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잿빛이 섞인 금색 눈썹이 보일 듯 말 듯 꿈틀거렸다. 모 아니면 도였다. 혜미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 들어갔길 바라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까 일부러 베개를 자르신 거잖아요. 처음부터… 절 벨 생각이 없었잖아요.”
‘역시 알고 있었던 건가.’
그녀의 반응을 시험하려 했던 세드릭의 의도는 사실이었다. 이든은 죽기 전, 세르노티 안에서 손에 꼽는 실력자였다. 마지막 순간 그가 살짝 칼끝의 방향을 바꾼 것은 상대가 진짜 그녀가 아니었다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차이였다.
하지만 눈앞의 그녀가 진짜 이든이라는 사실을 세드릭이 인정한다고 해도, 모든 일이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3년 전, 이든의 죽음을 목도하고 발터는 흡사 미치광이처럼 눈이 돌았다. 그녀의 시체를 업고 돌산의 마법사에게 찾아간 지 열흘 후, 상처가 완벽히 사라진 채 잠든 이든을 업고 영지로 되돌아왔다.
그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그녀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생소한 말투를 쓰는 그녀를 이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모두에게 무리가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든이 다시 살아난 이상,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들의 동료로만 생각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녀의 뜻에 따라 세르노티의 기사 전체의 운명이 결정될 상황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드릭이 지금,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가질 수 있는 불만을 대표해서 발터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괜찮으면 제가 저 사람… 그러니까, 발터와 둘만 이야기할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혜미가 덜덜 떨며 세드릭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피 튀기는 싸움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이었다. 세드릭이 들고 있는 칼은 장난감이나 소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마 발터의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침상 아래로 떨어진 작살난 베개를 보니 다시금 턱이 덜덜 떨렸다.
“제발… 싸우지 말아 주세요….”
공손하게 대하면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미가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제가 빠, 빨리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탑의 맨 꼭대기, 지상과 멀어 조용한 공간에 더욱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고개 숙인 그녀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낀 기사들 때문이다. 이든이 그들 모두에게 고개 숙인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함께 훈련하던 그녀가 황제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직후, 기사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였다.
그때 이든은 울면서 몇 번이나 외쳤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그녀는 지켜야 할 주군이 아니라 동료라고.
과거의 기억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 것은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탁.
탁.
세드릭과 발터의 검이 차례로 닫히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렸다.
“…내일까지 시간을 주지.”
침묵을 깨고 세드릭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
“그때까지 기억을 되찾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든.”
***
“고개 들어.”
발터의 낮은 목소리에 혜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공간 안에는 그녀와 발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 나간 건지 소리도 들리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혜미는 딱딱한 침상에 풀쩍 주저앉았다. 베개에서 흘러나온 거위 털이 진동에 가볍게 휘날렸다. 세드릭이 그녀에게 칼을 휘둘렀던 조금 전의 일이 생생하게 실감이 났다.
“아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
혜미가 중얼거리자 발터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뭘요?”
“다른 이에게 고개 숙이지 말라고.”
“…….”
“세드릭은 네가 고개 숙여야 할 이가 아니야. 그 반대면 모를까.”
태평한 소리에 혜미는 조금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봤더니 바윗덩어리 같은 눈앞의 남자는 다혈질에다 무모하기가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과연 믿어도 되는 건지, 조금 불안해졌다.
“저기… 요…. 제가 그 사람한테 버릇없게 굴었으면 베개가 아니라 제 목이 날아갔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최대한 그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게 주의하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아.”
발터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너 역시 세드릭에게 당할 만큼 약하지 않고.”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혜미는 세드릭이 검을 빼내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검집에서 칼을 빼내고 휘두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아까 그 세드릭이라는 사람, 딱 봐도 엄청난 실력자잖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전 칼이라고는 택배 박스 뜯을 때밖에 쓴 적이 없어요. 근데 그런 사람을 제가 어떻게 이겨요?”
“무방비한 상태에서 갑자기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어.”
“…인간이 극단적인 상황에 밀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아기가 깔린 것을 보고 차를 번쩍 들었다는 어느 부모의 일화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게 아니라면 혜미는 도저히 아까의 상황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빗겨 간 공격의 의도를 알아채는 것도 초심자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건 그냥 운 좋게 때려 맞힌 거예요!”
목소리를 애타게 높여 보았지만 발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 보였다.
“명심해. 세르노티에서 네가 고개 숙여야 할 이는 아무도 없어.”
“…왜일까요?”
미간을 모으며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그녀를 향해 발터가 또다시 아리송한 답을 주었다.
“우리는 널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니까.”
산 넘어 산이었다. 혜미가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꽉 눌렀다.
“네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드릭이 기사들을 모두 소집했다. 미리 막았어야 했는데, 늦었어. 용서해라.”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 잠깐만요.”
혜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발터를 제지하듯 살짝 양손을 들었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가까이 오지 말고 저기…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발터의 짙은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보며 혜미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당신이 가까이 오면 제가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래요.”
“…내가 무섭다고?”
발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녀 스스로의 상태였다.
“아무튼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첫 경험을 선사한 상대를 보며 혜미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처음 보는 짐승 같은 남자와 욕구불만에 미친 사람처럼 밤새도록 몸을 섞을 수가 있단 말인가.
무겁게 한숨 쉬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발터가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묻었다.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 없고 민첩한 움직임.
아까 세드릭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기척 없이 움직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딱 봐도 평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엄청난 훈련을 한 것이 틀림없다. 대체 뭐 하는 이들일까.
“일단 설명 좀 해 줄 수 있을까요? 여긴 어딘지, 당신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차근차근이요.”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건가? 아무것도?”
혜미는 실망한 그의 표정을 보고 묘하게 죄책감이 드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네.”
“뭐부터 설명해 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십 가지의 질문들 중, 혜미가 가장 필요한 정보를 먼저 물었다.
“베네딕트는 누구예요? 그 은발의 남자.”
일단 약간 미치광이 같았던 그 남자를 찾아야 했다. 혜미는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그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교황이야.”
“교황이요?”
“대마법사이기도 하지.”
“마법사요?”
발터가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반복하는 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혜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머리를 최대한 간단히 정리하려 애를 썼다. 그녀는 현대인이고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력이니까.
0. 베네딕트라는 은발의 남자는 교황이자 대마법사이다.
“그래. 죽은 널 살려 내고 사라진 네 영혼을 찾아낸 장본인이야.”
발터의 말투가 묘하게 싸늘했지만 혜미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이라면… 그… 이든을 말하는 거죠?”
“네가 바로 이든이야.”
혜미는 발터의 말을 흘려들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1. 그녀는 어제 이상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차원 이동을 했다.
1-2. 이든이라는 사람이 이 세계에서 죽었다. 베네딕트는 죽은 이든의 영혼을 대한민국에서 찾아낸 후, 발터라는 남자를 이용해 이 세계로 불러들였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차원 이동을 한 이유라는 뜻이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말 미안한데… 다른 질문을 하기 전에 이거 하나만큼은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뭐지?”
혜미는 발터를 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긴장감이 가득 찬 얼굴로 내뱉었다.
“그 교황이라는 사람,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게 분명해요.”
“…무슨 뜻이야?”
“모르시겠어요? 아까는 죽을까 봐 대충 둘러댄 거지만 나는 당신들이 찾는 그 여자가 아니라고요. 실은 애먼 사람을 데려온 거라고요…!”
양 주먹을 불끈 쥐고 진지하게 외치는 혜미를 향해 발터가 묵직한 시선을 주었다. 딱 봐도 못 믿는 표정이었다. 혜미는 탄식을 터뜨리며 그를 향해 애원하듯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예요. 그러니까 절 그 베네딕트라는 마법사한테 데려가 주세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네?”
“넌 눈을 뜨자마자 나를 불렀어. 내 이름. 발터.”
“그… 그건….”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부르며 애원했지. 처음에는 끝내지 말아 달라고. 나중엔 제발 그만해 달라고. 지금 네가 앉아 있는 바로 그곳에서.”
혜미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지난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생생히 재생되고 있었다.
2. 발터와 잤다. (기억나는 것만 5회 이상)
발터가 표정의 변화 없는 얼굴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혼자 부끄러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얼굴에 피가 순식간에 몰리는 것은 의지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 눈을 떴을 때… 머릿속이 순간 뒤엉키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입으로 말을 내뱉고 있는 건 난데,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 박자 늦게 깨닫는 느낌이었거든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아니. 전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발터의 대답에 혜미가 탄식을 삼키며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세상에는 역시 그녀만큼이나 머리가 나쁜 사람도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바보가 열이 받으면 진짜 무서우니까.
“제 생각에는 그러니까… 당신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부르게 된 건, 이 여자… 이든의 육체가 학습한 습관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생각해 보세요. 영혼과 뇌를 분리시킨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닐까요?”
혜미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번갈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발터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제, 제가 분명히 다가오지 말라고 부탁을 했던 것 같은데….”
혜미의 눈빛이 당황해 흔들렸다.
“이든.”
발터가 그녀의 앞에 소리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그의 손이 올라와 무릎 위에 놓인 혜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혜미는 그를 차마 뿌리치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왜 이 남자는 갑자기 무릎을 꿇어서 사람을 당황시키는 걸까.
두근. 두근.
심장이 제 속도보다 빨리 뛰고 있었다. 발터의 엄지가 그녀의 맥이 뛰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쓸었다. 맥박이 조금 더 빨라지며 호흡이 뜨거워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너는 머리와 심장이 따로 노는 사람이 아니야.”
자신을 향한 짐승 같은 열망을 띠고 있는 암갈색 눈. 혜미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라 그저 숨만 몰아쉬었다.
“너는 솔직하고, 그래서 강하다. 남을 속이는 일은 귀찮아서 하질 못하고, 혹여나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티가 나는 건 그 때문이었을 거야. 그뿐인가. 타인을 위해 남몰래 애쓰면서도 칭찬받는 걸 민망해하며 도망치는 성격이기도 하지.”
흐릿한 미소가 순간적으로 발터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간 것도 같았다. 그가 웃으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세르노티 안에서 그런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든.”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네요.”
발터가 또다시 입술을 묘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가늘어졌다.
“대단했지. 여러모로.”
혜미는 문득 이든이라는 여자가 부러워졌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타인에게 이토록 강력한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1%의 특별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었다. 99%의 보통 사람에 속한 그녀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 남자는 정말 내가, 그녀라고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믿고 싶은 걸까.
“발터.”
혜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응.”
“이든은 어떻게 죽었어요?”
발터가 잠시 말을 망설이다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살해당했어.”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억울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살리려 많은 사람이 애를 썼던 거겠지.
“왜 살해당했는데요?”
“…내가 널 지키지 못했거든.”
낮은 목소리로 답하는 발터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죽은 듯이 잠든 이든을 바라보며 매일같이 되새겼던 그날 밤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겠다고. 이든이 눈을 뜨기만 한다면 평생 욕심부리지 않고 그녀의 개로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당신이 이든을… 다시 살린 거예요?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해서…?”
발터는 자신을 향해 되묻는 그녀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이든에게로 갔었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발트리가 그를 꾸짖고 헛간에 처넣었다면. 모든 것이 바뀌었을까. 달콤한 꿈의 대가는 너무나 처절했다.
“살리는 건 베네딕트의 몫이었어. 난 그 곁에서 네가 눈뜰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발터는 죽음과 같은 잠에 빠진 이든의 곁에서 수만 번의 맹세를 거듭했다.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어리석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이를 감히 욕심냈던 스스로를 후회하며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냈다.
“…이거, 였나…?”
혜미가 발터를 바라보며 베네딕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베네딕트는 그녀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라졌다. 어쩌면 베네딕트가 말한 선물은 바로 이 남자였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녀가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단 한 가지, 그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발터.”
가만히 그를 부르자 혜미의 입 속에서 부드러운 공명이 일었다. 이제껏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단지 몸에서 학습된 무의식일 뿐일까.
“…….”
바위 같은 남자가 입을 다문 바람에 멀리서 부엉이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청승맞게 들렸다. 공기의 움직임까지 느껴질 듯 조용한 공간에서 발터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그녀에게 꽂았다.
짙은 눈썹이 미간에 구겨져 일렁였다.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눈동자에 축축한 물기가 일자, 혜미의 가슴 깊숙한 곳이 이유 없이 욱신거렸다.
“당신과 이든의 관계는… 대체 뭐였어요?”
혜미의 나직한 질문에 발터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길쭉하고 보기 좋은 그의 입술이 지난밤, 정신 나간 듯 자신의 몸을 탐하던 시간이 고스란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든.”
그녀를 응시하는 발터의 넓은 가슴이 부풀었다. 서서히 바닥에서 일어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혜미가 긴장에 입술을 축였다. 주제넘은 질문에 기분이 나빠져 한 대 치려는 걸까. 아니면 다시 옷을 벗기기라도 하려는 걸까. 뭐든 떨리는 건 마찬가지다.
“겁내지 마.”
발터가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널찍한 그의 몸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에 그녀의 몸이 완전히 가려졌다. 발터의 손은 진득하고 뜨거웠다.
“질문에 대답해 주려는 것뿐이니까.”
혜미의 얼굴에 피가 몰려 달아올랐다. 이상한 것은 발터가 가까이 오자마자 저릿거리며 반응하는 그녀의 심장이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 주세요.”
“왜지?”
“무서워서요.”
그의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잠겼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열망과 괴로움이 동시에 타올랐다.
“지난밤, 나와 잤을 때도 내가 두려웠어? 넌 날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어.”
“그, 그건….”
혜미의 귓불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난밤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기억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그럼 지금도 네가 날 두려워하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게 되겠지.”
“기, 기억해요!”
혜미가 당장이라도 그녀를 침대에 눕힐 것 같은 발터를 향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뭘?”
“밤새도록 당신과 짐승처럼 엉겨 붙어서 뒹군 거…. 저도 기억한다고요.”
발터가 시뻘게진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의 미소가 슬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식이었잖아.”
“…네?”
지난밤의 뜨거웠던 정사가 지금도 생생했다. 온몸 구석구석에 닿던 그의 감각을 떠올리자 혜미는 식었던 몸에 뭉근한 열기가 피어날 지경이었다. 발터의 양팔이 그녀가 앉아 있는 침상을 짚었다. 그의 얼굴이 한층 가까웠다.
“한번 시작하면 동이 틀 때까지 섹스하는 게 너와 나의 일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남자의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농밀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당황해서 눈이 커다래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발터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거침없는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안에 일곱 번 이상 파정하지 않으면 서로가 만족하지 못했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몸을 섞은 후에도 우린 서로 얽힌 채 잠이 들었어. 네가 자면서도 내 물건을 조여 오는 바람에 난 수시로 깨어나 발정이 난 짐승처럼 네게 쑤셔 박았지. 하지만 너와 내가 선택한 불면의 밤에 넌 단 한 번도….”
잠시 말을 끊는 발터의 널찍한 가슴이 거칠게 부풀었다 제자리를 되찾았다.
“더 세게…. 발터…. 아아…! 넌 내 거야. 흐응! 영원히…. 아흣…. 영원히…!”
“넌 단 한 번도 나를 거부한 적이 없어.”
그녀를 향해 괴롭게 속삭이는 그를 보며 혜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어젯밤 일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향한 남자의 진지한 얼굴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알겠어요. 그럼….”
꿀꺽. 긴장한 혜미가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입을 뗐다.
“당신과 나는, 이… 세계에서 연인이었던 거군요.”
연인도 보통 연인이 아니라 아주 지독한 바퀴벌레 같은 한 쌍이 아니었을까. 공공장소에서까지 애정 표현을 하며 외로운 솔로를 불쾌하게 만드는 이들이었을 게 분명했다.
선이 굵고 뚜렷한 그의 얼굴이 기울어지며 천천히 그녀의 얼굴 아래로 내려왔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손에서 그녀와 같은 속도로 맥박이 뛰었다.
“대답해 주세요.”
혜미는 고개를 들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를 두 눈에 담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아득하고 편안하고, 두근거리는 동시에 심장이 저릿저릿 아파 오는 이 기분은 과연 누가 느끼는 것일까. 이든일까. 아니면 그녀일까.
“이든.”
마주 닿을 거리에서 멈춘 그의 입술이 작은 속삭임을 토해 냈다. 혜미는 혼란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이든과 당신은… 서로 사랑했던 거죠, 발터? 그래. 그랬던 게 분명해요.”
혜미는 일련의 모든 상황을 간신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 이든이라면, 발터의 몸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환영하듯 받아들였던 자신의 상태도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 그랬어.”
발터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당신은….”
혜미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조용한 말투로 물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다시 저릿했다.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남자의 표정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게다가 그녀가 이든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면 기뻐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발터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기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열망과 괴로움이 뒤엉킨 무언가였다.
“제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가요?”
스륵.
발터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마저 꿇었다. 그의 얼굴이 느리게 바닥을 향했다. 당황해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의 발등에 닿은 것은 그의 입술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뜨끈한 체온과 숨결이 닿아 오는 느낌에 혜미의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발터의 고개가 더욱 더 낮은 곳을 향하자 그녀는 더욱 당황해 발을 빼려고 했지만, 그의 손에 발목이 꽉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기요…. 잠깐 이것 좀 놔주시면….”
젊은 전사의 얼굴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뜨거운 암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그녀를 향해 애끓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괴로운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었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어. 다만 이것 하나만은 맹세하지.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어. 두 번 다시 너를 혼자 두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아.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든.”
혜미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설마 당신 때문에 죽었을 리도 없을 것 같고….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잡힌 발목에서 화끈화끈 불길이 일었다. 혜미는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발터를 향해 애원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 돌아왔으니까…. 이제 된 거잖아요. 일단 좀 일어나시면 안 될까요?”
“네가 허락하기 전엔 일어날 수가 없어.”
“무슨… 허락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혜미의 앞에서 발터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몬드형의 눈매 안에서 그의 눈동자가 뜨거운 빛을 발했다.
“세르노티의 가주, 저 발터 세르노티가 폐하의 것이 되기를 감히 원합니다.”
마치 속에서 끓는 열을 토해 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제 미천한 목숨을 폐하를 위해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의 순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지금 뭐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폐하께서 계셔야 할 자리로 돌아가실 때까지, 황좌를 찾으실 때까지, 그 곁에서 그림자로 살다 죽는 무한한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황좌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놀란 혜미는 발바닥으로 저도 몰래 그의 어깨를 세게 밀며 걷어찼지만, 바닥에 무릎 꿇은 발터는 1밀리미터도 요동이 없었다.
“발터.”
“말씀하십시오.”
충견처럼 바닥에 무릎 꿇은 그에게 묘하게 배신감이 드는 이유를 본인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연인이 아니라 부하였던 것인가? 혜미가 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뭐든지 허락할 테니까 제 발 좀 놔주세요.”
“…명령입니까?”
“…네에!”
혜미가 흡사 울부짖는 소리를 내자 발터가 그제야 손을 떼어 냈다. 혜미는 침상에 양 무릎을 모은 채 세우고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황제라니.
내가 황제라니!!!
보는 사람만 없으면 침대에 벌렁 누워 허공에 발차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껏해야 칼을 쓰는 검투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녀의 머리로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주어진 정보 값은 너무도 적은데, 이해해야 할 범위는 산더미다.
“발터.”
“…말씀하십시오.”
“저기요. 갑자기 존댓말 하니까 이상해요.”
혜미가 그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인상을 구겼다.
“캐릭터 안 어울리니까 그냥 반말로 해 주세요.”
발터가 그녀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아래로 일렁였다.
“저 지금 완전 울고 싶은 기분이거든요.”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이해해.”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혜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로 걸었다. 키가 낮은 의자를 빼고 앉은 후, 그녀가 발터를 보았다.
“이제부터 저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
“도대체 저한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 주세요. 사소한 것까지 전부 다요.”
세드릭은 내일까지 기억을 되찾으라고 말했다. 그 전에 가능한 모든 정보를 모두 알아내야 했다.
그녀가 왜 살해당해야 했는지. 왜, 이곳은 궁전이 아닌 건지. 그리고, 발터와 그녀는 대체 어떻게 하다가 몸을 섞는 관계가 된 건지.
“그래 줄 수 있어요?”
“…노력해 볼게.”
발터가 천천히 걸어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녀와 함께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파편처럼 그의 뇌리를 쑤셨다.
“푸하하. 발터. 너 씩씩거리고 있으니까 진짜 발정 난 멧돼지 같은 거 알아?”
“대머리 독수리같이 생긴 게…. 잡히면 입을 틀어막아 주지.”
나란히 달리며 함께 웃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이제부터 발터는 세르노티의 가주로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그녀를 지켜야 했다.
그것이 황제의 그림자, 혹은 암살자로 불리는 세르노티의 운명이었다.
***
제국력 175년, 봄.
황태자 크리스티앙의 즉위식 10개월 전.
세르노티 영지.
“죽어라, 이 멍청한 놈아.”
“멍청한 게 과연 누굴까?”
챙!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공중에서 마주친 두 칼이 부들부들 떨렸다. 밀리지 않으려 그를 노려보는 이든을 향해 발터가 씩 웃었다.
“힘으로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이든이 입술을 비틀며 마주 웃었다.
“검은 힘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란다. 애송아.”
채쟁!
칼날이 옆으로 비켜나가더니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젠장. 어느 쪽이지?
흙바람을 일으키며 도망간 탓에 방향을 놓쳐 버렸다. 고개를 휙, 돌려 그녀를 찾는 발터를 향해 이든이 낄낄거리며 내뱉었다.
“무식과 힘이 비례한다는 소리는 딱 너를 보고 하는 말일 거야.”
팔랑. 팔랑.
노란 산수유 이파리가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쪽으로 발터가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나무에 숨어 있다가 아래로 점프한 이든의 커다란 칼이 땅에 깊숙이 꽂혔다. 빽빽한 토질에 검 손잡이 끝까지 들어가도록 세게 메다꽂았을 정도면 회심의 일격이라는 소리였다.
“이런. 이런. 칼 부러진 거 아닌가? 누가 그러던데. 무식과 힘이 비례한다고. 아까 혹시 자기소개 한 거냐?”
“제기랄….”
이든은 이죽거리는 발터를 보며 눈을 굴렸다. 땅에 깊숙이 박힌 검을 빼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든은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발터의 손목을 발로 강하게 걷어찼다.
“안 그래도 손목이 뻐근하다 싶었는데, 안마라도 해 주려고?”
“눈물이나 닦고 말하시지.”
“살려 달라고 애원이나 하지 마라.”
그를 비웃는 이든을 향해 발터가 사정없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땅바닥을 구르는 그녀의 옆으로 나뭇잎이 엉망진창으로 날았다. 육중한 검이 날아다닐 때마다 회오리처럼 흙바람이 일었다.
휙! 휙! 휘익!
이든은 굴러다니며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발터의 칼질에 놀라 오들오들 떨고 있는 다람쥐를 재빨리 손에 낚아챘다.
“하아, 하아, 이제야 좀 몸이 풀렸나 봐…?”
이든이 바닥에 손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흙과 나뭇잎이 온몸에 붙어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도토리를 움켜쥔 다람쥐를 손에서 살며시 풀어주고 난 후, 이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