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20화 (20/29)

20. 더블 데이트

[너 스티브한테 이야기 안 했지?]

도널리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이 데이트 하기 싫어한다는 말 안 했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오래 화를 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할리 자신이 그런 미팅을 해봐서 알 텐데 다른 사람한테 그런 식의 미팅을 주선할 마음이 들 수 있단 말인가.

[스티브를 실망시킬 수가 없었어.]

할리는 이 엉뚱한 데이트를 취소하면 그가 타락이라도 할 것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스티브가 얼마나 널 만나고 싶어하는지 알아?]

[그래, 그렇겠지.]

도널리는 중얼거렸다. 할리는 바로 어제 아침에 이런 소개팅을 한다는 선언을 했다. 도널리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그녀는 스티브 매리스건, 어떤 남자건 지금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할리는 막무가내였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나 봐.]

[싫어, 할리. 싫어, 싫다고. 정말 싫어.]

하지만 도널리는 할리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그녀는 스티브의 장점을 줄줄 늘어놓았다. 친절하고, 사려깊고, 책임감이 강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할리 말을 들어 보면, 이 남자는 너무 좋아서 사실대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건 도널리의 짧은 경험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 번만, 응? 더는 조르지 않을게.]

할리는 애원했다.

[싫어.]

도널리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할리, 난 정말 관심 없어.]

할리는 굴하지 않고 친구를 노려보았다.

[너 그 사람하고 아주 잘 맞는단 말이야!]

[내 생각은 안 그래.]

도널리도 굴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이유는 충분했다. 그

녀는 또다시 실망을 감내할 힘이 남아 있질 않았고, 스티브는 아직 전 아내를 사랑하고 있을지 몰랐으며, 친구의 친구를 만난다는 사실에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스티브한테 맞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할리였다. 할리는 말끝마다 스티브 이야기였다. 스티브가 이런 말을 했고, 스티브가 뭘 했고 하면서 말이다. 스티브 이야기가 아니면 그의 아이 이야기였다. 도널리는 왜 그렇게 똑똑하고 영리한 여자가 이토록 둔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리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누구든 그녀가 스티브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도 곧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도널리는 그 사실을 몇 주일 전에 간파했다.

[스티브는 아이한테도 정말 잘해. 인내심 있고, 따뜻하고, 얼마나 재미있다고. 왜 스티브와 데이트를 안 하겠다고 우기는지 모르겠다. 도널리, 믿져야 본전이잖아?]

[난 못 해.]

[못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할리의 입이 벌어졌다.

[니가 이러면 얼마나 곤란해지는지 몰라서 그래? 스티브는 이제 2시간만 있으면 타드하고 같이 올 텐데, 그때 네가 없어 봐라.]

도널리는 자기가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꺼냈다.

[그 사람 이혼했다며.......?]

[너도 했잖아.]

[그래. 하지만 네가 한 말로 보면, 그는 지금도 전 아내를 사랑하잖아.]

[그 여잔 이제 재혼했어. 너를 만나면 스티브도 메리 린을 까맣게 잊어버릴 거야.]

도널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누군가가 스티브 매리스로 하여금 메리 린을 잊게 할 수 있다면, 그건 도널리가 아니라 할리였다.

[한 가지만 물어 보자. 왜 네가 스티브와 데이트를 하지 않는 거니?]

할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왜 대답 못하니?]

도널리는 할리가 실제 상황을 파악할 만큼 오래 말문이 막혀 있기를 바라면서 다그쳤다.

[우린 친구야. 이웃이고, 설사 내가 그 사람한테 관심이 있다 치더라도, 난 그가 지금 필요로 하는 여자는 아니야. 나한테는 로맨틱하거나 신비한 게 전혀 없어. 너랑 다르단 말야. 난 평범한 옆집 여자 할리 매카시일 뿐이야. 우린 아이와 같이 놀고 이따금 피자나 먹고......]

할리가 주절주절 말해 나가는 동안 도널리도 결심이 무너지고 있었다. 꼭 한 번만이다. 저녁 한 번 같이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끔찍할 것도 없다. 마음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할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고, 타드라는 미지의 남자와 데이트 상대로 같이 갈 것이다.

[네가 안 가면, 오늘 저녁은 완전 끝장이야. 나도 타드를 만나고 싶었는데.]

할리는 우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제법 그럴 듯하게 연기했다. 그래도 도널리는 넘어가지 않았다. 할리도 도널리가 스티브에게 관심이 없는 것만큼이나 타드란 남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할리는 모두를 위해서 자기가 큰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전에 타드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안 적이 있었어.]

도널리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는 중학교 때 조지아 주에서 퍼시픽 노스웨스트로 이사를 왔었다. 그녀는 남부 억양 때문에 언제나 다른 학생들과 비교가 되었고 가차없이 놀림을 받았었다. 지금도 그녀는 스칼렛 오하라의 농담을 들으면 몸서리가 쳐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즈음 그녀는 말이 없고 내성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너무 수줍음을 타서 잘생긴 남학생에게 자기 감정을 알리지도 못하는 쑥맥이었다.

[나도 두세 명쯤은 알고 있어. 그게 뭐 별 거니? 나를 바보꼴로 만들 거야. 아니면 이 별것 아닌 일을 해줄 거야?]

[알았어, 알았어.]

도널리는 신음 소리를 냈다.

[못할 것도 없지, 뭐.]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며 안도했다.

[앞으론 이런 짓 하기 전에 나하고 먼저 의논해야 해.]

도널리는 엄하게 말했다.

할리는 맹세를 하듯 두 손을 깍지꼈다.

[그럴께, 약속해.]

[좋아.]

도널리는 스티브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좋아하길 바랐다. 옷은 갈아입지 않을 것이다. 지금 보는 그대로가 그가 얻게 될 전부였다.

[이번 주일에 아이가 와 있다고 하지 않았니?]

[오늘 밤만 스티브 부모님이 봐주기로 했어.]

할리는 갑자기 싱글거렸다.

[정말 잘될 거야. 네가 거절했으면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싸지!]

이 일에 대해 도널리는 할리에게 두고두고 보상을 받고야 말 것이다.

[8시에 데리러 온댔어.]

할리는 시계를 보았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해.]

[아니, 이대로 나갈 거야.]

그녀는 검은색 쫄바지에 검정색에 금색 별무늬가 있는 긴 저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할리는 그녀의 옷차림새를 주욱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갔다.

도널리는 앉아서 친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할리는 그녀의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고집과 설득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샌포드가 약혼을 한 것이다.

그는 직접 전화를 해서 알려 주는 예우를 갖추었다. 그녀와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약혼을 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예상 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었고, 특별히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자기한테 맞는 여자를 찾았으니 도널리도 기쁘게 생각해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후회로 괴로워하진 않았다.

다만.....다시 사랑할 남자를 아예 못 만날까 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까 봐, 가족을 자길 수 없을까 봐 그것이 두려운 것뿐이었다.

정확히 8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도널리는 스티브에 대해 한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을 잘 지킨다는 것. 할리는 격려와 희망이 섞인 표정으로 도널리를 한 번 본 후 문을 열었다. 도널리는 이전에 할리의 집에 올 때 흘낏 본 인상으로 스티브 매리스를 알아보았다. 그는 옆에 키가 크고 매력적인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같이 온 남자의 행동거지로 보아 그 역시 더블 데이트에 별로 흥미 없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멈춘 것은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그 타드 스태포드가 아닌가!

도널리는 스티브를 소개해 줄 때 애써 공손하게 미소를 짓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타드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는 도널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할리, 이 쪽은 타드 스태포드라고 해.]

그는 할리와 악수를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도널리에게로 향했다.

[도널리 노먼?]

그의 질문은 목소리라기보다는 훅 들어마신 숨이었다.

[지금은 쿠퍼야. 결혼을 했었거든.]

이것으로 말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덧붙였다.

[불행하게도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랬어.]

내키지 않아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타드는 도널리에게서 할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로 아는 사이예요?]

할리가 둘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타드가 대답했다.

할리는 눈짓으로 도널리에게 이 사람이 좀 전에 말한 그 타드인지 물었다. 도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행운, 운명, 우연의 일치. 이런 것을 두고 그런 말이 있었던가 보다. 그 옛날 그 시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지금 그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할리.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동안의 세월이 그에게는 좋았던 것 같았다. 그는 도널리가 기억하는 그 옛날의 모습과 똑같았다.....아니, 더 나아졌다. 지금은 열여덟 살 때엔 없었던 성숙의 태가 완연했다. 얼굴의 주름살은 깊이와 인격을 나타내 주었고, 소년 시절 가냘펐던 몸은 남자다운 근육의 완숙한 몸으로 성숙해 있었다.

[내 차를 타고 가시죠.]

스티브의 말에 도널리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좋아요.]

도널리는 타드에게서 눈을 떼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스티브가 자기 데이트 상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할리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려고 애쓰는 듯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도널리는 스티브와 함께 앞좌석에 앉았고, 할리와 타드는 뒷좌석에 앉았다. 아무도 말할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혼자만의 착각인진 몰라도, 도널리는 뒤통수에 와닿는 타드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스티브는 도널리를 대화에 끼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널리는 자신의 외마디 대답이 대화에 도움이 될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이젠 수줍음을 벗었다고 생각했었지만, 혀는 이빨에 갓풀을 붙여 놓은 것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옛날에 알았던 소년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 뒷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 밤 이후로 스티브가 도널리한테 데이트를 하자고 조를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도널리를 뗄수 있어 오히려 반가워할 것이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녀는 여러 해 전의 타드를 생각했다. 졸업을 며칠 앞두고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길게 줄지어 있는 한 카페테리아 앞에서 그들은 앞뒤로 서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수줍어서 인사조차도 못 건넸었다. 그 후 도널리는 후회와 아쉬움에 그의 차에 쪽지를 남겨 놓았었다.

그 쪽지엔 '난 네가 멋있다고 생각해.'라고 썼었다. 그러나 이름을 쓸 용기는 없었다. 그 후로 늘 후회를 했었지만 더 이상 회상에 잠길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부둣가의 멕시코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은 근사한 이국의 향내--실랜트로와 칠리--로 가득했고, 축제 분위기의 마리아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도널리와 타드는 각자의 데이트 '짝'과 마주하고 나란히 앉았다. 스티브와 할리가 거의 이야기를 이끌고 있었다. 웨이트리스가 음료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네 사람 모두 마가리타를 시켰다.

도널리는 메뉴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할리와 스티브는 살사(칠레 소스)와 칩을 먹었다. 하지만 도널리는 기름에 튀긴 음식보다는 그릴에서 갓 구워낸 토르티야(납작하게 구운 옥수수빵)를 먹기로 했다.

[부드러운 토르티야 한 접시 주시겠어요?]

웨이트리스가 음료수를 가지고 왔을 때 타드가 말했다.

[나도요.]

도널리는 그를 따라 말했다.

타드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를 못했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바보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열여섯 살 때로 되돌아간 것처럼 얼굴이 발개졌다.

웨이트리스가 음식 주문을 받으러 왔다. 도널리는 그 식당의 특별메뉴 중 하나를 시켰다. 치즈 엔칠라다(옥수수 가루에 맵게 고추로 양념한 파이)와 칠리 렐레노를. 타드도 도널리의 주문을 되풀이했다.

[두 사람 짰어?]

할리가 농담처럼 물었다.

[아니야.]

도널리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음식 취향이 비슷한 것뿐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과장해서 생각하면 안 돼.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이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스티브가 할리에게 질문을 했고, 곧 두 사람은 열띤 대화에 빠져들었다.

도널리와 타드 사이에 있던 거리가 갑자기 없어진 것 같았다. 도널리는 그를 다시 보고 자기 가슴이 그토록 뛰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 마저 느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똑바로 앞만 쳐다보았다. 그에게 물어 볼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예전의 수줍음 많은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타드 역시 도널리만큼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최근에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알아? 3학년 때 영어를 가르쳤던 오리어리 선생님을 만났어. 그 선생님 수업 들은 적 있어?]

오리어리 선생님은 도널리가 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선생님이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기에 가장 안전한 화제였다.

[그래! 어떠신데? 오랫동안 소식 못 들었어.]

[옛날하고 똑같으셔. 하나도 변한 데가 없더군. 아, 머리는 좀 희였지만, 말할 때 눈이 반짝이는 것도 여전하고, 만나 뵈니 얼마나 반갑던지.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란 말을 늘 하고 싶었는데.]

[나도야.]

도널리는 고개를 떨어져라 끄덕였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었지. 셰익스피어 희곡을 배우는 동안은 마치 그 시대에서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또 제인 오스틴은 어떻고.....오리어리 선생님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잖아. 시간을 초월해 오늘날에도 적절하게 해당되는 남녀관에 대해서 보라고 하셨지. 난 <오만과 편견>을 몇 년 마다 다시 읽곤 해.]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언제나 오리어리 선생님한테 감사할 거야.]

[나도 그래.]

이제 두 사람도 긴장이 풀려서 웃으며 추억담을 즐겼다. 얼마 안 있어 도널리는 할리와 스티브가 이야기를 멈추고 자기들을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할리는 도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할리는 타드 쪽으로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스티브도 도널리 쪽으로 가까이 의자를 당겼다.

도널리는 할리를 나무랄 수 없었다. 스티브가 그녀의 짝이었고, 할리는 타드의 짝이 아닌가. 친구가 자기 짝을 가로채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으니!

스티브 역시 타드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얼굴로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니.......

갑자기 모든 게 뒤엉켜 버린 기분이 들었다. 도널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몰랐다.

어쨌거나 저녁 식사는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도널리는 한 입도 먹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웨이트리스가 접시를 치우러 왔을 때, 그녀는 자기 음식이 반이나 없어진 것을 보고 놀랐다.

스티브가 부둣가를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모두 호응하는 것 같았다. 식당을 나서면서 도널리는 타드가 스티브를 한 옆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따금씩 두 여자들을 쳐다봐 가면서.

도널리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일단은 할리와 단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 반가웠다.

[나 그렇게 미워하지 마.]

그녀는 자기와 타드 사이에 생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작게 중얼거렸다.

[내 짝을 훔쳐가서 미워할까 봐?]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못된 여자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과하려고 했지만, 할리가 말을 막았다. 그녀의 눈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사라지면서 부드러운 표정이 자리잡았다.

[걱정 마. 너희 둘이 서로 알아봤을 때부터 지도가 어떻게 그려질지 파악했으니까.]

[할리, 난 타드를 좋아했었어.]

게다가 그 불꽃이 다시 살아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타드와 같이 있는 것은 지난 세월의 층을 모두 벗겨내서 저 심약하고 꿈 많던 소녀를 다시 드러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두렵게 하는 것은 타드를 쉽게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사춘기의 풋사랑이 아니라 강력하고 복합적인 성숙한 감정이었다.

잠시 후 타드가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스티브와 이야기를 했어.]

이렇게 말하며 그는 도널리의 손을 잡아 꽉 쥐었다.

[우리 둘이 따로 가는 게 어때?]

도널리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할리는?]

[스티브가 지금 말하고 있어.]

도널리는 어깨 너머로 할리를 보았다. 할리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재미 많이 봐!]

그녀가 밝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스티브와 함께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리고 타드의 믿을 수 없이 강렬한 시선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했는데.]

그가 말했다. 그의 말에 반박하는 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었다.

[할리와 스티브 역시 서로 둘이 짝이 되었어야 했어. 너하고 스티브, 나하고 할리, 이렇게가 이니고.]

[내 생각엔 할리가 벌써 스티브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아.]

도널리가 말했다.

[스티브는 이미 할리를 사랑하고 있어.]

도널리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난 스티브가 아직 메리 린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타드는 대답할 말을 가늠하듯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아마 그렇다고 해야 할 거야. 나도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 메리 린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야.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까.]

도널리는 혼자 웃었다.

[난 언제나 그런 너를 좋아했었지.]

타드는 그녀를 보았다.

[내가 어때서?]

[공평하잖아. 그리고 관대하고.]

그녀의 대답에 갑자기 그가 조용해졌다.

[네가 내 차에 쪽지를 놓고 가는 걸 봤었어.]

도널리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겁내지는 않았다.

[그때 한 말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날 카페테리아에서 너한테 말을 못하고 헤어진 걸 후회했었어.]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난 여자 앞에만 서면 말을 잘 못했지. 지금도 그래.]

그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나도 너를 좋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우리 학년의 다른 아이들은 다 미숙해 보였는데, 넌 안 그랬어.]

[넌 나의 첫사랑이었어. 그 해 내내 네 꿈만 꾸었지.]

그들은 선착장 밖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보다 더 선선한 바람이 춤추고 있었다.

[나도 네 꿈을 꾸었어, 도널리.]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도널리는 자기 감정을 쉽게 표출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당황한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돌아섰다.

[도널리.]

타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무슨 말 잘못했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미안해.]

그녀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눈물을 찍었다.

[이상한......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잖아.]

그는 그녀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는 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려 도널리의 눈이 자기 눈과 마주치게 했다.

[떨고 있군.]

[바람이 차서 그래.]

처음으로 말이 되는 핑계였다.

무의식적으로 속을 담아 두었다가 갑자기 모두 뱉어내는 것처럼 그의 격한 호흡이 그녀의 얼굴에 부딪쳤다.

[괜찮을 거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일, 나도 느껴. 사실 나도 두려워.]

[난 한 번 결혼했었어......이혼한 후엔 거의 죽다시피 했지.]

[내 결혼생활은 1년도 못 갔어.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 아픔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

[지금은?]

그녀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지금은........]

그의 표정은 자기도 도널리만큼 놀라고, 겁이 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호흡이 불규칙했다.

[오두막집을 하나 갖고 있어.]

그는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 나와 같이 가. 주말을 거기서 보내자구.]

도널리의 결정은 1초도 안 걸렸다.

[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