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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간이라구요?” 로리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외쳤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럴 순 없어요!”
“글쎄...” 클레이는 그녀를 위로라도 하듯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소. 그러니 좀 침착해요. 그 차가 하필이면 외제라서 수리하기가 더 힘드는 거요. 아니면 하루 만에도 끝낼 수 있는 일인데 말이오.”
“아무튼 다른 수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로리는 그의 말은 아예 무시한 듯 흥분한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이곤 뭔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는 로리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한번 해보기나 합시다. 무슨 방법이라도 떠오른 게 있다면 말이오.”
그의 침착함은 오히려 로리를 화나게 했다. 사실 그에게 화를 낼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이곳에서 나흘 간 있어야 한다면 지금까지 몇 달간이나 준비해 온 작가모임은 구경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작가모임 참석 이외에도 그 이후의 그럴싸한 휴가계획을 갖고 있었다.
클레이는 소용없을 거라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전화번호부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낚아채듯 책을 받아서 열심히 뒤적거려 보았다. 다행히 한 군데 유일한 자동차 정비소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네...” 그녀는 실망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는 그들을 향해 뒤돌아 섰다. “도와줘서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저..., 여기가 무슨 마을이라고 했죠? 호텔이라도 하나 잡아야겠어요.”
“나이팅게일을 말하는 거요?”
“아, 네. 맞아요.” 그녀는 멍청하게 환히 웃었다. 그 순간 그녀가 실상 할 수 있는 일은 그 뿐이었다. “지금 나에겐, 아무 곳이건 깨끗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클레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턱을 쓱 문질렀다. “글쎄,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못될 것 같군요.”
“이번엔 또 뭐죠? 호텔 지배인이 그 조 할아버지랑 함께 낚시라도 떠났나요?” 로리는 애써 흥분하지 않으려 했으나 잘 되지가 않았다. “아무튼 이곳 사람들은 지나치게 낙천적이군요. 누군가 자신을 꼭 필요로 할 상황에 처했을 경우를 미리 생각해 주고서 비우든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글쎄, 이번엔 낚시가 문제가 아니라 호텔이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죠.”
“뭐라구요?” 마침내 로리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호텔 하나 없을 수가 있죠?”
“보다시피 이곳은 교통이 많은 지역이 못되오. 사람들은 거의가 다 고속도로를 이용하죠.”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그 기막힌 경관에 대한 지불치고는 너무 비싼 셈이다.
“리버스테일이라는 이곳 근방은 어떤가요? 거긴 호텔이 있겠죠?”
클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근사한 호텔이 하나 있긴 해요. 하지만 벌써 만원일 거요.”
“만원이라뇨? 이곳엔 관광객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이젠 클레이에게 따지듯 그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관광객 때문이 아니오.” 여전히 그의 얼굴은 로리의 신경질이 이해된다는 듯한 침착한 표정이었다.
“관광객이 아니면 뭐죠? 어떻게 호텔이 관광객도 없는데 그렇게 만원이 될 수 있단 말이에요?" 애써 진정하려는 모습이 그녀의 목소리에 역력했다.
“제롬 씨 때문이오.”
“제롬이라뇨?”
“정확히 말하자면 제롬 씨네 가족 때문이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녀의 답답함은 극에 달했고 더 참을 수도 없을 것처럼 얼굴마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제롬 씨네 가족, 아니, 어쩌면 제롬이란 성씨를 가진 사람이 모두 참가하는 모임이 있소. 각 주에서 다 모이는 아주 큰 행사요.”
“맙소사.” 그녀는 리버스데일의 호텔에 확인 전화까지 걸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긴장감이 주방 전체에 맴돌고 있었다. 이젠 어떡한담. 정말 공원 벤치에 쭈그리고 잠을 자야 하는 건 아닐까. 글쎄, 이 망할 나이팅게일엔 공원마저 없을지도 모르지.
뒤채로 향한 문이 열리자 스킵이 즐거운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식탁 쪽에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차를 따라 마셨다. “어떻게 됐죠?”
“모두 다 엉망이에요. 물펌프는 나흘이나 돼야 고칠 수 있다고 하고 게다가 100km 반경 내에 있는 유일한 호텔은 다음주까지 모두 예약이 돼 있다는군요.”
“으음, 그래요? 하지만 뭐 그리 문제가 될 건 없네요. 여기 계시면 되니까요.” 스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클레이 형, 괜찮죠?”
로리는 얼른 클레이가 입을 열기 전에 대답했다. “아녜요,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폐를 끼치는 건 아니죠. 그렇죠, 클레이 형?”
“아니에요. 그건 물어 볼 필요도 없어요.” 그녀는 클레이의 대답을 가로막으려 성급하게 대꾸했다. 로리는 이 사람들을 모르고 게다가 그들 역시 로리를 모르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는 거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레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보다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원한다면 이 <엘크런>은 당신을 환영할 거요.”
“이미 너무 많은 실례를 했어요. 정말이지...”
“빈방도 충분해요.” 스킵이 말했다.
그의 천진난만한 푸른 눈이 그녀의 결정을 흐트려 놓았다.
“2층에 침실이 있어요. 물론 비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남자 둘이랑 같이 있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메리도 여기 있으니까요.”
그들이 이토록 자기에게 친절히 대해 주는 이유를 그녀는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의 거절의사가 점점 약해져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들은 모르잖아요.”
“알 만한 거는 아는 거고, 필요 없는 건 알 필요가 없죠, 안 그래요 클레이 형?” 스킵은 다시 한번 형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듯한 미소를 보냈다.
“당신만 좋다면 여기 머무는 게 더 나을 것 같소.” 클레이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다시 한번 로리는 이 놀라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선이 분명한 그의 턱 언저리가 한층 더 그를 완고하게 보이게 했다. 언제나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안다고 자신해 온 로리는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아주 진실된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계속해서 신세만 지는군요. 저..., 그렇다면 내가 어떤 대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괜찮아요.” 스킵은 마치 뛸 듯이 기뻐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클레이는 그런 동생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떤 것이라도 해드리고 싶어요.”
“혹시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요?”
“조금은요. 도서관에서 몇 년째 사용해 오고 있어요.”
“도서관에서 일을 해요?”
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짙은 밤색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 “아동문학 담당이에요.”
언젠가는 그녀 역시 자기가 쓴 책을 출간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도 그 작가모임에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번 모임엔 전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3명의 아동문학 작가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리에겐 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였다.
“만약 여기에 컴퓨터 시스템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어떤 거라도 해보고 싶어요.”
“클레이 형이 작년 겨울에 하나 샀어요.” 스킵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형 말로는 그게 첨단과학이라는군요. 앞으로는 모든 게 컴퓨터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라면서요. 말에 관한 모든 것들을 이제 다 기록할 예정이에요.”
건장하고도 조금은 무뚝뚝해 보이는 여자가 성큼 주방으로 들어섰다. 아마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가정부인 듯 보였다. 그녀는 힐끗 로리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온 도시 여자인가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지?”
“메리.” 클레이가 말했다. “로리 캠벌이에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그걸 수리하는 동안 당분간 여기 있을 거예요. 침대 좀 봐주시겠어요”
메리의 커다란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해 보였다.
“아, 아녜요,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메리.”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는 이층 구석에 있는 붙박이장에 들어 있어요.”
“로리는 우리들의 손님이에요.” 클레이는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으나 한마디 한마디를 끊는 그의 말투가 다소 엄하게 들렸다.
메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이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내겐 할 일이 있어요. 그러니 할 수 있다면 아가씨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로리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예쁜 도시 여자를 초대한 것까진 좋지만 난 이 아가씨 침대를 봐주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해요.” 메리는 이렇게 내뱉고는 주방을 홱 나가 버렸다.
“메리는 거의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원래가 좀 무뚝뚝한 편이죠. 워낙 별 뜻 없이 저런 말을 잘하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네.” 기분이 상하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해 로리는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아마 메리는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에겐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차에서 당신 가방을 가져와야겠어요.” 스킵을 그렇게 말하며 문을 향해 돌아섰다.
클레이는 잔을 마저 비우고 난 뒤 일어서며 로리를 쳐다보았다. “일이 있어 나가 봐야 되겠는데.”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때요, 혼자 지루하지 않겠소?”
“천만에요. 제 염려는 마세요.”
클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6시쯤이니 기억해둬요.”
“고마워요.”
로리는 빈 잔을 싱크대 위로 올려놓았다. 스킵이 가방을 가져올 동안 그녀는 댄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론 그에게 한바탕 짜증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모임에 나가 버렸다는 비서의 말이 로리의 짜증스러움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그녀는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수화기를 놓으려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이곳의 전화번호를 머뭇거리며 비서에게 일러 주었다. 그러나 이곳이 클레이와 스킵 프랭클린의 집이란 말은 하지 않았고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답답하면 댄이 다시 전화를 하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스킵이 들어섰다. “클레이 형이 2층 끝 방을 치우라는군요. 그곳에서 주무시면 좋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 방은 예전에 엄마 아빠가 쓰시던 방인데 두 분 다 몇 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이후로 그냥 비워 두었어요. 대충 정리를 하면 전망은 아주 좋으니까 맘에 꼭 들거예요.”
“하지만, 스킵...”
“<엘크런>에서 가장 전망 좋기로 유명하죠. 그 방은 우리 집에서 제일 크고 좋은 방이에요.”
“스킵,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부모님이 쓰시던 방을 나 같은 사람이 쓰겠어요. 호의는 정말 너무나 고맙지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요.”
“하지만 형이 그 방을 쓰시라고 했어요.” 스킵은 성큼성큼 계단으로 올라섰다.
로리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녀는 깔끔하면서도 뭔가 엄숙한 느낌이 감도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잘 정돈된 나무 색의 가구 몇 점과 한 쪽 벽을 차지한 커다란 벽난로, 그리고 좀 오래된 낡은 느낌의 피아노가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위로 몇몇 개의 사진들이 그녀의 눈길을 멈추게 했다. 고등학교 시절쯤의 어린 클레이가 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었고, 그 곁에 그들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중년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스킵은 잠시 멈춰 서서는 로리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할아버님이 50년 전에 이 집을 지으셨대요.”
“굉장하군요.”
“말 그래도죠.” 그의 눈동자가 자만심으로 귀엽게 반짝거렸다.
방문을 열어 젖히자 발코니의 창을 통해 마을 전체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푸른 능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신선한 내음이 가슴속까지 파고 들어와 답답한 마음을 맑게 씻어내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들 이곳을 좋아하죠.” 스킵이 그녀의 뒤에 다가와 말했다.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자, 이제 저도 일하러 나가 봐야 해요.”
로리는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서며 미소를 띄워 보였다. “고마워요, 스킵. 정말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군요.”
스킵은 그녀의 말에 쑥스러운 듯 문 쪽으로 걸어나가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녁식사때 만나요!”
“벌써 기다려지는데요.”
“자, 그럼 이따 봐요.” 그는 오른쪽 팔을 흔들어 보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가방 속에 있는 옷들을 꺼내서 옷걸이에 걸어 벽장 속에 대충 걸어두고 자질구레한 것들은 아예 꺼내지 않고 그냥 남겨 두었다. 기껏해야 내일이나 모레까지만 여기 있으면 떠날 텐데 구태여 구겨지는 옷을 제외하곤 너저분히 풀어 헤쳐 놓을 필요가 없다. 대충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가볍게 머리를 빗어 넘겼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로 긴장한 탓이었을까, 얼굴이 피곤함으로 다소 수척해 보였다. 몇 분 뒤 그녀는 기분도 바꿔 볼 겸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이럴 땐 혼자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보다 얘기를 나누면서 기분을 푸는 게 더 나은 법이다.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메리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메리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감자를 올렸다. 기름이 튀는 소리 사이로 메리가 예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저기 뒤뜰에 세워 둔 스포츠카가 당신이 끌고 온 차요?”
“그래요, 제 차예요.”
“흐흠, 그런데 왜 여기다가 처박아 두는 거죠?”
“물펌프가 고장이 났다나 봐요.”
“클레이가 고친다고 그러던가요?”
“아녜요, 리버스데일에 있다는 자동차 정비소의 수리공이 토요일까지 고쳐 놓겠다고 말했어요.”
“조지를 말하는 건가요?”
“그래요, 조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메리는 얼마간 로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저 흠흠 하는 잔기침 소리만 내면서, 감자 부침에 열중하는 듯 했다. 이윽고 그녀는 가스 불을 줄인 뒤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토요일이 일요일이 되고, 그 일요일 그 다음주 토요일이 되고, 그 다음엔 다음달..., 뭐 그런 순이겠지. 조지가 하는 일은 늘상 그 모양이니까. 아무튼 당신, 그러다간 올 여름 내내 여기서 머물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