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뿔 달린 헬멧을 쓴 거구의 여자
케니가 메리 린의 집으로 돌아가자 집이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스티브는 어제, 고독감과 싸우며 집안 청소를 했지만 청소도 너무 빨리 끝나 버렸다.
케니와 함께 지낸 두 주일은 정말 즐거웠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그는 고독 또한
그런대로 즐길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혼을 한 직후엔 외롭고 조용한 삶이 미칠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변화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케니를 주말에만 보는 것 같은 낯선 환경의 변화도 포함해서.
그는 케니가 새로운 환경에 별 탈 없이 적응한 것도 기뻤다. 아이 앞에서 그와 메리 린이 예의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했다.
감사한 일들의 목록을 적는다면, 할리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녀는 셀 수 없이, 특히 지난 두 주일 동안 케니를 돌보며 그를 도와주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스티브는 저녁을 어떻게 때울까 생각하며 안에 든 내용물들을 검사했다. 혼자 먹자고 음식을 만드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할리는 뭘 먹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지난 두 주일 동안 그녀는 음식을 만들어다 주거나 아니면 그의 집에 와서 함께 먹었다.
스티브는 그녀가 집에 있는지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살피다가 그녀의 차가 눈에 띄자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그는 그녀의 부엌 창문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 그녀는 거기 있었다. 손목에 전화줄을 감은 채 전화기에 대고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폼으로 보아 화가 난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금방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스티브의 집에서 전화벨이 울려 그는 서둘러 받았다.
[여보세요, 할리.]
그는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가 생각하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그녀는 다짜고짜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놀드가 오늘 저녁 데이트를 취소한다고 전화를 걸었어요. 벌써 세 번째라고요.]
스티브는 할리가 왜 그 작자를 계속 만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놀드란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상공회의소를 통해서까지 연극표를 사뒀는데 말예요.]
화가 날 만도 했다.
[같이 가겠다고 해놓고는 지금 와서......]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날로 바꿔서 같이 가면 되잖소.]
[내가 미쳤어요? 아놀드는 이제 안 만날 거예요. 더 화가 나는 것은 그의 태도예요. 글쎄, 내가 안 만나겠다고 하니까 아예 안심을 하는 것 같더라니까요.]
그녀는 숨을 가다듬느라 말을 끊었다.
[어쨌든 표는 바꾸지 않을 거고, 또 썩히지도 않을 거예요.]
혼자 가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그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할리가 자기한테 같이 자가고 말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솔직히 오늘은 피곤했고, 아무리 평이 좋은 것이라 해도 연극은 따분했다.
[도널리와 타드는 어때?]
그는 수를 피웠다.
[도널리와 타드? 농담이시겠지!]
[그런 것 같군.]
할리 말이 맞았다. 그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지난주 내내 아침마다 타드는 바보처럼 싱글벙글하며 출근을 했다. 스티브는 그렇게 깊이 사랑에 빠진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당신이 같이 가줄 수 있어요?]
할리가 애원을 했다.
[아참, 안 되겠구나. 월요일엔 불링을 하죠?]
[아니오.]
그는 실로 유감이었다.
[여름엔 볼링 대회가 없소.]
[그럼, 같이 가줘요.]
할리가 그에게 뭘 부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순간 스티브는 자기가 할리의 청을 거절할 마음이 없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차리고 가야 하는데?]
그녀는 머뭇거렸다.
[정장을 입어야 해요. 짙은 색으로 있어요?]
그는 속으로 욕을 했다.
[있소.]
스티브는 그 양복을 싫어했다. 그 옷을 입어야 할 때마다 더 싫어졌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갈 때를 대비해 갖고 있는 양복이어서, 최근 얼마 동안은 입어 보질 않았었다.
[가겠다는 뜻인가요?]
스티브는 할리가 자기를 위해 도와주었던 여러 일들을 상기했다.
[그러지 뭐.]
그는 내키지 않게 중얼거렸다.
[좀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돼요, 매리스?]
할리가 쏘아붙였다.
스티브는 웃었다.
[몇 시까지 준비하면 되겠소?]
[7시 반이요.]
[이 초대에 저녁 식사도 포함된 거요?]
[저녁까지 사란 말인가요?]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칠리 한 통은 가져가겠소.]
그가 말했다.
[난 뭐가 있나 보자.....]
그는 다시 창가로 가서 할리가 전화선을 질질 끌고 냉장고로 가 그 안을 뒤지는 것을 내다보았다.
[양상추 한 덩어리하고 체다 치즈가 좀 있네요. 타코 샐러드를 만들 수 있겠어요. 칩 좀 있어요?]
[케니가 먹어치우지 않았다면 있을걸.]
[그럼 됐어요.]
할리가 칠리 한 통과 양상추 몇 잎사귀로 얼마나 멋진 저녁을 만들었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보다는 그녀와 같이 먹었기 때문에 그 저녁이 맛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오래 전 타드가 사준 하나밖에 없는 넥타이에 샐러드 드레싱이 묻을까 봐 스티브는 저녁을 먹은 후에 옷을 갈아입었다. 불현듯 이 양복을 마지막으로 입었던 때가 생각났다. 판사 앞에 서서 합의 이혼을 결정짓던 날이었다. 상의 호주머니에서 변호사 명함이 나왔다. 그는 얼른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어느덧 이혼을 한 지도 1년 반이 지났고, 별거 생활을 시작한 건 더 오래 되었다. 그 당시엔 이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익숙한 아픔이 그의 기분을 위협해 왔다. 이제 메리 린은 재혼을 했고, 스티브도 그가 원하던 식으로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버젓이 살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예전에 알았던 기쁨도 다시 찾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쁨도 맛보고 있었다.
할리를 데리러 그녀의 집에 갔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의 윤곽을 살려 주는 진한 청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 여자가 할리란 말인가? 스티브는 그녀의 몸매가 얼마나 균형 잡혀 있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옷 맘에 들어요?]
할리는 펭귄처럼 두 손을 뻣뻣하게 양 옆으로 벌리고 한 바퀴 돌았다.
[와!]
숨이 남아 있었다면 두 번째로 휘파람을 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리의 모습이 그의 숨을 잡아먹어 버렸다.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은 그녀를 과소 평가하는 말일 것이다. 아놀드는 생각보다 훨씬 바보였다.
[당신 모습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뚱보.]
할리가 대신 말하며 배를 내밀었다. 스티브가 보기엔 그 배도 가냘펐다.
[아니오!]
그는 아첨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칭찬을 해주어야 할 때마다 늘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할리는 그의 찬사를 기대하며 말똥히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 린이 그랬던 것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메리 린을 너무나 자주 실망시켰던 것처럼 할리도 실망시킬까 봐 두려웠다.
[아주 아름다워.]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상의 말이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할리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름답소.]
그는 다시 한 번 말하면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로 덧붙였다.
[고마워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연극은 시애틀 시내에 있는 5번가 극장에서 했다. 그들의 좌석은 발코니 첫 번째 줄에서 통로 쪽이었다.
극장 내부가 어두워지면서 연극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연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페라였다. 모든 대사를 노래로 하고 있었다. 그는 프로그램을 펼쳐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페라 제목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독일어인 것만은 확실했다.
할리는 완전히 오페라에 취해 있었다.
첫 번째 장면이 끝날 즈음, 스티브는 주의가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목을 길게 빼고 천장에 달린 크리스털 조명기구를 관찰했다. 극장은 최근에 보수를 해서 구석구석이 인상적이었다.
[스티브?]
할리가 그를 향해 인상을 찡그렸다.
[왜 뭐가 잘못 됐어요?]
[아니, 새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는 거요.]
그는 조그많게 속삭였다.
[저게 진짜 크리스털일까? 당신도 모르지?]
[몰라요.]
[이 의자들도 전부 새로 들여놓은 거로군.]
그는 어깨를 돌려 보며 쿠션이 편안한지 시험해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할리는 다시 무대로 주의를 돌렸다.
스티브는 금방 또 지루해져서 할리에게 펜을 좀 달라고 했다.
할리는 가방을 집기 위해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스티브는 그때 얼른 그녀의 가슴을 보았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할리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보이며 스티브의 손에 펜을 쥐어 주었다. 스티브는 프로그램 표지에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그적거렸다. 그는 자기가 여자 가슴 모양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솜씨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미술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당대에 유명했던 화가 한 명의 그림을 보았다. 기획 전시용으로 다른 박물관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그는 그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가 본 것은 기형적인 젖가슴을 가진 옷걸이뿐이었다. 게다가 위치도 엉뚱하게 잘못되어 있었는데, 그 그림으로 화가는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것이다.
스티브는 자기가 그린 낙서를 화랑에 보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스케치했다. 여자의 상반신에 가슴 네 개, 그리고 여러 개의 젖꼭지를 그렸다. 한창 몰두해 있을 때 할리가 그의 그림을 넘겨다보고는 프로그램을 확 빼앗아가 버렸다. 그리고는 그에게 인상을 써보이더니 프로그램을 구겨 버렸다.
알았어, 알았어. 스티브는 다시 배우들에게로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그것처럼 지루한 것이 없었다. 그는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뿔이 달리 헬멧을 쓰고 창을 들고 무대를 뛰어다니며 전사 흉내나 내는 우람한 여자들은 성적 매력으로 말하자면 빵점이었다.
그는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공연에만 관심을 쏟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눈꺼풀이 가물거리며 잠이 쏟아졌다. 몇 초 후 깜빡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고개를 번쩍 들어 소리를 내면서 하품을 했다. 계속되는 하품을 죽이고 있는데 할리가 그를 노려보았다.
잠시 뒤 커튼이 내려오고 불이 켜졌다. 마침내 자유로워지자 그는 의자에서 껑충 뛰다시피 벌떡 일어섰다.
[가서 뭐 마실 것 좀 가져오겠소.]
그가 나가려는데 할리가 그를 잡으며 막았다.
[도대체 왜 그래요?]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뭐가 어때서?]
[이 오페라는 대단한 수작이고, 멋지고......]
[지루하지.]
그가 말했다.
[당신한테야 그럴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안 그래요. 케니도 당신보다는 잘 볼 거예요. 어쩌면 아홉 살짜리 아이보다도 못해요? 게다가 아까 그 그림은 도대체 뭐예요?]
스티브는 분명히 할리가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건지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냥 낙서를 한 거요. 아무 의미도 없소.]
[그 낙서를 정신과 의사한테 보여 본 적 있어요?]
[2부에는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지.]
[됐어요. 그만 가요.]
[가?]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분명 그런 말은 농담으로 한 건 아니리라.
[어디 가고 싶소?]
[집이오.]
고맙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와 극장 밖으로 나오자, 이런 배려가 결코 대가 없이 주어진 것은 아닐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화가 난 건 아니겠지?]
그가 물었다.
[화 안 났어요.]
하지만 말하는 어조로 보아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페라 끝까지 봐도 되오.]
그녀가 마음을 바꾸지 말기를 기도하면서 예의상 말했다.
주차장에 와서야 스티브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리도 자기만큼이나 오페라가 지루했던 것이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도 그 오페라 재미없었지?]
발걸음이 가벼워지면서 그는 득의만만하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 음악.......]
[거짓말하지 마, 할리.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랄 거요.]
그는 그녀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걸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부여잡고 몸을 꺾어 가며 깔깔거렸다. 여전히 웃음을 띤 채 할리는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스티브, 자기를 한 번 봤어야 해요!]
[내가 그렇게 남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존재라니 반갑군.]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두 사람은 곧장 집으로 갈 수 없다는 데 동의했다. 스티브는 커피를 제안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심야식당이었다.
커피가 나오자 할리는 크림과 설탕을 넣고, 자기가 한 행동에 놀란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난 우울할 때만 크림을 넣죠.]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건 아마 도널리와 상관있는 일일 거예요.]
스티브는 그녀의 생각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커피에 크림, 우울, 그리고 도널리. 분명 거기엔 뭔가 관련이 있을 터인데, 그게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그 둘이 결혼을 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요.]
[난 그들이 이미 같이 살고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거요.]
그는 친구로 알아 온 오랜 세월 동안 타드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한 사람에게 사랑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겁이 날 정도였다. 그는 할리에게 그 말을 했다.
[나도 동감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바짝 다가서며 외쳤다. 그녀는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쌌다.
[타드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요? 도널리를 한 번 봐요. 정말이지......역겨울 정도예요.]
그녀는 말을 끊었다가 이내 계속했다.
[질투가 나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질투가 나서? 스티브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타드한테 그런 감정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타드는 출근 시가네 정확하게 도착해서 모든 일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퇴근을 했다.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하루 일과가 끝났을 때 스티브는 잔뜩 불평거리를 늘어놓았다. 모두 사소한 일들이었다. 맞았다. 그도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주일 동안 도널리는 내가 일평생 해본 것보다 더 많이 섹스를 했어요.]
할리는 커피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게 설명이 돼요.]
[무슨 설명?]
[내가 커피에 크림을 탄 거.]
[아.]
이제 그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나니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았다.
[타드도 마찬가지요.]
그가 투덜거렸다.
[행복이라는 가스를 마시면서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마냥 걸어다니지.]
[바로 그거예요.]
할리는 신음을 했다.
[어떤 것도 그 풍선을 터뜨릴 수가 없죠. 정말.........역겨워.]
그녀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쾅 소리를 내면서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지금 우리가 너무 유치하게 노는 건가요?]
[아니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가 다시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지금처럼 불평을 할까?]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요.]
할리는 두 손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애당초 이 소개팅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타드한테 뇌물까지 바쳤다는 사실이야. 타드는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소.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말해 주었는데도 말이오.]
할리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내 기분 풀어 주려고 하는 말이라면, 그만 둬요.]
스티브는 싱긋 웃었다.
[도널리도 나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면서?]
할리는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그래, 타드와 도널리는 서로 좋아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한테도 기회는 있었잖소. 일평생 최고의 기회를 거절했지. 내가 침대로 가자고 했던 말 기억하오?]
[그럼요!]
그녀는 눈알을 굴렸다.
['할래?' 그런 로맨틱한 초대를 내가 왜 거절했을까?]
스티브는 쿡쿡 웃었다. 그때 그는 재주가 젬병이었다. 그도 인정했다. 그리고 기분이 저조했었다. 그가 정말 필요했던 것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었고, 할리가 바로 그 상대가 되어 주었었다. 그 점에 대해 그는 늘 고맙게 생각했다.
[그 두 사람 그러다가 탈진해서 죽어 버릴 거예요.]
[하지만 죽어도 원이 없겠지.]
할리의 눈에 다시 노골적인 부러움의 빛이 번뜩였다.
[결혼 전에도 그 난리면, 결혼 후엔 어떻겠어요!]
[맞소.]
스티브는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타드한테 충고를 한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 할 거요.]
[스티브!]
[내가 농담하는 줄 아오?]
할리는 메리 린이 도대체 어떤 아내였을까 궁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의 전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지금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 마당이라 더욱 더 그랬다. 다른 남자와 같이 잔다......그는 그 사실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을 하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메리 린 이야기는 완전히 피하고 있었다.
[타드와 도널리는 정말 잘 살 것 같아요.]
할리가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녀는 커피에 크림을 더 넣고 천천히 저었다.
[할리에게도 좋은 남자가 나타날 거요.]
그녀는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그 남자를 만나죠?]
스티브 역시 그건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