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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클레이가 약혼을 했다구요?” 로리는 충격으로 갑자기 피가 머리끝으로 몰리는 것 같았다. 마치 뭔가에 심하게 부딪친 듯 일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로리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니, 어쩌면 축하한다는 말까지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약혼이라는 그 한 마디가 지난밤의 모든 아름다움과 꿈을 송두리째 짓밟아 버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클레이랑 행복하시길 바래요.” 로리는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이 진심이길 스스로 빌었다. 그녀 앞에 나타난 저 여자가 다름 아닌 클레이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스킵이 공연히 말부터 앞세우는군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의 눈에는 기쁨과 설렘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클레이는 약혼반지조차 사주질 않았는데요.”
“하지만 벌써 형이랑 결혼 얘긴 다 한 거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형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구요.” 스킵이 강조라도 하듯 자신의 말에 힘을 주었다.
“클레이를 좋아한 건 내가 겨우 10살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초등학교 노트를 보면 온통 그의 이름이 가득해요. 물론 클레이는 내게 무관심했고, 그에게 있어 난 그저 이웃집에 사는 여학생정도였을 뿐이에요. 그가 내게 관심을 가지게 하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한 10년은 될 거예요. 겨우 2년 전부터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형과 당신은 결혼하게 될 거잖아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아직 날을 잡은 것도 아니고...”
로리는 계속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분명 케이트는 사랑스러운 여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그녀의 가슴을 달랠 수는 없었다.
“결혼은 아무튼 확실한 거고, 또 그렇기에 난 당신을 형의 약혼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은 일러요.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요.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죠.”
어쨌든 이 순간 로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연출해내는 것뿐이었다.
“케이트에게 나이트 송을 보여 주기 위해 여길 데려왔어요.” 스킵이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엘크런>에 왔어요. 어제 저녁 클레이가 와서 당신 차에 대해 말하더군요. 당신의 휴가가 엉망이 되어 버려서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이 속상했겠어요.”
“이미 일어난 일인데요, 뭐. 낙심해 있는다고 일이 해결될 것도 아니고,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모든 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뿐인 것 같아요.” 로리가 어깨를 들썩해 보이며 대꾸했다.
케이트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 주는 눈빛을 보냈다. “자, 로리, 스킵이 나이트 송을 보여 준다는데, 함께 갈래요?”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마구간을 향해 가는 길에 인부 몇몇이 멀리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이트 송은 보드랍고도 아직은 여린 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서 있었다.
“오, 정말 너무도 귀엽지 않아요?” 케이트가 속삭였다.
어린 나이트 송은 아침식사를 마친 뒤 신비로운 듯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탄생을 지켜본 로리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킵!” 클레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큼 들어선 클레이는 모자를 벗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한 쪽 팔에는 로리가 어젯밤 감아 준 붕대가 보였다. 아니 어젯밤이 아니라 바로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로리는 그의 구릿빛 얼굴을 타는 듯한 눈으로 응시했다. 케이트와 눈이 마주친 클레이는 미간이 좁혀지면서 입술에 엷은 경련이 일어났다.
“안녕, 케이트.”
“안녕, 클레이.”
짧은 인사를 끝낸 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로리에게로 향해졌다. “잘 잤소?” 클레이가 마침내 로리에게 말했다.
“잘 잤어요.” 아마 로리가 그의 약혼녀 앞에서 문제가 될만한 말을 떠벌리지나 않을까 하고 그는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클레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토록 그를 사랑하고 있는 이 순진한 케이트에게 상처를 입히는 짓은 차마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이트 송 얘길 하고 있었어요.” 케이트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형이 나이트 송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하군요. 형은 그런 종류의 이름보다는 브루투스나 파이어파워 같은 이름을 더 좋아하잖아요.” 스킵이 형의 특이한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말에게 물을 날라다 주라고 말한 지 벌써 몇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스킵?”
“네, 그런데...”
“그럼 어서 가보도록 해. 조금 있으면 수의사도 올 거니까.”
스킵의 눈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형의 화난 얼굴에 당황한 스킵은 목 언저리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우물우물 말을 하며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알았어요... 머, 먼저 나가게 돼서 미안해요.”
스킵이 마구간을 나가자 케이트가 염려스러운 듯 클레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클레이, 왜 그래요?”
“내가 시킨 일을 벌써 다 끝내고도 남았을 시간이오. 지금 말들이 얼마나 목말라하겠소. 이런 일은 미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스킵도 잘 알 거요.”
“화를 내려면 스킵이 아니라 나한테 내세요. 전화도 않고 불쑥 찾아온 건 나니까요.”
“당신이 여기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끝날 일이었소.”
공연스레 스킵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클레이에 대해서 로리는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스킵이 자신의 약혼녀를 로리에게 인사시켜 주었다는 사실이 분명 그를 화나게 했을 것이다.
“나이트 송을 보러 왔어요. 스킵이 뭐라고 하든 간에 난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케이트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의 넓은 가슴에 몸을 기댔다.
클레이는 케이트에게 공허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내 로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마치 이해를 구한다는 애타는 표정이 로리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오늘 점심때 아빠를 만나기로 했어요.” 갑자기 생각난 듯 케이트는 클레이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깜빡했다간 늦을 뻔했어요.”
“차까지 데려다 주겠소.”
“아녜요, 당신은 바쁘잖아요. 내일 밤 농장에서 있을 파티에 로리를 데려오시지 않을래요?”
“아녜요, 괜히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아요.”
“무슨 소리예요, 성가시다뇨. 다들 환영해 줄 거예요. 그리고 파티복은 신경쓸 것 없어요. 내게 여벌이 많거든요. 아마 나랑 사이즈가 거의 같을 것 같네요. 키는 나보다 조금 큰 편이지만...”
로리는 더 이상 거절해야 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한 채 말없이 미소만 띄우고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로리는 이 나흘 간을 <엘크런>에서 보내야 되는데 그녀에겐 무척이나 길고도 따분한 시간일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로리에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내 생각을 해줘서 고마워요, 케이트.”
“오전엔 이곳 나이팅게일을 쭉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작지만 아름답고 소박한 곳이에요.”
“클레이!” 멀리서 인부들이 클레이를 부르고 있었다. “이리로 좀 와주겠어요?”
“알았소, 지금 가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 뒤 그는 얼른 로리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그녀는 애써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되도록 냉정하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자, 그럼 먼저 실례해야겠소.”
“그래요. 나중에 봐요, 클레이.” 케이트가 말했다.
클레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인부들에게로 달려갔다.
케이트는 뜰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고 로리는 막연히 그녀 뒤를 따라갔다.
“클레이 말은 당신이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것 같던데, 원한다면 저희 도서관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작년에 새로 하나 지었는데, 물론 당신이 일하는 그런 도서관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나름대로 자랑스러워요.”
“꼭 한번 보고 싶어요.”
“그럼 내일 아침 10시경에 당신을 데리러 올께요. 괜찮겠죠?”
“좋아요.”
“그리고 오후엔 스킵, 클레이랑 함께 파티에 간다고 생각해 두세요.”
내키진 않았지만 로리는 그러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이런 시골구석의 파티에나 참석하면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걸 만일 댄이 안다면 뭐라고 말할까.
“자, 그럼 내일 봐요.”
“잘 가요...” 그녀는 중얼거리듯 작별인사를 했고, 케이트의 승용차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막연해진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뭐 좀 도와 드릴까요?” 점심 준비를 하느라 바쁜 메리에게 그녀가 물었다.
“대답 대신 메리는 그녀에게 유리접시 몇 개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요리 좀 할 줄 알아요?”
“그럭저럭 굶어 죽진 않을 정도예요.”
“그렇게 여읜 걸로 봐서 아마 당신은 남자를 일주일 이내에 굶겨 죽일 것 같네요.”
로리는 깔깔 웃으며 메리의 말에 때꾸했다. “비록 이렇게 약해 보이지만, 메리, 조심해요. 언제 갑자기 달려들어 당신에게 키스할지 모르니까 말예요.”
메리 역시 로리의 농담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웃음 속에서 애플파이는 알맞게 익어갔다.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메리는 천천히 로리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꺼냈다. “리버스데일 근처에 온다는데 나보고 나올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딱 하루만 그곳에 머물건가 봐요.”
로리는 메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동생을 봤으면 좋겠는데...”
“그럼요, 가서 만나야죠. 메리, 주방일을 맡을 누군가가 필요한 거죠?”
“일꾼들은 저녁에 다들 집으로 가기 때문에 스킵과 클레이 것만 준비하면 돼요.”
“걱정 말아요. 절대로 둘 다 굶겨 죽이진 않을 테니까요.”
“할 수 있겠어요?”
“제 실력을 그렇게 못 믿으시겠다면 케이트 로건이라도 불러서 같이 준비를 할께요. 됐어요?”
메리는 기쁨의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메리는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뒤 자신의 침실로 올라갔다.
뭔가 허전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와 뜰 앞을 서성이던 로리는 클레이가 컴퓨터를 보여 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그 날 오후를 그 일을 하며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쯤 앉아 있었을까. 목 언저리와 어깨가 결려오자 그녀는 몸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언제부터 와 있었소?” 굵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오, 클레이! 깜짝 놀랐잖아요.”
“오래됐소?” 반복해서 클레이가 물었다.
“한 한 시간쯤 됐어요.” 그녀는 시계를 보면서 대답했다.
클레이는 한 발짝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내 사과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로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선 이제 아무것도 기대한다거나 바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신에게 꼭 해명해야 될 게 있소.”
“클레이, 당신이 내게 무엇을 변명해야 한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어요.” 로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으나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로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의 깊은 한숨이 어깨를 더욱 처지게 만들었다.
“로리, 물론 미안하오. 하지만 그건..., 오, 맙소사.”
“클레이, 난 정말...”
그는 로리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갑자기 격렬하게 그녀의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케이트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소.”
“아니에요.” 그녀는 그의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더 판단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제발, 아무 얘기도 말아 줘요.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에요.”
“케이트와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소.” 클레이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얘길 시작했다.
“제발 그만해요.”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로리 스스로도 자신이 그 장소를 박차고 나올 정도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년 전쯤부터 사람들이 나와 케이트가 결혼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소. 난 그것에 대해 좋다, 싫다의 말을 꺼내지도 않았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걸 사실로 받아들였소. 남자에겐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나눌 아내가 필요한 것 아니겠소?”
“케이트는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분노와 함께 모멸감 따위가 치밀어 올랐지만 로리는 자신이 그렇게 심하게 상처받았음을 클레이가 눈치채지 않도록 애써 평정한 척했다. “당신이 사과해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케이트예요.”
“알아요.” 그는 한 손으로 눈을 누르며 피곤한 듯 말했다. “하지만 케이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소.”
“그럼, 그러지 않으면 되잖아요.”
클레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길에 로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보낼 수밖엔 없었다.
“케이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알아서 좋은 일도 아니구요. 그러니 어젯밤에 잠깐 저질렀던 실수쯤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클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간단해요.” 그녀는 마음의 동요를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 “생각해 봐요, 클레이. 우린 겨우 몇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이에요. 스타 브라이트와 나이트 송, 우린 그들과 함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체험했어요. 그 뒤로는 아마 별빛 탓이었을 거예요. 우린 서로를 모르는 이방인일 뿐이에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두려워, 로리는 고개를 돌리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정말 달빛 때문이었을까?”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절망스럽게 들렸다.
“물론이에요. 그밖에 또 뭐가 있겠어요?”
갑자기 사무실의 불빛이 흐려지는 듯했다. 로리는 갑자기 엄습하는 피로감을 느끼며 의자에 꺼져 들어갈 듯 몸을 뉘었다. 그와의 이 우연찮은 만남이 얼마나 그녀를 괴롭혔는지 모른다.
프린트키를 누른 뒤 시작된 타이핑 소리가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시 동안 잃게 했다. 2시간 동안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자료를 정리하고, 입력시키고, 다시 프린트로 뽑아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생각할 시간을 아예 갖지 않은 것이 차라리 그녀를 편안하게 했다.
로리는 집안으로 들어와 리버스데일에 있는 정비소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로리 캠벌입니다. 물펌프 때문에 연락했던 나이팅게일의...”
“네, 캠벌 양, 무슨 일이시죠?”
“뭐, 별 문제가 또 생기진 않았나 해서요. 클레이, 아니 프랭클린 씨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전 차가 수리될 때까지 꼼짝 않고 이곳에 있어야만 하거든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빨리 수리가 끝나 돌아갔으면 해서요. 이해하시겠죠?”
“하지만 아가씨, 물펌프가 도착을 해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좀 빨리 도착하도록 하실 수 없나요?”
“벌써 출발해서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에요. 로스앤젤레스에서 배편으로 포틀랜드로 이미 보냈어요. 그 다음에 그곳에서부터 또 여기까지 운반해야 하고, 그러자면 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흘이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당신이 어제 너무 늦게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도 나로서는 빨리 한다고 하는 중입니다.”
“알았어요. 너무 재촉하기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누구나 다 그런걸요, 뭐. 아무튼 도착하자마자 이쪽에서 연락드릴 테니까 염려 마세요.”
“정말 고마워요.”
“클레이 씨가 당신 차를 끌고 왔기 때문에 견인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배삯과 장거리 통화요금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그제서야 그녀는 그 스포츠카가 뒤뜰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내일이나 모레쯤 내게 연락 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아무튼 도착하자마자 연락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걱정 말아요.” 그 기술자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전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했다.
그 날 저녁식사는 다소 짜증스러웠다. 만약 스킵이 없었다면 그녀는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을 것이다. 클레이는 시종일관 거의 말이 없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스킵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고, 로리는 애써 밝은 표정으로 분위기를 맞추려 했다.
“로리, 여기 있는 동안 승마를 배우는 게 어떻겠어요?” 스킵이 말했다.
“아녜요.” 킹이나 헤라클레스를 본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했다.
“레인 매직을 타면 근사할 거예요.”
“레인 매직이라뇨?”
“아, 그건 케이트가 지어 준 이름이에요. 클레이 형은 그 말을 아주 아끼죠. 멋있고 차분한 말이에요.”
클레이는 묵묵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로리의 심기는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되었고, 케이트의 이름이 나오자 공연스레 얼굴이 굳어져감을 느꼈다.
“고마워요, 스킵. 하지만 승마는 관심이 없어요.”
“말타는 게 겁이 나서 그래요?”
“그래요, 내겐 말보다는 회전목마가 어울릴 거예요. 전 도시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아가씨들도 다 승마를 즐기던데요. 한번 시도해 봐요. 공연히 겁부터 먹지말고 말예요.”
“오, 스킵. 정말 됐어요.”
“로리, 절대로 다칠 일은 없어요. 내가 바로 옆에서 가르쳐 줄 테니까요.”
“됐어요, 스킵.” 그녀는 자신이 말을 타고 있는 어설픈 모습을 떠올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둬, 스킵.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 클레이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스킵의 놀란 시선이 로리에게서 클레이로 옮겨갔다. “난 단지 로리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이었어요, 형.”
클레이가 쥔 물 컵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녀는 행여 부서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로리가 승마에 관심이 없다면 그걸로 된 거지, 왜 자꾸 쓸데없이 말을 물고늘어지는 거니?”
스킵의 얼굴에서 놀라움은 사라졌지만 이내 분노로 몸이 빳빳이 경직되어 왔다. “클레이 형,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요? 오늘 하루 종일 형은 마치 상처 입은 곰처럼 아무에게나 으르렁거리고 있어요. 갑자기 왕이라도 됐나요?”
“실례지만 애플파이를 좀더 가져올께요.” 로리는 그렇게 말하곤 얼른 식탁을 빠져나왔다. 그녀로서는 그들의 날카로운 언쟁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어대건, 그녀는 알고 싶지도,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얼마 있지 않아 곧 부드러워졌고, 웃음소리까지 들려오자 로리는 부엌에서 나와 식탁으로 향했다.
“미안해요, 로리.” 클레이가 말했다. “스킵이 옳아요.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공연히 짜증만 부린 거였소.”
“다행이에요, 서로 이해할 수 있어서.” 그녀는 맑은 미소를 지어 보내며 말했다.
스킵은 또 별달리 토론할 가치도 없는 몇몇 화제를 꺼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늘은 몇 시에 케이트를 만날 거죠, 형?”
“케이트는 오늘 농민조합 여성 단체 사람들과 약속이 있어. 아마 내일 밤 파티 때문에 모이는 걸 거야.”
“아, 그래요. 형 말을 들으니, 오늘 그녀가 바쁘다고 했었던 것 같아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스킵은 로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리, 내일 파티에 같이 가는 게 어때요? 해마다 열리는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인만큼 굉장히 멋있고, 준비가 잘돼 있을 거예요.”
“이미 케이트가 날 초대해서 그녀랑 함께 가기로 했어요.”
“괜찮다면 우리 차로 함께 가요. 당신과 팔짱을 끼고 함께 입장하고 싶어요. 아마 당신은 거기에 온 남자들을 온통 휘저어 놓을 거예요. 특히나 이곳 여자들이 모두 눈독을 들이는 루크 리버스의 마음까지도 당신이 사로잡을걸요.”
순간 클레이의 스푼이 유리접시에 쨍그렁 소리를 냈고, 그는 짧게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해요, 스킵. 이미 케이트의 차를 타고 가기로 했어요.”
“이런 제길. 그럼 할 수 없죠, 뭐.”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에서 식사는 끝났다. 한순간 클레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마치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클레이의 눈빛이 그녀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식사 후 스킵은 트럼프 놀이를 제의했고 그녀는 클레이로부터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곧 스킵과의 게임을 시작했다. 클레이는 서재에 앉아 말없이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손을 움직일 때마다 서재 쪽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로리가 느끼는 이 애타는 심경을 클레이도 피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대 8이에요. 당신이 또 2점이나 잃었어요.” 스킵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마 오늘은 게임이 내키지 않나 보군요.”
“그런가 봐요. 괜찮다면 그만 자러 올라가야겠어요.” 사과하는 듯한 미소를 보내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스킵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관심은 카드가 아니라 온통 클레이에게 향해 있었다.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 관계에 있는 클레이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뒤죽박죽 어수선하기만 했던 것이다.
우울한 가운데 그녀는 컵을 들고 싱크대 쪽으로 가 깨끗이 씻고 대충 정돈을 마쳤다. 그리고 손을 씻은 뒤 침실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클레이가 문 쪽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킵은 어디 있죠?”
“2층에 올라갔을 거요.” 로리는 그들 사이에 은연중에 고조되어 가고 있는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하품을 하며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오늘 식사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질투하고 있었소...” 그는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하듯 말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당신은 내내 스킵과 함께 웃고 떠들었지만 난 당신의 눈이 나를 향해 반짝이기를 줄곧 원하고 있었소.” 그는 한순간 말을 멈추다가 이내 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는 내 자신이 정말이지 믿어지질 않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