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24화 (24/29)
  • 24. 영화

    금요일, 할리는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왔다. 차를 대자마자 케니가 달려왔다.

    [아빠가 드라이브인 영화관에 데려간대요!]

    케니가 신이 나서 말했다.

    오늘 밤은 그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8월이었고 날씨는 완벽했다.

    [같이 갈래요?]

    케니가 물었다.

    [아니, 어쨌든 고맙다.]

    이번주는 되는 일이 없었다. 유능한 직원 한 명이 갑자기 남편이 동부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며 사표를 낸 것으로 시작해서 오늘 오후 주문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고, 도널리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도널리는 사전 연락도 없이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를 끼고 나타났다. 할리는 그녀를 안으며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도널리는 금년에만 약혼 반지를 두 개나 받았는데 자기는 반지는 커녕 싸구려 보석 하나도 못 받았다는 사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반지가 탐나서가 아니었다. 두 남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 부러운 것이다. 두 남자씩이나, 그동안 할리는 어디서 쓸데없고 한심하고 징그러운 놈들만 만나고 다녔었다.

    기분이 울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같이 가요, 누나.]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아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돌아보니 스티브가 온갖 슬픔을 다 안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피곤해요.]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30분 동안 거품나는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텔레비젼 앞에서 <메리 타일러 무어> 재방송이나 보면서 빈둥거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도 메리 리차즈처럼 독신으로 살 팔자인 것 같았다.

    [나도 피고하오. 그런데 지난주에 케니한테 데려간다고 약속을 했더니, 친한 친구 열댓 명까지 같이 가자고 불러놓은 모양이오.]

    [두 명이야.]

    케니가 정정했다.

    [제일 친한 친구 두 명만 부른 거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스티브는 할리의 어깨를 으스러지게 잡았다.

    [우리 둘이 다 차를 가지고 가서 나란히 차를 대는 거요. 아이들은 내 차에 두고,

    난 당신 차에서 같이 보는 거요, 어떻소?]

    그는 분명 이 일에 머리를 좀 굴렸다. 할리가 거절을 하면 그 뒤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들과 자동차 안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거절을 했을 것이다. 딱 한 가지만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면. 스티브가 저 웃기는 오페라에 같이 가주었기 때문이다. 기꺼이 가준 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가주기는 했잖은가.

    [좋아요.]

    그녀는 우물쭈물 말했다.

    [좀 좋은 척이라도 하면 안 되오, 매카시?]

    그는 할리가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냈다.

    그녀는 속으로 불평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싫은 것만도 아니었다. 피곤한 건 사실이었지만 스티브와 케이와 함께 있으면 다시 기운이 솟곤 했으니까. 같이 안 간다면, 나 혼자 슬픔에 잠겨 더블 핏지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이나 퍼먹고 앉아 있을 것이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게다가 스티브는 월요일 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었다. 친구 같으 짧은 키스, 그 전에 그들이 했던 그런 키스였다. 따뜻하고 편안한 키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할리는 그와의 키스에서 편안함과 우정 그 이상을 느꼈다. 그 키스는 발가락 끝까지 전율시켰다. 친구와 나누는 작별의 키스는 여자의 발끝을 오므라들게 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키스를 받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 때문에 드라이브인 영화관에 가는 것에 동의를 한 것이다.

    [아빠가 팝콘도 만들어 준댔어요.]

    케니가 마치 자기 아빠에게 대단한 요리 대상이라도 수여하는 것처럼 숨가쁘게 말했다.

    [그것도 전자렌지에 하는 게 아니고.]

    케니는 경탄해하며 들뜬 목소리로 계속했다.

    [아빠가 어렸을 땐 가스렌지에다 팝콘을 튀겼대요.]

    할리도 그렇게 팝콘을 튀겼던 기억이 났다. 문득 그녀는 백 살은 된 기분이었다.

    [재미있구나.]

    [구경해도 된댔어요.]

    [도와줄 수은 없겠지?]

    스티브가 불쌍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의 애걸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좋아요.]

    희생을 각오한 듯한 표정으로 말하려고 했지만, 할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웃고 있었다.

    [옷만 갈아입고 금방 올게요.]

    케니가 그녀를 따라와서 짧은 바지와 짧은 티셔츠를 골라 주었다.

    [누나가 같이 가서 너무 좋아요.]

    케니는 할리의 침대 끝에 올라가 앉았다.

    케니의 표정이 별로 밝아 보이지 않았지만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케니는 걱정스러운 일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할리에게 말을 하곤 했었다.

    [나도 같이 가서 좋아.]

    [아빠가 내 친구 앤지를 초대해도 좋댔어요.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예요. 사람은 누구나 제일 친한 친구가 있잖아요.]

    케니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내 생각에 아빠한테는 누나가 제일 친한 친구인 것 같아요.]

    할리는 가슴이 뭉클했다.

    [나한테도 아빠가 가장 좋은 친구란다.

    케니는 다시 조용해졌다. 할리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액세서리를 뺐다. 그리고 화장을 지우고 스타킹과 하이힐을 벗어던진 후 천으로 만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엄마와 킵 아저씨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난데없이 케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할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었다.

    [결혼을 하면 처음엔 서로 익숙해지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는 거란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케니.]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엄마는 킵 아저씨가 전에 결혼한 적이 있었다는 걸 알아냈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그 사실도 아저씨 전 부인한테서 들었어요.]

    [저런.]

    할리는 메리 린에 대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둘이 있어서 양육비를 대주고 있대요. 근데 엄만 아직 부인 한 명에 대해서밖에 몰라요.]

    킵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메리 린에게 미리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다면,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일지 의문이 들었다.

    [아빠는 아직 몰라요.]

    케니가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얘기 안 할께.]

    [난 킵 아저씨가 싫어요. 엄마가 왜 그런 사람이랑 결혼했는지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재미있는 데를 데려다준다고 해놓고선 맨날 약속을 안 지켜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거야.]

    할리는 케니의 옆에 앉았다.

    [나도 그런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 그건 그 친구가 나쁜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뿐이지. 킵 아저씨도 마찬가지야.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약속을 다 지킬 수가 없었을 뿐이야.]

    [킵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케니가 물었다.

    [글쎄다. 잘은 모르지만, 많지는 않겠지.]

    [그랬으면 좋겠어요.]

    케니가 말했다. 그리고는 할리를 꽉 껴안았다.

    할리와 케니는 농담을 해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케니의 친구들은 다른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1시간 일찍 집을 나서 맥도날드에서 햄버거와 음료수를 샀다. 계획했던 대로 그들은 영화관 앞에서 나란히 차를 세웠다.

    할리는 어렸을 때말고는 드라이브인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앞좌석에 타고 그녀와 줄리는 파자마 차림으로 뒷좌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곤 했었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사랑과 보호를 받았던 어린 시절의 따스한 느낌은 생생했다.

    오늘 밤 첫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가 나오는 액션 스릴러였다. 손에 땀을 쥐고 봐야 하는 그런 영화였다. 두 번째 프로는 쇼의 일종이었지만 유명한 스타는 나오지 않았다.

    차를 주차하고 라디오의 채널을 맞춘 후 스티브는 자기 차에서 나와 할리의 차 앞좌석으로 탔다. 완벽한 계획같아 보였다. 아이들이 싸우기 전까지는.

    한 친구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다.

    [케니가 자기 팝콘을 다 먹고 내 걸 훔치려고 해요.]

    [내 것도요.]

    여자아이도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티브는 케니에게 음료수를 사오게 했다.

    [내가 어쩌자구 아이들의 꼬임에 넘어갔는지 모르겠소.]

    스티브는 아이들에게 약속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 같다고 할리는 생각했다. 약속을 지키는 일은 아이들에겐 어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했다.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자랑스럽다고?]

    [약속을 지켜서요.]

    [다른 도리가 없었소.]

    그는 할리의 칭찬을 거부했다. 그는 등을 기대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최근에 타드하고 이야기해 봤어요?]

    영화가 끝나고 출연자 자막이 나오고 있을 때 그녀가 물었다.

    [도널리한테 청혼을 했다더군. 놀랄 일도 아니지.]

    [도널리는 당장에 아기를 갖고 싶어해요.]

    할리는 아쉬운 듯이 말했다. 일이 진행되는 속도로 보아 도널리는 할리가 남편을 찾기도 전에 할머니가 될 판이었다.

    [아직 임신을 한 게 아니라면 기적이지. 타드는 얼마나 피곤한지 아침마다 존다오. 도널리가 밤새도록 못 자게 하나 보지?]

    [서로 그러고 있을걸요.]

    [정말 역겨운 일이군.]

    스티브가 내뱉었다.

    [누가 아니래요.]

    할리는 식욕이 떨어져서 팝콘을 내려놓았다.

    [있죠. 지금 우리 둘 다 질투가 나서 죽을려고 하는 거예요.]

    [아멘.]

    두 사람은 마주 쳐다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할리는 의자를 끝까지 뒤로 밀어다 놓고 앉았다. 기분이 좋았다. 영화와는 상관이 없었다. 케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케니가 자기를 스티브의 가장 친한 친구로 표현한 것이 기분 좋았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었다.

    그녀는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내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워요.]

    [내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소.]

    그는 모을 기울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의 입은 그녀의 입술을 살짝 스치고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할리가 그에게 키스를 해서 힘을 주었다.

    그녀는 바로 성적 충동을 느꼈다. 스티브도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똑바로 하고 그녀를 오랫동안 뜨겁게 쳐다보았다. 그녀도 스티브를 그렇게 보았다. 차 안의 산소가 갑자기 다 타버린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말은 고사하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빛이라고는 스크린과 음료수 판매대의 불빛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리는 스티브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의 눈은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할리 역시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마침내 스티브가 말을 꺼냈다.

    [할리?]

    [네?]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한테 물어 보는 거예요?]

    그녀는 농담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우린 키스를 했고......]

    [정말 좋군, 정말 좋아.]

    이 새로운 발견을 다시 시험해 보아야겠다는 듯이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기울여 다시 입을 가져왔다. 할리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가슴은 활짝 열려 있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를 반가이 맞자 키스는 즉시 다른 양상을 띠었다. 강렬해지면서 더욱 깊이 요구해 왔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각도를 맞춘 채 자동차의 공간이 허락하는 한 가까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엉덩이가 콘솔에 부딪혀 멍이 날 지경이었지만 할리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키스를 원했다. 아니, 필요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렸다. 스티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바닥 아래에서 그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있던 손을 위로 가져가 그의 셔츠 깃을 잡고 엄습하는 관능의 폭풍우로부터 몸을 가누었다.

    그가 그녀의 입 안을 속속들이 헤매는 동안 그녀는 에로틱한 유희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의 혀도 그의 혀에 반응하며 말리고 휘감기며 정열적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 모두 숨을 헐떡이며 가빠하고 있었다.

    그가 신음을 했다. 그녀는 칭얼거렸다.

    갑자기 그가 입을 떼고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거친 숨결이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할리는 숨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다시 키스를 했을 때는 느리고 부드러웠다. 몇 달 전의 첫키스처럼, 그의 입에서 버터 발린 팝콘 맛이 났다. 그 맛이 황홀했다. 길고 깊은 키스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가 키스를 멈추었을 때, 할리는 뒤로 무너지며 눈을 감았다.

    [이게 현실이라고 말해 줘요.]

    [현실이오.]

    [우리가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 줘요.]

    [알잖소.]

    그녀는 다시 말했다.

    [도널리와 타드의 일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고 말해 줘요.]

    [아니오, 이건 진실이오, 할리.]

    [어떻게 그렇게 장님일 수가 있었을까요?]

    놀라웠다. 스티브. 스티브 매리스! 몇 달 동안 남자를 찾으려고 쓸데없이 쑤시고 다니는 동안 스티브는 늘 옆에 있었던 것이다.

    미쳤어. 내가 미쳤지. 그녀는 자신에게 발길질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믿어, 할리, 믿어.]

    그는 그녀의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감쌌다. 손 안에 그녀의 가슴이 꽉 찼다.

    그가 손가락으로 유두 가장자리를 더듬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어.]

    스티브가 신음했다. 그의 목소리는 좌절감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손을 아래로 가져가며 부드러운 배를 스쳤다.

    [우릴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뭐?]

    그는 고개를 들어 아이들이 있는 차 쪽을 보았다. 세 쌍의 눈이 옆 창문으로 그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영화보다 재미있는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선이 마주친 것을 알고 케니가 손을 흔들었다. 할리와 스티브도 손을 흔들었다.

    할리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티브는 창문을 내렸다. 창문은 김으로 뿌옇게 흐려 있었다. 할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집에 갈래?]

    이 질문에 아이들의 대답이 합창으로 나왔다.

    [아니.]

    [그럼 영화 봐.]

    [아빠, 지금 할리 누나한테 키스했어?]

    케니가 불쾌한 기색을 내보였다.

    [입에다가?]

    [누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스티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할리는 팔꿈치로 그를 쳤다. 그는 아파서 죽겠다는 시늉을 과장되게 해보였고, 모두들, 할리까지도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 다시 영화에 몰두한 것을 확인하고 스티브는 창문을 올렸다.

    그는 할리의 손을 꽉 잡았다. 스티브는 똑바로 앞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가 영화를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할리는 알았다.

    [좋아,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그녀는 그가 무엇을 묻는 건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냐고요?]

    그녀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따라서 말했다.

    [침대로 가자는 건가요?]

    [그렇소.]

    할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도 도널리와 타드가 한 경험을 좀 해야 한다, 이거죠?]

    [아니오!]

    그의 갑작스런 반응에 할리는 깜짝 놀랐다.

    [이건 도널리와 타드와는 아무 상관 없소. 당신과 나, 우리 둘만의 일이오. 난 오래 전부터 우리 둘 사이에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사실 두려웠지.]

    [나도 두려워요.]

    그는 그녀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할리는 그의 눈에서 굶주림을 보았다. 그건 그녀 자신의 굶주림이 반사되어 보인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원했다. 그가 필요했다. 스티브는 고개를 숙여 욕망을 다 토하듯이 키스를 했다.

    [이게 좀 대답이 되오?]

    그가 물었다.

    [네.]

    그녀의 심장은 박동을 늦출 줄을 몰랐다.

    스티브는 경이감에 가득 찬 눈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사랑하오, 할리.]

    눈물이 순식간에 그녀의 눈을 채우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 스티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런데 왜 우는 거요?]

    [진실을 알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에요. 너무 행복해요..... 아놀드가 바보같이 느껴진 것도 당연하지.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할리의 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손바닥에 키스했다.

    [아까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할 거요. 오늘 밤에, 할리. 난 한순간도 더 기다릴 수 없어.]

    [오늘 밤이라고요?]

    [영화가 끝나는 즉시 집으로 갑시다. 케니를 재우자마자 내가 당신 집으로 가겠소.]

    [점점 마음에 드네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닐 테니까 두고 보시오.]

    할리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약속, 약속.]

    [케니도 피곤해서 바로 곯아떨어질 거요.]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역시 스티브만큼 들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쿵쿵거렸다.

    [지난 1월에 섹시한 실크 잠옷을 사뒀어요. 그걸 스티브 당신을 위해 입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잠옷 이야기에 스티브는 신음 소리를 냈다.

    [할리, 내가 지금 당장 여기서 당신을 갖길 바란다면 계속하시오. 아니라면 그만 조용히 좀 해주겠소?]

    [조용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너무 흥분이 되어서.]

    그는 또다시 키스를 했다. 아이들이 가득 탄 차 한 대가 그들 옆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의 키스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연자 자막이 나오기 시작하자마자 스티브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차에서 내려 자기 차로 갔다. 그는 집까지 내내 속도위반을 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딱지를 떼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스티브는 아이들을 집 안으로 서둘러 들여보냈다.

    [아빠, 뭐가 그렇게 급해?]

    케니가 불평을 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 안은 지금 치울 필요 없어. 내일 아침에 하자.]

    그가 명령했다.

    [아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안 된다고 늘 말했잖아.]

    케니가 계속 칭얼거렸다.

    [그건 거짓말이었어.]

    스티브는 아들의 어깨를 밀어붙였다.

    [자, 어서 침대로 가자, 늦었어. 내일은 또 할 일이 많잖니.]

    아이를 잡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그는 다시 쏜살같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할리에게 돌아갔다.

    [20분만 시간을 줘. 길어야 30분, 알았지?]

    [30분이나?]

    그건 영겁과도 같았다.

    [케니한테 자장가도 불러 주고 책도 읽어 줘야지. 눈을 붙이자마자 달려가겠소.]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는 다시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할리는 30분의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이 순간을 몇 달 동안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그녀는 하나도 빠짐 없이 모든 세부적인 일을 철저히 계획해 두었었다.

    우선 그녀는 욕조를 뜨거운 물로 채우고 여러 가지 향기나는 오일 혼합물을 따랐다. 그런 다음 옷을 벗고 몸을 깊이 담구었다. 눈을 감고 그녀는 스티브를 상상했다.

    스티브,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정말로 사랑했다. 그 사실을 진작 깨닫지 못한 것이 놀라웠다. 지난 2, 3개월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합산되면서 완전히 의미가 통했다. 그녀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스티브를 사랑했다.

    두꺼운 타월로 몸의 물기를 닦은 후 그녀는 매끄러운 실크 잠옷을 입고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스티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밤 그녀는 아름다운 유혹의 여신이 될 것이다. 그녀는 스티브에게 온몸을 맡기고 열정을 불태울 생각이었다.

    이제 무대를 꾸밀 시간이 되었다. 우선 그녀는 침대 시트를 걷어 세탁물 통에 넣고 깨끗한 시트와 그녀가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이불을 깔았다. 다음엔 가장 좋아하는 콜론을 침실 여기 저기에 뿌리고는 그 향기나는 방울들이 떨어지는 가운데로 두 팔을 벌리고 걸어다녔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흰색 이불 위에 말린 장미 꽃잎을 흩뿌려 놓았다. 그녀는 스티브가 자기를 안고 침실로 들어와 침대에 부드럽게 눕히고 정열적인 사랑을 해주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녀는 침대 옆에 있는 디지털 시계를 보면서 이제 스티브가 올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침대에 앉아 있다가 문득 그녀는, 달력에서 본 모델들처럼 먹이를 찾아나온 암호랑이 포즈를 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몇 가지 포즈를 해보다가, 한 쪽 무릎으로 무게 중심을 잡고, 두 팔과 한 쪽 다리를 쭉 뻗고 있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목 깊숙이에서 으르렁하는 소리를 내보았다.

    그런 자세로 3분 정도 버티자 무릎이 아파왔다. 35분이 지났다. 그녀는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준비된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녀는 서성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절부절하며 빼꼼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집을 보니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케니가 부엌에서 달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스티브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래, 몇 분 더 기다려 보자.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이 첫 경험은 완벽할 것이다. 스티브는 그녀를 원했다. 그만큼 그녀도 그를 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품이 나왔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일어나 침실로 가서 다시 암호랑이 포즈를 잡고는 짝을 맞이하리라.

    졸음이 와서 그녀는 머리를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고단한 하루였다. 얼마 안 있어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있으려고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스티브가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잠이 든다 해도, 그가 깨워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할리는 햇살이 비치는 순간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녀는 장식용 방석을 벤 채 여전히 소파에 누워 있었다.

    스티브 매리스는 그녀를 바람 맞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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