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에서 온 신부-8화 (8/13)
  • 8

    “레몬파이 한 조각 더 먹을래요.” 스킵이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음식이 너 때문에 다 바닥나겠다, 스킵.” 클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로리는 미소를 띄우며 스킵을 바라보았다.

    “로리와 케이트가 저녁식사 준비를 하느라 너무 수고했으니 접시는 스킵과 내가 닦도록 하겠소.” 스킵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클레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요?” 스킵이 말했다.

    “그 정도는 해야지.”

    “아녜요, 식사가 그리 맛있지도 않았을 텐데 맛있게 먹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그러니 접시는 내가 닦을께요.”

    “무슨 소리요, 로리. 오늘 저녁은 아주 좋았어요.” 클레이가 배를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로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렇게 많이 먹는 줄 모르고... 음식이 많이 부족했죠? 모두들 아직 배가 안찼을 테니 내가 피자를 한턱 낼께 함께 나가요?”

    로리의 말에 그들은 일제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리, 피자 가게는 여기서 50km나 떨어져 있소.” 클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맙소사, 그 흔한 피자 가게가 여기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단 말예요?”

    “우린 별로 피자를 사먹을 일이 없어요. 메리의 피자 솜씨는 여느 피자 집보다 훨씬 뛰어나거든요.” 스킵은 마치 메리의 피자가 너무나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좋아요, 로리. 오늘밤을 위해서 내가 얼른 다녀오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바람처럼 다녀올 테니까요.”

    피자박스가 어지러이 늘어진 거실에 모여 앉아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늦은 밤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음악 좀 들을까요?” 스킵이 등받이 소파에 푹 기대면서 말했다.

    “좋아요, 내가 연주를 하죠.” 케이트가 일어나 피아노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끝이 건반 위로 가볍게 내려앉자 깊은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곡이 흘러나왔다.

    “누가 리 그린우드의 노래를 부를래요?”

    “좋아요.” 스킵이 일어나 흥얼거리며 몸을 흔들어댔다.

    “누구 노래라고요?”

    “리 그린우드, 컨트리 싱어요. 이 지방 출신이지.” 클레이가 말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로리가 중얼거렸다.

    “그럼 자니 캐시는 어때요? 그 사람은 아주 유명하니까요.” 케이트가 말했다.

    “좋아요. 그 사람은 잘 알죠.”

    스킵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몸을 흔들어댔고 로리는 그 곁에 앉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클레이는 기타를 가지고 들어와 곁에 앉았다. 곧이어 스킵도 하모니카를 가지고 와 연주하기 시작하자 셋은 능숙한 솜씨로 하모니를 이루어냈다.

    “로리를 위하여 한 곡!” 스킵이 클레이와 케이트에게 소리쳤다.

    클레이의 풍부한 바리톤 음성과 케이트의 맑은 소프라노가 어우려져 나오자 로리는 까딱이던 발을 멈췄다. 그녀의 눈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조화를 연출해내는 그들을 향했다. 노래가 끝나자 로리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케이트와 클레이 형은 항상 교회에서 듀엣으로 노래를 불러요. 멋있죠?"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케이트와 클레이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들은 그들의 화음만큼이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케이트는 두 팔로 클레이의 허리를 감싼 채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얹었다. 그녀에겐 이미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

    "노래 잘해요, 로리?" 케이트가 클레이 곁에서 일어나 피아노로 다가가며 물었다.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조금 불러요." 사실 로리의 노래 솜씨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합창부 활동을 했었고, 피아노 레슨도 5년을 넘게 받았었다.

    "좋아요." 로리에게 케이트는 피아노 의자를 받쳐 주며 말했다.

    그녀는 대학시절 불렀던 곡을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 찬찬히 부르기 시작했다.

    곡이 끝나자 모두들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피아노를 좀더 연주해 봐요. 다른 사람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니 참 좋아요."

    "하지만 당신들이 주로 부르는 노래는 어떻게 연주하는지 잘 몰라요."

    "당신이 잘하는 곡으로 해봐요. 우리가 알아서 맞출께요." 케이트가 클레이 곁에 앉아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주를 시작했다. "빌리 오션의 곡이에요. 컨트리라기보다는 록 음악에 가깝죠. 하지만 들어 봤을 거예요." 그러나 몇 소절 안 가 그녀는 그들 세 사람 중 누구도 그 곡을 들어 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케이트는 그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더니 뭔가 생각이 난다는 듯 말했다. "코카콜라 선전에 나온 사람이죠?"

    “맞아요.” 로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히트 곡도 꽤 많아요.”

    케이트는 고개를 저으며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리, 하지만 우린 가사를 몰라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요?”

    “그 사람은 배우가 아닌가요? 그 사람이 노래도 해요?” 스킵이 물었다.

    결국 로리는 피아노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 피아노는 당신이 쳐야겠어요. 난 컨트리 곡은 잘 몰라요.“

    “우리랑 조금만 더 있다 보면 컨드리 곡도 아주 익숙해질 거예요.” 스킵이 그의 하모니카를 입에 대면서 말했다.

    “이제 1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구나.” 클레이가 문득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며칠 더 있으면 안되나요, 로리? 이제 겨우 친해지려는데...” 스킵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로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음주에 있을 마을 축제를 못 보고 가면 후회할 거예요. 아마 캐나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여길 들르면 볼 수 있을 텐데...” 케이트는 진심으로 로리가 다시 이곳으로 와주길 바란다는 표정을 지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클레이와 난 노래를 함께 부를 예정이고, 또 스퀘어댄스 경연대회에도 참석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돼지 경주도요.” 스킵이 끼어들었다.

    “돼지 경주라뇨?”

    “굉장히 재미있는 경기예요. 가장 빠른 돼지 10마리를 놓고 먹을 것을 미끼로 해서 누가 가장 빨리 달리나 시합하는 거죠. 상품도 굉장하구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 로리.”

    “메리의 애플파이도 참가할 거요. 그녀는 파이대회에서 6년째 연승을 하고 있어요.” 클레이가 말했다.

    그녀는 대답을 하는 대신 클레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것은 그에게서부터 어떤 대답을 구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그의 말없는 그 눈빛만이 그녀의 결정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는 무표정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로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로리는 어쩔 수 없이 변명을 늘어놓으며 유감의 뜻을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시간이 없어요. 월요일 아침부터 당장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자니 시간이 너무 빡빡해요.”

    “캐나다 여행에서 조금 일찍 돌아오면 되잖아요. 금요일 오후쯤 이곳에 도착해도 될 텐데...” 스킵이 말했다. “저번 파티 생각을 해봐요. 정말 멋있지 않았어요?”

    그래, 정말 그땐 근사한 파티였어. 돼지 경주라는 그 우스꽝스러운 경기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 누구보다도 로리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로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스킵이 재촉하듯 그녀를 불렀다.

    “아..., 잘 모르겠어요.”

    “마을 축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훌륭하고 즐거운 추억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당신들에게 계속 폐를 끼치는 것도 미안하구요.”

    클레이는 여전히 그녀에게 아무런 눈길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여름 내내 이곳에 있다 해도 문제될 건 없어요. 오히려 우리에겐 큰 기쁨이 될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클레이 형?”

    클레이는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당연히 로리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환영이지.”

    “이런 말썽쟁이 남자 2명이랑 있으면 골치만 아플 테니까 아예 우리 집에 와 있어도 좋아요.”

    로리는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빅토리아에서 보낼 때 휴가는 취소할 수가 없어요.”

    “물론 돌아와서 일할 걱정 때문에 그런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스킵 말대로 하루만 빨리 돌아오면 되잖아요.” 케이트는 다시 한번 스킵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로리가 아마 시간이 없나 보군.” 이윽고 잠잠하던 클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야지.”

    “마치 로리가 다시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형.”

    “그게 아니야, 스킵. 나 역시 로리가 여기 있어 주길 바라고 있어. 하지만 로리에겐 나름대로의 휴가 계획이 있을 테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야.”

    로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응시하고 있는 클레이의 눈동자가 애정으로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 내내 스킵은 로리가 캐나다 여행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주길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나 로리는 지금 클레이와 이별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끝날 만큼 고통스러운데 그 이별을 두 번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캐나다 여행에서 다시 이곳 <엘크런>으로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또 강요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를 설득하는 데 지친 스킵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고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클레이는 케이트를 데려다 주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러 밖으로 나갔다.

    “내일 떠나기 전에 내게 전화 주세요.” 케이트가 말했다.

    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트를 가볍게 안았다.

    “그리고 만약 내일이라도 마음이 변한다면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당신의 결정을 반길 거라는 걸 잊지 말아요.”

    “고마워요, 케이트.”

    케이트와 클레이가 떠나자 집안은 정적 속에 싸였다. 아무래도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클레이와 함께 앉아 별을 세던 곳으로 향했다. 하늘은 그때와 다름없이 마치 살아 숨쉬듯 신선했고, 별들도 어김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드넓은 대지, 이 마을에 클레이는 속해 있다. 그리고 그녀는 도회지에서 온 멋모르는 아가씨였고, 얼마나 그들 사이엔 많은 차이점이 있나를 오늘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엘크런>과 완전히 하나가 된 사람이고 <엘크런>을 떠난 그의 모습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로리는 처음으로 그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빠져 버리고,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그 사랑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얘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있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바로 자기 자신이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마치 미궁 속에 빠진 듯 주체 못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그녀의 혼을 뺏어갔고 그녀의 몸까지도 휘감아 버리고 있다.

    클레이는 영원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나이트 송의 탄생을 기뻐하던 그 순간부터 그녀를 급류에 휘말린 듯 위태롭게 했던 그 사랑이 이제 몇 시간 후면 이별이라는 아픔으로 남게 될 것이다.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곧 그것이 클레이의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 곁에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감은 채 말없이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들을 에워싼 이 밤의 향기로운 침묵을 깨는 것이 두려운 듯 둘 다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심히 빛나는 별들은 마치 그녀의 클레이에 대한 사랑처럼 언제까지나 그 빛을 잃지 않을 것 같았다.

    가냘픈 한숨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인생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우연히, 혹은 공연히 이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나도 그렇소.”

    “모든 일은 다 나름대로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거예요.”

    “우리의 마지막 시간들을 철학 얘기로 보내고 싶소, 로리?" 그는 턱을 가벼이 그녀의 머리 위에 얹으며 말했다. ”슬프오, 로리?“

    “아뇨, 그냥 아주 낯선 느낌이 갑자기 들어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 말예요. 내일이면 난 떠나고 그 이후로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후회는 없어요. 하지만 마음이 아파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았다.

    “아무튼 이 모든 현실을 인정해야 되겠죠. 아무것도 이젠 바뀌어질 수 없어요. 차는 수리될 거고 난 이제 나의 자리로,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자리로 각자 돌아가는 거예요.”

    “당신이 떠나고 나면 아마 내 가슴엔 그랜드캐니언보다 더 큰 구멍이 남을 것 같소.” 그의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 역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듯했다. “난 아주 단순한 사람이오. 아마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당신의 그 친구처럼 그리 똑똑하고 복잡한 사람은 못될 거요.”

    순간 그녀는 댄의 얼굴을 떠올렸다. 클레이의 말은 옳다. 그는 클레이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일과 자신의 승용차에 열광하는 사람, 그러나 또한 말할 수 없이 친절한 면도 있는 바로 그 점이 로리의 마음을 끌게 했던 것이다.

    “수년 동안 몸담아 일한 이 <엘크런>이야말로 내 삶을 풍요롭게 해왔소. 내 삶의 터전이지. 언젠가 나의 아들이 내 뒤를 이어 이곳에다 또 자신의 삶을 이어나갈 거요.” 그는 한숨을 한번 몰아 쉬며 계속했다. “언제나 내가 마음먹는 일은 꼭 이뤄졌고, 그러도록 나 또한 최선을 다했었소. 그러다가 당신이 나타난 거요. 갑자기 나는 비틀거리기 시작했지.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소.”

    로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나지막했다. “그 바보 같은 물펌프 탓이기도 하죠.”

    “언제나 난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면서 실천하는 타입의 사람이었소. 그러나 당신은 나를 스킵보다도 더 어린 사춘기 소년으로 만들어 버렸소.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소. 이제 몇 시간 후면 당신은 내 곁을 떠나고, 나는 그것을 막을 수도 잡을 수도 없소. 내 모든 이제까지의 삶이 무의미해져 버리는 기분이 드오.”

    “하지만 난 떠날 수밖에 없어요.”

    "알아요. 당신은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 역시 떠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클레이, 난 오늘밤 비로소 성숙된 여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당신과 나를 위해서 내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해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다른 어떤 것들보다 힘들고 괴로울 거라는 것을 알지만,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나는 떠나야 하는 거예요.”

    클레이는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한 번만 더 안게 해주겠소?”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돼요... 미안해요, 클레이. 하지만 우린 이래선 안돼요.”

    “나도 모르겠소. 어떻게 해야 할지...”

    “나를 당신의 아름다운 추억 중의 하나로 기억해 줘요, 클레이.”

    클레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해야 돼, 로리. 언제까지나.”

    그녀는 애써 등을 돌렸다. 어느새 눈물이 그녀의 눈동자를 뜨겁게 적시고 있었다. “잘 자요, 클레이.”

    “로리, 당신도.”

    이튿날 아침 로리가 부엌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스킵과 클레이는 일을 하러 나간 뒤였다.

    “안녕하세요, 메리? 동생과는 잘 만났어요?”

    “아주 좋았어요.”

    로리는 메리 곁을 지나 테이블에 앉은 다음 커피포트의 물을 잔에 부었다.

    “어제 저녁은 잘 먹었어요?” 메리가 미소 띈 얼굴로 물었다.

    “별로 신통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피자박스를 숨기려고 애를 썼더군요. 아마 그 레스토랑 피자로 두 남자를 겨우 살려냈나 보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로리는 웃음으로 난감한 표정을 감추려 애를 썼다.

    “피자 가게는 여기서 한 30분은 가야 있는데, 도대체 당신이 가서 사온 거예요, 아니면 스킵을 시킨 거예요?”

    “스킵이 자진해서 사러 가겠다고 했어요.”

    메리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런, 그렇다니까. 도무지 도시 여자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로리는 메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두 달 정도 당신 곁에서 배우고 싶지만 불행히도 오늘 오후면 떠나야 되거든요.”

    메리의 얼굴이 일순간 놀라움으로 경직되는 듯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가는군요.”

    “내가 없어지니 속이 후련하시겠어요.” 로리는 약간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메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로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런 소리 말아요. 도시 여자치고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클레이가... 그리울 거예요, 그렇죠?”

    로리는 일순간 당혹감을 가졌으나 아주 유쾌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그래요. 아마 보고 싶을 거예요.”

    메리의 얼굴은 장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엄한 표정이었다. “사실 다 눈치채고 있었지만, 클레이도 당신을 상당히 좋아하고 있어요. 지금 떠나는 게 최상이에요.”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쉽지는 않군요.”

    메리는 따스한 눈길을 그녀에게 보내며 말했다. “당신 기분은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잘하는 거예요. 곧 잊을 수 있을 거예요.”

    절대로 클레이를 잊을 순 없을 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녀는 묵묵히 메리가 내준 바나나파이를 삼키고 있었다.

    “케이트 로건은 클레이에게 좋은 아내가 될 거예요.” 메리가 말했다.

    “나도 그들이 행복하길 빌어요.” 로리가 쓸쓸히 대꾸했다.

    “케이트는 그를 아주 사랑하고 있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죠. 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일이 하나 있어요. 대학을 다닐 때 클레이는 시애틀에서 온 한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더랬어요. 그 여자는 도시에서 태어나 쭉 도시에서만 산 아가씨였어요. 아무튼 클레이는 그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이곳 <엘크런>까지 데리고 왔었죠. 그런데 한 이틀쯤 머물더니 그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짐을 싸 가지고는 떠나버렸죠. 그 뒤 클레이는 그 여자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지만 무척 상처를 입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케이트가 대학을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 클레이는 그녀와의 결혼을 신중히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야 언제나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나서지를 않아서 그렇지 사실은 이 얘기, 저 얘기 다 들어요. 케이트는 이곳 사람들에게 아주 평이 좋아요.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하잖아요. 그녀가 가르치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얼마나 그녀를 따르는지 아마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메리가 이런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케이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이미 로리 자신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케이트는 남다른 많은 고충을 안고 살아왔어요. 그녀는 암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었죠.” 잠시 머뭇거리다가 메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건 당신이 이곳을 떠나는 건 잘하는 일이에요. 케이트를 위해서, 그리고 클레이를 위해서도.”

    로리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메리, 사랑에 빠져본 일이 있나요?”

    “한 번요. 그 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죠.”

    “혼자 산 걸 후회하진 않나요?”

    “가끔은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나름대로는 이게 더 편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이들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스킵과 클레이를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위안을 받죠.”

    “그들은 당신을 가족처럼 생각하더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메리는 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군요, 점심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래요. 전 2층에 올라가서 짐 정리나 좀 해야겠어요.”

    2층으로 올라온 그녀는 흘끗 클레이의 부모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몇 번이나 지나치면서도 무심히 넘겨 버리곤 하던 사진이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이 방을 떠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녀는 다른 때와는 달리 유심히 그들을 찬찬히 관찰했다. 놀라울 정도로 클레이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로리는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나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사람을 끄는 그 눈동자는 클레이의 그것과 거의 같은 모양이었고, 짙은 머리칼 또한 클레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에 비해 스킵은 아버지를 닮은 편이었다. 맑고 천진한 푸른 눈동자며 미소는 사진 속의 아버지와 흡사했다.

    전화 벨 소리가 울리자 로리는 멈칫 피아노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당신 전화예요.” 메리가 부엌에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로리는 그 전화가 리버스데일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침 나절 내내 그녀는 그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세요.” 행여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으로 수화기를 잡은 그녀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캠벌 양.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고마워요.”

    “<엘크런>까지 차를 보내 드리도록 하죠. 아시겠지만 상당한 거리이니만큼 운송비를 충분히 생각하셔야 할겁니다.”

    “좋아요, 언제쯤이면 도착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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