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15화 (15/29)

15. 할리 이모

내가 미쳤지, 할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치지 않고서는 동생 부부에게 오레곤 해변에서 캠핑을 하라고 보내곤 6개월짜리 갓난아기를 봐주겠다는 용감무쌍한 짓을 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원래는 그녀의 엄마가 엘렌을 봐주기로 했었는데, 독감에 걸려 아기에게 옮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줄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온 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면서 울며불며 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리는 마음이 약해져서 자기가 엘렌을 봐주겠다고 했다. 6개월밖에 안 된 아이가 말썽을 피워 봐야 얼마나 피우겠는가? 그녀는 자신있게 생각했다. 그 나이엔 하루 종일 잠만 자지 않는가.

전화를 끊는 순간 의심이 들긴 했다. 아이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갓난아기를 봐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스티브에게 전화를 걸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케니가 있어 주길 부탁했다.

다음날 줄리가 이삿짐차 하나는 됨직한 짐보따리--휴대용 아기 침대, 무지막지하게 큰 기저귀 가방, 미니 플라스틱 목욕통 등등을 포함해서--를 가지고 왔을 때, 할리는 무슨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엘렌은 아주 순해.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줄리가 다짐했다.

[알았어.]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살고 있었다. 여차하면 차를 집어 타고 킷샙 페닌슐러로 가면 되었다.

[엄마도 지금쯤은 나아가고 있을 거야.]

할리는 쾌활하게 동생을 안심시켰다.

줄리와 제이슨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엄마는 주말에 집에 없어.]

줄리가 말했다.

[없어?]

할리는 목에 뭐가 걸리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에 친구가 라스베이거스로 초대를 했다길래 제이슨과 내가 걱정 말고 가시라고 했어.]

이런 경우가 어딨어? 왜 아무도 나한텐 물어 보지 않은 거야. 최후의 보루로 믿고 있던 엄마마저도 조달이 되지 않는다니.

제이슨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할리의 두려움은 폭발했다.

10분 후에 엘렌은 잠에서 깨어났다.

6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이 꼬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를 안고 있는 여자가 자기 엄마도, 할머니도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할리를 한 번 말똥히 쳐다보더니 엘렌은 금방 공포 영화 주인공이 부러워할 만큼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할리는 아기를 안고 절박하게 달랬다.

[할리 이모야, 이모 알지?]

아니, 모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엘렌을 탓하겠는가? 할리를 몇 번 밖에 못 봤었고, 그것도 식구들이 잔뜩 모여 있을 때였었다.

[헤이, 매카시.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었잖아.]

할리는 스스로를 격려해 가면서 다시 시도했다.

분명 분을 발라 준다든가 트림을 시켜 주는 정도로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진짜 엄마가 되어 불 수 있는 기회였다.

엘렌의 비명이 점차 애처로운 흐느낌으로 변할 때까지 할리는 계속 아기를 안고 흔들어 주었다.

케니가 부엌 문에 나타났을 때, 할리는 케니에게 키스라도 해주고 싶었다.

[누나 조카예요?]

케니가 물었다.

[아직 나하고 낯이 설어서 그래.]

엘렌이 우는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기저귀가 젖었나?]

기저귀라, 할리는 그 생각을 못 했었다.

[이런, 가엾은 것.]

할리는 아기를 달래며 줄리가 두고 간 기저귀 가방을 뒤졌다. 엄청난 기저귀 가방 속에서 베이비 푸드 병, 젖병, 담요, 딸랑이, 이빨 날 때 무는 고무 링, 노란 오리 인형, 플라스틱 젖꼭지, 짓, 솔, 양말, 신발 세켤레가 나왔다. 기저귀는 없었다.

[더 속에 들었나 봐요.]

케니가 말했다.

과연 그 속에서 일회용 기저귀 한 부대가 나왔다. 충분한 기저귀와 함께 엉덩이 닦는 종이, 파우더, 부스럼 방지 연고, 그리고 곰인형이 나왔다. 기저귀 사용법 안내서는 없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음을 증명해 보일 각오로 할리는 플란넬 담요를 카펫 위에 깔고 낑낑거리는 엘렌을 그 가운데에 눕혔다. 할리는 케니에게 웃어 보였다.

[할 만한데?]

그녀는 금방 그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할리가 마지막으로 기저귀를 갈아 본 것은 어렸을 때 인형을 갖고 놀 때였다. 할리가 갖고 놀던 인형들은 말도 하고 울기도 하고 오줌도 누었다. 하지만 어떤 인형도 발길질을 하거나 몸을 비틀어 대거나 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기저귀를 다 갈아채웠을 때 할리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누나 잘하는데요?]

케니가 축하해 주었다.

시계를 보니 줄리와 제이슨이 떠난 지 1시간도 안 되어 있었다. 이제 35시간만 버티면 되었다. 식은 죽 먹기지, 뭐. 할리는 조그많게 중얼거렸다.

[아빠는 소프트볼 연습하러 간댔어요. 누나가 원하면, 난 남아서 도와줄게요.]

내가 원한다면.....할리는 케니의 어깨를 잡고 그러안았다. 그만큼 고마웠다.

케니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할리는 그날 아침 내내 그리고 오후까지 잘해 나갔다. 엘렌이 낮잠을 자자 할리도 한숨 잤다. 6개월 짜리 아기의 비위를 맞추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는지 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날 오후도 금방 지나갔다. 저녁 시간이 되어 할리는 이제 혼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케니를 보냈다. 엘렌이 이젠 할리의 얼굴을 익힌 것 같았다. 할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제법 자신이 생겼다. 나도 할 수 있다!

자정이 지나자마자 사정이 바뀌었다. 엘렌이 잘 자다가 갑자기 깨어나서 빽빽 울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할리는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전등 스위치를 찾다가 발가락을 부딪혔다. 침대 옆 스탠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팔에 안은 채 할리는 슬리퍼에 닿아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까지 걸어다녔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앤니 그리피스 쇼 볼래?]

텔레비젼 재방송도 엘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고집쟁이.]

그녀는 투덜거렸다.

2시간이 그렇게 지나자, 할리는 기력이 다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다. 이마를 만져 보니 열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쉬지 않고 몇 시간씩 울어댔기 때문인지 아니면 탈이 나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사에게 가봐야 하는 건가. 할리가 보지 않는 사이에 이상한 걸 집어먹었을지도 몰랐다. 혹은 그녀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가.

구급차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스티브의 집 부엌 불이 구세주의 강림처럼 환하게 켜 있는 것이 보였다. 할리는 얼른 전화기로 달려갔다.

[아기가 왜 그렇게 울지?]

스티브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걸 알면 전화를 왜 걸겠어요.]

할리는 공연히 딱딱거렸다.

[그런데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어요?]

그 이유야 어쨌든 할리는 고맙기만 했다. 스티브는 아이를 키워 보았으니 이런 난관도 다 겪어 보지 않았겠는가.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상식적인 선에서의 충고란 충고는 다 늘어놓았다.

[누굴 바보로 알아요?]

할리는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물론 기저귀는 갈았죠! 열 번도 더!]

[언제부터 울었소?]

[태어났을 때부터! 이 봐요. 이 꼬마를 다시 재워 주면 천 달러 줄게요.]

이 말에 스티브는 군말을 다 집어넣었다.

[농담이시겠지.]

[내가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엘렌이 점점 소리를 높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5분만 기다려요.]

그는 3분 만에 왔다.

[갑시다.]

그는 구겨진 회색 운동복 차림으로 문가에 서서 말했다.

[어딜 가요?]

결국 스티브도 아기를 응급실로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할리는 안심을 하곤 길이가 긴 스웨터를 집어들고 파자마 위에 뒤집어썼다.

그녀가 담요를 하나 더 가져와서 엘렌을 싸는 동안 스티브는 유아용 시트를 내다 트럭 의자 한가운데에 설치했다. 나가기 직전에 할리는 지갑을 기억해 내서 손에 움켜쥐곤 스티브의 무시무시한 트럭으로 갔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아기를 받아들어 시트에 앉히곤 할리가 차에 오르도록 거들어 주었다.

[어느 병원으로 가죠?]

안전벨트를 매면서 할리가 물었다. 다행히 줄리는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진료 허가서에 사인을 해주고 갔었다.

[병원에 가는 게 아니오!]

무섭게 질러대는 엘렌의 울음 소리 때문에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할리는 엘렌에 대해 한 가지는 인정했다. 폐는 정말 좋았다.

두 블록 정도 갔을 때 엘렌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침묵이 그렇게 반가운 것도 평생 처음이었다.

[내 생각엔 이빨이 나는 것 같소.]

스티브가 말했다.

[벌써요?]

할리는 아기 이빨은 훨씬 더 커서 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요.]

그는 할리를 힐끗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브가 나보다야 잘 알겠지.

[우리 아이도 엔진을 걸자마자 잠이 들곤 했소. 경험으로 보면, 엘렌한테 심각하게 탈이 난 게 아니라면 여섯 블록 가기 전에 잠이 들거라고 생각했지. 어떻소, 할리 이모님?]

[대단하네요.]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린 강을 따라가고 있었다. 가로등도 별로 없었고, 고불거리는 길이 엘렌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한 것이다. 하지만 잠이 든 건 엘렌만이 아니었다. 할리도 눈꺼풀이 내려오며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그녀의 집 밖에 주차되어 있었다. 스티브는 엘렌을 카 시트째로 안아들고 트럭에서 내리고 있었다.

[깨워서 미안하요, 잠자는 공주.]

그가 말했다.

할리는 자기 쪽 문을 열고 몸을 돌려 엎드린 자세로, 두 발을 대롱 거리며 트럭 시트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녀의 집은 컴컴하고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녀는 열쇠로 문을 땄다.

스티브는 엘렌을 카 시트에서 조심스럽게 안아서는 아기 침대로 옮겨 뉘였다. 두 사람은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하면서 숨을 죽였다. 몇 분이 지나도 엘렌이 아무 기척이 없자, 두 사람은 까치발로 방을 나왔다.

[고마워요.]

할리가 말했다.

[신경쓸 것 없소. 천 달러 빚진 거나 잊지 마시오.]

스티브가 답했다.

그녀는 입을 해 벌렸다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 말도 안 되는 흥정을 걸었던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스티브는 씩 웃었다.

[걱정 마시지. 비자 카드도 받으니까.]

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곤 자기 집으로 갔다.

할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쇼핑이 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할리 이모 역할을 한 다음 주말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크게 한 턱 내기로 했다. 도널리도 같이 가기로 했다. 근처 백화점에서 하는 평상적인 50퍼센트 할인 세일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도널리는 그들이 완전히 광적인 소비 형태를 요구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여권, 얼굴 마사지, 그리고 치즈 케이크를 포함한 소비여야 했다.

[이 쇼핑을 하려고 크리스마스를 위해 저금한 돈을 홀랑 꺼낸 거아니?]

캐나다 국경을 넘으면서 할리가 툴툴거렸다.

[걱정할 거 없어.]

도널리는 통관을 위해 길게 서 있는 차량의 행렬 뒤에 차를 갖다댔다.

[크리스마스 때쯤 되면 넌 결혼해 있을 거고 부자 남편이 네가 쇼핑한 것들을 다 계산해 줄 테니까.]

남편이라. 지난 몇 달 동안 그 한 단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웠던가. 남편, 결혼, 가정, 최근 들어 할리는 이런 인생의 단계에 이르는 데 대해 좀더 깊은 이해가 생겼다.

[얘.]

도널리는 시선을 돌려 할리를 보았다.

[너, 왜 갑자기 그렇게 심각해졌어?]

할리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지난주 내내 겪어온 감정적인 위기에 대해 도널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다면, 아무에게도 할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이야?]

도널리가 부드럽게 채근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어. 지금처럼 아빠가 그리운 적이 없어.]

할리의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녀는 손등으로 코를 훔쳤다. 눈물이 뺨에 흘러내리는 채로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내가 울 줄 몰랐어.]

[할리, 괜찮아. 우린 가장 친한 친구잖아, 잊었어?]

할리는 가방을 찾아 휴지를 꺼냈다.

[아빠말고도 그렉 생각을 했어. 그렉하고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 그땐....고집불통이어서 그렉이 주겠다는 걸 거절했지 뭐야.]

[그렉 하니컷 말이니? 벌써 몇 년 전에 끝났는 줄 알았는데?]

[그래, 그때 그렉은 나와 결혼하고 싶어했어.]

그녀는 말을 끊고 코를 풀었다.

[그때 내가 아티스틱 라이슨스 사를 세우려고 엄청난 돈을 융자받았던 거 알지? 남자 때문에 내 사업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

[그럼 그렉하고 결혼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도널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나도 몰라.]

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와서 느낀 감정이 어떤 건지도 분명하게 알 수가 없어. 그렉은 참 멋있었고, 난 그를 사랑했었어. 정말 사랑했었어.]

그녀는 다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결혼할 만큼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겠지.]

[왜 갑자기 그렉 생각을 한 거야?]

그건 할리 자신도 몰랐다. 크리스마스 때 그녀는 그렉에게서 사진 카드를 받았었다. 아내와 두 아이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엘렌과 주말을 보낸 후 할리는 자기도 가족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하고 확실해졌다. 그렉의 가족 사진이 생각난 것은 그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머리 속으로 그렉의 아내 대신 자신을 집어넣어서 그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 스친 생각이었다.

[내 가슴 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아.]

그녀는 젖은 휴지를 집게 손가락에 감으면서 털어놓았다.

[지난 주말엔 엘렌하고 같이 지냈어. 정신은 없었지만 있잖니, 너무 너무 좋았어. 줄리와 제이슨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땐 모성애에 휩싸여서 엘렌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니까.]

[정말?]

[그래, 일요일에 스티브가 엘렌의 잇몸에 바르라고 연고를 가져왔는데, 그 연고를 발라줬더니 공주처럼 이쁘게 구는 거 있지. 이젠 나도 잠을 설쳐가며 애를 보는 것도 할 수 있어.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걸 아니까.]

그녀는 몸을 떨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리타가 전부터 그랬잖아. 내가 남편감 구하는데 너무 까다롭게 논다고, 그땐 웃어 버렸지만 지금은 리타 말이 맞았던 것 같아.]

그 말에 도널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좋다는 건 아니야. 래리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르겠어. 다정한 사람이야, 하지만.....래리하고 결혼하는 것은 상상이 안 돼.]

[할리, 이제 그만 괴로워하고 우리 주말여행이나 즐기자.]

[네 말이 맞아.]

할리는 도널리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래리와의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한다 해도, 그건 도널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샌포드는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할리와 도널리가 이번 여행을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할리는 자기보다도 도널리에게 이런 탈출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묵은 호텔은 여행 안내 책자에 표시되어 있던 작은 별 표시 하나하나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밤이면 베개에 작은 초콜릿을 놓아 두는 것이나 목욕 가운, 향기 좋은 로션, 사우나와 헬스 장까지 갖출 것은 모두 다 갖추고 있었다. 쇼핑을 3시간씩이나 하고 돌아와서 운동이 필요하기나 할까마는.......

할리는 쇼핑 가방을 메고 다니느라 어깨까지 뻐근했다. 그들은 아픈 어깨를 치료할 방법도 찾아냈다. 호텔 마사지였다. 마사지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할리는 약간 겁이 났다. 1시간 후 할리는 젖은 국수처럼 몸이 유연해졌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세상을 대면하기 위해 용기있게 나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다음엔 얼굴 마사지가 이어졌고, 그 다음에 매니큐어를 칠했다.

그들은 짧은 스커트에 검은 스타킹을 신고 호텔 꼭대기층에 있는 회전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캐나다 달러로 환전한 덕분에 35퍼센트 할인으로 쇼핑을 해서 남은 돈은 동 페리뇽 한 병에 서슴없이 써버렸다. 할리가 먹어 본 중에 최고의 샴페인이었다.

밤은 아름다웠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밴쿠버가 눈 아래 펼쳐졌다. 할리는 주변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아니면 쇼핑의 효과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온몸에 달콤한 마사지를 한 덕분인지 몰라도 다시 젊어진 기분이었고, 놀랄 만큼 행복했다.

[우리 무슨 축하를 하고 있는 것 같아.]

할리가 말했다. 시작하던 시점에 비해 목표에 더 가까워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해서 다시 포부에 부풀어 있었다.

[축하하고 있는 거잖아.]

도널리가 크리스털 잔을 쳐들어 올렸다.

[우리를 위해서, 누가 될진 몰라도, 미래의 남편들을 위해서.]

[미래의 남편들을 위해서.]

할리는 잔을 쨍그랑 마주치면서 따라했다. 남편이라. 그건 그녀의 애인이자 동반자이며 친구가 될 사람을 의미했다. 평생의 동반자.......

[기분 좋다.]

도널리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몸도, 마음도.]

[나도 마찬가지야.]

할리가 말했다.

[웃기지, 샌포드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오늘 아침만큼 아프게 느껴지지 않아.]

그녀는 생긋 웃었다.

[자기 방종에 빠져 보는 것이 바로 이런 건가 봐.]

도널리는 발 아래 펼쳐진 전망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다음날 늦게까지 자고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시애틀로 향했다. 이번 주말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였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희망에 부풀어서 그 현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할리는 그런 긍정적인 자세를 계속 고수하리라 다짐했다.

국경선을 넘은 직후부터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사실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기로 했다.

[샌포드와 끝난 다음에 나한테 다른 남자가 있을 거라고 말해 준 게 너였지.]

도널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난 그 남자를 만날 준비가 되었어.]

[그래, 잘했어.]

할리는 도널리의 결정에 흡족해하며 머리를 시트 뒤에 기댔다.

[그럼 너도 데이트라인에 다시 연락할 거야?]

도널리는 한참을 끈 후에야 대답했다.

[그건 아냐.]

[왜?]

도널리의 대답은 이미 결혼한 남자를 만났다고 선언한 것보다도 더 놀라운 말이었다.

[글쎄.......그런 데이트 대행사를 통해서는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할리에게 데이트라인에 등록하라고 설득한 장본인이 도널리였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할리는 꾹 참았다.

어느새 도널리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몇 분이면 집에 닿는다.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기쁨과 편안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가지런하게 심은 관목, 바구니 너머로 흘러내린 고사리, 밝은 색의 문과 아름다운 커텐.....그녀의 집은 친숙한 얼굴로 그녀를 반겨 주었다. 그녀는 여행가방과 쇼핑 꾸러미들을 도널리의 차 트렁크에서 내린 다음 도널리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을 했다.

비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오자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래리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안전히 돌아온 것을 알려야 했다. 래리가 그런 관심이나 있는지 의심이 들면서, 그리고 그 답을 짐작하면서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벽에 걸린 전화기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가방은 아직도 어깨에 맨 채였다. 여행가방과 쇼핑 꾸러미는 거실 한가운데 쌓여 있었다.

[여보세요.]

래리는 전화 소리가 일을 방해한 것처럼 퉁명스럽게 받았다.

[할리예요.]

[캐나다는 어땠습니까?]

그는 여전히 무감각한 목소리로, 아무런 열의도 감정도 없이 말했다. 할리는 학생들이 그의 수업 시간 동안 졸지 않고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캐나다.]

그녀는 따라서 말했다. 그리곤 래리가 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고 얼른 덧붙였다.

[아주 좋았어요.]

[잘됐군.]

침묵이 흘렀다.

[래리........여행을 갔다오면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이런 말을 전화로 한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할리도 알았다.

[당신을 얼마나 좋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이미 여러 번 말했었죠.]

그녀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거짓말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빌었다.

[나 같은 학력과 배경을 가진 남자라면 당신 같은 사람에겐 가히 인상적일 거라고 생각하오.]

다른 상황에서라면 그 '당신 같은 사람'이란 말에 발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가지고 물고 늘어져 봐야 어차피 해야 할 일을 지연시킬 뿐이었다.

[이번 주말에 떨어져 지내 본 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았다고 생각해요. 나한텐 생각을 정리해 볼 기회가 되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죠. 사소한 문제들은 가지를 치고 중요한 문제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니까.]

[바로 그래요.]

이제 그녀가 할 일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안게 되었다는 사실만 설명하면 되었다. 그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녀는 돌아서 질문했다.

[내가 없는 동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냐고?]

그는 놀란 듯이 되물었다.

[암 그랬겠죠....하지만 겨우 32시간밖에 안 됐잖습니까. 사람의 빈 자리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고 알아온 시간과 관계되는데, 우리 경우는 겨우 몇 주일밖에 안 되었잖습니까.]

[6주일이죠.]

그녀는 이런 지겨운 얘길 하고 있는 자신을 저주했다.

[내 말이 바로 그겁니다.]

[지금까지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른다면.....]

[감정? 난 아직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데! 지금 나한테 청혼하라고 다그치는 거요, 할리?]

청혼이라고? 그는 할리가 청혼해주길 바란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청혼을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에요.]

할리는 이 대화가 어디까지 비껴나갈까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우리 이쯤에서 정리하고 각자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한 말이에요.]

만약의 경우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덧붙였다.

[그만 만나자고요.]

뻣뻣한 침묵이 흘렀다.

[나와 그만 끝내자는 겁니까?]

그는 완전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요.]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멋진 여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지난번 여자도 그런 말을 했었소.]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엔.....스파크가 없어요.]

전화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만에 소리가 들렸다.

[스파크를 찾고 있다면, 전봇대를 껴안아 보시지.]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할리는 약간의 냉소를 자신에게 허락했다.

[안녕, 래리. 행운을 빌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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