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에서 온 신부-12화 (12/13)

12

“케이트,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과 클레이 말이에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진지하고도 약간은 침울한 어조였다. “그를 사랑하나요, 아닌가요? 지금 난 그것을 알고 싶어요.”

도대체가 오늘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온통 어리둥절한 일들투성이다. 클레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한다는 것은 케이트에게 상처만 줄뿐이고, 로리는 한 사람을 그렇게 가슴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여보세요? 로리? 괜찮으니 대답을 해봐요.”

“케이트, 도대체 왜, 내가 클레이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묻는 거죠? 어차피 그는 이제 당신의 사람이 될 거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를 사랑하고 안하고가 무슨 상관이에요? 난 당신들의 삶에서 떠나 있고, 또 가까이 하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당신을 사랑해요.”

케이트의 목소리는 지금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뜨거움을 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쩌면 그녀는 모든 것을 떠나서 단순히 아픔을 호소할 친구를 찾아서 전화한 건지도 모른다.

“알아요.”

“그게 당신에겐 아무 상관도, 느낌도 없다는 건가요?”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느낌이 없는 건 아녜요.”

“그럼 어떻게 클레이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어요?”

“내가 어떻게 했길래요?”

“그에게 이런 식으로 상처를 주느냐구요!”

“케이트, 난 지금 당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내가 고의로 클레이를 괴롭히려 했다거나 한 일은 없어요... 정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하겠어요. 그래요, 난 클레이를 사랑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 하지만 그는 결국 당신의 약혼자이고, 당신은 그를 나보다 먼저 알고, 또 사랑해 왔어요.”

케이트의 쓸쓸한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도대체 이게 뭐죠. 지금 무슨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요?”

“그건 아녜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 이상,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약혼자가 아니에요.” 케이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온 뒤부터 이미 그는 나의 약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케이트? 지금 무슨...”

“그래요. 사실 그 말을 당신에게 전해 주기 위해 전화한 거예요.”

“하지만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그러나 이제 이미 결론을 내려졌어요.”

“하지만 당신을 클레이를 사랑하고 있잖아요.”

“난 그를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랑해 왔어요. 그리고 나의 사랑은 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도 있어요. 내가 왜 지방의회 회원들에게 당신을 추천했겠어요. 난 당신만이 우리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는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적격자라고 그들에게 말했어요. 내가 일부러 할 일 없이 그런 소릴 했겠어요?”

“아녜요, 케이트. 당신도 내가 왜 거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리라 믿어요. 난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아요, 로리. 당신이 정말 그 정도밖엔 생각 못한다면 당신은 내게서, 아니, 클레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해요.”

“케이트, 미안해요. 하지만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요. 도대체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요. 난...”

“할 말이 있으면 나를 만나서 직접 얘기하도록 해요. 일단 난 지금 아빠에게 당신이 도서관에서 일하기로 했다고 말씀드려 놓았어요. 일은 2주 후부터 시작되니까 그전에 도착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겠죠, 로리?”

로리의 차가 긴 먼지를 일으키며 <서클 엘 랜치>를 향해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케이트의 전화를 받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고, 그 주 내내 그녀의 머릿속은 케이트가 한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젠 케이트가 더 이상 그의 약혼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로리는 클레이에게 먼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우선은 케이트에게서 자세한 얘기를 듣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로건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태양이 가을의 엷은 하늘을 더욱 환하게 물들이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긴장을 풀기 위해 뻣뻣해진 목과 어깨를 한 번씩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오늘 거의 하루 내내 차를 몰고 와 몹시 지쳐있었다.

루크 리버스가 그녀의 차 소리를 듣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깊은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돌아왔군요.”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 있나요?”

“곧 올 거예요. 케이트는 학교에서 보통 4시경이면 도착해요. 들어와서 커피나 한잔하면서 기다리시죠.”

“고마워요.”

루크는 그녀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이팅게일에서 도서관 일을 하게 됐다면서요.”

“네.” 그러나 그녀가 온 것은 결코 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좋아요.” 루크는 잔을 가져와 커피를 부었다. 그는 잔을 로리 앞에다 놓고는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고마워요, 루크.”

“아, 저기 케이트가 오고 있군요. 나중에 얘기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서 지금 말해 두는 거지만, 정말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나 자신을 위해서 당신께 감사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황급히 나가 버렸다.

잠시 후 케이트가 들어왔고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못 본 동생에게 하듯 로리를 힘껏 껴안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로리의 놀라움은 너무나 컸으나, 그런 그녀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트가 급히 말을 이었다. “아마 내 전화를 받고 혹시 미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거예요. 나도 사실 정신이 없었고 침착하게 전화로 당신에게 얘길 전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잔을 가져와 자신의 커피를 따라 부었다.

로리의 마음은 타는 듯했다. 이윽고 케이트의 대답이 꼭 필요한 질문이 로리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날 밤 당신의 전화를 내가 잘 이해하고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과 클레이는 이젠 약혼자 사이가 아니라고 내게 말했던 것 같은데...”

케이트의 푸른 눈동자는 그녀 자신의 고통을 감추기에는 너무나 크고 맑았다.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케이트는 로리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 잔을 잡았다. “사실 그 댄스파티가 있던 그날, 난 당신과 클레이가 얼마나 서로를 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아마 바보라도 알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난 당신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버리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케이트. 난 사실 당신과 클레이가 약혼했다는 소릴 듣고는...”

“됐어요.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나도 잘 알아요. 나 역시 그와 똑같은 것을 그 이후에 느껴야 했으니까 말이에요. 그날 클레이의 눈동자는 줄곧 당신에게 집중되어 있었어요. 당신이 파트너를 바꿀 때마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어요. 비록 그는 내 곁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당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던 거죠.”

“그는 당신도 역시 사랑해요. 그래서 이 모든 어려움이 생긴 거구요.”

“아녜요.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난 당신이 도착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어요. 그는 나를 존중해 주고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뿐이었어요. 클레이의 사고방식으로 봐선 그 정도면 충분했고, 나의 사고방식으로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쩌면 아마 결혼을 하고 문제없이 살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을 만난 뒤 클레이는 완전히 변해 버렸어요. 당신은 클레이의 가슴을 강타한 거예요, 로리.”

“하지만 클레이가 당신을 생각하는 감정도 단순한 호의나 존중 이상이었어요.”

“아녜요. 사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클레이를 미친 듯이 사랑했어요. 난 그가 원한다면 조용히 뒤로 물러날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해요.” 그녀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로리. 아직도 여전히 고통스러워요. 하지만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어요.”

로리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케이트의 손가락이 로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살포시 닦아내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준다는 거예요.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그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케이트, 제발. 이럴 필요까진 없어요.”

“아녜요. 더 할말이 아직 있어요. 이 말은 정말 하기 힘든 말이에요. 당신에게 보냈던 그 편지에 대해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어요. 그땐 정말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 있었어요.”

“편지라뇨? 당신이 내게 사과해야 할 편지가 있었나요?” 로리가 케이트로부터 받은 편지는 나이팅게일에서 열린 그 마을 축제와 메리가 상을 받은 얘기가 적혀 있는 그 편지 한 통뿐이었다.

“사실 난 당신에게 위선투성이의 편지를 보냈던 거예요.”

“하지만 케이트, 난 당신에게 겨우 한 통의 편지밖에 받지 못했고, 그 편지는 그런 위선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사과할 내용이 아니었잖아요.”

“오, 로리. 하지만 난 그 편지에 거짓말을 써보냈어요. 10월에 결혼한다는... 정말 내가 나빴어요. 난 우리가 10월에 결혼한다는 말을 하면 당신이 그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였어요. 정말 그땐...”

“알아요, 그때 당신의 심정은 최악이었을 거고, 그러다 보니... 케이트..., 됐어요.” 로리는 케이트의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당신을 미워한다는 생각보다는 당신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참 이상한 일이죠?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생각에 휘말려 엉뚱한 일을 저지르기까지 했으니 말이에요.”

“당신은 절대로 남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이 못돼요, 케이트.”

“하지만 결국 내가 나빴어요. 난 정말 아주 끔찍한 일까지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어요, 로리.”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그 편지를 보내고 난 며칠 후 클레이가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찾아왔어요. 그때 난 이제 클레이를 잃는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어떤 것도 당신에 대한 클레이의 사랑은 변화시킬 수 없었어요. 그날 밤 나는 편지에 관한 얘길 그에게 했어요. 그리고 클레이는 물론 나를 용서했지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난 당신에게 용서받고 싶었어요.”

“오, 케이트. 됐어요. 정말 이러지 않아도 돼요. 난 진심으로 당신의 심정을 이해해요.”

“로리, 고마워요. 이제 좀 나아지는 것 같군요. 이젠 가슴이 다 후련해졌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그때 클레이가 당신과의 약혼을 이미 포기했다면 샌프란시스코에 왔을 때 왜 나에겐 아무 말도 안했을까요?”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 떠들어대는 걸 싫어하는데다가 다녀온 뒤로는 온종일 일에만 매달려 있거든요. 다들 걱정을 할 정도였어요. 특히나 메리의 걱정은 대단했어요. 만약 당신이 오지 않으면 메리가 직접 당신을 찾아가려는 결심까지 했었어요.”

“메리가 그러던가요?” 그녀가 클레이의 삶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메리가 그 정도였다면 클레이의 모습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자, 이제 클레이에게로 가봐요. 여기 앉아서 바보 같은 내 얘기만 듣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요. 나랑 더 있어봤자 한심한 내 모습밖에 더 보겠어요.” 케이트는 로리보다 먼저 일어서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 탓인지 유난히 반짝거리는 듯했다.

“케이트,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을 친구로 가질 수 있다니 난 정말 축복 받았나 봐요. 어떻게 당신에게 이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을까요?”

“아이를 낳으면 내가 대모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 그리고 클레이와의 결혼 50주년 기념식에 나를 초대하는 것, 뭐 그 정도면 될 거예요. 자, 더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나가요.”

케이트는 문을 열고 거의 떼밀다시피 로리를 이끌었다.

루크 리버스가 말없이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루크가 다가섰다. “자, 케이트랑은 얘기가 잘 끝났나요?”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케이트로선 감당해야 할 더 어려운 일들이 당분간 많을 거예요. 그러나 곧 괜찮아지리라고 나는 확신해요.” 그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이 마을의 한 사람이 된 것을 처음으로 축하하는 사람이 되고 싶군요.”

“고마워요.”

“자, 그럼 난 이만 들어가서 케이트를 좀 돌봐야 할 것 같아요.”

루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녀는 그가 분명 케이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그의 자상한 배려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로건의 집에서 클레이의 집까지 도착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차를 뒤뜰에 주차시킨 뒤 시동을 끄기까지 그녀의 가슴은 흥분으로 인해 거의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집안으로 들어섰을 땐 메리의 모습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잘 왔어요.” 메리는 반가운 미소를 띄웠다.

“오리건 나이팅게일 최고의 애플파이 실력자가 되었다면서요.”

메리는 정말로 자랑스럽다는 듯 우승의 표시로 앞치마에 달아 놓은 리본을 로리 쪽으로 내밀었다. “당신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요.”

“아직도 미운 도시 계집애죠?”

“하지만 당신은 여느 시골 아가씨들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어요.” 메리는 그녀를 따사롭게 안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클레이를 잊고 떠나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오, 메리. 그런 것들엔 신경 쓰지 말아요. 제발.”

“아녜요. 클레이는 케이트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그는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당신이 떠나간 뒤 그 순간부터 그는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상실해 버렸어요. 완전히 넔이 나가 버린 그런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어요.”

로리 역시 마찬가지엿다. 그러나 로리는 메리에게 굳이 그 얘길 하는 대신 그녀의 가슴에 안겨들어 고개를 파묻었다.

“클레이는 일하러 나갔어요. 아마 한 시간쯤 있으면 돌아올 거예요.”

“한 시간이나요?”

“그때가 저녁식사 시간이니까요. 클레이와 스킵의 식사시간은 아주 규칙적이에요. 그건 내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죠. 규칙적인 식사야말로 건강엔 최상이니까요. 자, 그동안 우린 그를 아주 깜짝 놀라게 해줄 일을 꾸미는 거예요. 당신은 테이블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난 그에게 그저 친구가 왔다고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내 차를 볼 텐데요.” 그녀는 자신이 끌고 온 승용차를 떠올리며 메리를 쳐다보았다.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예요. 클레이는 당신 차가 뭔지도 모르잖아요. 단지 그때의 그 스포츠카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게다가 요샌 일에다 몸을 완전히 맡기고 있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하러 들어올 때쯤이면 아주 녹초가 되어 있어서 밖에 귀신이 서 있어도 못 알아보고 지나칠 거예요.”

“내가 뭐 거들어서 할 일이 있을까요?” 로리가 밝은 표정으로 메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메리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어 보였다. “로리, 당신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클레이에게 환한 미소를 안겨 주는 일뿐이에요.”

“오, 메리, 이 집에 들어설 때부터 그 정도는 이미 각오를 하고 들어온걸요.”

한 시간은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엘크런>으로 돌아왔다는 그 기쁨은 시간을 아주 빨리 가게 했고, 한편으로 클레이를 기다리는 조급한 마음은 그녀가 여지껏 살아온 인생보다도 더 길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드디어 스킵과 클레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오늘 저녁은 뭐죠?” 스킵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테이블에 있으니 손부터 씻어요.”

로리의 가슴은 기쁨과 설렘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메리가 클에이에게 뭔가를 물었고, 클레이 또한 뭐라고 대답했지만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새 도서관 사서직으로 일할 아가씨가 인사하러 들렀어요. 아마 로건 씨랑 케이트가 보낸 모양인데 씻고 인사나 해요.”

“그냥 보내세요, 메리. 난 지금 사람들 만날 기분이 아녜요.”

“그렇게는 안돼요. 이미 식사 초대를 해버렸고, 지금 기다리고 있단 말예요. 그러니 아무 소리말고 가서 세수하고 옷도 좀 털어 내고 서로 인사해요.”

로리의 가슴은 이제 터져 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클레이의 모습이 성큼 걸어 들어왔을 때 이미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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