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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온 신부-10화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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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리는 그 편지를 부엌의 식탁 위에 얹어 놓고는 한동안 뜯을 생각도 못한 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마도 그 편지는 케이트나 클레이, 그렇지 않으면 메리에게서부터 날아온 것임에 틀림없다.

    긴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그녀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그 켄터키 주에서 온 봉투부터 뜯어보았다.

    얇은 서류 몇 장이 그녀를 당혹하게 했고, 그녀는 그것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명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전국 마사회에서 보낸 나이트 송에 관한 소유증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로리 캠벌이 그 소유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나이트 송의 태어난 날짜가 그녀의 기억과 일치했고, 그녀는 그것이 클레이가 나이트 송의 소유를 로리 캠벌에게 양도했음을 알리는 서류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클레이가 그녀에게 나이트 송을 선사한 것이다.

    “그들 둘을 함께 하도록 한 것,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 꺼지지 않을 한줌의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나이트 송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잃어버린 사랑이 결코 지워지지 않듯 그녀의 삶도 계속될 것이고 이제 그녀에게는 그 잃어버린 추억을 자신의 삶에 접목시킬 조그마한 위안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로리는 그러한 어떤 것을 필요로 했고 클레이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무척이나 다르게 자라왔고, 다른 말씨와 사고와,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뭔가 유사한 것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랑에 타인의 슬픔을 대가로 치르게 하지 않으려는 데는 거의 일치했던 것이다.

    눈물이 그녀의 얼굴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슬픔을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고 나이팅게일로부터 온 편지를 뜯었다. 케이트였다.

    편지를 로리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소소한 뉴스거리로부터 시작되었고, 마을 축제에 관한 즐거웠던 일들에 관해서 상세히 적혀 있었다. 돼지 경주의 그 유쾌하고도 즐거웠던 순간에 그녀가 함께 하지 못했음에 큰 유감의 뜻을 보내며, 메리가 이번에도 파이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해왔다.

    편지의 뒷부분에 가서는 클레이가 9월 첫주에 경마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오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클레이는 작년의 우승에 이은 연승의 꿈을 안고 이번에도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로리는 놀라움으로 자신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클레이가 샌프란시스코에 오다니... 그녀가 나이팅게일을 떠나기 전에 이미 이 경주의 참석여부를 결정했음이 분명한데도 그는 로리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묘한 심정으로 편지를 접으려다 편지지 뒷면에 케이트가 덧붙인 추신에 눈길이 머물렀다. 10월경쯤 아마 그들은 결혼을 할 생각이고, 그때 초대장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10월이라고..., 이제 몇 주 남지 않아 클레이는 케이트의 사람이 된다. 그녀의 가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듯했다. 이 순간이 닥치리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클레이가 결혼을 결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로리, 정말 당신, 그 경마대회에 가고 싶다는 거요?” 그녀의 아파트 거실 소파에 기댄 채 금요일자 신문의 연예오락난을 펼치며 댄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로리는 댄이 그녀의 의중을 눈치채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에게 엷은 미소를 보냈다. 댄은 주말에 함께 갈 수 있는 여러 장소를 제시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거절했고 지금 갑자기 경마대회에 가자는 말을 그에게 했던 것이다.

    “당신 언제부터 말에 관심 있었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댄?”

    “난 별론데.”

    “하지만 댄, 이제 우리도 좀 시야를 넓히는 게 어때요? 뭔가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경마장에 가서 도박이라도 배우자는 거요?”

    “물론 그런 건 아녜요. 하지만 이번 경마대회는 굉장히 큰 규모고, 전국에서 유명한 말은 다 참가를 한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니.”

    로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그럼, 영화나 봐야겠군요.” 실망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로리가 휴가에서 돌아온 뒤 그들은 손에 꼽을까 말까할 정도로 별 만남을 가지지 않았었다. 오늘밤도 마찬가지로 그가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면 그를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참이다. 빨리 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리면 좋으련만 그럴 기미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웬일로 경마라는 거지?”

    요 며칠간 신문은 케이트가 알려 준 그 경마대회 소식으로 크게 떠들어대고 있었고 출전하는 말 중에는 <엘크런>에서 그녀가 보았던 훌륭한 말들이 끼어 있었다.

    만일 댄이 경마대회에 결국 가지 않는다면 로리는 혼자서라도 갈 작정이다. 클레이를 꼭 찾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가 멀리서나마 그를 한 번 보고자 하는 기대와 설렘은 사실 그녀를 들뜨게 했다.

    “당신 도대체 요새 왜 그렇게 변한 거지?” 처음 듣는 댄의 불평은 아니었다.

    “그럼 영화를 보러 가자고 내가 말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짜증스럽게 흘러나왔다.

    만약 그가 그녀의 친구로서라도 남아 있고 싶지 않다면 그는 다른 여자랑 데이트를 하는 수밖에 없다. 수 차례에 걸쳐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늘어놓았지만 번번이 로리는 그의 말을 가로막아 버리고 말았다. 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를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바보 같은 영화가 보고 싶어서 내가 이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소? 당신 요즘 도대체...”

    “댄, 난 좀 일상적이고 무료한 것을 피해 보자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예요.”

    “하지만 경마라는 건 좀...”

    “알았어요. 언제나 당신 주장뿐이군요.” 만약 그가 이렇게까지 완강히 거부할 줄 알았다면 아예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말 것을 그랬다.

    “이번 달엔 글을 얼마나 썼소?”

    느닷없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당황했다.

    “하나도 못 썼지, 안 그러오? 요즘 컴퓨터 앞에 앉아 멍하니 빈 화면만 보고 있는 당신 모습을 발견한 게 한두 번이 아니오. 도대체 무슨 일이오, 로리? 왜 그렇게 되었지?”

    “혼자 맘대로 상상하지 마세요.” 그녀는 초라해진 자신을 느끼며 애써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자, 그럼 영화를 보로 날 데리고 나가실 건가요, 아니면 여기 앉아서 계속 쓸데없는 질문만 늘어놓을 건가요?”

    댄은 쓸쓸히 웃으며 일어섰다. “도대체 그 휴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신에게 지독한 상처를 준 건 확실한 것 같소.”

    로리는 애써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슬픔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끝까지 숨길 순 없을 거요, 로리. 언제라도 숨기고 있는 그 얘길 하고 싶으면 내게 해요. 당신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더 절실히 함께 느끼며 들어 줄 테니까 말이오. 난 당신의 친구니까.”

    “댄, 제발.”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떠나 있는 동안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난 모양인데, 그건 아무 상관 없소. 그래 봐야 겨우 2주간일 뿐이니...”

    “댄!”

    그는 팔을 뻗어 로리를 소파에 앉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둬요. 곧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우린 이미 좋은 친구잖소. 그게 어쩌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지도 모르오.”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난 지금 열정적인 어떤 걸 바라는 건 아니오. 이미 그런 폭풍 같은 열정은 내 첫 여자에게서 지나갔소. 난 이제 아오, 사랑은 결코 주체도 못할 그런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얘긴 벌써 끝난 얘기예요. 댄, 난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그녀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댄의 말이 옳다. 아무리 그녀가 그 진실을 외면하려 해도 그녀는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나이팅게일을 떠나오는 그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던 것이다. 클레이의 얼굴을 지우려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것만이 그들 둘 다를 위한 최선이라 위안하면서... 그러나 그 짧았던 만남은 평생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오.”

    “더 결정할 일도 없어요, 댄.”

    그의 손길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무튼 누군가가 있었던 건 사실인가 보군, 로리.”

    “맞아요.”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녜요.”

    “좋소. 지금 당장은 무척 힘들겠지만 나의 청혼을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해 봐요. 난 단지 당신을 돌봐 주고 싶고, 당신이 다시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이오.”

    댄과의 결혼은 결국 클레이를 잊기 위한 이기적인 발상밖에는 될 수 없음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한 결정은 단지 댄에게 상처만 줄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 생각해 줘요. 난 어떤 일이라도 다 각오가 돼 있소. 어린애가 아니니까 나를 걱정하지는 말아요. 그리고 결혼에 관해서 시간을 두고 신중히 생각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오.”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시간을 두더라도 자신의 대답은 이미 결정나 있음을 알면서도...

    “자, 영화를 보겠소, 아니면 경마를 보겠소?”

    “영화죠.”

    댄이 선택한 영화는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희극물이었다. 그 영화는 다소 로리의 우울한 기분을 잊게 해주었고, 영화가 끝난 뒤 식사를 하고 와인을 곁들이며 정치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늘상 그녀에게 가까이 있어 주는 댄이 로리는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녀의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에도 꽤 이른 시간이었고, 그녀는 그에게 커피 한잔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했다. 아파트의 좁은 주차장에 간신히 차를 주차시키고 난 뒤 그가 문득 그녀에게 말했다. “새로 이사 온 이웃이 있소?”

    “아뇨, 왜요?”

    “저기 못 보던 트럭이 하나 있어서 말이오. 위험스러워 보이는데.” 그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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