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타드가 도널리를 만났을 때
[정말 놀라운 일이죠?]
할리는 단숨에 스티브를 제치고 부두 아래로 걸어갔다.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스티브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게 뭐였죠,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였던가?]
[누가 누굴 만나?]
스티브가 숨이 가쁜 체하며 물었다.
[그 영화 말이에요. 몇 년 전에 나왔던 거. 두 남녀가 제일 친한 친구들을 만나게 해줬는데, 그 친구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이야기 있잖아요.]
스티브는 놀란 척했다.
[타드가 도널리와 결혼할 거란 말이요? 그렇게 잠깐 만나고?]
[그렇게 맹한 척하지 말아요. 스티브 매리스. 지금 내 제일 친한 친구가 내 짝을 채갔다고요.]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그 말은 여기 있는 내 자긍심을 썩 높혀 주는 말이 아니로군.]
스티브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첫째, 나 역시 내 짝을 제일 친한 친구한테 뺏겼고, 당신은 나 같은 멍청이하고 엮인 것을 불평하고 있어.]
[불평하는 게 아녜요.]
스티브는 말을 완전히 곡해했다.
[뭐 썩 즐거워하는 것 같진 않은걸.]
그녀는 한 팔을 그의 팔에 끼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당신도 아주 나쁜 건 아녜요.]
스티브는 코방귀를 뀌었다.
[대단한 열정인걸.]
[그냥 실망한 것뿐이에요.]
[상처 난 데 소금 치는 거요?]
할리는 깔깔거렸다.
[당신 입장을 생각해서 그렇단 말이에요. 도널리와 꼭 맞을 줄 알았는데. 도널리는 당신이 원하는 그런 여자고, 또 당신도 도널리에게 완벽한 남자니까요. 도널리가 타드를 알았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왜 도널리가 나한테 꼭 맞는 여자라고 생각하오?]
할리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껏 만나 본 다른 남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스티브 역시 빤한 사실을 설명해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도널리는 아름답고 지적이에요. 거기다 가슴 아픈 이혼 경험이 있어서, 당신의 아픔도 이해할 수 있죠. 도널리는 아이들하고도 잘 지내요. 케니도 도널리를 만나 보면 아주 좋아할 거예요. 물론 도널리는 당신이 여자의 조건으로 말한 조건도 다 갖추고 있고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알면서. 외적인 조건 말이에요.]
[그건 못 봤는데?]
할리는 내기를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또 두 사람의 성격도 서로를 잘 보완해 줄 수 있어요.]
그녀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유감의 한숨이었다.
[하지만 이젠 늦었어요.]
[늦어?]
[타드 때문에요. 도널리를 그렇게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남자는 처음봤어요. 샌포드도 그렇게 못했죠. 그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남잔데 말예요.]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해봤는데, 할리 자신이 샌포드와 데이트를 하는 것도 괜찮을 성싶었다. 아이를 안 갖고 싶어하는 것만 제외하면, 그는 모든 여성의 꿈이었다. 하지만 도널리는 가정이라는, 그녀에겐 너무나 소중한 것을 거부할 수 없어 그 꿈을 포기해 버렸다. 결코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할리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라면 어떻게 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결정을 해야 할 입장이 아닌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부두에 있는 소방서와 이 지방 레스토랑 주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이바 해글런드의 동상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피곤함이 밀려와서 할리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녀는 부둣가에 늘어선 매점들을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저기 어디서 더블 핏지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을 파는 집이 있을까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안 될까?]
스티브가 물었다.
[돼죠. 양만 좀 많으면.]
[금방 오겠소.]
그는 사라졌다가 초콜릿과 아몬드로 범벅을 한 아이스크림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게 가장 나은 거였소.]
할리는 반가이 받았다.
[그동안 내가 과소평가를 했었군요. 매리스.]
[이봐. 내가 옛날부터 말했잖소.]
[오늘 일에 대해 정말 기분 안 나쁜 거예요?]
그는 한 점의 유감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할리는 자존심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자기 데이트 짝이 뒤로 안 돌아보고 갔는데 아무렇지도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도널리에 대해 원한이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나로서는 타드가 도널리와 같이 가준 게 최상이었소.]
그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물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자기 데이트 짝이랑 가버렸는데도 아무렇지 않아요?]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죠?]
[간단하오. 도널리는 남편을 구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난 관심 없거든. 당신한테 미리 말하려고 했었소. 난 결혼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오. 정말이오, 한 번으로 족해.]
[그러니까 오늘 저녁 내 중매 역할이 완전히 허사였다는 말이군요.]
할리는 아이스크림을 콱 깨물었다. 이빨이 아플 정도로 시려 왔다. 아마도 스티브는 남은 여생을 자기 첫사랑이자 단 하나의 사랑만 그리다가 죽을 모양이었다. 할리는 너무 화가 나서 또다시 아이스크림을 깨물었다. 이가 얼얼 했다.
[왜 대화를 할 때마다 메리 린 이야기가 나와야 하죠?]
이가 차가운 충격에서 벗어나자 할리가 물었다.
[메리 린? 누가 메리 린 이야기를 한다고 그러요?]
그는 반쯤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할리는 한숨을 쉬었다.
[보세요. 다시 결혼을 안 할 거라면, 왜 도널리를 만나겠다고 한 거죠?]
[난 당신을 위해서 한 거요.]
그래, 왜 아니겠어.
스티브는 그녀의 눈에서 회의를 읽은 모양이었다.
[난 당신과 타드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었소. 타드는 좋은 친구요. 할리가 지금까지 만나 본 한심한 치들말고 좀 근사한 사람을 만나게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었소.]
그가 하도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할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널리하고 타드가 잘 된다면, 그것도 잘된 일이지. 타드도 지금 누군가 필요하니까.]
할리는 일평생 혼자 살 것처럼 말했던 그의 말이 걸렸다.
[당신은 평생 은둔자처럼 살 계획이란 말인가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니오. 이제 메리 린은 결혼을 했고, 우리가 다시 재결합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러니 내가 다시 데이트를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거지. 결혼은 관심이 없다해도, 뭐랄까......교제는 하고 싶어.]
교제라. 바야흐로 진실이 나온 것이다. 그의 행동이 완전히 이타주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데이트할 건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녀는 은근히 궁금해서 물었다. 케니의 야구 시합에서 만났던 여자를 기억하며, 다른 여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어쨌거나 스티브는 건강하고 잘생겼으니까. 성공도 했고, 성격도 좋고, 지금 한참 때였다.
[두 명.]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누구죠?]
아마 야구장에서 본 여자와 볼링장에서 안 여자겠지. 할리는 추측했다.
[볼링하면서 알게 된 친구.]
할리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녀 생각이 맞았다. 누군진 몰라도 그 친구란 여자가 봄에 있었던 경기 때 그의 파트너가 되어 주지 않은 것이 애석했다. 그랬다면 할리가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 사실 고생은 아니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할리는 그 볼링 게임을 아주 즐겼었다.
[결국 오늘 밤 우리 둘이 같이 있게 되어 버렸는데, 솔직히 말하면 난 기쁘오.]
할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고마워요. 그런 말이 필요했어요.]
이러고 나서 또 다른 엉뚱한 말로 금방 한 칭찬을 엉망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그녀는 곧 따라올 모욕의 말에 대비해서 각오를 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그가 끝까지 말하도록 손짓하며 독려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같은 건 없소....방금 한 말은 진심이오.]
할리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다 먹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신선한 해물 냄새, 다채로운 기념품 가게, 전차,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노점상들, 이 모두가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배 타고 싶소?]
스티브가 물었다. 월라 월라라고 하는, 자동차와 승객을 모두 태울 수 있는 3층짜리 배가 정박해 있었다.
[어디로?]
마음이 끌렸다. 이 배가 어느 이국적이고 멋진 곳으로 데려가 준다면, 예를 들면 알래스카 같은 곳으로 그곳엔 남자가 많고 여자가 부족하다니까.
[베인브릿지 섬. 30분 정도밖에 안 거릴오. 거기 내려서 좀 걷다가 커피 한 잔 하고 다시 걸어오면 되오.]
알래스카는 아니지만, 그럼 어때.
[가죠.]
할리는 스티브의 손을 잡고 선착장 쪽으로 걸어갔다.
스티브는 표를 산 뒤 배에 올랐다. 두 사람은 갑판에 서서 바다를 내다보며 자오차들이 줄을 지어 철제 트랩을 건너면서 내는 쩌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스티브는 무심히 한 팔로 할리의 어깨를 감았다. 할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겉으로는 용감한 척했어도 속은 울적했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목표 근처에도 못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같이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그의 어깨에 기대 울 태세로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셔츠 단추를 풀어 놓은 채 트럭을 세차하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그에게서 거의 내키지 않는 매력을 느꼈었다. 모순된 감정들이 엄습했었고, 지금도 그 감정들은 정리되지 않았다. 그녀는 스티브를 친구, 그리고 이웃 이상으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왜?]
스티브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밀착된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그녀의 등을 감싸고 있는 팔의 느낌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냥........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게 그렇게 힘드오?]
[가끔은.]
갑자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물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배가 선창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하면서 기적 소리가 울렸다.
[잠깐.]
스티브는 마치 기적 소리가 자기한테서 나는 것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그녀는 그의 어린아이 같은 장난에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의 관계는 지금 이대로 두는 것이 최상이었다. 친구로.......그의 농담에 웃고, 거리낌 없이 그를 놀리는 사이가 좋았다.
스티브는 할리의 잔디를 깎아 주고, 할리는 그의 아이를 봐줄 것이다. 그건 공정한 거래였다. 이웃간의 거래. 연인 사이가 된다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규정짓는 조항들이 달라지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 복잡하지 않고 서로를 도와주는 우정이 깨질 수도 있다. 이 관계가 발전하여 성적으로 얽힌다 해도 스티브가 메리 린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남아 있는 한 결혼으로까지 이어지진 못할 것이다. 할리가 원하는 것은 결혼이었다.
얼굴을 피하지 않은 채 바람을 맞고 있는 그를 보면서, 할리는 아놀드를 생각했다. 다정하고, 자상하고, 완벽한 아놀드와 결혼하면.......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와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간유구를 먹겠다.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그건지도 몰랐다. 약 말이다.
최근에 만나 본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스티브와 같이 있을 때는 긴장이 풀렸다. 스티브하고는 아무 말 하지 않고도 편안한 기분을 가질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로 푸젯 사운드의 아름다운 녹색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윈즈로에 닿자 그들은 배에서 내려 옥외 카페로 갔다. 할리는 에스프레소를, 스티브는 라테를 시켰다.
[당신 차를 타고 왔다는 걸 타드가 기억할까요?]
타드와 도널리가 차도 없이 시내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그럴 거요.]
[그럼 어떻게 집에 가죠?]
[내 차 키를 줬소.]
[뭐라고요?]
[우린 버스를 타고 가면 되오.]
[버스?]
[걱정되면, 택시를 타지.]
[정말 자존심도 없어요? 처음엔 자기 짝을 빼앗기더니 그 다음엔 차까지 줘요?]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스티브의 관대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들이 시애틀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배에 탔을 때는 어두워진 후였다. 멀리서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고, 맑은 하늘에서는 별이 보석처럼 빛났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할리는 배의 앞쪽으로 갔고 스티브도 그 뒤를 따라왔다. 아까보다 더욱 차가워진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난간을 잡았다. 스티브가 그녀의 뒤로 와서 두 팔로 감싸안았다. 그의 온기가 피부 깊은 곳까지 스며 들어왔다. 작은 전율이 온몸을 타고 지나갔다.
[추운가 보군.]
그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으니 스티브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과 박자를 맞추어 고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가슴이 동시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언제 부터 이렇게 되었을까......이렇게 편안한 친밀감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그들은 영원히라도 그렇게 있을 수 있었다. 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할리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스티브 역시 그런 것 같았다. 할리는 그렇게 서서 그의 따뜻한 품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점점 다가오는 항구를 바라보는 것으로 완전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배는 너무나 빨리 항구에 닿았다. 할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약간 어색했다. 스티브도 그럴까 궁금했다. 그들의 친밀한 분위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정말 좋았어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서 할리가 말했다.
[나 같은 대타랑 남게 되었는데?]
[그건 괜찮아요, 타드가 나를 버린 거니까.]
[할리 매카시도 나쁘진 않았소.]
그는 할리의 손을 잡고 깎지를 꼈다.
[스티브 매리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