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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 그리고 스킵과 마주 앉은 저녁식탁에서까지 로리는 메리가 뱉어낸 말들이 떠올라 어수선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흘 이상은 절대로 머물 수가 없어요.”
“당신을 무슨 죄인처럼 이곳에다 가둬 둘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 말아요, 로리.” 클레이는 무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메리 말에 따르면 이번 여름 내내 기다려도 될까 말까 할 정도라던데... 정말 도저히 난 그럴 수 없어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에요.”
“염려 말아요, 내가 조지에게 다시 한번 말해 놓겠소. 그가 당신 차 수리하는 것을 잊지 않는 한 당신 염려처럼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말이오.”
“제발 그에게 내 차에 관해서 잊지 않도록 확인 전화를 좀 해주시겠어요, 부탁이에요.” 로리는 거의 애원하듯 그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최악의 경우엔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소. 목요일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이곳에 들어오는데 정 급하면 먼저 버스를 타고 가고, 그뒤에 차가 고쳐지는 대로 가져가면 되잖겠소.”
“버스가 있어요? 정말 다행이군요.” 아무튼 휴가의 시작은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 최소한 그 버스라는 것이 휴가의 마무리까지 망쳐 놓진 않겠지 하는 기대가 로리의 불안을 어느 정도는 가시게 했다.
“자, 이젠 염려 말고 식사를 하죠, 배고프지 않아요?” 스킵이 물었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에요.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종일 거의 먹은 게 없었거든요.”
클레이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튀긴 닭을 내밀었다. 그뒤로 감자 튀김, 비스킷, 그리고 연푸른 빛깔의 강낭콩 요리와 야채 샐러드, 우유 등이 연이어 그녀 앞으로 내밀어졌고, 로리는 자기 앞에 놓인 접시를 거의 남김없이 해치우고 있었다. 긴장 뒤의 식욕은 접시마저 깨물어 먹을 정도였다.
“그래도 디저트 먹을 배는 따로 남겨 둬야 해요.” 클레이 특유의 낮고도 울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의 미소가 묘하게 그녀의 가슴을 다시 울렁거리게 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마구간으로 가서 킹 지니어스를 당신에게 소개시켜 줄 생각이에요.” 스킵은 닭다리 한쪽으로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흔들어대며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무튼 만나 보면 재미있겠죠.”
“일단 한번 만나게 되면 당신이 침실 발코니에서 이 <엘크런>을 봤을 때와 똑같은 감동을 받게 될 거예요.”
스킵의 말투로 봐서 그 킹이라고 불리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집앞 풀밭에서 한가로이 거닐고 있던 여러 말들 중의 한 마리인 게 더 확실했다.
“헤라클레스 근처엔 로리를 데려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스킵.”
“물론이에요.”
“헤라클레스는 또 누구죠?”
“클레이 형의 애마예요. 아주 근사한 말이죠. 처음에 이곳 <엘크런>에 헤라클레스가 왔을 땐 굉장했어요. 사납고 난폭한데다가 아무도 녀석을 길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클레이 형이 해냈어요. 클레이 형만 있으면 아주 온순해져요. 하지만 일단 형이 없으면 여전히 난폭해요. 누구도, 클레이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은 가까이 오는 걸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로리는 두 형제를 번갈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클레이는 하얀 이를 드러낸 채 환한 미소를 그녀에게 지어 보였다. 순간, 로리는 또 한차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온몸이 저릴 듯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댄 로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최근 몇 개월 간 만나오던 증권 중개업자였다. 로리는 그의 안정되고도 탄탄한 직업, 그리고 세련된 용모에 관심이 끌렸고, 근래에 와서는 자기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로리는, 적어도 그와 사랑에 빠졌다는 그 생각만큼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댄 로저를 친구 이상의 연인으로서 사랑하고 있었다면 결코 클레이라는 이 낯선 남자에게 이토록 강렬한 끌림을 받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녀로서는 이번 휴가 동안 댄과 떨어져 있어 봄으로써 그에 대한 감정을 스스로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이틀만에 로리는 그 대답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리는 애써 클레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 눈길을 돌렸다.
스킵은 <엘크런>에 있는 여러 종류의 종마들에 관해서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킹을 보면, 아마 당신도 그녀석에게 흠뻑 빠질 거예요. 지난 5년 내내 경마대회에 나가 연승을 거둔 녀석이에요. 굉장한 일이죠, 5년 연승이란 건. 아무튼 킹을 그 정도로까지 만든 건 다름 아닌 클레이 형이에요. 형이 아니면 누구도 킹을 그렇게 멋있고 근사하게 길들이진 못했을 거예요.” 스킵의 눈빛은 킹과 자기형에 대한 자부심으로 반짝거렸다.
“들어올 때 집 앞에서 본 그 말들이 다 당신네 소유인가요?”
“몇몇은 우리 소유고 몇몇은 우리가 대리 사육을 하고 있어요. 전국 각지에서 클레이 형에게 말을 맡기고, 형은 그들을 사육하고 조련시키는 일을 하죠.”
“굉장하군요, 클레이. 전국 각지에서 당신에게 말을 조련시키도록 부탁하다니.” 로리는 클레이가 말등에 올라타서 가까스로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며 몸을 뒤트는 장면을 생각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할리우드 판 영화처럼 말 길들이는 게 그리 멋있고 재미있기만 한 건 아니죠.” 클레이는 덧붙였다.
면도를 말끔히 한 그의 턱 언저리가 로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코끝이 찡해져 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몇 살이오?” 클레이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순간 로리는 그의 당혹스런 질문에 어쩔 바를 모르고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24살이에요.”
더듬거리는 그녀의 대답에 클레이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스킵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유쾌한 듯 입을 열었다. “안됐구나, 스킵. 너하곤 너무 나이가 안 맞는걸.”
“형,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형은 30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한 사람들 얘기도 못 들었어요? 나이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는 거예요. 특히나 남녀간에 있어선 말이에요. 그리고 난 언제나 내 이상형의 여자는 나보다 연상이길 원했어요. 게다가 로리처럼...”
“로리처럼?” 클레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스킵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였다. “로리는 전혀 도회지 여자 같지 않은 귀엽고..., 순수한 매력이 있어요.”
로리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들 두 형제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들 대화의 대상인 로리가 곁에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린 스킵은 비스킷을 입에 물며 우물거리듯 말했다. “사실 난 로리가 한 20살 정도 밖에 안 되는 줄 알았어요.”
“어쨌건 고맙다고 말해야겠군요.” 그녀는 버터를 비스킷에 찍어 바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로리. 우리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소.” 클레이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몇 살쯤으로 보이죠?” 설레는 듯한 눈동자로 스킵은 로리를 쳐다보았다.
“20살?” 로리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스킵은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난 주에 17살이 됐어요.”
“놀랍군요, 난 그보다 더 많이 말하려 했었는데.”
스킵은 더더욱 기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내 나이보다 좀 높게 보는 편이죠.”
“자, 스킵. 오늘 저녁엔 루크 리버스를 보살펴야 하는 걸 잊지 않았겠지?” 클레이가 스킵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스킵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이따가 하면 되잖아요.”
“로리만 좋다면 킹은 내가 가서 보여 주도록 하마.”
클레이의 제안이 스킵을 다소 당황하게 만든 것 같았다. 로리도 그들 두 형제 사이에서 감도는 긴장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막연히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스킵이 이윽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형, 정말 로리랑 함께 가고 싶어요?”
클레이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글쎄, 뭐 안될 이유라도 있을까?”
“아뇨, 형. 물론 그럴 이유는 없어요.” 스킵은 비스킷을 입에 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클레이 형이 더 잘 알아서 구경시켜 줄 거예요, 로리.”
“알았어요.” 로리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스킵의 눈빛에 분명히 불쾌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그들 형제 사이의 미묘한 질서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스킵이 원한다면, 구경하는 것을 내일로 미루도록 하죠. 내일이면 스킵이 저녁시간을 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뇨, 됐어요. 클레이 형이 당신을 데리고 가서 말을 구경시켜 주고 싶은가 봐요. 함께 가도록 해요.”
저녁식사가 끝나자 로리는 식탁을 치우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메리는 그녀가 부엌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비록 친근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메리는 그녀에게 아까보다는 조금 다정한 투로 말을 건넸다. “마구간을 구경하기로 했다면서오, 어서 나가 보기나 해요.”
“그럼 내일 저녁식사땐 내가 당신을 도우는 걸 허락해 줘요.” 그녀는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해 마치 어리광을 피우듯 메리의 팔을 잡았다.
메리는 그러한 로리의 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며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 애플파이는 어땠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지금까지 먹어 본 것들 중에서 최고였어요.”
만족스런 표정이 메리의 얼굴에서 가득 풍겨 나왔다. “아마 보통 때보다는 맛이 영 달랐을 거예요. 재료를 좀 유별나게 써봤죠. 특이한 맛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는데. 도회지 아가씨에게 나이팅게일 최고의 애플파이 맛을 선사할 생각이었거든요. 아무튼 맛이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좀 걱정했었는데...”
이윽고 클레이의 안내로 로리는 마구간으로 가는 길을 나섰다. 뜰을 지나 어마어마하게 큰 문 앞에 섰을 때, 로리는 마치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풀내음과 가죽냄새, 그리고 향그러운 구유내음이 시골 밤의 적막 속에 새어나왔다.
“킹은 여기에 있어요.” 턱 끝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문을 열어 젖히자 로리가 이제까지 봐온 것들 중에서 가장 멋진 한 마리의 말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짙은 밤색의 늠름한 모습이 그녀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아마 자기 자신에 대해 대단한 자만심이라도 가진 듯 담담하면서도 뭔가 오만한 모습이었다.
“이봐, 킹, 너에게 이 젊은 아가씨를 소개하기 위해 모셔왔다.”
“정말 굉장하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당신이 정말 저 말을 길들였다는 건가요?”
클레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로리가 뭔가를 그에게 계속 물어 보려 했을 때 다른 한쪽 구석에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유감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헤라클레스요. 자기를 무시하지 말아 달라는군.” 그는 킹의 맞은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검은 색의 말이 불쑥 튀어나와 왜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 주지 않느냐고 불평이라도 하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로리 양을 소개시켜 주기 위해 모시고 왔어, 헤라클레스. 이젠 그 고개 좀 집어넣지, 그래.”
“안녕.” 로리는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클레이가 그 동물들과 마치 뜻이 다 통하는 것처럼 대화를 한다는 사실이 좀 의아스러웠지만 그녀 역시 헤라클레스에게 사람에게 대하듯 인사를 했던 것이다.
“겁내재 않아도 돼요, 내가 있는 한은 말이오.” 클레이는 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로리는 마구간의 크기가 상상 외로 어마어마하게 큰 것에 무척 놀랐다. “말이 대체 몇 마리쯤이나 있죠?”
“36마리에다가 지금 새끼를 배고 있는 놈이 4마리죠. 하지만 이건 <엘크런>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오.” 그는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반대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 사무실이 저기 있는데 한번 보겠소?”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다다랐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때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선을 끈 것은 벽에 장식되어 있는 수십 가지의 기념사진, 상장, 그리고 트로피였다. 책상 옆으론 스킵이 말하던 컴퓨터가 놓여져 있었다.
“내가 도서관에서 사용하던 것과 거의 같은 기종이군요.”
“근방 고등학교 학생을 임시로 고용해 데이터 입력은 시켰지만 아직 제대로 되어 가는 것 같지는 않소.”
로리는 파일을 살펴보고는 자기가 충분히 처리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서자 뒤돌아 그에게 말했다. "그 학생에게 계속 부탁할 것 없이 내가 타이핑해서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클레이?“
“로리, 그럴 필요는 없소. 당신을 이곳 사무실에다 처박아 놓고 그 지겨운 타이핑을 시키고 싶진 않소.”
“단지 난 내 차가 고쳐질 동안 당신에게 뭔가 그 보답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좋소, 당신이 굳이 원한다면. 하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소.”
“하도록 해주세요.” 로리는 자신의 머리칼을 한번 쓸어 넘기며 방긋 웃었다.
이윽고 사무실을 나서게 되자 클레이는 아주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이 너무 아쉽군. 모임이 있어요. 내가 빠지면 안될...”
“그래요? 걱정 마세요, 난 괜찮으니까.”
여전히 클레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주겠소.”
잠시 후 클레이는 그녀를 데려다 준 뒤 떠났다. 집안은 조용했다. 메리도 아마 일을 다 끝낸 뒤 자신의 침실로 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스킵은 전화기에 매달려 그의 친구와 이야길 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리는 거실로 들어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잡지나 하나 꺼내 건성으로 책장을 넘겼다.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로리는 자신이 은연중에 클레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녀 스스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스킵이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피곤하지 않아요, 로리?”
“전혀, <엘크런>을 아직 열 바퀴는 더 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명랑하게 대꾸했다.
“킹을 봤어요? 어땠어요?”
“굉장했어요, 난 지금까지 그렇게 크고 멋있는 말을 가까이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봤을까...”
“형이랑 나는 그 말들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어요. 우린 그것들을 직업적으로 돌본다기보다는 한 가족처럼 돌보고 키우고 있죠. 눈물이라곤 모르는 클레이 형도 말의 사육기간이 끝나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갈 땐 공연스레 눈시울을 붉히곤 해요.”
로리는 순간, 그 샌프란시스코의 하늘빛 같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흐린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과는 달리, 푸른 빛깔의 하늘이 그대로 점점이 푸른 구슬처럼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 잠이 안 오면 함께 트럼프 놀이를 하는 게 어때요?” 스킵은 어느새 카드를 손에 쥐고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잠은 올 것 같지가 않았고, 그렇다고 혼자서 멍하니 거실에 앉아 클레이를 기다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어서 로리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몇 번 패를 돌리기도 전에 스킵은 이내 피곤한 듯 하품을 해댔고 로리는 카드를 접어 챙기며 스킵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잘 시간이 너무 늦어진 건 아니에요?”
“아녜요. 항상 이 시간쯤에 잠자리에 들곤 해요. 푹 자고 새벽이면 일을 나가죠. 우리가 일어났다고 해서 해 뜨기 전에 굳이 일어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늦게까지 푹 자도록 해요.”
스킵의 그 말은 그들의 일과가 새벽녘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리는 스킵을 따라 층계를 올라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따뜻한 물에 샤워까지 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 끝에 걸쳐 앉아 자신의 애당초의 계획과 모든 게 얼마나 달리 진행되어 가고 있나를 생각해 봤다. 계획 대로였다면 지금쯤 모임 첫날을 자축하는 칵테일 파티에 참석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게 엉망이다. 그녀는 그 작가모임 대신 잘생긴 시골 총각 때문에 마음만 공연히 들떠 잠 못 이루고 있는 것이다.
로리는 혼자서 허탈하게 웃었다. 모든 게 엉망이야. 엉망도 한참 엉망이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집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클레이가 도착한 모양이다. 그녀는 얼른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분명히 그 소리는 인기척이라기보다는 비명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로리는 순간 당황했다. 그것은 클레이가 몰고 온 트럭이 멈추는 소리와는 아주 다른 소리였고 거의 신음소리에 가까운 비명소리임이 틀림없었다. 가운을 집어들고 그녀는 얼른 슬리퍼를 신고는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에서 들어 보니 그 비명소리는 마구간 쪽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말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아무튼 그녀는 우선 스킵의 방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도대체 메리는 어디서 자는지, 스킵의 방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스킵의 방을 찾았지만 그는 코를 골면서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스킵, 빨리 일어나 봐요. 아마 말이 어떻게 되었나 봐요, 스킵!”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코만 골뿐이었다.
“스킵!” 이번엔 목청을 더 높여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스킵, 제발 좀 일어나 봐요, 난 알다시피 도회지에서 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라요. 어떻게 해야 하죠, 스킵? 제발 좀 일어나 봐요!”
마구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하고 거칠어져 갔다. 어쩌면 마구간에 불이라도 난 건 아닐까. 맙소사, 이 일을 어떡한담. 그녀는 방을 뛰쳐나와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함을 질러댔다. “스킵! 메리! 아무라도 좀 나와 봐요, 어떻게 좀 해봐요!”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외침을 듣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만이 귓속에서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막연히 집을 나와 뜰을 가로질러 떨리는 손으로 마구간으로 향한 문을 열었다. 희미한 전등불만이 간신히 그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꿈치를 들고 그녀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가슴을 섬뜩하게 죄어오는 괴상한 소리가 말의 거친 숨소리 사이에 섞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착하지, 자아...” 그녀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그 속을 채 들여다보는 둥 마는 둥 그녀는 다시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말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다시 한번 그녀는 용기를 냈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 상황에서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보 같은 스킵, 그리고 메리는 왜 그리 깊이 잠들어 버려서 이럴 때 일어나지도 않는담.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과 잔뜩 긴장된 얼굴 표정으로 가만히 문을 밀어 젖혔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누군가 방해자가 문을 열었음을 깨달은 탓일까 더욱더 격렬하고도 거센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녀는 온몸이 거의 얼어붙어 버릴 것처럼 움찔 놀라 뒷걸음질쳐 버리고 말았다.
어두움, 신음소리. 이제 겁에 질릴 대로 질린 로리는 무섬증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거의 끌다시피 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싸늘한 한기가 그녀를 에워쌌다. 무서움이었을까, 아니면 밤 공기 탓이었을까. 그녀는 오싹해진 몸을 덮기 위해 손을 들고 있던 가운을 펼쳤다.
그때였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오, 틀림없이 클레이일 거야. 그녀는 말문이 막혀 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가 로리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을 때야 그녀는 얼어붙은 입을 겨우 뗄 수 있었다. “오, 클레이...”
마치 쓰러져 버릴 듯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클레이가 붙들며 말했다. “로리, 무슨 일이오?”
“마... 마구간에 이... 이상한 일이 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