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에서 온 신부-9화 (9/13)

9

“정말 떠나는 건가요?” 그녀의 가방을 집어들며 스킵이 말했다. “마을 축제를 꼭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

“결심을 흐트리지 말아요, 스킵. 정신이 온통 그 <돼지 경주>라는 데 가 있어서 그걸 뿌리치기가 너무나 힘들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천천히 침실을 둘러보았다.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를 생각했다.

스킵은 벌써 문을 열고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트가 일이 다 끝났다고 인사하러 나온댔어요.”

“가기 전에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스킵의 말에 중얼거리듯 대꾸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엔 조금이라도 이 방에 더 머물렀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이 남아 있었다.

“메리는 당신 점심 도시락을 싸고 있어요. 아마 메리 성격으로 봐서 그 도시락은 당신이 일주일 정도 먹고도 남을 만큼 푸짐할 거예요.”

로리는 빙그레 웃으며 스킵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걸 가져가는 게 좋을 거예요. 레스토랑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먹지 않는 게 좋아요.” 메리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잘 있어요, 메리. 정말 고마워요, 오늘 아침의 얘기도 고마웠구요.”

“운전 조심해요.” 메리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께요, 고마워요.”

“편지라도 써보내요.”

“물론이에요.” 그들의 따스함이 그녀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떠난다는 게 상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로리는 느꼈다.

“클레이 형은 도대체 어디 있지.” 그녀의 MGB 승용차에 짐을 넣으며 스킵이 말했다.

“아마 작별인사하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겠죠.”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요. 가서 한번 형을 찾아봐야겠어요.”

로리는 스킵이 형을 찾아나서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반응은 오히려 스킵에게 뭔가를 눈치채게끔 할 것 같았다. 그녀는 클레이가 아침나절 내내 그녀를 피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스킵은 주저하면서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형이랑 혹시 싸웠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스킵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였다.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과 형이 함께 있는 걸 a보면 형이 당신에게 홀딱 빠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괜한 상상이에요.”

“아녜요. 당신이 도착했을 때부터 형의 태도가 좀 이상해졌어요.”

“갑작스런 나의 출현이 괜히 모두를 혼란스럽게 했나 보죠.”

“아녜요. 사실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우리 모두 정말 즐거웠어요. 단지 당신이 여기에 더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릴 혼란스럽게 할 뿐이죠.”

“고마워요, 스킵.”

“아직도 당신이 마을 축제에 왔으면 싶어요. 정말 재미있을 텐데... 물론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에선 어떤지 모르지만 마을 축제도 굉장할 거예요.”

“물론 굉장히 멋있고 재미있을 거예요.”

“시골이 싫은 건 아니죠?”

“물론 아녜요. 생활방식이 조금 다른 건 있지만 <엘르런>에 있는 동안 마치 물을 만난 백조처럼 모든 게 평온하고 즐거웠어요.”

스킵은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에 대해서 생각들을 잘 안 하나 봐요.”

“생각할 시간조차 없죠.” 아마 스킵 역시 도시라는 곳에서 얼마간이라도 지내본다면 그녀의 이런 대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기는 참 조용해서 좋아요.”

“저도 조용한 게 좋아요.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요.”

“여기 <엘크런>에 오기 전까진 도시의 그 말초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었죠. 그리고 그게 최상인 줄로만 알고 있었구요.”

“아! 저기 클레이 형이 오는군요.”

그녀는 순간 긴장으로 인해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뜰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며 로리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로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곧 떠나요.”

“케이트도 곧 작별 인사하러 올 거예요.” 스킵이 덧붙였다.

로리는 클레이가 애써 시선을 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그들로서는 서로 더 나누어야 할 어떤 말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고맙다고 말하는 게 쑥스럽군요.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해요.” 그의 손을 잡아 흔들며 그녀가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로리는 그가 얼마나 많은 얘기를 지금 그녀에게 보내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를 향한 절망적인 열정이 불현듯 치밀어 올라왔다.

“아, 클레이...”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왔다.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말아요.”

“알아요, 하...하지만...”

그는 그녀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타까운 듯 시선을 돌렸다.

“스킵, 가서 선더를 좀 잡아. 돈이 선더의 몸에 붙는 벌레를 잡고 있는데 혼자선 힘들 거야.” 클레이의 목소리는 아주 낮아서 듣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거역 못할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클레이 형, 로리가 가는 마당에...”

“어서!”

스킵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스킵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클레이는 힘차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로 다가왔고 그녀로서는 피할 수도, 또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지금 사방이 다 트인 뜰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러나 클레이는 상관없다는 듯 그녀의 이마와 뺨과 입술을 더듬고 있었고 그녀 또한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건 나도 아오.” 그가 속삭였다.

로리의 가슴은 아픔으로 미어지는 듯했다.

멀리서 차의 시동소리가 들려오자 클레이는 천천히 그녀를 잡은 손을 풀었다.

“그저 악수나 하고 당신을 보내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아무리 가다듬으려 해도 당신을 보면 나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군.”

그녀는 힘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케이트의 승용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클레이는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잘 가요, 로리.” 그는 그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뒤돌아 서서 뛰기 시작했다.

골든 게이트 공원으로 들어섰을 때 안개는 샌프란시스코답게 짙고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로리는 찌들린 가슴에 맑은 공기를 집어넣기 위해 긴 심호흡을 했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그 휴가 뒤에 남은 것은 엄청나게 밀린 일거리뿐이었고, 무엇보다도 댄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큰 과제로 남아 있었다.

“로리?”

“여기예요.” 그녀는 벤치에 앉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런, 많이 달라져 보이는군.” 댄이 다가섰다.

“고작 2주간의 휴가가 이렇게 사람을 달라지게 했다는 게 나로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겨우 이틀이 지났고, 댄과는 그의 차고에 MGB를 넣을 때 잠시 얼굴만 스쳤을 뿐, 돌아와서 처음으로 갖는 만남이었다.

댄은 그녀의 곁에 앉아서 로리와 마찬가지로 심호흡을 길게 했다.

“그 2주간이란 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몰라.”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영양제 매일 먹는 것 잊었지, 로리? 그봐요. 당신은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해요, 댄. 그동안 맑은 공기 때문인지 최상의 컨디션이었어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기 2km전부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것 같더군요.”

댄은 그녀의 말에 미소를 띄우며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에 맺힌 땀을 닦기 시작했다. 가냘프고도 섬세한 손마디와 곱게 자른 손톱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예쁘고도 친근감 가는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햇볕에 검게 그은 억센 클레이의 손마디를 떠올렸다. 다정한, 그리고 힘센 그런 손가락이 댄의 그것과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었다.

“로리, 이제 좀 심각하게 얘기해야 할 것 같소. 우리의 미래에 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싶어.” 그는 곁에 앉은 로리의 어깨에 가만히 팔을 얹었다. “당신이 없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았소.”

그녀는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해야 할 말들을 침착하게, 그리고 빠짐없이 이끌어 나갈 수 있기를 빌었다. 지난 몇 개월 간의 만남에 있어서 결코 그녀는 댄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댄으로서는 막 이혼을 한 직후에서 오는 외로움이나 허탈감을 채워 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로리가 잘 맡아 주었던 것이다.

“오, 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아무말 말아요.”

“무슨 소리요?”

“나 또한 당신과 떨어져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봤어요. 그래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우린 좋은 친구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반짝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로리? 그 2주간의 휴가 동안 왜 이렇게 갑자기 변해 버렸지?”

“침착해요, 댄.” 그의 말처럼 갑자기는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해야 했던 말들을 이제야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왜 여행에 대해선 내게 아무 얘기도 않는 거요, 로리? 그저 차가 고장나서 오리건 주에 3일간 갇혀 있었다는 것말고는 도대체 아무 말도 한 게 없잖소. 그 물펌프 때문에 화가 난 거요? 난 정말 몰랐었소. 휴가도 망쳐 버렸고, 작가모임도 그 물펌프 때문에 못 갔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러는 거요? 그건 정말 미안하오.”

“작가모임은 모르겠지만 남은 휴가를 망친 건 아녜요. 빅토리아는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빅토리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는 없었다.

“당신은 엽서 한 장 내게 보내지 않았소.”

“미안해요.”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오? 당신이 가버린 뒤 그 허전함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었소.”

“댄, 제발.” 로리는 몸을 일으켜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허공으로 향한 채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린 좋은 친구잖소?”

“물론이에요.”

그녀의 그 긍정이 그에겐 그나마 큰 위안이 되는 듯했다. “좋은 친구...” 댄은 조용히 그 말을 되뇌었다.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제될 것 없지 않소. 난 당신이 떠난 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소. 이제 당신은 돌아왔고, 나를 아주 좋은 친구라고 얘기하고 있소. 그건 당신의 나에 대한 감정의 출발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댄, 제발.”

“그렇지 않소?”

“우리의 관계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어요.” 물론 댄은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미치도록 사랑에 빠져 버릴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로리의 사랑은 이미 클레이에게서 끝나 버렸던 것이다.

급작스럽게 댄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세차게 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느낌도 가질 수 없었다. 댄은 그녀와 깊은 입맞춤을 나누고 싶어했으나 절망적으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좋아, 로리. 오늘은 이쯤만 해두지.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요, 곧.”

댄은 그녀의 아파트 앞에 그녀를 내려 주면서 말했다. “곧 볼 수 있겠지, 로리?”

로리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댄, 당신과 사랑에 빠지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더 이상 감정을 확대시키고 싶지도 않구요. 아마 당신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의 턱 언저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것 아니겠소?”

“그래요, 물론. 하지만...”

“그럼 모든 일은 내게 맡겨 둬요. 그리고 내가 쓸데없이 당신에게 시간을 허비한다고 해서 걱정하진 말아요. 그건 내 문제지 당신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오. 지금은 내 생각뿐이지만 당신의 마음도 곧 바뀔 거요. 내 사랑은 당신을 변화시킬 만큼 크고 넓으니 말이오.”

“오, 댄. 제발...”

“자, 그렇게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일요일날 영화나 한 편 보는 게 어떻소?”

“댄, 안돼요.”

“난 고집쟁이요. 더 말할 필요도 없어요. 6시에 데리러 오겠소.”

로리는 더 이상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알았어요.”

로리는 힘없이 댄에게 작별인사를 하곤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편지함에 무심히 손을 집어넣었다. 한 뭉큼의 고지서가 손에 잡혔다. 전기세 고지서, 백화점 카드 내역서..., 그리고 켄터키 주 소인의 봉투와 낯선 글씨체로 그녀의 이름이 적힌 오리건 주 나이팅게일의 소인이 찍혀 있는 한 통의 편지가 고지서 사이에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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