대비하지 못한 네가 멍청한 거지.”

    이든이 양다리로 통나무 같은 그의 허리를 강하게 휘감으며 씩 웃었다. 그녀는 이제 그와 배를 마주 대고 단단히 얽힌 채였다.

    “조르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 이 바보야.”

    꽉 다문 발터의 입술 새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렀다. 딱딱하게 경직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뜨거운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가쁘게 흘러나왔다.

    “너… 진짜….”

    얘가 왜 이러지? 소의 힘줄 같은 허리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라 웬만한 조르기로는 아프지도 않을 테데.

    “…내 눈엔 지금 네가 제일 멍청해 보여.”

    허스키하게 내뱉는 발터의 눈빛이 시커멓게 어두워지며 흔들렸다.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야, 아프거든…?”

    “손목 부러지기 싫으면 가만있어.”

    그가 그녀에게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발터가 가끔 그녀를 이렇게 쳐다볼 때면 영락없이 짐승 같았다. 상체를 탈의하고 있으니 녀석의 야수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알았다.”

    “네가 뭘 알아.”

    발터가 잇새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열이 올라 색이 짙었다.

    “지금 완전히 꼭지 돈 거 잘 알겠으니까, 한 대 패든 물어뜯든 뭐든 하고 빨리 끝내라고.”

    이든이 그를 보며 애써 호기롭게 웃었지만 속은 전전긍긍이었다. 가쁜 숨을 씩씩 내뿜는 커다란 늑대 같은 녀석에게 정말로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만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입 벌려.”

    “…뭐?”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입 벌리고 혀 내밀어.”

    발터가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다시 뱉었다.

    …이 미친 자식이 설마 혀를 뽑으려는 건가?

    그녀의 예상은 사실인 듯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가오는 그를 보며 이든이 놀란 입을 딱 다물었다.

    커다랗게 확장된 이든의 동공에 열 받은 발터의 얼굴이 비쳤다. 그의 시커먼 눈동자에 담긴 그녀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물어뜯기기 전에 입 벌리라고 경고했다.”

    눈이 돈 것 같은 발터가 정말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을 기세로 이를 뿌득거리며 거친 숨결을 내뱉었을 때였다.

    “자, 자! 둘 다 동작 그만!”

    손뼉을 짝짝 치며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발터의 외숙부이자 세르노티 훈련생들의 교관인 세드릭이었다. 발터의 입술에서 작게 욕설이 샜다.

    “망할….”

    “발터! 이든! 또 싸우는 거냐? 사냥 보내 놨더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너희들은 대체 언제 정신 차릴 작정이야? 그만들 하고 빨리 돌아오지 못해?”

    그들과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타고난 노안인 세드릭은, 생긴 것과 어울리게 잔소리가 많았다. 그 잔소리가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하마터면 혀가 잡아 뽑힐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이든이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발터가 여전히 그녀를 깔아뭉개고 있었으므로 입술은 아직도 앙다문 채였다.

    “성주께 말씀드려서 둘 다 헛간에 처넣기 전에 당장 그만해!”

    세드릭은 심각한 원칙주의자로 한다면 하는 이였다. 오늘 저녁이 멧돼지 통구이로 결정된 이 판국에 헛간에서 돼지 꿀꿀이 죽 같은 걸 먹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멍청한 발터라도 그건 싫은 듯했다.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그가 낮게 내뱉으며 그녀의 양 팔목을 결박한 손에 힘을 풀었다.

    “저리 꺼져, 이 미친 자식아.”

    이든이 바위 같은 그의 몸을 세게 밀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 잽싸게 나무 위로 올라가서 숨을 돌렸다.

    “아…. 진짜….”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인 양 팔목의 상태보다, 발터가 시도하려고 했던 공격 방식이 더 충격적이었다.

    “세드릭! 너 아니었으면 진짜 나 발터한테 혀가 잡아 뽑힐 뻔했어! 뭐 저런 미친 녀석이 다 있어? 쟤 헛간에 처넣어 주라. 응?”

    “뭐야. 이 녀석, 크기가 엄청나잖아?”

    세드릭에게 고자질하듯 일러바쳤지만 그는 죽다 살아난 이든보다 혀를 길게 빼고 쓰러진 멧돼지에 더욱 관심이 가는 듯했다.

    “누가 잡은 거야? 꼴을 봐선 발터가 저 녀석이랑 한판 붙은 것 같은데.”

    세드릭이 휘파람을 불며 날카로운 얼굴에 모처럼 커다란 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든이 잡았어.”

    예상치 못한 발터의 말에 잠시 당황한 이든이 그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이든이 잡았다고?”

    “그래.”

    발터가 다시금 순순히 수긍했다. 평소라면 서로 자신의 공이 크다고 우겼을 텐데. 이든은 아까 조르기 공격이 너무 세게 들어간 탓에 그의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옮기는 건 발터 네가 하면 되겠네.”

    “여기까지 온 네가 도와줄 생각은 없고?”

    “오늘 사냥 당번은 너희 둘이잖아? 난 확인차 온 것뿐이다.”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한 후, 언덕 아래로 유유히 사라졌다.

    “아휴, 하여간 꼭 저렇게 얄밉게 굴어.”

    “어차피 도와줄 거라고 생각도 안 했잖아.”

    “하긴. 그건 그래.”

    발터가 나무 위에서 키득거리는 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눈이 부셨다. 이든이 그를 보며 햇살보다 환하게 웃었다.

    “근데 너는 뭔 꿍꿍이야?”

    “뭐가?”

    검집째 휙 날아오는 자신의 검을 낚아채고 몸에 맨 후, 발터가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타고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아까 세드릭한테 왜 내가 멧돼지 잡았다고 했냐고.”

    “이제 별걸 가지고 다 시비를 거네.”

    발터의 몸이 휙, 하고 공중에 가볍게 날아오르더니 조금 더 위의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가 높이 올라올 때마다 오래된 떡갈나무에 달린 수백 개의 이파리가 팔랑거리며 춤을 추듯 흔들렸다.

    “발터, 너 그렇게 나무 타면 진짜 커다란 곰탱이 같은 거 알아?”

    “이렇게 잘생긴 곰이 있으면 내 앞에 데려와 봐라.”

    팔의 힘만으로 손쉽게 나무를 타고, 마침내 그녀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후 발터가 이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 착각도 재주라면 재주다, 진짜.”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그와 나란히 앉은 이든이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백 살은 족히 넘는 커다란 나무의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환하게 웃는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발터를 향해 문득 이든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발터.”

    발터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든이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자연스레 위로 말려 올라간 속눈썹 아래, 색이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향해 있었다. 짤막하게 잘린 풍성한 단발머리가 뺨 근처에서 바람에 날려 흔들렸다.

    발터가 기다란 눈을 더욱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동자에 흘러 따가웠다. 눈을 감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드릭한테 사실대로 말해 줘서 고맙다.”

    이든의 도톰한 입술이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그 모습을 응시하는 발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였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말로만 지껄이지 말고 진심을 보여.”

    “음…. 그럼 아까 곰탱이라고 말한 거 취소할게.”

    “장난하냐?”

    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는 발터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햇살이 뜨거운 모양인지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실 꽤 쓸 만한 얼굴인데 말이지. 다른 애들은 세드릭이 잘생겼다고 입을 모으지만… 솔직히 걘 너무 노안이잖아? 그 얼굴이 어떻게 스물이냐고. 서른이면 인정.”

    이든이 키득거리며 발터의 마른 뺨을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까 표창에 살짝 스친 상처에서 맺힌 피가 이든의 손에 묻어났다.

    “아팠어?”

    발터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전혀.”

    “…허세는.”

    이든이 웃으며 손에 묻은 발터의 핏방울을 혀로 날름 핥았다. 날카로운 쇠 맛이 났다.

    발터의 맛. 익숙한 맛이다. 그의 땀 냄새와 체향까지 모두 그녀에게는 익숙했다.

    “잘생긴 우리 발터.”

    그의 피를 싹 핥아먹은 후, 이든이 나직하게 내뱉자 복숭아씨처럼 툭 튀어나온 발터의 목울대가 다시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에 은근한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원래 알고 있었지. 근데 아까 가까이서 얼굴 보니까, 새삼 멋있더라고. 작년 여름에 우물 판다고 우리 개고생했을 때 마을 아주머니들이 왜 너한테만 잘해 줬는지 이해가 가더라.”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놀리는 거 아니야. 카트리나 아주머니가 그러던데? 잘생긴 사람한테는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고, 괜히 잘해 주고 싶은 게 당연하다고.”

    그의 성대에서 짐승 같은 숨소리가 신음처럼 섞여 나왔다. 짙은 갈색의 머리색을 닮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흔들리며 거칠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든이 입을 꾹 다문 발터의 얼굴을 손에 가둔 채,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발터, 그런데 말이야.”

    “…….”

    “나 너한테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

    빛을 가득 담아 옅게 풀어진 그녀의 보랏빛 두 눈에 슬그머니 긴장이 들어찼다. 그런 그녀를 코앞에서 마주한 발터 역시 심장이 터질 듯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솔직하게 말해 줄 거야? 이런 걸 굳이 물어보는 나도 좀 민망하긴 한데….”

    “…그냥 말해.”

    낮게 속삭이는 발터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쿵. 쿵. 그와 그녀의 심장 박동이 동시에 빨라졌다. 긴장에 아랫입술을 축이는 그를 보며 이든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돼지 앞다리, 두 개 다 내 거지?”

    발터는 잠시 말을 잃은 듯 대답을 하지 못했다.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든이 혀를 차며 양손에 가둔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짝, 소리 나게 때렸다. 간질간질하게 피어오르던 공기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내가 너한테 하나라도 줄 거란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알았어?”

    발터가 마치 뒤통수를 때려 맞은 것 같은 얼굴로 눈썹을 비뚜름하게 들어 올렸다. 경직된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게 실시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솔직히 네가 안 나섰어도 걘 어차피 나한테 죽을 목숨이었거든? 그래. 뭐, 갈비는 많으니까 다른 애들이랑 나눠 먹는다 하더라도 앞다리는 절대 포기 못…!”

    발터가 이든의 목에 팔을 걸어 압박하자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야, 야, 이거 안 놔?”

    핏줄이 돋은 팔뚝을 퍽, 퍽, 쳐 보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발터는 그녀에게 복수하듯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그래. 많이 많이 처먹고 많이 많이 커라. 어?”

    분노한 발터의 이글거리는 숨결이 이든의 귓바퀴에 닿았다. 아. 간지러워. 그를 나무 아래로 떠밀어 버리려던 그녀가 흠칫 몸을 움츠린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갑자기 정수리가 짜릿하게 저렸다.

    “너하고 제대로 된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내가 등신이지. 이제부터 내가 널 다시 봐주면 인간이 아니라… 개다, 개!”

    낮게 으르렁거리듯 속삭인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의 귓불을 강하게 씹었다. 뜨끔하고 뜨겁고, 날카로운 쨍한 감각에 화들짝 놀란 이든에게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아야, 아파!”

    이든이 주먹을 냅다 휘두를 틈도 없이 발터가 나무에서 휙 뛰어내렸다.

    풀쩍.

    소리도 없이 사뿐히 착지한 그의 곁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날았다.

    “야! 어디 가는 거야!”

    “멍청한 네 꼴 보기 싫어서 먼저 돌아간다.”

    “야 이 자식아, 멧돼지는 들고 가야 할 거 아냐!”

    벌게진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지르는 이든을 향해 발터가 코웃음을 쳤다.

    “넌 손 없어?”

    “뭐라고? 야! 죽고 싶어?”

    발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덕 아래로 뚜벅뚜벅 전진하며 가운뎃손가락을 공중에 들어 보일 뿐이었다.

    “…아 씨. 뭐야, 저 새끼.”

    이든은 아직도 얼얼한 귀를 어루만지며 황당해 어쩔 줄을 몰랐다.

    하마터면 귓불 잘릴 뻔했잖아. 아까는 혀를 뽑아 버리겠다고 하질 않나. 이제는 진짜 물기까지 해?

    “저 자식, 뭐 이상한 병 같은 거 걸린 거 아니야? 도대체 왜 저렇게 야만적이 됐지?”

    발터의 고뇌를 알 리가 없는 이든은 홀로 외로이 멧돼지의 네 다리에 밧줄을 단단히 돌려 묶으며 욕설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저녁 식사 시간, 이든의 귀를 물어뜯은 잔혹범은 진흙에 묻어 구운 멧돼지를 가열하게 씹어 뜯고 포도주를 들통으로 들이부었다. 마치 며칠은 굶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정작 오늘 만찬의 주역인 이든은 식욕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앞다리를 세드릭에게 양보했지만 결과는 역효과였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속셈이지?”

    눈썹을 비뚜름하게 올리며 수상한 눈으로 그녀를 보는 세드릭을 한 대 쥐어박고만 싶었다.

    “먹을 거 양보하는 데 이유 있어? 넌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진심으로 좀 받아들여라.”

    의심이 많은 세드릭이 입술을 비틀며 그녀를 비웃었다.

    “네가 누군가에게 먹을 걸 양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그게 왜 말이 안 되는데?”

    “이든, 네가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지?”

    이든이 잠시 망설이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먹을 때.”

    “두 번째로 행복할 때는?”

    말 없는 그녀를 대신해서 세드릭이 태연하게 자문자답을 했다.

    “먹으면서 그다음에 뭘 먹을지를 생각할 때지.”

    “……!”

    “어떻게 알았는지 깜짝 놀라는 표정이구나. 그 정도야 너무 쉽지. 넌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내일 아침 메뉴를 궁금해하는 성격이잖아? 근데 그런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 부위를 양보한다. 딱 봐도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

    말이 길어지는 세드릭을 보는 이든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이 없어서 더욱 열이 받았다. 이든이 벌컥 소리를 높였다.

    “넌 스스로가 의심이 좀 너무 많다는 생각은 안 하냐?”

    “전혀?”

    아마포 냅킨으로 꼼꼼히 입가를 정리한 후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나 요즘 체중 조절 중이라. 그럴 리가 없겠지만 네 호의가 만약 진심이었다면 마음만 받아들이지.”

    “뭐? 체중 조절? 그딴 걸 왜 하는데?”

    “군살이 붙은 걸 보면 심미적으로 좀 괴로워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 외모는 좀 마른 게 완벽해 보이잖아.”

    “아아. 진짜 재수 없어!”

    이든이 진심으로 화를 내기 일보 직전, 건너편에서 조용히 갈빗살을 뜯고 있던 아일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세드릭은 지금도 추… 충분히 완벽해요!”

    훈련생 중 가장 막내인 아일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처음 몇 달간은 입을 열지 않아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던 그녀는 지금도 말이 많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큰 소리를 낼 때는 세드릭에 관련한 일뿐이었다.

    “응? 뭐라고, 아일라?”

    “체중…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충분히 멋… 아니, 완벽하다고요.”

    사냥을 나갔다가 숲에서 길을 헤매고 있던 어린 아일라를 세르노티 영지까지 데려온 것이 세드릭이었다. 그를 따라 성에서 살게 되고, 결국 세르노티의 정예 훈련생이 된 아일라는 세드릭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의 말이라면 아마 하늘의 달이 두 개라고 해도 믿을 게 분명했다.

    “아일라.”

    아일라의 곁에서 쿡쿡 웃는 다른 동기들은 그녀를 대놓고 놀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그럴 수가 없는 이유는 물론,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타이르는 세드릭 때문이다.

    “설마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거야? 이든을 믿어서는 안 돼.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무식한 사람일수록 멀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접시를 이리 주렴. 내 걸 나눠 줄 테니.”

    “아, 아뇨. 전 그런 게 아니라….”

    애늙은이 같은 세드릭은 아마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아일라를 제 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일라, 함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제일 원초적인 함정이 바로 단순하고 무식한 이들이 파는 함정이다. 예측에서 빗겨나가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지. 세드릭 슈네가 집필한 암살론 제6 장, 함정 편에 적혀있는 내용인데. 설마 잊은 거야?”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잔소리와 잘난 척을 동시에 시작한 세드릭 슈네 본인의 앞에서 쩔쩔매는 아일라를 보며 이든은 처음 말을 꺼낸 스스로를 몹시도 후회했다. 기다란 작살에 찔린 통돼지에서 기름이 자르르 흘렀다. 껍질은 바삭하고 기름기가 쫙 빠진 살코기는 부드럽고 쫄깃할 게 분명했다. 내가 미쳤다고 먹을 걸 양보했지. 이든이 마음을 고쳐먹고 접시로 향했을 때였다.

    “다들 배가 부른 것 같은데, 그럼 이건 내가 먹을게.”

    발터가 냉큼 끼어들어 접시를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돼지 앞다리는 결국 그의 차지가 된 것이다.

    “아아, 저 밉상….”

    이든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막사로 돌아와 일찍 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요리장인 카트리나 아주머니가 영지 사람들과 함께 겨울을 대비해 술을 담그는 바쁜 날이었다.

    덕분에 오크 통에 남아 있는 오래된 술을 다 끝장내라는 지령을 받기라도 한 건지, 포도주 냄새를 풀풀 풍기며 돌아온 발터와 일행들은 코를 드르렁거리며 잘도 잠을 잤다.

    이든은 물어뜯긴 귀가 밤새 화끈거리는 느낌에 분통이 터져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한 손을 베개 삼은 채 뒤통수에 대고 길게 누워 깊이 잠든 발터의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디 한번 당해 봐라.’

    이마나 한 대 따악, 때리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옆에 붙은 발터의 침대로 살금살금 기어가 손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그냥 자라.”

    자는 줄 알았던 발터가 그녀의 손목을 휙 잡아당기는 바람에, 이든은 그의 몸 옆으로 엎어지듯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괴물 같은 놈.

    이든이 씩씩거리자 그의 손이 그녀의 눈을 덮었다. 그를 발로 걷어차 주려던 이든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이든은 원인 모를 악몽에 시달렸었다. 주변이 온통 불길에 휩싸이는 꿈이었다. 밤에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면, 새벽이 올 때까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뒤척이던 그녀의 시야를 가려 주었던 건 발터의 손이었다. 이제는 얼굴을 다 덮을 정도로 커다래진 손의 온기를 느끼며 이든은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었다.

    발터가 눈을 슬쩍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에 입을 헤 벌리고 편안히 잠든 이든이 보였다. 그는 손에 닿는 그녀의 따뜻한 숨결을 느끼며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다. 잠을 자지 않아도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멀리서 매미가 쎄에, 하고 울기 시작했다. 화답하듯 다른 매미 한 마리도 덩달아 울었다. 세르노티의 여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전혀 졸리지 않다. 지금 나는 눈을 아주 천천히 끔뻑거리고 있을 뿐 절대로 졸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개가 무거워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은 내 머리에 들어 있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 절대로 졸리기 때문이 아니….

    탁!

    “발터!”

    “넵!”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이든의 팔을 누군가가 슬며시 끌어당겨 다시 앉혔다.

    “네, 성주님.”

    그녀의 곁에서 발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흐음….”

    높은 의자 위에 앉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발트리가 보였다. 이든은 자신이 절대 졸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필하듯 공중으로 손을 휙휙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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