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2)
  • 집에 온 걸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엄마에게서 득달같이 메시지가 왔다. 혹시 집 안에 감시 카메라 같은 걸 감춰 둔 게 아닐까. 혜미는 괜히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천장을 눈으로 슥 훑었다.

    꼬르륵.

    의도치 않은 긴 산책 덕에, 아침부터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배 속이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 어딘가의 누군가가 말했던가. 오늘따라 깊이 사무치는 말이었다.

    열어 본 냉장고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두부와 참치를 넣어 만든 동그랑땡, 목이버섯이 들어간 잡채와 짭짤하고 달콤한 소불고기, 묵은 김치를 넣어 매콤하게 지진 꽁치조림까지. 혜미는 일단 먹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후루룩.

    부들부들하게 잘 불어 있는 미역이 입에 씹히는 맛이 고소했다. 혜미는 푹 익은 양지머리가 씹히는 미역국을 숟가락으로 크게 떠서 연신 입 안으로 퍼 넣었다. 배가 웬만큼 차니 우울했던 기분이 아주 조금 가셨다.

    ‘나라고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녀는 어릴 적부터 공부에 두각을 보이지도 않았고 예체능에 특기도 없었다. 길거리 캐스팅을 당할 만큼 뛰어난 외모도 아니었고 신체 조건이 특별하게 우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모두 잘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율로 따지자면 누가 봐도 특출난 사람들은 전체의 1% 정도이고, 그마저도 그녀와 같은 99%의 보통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특별함이 빛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솨아.

    혜미는 흡사 스스로가 철학자가 된 기분에 빠진 채 설거지를 시작했다. 접시를 뽀득뽀득 소리 나게 씻고 깨끗한 마른 행주로 닦아 찬장에 넣었다. 줄지어 깔끔하게 정리된 접시를 보니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30년이 다 되어 가는 오래된 집이 아직도 청결하게 유지되는 것은 엄마의 깔끔한 성격 덕분이었다.

    그녀는 잔소리가 조금 심하게 많긴 하지만 요리 솜씨는 끝내준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은 정답일 것이다. 집에는 아무리 등짝을 때려 대도 밥은 꼬박꼬박 차려 주는 엄마가 있었고, 엄마 등쌀에 눌려 기는 못 펴지만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빠도 있었다.

    혜미는 머릿속으로 긍정 회로를 작동시켰다. 무슨 일이 있건 꽁해 있지 않고 금방 풀리는 것은 그녀의 장점이었다. 가끔 욱하는 성격에 친구와 다툴 때도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녀 덕분에 싸움이 오래가는 일은 없었다.

    시험지 뒷장을 보지 못해 답안지 반을 백지로 냈을 때도 혜미는 그냥 웃고 말았다. 더 떨어질 성적도 없었거니와 시험을 망쳤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아 봤자 배만 고플 뿐이었다. 오늘 아침의 그녀처럼.

    엄마는 뒤끝이 없고 낙천적인 그녀의 성격을 태평하고 게으르다 욕했지만, 혜미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모두 그녀 같은 사람만 있으면 분쟁이나 갈등이 없어져 훨씬 평화로울 게 분명하다.

    ‘나는 나중에 가업을 물려받으면 되잖아?’

    혜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작은 목욕탕집 주인이었다. 오래된 목욕탕이었지만 다정한 아버지가 늘 카운터를 보고 있어 단골손님들은 편안함을 느꼈고, 꼼꼼한 엄마 덕분에 목욕탕 내부도 언제나 청결하게 수리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큰길 빌딩에 24시간 대형 스파가 들어왔을 때,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을 게 분명했다.

    ‘목욕탕에서 아르바이트 시켜 주면 잘할 자신 있는데 말이야. 세신 아르바이트도 있고, 청소도 있고, 하다못해 계란이라도 구울 수 있잖아.’

    혜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대손손 운영하는 식당도 있는데, 그것이 목욕탕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편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도 엄마는 늘 그녀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실 목욕탕 운영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주취 상태의 손님이 다른 손님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있었고, 절도나 분실 사건은 자주 일어나는 축에 속했다.

    몰래카메라나 성추행 사건 때문에 혜미의 아버지가 경찰서에 간 일도 손에 꼽았다. 눈이 침침한 손님이 비누 조각을 밟아 미끄러져 뒤통수가 찢어지는 바람에 응급실에 함께 출동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다사다난한 시간을 겪어 온 혜미의 부모는 그들의 딸이 웬만해선 다른 일을 하기를 바랐다. 하나뿐인 딸이 여러 가지 사회생활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혜미가 그 의중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아. 모르겠다.”

    다시 우울감이 몰려오려는 느낌에 혜미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냉장고를 열었다. 우울할 때는 역시 설탕 들어간 음식이 최고였다. 예쁜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을 담고 방으로 향하다가 다시 돌아와 한 조각을 더 담았다. 사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곁들이면 딱 어울릴 것 같지만, 가벼운 지갑 탓에 다음으로 기약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고, 한강 다리까지 갔다가 새로운 생을 다짐하며 돌아온 날이었다.

    뭔가 중요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꿀꺽.

    혜미가 커다래진 눈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하루를 생산적인 활동을 하며 보내기로 결심한 그녀가 선택한 일은 독서였다. 책은 자고로 마음의 양식이었고, 책 읽기는 집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휴식이었다.

    “초련 아씨….”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혜미는 잔뜩 숨을 죽이고 휴대폰 화면에 집중했다. 한창 두근거리는 전개였다. 드디어 합방을 하는 머슴 강쇠와 뒷방 아씨의 뜨거운 방앗간 신을 기대하자 손에 땀이 잡혔다.

    “강쇠야….”

    혜미가 손가락을 꾹 눌러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어릴 적부터 흠모해 온 아씨의 앞에서 마침내 옷을 훌렁 벗은 강쇠의 아름다운 자태가 휴대폰 액정을 꽉 채웠다. 구질구질한 머슴 옷으로도 훌륭함을 가릴 수 없었던 그의 육체는 벗으니 더 예술이었다.

    쪼개진 돌덩이를 붙여놓은 것 같은 양 허벅지에 울퉁불퉁한 복근.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검열 삭제를 비웃듯 벌떡 선 형태로 빛나는 광선 자지!

    꺄악. 최고다! 역시 남자는 뭐든 커야 제맛이지.

    눈앞의 광경을 본 그림 속 아씨는 충격에 얼어붙었고, 혜미는 베개를 팡 치며 환호성을 참았다.

    한강 물에 빠져 죽고 싶었던 반나절 전의 자신을 까맣게 잊은 채, 흐흐흐 웃으며 욕망에 어두워진 눈을 빛냈다.

    “아씨, 지가 씨방 회까닥 돌아 버리겠구만유. 여기… 좆대가리에서 뚝뚝 흘리는 거 보이시지라? 저 좀 만져 주셔라. 저 좀 살려 주셔라.”

    활자로 봐도 생생한 강쇠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한 글자 한 글자 핥듯이 집중해 읽었다.

    “나는… 하아…. 나는… 그런 것 하지 못해.”

    산처럼 쌓인 장작을 퍽퍽 쪼개는 강쇠를 몰래 지켜보며 흠모하던 뒷방 아씨. 달거리도 시작하지 않은 열셋 어린 나이에 50살 병든 홀아비에게 팔리듯 시집온 그녀는 결혼 일주일 만에 과부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시집올 당시, 역시나 나이가 어린 머슴이었던 강쇠는 이제 소도 때려잡는 건장한 사내로 자라났다.

    땀에 젖어 꿀렁거리는 널찍한 등짝을 보며 손수건을 물어뜯던 아씨의 청초한 눈가가 두려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안고 붉어졌다.

    다음 페이지. 빨리.

    “헉… 헉…. 아씨…. 속곳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디유…. 다리 쪼까 벌려 주셔유…. 지발유. 예에?”

    고개를 45도 각도로 모로 숙인 채 바들바들 떠는 가여운 초련 아씨. 그녀를 향해 강쇠가 빛나는 광선 자지를 꺼떡이며 온돌 바닥을 기어오는 장면이 이어졌다. 바깥에는 눈이 펄펄 날리고 있고,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도 곤히 잠든 겨울밤이었다.

    후후.

    예상대로의 전개라면 욕망을 이기지 못한 강쇠가 아씨를 벌렁 바닥에 눕힌 후, 푹 젖은 속곳에 얼굴을 처박고선 헉헉거릴 것이다.

    “네가 어떻게… 하윽…. 아앙, 그런 곳에 너 따위의 더러운 입을….”

    “죽여 주셔유…. 추릅. 추릅…. 아씨, 지는 시방 딱 죽어도 좋구만유…. 추르릅…. 아씨는 윗입도 고운데, 아랫입도 어찌 이리, 허억… 작고 어여쁘십니까…. 추릅!”

    “아, 안… 돼! 거기 빨지 마… 아아앙!”

    “입이 고만 떨어지질 않는구먼유, 아씨…. 아흑…. 춥…. 아씨, 보짓물이…. 감주보다 더, 달어서….”

    그럼 그렇지.

    이제껏 초야도 치르지 않은 순결한 초련 아씨는 이제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자극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 것이다. 그러고는 결국 강쇠가 휘두르는 방망이질에 굴복해 바위 같은 그의 몸에 깔려 큰 소리로 새된 신음을 터뜨릴 게 분명했다.

    아, 바로 이 맛이었다.

    줄거리가 빤한 이야기를 질리지도 않고 왜 계속 보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원래 잘 아는 맛이 제일 꿀맛인 법이라고 대답하리라.

    두근두근.

    다음 장을 기대하며 그녀가 맘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을 때였다.

    “즐거워 보이는군요.”

    작게 웃음기가 섞인 남자 목소리에 혜미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또렷하게 들려온 목소리의 행방을 쫒아 천천히 방 안으로 시선을 굴렸지만 당연하게도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바깥 놀이터에서 누군가 떠들고 있는 걸까. 너무 집중해서 잘못 들었나.

    혜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박았다. 이제 꽉 닫힌 음문을 입으로 충분히 열었으니 강쇠와 초련 아씨가 본격적인 떡 방앗간을 차릴 차례였다. 암. 삽입 전엔 무조건 입으로 하는 거지. 실전 경험은 없지만 이론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녀였다.

    “그렇게나 재미가 있습니까?”

    혜미의 굳은 손에서 휴대폰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커다래진 눈만 깜빡였다. 심장이 쿵쿵 불안한 속도로 빠르게 뛰었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녀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이 방 안에 누군가 있다는 소리였다.

    강도인가? 빈집에 침입한 변태인가?

    옷장, 침대 밑, 작은방에서 이어지는 베란다 등, 강도가 숨어 있을 공간은 많았다.

    온갖 끔찍한 상상이 이어지는 와중,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방해를 해서 미안하군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혜미가 이제까지 보던 총천연색 페이지 대신,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얼굴이 스크린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뜨였다. 긴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가 얼어붙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 놀라지 않는군요. 다행입니다.”

    혜미는 눈을 꽉 감고 고개를 한 번 세게 털어 낸 후, 휴대폰의 전원을 길게 눌러 껐다. 기계를 이불 위로 휙, 던지고 난 다음, 마음속으로 천천히 열을 셌다.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면 이대로 잠들어 버려도 상관이 없었고, 헛것을 본 거라면 차가운 물로 샤워하며 정신을 차리면 될 것 같았다.

    뭐든 강도보다는 나았다.

    셋.

    둘.

    하나.

    눈을 떴을 때 혜미의 앞에는 휴대폰 속에서 튀어나온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생각은 끝났습니까?”

    짝.

    혜미는 양 손바닥으로 제 뺨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두드렸다.

    “저런. 아프겠군요. 이대로라면 자국이 남겠습니다.”

    은발의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자 스르륵,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쏟아지며 햇빛을 반사했다.

    내가 더위를 먹었나? 아니면 정말로 꿈을 꾸는 건가? 꿈이라고 하기엔 방금 전 손바닥으로 세게 때린 뺨이 심하게 얼얼했다.

    혜미는 자신을 향해 기다란 손을 뻗어 오는 은발남을 보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누구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그녀의 성대를 간신히 비집었다.

    “그대를 이 세계로 보낸 사람이라고 해 두죠. 찾는 데 꽤나 오래 걸렸습니다.”

    은발남이 손을 거두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남자여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이제껏 혜미가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의상을 제작하는 사람이라면 좀 다를까. 금실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백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그녀를 보며 다시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은 그것뿐?”

    근처에 정신 병원이 있었던가? 혜미는 혹시 머리가 많이 아픈 분이 길을 잘못 든 건 아닌지, 희한한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경찰에 신고하는 게 답인 것 같았다. 아까 휴대폰에 떠오른 남자의 얼굴까지는 설명을 하기 힘이 들었지만, 놀라서 착시 현상을 본 것이라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휴대폰을 집으려 혜미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네모난 기계가 휙, 하고 공중으로 날아가더니 사뿐히 책상 위에 착지했다.

    휴대폰이 저절로 움직였어…!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그녀의 입이 소리 없이 떡 벌어졌다.

    “질문이 없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네? 어, 어디로요?”

    은발남이 말을 더듬는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저기요. 죄송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저… 죽었나요?”

    혜미는 사실 아까 그녀가 한강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은발의 미남자는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인 것이다.

    “설명은 충직한 그대의 부하에게 듣는 게 좋겠습니다.”

    “부하요? 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점점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저승사자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싸늘한 겨울바람 같은 숨결이 여린 뺨에 닿았다. 혜미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의 연한 하늘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도 깜짝할 수 없어 얼어붙었다.

    “내 이름은 베네딕트. 도움이 필요할 땐, 절 찾으러 오세요.”

    찬 눈송이 같은 감촉이 혜미의 뺨을 스쳤다.

    “가장 빛나는 곳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환한 빛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대를 찾게 된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드리죠.”

    부드럽게 갈린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졌다. 혜미는 그저 두 눈만 크게 뜬 채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재미있는 시간을 방해한 것에 대한 사과의 뜻입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동공을 찌르는 빛이 사라진 후에야 혜미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은발의 저승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흐트러진 침대 이불 위에는 그녀가 보던 웹툰이 띄워진 휴대폰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꿈이었구나.

    “…아. 그럼 그렇지.”

    그제야 긴장이 풀린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탁 터졌다. 혜미는 헝클어지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해 묶으며 그녀의 방 안을 확인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녀의 방.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썼던 방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 오면서 엄마가 고른 촌스러운 무늬의 분홍 벽지. 언제부터 그곳에 달려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사각형의 노란색 벽시계. 앉아서 공부한 적이 손에 꼽는 자그마한 책상과 방문 옆에 걸려 있는 전신 거울.

    “…….”

    고무줄에 머리카락을 돌려 끼우던 그녀의 시선이 거울에서 딱 멈추었다. 시커먼 후드가 달린 망토 같은 옷을 몸에 칭칭 감은 채, 거울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남자가 있었다.

    꿈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저승사자는 따로 있었다.

    “이든, 내가 보여?”

    시커먼 돌덩이같이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남자가 거울 속에서 그녀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보이는구나.”

    혜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을 부릅떴다. 바싹 말라 수분기가 없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져 바들바들 떨렸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자.”

    혜미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땀에 젖은 손으로 얇은 이불을 잡았다 펴기를 반복했다.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는 심장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너라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뒤이어진 충격적인 장면에 혜미는 그 상태로 얼어붙고 말았다. 시커먼 남자가 거울 속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평평해야 할 거울이 불룩하게 앞으로 늘어났다. 남자는 마치 투명한 벽지를 찢어발기듯, 그 속에서 서서히 몸을 빼내고 있었던 것이다.

    휴대폰 속에서 미소 짓던 은발남은 양반이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생생한 현장에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아…. 안 돼.”

    앉은 자세로 포박을 하듯, 혜미가 뒤로 기었다. 침대 머리 판에 등이 닿아 더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오래 기다렸다, 이든. 난 네가 깨어날 줄 알고 있었어.”

    “오, 오지 마….”

    혜미는 겁에 질린 눈으로 중얼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는 이제 거울 속에서 완전히 몸을 빼낸 후, 침대에 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아…. 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파트 3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죽을까? 운 좋으면 다리 한쪽이 부러지는 걸로 끝날지도 몰랐다. 뭐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코앞에 느낀 혜미는 일어나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마치 몸을 밧줄로 칭칭 묶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흣…! 으으…!

    눈을 꽉 감은 혜미의 입에서 희미한 비명이 샜다. 눈을 질끈 감고 있어도 느낄 수가 있었다. 시커먼 놈이 지금 거울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흐으…. 흐으윽….”

    이가 위아래로 딱딱 부딪치며 저절로 떨렸다. 혜미는 죽을힘을 다해 눈을 살며시 떴다. 시커먼 남자는 그녀의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호, 혹시 누구세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글거리는 진한 갈색 눈동자에 불길이 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은발의 남자를 볼 때와는 확실히 다른 공포가 밀려들었다. 가슴이 일렁이며 뜨거워지고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베네딕트라고 불렸던 이가 준다는 선물이 바로 이거였을까.

    “귀, 귀신이에요? 유령? 아님, 저승사자?”

    그의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혜미가 되는대로 질문을 내뱉었다.

    “제가 미친 건 아닌 것 같거든요…. 근데… 이게 대체….”

    내가 죽은 건지.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뭔지.

    “그래. 넌 미치지 않았어.”

    남자가 순식간에 그녀의 침대 머리맡까지 다가왔다. 커다란 몸과 어울리지 않게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너처럼 강한 자는 미칠 수가 없으니까.”

    혜미는 급격한 공포감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끙끙거리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설명은 나중에.”

    얇은 이불이 그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날아갔다. 혜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크게 뜨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커다란 손이 목을 틀어쥐는 상상을 하며 덜덜 떠는 혜미의 앞에서 그가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널 너무 오래 기다렸어.”

    후드를 벗고 얼굴을 완전히 드러낸 남자가 그녀를 보며 거친 숨을 내뿜었다. 남자는 베네딕트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못해 뇌리에 콱 박히는 이목구비. 상상 속에서만 떠올렸던 시커먼 늑대가 의인화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남성적 외모에 놀랄 새도 없었다.

    “…뭐, 지금 뭐 하는….”

    커다란 몸을 칭칭 감았던 망토 같은 옷이 소리도 없이 풀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자. 네 영혼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당황한 혜미의 귀에 그의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 어….”

    그의 몸집은 옷에 가려져 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났다. 여기저기 찢기고 베여 아문 상처투성이인 커다란 구릿빛 몸이 창으로 비치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의 완전한 나체.

    직각으로 떡 벌어진 어깨 위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치솟았고 흉통 자체가 넓고 두꺼운 상박은 앞뒤로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날카로운 칼로 이리저리 조각해 놓은 것처럼 갈라진 복근. 마치 커다란 돌을 깨부수어서 붙여넣은 것 같은 양 허벅지. 그 사이에서 배꼽을 훌쩍 가리며 치솟아 발기한 남자의 성기는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그녀의 팔뚝만 했다. 핏줄이 툭툭 불거져 흉기로까지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물건을 처음 본 느낌은.

    “하아….”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녀의 작은 침대에 기어 올라오는 남자를 보며 혜미를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뭐 하는….”

    싱글 매트리스가 푹, 꺼지고 그 아래를 받친 철제 프레임이 삐걱거렸다. 남자가 그녀를 제 무릎 사이에 가두었지만, 혜미는 침대 위에서 앉은 채로 밧줄로 꽁꽁 묶이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나와 함께 가자.”

    “사, 살려 주세요.”

    그녀의 입 밖으로 본능적인 문장이 튀어나왔다. 혜미가 애원하듯 속삭이자 남자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날 봐, 이든.”

    구겨진 그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에 있었다. 짙은 갈색 눈썹 아래 가로로 긴 눈매, 미간이 툭 불거져 고집스럽게 보이는 콧등과 색이 뚜렷한 입술은 한눈에 봐도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중 가장 날카롭게 뇌리를 파고드는 것은 아몬드 같은 눈매 안에서 무섭게 이글거리는 짙은 갈색 눈동자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제발… 사라져 주세요. 부… 부탁이니까….”

    혜미는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두 손을 모아 빌 수가 없는 게 억울했다.

    “살려 주시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게요. 뭐든 다 할게요.”

    그녀는 진심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엄마와 다투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져서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았다.

    “내게서 도망치려 하지 마.”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끓는 것 같은 목소리를 뱉어 냈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 뜨거운 눈이었다. 이 눈을 한 번 보고 평생 그를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혜미는 그가 대체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제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나요? 나한테 왜 이래요?

    “널 잃었던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남자가 허스키한 음성을 내뱉으며 그녀의 뒤통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혜미는 눈을 커다랗게 홉뜬 채, 다가오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습한 열기가 그녀의 뺨에 닿아 왔다.

    “하… 아….”

    뜨겁다.

    결박하듯 그녀의 목덜미를 꽉 쥐고 있는 커다란 손의 체온도. 그녀의 얼굴에 닿는 남자의 숨결도. 모두가 델 듯이 뜨거웠다.

    이게 꿈일 리가 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급격하게 뛰며 그녀의 온몸으로 뜨거운 피를 내보냈다. 남자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혜미의 시선을 꽉 붙잡았다.

    “저한테… 왜… 왜 이러세요….”

    결국 눈물을 눈에 달고 혜미가 애원하듯 그에게 속삭였다. 남자가 그녀를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늦게 가서 미안하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그에게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무섭도록 강렬한 두 눈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향한 그의 시선에 갈급한 욕망과 애끓는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널 그 꼴로 만들고, 고통스럽게 해서, 미안하다. 이든.”

    남자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동시에 그녀를 향해 내뿜는 그의 숨결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감히… 네 곁에 있기를 바라는 날….”

    도저히 사람 몸의 일부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딱딱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짓누르는 순간, 혜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용서해라.”

    그가 그녀와 섹스할 것이라는 사실을.

    “흑…!”

    남자의 손이 잠옷 대용으로 걸쳐 입은 그녀의 기다란 티셔츠를 붙잡았다. 혜미의 옷이 가로로 부욱 찢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치 종이를 찢어발기듯 섬유를 작살 내는 그의 엄청난 힘에 놀랄 새도 없었다.

    “저, 저기…. 흣…!”

    “제발 내게 돌아와 줘, 이든.”

    그녀의 얼굴에 조심스레 닿아 오는 그의 커다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시선에 고통이 뚝뚝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대체 무엇이 이 커다란 남자를 이토록 절실하게 만들었을까.

    그녀의 온몸을 가득 채운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자리에 희미한 안타까움과 의문이 들어찼다. 젖은 목소리로 돌아오라 애원하는 이 남자는 지금 진심이었다.

    “이든, 제발 깨어나. 깨어나서 나를 벌해라.”

    남자가 타들어 가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뜨겁게 속삭였다. 고집스러울 만큼 높다란 코가 혜미의 콧등을 스치며 뺨을 짓누르는가 싶었다.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흣…!”

    혜미의 입술이 그에게 단번에 먹혀들었다. 마주 닿자마자 강하게 쭈욱 빨려 들어가는 느낌. 갈구하는 강한 눈동자를 차마 마주하기가 두려워 그녀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찔했다. 남자는 맹수였다. 마치 사정거리 안의 사냥감을 공격하듯 실수가 없었다.

    두툼하고 뜨거운 혀가 혜미의 자그마한 입 안을 거침없이 비집었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에러 난 컴퓨터처럼 올 스톱이었다.

    “흐읍…. 으읍…!”

    본능적으로 뒤로 숨어드는 그녀의 혀를 정확하게 찾아낸 남자가 제 것을 강하게 얽고 빨았다. 두 입술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있었다. 혜미가 고개를 빼내려 하면 할수록 그에게 점점 더 깊숙하게 잡아 먹혔다.

    “흐으…. 으….”

    혀뿌리를 뽑아낼 기세로 그녀를 격렬히 빨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입을 떼나 싶었다. 멈춘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던 것 오산이었다. 그녀를 데울 듯 뜨겁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붉어지며 가늘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대체 왜…?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지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하아… 하….”

    남자가 넓적한 혓바닥을 그녀의 혀에 마주 닿게 한 후, 개처럼 비벼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돌기가 부딪히는 생생한 느낌에, 마치 찜통에 들어간 것처럼 혜미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키스가 이토록 애절하고 진득한 무엇이었던가. 정수리가 아찔하며 머리에 오싹오싹 쥐가 났다.

    “하아…. 하아….”

    저절로 다물리는 그녀의 입술을 남자가 다시 비집었다. 입천장을 쓸어내리고 혀를 강하게 휘어 감자 양 어금니 아래에서 타액이 절로 샘솟았다. 그가 타액을 죽죽 빨며 손으로 그녀의 귓불을 뭉근히 어루만졌다.

    남자는 그녀의 몸을 열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혜미의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육체적 반응이었다. 거기에는 그녀를 간절히 원하며 괴롭게 일그러지는 깊은 눈동자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으흑…!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혜미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신음했다. 간신히 혀를 놓아 준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로 이동했다. 뒤섞인 타액이 입술 새로 기다랗게 흘러내렸다.

    “하아…. 이든….”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뜻 모를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정작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것은 그녀였다. 다리 사이가 흘러내린 애액으로 젖어 축축했다. 짐승처럼 게걸스러웠던 입맞춤의 부작용이었다. 난생처음 키스하며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도 미칠 지경인데, 마치 연인을 대하듯 절절하게 그녀를 보는 눈빛과 절절한 목소리에 머릿속마저 엉망이다.

    “흑!”

    단단한 통나무 같은 그의 팔뚝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그리고 몸이 번쩍 들리더니 침대에 똑바로 뉘어졌다. 남자는 성인 여자인 그녀를 마치 솜으로 만든 인형 다루듯 가볍게 다루고 있었다.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

    남자의 양손이 무릎에 닿더니 그녀의 두 다리가 휙 가로로 벌어졌다. 말도 안 돼. 혜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미치도록 부드럽고 뜨거운 무언가가 그녀의 음부에 닿았다. 놀란 혜미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소용은 없었다.

    “으응…!”

    그녀의 음부에 얼굴을 처박은 남자의 혓바닥이 그녀의 음핵을 돌리며 핥았다. 부풀어 오른 내벽에서 뜨끈한 애액이 꿀렁 흘러내렸다. 성기에서 터지는 감각에 머릿속까지 짜릿해지는 느낌. 혜미는 자극을 참을 수 없어 시트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아아, 아흑… 으응…!”

    남자가 본격적으로 그녀의 음부를 빨았다. 소음순을 헤집고 들어온 입술이 쾌락의 핵을 간질이고, 줄줄 흘러나오는 애액을 핥았다. 가장 부드러운 점막끼리 부딪치며 선사하는 쾌감에 남자의 팔에 단단히 걸린 그녀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안 돼, 아… 아, 안… 흐응!”

    절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리가 마음대로 꿈틀거리며 뜨거운 몸속에 쾌락이 터져 나갔다. 남자가 그녀의 음부를 더욱 격렬하게 빨았다. 남자는 혜미가 울먹이는 신음을 터뜨리며 절정에 이르고 나서야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들었다. 번들거리는 애액으로 엉망이 된 얼굴색은 한층 짙어져 있었다.

    “못 참겠어, 이든.”

    괴로운 얼굴로 남자가 뜨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절정의 여운에 몸을 가늘게 떠는 혜미의 다리 사이를 남자의 무릎이 비집고 들었다. 두툼한 불기둥 같은 성기가 그녀의 좁은 음부에 닿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헐떡이던 혜미가 돌덩이 같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저, 저기 잠시만, 흐읏…!”

    타액과 애액으로 흠뻑 젖은 질구에 두툼한 귀두가 눌리듯 문질러졌다.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몰린 것 같은 기분. 자극에 민감해진 혜미의 내벽이 저절로 움찔거리며 애액을 뱉어 냈다.

    설마. 하는 건 아니죠?

    “참을 수가 없어. 난 널 너무 오래 기다렸다.”

    남자가 혜미의 마음속 외침에 대답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뺨을 감싸는 손에 땀이 진득하다.

    “이, 이봐요…. 저기요!”

    아무리 젖어 있다고 한들, 그녀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의 성기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설마 그 팔뚝만 한 걸 내 안에 다 쑤셔 박지는 않겠지.

    “잠깐만…. 흐윽…!”

    놀라 벌어지는 그녀의 입을 제 입술로 다시금 틀어막으며, 남자는 혜미의 희망을 단번에 배신했다.

    인간의 몸에는 한계가 없었다.

    “으음…! 으으응…!”

    껍질을 까뒤집으며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남자의 뭉툭한 귀두가 그녀의 질구를 짓쑤시며 안으로 묵직하게 진입했다. 연한 살갗끼리 부딪치며 안으로 말려드는 느낌보다 쑤욱, 하고 밀어붙이는 압력이 더욱 강렬했다. 커다란 방망이를 몸에 쑤셔 넣으면 이런 기분일까.

    “흐윽!!!”

    혜미는 눈을 꽉 감은 채 그의 혀에 잠식당한 입술로 크게 신음했다. 삽입의 시간이 영원처럼 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좁은 내벽을 쫘악 벌리며 질 안으로 들이차는 물건이 대체 어디까지 그녀의 몸을 뚫을 셈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아아…!”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몸이었다. 처음은 아프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이제껏 상상했던 고통과는 전혀 달랐다.

    날카로운 아픔이나 통각 대신 엄청난 압력만이 느껴졌다. 혜미의 음부는 마치 장화 신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진득한 갯벌처럼 남자의 성기를 더욱 깊숙한 내부로 빨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든의 영혼이 깃든 혜미의 육체에 베네딕트가 걸어 놓은 마법 때문이었지만, 기억을 잃은 그녀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아. 이든…!’

    욕망으로 쉬어 절절 끓는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혜미의 머릿속에 환청처럼 울렸다.

    ‘널 기다리는 지난 시간은 내게 시커먼 어둠이었어.’

    그의 뜨끈한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터뜨릴 듯 틀어쥐더니, 마침내 허리를 퍽, 하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완벽하게 삽입한 순간, 짐승 같은 남자의 신음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젠장… 흣!’

    “하으…. 하아…. 하아….”

    눈가에 눈물을 달고 거칠게 내뱉는 혜미의 숨결 역시 뜨거웠다. 거대한 성기가 뿌리 끝까지 완벽하게 다 들어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그녀의 아랫배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있었다.

    “저, 저기요…. 하아…. 그거 좀… 빼 주세요. 몸이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제발, 빼 주시면 안 될…. 하으응!”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한계까지 벌어져, 그의 성기를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그녀의 몸속을 더욱 깊이 쑤시고 싶다는 듯, 삽입한 채 허리를 위아래로 비벼 댔다. 단단한 성기가 예민하게 부푼 내벽을 이리저리 누르자 혜미는 그의 품 안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이든. 아아, 나의 이든.’

    “아흑…!”

    남자의 우뚝 선 물건 아래에서 흔들리던 고환이 그녀의 회음부에 짓눌렸다. 그의 성기 크기만큼 유연하게 벌어진 질구 그리고 그 안을 비집은 성기에서 박동하는 맥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말도 안 돼. 아아. 그녀의 내벽에 닿는 모든 부분이 못 견디게 기분 좋았다.

    ‘제발 깨어나.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나는… 아아,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든의 위에서 남자가 힘찬 왕복을 시작했다. 쑥, 빠져나갔다가 퍽, 하고 허리가 펄떡거릴 정도로 강하게 그녀의 몸을 비집었다.

    퍽! 스르륵… 퍽!

    “아, 아… 흑!”

    스륵. 퍽! …퍽! 퍽퍽퍼퍽!

    “아흐윽…. 흣! 으흑! 아아! 아! 아흥!!!”

    그녀의 몸 안을 뚫어 버릴 듯 격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섹스에는 일정한 규칙도, 주기도 없었다.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본능에만 충실한 추삽질을 받아들이는 혜미의 아랫도리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춥. 추릅. 춥. 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