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16화 (16/29)
  • 16. 남자답게 그렇게

    케니는 당장이라도 아빠가 나타날 것처럼 초조하게 등뒤를 힐끔거렸다. 케니는 할리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래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부엌 문 앞에 나타났었다.

    [왜, 무슨 일이니?]

    케니가 이렇게 불안해하거나 기분이 상한 것은 보질 못했었다. 늘 명랑하고, 사분사분하며, 걱정이 없는 아이였다.

    케니의 불안한 눈이 다시 아버지의 집 쪽으로 향했다.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지.]

    케니는 할리가 쇼핑 꾸러미를 침실로 나르는 일을 거들었다. 그리곤 1주일 내내 참았다는 듯이 홍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오, 누나, 나 정말 아빠 때문에 걱정돼 죽겠어요.]

    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스티브가 병이 났거나 다친 건 아니겠지?

    [왜, 무슨 일인데?]

    [엄마가 킵 아저씨하고 결혼하기로 했어요.]

    할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스티브의 기분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빠도 아시니?]

    [아직은 몰라요. 엄마가 오늘 밤 나를 데리러 와서 그때 말할 거라고 했어요.]

    [저런.]

    할리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스티브는 늘 재결합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었다. 그는 모든 미래를 메리와의 재결합을 가정해 두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지금도 엄마를 사랑하고 있어요.]

    케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어린 소년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그녀에게 아빠와 결혼할 마음이 없냐고 물어 보았을 때에도 할리는 아이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아마도 케니는 메리 린의 의도를 스티브보다 먼저 알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정말로 엄마가 재혼을 하게 되자 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이 역시 제 부모가 다시 합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할리는 두 팔을 벌렸다. 케니는 그 안으로 들어와 할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아빠하고 이야기 좀 해줄래요?]

    잠시 후에 케니가 물었다.

    할리는 이 일에서 빠지고 싶었다. 스티브가 그녀를 위해 베풀어 준 온정만 아니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여러 점에서 그는 도널리만큼 좋은 친구였다.

    [최선을 다 할게.]

    할리는 약속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혹은 스티브가 자기말을 듣고 싶어할지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케니의 머리를 토닥였다.

    [걱정 마, 케니. 아빠는 어른이야. 이런 일 정도는 문제 없이 잘 처리하실 거야.]

    그 소식이 스티브에게 엄청난 충격은 아닐 것이다. 메리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티브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의미를 무시했을 뿐이다.

    케니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쳐들어 할리를 보았다.

    [주말 내내 누나가 오기만 기다렸어요.]

    [이런, 미안하다. 케니. 이야기하고 싶을 때 내가 없어서.]

    케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괜찮아요. 아빠가 필요할 때 누나가 있다는 게 더 중요해요. 아빤 친구가 필요할 텐데, 타드 아저씨한테는 전화를 안 걸 거거든요.]

    [타드?]

    [아빠랑 제일 친한 친구예요. 만나 본 적 없어요?]

    [아직.]

    볼링 시합을 같이 하고 몇 번 끼어서 피자집에 간 것 외에는 사실 스티브와 같이 어울려서 뭘 해본 적은 없었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온 것 같아요.]

    케니는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안녕!]

    할리는 아프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으므로 거실 창문 커텐 뒤에 숨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 같아 망설여졌지만, 이젠 그녀도 시나리오의 일부가 된 거라고 위안을 삼았다. 스티브에게 위로를 해주려면, 그의 반응을 알아 두어야 했다.

    케니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짐가방을 어깨에 맨 채 엄마의 차에 탔다. 그리고는 뒷좌석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스티브는 아이를 따라 잔디밭을 가로 질러서 차가 있는 데까지 갔다. 메리 린은 할리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고, 스티브는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할리는 메리 린이 아이를 데리러 오는 이 일요일 오후 시간을 스티브가 얼마나 고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잠시 후 할리는 그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계속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손을 힘있게 내저었다. 그 다음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지면서, 주먹으로 자동차 후드를 쾅 하고 내리찍었다.

    할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손이 분명 다쳤을 것이다. 그와 레리 린은 이제 낮은 목소리로 말을--아니면 욕을?--주고 받았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할리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만의 비밀이어야 할 장면을 훔쳐본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녀가 본 광경으로 뱃속이 울렁거렸다.

    스티브가 혼자 있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고 할리는 1시간을 기다렸다. 검은 하늘에선 이제 일광이 약해져 있었지만 스티브의 콘도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었다. 그는 스테레오를 크게 틀어놓은 채 카펫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할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생일에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좀더 귀를 기울인 후에야 흘러나오는 노래가 '광대를 보내 주세요'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찬장을 뒤져 작년 크리스마스 때 어느 고객이 감사의 표시로 준 테네시 버번 병을 찾아냈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술에 취해야 할 땐 이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 생일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기념품으로 가져온 작은 술잔을 꺼내들고 스티브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 현관 앞에서 비를 맞으며 선 채로 그녀는 몇 번이나 벨을 눌렀지만 묵묵 부답이었다. 문을 안 열어 줄 참인가?

    [스티브.]

    그녀는 문을 쾅쾅 치면서 소리쳤다.

    [빗물에 빠져 죽겠어요, 문 좀 열어요!]

    잠시 후 그는 음악 소리를 낮춘 후 문을 열었다.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요?]

    그녀는 술과 술잔을 들어 보였다.

    [약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는 놀란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압니까?]

    [케니가 말해 줬어요.]

    그는 할리가 들어오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믿어지지가 않아.]

    그는 비극적인 사고의 후유증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처럼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는 소파에 털석 주저앉아 몸을 앞으로 내밀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할리는 부엌으로 가서 잔에 얼음을 채우고 그에게는 버번만 더블로 부었다. 그리고 자기 잔에는 물을 충분히 섞어 희석시켰다.

    그녀가 잔을 건네자 그는 고개를 들고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는 얼마 동안 잔을 잡은 채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리가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 같았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그녀는 조심스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목구멍을 타고 술이 내려가는 게 느껴지자 그녀는 빠르게 눈을 껌벅거렸다. 눈물이 핑 돌고 기침이 나오려고 해 자기 가슴을 탕탕 쳐댔다.

    [괜찮소?]

    스티브가 물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눈을 껌벅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희석을 했는데도 이런데 스트레이트로 먹었다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할리는 그의 눈에 담긴 처절한 빛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스티브,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요. 메리 린하고 재결합하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깊은 한숨을 쉬면서 그의 어깨가 들렸다가 내려왔다.

    [그 바보 같은 놈하고 결혼을 한다더군.]

    지금은 그가 킵을 알지도 못하면서 인격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을 할때는 아닌 것 같았다. 그에겐 메리 린에게 다른 남자가 끼어 들어와 그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았다는 사실 외엔 중요한 것이 없었다.

    [우린 고등학교 때 만났지.]

    잠시 후 스티브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메리 린하고요?]

    그녀는 메리 린에 대해서나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추억을 되새겨 봐야 가슴만 아프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메리 린으로 인해 생긴 슬픔을 메리 린과 함께 방출하고 싶어한다면,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만큼 그에게 신세도 졌으니까.

    [메리 린이 전학을 왔는데, 얼마나 예뻤던지 난 그녀를 볼 때마다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소, 매일 축구팀 연습하는 것을 와서 보곤 했는데.....]

    [당신이 팀에서 스타 플레이어였죠?]

    그의 운동 실력으로 보아 다른 자리는 생각할 수 없었다.

    [쿼터백이었소. 어떻게 알았지?]

    [때려 맞춘 거죠, 뭐.]

    그녀는 싱긋 웃어 보였다.

    스티브는 버번 원액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고, 호수에서 갓 나온 개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낮은 소리로 욕설을 뱉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젠장할, 더럽게 좋은 버번이로군.]

    [내 친구들한텐 최고로만 대접하니까요.]

    스티브는 소파 쿠션에 기대 앉았다. 폴 사이먼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 사랑해'가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난 메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소.]

    스티브가 말했다.

    [그 사랑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할리는 자기가 고등학교 시절에 좋아했던 남학생을 떠올렸다. 그들은 고3때 헤어졌고, 그는 댄스 파티 때 다른 여학생을 데리고 왔었다. 할리는 그 전 여름에 만난 적이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의 사촌과 같이 갔었다. 괜찮기는 했지만 첫사랑의 연인만은 못했었다.

    스티브는 날카롭게, 외마디 웃음소리를 냈다.

    [첫 번째 데이트 때 메리한테 청혼을 했소.]

    스티브는 소파 등에 머리를 기대고 그때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키스를 했을 때 메리를 사랑하게 될 거란 걸 알았지. 나중에 아버지 말씀이 아버지도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랬다고 하더군. 미군 위문협회 파티에서 어머니한테 춤을 추자고 했었는데, 한 바퀴를 돌고는 대번에 청혼을 하셨다는군.]

    얼마나 낭만적인가! 할리는 자기도 그렇게 쉽게 사랑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웠다. CD 플레이어에서 다음 곡으로 티나 터너의 '사랑이 무슨 상관 있나요?'가 나오자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했다. 그리곤 이내 한숨이 나왔다. 스티브, 친구이자 이웃인 이 사람은 십대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 그런데 지금 메리 린은 그를 떠났다. 파경을 만난 결혼, 배신당한 사랑은 자주 일어나는 일일지 몰라도, 비극은 비극이었다.

    [그 다음주에 반지를 주었지.]

    버번 탓인지 스티브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물론 우린 그게 약혼 반지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그렇게 잠깐 만나고 벌써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면 부모님들이 벼락을 치실 게 뻔하니까.]

    할리는 스티브가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런 낭만, 평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이런 사랑은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메리 린은 그 모든 것을 미련없이 내동댕이친 것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슴으로는 메리와 첫 데이트를 한 날 밤에 결혼을 했어. 서로를 발견한 날이었지. 우리의 가슴이 하나로 이어진 날, 내 평생 오직 메리 린만을 사랑할 것을 안 날이었소.]

    할리의 목이 꽉 메이면서 아프기까지 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급기야 쏟아졌다.

    스티브가 눈을 번쩍 떴다.

    [할리!]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휴지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울고 있소?]

    [아니요.]

    스티브는 성급히 일어나 휴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휴지를 뽑았다. 정말 창피한 노릇이었다. 그녀는 코를 힝 하고 풀고는 휴지를 주머니 속에 쑤셔넣었다. 스티브는 그녀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울먹이며 새 휴지를 다시 뽑아들었다. 에릭 클랩튼의 '천국의 눈물'을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들고 있는 휴지를 괜시리 쥐어짰다.

    [뭐가 미안하단 거요?]

    스티브가 부드럽게 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휴지를 한 줌 잡아당겼다. 휴지 두세 장이 한꺼번에 뽑혀나왔다.

    [당신을 위로하러 왔는데...]

    그녀는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이제 아예 대놓고 울기 시작했다.

    그는 한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위로를 해주러 온 것이었는데 반대로 그녀가 그에게서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왜 울고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메리 린이 왜 이혼을 하고 싶어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소.]

    스티브가 중얼거렸다.

    [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울음을 멈추려고 코를 요란하게 킁킁거렸다.

    스티브의 눈에서 본 슬픔, 그 고통, 그 처절한 낙심 때문이라고 그녀는 결론지었다.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는 가정과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 것이다. 그이 인생은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스티브가 부엌으로 갔다. 그녀가 이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주섬주섬 일어섰을 때 그가 다시 돌아왔다.

    [이거.]

    그가 그녀에게 새로 채운 술잔을 내밀었다.

    [알콜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더 만들기만 해요.]

    그녀는 자기가 술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했다.

    [나를 믿어요. 판사가 우리 이혼을 최종 선언한 날. 난 망신창이가 되도록 퍼마셨지. 다음날 아침 머리가 깨질 것 같더군. 그렇게 데인 뒤론 취할 정도론 안 마시오.]

    [그 말 들으니 반갑군요.]

    그녀는 숨을 단숨에 들이켰다. 헉헉, 쿨럭쿨럭......숨을 쉬기 힘들었다.

    스티브가 그녀의 등을 툭툭 쳐주었다.

    [할리 매카시, 당신은 정말 좋은 친구야.]

    그가 말했다.

    [스티브 매리스 당신도.]

    그가 그녀의 몸에 팔을 감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스티브의 팔에 안긴 기분이 얼마나 아늑한지, 그녀의 가슴에 맞닿은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그의 숨결을 목에 느끼는 것이 얼마나 푸근한지 놀라웠다. 편안하고 따스했다.

    그의 키스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의 입술이 내려오며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입술은 거칠거나 서두름 없이 부드럽고 자제되어 있었다. 그녀의 생일에 했던 키스와 같은 종류였다. 약속도 없고, 요구도 없는, 친구간의 키스.

    그는 입술을 떼며 물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아니요. 잔디밭 정도는 건너갈 수 있어요.]

    그녀는 뺨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그럼.]

    말은 자신있게 했지만, 할리는 진짜인지 의심스러웠다. 메리 린의 결혼 선언은 큰 충격이었음에도 그는 생각보다 의연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디온 워릭의 '이런 사랑은 다시 없을 거야'를 뒤로 하며 할리는 집을 나왔다.

    스티브는 홈 플레이트에 서서 어깨 근육을 풀기 위해 두어 차례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는 자세를 취하고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를 기다렸다. 속구가 날아왔다. 스티브가 보고 있는 것은 야구공이 아니었다. 그건 킵 로건의 얼굴이었다.

    딱! 방망이가 공에 맞아 부러지면서 파열음이 야구장 안에 메아리 쳤다. 스티브는 부러진 방망이를 바닥에 내던지고 1루로 달려나갔다. 그의 눈은 공을 쫓아가다가 공이 울타리를 넘어가는 것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또 홈런이었다.

    그는 가쁜 숨을 쉬면서 선수 대기장으로 돌아왔다. 동료 선수들이 그의 등을 툭툭 치면서 환호했다.

    [오늘 어떻게 된 거야?]

    타드가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와서 물었다.

    [벌써 세 번째 홈런이잖아.]

    [그래?]

    스티브는 몰랐던 것처럼 말했다. 그는 딱딱한 벤치에 앉아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팔꿈치를 무릎 위에 기댔다.

    [오늘 밤 잘 자려고 그런 거지, 뭐.]

    [벌써 방망이를 두 개나 부러뜨린 거 알아? 분명히 뭐에 씌었어.]

    [상상력도 좋군.]

    스티브는 필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타드 같은 친구들한테는 비밀을 감출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스티브는 모자를 벗어, 허벅지에 탁탁 털었다. 타드의 시선이 따가웠다.

    [메리 린이 결혼하기로 했대.]

    그는 무심한 척하며 툭 던졌다. 빌리 로스가 2루까지 스틸을 성공했다. 스티브는 벌떡 일어나 환호를 질렀다.

    타드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언제 알았나?]

    스티브는 다시 앉았다. 여전히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가 말했다.

    [일요일 밤에.]

    [좀더 일찍 말해 주지 그랬나.]

    타드는 메리 린의 소식이 자기에게도 영향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스티브는 메리가 그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고 애걸하는, 그리고 자기 침대로 다시 그를 불러 주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런 꿈은 일요일 오후, 메리가 결혼 발표를 하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너무 상심한 건 아니야?]

    타드가 물었다.

    [괜찮아, 너무 좋아서 방방 뛰고 있어.]

    스티브는 무감각하게 말했다.

    타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했는데.]

    스티브는 친구를 노려보았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말을 듣는 것이야말로 지금은 사양하고 싶었다.

    타드는 즉각 공격을 했다.

    [킵하고 쇼핑하는 걸 봤다고 했잖아, 기억하지?]

    스티브는 타드가 그 정도로 끝내 주기를 바랐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했다.

    [그때부터 그 남자와 심각한 사이라는 걸 알았다고.]

    타드는 굴하지 않았다.

    [차마 자네한테 말을 못한 거지. 말 안 해도 알 줄 알았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뻔한 결과였다. 누굴 탓하랴. 케니는 금년 초에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몇 가지 힌트까지 던져 주면서. 메리 린이 육체적인 관계를 거부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빤한 것을 못 보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애당초 이혼도 그런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자네 차례야.]

    스티브가 말했다. 타드가 필드로 나가게 된 것이 반가웠다. 그는 메리 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위장이 뒤틀렸다. 이제 그녀를 보내 주어야 한다. 그녀와 같이 사는 삶은 이제 포기해야 한다.

    인간 관계에 대한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내용도 그런 것이었다. 전문가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들, 그러니까 과거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소유권'을 찾아, 자기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결혼 실패에 대해 자기 자신과 메리 린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스티브도 안다. 최근에 라디오에서 전화 상담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을 때, 그는 그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차 안에 앉아서 듣기까지 했다. 그 프로는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

    그를 감정적인 위기에서 구출해 준 사람은 상담 전문가들만이 아니었다. 할리의 도움도 컸다. 고통과 슬픔으로 채워진 한 주일 동안, 할리 생각을 하면 모든 일이 참을 만하게 보였다. 할리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버번을 들고 찾아오기까지 한 것이다. 결국은 눈물 바다가 되어 휴지 한 상자를 바닥내고 가긴 했지만.

    우습지만, 할리가 운 것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풀어 주었다. 처음에 그녀가 집에 찾아왔을 때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다른 사람과 같이 있고 싶겠는가? 심장을 떼어낸 것 같은 기분인데.....하지만 할리는 결국 그의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주었다.

    스티브는 할리 매카시 같은 이웃을 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타드는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다. 그는 최근 들어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그는 욕을 하면서 스티브에게 돌아왔다.

    [걱정할 거 없어. 시즌 첫 번째 게임인 걸 뭘 그러나.]

    스티브가 위로했다.

    타드는 힘없이 조용한 구석을 찾아 혼자 인상을 쓰며 앉아 있었다. 케니가 그러고 있었다면 스티브는 왕삐짐이라고 놀렸을 것이다.

    스티브는 할리의 차가 지난 이틀 동안 자리에 주차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보통은 그런 것은 신경이 둔한 그였지만, 할리는 소방전에 너무 가까이 주차했다가 딱지를 떼는 것을 유난히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해가 뉘엿뉘엿 질 녁에 집에 돌아왔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면서 할리의 집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한 번 가서 봐야 할 것 같았다. 이웃에 산다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 아닌가.

    그의 노크에 그녀는 기운 없는 소리로 들어오라고 외쳤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녀는 소파에 베개와 담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안에 파묻혀 있었다. 낡은 가운 바람으로 엎드려서 한 팔을 소파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카펫을 쓸고 있었다. 탁자엔 여러 가지 약병, 더러운 컵 서너 개, 휴지 상자, 그리고 온도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빈 양동이가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어디 아픈 거요?]

    그가 물었다.

    [눈도 좋으시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런, 기분이 안 좋으시군. 그건 그렇고, 문은 왜 열어 둔 거요? 여긴 '초원의 집'이 아니라구.]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녀는 팔을 들어 그를 막았다.

    [내 말 들어요. 독감에 옮고 싶지 않으면.]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모기 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문. 도널리가 이따 온다고 했는데, 기운이 없어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열어 두었어요.]

    [병원엔 갔었소?]

    [너무 아파서 갈 수도 없어요. 이 모양으로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앵돌아져서 대답했다.

    [내가 데려다줄까?]

    그녀는 잠깐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고맙지만 됐어요, 고비는 넘겼으니까요.]

    그리고 나서 덧붙였다.

    [고마워요.]

    그는 부엌으로 갔다. 부엌은 좀 완곡하게 표현을 한다 해도 난장판 이었다. 사용한 커피잔과 유리잔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다 먹은 오렌지 주스 통이 넘어져서 남아 있던 주스가 흘러나와 카운터 위에 얼룩져 있었다. 크래커 상자가 열려진 채로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식사는 언제 했소?]

    그는 거실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제발.]

    그녀는 괴로운 듯이 신음했다.

    [먹는 얘기는 하지 말아요.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넘기질 못했어요.]

    [물은 마셨겠지?]

    [그런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토할 것도 없었을 테니까.]

    그녀가 안쓰러웠다. 스티브는 혼자 아프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그는 더러운 그릇을 식기세척기 안에 넣고 카운터를 행주로 닦았다.

    [고마워요.]

    그가 차를 끓여 오자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또 내가 해줄 거 없소?]

    [화장실에 좀 데려가 줄래요?]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서 못 일어나겠더라구요.]

    [그렇겠지.]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피부는 창백했고, 한쪽 머리는 눌려서 완전히 납작해져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새겨진 장식이 그녀의 뺨에 꽃 모양의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가운을 여미고 끈을 묶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몸을 휘청거렸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안아 몸을 똑바로 세워 주었다. 할리가 균형을 잡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욕실의 불을 켰다.

    [저 벽에서 저울 좀 떼줄래요?]

    할리가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울?]

    그는 믿을 수 없는 소리로 물었다.

    [몸무게를 달아 보려고요.]

    스티브는 정말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기운도 없으면서 몸무게는 뭐하러 달아 보려는 거요?]

    [체중이 얼마나 줄었는지 보려고 그러는 거죠.]

    그녀는 힘들어하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를 분명하게 말했다.

    [이틀 동안 주스하고 크래커밖에 안 먹었거든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벽에 걸려 있는 체중계를 잡아당겨 뽑았다.

    [자.]

    그는 참을성 있게 그녀가 체중기 위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망설였다.

    [보지 말아요.]

    [뭐라고?]

    [뒤로 돌아서요.]

    [아이구야......]

    스티브는 이마를 탁 치며 뒤로 돌아섰다.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힘은 없지만 득의만만한 쾌재가 들렸다.

    [줄은 모양이지?]

    [그래요. 아, 기분 좋다!]

    [그렇다면야 뭐.....]

    그는 할리가 왜 그렇게 체중에 대해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엔 괜찮아 보였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동안 그녀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분석을 하면서 먹었다. 더블 핏지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에 얽힌 에피소드는 제외하고.

    그는 다시 그녀를 부축해서 거실로 데려와 베개를 털어 주었다.

    [이럴 때 그 교수란 작자는 어디 가 있는 거요?]

    스티브 생각엔 할리의 수학과 교수 친구가 그녀를 보살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우린 다시 안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목소리에서 아무런 미련도 느낄 수 없었다.

    [아.]

    [그 사람이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어서요.]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남자가 벌거벗는 상상을 자주 하나 보지?]

    [아니요. 필요한 사람만 해요. 당신은 아니에요.]

    [다행이군.]

    [그 사람이 재미있어하는 건 딱 한 번밖에 못 봤어요. 공용 채널에서 한 곰팡이에 대한 프로그램이었죠.]

    그 말에 어떤 감추어진 의미가 있었다 해도 스티브는 그것을 캐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진 거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요.]

    [할리한테 꼭 맞는 사람이 있을 거요. 낙심하지 말라고.]

    [도널리도 그런 말을 해요. 난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목표를 세우고, 성공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완전 실패였어요.]

    [그렇게 자학하지 말아요.]

    할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렇게 살이 빠질 거라고, 내가 남자 없이 살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스티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뭘. 정말 내가 뭐 갖다 줄 거 없소?]

    [이제 됐어요. 고마워요.]

    스티브는 나갔다. 잔디밭을 지나 자기 집으로 가면서 그는 자기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리 생각을 하면 그렇게 피식피식 웃을 때가 많았다. 그녀는 인생에서 유머를 찾고 사는 것 같았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스티브도 덩달아 그 유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부엌 찬장 속을 뒤졌다. 닭고기 수프 한 통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데워 두 그릇에 나누어 담은 다음, 하나는 테이블에 남겨 두고, 다른 하나를 할리에게 가져갔다.

    그녀는 그가 다시 온 것을 보고 놀랐다.

    [이것 좀 먹어 보시오.]

    그는 수프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엌에서 크래커를 가져왔다.

    [먹으면 좀 나아질 거요.]

    [정말 자상하군요.]

    그녀는 가슴이 뭉클했다.

    [나, 괜찮은 친구지?]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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