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에서 온 신부-11화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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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이!” 무의식중에 그의 이름이 로리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얼른 문을 열고 나와 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나 커서 온 거리가 함께 뛰고 있는 듯했다.

    “로리? 누구지?” 댄이 함께 내려섰다.

    그녀는 댄의 목소리를 거의 들을 수도 없었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클레이가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두운 곳에 주차를 해놓고 있었기에 그의 차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댄은 천천히 그녀 곁에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아 안았다. 그의 팔은 마치 날아가 버리려는 한 여자를 애써 붙잡은 듯 힘이 들어 있었다.

    “누구요?” 댄이 다시 물었다.

    로리는 입을 열어 말하려 했으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친구예요.”

    “카우보이 같군, 그래.” 댄의 눈엔 낡은 진 차림의 클레이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모양이다.

    클레이는 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안녕, 로리.”

    “클레이...”

    그의 타는 듯한 눈동자가 로리를 스쳐 댄에게 잠시 머물렀다.

    “클레이 프랭클린, 댄 로저예요. 그 증권 중개업을 하는..., 일전에 말했었죠. 그때 내가 타고 온 스포츠카가...”

    클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오.”

    댄은 로리 곁에 서서 클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레이와 그의 동생 스킵이 그때 차가 고장났을 때 날 도와줬어요.”

    “그래요, 그 말 들은 것 같소.”

    “커피를 한잔 마시러 올라가던 참이었어요.” 그녀는 클레이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그래요, 가서 함께 마시죠.” 댄의 목소리는 기꺼움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클레이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녀는 그의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로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같이 마셔요.” 로리가 속삭였다.

    어떤 느낌을 받아서였을까, 댄은 그녀를 두르고 있던 팔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위스 모카 커피를 가져다 놓았거든요. 그래서 로리와 함께 그걸 마시려던 참이었어요.”

    “스위스 모카 커피라구요?” 클레이는 처음 들어 본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페인이 없는 커피죠.” 댄이 덧붙였다.

    “여기 오래 있었나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그녀가 클레이에게 물었다.

    “한 시간 정도.”

    “오, 클레이...”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요?” 댄은 마치 클레이가 한 시간 동안 기다린 것에 대한 책임은 클레이 자신에게 있을 뿐이라는 듯 말했다. “하긴 시골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않고 남의 집을 잘 방문하고, 또 그게 더 친근감 있는 것이라고들 하더군요.”

    로리가 댄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자, 댄은 자기가 말을 잘못한 게 있느냐는 듯 로리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그들 앞에 멈췄다.

    “당신이 없길래 이웃집에 당신이 어디 갔냐고 물었소.” 댄의 말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클레이가 입을 뗐다.

    “이웃집이라뇨?” 댄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뭐라든가요?” 로리가 말했다.

    클레이는 댄을 슬쩍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사는지조차 모른다고 하더군.”

    “사실 문을 열어 준 것만 해도 신기할 따름이오. 이곳 도시는 시골의 조그마한 마을과 많은 차이가 있죠.” 댄이 마치 고등학교 선생님 같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클레이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웃과는 거의 말을 않죠. 모두들 자기 일들이 더 바쁘고, 공연히 남의 일에 신경 쓰길 싫어하니까 말이에요.”

    “스킵과 클레이가 아니었으면 난 어떡할 뻔했는지 몰라요.” 로리는 이쯤에서 댄의 설교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쑥 말을 꺼냈다.

    “그래요, 아무튼 로리를 잘 돌봐 줘서 정말 고마워요.” 댄이 덤덤하게 인사했다.

    “메리는 어떻게 지내요?” 엘리베이터가 그녀의 집 층에 멎자 얼른 화제를 바꾸기 위해 메리 얘기를 꺼냈다.

    “애플파이 상을 받고 난 뒤 아주 의기양양해서 지내고 있소.” 클레이의 눈가에 미소가 흘렀다.

    “자랑할 만도 하죠. 그리고 스킵은요?” 그녀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들며 물었다.

    “잘 지내고 있소. 지난주부터 수업에 들어갔고, 이제 3학년이 되었소.”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가 안부 전하더군.”

    “내 안부도 전해 줘요.”

    “아직 아무도 당신에게서 연락을 못 받았다고 하더군.”

    “미안해요, 케이트가 먼저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동안 일이 많았거든요.” 사실 몇 번이나 그녀에게 답장을 쓰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로리는 결혼 청첩장을 받게 되면 근사한 선물이나 하나 보내려 마음먹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외투를 벗어 걸어 놓고는 그들을 의자에 앉혔다. “자, 그럼 커피를 끓여 올께요.”

    “원두를 갈아줄까?” 댄이 말했다.

    “아녜요,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로리는 당신이 그 어디더라?...” 댄은 그녀가 찻잔을 날라 오자 입을 열었다.

    “나이팅게일이오.”

    “그래요, 그 나이팅게일에서 당신이 뭘 하는지 말한 적이 없어요. 야채나 뭐 그런 걸 재배하나요?”

    “클레이는 말을 사육하고 있어요. 우수한 종마들을 훈련시키는 그런 일을 해요. <엘크런>이란 자신의 농장에서요.” 로리가 클레이를 대신해 설명했다.

    댄은 마치 망치로 머리라도 두들겨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요, 말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군요.”

    “나이트 송은 어때요?” 로리는 댄이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빨리 말을 했다.

    “날이 갈수록 예뻐지고 있소.”

    나이트 송이 얼마나 그녀에게 큰 의미가 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로리는 클레이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그녀는 명랑하고도 덤덤한 표정으로 댄에게 나이트 송에 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스타 브라이트라는 말이 망아지를 낳을 때..., 이름이 맞나요?”

    클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무도 없었거든요. 스킵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메리도 마찬가지였어요. 급하긴 급하지, 그래서...”

    “그래서 설마 당신이 그 망아지 낳는 걸 도왔다는 소린 아니겠지?” 댄이 그녀의 말을 잠시 막았다.

    “그렇지 않아요, 댄. 내가 도왔어요.”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그날 밤의 일을 댄에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 달아났다. 아무에게도 그날 밤 클레이와 함께 나누었던 그 신선하고도 아름다웠던 추억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차 한잔 더 가져올께요.”

    부엌에 있는 동안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클레이와 댄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사무적이고 냉랭한 댄의 모습과 거칠지만 유쾌한 클레이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이 그 나이트 송인가 하는 망아지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줬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군, 로리.”

    “참, 나이트 송의 사진을 가져왔소.” 클레이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선 웃옷의 주머니 속에서 사진을 꺼내어 로리에게 건네주었다.

    “오, 클레이. 세상에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멋있게 자랐군요.”

    “좋아할 줄 알았소.” 클레이가 미소지었다.

    그녀는 사진을 댄에게 내밀었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한번 흘끗 쳐다볼 뿐이었다.

    “보통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나 아이들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잖소?”

    댄의 말에서 로리는 클레이가 혹시 결혼을 했는지 아닌지를 물어 보고 싶어하는 의중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깊은숨을 조용히 들여 마시고는 말했다.

    “클레이는 약혼했어요. 케이트 로건과요.”

    “그래요?” 댄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일어서서 로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불에까지 입술을 가져다대곤 속삭이듯 말했다. “로리와 나도 요즘 심각하게 결혼문제를 의논하고 있어요, 안 그래요, 로리?”

    비록 클레이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짐을 로리는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소, 로리?” 잠시 사이를 두고 클레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로리의 어깨를 잡고 있는 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밤도 결혼 얘길 나누고 있었소.”

    그녀의 눈길은 클레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그녀가 받아들이지만 않았을 뿐 결혼 얘기는 있었다. 그리고 몇 주 안 있으면 결국 케이트와 결혼을 하게 될 그에게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댄이 내게 청혼했어요.”

    “난 로리에게 완전히 빠졌어요.” 그는 이어서 그의 사업에 관한 몇 가지 목표에 대해서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댄의 미래는 아주 밝은 편이에요.” 로리가 말했다.

    “그렇겠죠.” 클레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 이제 그만 가봐야겠군요.”

    “케이트가 그러던데 이번에도 도전한다면서요?”

    “난 내가 원하는 것은 꼭 이루는 사람이오.” 그의 말이 묘하게 그녀의 가슴을 울려댔다.

    그녀는 클레이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엄숙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바깥까지 바래다 드릴께요.”

    “나도 함께 가지.” 댄이 말했다.

    “아뇨, 당신은 여기 있어요.” 로리는 댄을 흘끗 쳐다보았다.

    “다시 만나서 즐거웠소, 로리.”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댄이 말했다.

    “네.” 클레이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짧게 말했다.

    “들러 줘서 고마워요.” 로리가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클레이!”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 나서며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멈춰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로리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상기된 얼굴로 억지 웃음을 지으며 애썼다. “댄이 오늘 한 실수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요, 로리.”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는 안될 것 같소.” 그는 천천히 말하면서 문득 시선을 댄이 있는 쪽으로 두며 중얼거렸다. “그를 사랑하오?”

    “그는...,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클레이는 두어 걸음 그녀에게서 떨어 섰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행복해요, 로리.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오.”

    9월의 마지막 주는 내내 비가 흩날렸다. 그리고 어두운 오후의 하늘은 로리의 마음만큼이나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보통 이맘때는 글을 쓰는 사람에겐 최적의 시기였으나 그녀는 지난 한달 내내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이트 송과, 어린 망아지들, 그리고 엄마가 되는 말들에 관한 동화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언제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때의 그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되살아나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월요일 오후, 도서관 업무를 끝내고 돌아온 로리는 오늘도 변함 없이 빈 화면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이렇듯 아무 스토리도 떠올릴 수 없으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건 이미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댄의 압력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전화벨이 울리자 그녀는 힘없이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샌프란시스코의 로리 캠벌 양입니까?”

    “네, 그런데요?”

    “데빈 로건 씨의 전화입니다.” 전화 교환수의 말이 떨어지자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캠벌 양, 데빈 로건입니다.”

    “누구라구요?”

    “데빈 로건, 오리건 주 나이팅게일의 지방의회입니다. 내 딸 케이트를 아시죠?”

    “아,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뜻밖의 전화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인사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분 전에 회의가 끝났습니다만, 아시죠?”

    “아뇨, 무슨 일인가요? 회의라뇨? 그리고 케이트는요?”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군요.”

    “글쎄요, 무슨 말씀인지.”

    “공무로 지금 전화를 드린 겁니다. 캠벌 양, 오늘밤 드디어 나이팅게일의 도서관에서 일할 고정 사서직을 확정지었습니다.”

    “네, 축하드립니다. 케이트 말에 따르면 이제껏 자원봉사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었다면서요.”

    “당신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일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리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놓칠 뻔했다. “뭐라고요? 무슨 말씀이시죠?”

    “내 딸 케이트가 당신을 추천했고, 오늘 드디어 회의를 거쳐 확정지은 겁니다.”

    “네에?...” 도대체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당신이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받고 있는 수준까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살 집고 무료로 대여해 드리고요.”

    케이트의 호의가 이런 엉뚱한 전화를 받게 했음이 틀림없다.

    “캠벌 양?”

    “아, 네,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거절해야겠군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좋아요. 그럼 10퍼센트 더 상향조절하겠소. 하지만 관장 월급보다 더 높을 순 없으니 더 이상은 곤란해요, 됐어요?”

    “로건 씨, 제발, 그 말이 아니에요. 월급은 내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에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케이트한테도요.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갈 수가 없어요.”

    “케이트는 당신이 그 자릴 무척 반가워할 거라고 하던데...”

    “그녀가 잘못 안 걸 거예요. 물론 기쁘고 고맙지만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좋아요, 만나서 얘길 못한 게 아쉽군요. 어쨌건 다음에 더 얘길 하도록 합시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로리는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미처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채 멍하니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연이어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시계를 흘끗 본 뒤 그녀는 오늘 댄이 오기로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댄은 하얗고 조그만 백을 들고서 환히 웃으며 들어왔다.

    “그게 뭐죠?”

    “요구르트. 일하는 사람한텐 간식이 필요한 법이니까. 어때, 잘 돼가오?”

    그녀는 냉장고에가 요구르트를 집어넣었다. “좀 있다가 먹을께요.”

    “로리, 왜 이리 안색이 창백하지? 또 무슨 일이 있었소?”

    “전화가 왔었어요. 다른 도서관 일자리가 생겼다면서...”

    “그거 잘된 일 아니오?”

    “...오리건의 나이팅게일이에요.”

    댄의 얼굴 표정이 코믹할 정도로 확 바뀌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소?”

    “거절했어요.”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리,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게 맞을까? 이제 당신은 그 시골뜨기를 잊고 드디어 나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겠소?”

    로리는 시선을 아래로 향해 내렸다. “댄,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난 결코 클레이를 잊지 못해요. 그건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다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죠. 하지만 난 안 그래요. 절대로 클레이 프랭클린을 잊을 순 없어요.”

    댄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 선 채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소.”

    “절대로 당신은 클레이처럼 나를 사랑할 순 없어요. 우린 안돼요, 더 이상. 그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결코 좋을 게 없고요.”

    그의 표정이 절망적으로 창백해졌다.

    “미안해요, 마음 상하게 해서. 하지만 꼭 이 말은 하고 싶었어요.”

    “그 시골에서 온 사나이가 당신을 본 순간 신호등도 무시한 채 길을 가로질러 당신에게 다가왔을 때 난 그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소. 그는 비록 다른 여자와 약혼했지만 결국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오. 하지만 로리, 현실을 냉정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하오. 당신은 결국 그에게서 잊혀지게 될 거요. 그건 사실이고 또 눈앞에 뻔히 보이는 일이오.”

    그녀는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댄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클레이는 곧 케이트의 사람이 된다.

    “미안해요, 로리... 우리의 결혼도 결국 취소하는 수밖엔 없겠소.”

    그의 말에 로리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취소라니? 결혼을 약속한 적도 없는데 취소라는 말부터 그는 하고 있는 것이다. 댄은 그녀가 휴가에서 돌아온 뒤 10번도 더 결혼을 말해 왔고 그녀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결국 약혼반지 하나 끼우기 전에 그는 결혼 취소를 말한 것이다. 어쨌건 그녀로서는 무거운 짐이 하나 줄어든 셈이다. 하지만 좋은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분명 쓸쓸한 여운을 주고 있었다.

    “미안해요.”

    “당분간 많이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사무실 아가씨들이 말하듯 난 원래 잘 참아내는 사람이니 그리 심하진 않을 거요.” 그는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며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자, 이제 요구르트 먹어요. 당신은 너무 야위었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떠난 뒤 그녀는 허탈감과도 같은 기분에 싸여 한동안 멍하니 현관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윽고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로리는 정신을 차린 듯 수화기를 향해 달려갔다.

    “로리? 케이트예요.”

    “케이트! 잘 있었어요?”

    “엉망이에요. 하지만 지금 내 얘길 하려고 전화한 건 아녜요. 왜 나이팅게일의 도서관 자리를 거절했죠? 그리고 클레이에겐 왜 그렇게 대했어요? 로리, 당신은 클레이를 사랑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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