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18화 (18/29)

18. 이웃집 소녀

젠장, 그는 할리가 그리웠다. 정말이지 너무 하긴 했다.

할리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리고 그녀가 문을 쾅 닫고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때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 후로 할리의 머리카락 한올조차 볼 수 없었다. 평소에는

얼마나 자주 부딪쳤던가를 생각해 보면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들은 퇴근하면서 우편물을 챙기다가, 혹은 아침 출근 길에

차를 타러 나갈 때 거의 매일 마주치곤 했었다. 할리는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스티브는

말할 수 없이 울적해졌다.

아이까지도 눈치를 챘다.

[할리 누나하고 무슨 일 있었어?]

케니가 메리 린의 결혼식 전 주말에 물었다.

[무슨 일? 왜 그런 생각을 하니?]

그는 자기가 할리를 모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메리 린한테 넋이 빠져서

바보 같은 짓을 한 후 할리가 인신공격을 했다는 사실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항상 바라던 것처럼 과연 메리 린은 그를 찾아왔다. 다만

그가 그린 로맨틱한 시나리오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지만,

빌러 오긴 했지만 그건 다시 돌아와 달라고 빈 것이

아니었다. 메리 린은 부탁을 하러 왔다. 재결합을 하는 대신

스티브는 전처가 새 남편과 신혼여행을 가 있는 동안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물론 그는 아이를 사랑했다. 그이 감정은 아이와는 아무

상관 없다. 메리의 재혼은 이제 현실이 되었고 그의 희망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그 후에 있은 할리의 연설은 안 그래도 아픈 상처를 한 번

더 건드린 꼴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가 한 행동은

잘못이었다. 할리의 갈색 눈에 나타난 상처와 실망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아빠?]

케니가 그의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할리 누나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더 이상 숨기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어.....우린, 그러니까, 사소한 일로 좀 다투었어.]

[누나도 그러더라.]

스티브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누나가 무슨 얘기를 하던?]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건 아니고, 내 야구시합 때 오라고 했었거든. 아빠랑

그런 일만 없었으면 올 수도 있을 텐데.]

[누나가 그러디?]

[아니.]

케니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냥 아빠랑 누나랑 서로 화가 났다고만 했어.]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구나.]

[아빠는 아직도 엄마를 사랑하지? 그런데 엄만 그

아저씨하고 결혼하잖아. 엄만 아빠하고 결혼해야 되는데.]

케니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사실, 이 말은 스티브의 기분을 그대로 요약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메리 린도 자기 삶이 있고 스티브 없이 그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엄마도 엄마의 인생이 있는 거야. 아빤 엄마를 이해하기로

했다. 이제 엄마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엄마를 위해 좋게

생각하자꾸나.]

이런 말을 하기는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다행이 그 말이

진심인 것처럼 들릴 만큼 확신있게 말하기는 했다.

[난 킵 아저씨가 싫어!]

케니는 뿌루퉁해서 말했다.

[아저씨한테도 기회를 줘야지.]

스티브는 아이를 달랬다. 이제 그의 아이는 메리 린의 새 남편과 같이 살아야 했다. 그러니 그와 잘 지내는 것이 케니에게도 좋았다.

[일단 잘 알고 나면 더 좋아질 거야.]

스티브는 덧붙여 말했다.

[그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잖아.]

케니가 정곡을 찔렀다.

메리 린과 같이 합치는 희망을 버리기는 괴로웠다.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그것과 킵이 아이의 새아버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했다.

[아빠는 널 사랑한다.]

스티브는 이렇게 말하고 두 팔을 벌렸다. 케니가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스티브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고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사랑이 밀려왔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는 아이를 안심시킬 말을 찾느라 고심하며 약속했다.

[아빠는 여전히 네 아빠야.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위해 여기 있을 거야.]

[엄마가......]

[쉿.]

스티브는 케니의 머리를 어깨에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아빠지?]

케니는 그의 말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약속해?]

[약속해.]

[아빠가 다시 결혼을 하더라도?]

스티브는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아빠가 다시 결혼을 하더라도.]

그는 다시 맹세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그를 아이에게서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1시간 후에 메리 린이 아이를 데리러 왔다. 스티브는 늘 그랬듯이 이제는 밖에 나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 의미가 없어졌다. 왜 자신을 고문하는가?

여름 방학이 되었고 아이는 아직 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우지 않은 단계였다. 그는 아이를 좀더 자주 보고, 좋은 아빠가 되는 일에 전력할 것이다. 사실은 메리 린이 신혼여행을 가 있는 두 주일 동안 아이와 함께 할 일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그때는 최소한 그의 고독은 좀 덜해질 것이다.

아이가 떠나고 집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은 스티브의 마음속에서 메아리를 치며 울려대는 것 같았다. 그는 집 안에 소리를 내려고 텔레비젼을 켰다. 하지만 텔레비젼 소리는 조용했을 때보다도 더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그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가끔씩 이렇게 조깅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가슴속의 울분을 아스팔트길에 쏟아 붓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집을 나서는데 할리의 집 앞에 차 한대가 와서 섰다. 평소 감탄해 마지 않던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오는 BMW 신모델이었다.

그 차에서 내리 옷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할리의 데이트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티브는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몇 가지 준비 운동을 했다. 할리와 데이트하는 남자를 좀더 자세히 보려고 시간을 끌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었다.

이번 남자는 예전의 남자들보다 잘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몰고 온 차로 보아 잘 나가는 사업가 같기도 했다.

스티브는 이번엔 할리의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시 그녀와 친구가 되기를 바랐다. 삶을 활기차게 하던 그녀의 웃음, 그녀와 케니와 함께 지내던 시간이 그리웠다.

그는 그 놈의 입을 좀 다물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자신의 실수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자한테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는 데 재주가 없었다. 메리 린과의 결혼생활이 그 좋은 예였다.

그는 달리기 시작했고 몇 분 만에 심장 박동이 올라갔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머리는 온통 할리 생각에 차 있었다. 메리 린이 아니라, 할리 생각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헷갈렸다.

다음날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자동차 와이퍼에 메모지를 꽂아 놓았다. 거기엔 한 마디 말밖엔 써 있지 않았다.

[미안.]

그 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할리가 쪽지를 못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의 차 와이퍼에 종이 쪽지가 끼워 있었다. 그는 쪽지를 폈다.

[용서하겠어요.]

스티브는 웃으며 쪽지를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출근을 했다.

그의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을 타드가 알아차렸다.

[오늘은 좋아 보이는군.]

스티브는 커피를 따랐다.

[사과를 해야 할 여자한테 뭘 주면 좋겠나? 꽃이야, 아니면 캔디야?]

[어떤 여자?]

[그런 건 상관 말고 꽃이야, 캔디야?]

타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그 옆집 여자하고 관련된 거 아냐? 샐리라고 했나? 해티? 아니, 할리. 맞지?]

[어떻게 알았어?]

[이봐, 스티브. 자네 말끝마다 할리 이야기를 했잖아. 그 여자, 코미디언 아냐? 자네가 노상 할리가 한 우스운 일을 이야기하는 걸 보니 말이야. 난 두 사람이 뜨거운 사이가 될 걸로 기대하고 있네.]

[나하고 할 리가?]

[그래, 그럼 누구겠나?]

애인? 할리하고 애인이라고? 그는 잠깐 그 생각을 해본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그건 불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할리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둘은 잘 어울렸다.

[왜 안 돼?]

[그건.........]

핑계로 댈 수 있는 거리가 줄줄이 떠올랐다. 너무 많아서

추려서 하나씩 말하기도 힘들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할리가 지금 남편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난 이미 데일 대로 데인 몸 아닌가. 할리는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야. 육체적인 일로 우리 관계를 복잡하게 할 생각은 없어.]

[아주 빈약한 핑계군.]

스티브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정과 사랑이 합쳐지면 그때도 우정이 살아 있을까?]

왜 그 좋은 것을 섹스로 망친단 말인가?

[난 그렇게 보지 않아. 친구 사이가 최고의 연인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거든. 서로 친숙하기 때문에 성적인

부분에서도 관계가 좋아지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스티브도 그 정도는 인정했다.

[내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꽃이야, 아니면 캔디야?]

그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수록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관계 없이 살았는지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여러 달이 되었다. 성인이 된 후로 가장 오랜

기간이었다.

[꽃.]

타드는 자기 커피 잔에 설탕을 넣으면서 덧붙였다.

[말하나마나 꽃이지.]

스티브는 캔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할리가 같이 먹자고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도 최근 들어 초롤릿 트러플(프랑스 송로류의 일종)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타드의 말이 옳았다. 꽃을 주면 할리를 위한 것이 될 테지만 캔디를 조면 할리는 먹지 않고 스티브만 먹게 될 것이다.

퇴근길에 스티브는 빨간 장미 한송이와 초콜릿, 그리고 차가운 백포도주 한 병을 샀다.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할리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장미꽃 가지를 입으로 물고 포도주와 초콜릿을 들고는 그녀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할리가 나와 그를 보고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미소는 햇살 같았고 스티브는 금세 그 따뜻한 온기에 녹아들었다.

[우리 친구지?]

[친구 맞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대꾸하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서로 못 보고 지낸 지 1주일밖에 안 되었음에도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이제 우정을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에 그는 마음이 가벼웠다. 때를 놓치기 전에 얼른 정식으로 사과하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자기 일이나 잘하라고 한 것, 그리고 결혼도 못했니

어쨌지 한 것 말이오.]

그는 이렇게 시작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후회했소. 미안하오, 할리.]

그녀의 아랫입술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닌걸요.]

그녀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주제넘은 말을 했어요.]

[아니오. 메리 린이 왔을 때 자전거에서 넘어지게 한 것도

사과하겠소. 화가 난 것도 당연하지.]

[이제 그만 잊어버려요.]

[좋았어.]

그는 포도주와 초콜릿, 그리고 장미를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새털처럼 부드러운 키스, 살짝

스쳐 가는 가벼운 키스, 정열이 없는 키스였다. 이 전에 그들이

나누었던 키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 그의 피를 타고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가슴에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이

자기 입술에 눌리는 것을. 그 부드럽고 여성적인 몸을 느끼고

싶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되고 있었다.

스티브는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할리가

테라스에 나가 포도주를 마시자고 했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 오는

저녁은 아름다웠다.

할리는 접는 의자에 기대앉아 다리를 길게 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티브도 마음이 느긋하게 풀렸다.

[요즘 빌 게이츠와 데이트를 하는 모양이지?]

스티브가 BMW를 타고 왔던 남자를 기억하며 질문을 던졌다.

[빌 게이츠는 결혼했어요.]

그가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을 폼이었다.

[그럼 그 Z3을 몰고 온 친구는 누구요?]

[아, 아놀드 말이군요. 아놀드 밴스, 데이트라인에서 소개해 준 사람이에요.]

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사람 만났어요?]

[아니, 며칠 전 밤에 조깅하러 나가다가 집 앞에 주차하는 것을 보았소.]

그는 자기가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와서 숨기는 것도 별 의미 없기는 하지만.

[완벽한 남편감 같더군.]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놀라운 표정이었다.

[아놀드는 공손하고 자상해요. 그런데 말이죠. 뭔가 짜릿하게

와닿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또 만날 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아 보였다.

[다음 수요일에요. 내가 왜 짜증이 나는지 알아요? 이 남자는

여자가 바라는 건 다 가졌는데 대체 난 관심이 안 가요.

같이 있으면 하품만 나요.]

스티브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입이

벌어지게 웃고 있었다. 흠, 차가 사람을 만드는 건 아니로군.

[도널리도 사정이 똑같아요.]

할리가 말했다.

[몇 년째 알고 지낸 부동산 중개업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죠.

겉으로 보면 최고인데, 도저히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앉아서 당신과 포도주를 마시고 있을라고요?]

그는 할리가 조카를 돌봐주던 날 밤에 말했던, 이와 비슷한 말을 기억하고 빙긋이 웃었다. 이렇게 여름날 저녁에 친구와 같이 앉아 여유롭게 노닥거리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나 보고 싶었소?]

[그랬어요.]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놀랐어요. 이번 주 내내 나를 피해 다니느라 무진 애쓰시더군요.]

[난 아니오. 당신이 나를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조금 바빴을 뿐이에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했죠.]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스티브는 그녀가 웃을 때 얼마나 예쁜지 또다시 느꼈다.

[궁금하다면 말해 주죠. 보고 싶기만 한게 아니라, 기분이

엉망이었어요. 미안했고요. 이 정도면 만족하나요?]

[나도 그랬소.]

할리가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나온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얼마 동안 아무 말 않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 이웃,

그들이 본 영화......화제는 어느덧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다음주 초에 며칠 출장을 갈 텐데. 내 우편물 좀 챙겨 줄래요?]

[그러지.]

우편물만 챙겨 주는 것이 아니라 화초에 물도 주고 또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다. 스티브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자기가

새로운 눈으로 할리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 타드가

한 말이 생각났다.

애인? 할리와?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오늘 밤 그녀는 짧은 바지에 브이 자로 파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만 쳐들면 그녀의 가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의 맨 가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망칙한 생각을 하다니! 상대는 할리야! 스티브는 자신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얼굴을 찌푸렸다. 할리는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스티브는 할리가 출장--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무역 박람회에 참관하는 것--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은 놀라웠다. 그 입술은 그가 본 중에 가장 완벽했다. 그는 가끔 혀끝으로 축여가면서 계속 움직이는 그 입술을 유심히 관찰했다. 입술을 축이는 행동은 전혀 선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이전에도 수천 번은 보아 왔지만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번 주말에 메리 린이 결혼을 하겠군.]

스티브는 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상처입은 영혼을 치료하는 약과도 같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니까.]

[케니는 어때요?]

[별로 좋아하진 않지. 하지만 어리니까 금방 적응을 할 거요.

그 천치바보한테도 기회를 주라고 했소.]

[스티브!]

[왜?]

[설마 케니 앞에서 킵을 그렇게 부르진 않았겠죠?]

그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큰소리로 하진 않았지.]

[휴.]

그녀는 선생님처럼 그를 야단치듯 째려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레리 린은 이제 결혼을 하겠지. 메리와 그 바보천치가

같이 자는 걸 상상할 수 있어?]

[스티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섹스 없이 지내 왔는지.]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남아 있는 포도주를 한 모금에

마셔버렸다.

할리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나야말로 얼마나 오랫동안

섹스 없이 지내 왔는지 몰라요.]

[정말?]

할리를 만난 이후로 그녀가 남자들을 연달아 만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마크와 래리, 또 다른 남자들은 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기분이 상해서 입술을 꽉 다물었다.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다 자는 건 아니에요.]

[삐진 거요.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러는 여자들도 많으니까

하는 말이었지.]

[듣던 중 가장 웃기는 말이군요, 스티브 매리스.]

[미안하오.]

그는 진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포도주병을 집어 술잔을

다시 채웠다.

[기분 상하게 할 뜻은 정말 없었소.]

[기분이 상한 게 아니에요.....그냥, 아니, 나도 모르겠어요.

당신 정말 가끔 바보 같은 말을 하더라.]

포도주 기운이 감도는지, 그녀의 뺨이 발그레해지며 눈썹이 땀으로 젖어 반짝였다. 얇은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가슴과 진주처럼 단단한 젖꼭지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브래지어를 안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고삐 풀린--아니 타락한?--심정으로 있을 땐 이런 생각은 지우는 게 좋을 성싶었다.

[이러면 어떻겠소?]

그는 빙긋이 웃었다.

[관심 있소?]

젠장, 물어 보는 거야 뭐 해롭나. 또 알아, 할리가 뜻밖의 대답을 할지?

[뭐가요?]

[섹스, 우리 둘이서.]

그는 아무런 감정 내색 없이 물었다. 친구가 최상의 애인이

된다던 타드의 이론을 시험해 볼 기회였다.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

그는 눈썹을 치켜떴다.

발그레했던 그녀의 얼굴이 이젠 완전히 빨개졌다.

그는 사심없는 만족의 한숨을 쉬었다.

[그냥 한번 물어 본 거요.]

[그렇게 해서 여자가 꼬셔지나요?]

그녀는 얼굴에 주름을 잡고 놀리는 표정을 지었다.

['야, 이리 와봐, 베이비, 우리 한 번 하자, 응?' 이런

식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섹스를 못했지.]

애초에 농담으로 한 소리였으므로 스티브는 그 말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럼 여자한테 침대에 가자고 할 땐 어떻게 말하면 되는 거요?]

[하여간 그런 식으론 안 돼요!]

[무릎을 꿇고, '어여쁜 공주님, 제발 봐주소서' 하면 다시

생각해 보겠어?]

[아니요!]

그는 웃었다.

[그럴 줄 알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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