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에서 온 신부-6화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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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설렘이나 기대도 없이 로리는 케이트 로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2층 계단을 내려갔다. 스킵과 클레이는 벌써 아침식사를 끝내고 일터로 나가 버린 뒤였다.

    메리는 조리대 위에 잔뜩 음식물들을 쌓아 놓고는 점심 때 먹을 고기를 양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일 저녁은 아마 당신이 준비하게 될 거라고 조금 전 클레이와 스킵에게 말해 뒀어요. 클레이는 앞으로 영원히 당신이 식사 준비를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군요, 글쎄." 메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로리는 식탁에 털썩 앉아 자신의 잔에 커피를 따라 부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머지않아 케이트 로건이 이 집에 들어오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할 텐데요, 뭐."

    메리는 로리에게 뭔가 대꾸를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곤 조용히 미소만 띄웠다. 어색함 때문이었는지 공연히 들뜬 목소리로 메리가 말을 내뱉었다. "아무튼 당신은 세상 남자들 마음을 온통 불질러 버릴 만큼 매력적이에요."

    "고마워요, 메리." 로리가 힘없이 대꾸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애인이 있겠죠? 당신처럼 매력적인 아가씨들은 여러 남자를 거느린다더군요. 특히나 도회지에서는 말이에요."

    느닷없는 메리의 질문에 로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순간 댄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얘길 할까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실 그녀는 댄과의 관계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또 정리해 보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이곳 <엘크런>에 도착한 순간 이미 결정지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 댄은 그냥 친구일 뿐이야. 아주 특별한 그리고 좋은 친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원, 그 대답 한번 들으려다 숨 넘어가겠어요, 로리.” 메리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아, 미안해요, 잠깐 생각 좀 하느라구요.” 얼굴이 빨개진 로리가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아무튼 그곳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긴 있나 보군요. 그렇게 당황해하는 걸 보니까 말예요.” 메리는 이윽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녜요.” 로리는 가볍게 머리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로리의 대답이 메리에겐 신통치 않게 들렸음이 그녀의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그녀는 매우 의아해한 듯한 표정으로 로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대뜸 로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차는 언제나 다 고쳐진대요?”

    메리의 그런 말투가 로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하긴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클레이를 잘 알고 있는 메리가 그와 로리 사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눈치채재 못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고, 당연히 메리로 봤을 때는 달갑지 않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모레쯤이면 된다고 그랬어요.”

    “잘됐군요.” 안도의 한숨일까, 메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다시 요리에 몰두했다.

    케이트 로건은 정확하게 아침 10시에 <엘크런>에 도착했다. 꽉 조이는 진 바지 차림에 헐렁한 셔츠를 걸치고 그 위에 실크 스카프를 두른, 아주 스포티한 차림새였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움직일 때마다 어깨 위로 넘실거렸고, 밝고도 환한 미소는 그녀를 더욱 앳되게 보이게 했다. 언뜻 보면 한 16살 정도의 소녀처럼 보였다.

    케이트는 환하게 웃으면서 로리에게 다가왔다. “안녕, 로리. 저런, 그렇게까지 멋있게 차려입지 않아도 되는 건데..., 그냥 편한 차림으로 나오지 그랬어요?”

    로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았다. “원래 정장을 좋아하는데다가, 가져온 옷들도 대부분 이런 종류예요. 너무 딱딱해 보이나요? 갈아입는 게 나을까요?”

    “아녜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아주 멋있고 근사해 보여요.”

    “내가 워낙 정장차림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도서관 일을 하다 보니 그런 캐주얼한 옷을 입을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곳에서는 항상 정장만 입도록 강요하는 편이었고 지금까지 나도 별 불만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요 몇 달간 댄 로저스라고, 이렇게 정장 입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랑 데이트를 해오고 있다 보니 더더욱 캐주얼하고는 멀어지게 된 거예요.”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로리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댄 로저스의 얘기까지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당신, 샌프란시스코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거군요!” 케이트의 얼굴이 순간 환해지는 기색이었고 로리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네, 요 몇 개월간 만나오고 있어요.” 메리의 기침소리가 비난조로 들려오고 있었으나 로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 그럼 이제 떠날까요?”

    “좋아요.” 이윽고 바깥으로 나오게 되자 케이트는 뭔가 불편한 기색으로 로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난 사실 당신에게 조금 놀라기도 했고, 그리고 사과도 하고 싶어요. 당신과 클레이를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그럴 필요 없어요, 케이트. 만약 내가 클레이의 약혼자였다면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케이트는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요. 예쁜 여자들이 잠시라도 클레이 주변에 있으면 이내 초조해져요. 아마 클레이가 원하는 그런 좋은 아내가 될 자질이 내겐 없나 봐요.”

    “나에 대해선 염려 말아요. 어차피 2,3일이면 떠날 텐데요.”

    “오, 로리. 당신을 빨리 보내고 싶어서 그런 건 정말 아니었어요. 단지 이 바보 같은 질투심 때문에...”

    "괜찮아요, 케이트.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아요. 어차피 난 떠나야 하는걸요. 비록 얼마 남진 않았지만 이제 차만 고쳐지면 휴가를 제대로 보내야죠. 갈 곳도 많고..., 혹시 밴쿠버에 있는 빅토리아라고 가본 적 있어요, 케이트?“

    “딱 한 버요. 하지만 그땐 겨우 5살 때였고, 기억도 제대로 안 나요. 하지만 아마, 클레이랑 신혼 여행을 그곳으로 떠날까 생각 중이에요.”

    “그것 참 괜찮은 생각이군요.” 한순간 고통으로 가슴이 죄어오는 듯했으나 로리는 그러한 감정을 케이트에게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써야 했다. “그건 그렇고 내일쯤 메리가 리버스데일로 동생을 만나러 간다는군요. 아마 동생이 그곳에 잠시 머물게 됐나 봐요. 그래서 저녁식사 준비를 내가 대신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때요? 와서 날 도와주지 않겠어요? 아마 함께 일하면 더욱더 가까워 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참 좋은 생각이에요.” 케이트는 로리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날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너무나 고마워요.”

    케이트의 말처럼 로리 자신은 가슴이 터지는 듯한 고통을 혼자 되씹으면서도 그녀를 위해 고통스러운 표정조차 짓지 않고 있었다.

    케이트는 그러한 로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난 오히려 당신 차가 고장나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 드려요. 좋은 친구를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니까요.”

    나이팅게일은 마치 잠든 것처럼 고요한 마을이었다. 중심의 큰길을 두고 양쪽으로 넬리 카페와 보험회사 지점, 약국 등등이 자그마하지만 깔끔하게 위치해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대고 다른 사람과 몸을 부딪쳐야만 하는 샌프란시스코에 비하면 이곳은 인구 1,500의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마치 그림처럼 맑은 마을이었다.

    “이쪽으로 난 도로를 메이플가라고 불러요. 그리고 왼쪽에 제법 큰 건물이 보이죠? 그건 이곳 나이팅게일의 고등학교예요. 그리고 그 뒤쪽으론 내가 말하던 도서관이 있어요.” 케이트는 그녀의 포드 승용차를 천천히 멈춰 세우며 말했다.

    로리는 가볍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 문을 잠그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오, 로리, 그럴 필요 없어요. 이곳에선 굳이 차 문을 잠그지 않아도 돼요. 도둑이 있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으니까요. 한 20여 년쯤에 한 번 차 도둑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얼마 안 가 잡히고 말았죠. 그것도 나이팅게일 사람이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 온 뜨내기의 소행이었을 뿐이에요.”

    로리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고 케이트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 놀랄 일은 못돼요, 로리. 이곳 나이팅게일에서는 2년 전부터 순찰차라는 걸 볼일이 없어져 버렸어요. 헨리라는 마을사람이 술에 만취한 채 소동을 피우는 바람에 한 번 그 경찰차가 온 적이 있었어요. 헨리는 넬리 카페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었죠. 헨리는 그곳 카페에서 노래를 불러 주는 사람이었구요.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헨리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나 봐요.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그 카페에 찾아와선 난동을 피운 거예요. 누가 다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물건들이 많이 부서지고 망가지고 그랬나 봐요.” 로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들썩거려 보였고 케이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 이었다. “하지만 그리 놀랄 일은 못돼요. 여긴 조용한 마을일 뿐, 샌프란시스코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저쪽으로 가면 소방서랑 경찰서가 한 건물에 있어요. 그리고 그 위로 정말 근사한 <자작나무>라는 카페가 있구요. 오늘 거기서 점심을 할까요?”

    “내가 당신에게 점심을 낸다는 조건으로요!”

    “그런 말 말아요, 로리. 당신은 이곳 손님이에요.”

    로리는 자신이 점심을 내겠다는 말을 계속해 봤자 말씨름만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어 버리곤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이곳에서도 농약을 팔고, 종자를 팔고..., 또 농기구 같은 걸 총판하는 그런 곳이 있겠네요?” 이런 시골 마을에선 으레 그런 유의 상회가 크게 번성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무심코 말을 꺼냈다.

    “있어요. 하지만 이곳이 아니라 마을 외곽으로 조금 빠져나가야 돼요. 사실 나이팅게일을 제대로 보려면 차를 몰고 그 외곽을 둘러봐야 되거든요.”

    마침내 그들은 도서관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도서관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잡은 고등학교는 널찍한 운동장과 잘 가꿔 놓은 화단이며 모든 것들이 샌프란시스코의 여느 고등학교들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케이트는 연신 쉬지 않고 나이팅게일 사람들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밤 파티는 아마 당신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로리. 도대체 교육 도로를 버려 두고 이곳 나이팅게일을 찾아든 젊은 아가씬 누구일까. 그리고 결국 차가 고장났고, 할 수 없이 이곳에 머물게 되었고, 게다가 도시에서 온 아가씨가 망아지를 낳는 그 힘든 일을 거들어 주었다는데,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더구나 스킵이 떠들어댄 바에 의하면 보기 드물게 매력적인 아가씨라든데, 등등... 어때요, 재미있지 않겠어요?”

    결국 케이트의 얘기는 로리의 승용차가 문제를 일으킨 것부터 그녀가 할 수 없이 클레이의 집에 머문다는 것까지 어느 하나 이곳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없으며 한결같이 그녀를 만나 보길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아마 도서관을 보면 깜짝 놀랄걸요.” 케이트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도서관을 완공해내기까진 여러 가지 힘든 일도 많았어요. 그러나 아빠가 특히 애를 써서 추진하셨고, 다행스럽게도 마을사람들이 도서관을 건립한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협조적이었던 덕분에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어요. 이곳 나이팅게일 역시 교육열만큼은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 결코 뒤지진 않을 거예요.”

    도서관은 이 마을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게다가 유리창이 아주 많다는 것이 그 건물의 특징이랄 수 있었다. 시간은 정오를 향해 가까워져 가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문이 닫혀 있다는 게 의아스러웠을 뿐,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그 고등학교처럼 널찍한 화단이 평화로워 보였다.

    “문이 열려져 있질 않네요.” 로리는 조금은 실망한 듯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내게 열쇠가 있으니까요.” 그녀는 손가방에서 커다란 열쇠꾸러미를 꺼내 문을 열었다. “작년에 새로이 도서관 건물이 지어지고 한 달 뒤, 홀도프슨 여사가 은퇴를 했어요. 그 뒤 예산 때문에 풀타임으로 일할 사서를 못 구해서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서 사서일을 맡고 있어요.”

    “아니, 사서가 없다뇨? 어떻게 그만한 예산도 없으면서 도서관을 크게 지을 생각을 했죠?”

    “그야 지방의회에 가서 물어 볼 일이죠. 아마 의회에서는 홀도프슨 여사가 시간제로 일했으니 당연히 그 후임도 시간제로 뽑을 생각을 했었나 봐요.”

    “그것도 이해가 안 가는 구실이군요.”

    “게다가 당신이 들어서 더 이해가 안 갈 일은, 지금 새로 지은 이 도서관이 그전보다 무려 두 배나 규모가 큰 도서관이라는 것이죠.”

    로리는 뭔가 말을 계속하고 싶었으나 공연히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계속해서 그 사서 자리를 맡을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지만, 관심 있는 사람도 없는데다가 따분하게 책이나 지키고 있기가 싫다는 이유로 계속 공석인 셈이에요.”

    “사서라는 게 책이나 체크하고, 책 정리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로리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져가고 있었다.

    사실 그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그녀로서도 할말이 많았고, 특히나 사서직에 대한 잘못 인식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대해서는 로리로서도 더 이상 예의를 따지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기에는 한계가 느껴졌다.

    “난 사서직에 대한 그런 그릇된 인식들이 참으로 안타까워요. 어쩌면 도서관 시설이라는 것이 그 지방의 교육척도가 될 수 있고, 교육은 문화의 기본 바탕이 되는 만큼 사서직이란 것은 그 지역사회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고작 책이나 열납한다는 측면으로만 봐도 대단한 일이고 또 중요한 일이죠. 게다가 사서직은 그런 기본적인 일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서비스를 다 하고 있다고 봐야 돼요. 가장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전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식과 정보는 그 지역 도서관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사서의 일이 아닐까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무슨 총회나 그런 건 없었나요? 좋은 도서관은 좋은 사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거예요.”

    “글쎄요.” 케이트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케이트의 대답이 희미한 것을 듣고 난 뒤 그제서야 로리는 자신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지껄여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함과 동시에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그녀는 얼른 말을 바꾸기 위해 애를 썼다. “어쨌든 참 좋은 도서관이에요. 근사하고도 굉장한 규모예요. 맑고 아름다운 이 나이팅게일에 가장 어울리는 건물이에요. 당신이 왜 그토록 이 도서관을 칭찬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아요.” 로리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말이 다 맞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너무 무례했죠?”

    “아니에요, 사실 당신 말이 다 옳아요. 사실 우린 이 좋은 시설을 제대로 사용 못하고 있으니까요. 자원봉사도 그 한계가 있는 법이죠. 솔직히 말하면, 아빠와 시의회에서는 홀도프슨 여사가 다시 일을 맡아 주길 은근히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올바른 처사는 못돼요. 그녀는 20년 이상을 일해 왔고, 이젠 그녀도 쉬어야 할 때거든요. 하지만 아직도 그녀 만한 후임자는 눈에 띄질 않고 있어요.”

    “곧 적당한 사람이 나타나겠죠.”

    “그러길 정말 바래요.”

    그들은 천천히 식사를 마친 뒤, 마을을 드라이브하며 구경하자는 케이트의 제의에 따라 짧은 관광길에 올랐다. 몇몇 교회를 지나 케이트가 다니던 국민학교, 그리고 예쁜 담장과 지붕의 주택가를 지나서 마을 외곽지역으로 벗어나니 <피드 앤드 서플라이>라는 사료와 농약 따위를 취급하는 큰 규모의 상점이 보였다. 조금 전 케이트가 말한 그 농약상회인 듯했다.

    “루크가 아마 저기 있을 거예요. 우리집의 총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죠. 아빤 저 사람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세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저걸 운영해 왔는데 이젠 아빠도 정년이 다 되었고, 루크에게 아빠가 하시던 모든 일을 맡기시려나 봐요.”

    케이트는 밖으로 나와 차에 기대서서 클랙슨을 두어 번 울린 뒤 서 있었다. 로리는 그저 케이트 곁에서 서성이기만 할 뿐이었다.

    “금방 나올 거예요.” 케이트가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햇볕에 그은 한 남자가 어깨에 뭔가를 잔뜩 지고는 성큼거리며 문밖으로 나왔다. 짙은 눈동자가 유난스레 돋보이는 그는 탄탄하고도 유연한 몸매로, 한눈으로 봐서도 그의 어떤 면이 이 나이팅게일의 모든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을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게 했다.

    “자, 여기에 우리들이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케이트가 살짝 윙크를 지어 보이고는 장난스럽게 루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관심도 많으신가요?” 그 역시 반짝이는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글쎄요, 관심은 많지만 아직 경력은 많다고 할 수 없죠.” 케이트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 둘의 대화를 듣고 서 있었다.

    “예쁜 손가락에 칠한 매니큐어가 지워지지 않게 조심해요.”

    “사실 오늘 당신에게 로리 캠벌을 소개시켜 드리려고 온 거예요. 일전에 클레이가 말한 그 차가 고장나서...”

    “아, 그래요.”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갑을 벗은 그의 손이 로리를 향했다. “반가워요, 로리.”

    “저도요.”

    “루크는 내게 오빠나 다름없어요.” 케이트는 스스럼없이 말했고, 루크는 그 말에 동의라도 하듯 말없이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파티에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드리려고 왔죠.”

    “클레이는요?” 그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물론 그도 오죠. 그와 나, 그리고 당신과 로리, 이렇게 넷이서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로리는 케이트의 그런 제의가 어쩐지 루크에게 압박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몹시 부담스러워졌다. “아니에요, 케이트. 공연히 루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요. 난 오히려 스킵과 함께 가는 게 나을 거예요. 스킵이 내게 춤을 가르쳐 준다고 그랬거든요.”

    “스킵은 춤 출 사람이 따로 있어요, 로리.”

    “하지만 루크의 발을 밟느니 스킵의 발이 나을 거예요. 일단 춤을 배우면서 사람들 구경이나 하죠 뭐. 난 나이팅게일 사람들이 즐기는 춤을 하나도 모르니까 말예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루크가 잘 가르쳐 줄 거예요, 그렇죠?”

    “물론이에요.”

    “정직하게 말해야 해요!” 케이트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케이트. 루크는 오늘밤 함께 춤출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내가 공연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루크의 눈이 당황스러운 빛을 띠었다.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은데요, 로리.”

    “난 아마 계속 당신 발만 밝을 거예요. 정말 난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해도 만족해요.”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혼자 앉아 있도록 루크가 내버려두진 않을 거예요. 나도 그렇구요.”

    “염려말고 편한 마음으로 함께 어울려요. 즐거울 거예요.” 루크가 말했다.

    로리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이제 집으로 가서 로리가 입을 옷을 골라봐야겠어요.”

    그들이 탄 차가 출발하는 순간 루크는 모자를 벗어 흔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아주 매력적으로 생겼군요.” 로리가 말했다.

    “그가 아직도 결혼을 안 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에요. 이곳 나이팅게일엔 그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인 여자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댄스파티 땐 여자들이 미친 듯 그에게 매달리죠. 하지만 루크는 그런 걸 싫어해요. 하지만 결국 루크도 결혼을 하겠죠. 나 또한 그가 혼자 사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요. 지난밤에 그는 30살이 되었으니 이제 그도 곧 가족을 갖고 정착하고 싶어하겠죠.”

    로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깊은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어쩌면 루크에겐 진실로 사랑하는 한 여인이 있고, 그 여인은 지금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로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루크와 케이트, 그리고 로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파티는 시작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루크와 파트너가 된 상태였지만 그녀로서는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고, 그저 실례를 범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만 맞출 생각이었다.

    그들이 함께 홀로 들어서니, 명랑한 목소리로 한 남자가 무대에서 흥을 돋우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로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홀 안을 휙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도 컸고, 또 잘 꾸며져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남자 주위로 유연하게 춤을 추고 있는 댄서들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로리는 밝은 파란 색의 웨스턴 스커트를 입고 싶었지만 결국 케이트가 고집하는 옷을 입었는데, 그 옷은 그녀에게 좀 큰 편이었고 불편함과 함께 어색함이 느껴졌다.

    꽤 많은 수의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기에 행여 테이블이 사람들에 밀려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홀은 온통 열기와 음악으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왠지 허전함을 느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녀 역시 저 무대 위로 올라서서 함께 웃으며 춤을 춰야 할 것이다. 분명 케이트도 스킵도, 그리고 클레이도 그녀가 춤추지 않고 앉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오, 벌써부터 내 발이 뛰고 있어요.” 케이트가 소리를 질렀다. 클레이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케이트의 허리를 감싼 채 플로어로 나갔다.

    “우리도 함께 출까요?” 루크가 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춤을 추고 싶은 기색이 아닌 듯했다.

    “이번 곡에는 그냥 앉아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난 춤을 어떻게 춰야 할지 전혀 모르니까요.”

    “괜찮아요.”

    루크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순간 아니나다를까 스커트가 의자에 걸려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소한 실수가 그녀를 무척이나 곤혹스럽게 했다.

    “안녕, 루크.”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늘 나타날 줄은 몰랐어요.”

    “베티 해먼드, 인사해요. 이쪽은 로리 캠벌이에요.”

    “반가워요, 베티.”

    “아, 어제 슈퍼마켓에서 당신 얘길 들었어요. 차가 고장나서 난처하게 되었다는 분 맞죠?”

    “맞아요. 바로 내가 그 장본인이에요.”

    “일이 다 잘되길 바래요.”

    “고마워요.” 비록 베티는 로리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루크를 떠나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는 루크와 춤추기를 무척이나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크, 이번 곡은 베티와 함께 춤추지 그래요. 내가 둘이 춤추는 걸 보면서 스텝을 읽힐께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우린 플로어 바깥쪽에 서서 춤을 출께요. 그래야 당신이 우릴 보고 스텝을 익힐 수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루크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베티는 즐거운 듯 루크의 손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루크는 어느 누구하고도 춤을 추고 싶지 않은 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로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루크에게는 그 첫인상부터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은 슬픔 같은 것이 풍겨 왔었고 그 슬픔은 막연하나마 로리가 동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처럼 느껴졌다.

    “괜찮겠어요, 로리?” 루크가 조심스레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로리는 열심히 스텝을 연구했다. 적어도 도회지에서 온 촌뜨기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스테이지가 끝나갈 때쯤 로리의 가슴도 열기로 젖어드는 듯했다. 그녀의 발이 이제 음악에 맞춰 요동치기 시작했고, 리듬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기쁨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로리, 함께 춤춰요.” 스킵이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아직은 잘...”

    “무슨 소리예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스킵은 그녀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끌었다.

    “스킵, 한번도 이런 춤은 춘 적이 없단 말예요. 아마 나 때문에 공연히 당황하게 될 거예요.”

    “누군 뭐 처음부터 이 춤을 알고 태어났나요?” 스킵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무대로 이끌었다.

    “여기 새 손님이 왔어요, 찰리. 그러니 이번엔 좀 간단하고 쉬운 곡을 부탁해요.” 스킵이 고함을 질렀다.

    찰리는 스킵에게 손가락으로 알았다는 시늉을 하고 난 뒤 마이크를 잡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로리 캠벌이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오늘이 그녀의 첫 무대라는군요.”

    수백 명의 시선이 로리에게로 향해지자 그녀는 쥐구멍 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곧 댄서들이 그녀를 죽 둘러싸고는 소리를 지르며 환영의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첫 스텝을 밟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고 어색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익숙하게 새로운 춤에 몸을 맡기고 자유로이 그들과 함께 무대를 누빌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한 스테이지가 끝났다.

    “펀치 좀 마실래요?” 스킵이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정말 굉장한데요.” 루크가 다가오며 미소 띈 얼굴로 말했다.

    “도회지 촌뜨기치고는 말이죠?”

    “아녜요.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손색이 없어요.”

    “고마워요.”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아녜요. 사실 클레이와 케이트가 당신 의사도 묻지 않고 날 떼밀다시피 맡겼잖아요. 하지만 당신도 나름대로의 시간을 즐겨야 할 텐데, 공연히 내가 당신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해요.”

    “당신과 함께 파티를 즐긴다는 건 부담이 아니라 행운이에요.” 루크가 겸연쩍게 웃으면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역력했다.

    “자, 로리, 이제 난 캐럴린이랑 함께 춤출께요. 괜찮겠죠?” 어느새 스킵은 자기 나이 또래의 앳된 아가씨의 손을 잡아 이끌고 있었다.

    “물론이죠, 스킵. 아까 바보 같은 촌뜨길 데리고 용감하게 무대 위로 나가 준 것 정말 고마워요.”

    스킵은 대답 대신 짓궂은 윙크를 지어 보이곤 이내 플로어로 사라졌다.

    무대 뒤쪽으로 케이트와 클레이가 춤을 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한번 슬픔이 가슴을 옥죄어 오는 것을 느꼈으나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클레이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스킵이 멀리서 살짝 손을 흔들어대자 로리는 깜짝 놀라며 답례로 손을 흔들었다.

    “자, 이번엔 나랑 출까요?” 루크가 제의했다.

    그녀는 주저함 없이 펀치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세 번째 곡이 나올 무렵엔 벌써 몇 번이나 파트너를 바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다 클레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곤 자신의 파트너와 춤에 몰두해 버렸다.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한순간 휘청거리기도 했다.

    겨우 10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로리는 너무나 지쳐 피곤했고, 얼굴과 목이 약간의 술과 피로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친 나머지 그녀는 춤추지 않고 그냥 테이블에 앉아 있으려 했으나 아무도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간신히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살며시 빠져나왔다. 신선한 밤공기가 가슴 깊이 파고 들어왔다. 로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음인지 몇몇 사람들도 열기를 벗어나 밤공기 속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기쁨을 전환시키기 위해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게 길을 걸어나와 루크의 차가 주차돼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루크의 차에 다다르자 그녀는 몸을 기대고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사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춤을 췄지만, 그녀는 슬픔과도 같은 외로움 속에 혼자 방황했다. 오늘 일을 댄에게 말하면 아마, 그런 촌뜨기 녀석과 춤을 췄냐며 그녀를 놀리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옳은 것이 못된다. 그들은 지극히 순박하고 선량했으며, 진심으로 그녀를 환영해 주었던 것이다. 단지 그들의 그런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녀 내부에서 피어나는 외로움이었지 그들이 촌뜨기인 탓은 아닌 것이다.

    “여기 있을 줄 알았소.”

    낯익은 그 목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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