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몇 번이나 부딪히고 빨려 연해진 입술이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거칠어진 호흡이 섞였다. 서로의 타액이 섞였다. 질척한 키스가 끊일 줄 모르고 이어졌다. 숨구멍을 틀어막을 기세로 몰아붙이던 처음의 격렬한 입맞춤도 미칠 것 같았지만, 섹스를 하면서 서로를 느끼는 농밀한 키스는 온몸을 절절 끓게 만들었다.
“하아…. 흐응….”
혜미는 뜨끈한 숨을 내뱉으며 그저 그의 혀가 움직이는 대로 이끌렸다. 쾌감이 넘치는 눈동자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을 감았다. 아니. 그녀를 간절히 원하는 그의 열망 어린 시선을 마주 볼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게 맞았다.
쭈웁, 하고 아랫입술을 진하게 물고 떨어진 남자가 허리를 쳐 대며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순식간에 붉은 흔적이 열꽃처럼 피었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흣!’
대못으로 망치질하듯 엉망진창으로 강하게 쑤셔지는 혜미의 아랫도리에서 퍽, 찔걱, 퍽, 거리는 찐득한 소음이 반복되었다. 동시에 질척한 애액이 그녀의 외음부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혜미는 완벽하게 젖어 든 상태로 그의 몸 아래에 깔려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몸은 태양열에 달아오른 바위 같았다. 커다란 돌덩이에 깔리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애액을 뒤집어쓴 남자의 페니스가 끊임없이 그녀의 내벽을 쑤셔 박았다. 엉덩이를 물리기가 무섭게 다시금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깊숙이 몸속을 비집는다.
“아흑! 으응! 흣! 으흐윽!”
이를 악물려고 해도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두려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저승사자인지 인큐버스인지 모를 남자와 몸을 섞고 있는 이 상황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와의 섹스에 뜨겁게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몸 상태였다.
어떻게 이 정도로 고통이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고통은커녕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짜릿한 쾌감에 온몸이 절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의 페니스가 긁고, 쑤시고 지나가는 모든 부분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몸은 더욱 강하게 그를 원하고 있었지만 처음 느끼는 생소한 흥분에 혜미는 어쩔 줄을 몰랐다.
“흐으…!”
가느다란 허리가 침대 위로 번쩍 들려 저절로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내벽이 남자의 성기를 움켜쥐듯 꽈악 조였다.
‘나도 널 원해, 이든.’
뜨겁게 느끼는 그녀를 깨달은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습한 열기를 담은 손이 가슴을 움켜쥔 것 것뿐인데 발가락까지 움찔거리며 몸이 뒤틀리는 이유는 뭘까.
혜미의 질벽이 다시금 경련하듯 그를 조이자, 남자가 낮은 신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예민하게 바짝 곤두선 젖꼭지를 빨아 삼키는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더욱 뜨겁게… 너를 가지고 싶다.’
지금도 뜨거워. 지금도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 죽을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겨우 입술을 열려고 하면 그의 성기가 강하게 내벽을 쑤시는 바람에 짤막한 신음만이 입술 새를 비집을 뿐이었다.
“하윽… 아아…! 흐응!”
겨드랑이와 갈비뼈, 아랫배와 배꼽까지. 굳은살이 엉망진창으로 박힌 투박한 남자의 손이 그녀의 피부를 샅샅이 더듬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전부 반응하는 느낌이다.
“하지, 흣, 마…. 거기…. 하으응!”
남자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클리토리스를 매만지자 견딜 수가 없었다. 혜미가 침대 시트를 그러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든, 이든…. 아아…. 이든…!’
그녀의 머릿속을 꽝꽝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입 안이 바싹 말라 혀로 입술을 축이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혀를 뒤섞어 온다.
퍽! 스륵…. 퍽! 퍽퍽!
매트리스를 척척하게 적실 정도로 흘러내린 애액이, 역시나 선액으로 엉망진창이 된 남자의 성기를 모조리 감싸며 달라붙었다. 마찰이 계속되자 끈적거리는 액이 엉망으로 뒤섞이며 크림처럼 하얀 거품을 만들어 냈다.
찌걱! 푹, 찌걱!
좁은 내벽에 길을 내며 쑤셔 박혔다가 질벽을 긁으며 빠져나오는 왕복 운동이 끝을 모르게 이어졌다. 땀으로 뒤섞인 두 육체에서 뜨끈거리며 열이 났다. 그녀의 등에 깔린 침대 시트는 어느새 끝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다. 남자의 강인한 어깨에 걸린 두 다리가 공중에서 하염없이 흔들렸다.
“흐윽…! 으응…! 흐으응…!”
눈을 꽉 감은 혜미의 눈가로 뜨거운 물줄기가 가느다랗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 지독한 쾌감을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몸은 더욱 큰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절정을 간절히 바라는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을 떠, 이든. 제발…! 제발.’
아득한 저편에서 열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완전히 죽는 걸까. 쾌감이 지독해질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혜미는 저도 모르게 땀에 젖은 남자의 등을 더듬듯 껴안았다.
“돌아와. 제발…!”
지금 그녀의 몸 위에서 가슴을 틀어쥐고 허리를 격하게 쳐 대면서 거칠게 신음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쳐졌다. 머릿속이 완전히 시커멓게 암전된 순간이었다.
“허억…!”
순간 혜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식은땀이 툭, 툭, 떨어졌다.
“이든.”
나체의 남자가 움직임을 딱 멈춘 채, 그녀의 위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깨어났구나. 드디어.”
어둑어둑한 공간, 은밀한 달빛이 작은 창을 통해 비켜 들어와 남자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비추었다.
“하아….”
혜미는 그녀의 몸 안을 꽉 채우고 있는 남자의 성기를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역시나 벌거벗은 남자와 한 몸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정오의 태양 대신 은밀한 달빛을 비추고 있는 작은 창 너머로 이름 모를 새가 구슬피 울었다.
튤립 무늬 벽지는 오간 데 없었다. 주변은 울퉁불퉁하게 네모로 잘린 돌로 쌓아 만든 벽이었다. 페인트칠이 희미하게 벗겨진 그녀의 방문 대신 아치형으로 된 나무문이 보였다.
문에는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고, 다리가 세 개뿐인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희미하게 타오르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 옆에 키가 짧아진 채 불이 꺼져 바닥에 나뒹구는 초가 수북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혜미가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해, 이든.”
쿵. 쿵. 그녀와 마주 닿은 가슴에서 강한 심장 박동이 울려 퍼졌다.
“…발터.”
마침내 이름이 불린 남자의 얼굴이 더욱 격하게 일그러졌다. 짙은 눈썹 아래, 부들부들 떨며 그녀를 응시하는 어두운 갈색 눈동자는 이제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정도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혜미는 제 입으로 말을 뱉고도 당황했다. 단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는 이름, 단 한 번도 뱉어 본 적이 없는 언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이든.”
긴장과 안도. 기쁨과 슬픔. 후회와 기대. 온갖 감정이 뒤섞여 지나가는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혜미가 당황해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아, 아…!”
그의 단단한 목에 혜미의 팔이 강하게 휘감겼다. 영혼이 돌아온 육체가 깨어나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끌어안긴 발터가 터지는 열망을 감당할 수 없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이게 아닌데. 혜미가 황급히 입을 뗐을 때였다.
“저, 저기요…. 죄, 죄송…. 흡….”
뒷말이 남자의 입술 새로 먹혔다. 발터는 그를 끌어안은 혜미에게 거칠게 파고들며 입술을 헤집었다. 목마른 짐승이 갈급하게 샘을 들이키듯 게걸스레 그녀의 타액을 빨아 마셨다.
“하아…. 흣…!”
그녀의 육체가 격렬하게 반응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빨리 뛰었다. 동시에 혜미의 머릿속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열망이 가득 차올랐다.
그를 지금 당장 가지고 싶어.
이 남자는 내 것이다.
단 한 번도 이성에게 느껴 본 적이 없는 기분. 마치 온몸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하아…. 아아….”
죽을 것처럼 목이 말랐다. 미칠 노릇이었다. 혜미는 짐승처럼 키스하는 남자에게 격렬히 화답하며 고무나무 침상 위를 뒹굴었다. 날카로운 송곳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 것같이 단단한 그의 육체를 손으로 연신 더듬자, 남자가 꽉 쉬어 뒤틀린 목소리를 냈다.
“이든…. 가만히 있어, 흣…!”
그녀를 짓누르며 다시금 허리를 털어 대려는 남자를 저지하며 혜미가 몸을 빙글 돌렸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두 육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힘이었다.
“아, 이… 이게 아닌데….”
바위 같은 남자를 양 무릎 사이에 끼운 채, 혜미가 어쩔 줄을 몰라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본능적으로 또다시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피가 몰린 곳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욱신거리는 그녀의 비부가 당장 그의 성기를 집어삼키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죄송해요…. 저, 정말 죄송합니다…. 아아…!”
자신의 몸에서 튕겨져 나와 우뚝 선 성기를 손으로 붙잡았다. 핏줄이 불거져 강하게 박동하는 단단한 살덩이를 처음 만지는데 머리와는 달리 거부감이 들지도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넣을게요. 미, 미안해요…. 흐윽…!”
혜미는 거대한 페니스를 움씰거리는 제 비부에 맞추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뜨거운 속살이 단번에 갈라지며 굵은 살덩이를 환영하듯 꽉 감싸며 달라붙었다.
“아아, 이든…! 흐읏…. 제기랄…!”
발터가 굳은살이 박인 커다랗고 두꺼운 손으로 그녀의 유방을 터뜨릴 듯 움켜쥐며 거칠게 신음했다. 강인한 목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단번에 먹히는 아찔한 기분에 단단하게 곧추선 성기가 그녀의 내벽에서 터질 듯 부풀어 올라 꿈틀거렸다. 삽입과 동시에 찾아온 아찔한 절정감에 혜미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더 원해. 더.
또다시 그녀의 하체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응! 으응!”
턱! 턱!
발터의 몸 위에서 그녀가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엉덩이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탄력적인 허벅지 근육에 피가 몰려 단단했다. 발터는 제 몸 위에 올라타 격렬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욕망에 절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신음했다.
“하, 흣…! 아아…!”
새하얀 크림에 엉망진창이 된 것 같은 발터의 거대한 성기가 그녀의 몸 안으로 쑥 삼켜질 때마다, 살갗이 엉망으로 부딪치며 턱, 턱, 젖은 소리를 냈다.
“좋, 좋아요?”
혜미가 그를 내려다보며 허리를 깊숙하게 박고 성기를 삼킨 채 엉덩이를 흔들었다. 모두 그녀의 몸이 저절로 움직인 탓이었다.
“흣…! 내 아래에서 먹히니까 좋으냐고…. 흐응…!”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혜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쾌감에 젖어 들어간 그녀의 눈가는 눈물이 맺힌 채 촉촉이 젖어 발그레했다. 발터가 꼿꼿이 선 유두를 달고 흔들리는 그녀의 유방을 뜨거운 손으로 움켜쥐듯 턱 붙잡았다.
“그래…. 나도 널… 통째로 먹어 버리고 싶다.”
벌게진 얼굴로 인상을 쓰며 신음하는 발터의 모습에 혜미의 내부에서 거친 욕망이 폭발했다. 혜미는 핏줄이 돋아난 그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꽉 박고 빨았다. 살갗을 빨아 맛보자 익숙한 체향이 혀끝에 휘감겼다. 나야말로 당신을 더 맛보고 싶어. 씹어 뜯고 싶어.
“아, 아흣!”
혜미의 입술에서 날카로운 신음이 터졌다. 발터가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한 후, 엄청난 힘으로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꾼 탓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혔지만 푹신한 털로 만든 양탄자 덕에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치겠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다, 이든.”
발터가 앉은 채로 그녀의 허벅지를 양손에 휘어 감고, 뜨겁게 풀어진 그녀의 질 속에 딱딱한 살덩이를 본격적으로 거칠게 쑤셔 박기 시작했다.
“아흑! 아! 하읏! 으응! 응! 하앙!”
번들거리는 쾌락의 산물을 두른 페니스에 핏줄이 툭툭 일어났다. 발터는 좁디좁은 그녀의 아래가 제 팔뚝만 한 성기를 삼켰다 뱉는 아찔한 광경을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붉은 속살이 유연하게 늘어나며 그의 살덩이에 딸려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했다. 질벽이 경련하듯 움찔거리며 그를 조이자 사정감에 성대가 낮게 울렸다.
“발터…. 흑! 아아, 발터…!”
발터는 흐느끼듯 소리 높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골반을 꽉 붙잡았다.
“말해, 이든. 흣! 뭘 원하지?”
무릎으로 바닥을 지탱하고 앉은 자세로 그녀의 하체를 들어 올린 채 퍽퍽 밀어치며 발터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가슴… 젖꼭지, 아흣…! 빠, 빨아…. 아아…. 죄, 죄송해요, 흐응!”
위아래로 흔들리는 유방을 제 손으로 더듬어 쥐고 흔드는 그녀를 보는 남자의 눈이 돌았다. 늘 욕망에 솔직했던 이든. 그는 그녀를 단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왜 사과를 하는 거야. 나도 그러고 싶어 한다는 걸, 알잖아.”
이든의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이 그의 얼굴을 짓누르던 감각이 떠오르자 발터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
발터가 그녀의 등을 끌어당기자 탄탄한 육체가 휙 딸려 왔다. 그와 마주 보고 앉은 상태로, 혜미가 그의 목에 양팔을 두른 채 허리를 유연하게 돌려 댔다.
“흣, 좋아…. 흐윽, 아아….”
그녀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혜미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음하자, 발터가 출렁이는 그녀의 맨가슴을 손에 틀어쥐었다. 유두와 유륜을 젖이 나올 정도로 뻑, 뻑, 소리 나게 빠는 그의 입술에서 허스키한 신음이 연신 흘렀다.
간질거려서 미칠 것 같던 젖꼭지가 강하게 빨리자 그제야 살 것만 같았다. 혜미가 그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비집고 몸을 뒤틀며 내벽을 강하게 조였다.
“흐… 읏! 제기랄, 이든…. 흐으…!”
“아! 아응!!! 흐으응!”
통나무 같은 그의 몸통을 양 허벅지로 강하게 휘어 감고 허리를 둥글게 돌리며 혜미가 아찔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 다, 그녀가 아는 감각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쾌감이었다.
푹 젖어 녹진하게 풀어진 질벽이 발터의 성기를 빠듯하게 조이자, 그가 그녀의 가슴에 이를 꽉 박았다. 쾌감은 고통의 크기와 비례했다.
“아앙! 아흐윽!”
발터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빼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이리 와.”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꽉 틀어쥐고 제게로 거칠게 마찰하듯 비벼 댔다. 배꼽 아래까지 한 줄로 이어진 무성한 그의 음모에 음핵이 자극되자 그녀가 허리를 뒤틀며 내벽을 더욱 아찔하게 조여 댔다.
“아아…. 미치겠… 흐응…!”
“내 위로 올라타라, 이든.”
발터는 그녀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발터의 등이 마룻바닥에 닿았다. 그녀와 몸을 겹쳐 안은 채 퍽, 하고 올려 치며 자궁 근처 성감대를 강하게 쑤셔 박았다.
“아앗!”
그녀의 엉덩이가 강하게 튕기며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금 그의 성기를 단번에 삼키며 내리박혔다.
“흐으응!!!”
몸속 깊숙한 곳에서 터지는 강렬한 쾌감에 혜미의 허리가 아찔하게 휘었다. 발터가 위로 올려 칠 때마다, 그녀 역시 수없이 부딪혀 붉어진 아랫도리를 아래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쾌감은 배가 되었다.
삐걱! 삐걱! 삐걱!
오크나무를 덧댄 바닥이 요란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살이 부딪치며 내는 젖은 소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핏줄이 불거져 솟은 커다란 성기에 마찰에 짙어진 크림색 애액이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아아, 흐윽! 아앙!!! 흐으응!”
“하! 이든…! 흣! 못 참겠어, 아아….”
사정에 가까워진 발터가 몸을 딱딱하게 경직시키며 엉망으로 긁힌 목소리를 마구 내뱉었다.
“네 안에 싸고 싶다, 이든. 다 쏟아 내고 싶어.”
“안 돼, 아직… 흑, 너무 좋아요, 조금만 더 해 주세… 하으읏!”
발터의 투박한 손가락이 애원하는 그녀의 입 안을 헤집었다. 혜미가 뾰족한 송곳니로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발터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거침없이 그녀의 혓바닥을 손으로 매만지며 끈끈한 타액을 제게 묻혔다.
“불가능해, 흣, 난 너무 오래 참았다.”
줄줄 흐르는 타액으로 젖은 그의 엄지가 그녀의 연갈색 음모를 헤집었다. 그러고는 피가 몰려 둥글게 부푼 음핵을 거칠게 짓누르듯 마찰하기 시작했다.
한계에 치달은 발터의 성기는 이미 귀두 끝에서 선액을 줄줄 흘려 대는 중이었다. 발터는 그녀 몸속의 성감대를 집중적으로 쑤시며 박아 올렸다. 뭉툭한 귀두가 푹, 푹, 살 속에 꽂히며 자극점을 아찔하게 때려 대자 혜미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무너져 매달렸다.
“아, 안, 돼, 싸, 싸지, 흑! 마, 끝, 아악! 끝내지, 으응! 마…! 아응! 으으응!!!”
“같이 해. 같이, 흣, 가자…. 이든…. 흣! 흐읏!”
뜨거운 숨을 씨근덕거리며 뱉어내는 발터는 거센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서 동시에 터지는 자극. 아랫배에서 쾌감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감각에 혜미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거칠게 흔들렸다. 폭포수가 한꺼번에 그녀의 몸을 덮치듯, 엄청난 쾌감이 몸 안에서 터져 나갔다.
“아응! 아아! 하으응! 하아아앙!!!”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혜미가 발터의 단단한 어깨를 쥐어짜듯 꼬집으며 살갗에 손톱을 박았다.
“흣, 아아, 으아아아!!!”
그녀를 끌어안고 발터가 짐승처럼 포효했다.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비부가 경련하며 그의 성기를 쥐어짜듯 강렬히 압박했다. 영혼이 돌아온 이든의 육체는 예전만큼이나, 아니 예전보다 더 성숙해져 있었다.
한없이 깊은 늪에 빠져들어 가는 기분. 그녀의 질 안에서 그의 페니스가 부풀어 올라 정액을 거칠게 뿜어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발터의 사정량은 엄청났다.
“아흣! 으으응!”
진한 수컷 냄새가 그녀의 코끝까지 닿아 올 정도였다. 절정의 여운에 몸을 가늘게 떠는 혜미를 끌어안고, 발터는 그가 싸지른 뜨거운 정액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녀의 비부에 몇 번이나 제 성기를 깊숙하게 짓쑤셨다.
“아…. 다시는 너를… 흣…. 잃지 않을 거야.”
혜미의 젖은 눈매를 핥으며 또다시 섹스를 시작하는 그의 목소리는 뜨끈한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저기요…. 저는…. 저는… 흐읍…!”
간신히 정신을 차린 혜미가 뒤늦게 그를 밀어내기란 불가능했다. 발터는 집요했고 그의 체력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거친 정사는 셀 수 없이 계속되었다. 제발 끝내지 말아 달라고 한 처음의 애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작은 창 너머로 보름달이 희미해지고 푸른 새벽빛이 밝아 오는 걸 보며, 혜미는 실신하듯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엎드려 누운 자세로 발터의 성기를 받아 내는 채였다.
“…….”
발터가 잠든 그녀의 이마에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떼어 냈다. 투박한 손과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자면서도 눈썹 근처를 조금 씰룩였다. 여전한 버릇이었다.
“당신… 누구예요?”
교황은 영혼이 돌아왔을 때 기억을 잃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발터는 세르노티의 탑에 이든을 데려다 놓은 후, 그녀가 깨기만을 기다렸다.
사건이 있은 지 3년이 지난 오늘, 발터는 드디어 그녀의 영혼과 꿈에서 조우할 수 있었다. 비록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첫눈에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그와는 달리 이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제발… 사라져 주세요. 부… 부탁이니까….”
그녀는 과연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을 만큼이나 고통스러웠던 걸까. 죽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무리는 아니었다. 이든이었다면, 어쩌면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발터는 갑자기 심장이 죄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이든.”
숨을 쌔근쌔근 내뱉으며 잠든 그녀를 와락 끌어안자 이든이 눈도 뜨지 못한 채 간신히 입술을 뗐다.
“저기… 발터. 이제 더는… 못 해요….”
“하지 않아.”
그녀의 입술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발터는 가슴속이 뜨끈하게 젖어 들었다. 이든은 무사히 돌아왔고 지금 그와 체온을 나누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숨 막혀요….”
투정하듯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다시 곤한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녹초가 되어 잠들었던 혜미가 눈을 떴을 때는 또다시 밤. 그녀의 앞에는 발터와 같은 옷차림을 한 이들이 수십 명 줄지어 서 있었다.
제국력 178년.
크리스티앙 재위 3년째 겨울.
세르노티 영지, 매의 탑.
익숙하지 않은 돌 천장을 보며 혜미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머릿속에서 짧게 정리되었다.
1. 그녀는 어제 이상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차원 이동을 했다.
2. 그와 잤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 고개를 퍼뜩 숙여 제 몸부터 살폈다. 다행히도 나체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하얀 튜닉을 걸쳐 준 것이 누구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일어났어?”
혜미의 집에 불쑥 나타나 그녀와 섹스한 장본인, 발터가 낮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뒤에 줄지어 죽 늘어선 이들을 훑었다. 지난밤 일은 꿈이 아니었다. 믿기 어렵지만 그녀가 차원 이동을 한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다섯 명씩 줄지어 선 이들의 숫자는 스물이 조금 안 되었다. 성별과 외모를 불문하고 묘하게 분위기가 닮은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모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혜미를 향해 있었다.
“정말… 이든인 건가?”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 발터의 곁에 서 있는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잿빛이 섞인 금발 머리로 대단한 미남자였지만 눈빛이 차가웠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아마 이 그룹의 최고 연장자인 듯했다.
“눈으로 보고도 모르겠어?”
“발터, 난 이든에게 물었다.”
건조하게 받아치는 잿빛 머리 남자를 향해 발터가 한 발짝 다가서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확인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세드릭. 지금은 이든을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해.”
세드릭이라고 불린 잿빛 머리가 혜미에게 다시 서늘한 시선을 주었다.
“이든, 몸은 좀 어때.”
이든.
베네딕트도 발터도 모두 그녀를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죽 늘어서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서늘했다. 마치 실험대에 올라간 표본이 된 것 같은 기분.
여기서 왠지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혜미가 깔깔한 목을 다듬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아요. 컨디션도 괜찮고요.”
대답하는 순간, 스무 쌍의 눈길이 단박에 가늘어지며 그녀와 세드릭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알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내가 뭘 잘못했나?
순식간에 방 안에 흐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혜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그녀가 애매하게 웃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기억이 좀 나지 않는 것 빼고는… 다 좋아요.”
세드릭의 잿빛 눈썹이 미간에 모여 꿈틀거렸다. 딱 봐도 좋지 않은 신호였다.
“이게, 이든이라고?”
싸늘한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남자의 적대감이 몸으로 느껴지자 혜미는 당황했다.
“저, 저는… 그게 그러니까….”
“세드릭. 이든은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그녀 대신, 발터가 한 발 나섰을 때였다.
휙.
세드릭의 검이 소리 없이 공중을 갈랐다. 검을 뽑는 데부터 휘두르기까지, 모두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공격이었다.
“…세드릭!”
거칠게 소리치는 발터의 머리 위로 흰 거위의 깃털이 날았다. 이든의 자리에 있던 베개를 반으로 자른 장검이 스륵, 부드럽게 긁히는 소리를 내며 검집으로 사라졌다. 세드릭이 낮게 혼잣말을 중얼댔다.
“동일인이 맞긴 한가 보군.”
혜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제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말도 안 돼.
그녀의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침상 뒤, 높은 천장 바로 아래에 자그마하게 뚫린 창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그것도 눈으로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치 날아오르듯이.
인간의 몸이 용수철이 아닌 이상 제 키를 훌쩍 넘는 도약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잘하는 것은 원래부터 많지도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운동은 단연 젬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기억은 잃어도 수십 년간 단련된 몸의 반응은 잊어버릴 수가 없겠지.”
세드릭이 그녀에게 힐끗 눈길을 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발터가 잇새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그의 목에 굵은 핏대가 섰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용서하지 않아.”
이글거리는 암갈색 눈동자에 살기가 넘쳐흘렀다. 그는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다시 한번 이든의 앞에서 칼을 뽑아 든다면 규율에 따라 세르노티의 가주로서 너를 베겠다.”
“발터.”
“네가 그렇게나 부르짖던 우리의 존재 이유가 뭐지? 그따위는 개나 주라는 소리인가?”
“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세드릭이 복잡한 마음을 감춘 채,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처참하게 살해된 이든의 곁을 지킨 발터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뜬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그녀를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창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드릭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이든은 살아생전 그에게 존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최소한 그녀는 모든 기억을 잃은 게 분명했다.
“뭐지?”
“베, 베네딕트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낸 혜미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혜미는 주먹을 애써 쥐었다 폈다. 이제 봤더니 스무 명의 사람들은 모두 칼 하나씩을 옆에 차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뭐 하는 이들일까. 혜미는 긴장에 자꾸만 작아지는 목소리를 애써 크게 냈다.
“베네딕트를 만나게 해 주세요.”
그녀의 머릿속에서 은발의 미친 남자가 떠오른 것은 생존 본능이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녀의 휴대폰을 움직이던 그라면 그녀를 집으로 무사히 돌려보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가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세드릭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치 시험하듯 입을 뗐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는걸요.”
“어째서?”
혜미는 칼집에 닿은 그의 손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도, 도움이 필요할 땐, 그를 찾으러 오라고….”
“무슨 도움.”
또 뭐라고 했더라. 혜미는 그가 또다시 칼을 뽑기 전에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가… 가장 빛나는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어요.”
“…이래도 그녀가 이든이 아니라고 생각해? 베네딕트가 뜻하는 ‘그곳’이 어딘지 정말 모르는 거야?”
발터가 인상을 일그러뜨렸지만 세드릭은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었다.
“이든이라면 오히려 그걸 부정해야 정상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싫어한 녀석이라고.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세드릭이 발터를 향해 착잡한 회색 시선을 던졌다. 발트리가 그동안 숨겨 왔던 그녀의 과거를 처음 밝혔을 때, 이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황녀라는 사실을 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마 잊은 거야, 세드릭?”
발터가 그를 향해 한 발 다가선 후, 이를 갈 듯 내뱉었다. 황가의 운명을 따르는 대신, 평범한 삶을 선택했던 대가로 이든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발터.”
“적어도 위험에 대비할 수는 있었겠지!”
만약 그때, 이든이 세르노티의 기사들과 함께 차후를 대비했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발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세드릭을 낮게 다그쳤다.
“설마 겁이 나는 건가?”
“무슨 뜻이지?”
세드릭이 잿빛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그녀가 이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앞으로의 일이 겁나서냐고 묻는 것이다. 그녀를 위해 죽는 게 두려워서!”
“발터.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냐, 설마?”
세드릭이 발터를 향해 낮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분노한 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황가를 위해 존재하는 전설의 세르노티. 빛의 그림자이며 매의 수호자. 큰 누이가 황명에 따라 비밀리에 혼인한 사람이 베일에 싸여 있던 세르노티의 가주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던 때, 가장 흥분했던 것은 어린 세드릭이었다.
“내게 세르노티가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혜미의 귀에는 그들이 하는 소리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잿빛 머리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두려울 지경이었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와 대립한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칼을 뽑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어… 어떡하지?’
혜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만약 세드릭이 발터를 죽인다면, 그 뒷 차례가 그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 그녀가 매달려야 할 사람이 누군지는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적어도 발터는 그녀가 베네딕트를 만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했다.
“이든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새어 나간다면 그들은 분명히 다시 찾아온다. 위험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나의 의무이기도 해. 지금처럼 이든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더더욱 위험하겠지.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세드릭이 발터를 보며 상처 입은 눈을 빛냈다.
“우린 이미 동료를 잃은 전적이 있다. 이든이 살아났다 하더라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해.”
이든이 죽던 날 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든을 죽이러 급습한 암살자들 역시 그들만큼이나 전문가였다. 그날 밤. 12년 동안 평화롭던 세르노티에는 총 네 명의 사상자와 한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뼈아픈 희생이었다.
“까딱했다간 우린 전멸할 수도 있다, 발터.”
“세드릭.”
발터의 눈이 어두운 빛을 냈다. 그 역시 세드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지금도 생생했으니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황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충성하는 것은 세르노티의 존재 의무였다. 세드릭이 지금 한 말은 가문의 근본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냉정해라, 발터.”
“…닥쳐.”
발터는 이든과 관련한 일이라면 더 이상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 찰나의 긴장감이 흐르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을 때였다.
“저, 저기요!”
혜미가 높은 창문에서 저도 모르게 훌쩍 뛰어내리며 황급하게 소리를 쳤다.
“세드릭! 발터! 잠깐만요!”
자신이 또 한 번 날다람쥐처럼 공중을 날았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혜미는 눈앞에서 칼부림이 일어나는 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그녀는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세드릭. 제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정말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 이든.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고개 숙여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발터가 검으로 세드릭의 목을 바짝 겨눈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뱉었다. 다리가 달달 떨리도록 두려운 상황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노력이 보이지도 않는지, 발터는 당장이라도 그를 찌를 듯한 기세였다.
이래서 그녀의 아빠가 다혈질인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던 거였다. 혜미가 울기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애원하듯 입을 뗐다.
“발터, 세드릭에게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녀의 애원이 통했는지 발터가 이를 뿌득 갈며 입을 다물었다. 혜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드릭을 향해 간신히 말을 이었다.
“세드릭. 다, 당신이 누군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우리가 그렇게 친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기다란 눈으로 힐끗 그녀를 보는 세드릭의 시선에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다시 한번 칼이 날아올까 봐 딸꾹질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혜미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상황에서 적을 만들면 안 된다고 그녀의 본능이 강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적어도 제가 당신을 미워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세드릭의 회색 눈동자에 소리 없는 빛이 스쳤다.
“세드릭도… 아마도 그랬으니까, 아까 절 봐주신 거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