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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온 신부-7화 (7/13)

7

로리는 으레 곁에 케이트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하려 애썼다. 파티 내내 그들 둘은 한번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고, 그것이 클레이와 로리의 직접적인 대면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고, 비로소 그녀는 그가 혼자임을 알 수 있었다. 열기로 들떠 있는 파티 장소를 떠나 이렇게 단둘이 어두운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로리의 기분을 묘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형식적이고도 태연한 척하느라 몸을 빳빳이 굳힌 채 그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와의 시선이 뒤엉킨 채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로리의 어깨에 가만히 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완강히 비틀어댐으로써 그의 접근에 거부의 뜻을 강하게 표현했다. 클레이의 손이 잠시 주춤거리다가는 그녀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그의 타는 듯한 시선에 로리는 거의 숨이 막혀 버리는 듯했다.

“어떻소?”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즐겁소?”

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시골이라는 것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했었어요. 별 기대도 하지 않았었구요. 하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굉장히 커요. 이렇게 온 마을 사람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는 것도 신기하구요. 음악이나 조명이나 어느 것 하나 도시에서의 그것에 빠지지 않아요. 너무 즐겁고 재미있어요. 고마워요.”

“다행이군.” 그는 공연스레 자신의 팔을 허공에 한번 휘저었다. 긴 한숨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엷게 흘러나왔다. “로리, 당신과 함께 춤추고 싶었소, 하지만...”

“됐어요.” 그녀는 성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변명은 공연히 그녀의 가슴만 아프게 할 뿐이다. 그녀 또한 얼마나 그의 넓은 가슴에 안겨 무대를 누비고 싶었던가?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정해진 춤출 수 있는 상대가 있었고, 또한 모두들 그것만이 당연하다는 듯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아니, 설혹 낯선 곳에서 온 그녀를 위해 클레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춤을 신청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오히려 그녀의 고통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다. 어쩌면 클레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충분히 다 이해하니까 그런 말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요.” 아무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려 해도 어느새 그녀의 눈망울은 조금씩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의 눈길이 따사롭게 그녀를 감싸안았다. 그녀 또한 그를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마술처럼 아름다운 밤향기가 그들의 눈길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해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소, 로리. 하지만 이해를 하고 안하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제 2,3일만 지나면 당신은 떠나 버릴 거고, 우린 각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의 자리로 묵묵히 돌아갈 뿐...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겠소.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했다.

클레이의 눈동자 위에 반짝이는 것은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밤이슬이었을까. 혹은 멀리 비치는 네온사인의 불빛이 반사된 탓일까? 클레이와 로리는 깊은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클레이와 함께 이렇게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달빛 아래 서 있다는 것이 그녀를 너무나 혼란스럽게 할 뿐이었다. 그와 함께 별을 쫓던 그날 밤의 기억이 새로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렇게 둘만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둘이서만...

“케이트가 기다리지 않나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크 리버스랑 함께 춤추고 있을 거요.”

한순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잠시 찬바람을 쐬러 나왔던 것뿐이니까요.”

“로리, 나와 함께 이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지 않겠소?”

거절의 의사를 비추기도 전에 클레이는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죄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그러한 거절이나 거부가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케이트는 그녀의 남은 삶을 클레이와 함께 할 것이지만, 로리로서는 이 짧은 얼마간 뿐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이 그의 목을 감쌌다. 그의 품에 이렇게 안긴다는 것이 얼마나 그녀를 들뜨게 하는지 모른다.

“오, 로리.” 그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마치 그들 둘만을 위해 태어난 듯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뺨이 그녀의 머리에 살짝 기대어 머리칼에서 나는 향그러운 내음을 들이켰다.

“이러면 안돼요.”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들 둘 중 어느 하나도 서로의 감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오, 로리.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더군.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소.”

“제발, 클레이. 우린..., 안돼요.” 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다시는 이렇게 가까이 서 있으면 안될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러한 맹세를 마음속으로 아무리 다진다 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클레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얼마나 케이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손이 로리의 어깨로 올라와 주춤대다가 목을 타고 내려와 뺨에 닿았다.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간질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몇 분간만이라도 나의 연인으로 있어 줘, 로리.” 클레이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았고, 이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향해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깊고도 긴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뒤에 오는 고독감은 입맞춤보다도 더 깊고도 길었다.

“안돼요.” 그녀의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클레이, 우린 이래선 안돼요.”

클레이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소.”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녜요.” 그녀는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난 당신의 사람이 될 수 없어요.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었어요. 당신에겐 케이트가 있잖아요.”

그는 긴 한숨을 내몰아 쉬며 말했다.

“당신 말이 다 옳소, 로리. 그래..., 우린 이래선 안 되는 거요. 약속하겠소. 이제 다시는 당신에게 키스하지 않겠다고...”

“저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의 손이 절망적으로 그녀를 잡았다. “자, 들어갑시다.”

다음날 아침 로리가 눈을 떴을 때 창 밖은 이미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그녀는 간밤의 클레이와의 대화가 떠올라 자리에 누운 채 멍하니 상념에 젖어 있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대충 씻은 뒤 2층 계단을 내려와 보니 메리는 벌써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젯밤 어땠어요?” 메리는 마치 로리가 어서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꺼냈다.

로리는 대답을 하는 대신 부엌을 빙빙 돌며 어젯밤 춤추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보였다.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요.” 메리는 로리의 행동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굉장했어요.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그렇게 즐거운 곳을 가본 건.”

“다른 큰 도시에 있는 파티랑 별 다를 바가 없죠?”

“조금도 손색이 없어요. 규모면에서는 도시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고, 더군다나 도시와는 달리 사람들끼리 너무 친하고 또 잘 어울려서 훨씬 더 즐겁고 근사했어요.”

“오늘도 케이트를 만나나요?” 메리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며 물었다.

로리는 빵 조각을 뜯어 입에 넣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아직 약속하진 않았어요. 아침엔 의사랑 면담이 있고 오후엔 교사모임을 간다나 봐요. 오는 길에 시간이 나면 들른다고 했지만 어쨌든 내일은 확실히 만날 거예요. 참, 언제 동생을 만나기로 했죠? 저녁을 준비하게 되면 케이트가 꼭 오기로 했어요.”

“난 또 당신이 그걸 잊어버렸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죠.” 메리는 정말 걱정하고 있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세요, 메리. 내가 뭘 하건 간에 당신과의 약속은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메리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흘렀다.

“오늘은 클레이의 컴퓨터에 입력시킬 게 좀 남았어요. 별로 많이 남은 건 아니니까 아마 오후에 끝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누가 찾아오면 어디 있다고 말해야 하죠?”

“사무실에요. 그 컴퓨터 옆이죠, 당연히.” 마치 메리는 누군가가 그녀를 찾으리라고 이미 예상한 듯 말을 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커피를 마신 뒤 그녀는 클레이의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텅빈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의 키를 누르고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로리는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가다듬으러 애를 쓰며 타이핑을 시작했다.

“로리.”

“클레이!”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그녀는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의 놀라움으로 그를 불렀다.

“여기 있는 줄 몰랐소.”

“내가 나갈까요?” 그가 무슨 업무라도 처리하러 들어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그녀는 말했다.

“아니오, 잠깐 볼일이 있어 들어왔을 뿐이니 금방 나갈 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류뭉치를 뒤적이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케이트 말을 듣자니, 샌프란시스코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더군. 몰랐었소.”

“정확히 말하자면 사귄다고까지 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한 6개월 정도 만났어요. 이혼남이구요. MGB는 그의 차예요.”

클레이의 턱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로리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소?”

“아뇨.”

그는 자신의 머리를 슬쩍 치며 말을 이었다. “하긴, 내가 당신에게 그런 걸 물어 볼 권리가 어디 있겠소. 미안하오, 로리.” 그는 이윽고 서류 하나를 빼어들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과 짧은 대화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실수로 그녀의 타이핑 속도는 엉망으로 줄어갔다. 언제부터인가 전화벨이 계속 울려댔지만 누군가 받겠지 하는 생각으로 무시한 채 자판을 반복해서 두드려댔다.

“로리, 당신 전화예요.” 스킵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와 말했다.

“나한테 온 전화라구요?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캠벌 야, 리버스데일입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함께 알려드려야겠군요.”

“무슨 일이죠?”

“우리 종업원이 당신 차에다 쓸 물펌프를 포틀랜드로부터 무사히 실어왔습니다.”

“잘됐군요, 다행이에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어요.”

“문제라뇨?”

“사실, 약간의 문제라고 말하긴 좀 그렇군요.”

“무슨 말이죠? 조지, 난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에요. 무슨 일인지 자세히 좀 얘기해 줘요.”

“안됐습니다만, 캠벌 양, 2,3일 정도 더 여기 계셔야겠어요.”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요?” 그녀가 맥빠진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자 스킵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거리며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

“로리, 대답 좀 해봐요.” 스킵이 다시 한번 애가 타는 목소리고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스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 MGB에 맞지 않는 걸로 잘못 실어왔대요. 그래서 한 2,3일간을 또 더 기다리라는 거예요. 이런 바보 같은 사람들이 어디 있담!”

스킵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리고 뭐가 문제예요, 로리. 여기서 한 2,3일 더 묵는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잖아요. 우린 당신이 하루라도 더 머물면 좋고, 또 당신도 이곳 나이팅게일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요. 하지만...” 사실 그녀로선 스킵에게 할 말이 없었다. 이 아름다운 전원, 그리고 그들의 선량한 마음 씀씀이 모두에 대해서 그녀는 진심으로 애정을 느끼고 있었고 스킵 역시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죠?”

“내 휴가요.”

“알아요, 나름대로 다른 계획이 있었다는 걸. 하지만 이곳에서도 충분히 쉬면서 재미있게 보낼 수 있잖아요.”

“그래. 하지만 내겐 내 일이 있고, 일을 하기 위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해요. 내가 여기서 할 일이라도 있나요?”

스킵이 나간 뒤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클레이에 대한 느낌은 점점 짙어만 가고, 아무리 멈추려 해도 그 느낌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한다. 그래서 로리는 이 주체 못할 감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댄은 전화 한 통화하지 않는 걸까?” 수화기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들어올리며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로리! 다행히도 전화를 해주었군.”

“당신이 전화를 해줬어야죠.”

“그럴려고 했지. 하지만 비서가 전화번호를 잘못 적어뒀나 봐. 그래서 계속 당신 전화만 기다리고 있었소. 도대체 무슨 일이오?”

그녀는 차가 갑자기 멈춘 것부터 상세히, 그러나 클레이 프랭클린에 대한 그녀의 느낌만 제외하곤 그에게 빠짐없이 얘길 했다.

“저런 미안하오, 로리.”

갑자기 로리의 눈에 눈물이 고여들었다. 사실 클레이의 문제만 아니라면 이렇게 서러울 정도의 큰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데리러 가는 게 어떻겠소?“ 그녀의 흐느낌과 침묵 뒤에 댄이 이윽고 말을 꺼냈다.

“어떻게 오시게요?”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그녀가 말했다. “내 차로요? 그 고물차로는 여기까지 올 염두도 못 낸다는 걸 잘 알잖아요. 게다가 MGB는 어떻게 다시 끌고 가구요.”

“좋은 수가 있소. 난 당신을 그 촌구석에다 더 이상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차를 하나 빌려서라도..., 아참! 이런, 제길. 깜빡 잊었군.”

“뭘 말이에요.”

“로리, 내일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내가 빠져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일이오. 정말 미안하오, 정말.”

“됐어요. 걱정 말아요. 이해하니까요.” 댄의 그 증권 중개업이란 일은 그 자신의 인생보다도 더 값진 것처럼 보였다. 그가 죽도록 사랑한다고 늘 외쳐대는 로리보다도 더 급한 것이 그에게는 일이었다. 로리는 문득 클레이를 떠올려 보았다. 클레이라면 이런 경우 어땠을까. 아마 그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고서라도 나를 향해 달려오리라.

무의미한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간 뒤에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허탈감과도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의자에 몸을 뉘었다.

“로리, 무슨 일이오?” 클레이가 급히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섰다. “스킵 말로는 완전히 엉망이 됐다던데, 무슨 소리지?”

“리버스데일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물펌프가 제대로 도착은 했지만 그 차에 맞지 않는 걸 가져왔다는군요.”

그는 모자를 벗으며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안됐군.”

“할 수 없이 이곳에 더 있어야 되나 봐요.” 갑자기 로리의 눈에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당신 차가 이곳 <엘크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장이 났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로리. 적어도 당신을 만나기 이전엔 난 그저 별 혼돈 없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당신을 보는 순간부터 이렇게 모든 게 엉망으로 뒤죽박죽이 돼버렸소.”

그녀 역시 차라리 클레이를 만나지 않은 것이 더 나은 일이었을 것이다.

안돼, 그녀는 결심했다. 이곳에 더 이상 머문다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에게도 너무나 가혹한 아픔일 뿐이야. 그녀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떠나야 할 시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짐을 챙기겠어요.”

“어딜 가겠다는 거요?” 로리도 그 물음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아무데나..., 그냥.”

“로리, 그만 집으로 들어가 쉬도록 해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미안하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았다.

“미안해요, 클레이.”

“무엇이 미안하단 말이오. 사실, 오히려 난 당신을 만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소. 자, 어서 들어가 봐요. 당신과 오래 있으면 점점 더 바보짓만 할 것 같으니까.”

다음날 리버스데일에 메리의 여동생이 도착했다. 로리는 메리의 그 낯익은 에이프런을 허리에 두르고 부엌일을 시작했다. 저녁 무렵엔 케이트까지 합세해서 식사 준비를 했다.

“클레이가 좋아하는 후식은 내가 만들께요.”

케이트는 파이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로리 또한 익숙하지 못한 솜씨나마 열심히 음식을 퍼담고 나르고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을까요, 케이트?”

“그러는 게 낫겠어요. 그전엔 항상 메리가 받았으니까요.”

로리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엘크런>입니다.”

“미스 캠벌인가요?”

로리는 단번에 리버스데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내가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알려드린다고 약속했었죠. 자, 기쁜 소식이에요. 방금 도착했는데 박스에서 꺼내 보기도 전에 기다릴 것 같아 전화드리는 겁니다.”

“이번엔 확실한 거겠죠?”

“어디 한번 보죠... 맞아요. 틀림없군요.”

로리는 지금 심정이 도대체 기쁜 건지 어떤 건지 확실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오늘 오후에 아들 녀석이 지역 야구게임에 참가해요. 그래서 당장 일을 시작할 순 없고..., 내일 아침 일찍 시작해서 오후까지 끝마쳐 놓기로 하죠. 내일 전화 주세요. 오후까지면 확실할 거예요.”

“그러죠.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케이트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자, 엷은 미소를 띄우며 방금 받은 전화 내용을 얘기했다. “다 잘되었다는군요. 방금 물펌프가 도착했고, 내일이면 다 끝나게끔 일을 처리해 준대요.”

“로리,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그러나 로리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제 <엘크런>을 떠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아무리 이곳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클레이 프랭클린은 영원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밤이 되는군요.” 케이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요? 당신이 떠난다는 게 나로선 아쉽기만하군요.”

“우린 계속 연락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결혼식 때 꼭 초대할께요.”

한순간 로리의 낯빛이 창백해졌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오늘 저녁은 아주 특별한 식사를 준비해야겠군요. 크리스털 유리잔도 꺼내고 차이나 식 도자기도 꺼내고...”

몇 분 안돼서 케이트는 근사하게 식탁을 꾸며 놓았다. 이윽고 스킵과 클레이가 들어섰고 로리는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저녁은 언제 먹죠? 배고파 죽겠어요.” 스킵이 들어서면서 말했다.

“거의 다 준비됐어요.” 로리가 말했다.

“이층에 좀 올라가 있어요.” 부엌으로 들어서는 그들을 밀어내며 케이트가 말했다. “올라가서 근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요.”

“저녁식사 때문에 옷을 갈아입으란 말이에요? 손도 다 씻었어요. 이 정도면 되잖아요.” 영문을 모르는 스킵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오늘은 식사가 아니라 파티예요. 그러니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파티라뇨?”

“로리의 환송회예요.”

“로리가 떠난다구요?” 스킵의 목소리는 마치 언젠가는 로리가 떠난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던 것처럼 들렸다.

“리버스데일에서 전화가 왔어요. 내일이면 차가 다 고쳐지고, 오후엔 떠날 수 있을 거래요.” 케이트가 어리둥절해 하는 스킵을 바라보며 말했다.

클레이의 타는 듯한 눈초리가 로리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녀 역시 절망적인 그의 눈초리에 곧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 어서 서둘러요. 식사는 이미 준비가 다 된 상태니까요.”

이윽고 옷을 말쑥히 갈아입은 그들이 식탁 위에 나란히 앉자 로리는 그들을 위해 오후 내내 준비했던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야, 냄새가 기가 막히는데요. 난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말이라도 한 마리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음식을 모두 나른 뒤 로리도 테이블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말 가는 건가요?” 실망으로 가득찬 스킵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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