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13화 (13/29)

13.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아빠,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축구 운동장에서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케니가 물었다. 그는 2년 동안 성인 축구팀에서 뛰었고, 아이는 아동 추계대회에서 뛰었다. 스티브는 아이에게 축구를 가르치질 좋아했다. 일요일 오후에 엄마와 친구들한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안절부절못할 때 시간을 보내기엔 축구 연습이 안성맞춤이었다.

아이가 스티브와 주말을 보낸 후 가끔씩은 집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어 성화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스티브의 마음이 쓰렸다. 이혼으로 인해 생긴 다른 모든 고통도 삼켜 버리듯이 이 아픔도 그는 꿀꺽 삼켜 버렸다.

[아빠, 내일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물었잖아.]

케니가 안달을 했다.

4월 21일이라는 것 외엔 스티브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중요한 날짜를 제대로 기억해 본적이 없었다. 발렌타인 데이는 이미 지났고, 성 패트릭 데이, 만우절 모두 다 지났다. 메리 린의 생일인가....그건 지날달이었다. 4월에 중요한 날이 뭐가 있더라?

[할리 누나 생일이야.]

대답이 없자 케니가 발표했다.

[누나가 서른 살이 되는 거야. 누나 친구가 꽃을 보냈다. 그래서 내가 물어 보니까 생일 선물로 온 거랬어. 이제 20대는 끝이라고 했어.]

[그래?]

스티브는 최근에 할리를 보지 못했다. 아이에게서 들으니 할리가 요리 강좌에 등록을 했다는 것이다. 가슴 운운해서 할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안다.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란 말인가. 물론 자기 생각을 말한것은 아니다. 그는 여자의 가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 솔직하자. 좋다, 이따금 쳐다보긴 했다. 하지만 안 그러는 남자가 어디 있는가?

[할리 누나가 요샌 데이트하는 남자가 없대.]

케니가 차에 오르면서 종알거렸다.

[왜?]

그가 물었다.

[처음부터 다시 할 거래.]

케니가 설명했다.

[요샌 과자 같은 걸 만든대.]

케니가 무릎에 축구공을 치면서 말했다.

[왜 그런 걸 만드냐고 하니까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남자들은 옆에서 거들어야 얼마나 자기가 결혼을 원하는지 겨우 깨닫게 된대. 그게 사실이야, 아빠?]

[음......그런 것 같구나.]

[아빠, 할리 누나 좋아해?]

[좋아하냐고? 물론이지.]

[아니, 그냥 좋아하는 거 말고, 진짜 좋아해?]

[여자로서 좋아하냐고?]

아들의 말투로 보아 그의 대답이 케니에게 중요한 모양이었다. 케니도 제 부모가 다시 합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니까. 어쩌면 그가 모르는 것을 아이들이 알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할리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빠도 할리를 아주 좋아해. 하지만 아빠랑 어울리는 여자는 아니란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오직 아이의 엄마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왜 할리 누나가 아빠하고 어울리지 않아?]

케니가 물었다.

[그건 왜냐하면....그냥 어울리지 않아, 오해하지는 말아라, 할리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엄마가 아니란 말이지.]

케니가 아빠 대신 말을 맺었다. 스티브는 케니의 목소리에서 슬픈 어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맞았다.]

그가 말했다.

[엄만 킵 아저씨랑 데이트하잖아.]

케니가 불쑥 말했다.

킵이란 작자의 이름이 나오자 스티브는 이를 악물었다. 메리 린이 킵과 어떤 관계인지, 그 관계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물어 볼 때마다 메리 린은 말을 돌리기만 했다.

[엄만 아직도 그 킵퍼루를 만나고 있다는 거야?]

스티브는 걱정스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농담처럼 말했다.

[많이.]

케니가 한숨을 쉬었다.

스티브가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야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아내를 다시 찾으려면 전략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지금처럼 두 손을 뗀 채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는 식의 방법은 보아하니 효과가 없었다. 메리 린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얘길 해보아야겠다고 그는 다짐 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할리 누나한테 만나자고 해봐, 아빠.]

케니가 아빠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뭐라고? 데이트를 하란 말이니? 그런 일은 없을 거다.]

[할리 누나 되게 재미있어, 아빠.]

아이가 더욱 밀어붙였다.

[그리고 초코칩 쿠키를 얼마나 잘 만든다구. 지난 주일엔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싸줬는데, 아이들이 다 맛있다고 했어.]

아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또 얼마나 웃긴다구. 누난 과자를  엄청 만들어선 전부 다 남에게 나눠 준다. 왜 누나는 안 먹느냐고 물으니까, 러닝 머신이 싫어졌기 때문이래.]

스티브는 빙긋이 웃었다.

[할리 누나랑 데이트하는 거 생각해 볼래, 아빠?]

케니는 도무지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알았다. 생각해 보마.]

그가 약속했다.

[그건 안 하겠단 뜻이야.]

아이가 투덜거렸다.

[그런 건 아냐. 생각해 볼게.]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여자 관계까지 참견하게 할 수는 없었다.

스티브가 케니와 한 대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도 없이 다음날 저녁 그 일이 일어났다. 그는 집안 일을 부지런히 해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잔디가 너무 자라 도저히 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월요일 오후에 그는 퇴근을 해서 잔디 깎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결정했다. 더 미루었다간 콘도 관리인이 그의 집 문을 부서져다 두드릴 판이었다.

최소한 날씨가 좋았다. 4월치고는 좀 더웠지만 화창한 날이었다. 바깥에서 있기에 더없이 좋았다.

스티브는 냉장고에 시원한 맥주 두 병을 재워둔 후 털털거리며 잔디를 깎기 시작했다. 기계가 낡아서 세 번째 당겼을 때야 비로소 시동이 걸리긴 했어도 하여간 돌아가긴 했다.

자기 집 잔디를 다 깎은 후, 그는 셔츠를 벗어붙이고 할리의 집 잔디를 절반 정도 깎아 주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서 여러 번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또한 금요일 오후에 그가 퇴근해서 올 때까지 케니를 그녀의 집에 있게 해준 것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했다.

잔디 깎는 기계를 껐을 때에야 그는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섹소폰의 구슬픈 블루스였다.

그는 감히 서서 소리가 나오는 곳을 확인하려 귀를 기울였다. 할리의 집 유리문을 흘낏 들여다보니, 그녀가 거실 바닥 카펫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 표정이 왠지 슬퍼 보였다. 케니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늘이 할리가 서른 살이 되는 날인 것이다.

스티브는 지난 2년 동안 생일을 혼자서 지냈었다. 생일은 어린아이들이나 챙기는 거라고 자위하긴 했지만, 아무도 법석을 떨어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잠자리에 들 때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공허감이 밀려왔던 기억이 생생했다.

스티브처럼 그녀도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는 축하를 받았을 것이다. 친구가 꽃도 보내주었다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은 혼자였고 비참함에 빠져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녀가 가여웠다.

스티브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내내 할리의 외로운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그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스낵용 케이크에 촛불 하나를 꽂아서, 맥주 두 병을 집어들고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

구슬픈 음악이 갑자기 멈추었다. 잠시 후 자물쇠가 철컥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초콜릿이 덮인 컵케이크를 내밀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할리의 눈이 둥그레졌다.

[케니한테 들었어요. 이 봐요, 서른 살 생일이 매일 찾아오는 게 아니라구.]

[들어오세요.]

그녀가 거실 쪽을 가리켰다.

[기분이 영 아니지만요.]

[잔치가 끝나서요?]

그는 여자들이 서른 살로 접어들면 젊음이 끝난 것처럼 느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생각할 땐 말도 안 되었다. 게다가 나이를 몰랐다면 그는 할리를 그저 스물다섯 살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아야 스물여덟 정도?

[서른.....]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아직 결혼 계획도 없으니.]

스티브는 맥주병 하나를 따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 아저씨한테 다 얘기해 보시오.]

[이 아저씨?]

[내가 다섯 살이나 위잖소. 난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다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시력이 침침하고.......그런 증상이 시작됐다구.]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삼십대도 별로 나쁘진 않아, 익숙해지면 아무 것도 아니오.]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이렇게 기분이 저조한 이유가 또 있어요.]

[세금 때문에?]

두 사라 모두 사업을 하기 때문에 세금신고 기간이 사람 피를 말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할리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가 안고 있는 걱정거리 외에 또 한가지를 생각나게 해준 것이다.

[그래도 작년보다 수입이 올랐으니 불평할 건 없죠.]

그녀는 맥주병을 기울이고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를 스카치 맛보듯이 홀짝이는 여자들이 있는데, 할리는 그렇지 않았다. 스티브는 할리의 그런 꾸밈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죽어라고 뺐던 5킬로그램 중에서 2.5 킬로그램이 다시 붙었어요.]

그녀는 애석하다는 듯이 말했다.

[얼마나 애를 써서 뺐는데, 더블 펏지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 한 번 먹었더니 고스란히 돌아온 거 있죠.]

스티브의 눈엔 2.5 킬로그램이 늘었다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잔치는 끝난 서른이라 해도 그녀는 조금도 아니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에 왜 체중을 달아 봤는지 알 수가 없어요. 오늘은 생일이라 체중을 안 달아 보려고 했었거든요.]

그녀는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저울이 보인 거예요.]

그녀는 소파 쿠션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일이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할까.]

갑자기 그녀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죠? 이런 이야기는 보통 도널리하고나 하는데, 스티브 아저씨가 생각보다 좋은 친군가 봐?]

[저울이 고장났는지도 모르지 뭐.]

그는 위로를 한답시고 한 말이다.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체중이 는 것을 저울 탓으로 돌리려는 그의 성의에 그녀는 내심 감동했다.

[문제는 내 계획에 의하면 지금쯤은 그 남자를 만났어야 한다구요.]

그녀는 한쪽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할리가 좀더 물어 봐 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누구?]

[결혼할 남자.]

그녀는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아, 그 남자.]

[이 맥주 맛 정말 좋네.]

그녀는 맥주를 털어 마시고 병을 내려놓았다.

스티브는 아직 한 모금밖엔 안 마시고 있었다.

[저녁 했소?}

할리는 두 눈을 꽉 감은 채로 머리를 소파 등에 붙였다. 그리고는 그의 질문에 재미있다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아침도 점심도 아무 것도 안 먹었어요. 일이 너무 많았어요.]

바로 그것이 맥주가 그렇게 팽 도는 이유였다.

[그럼 잘됐군. 중국 음식을 시킬까 했었는데, 배달을 해주는 중국집이 새로 생겼소, 내가 내지.]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맞았소.]

그는 전화기로 가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두 사람이 두세 끼니는 충분히 먹을 만큼 주문을 했다.

[도널리는 하와이에 갔어요.]

할리가 말했다.

그는 할리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멀리서도 꽃을 보내줬어요.]

[고마운 친구군.]

[정말 그래요.]

할리도 수긍했다.

음식이 배달되자 할리의 기분이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후추를 친 쇠고기 요리와 아몬드와 같이 튀긴 닭고기 냄새가 자그마한 부엌을 채우며 식욕을 자극했다.

[내 생전에 누가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준 적도 많지 않아요.]

할리는 접시 두 개를 식탁에 진열하고 차를 끓일 물을 불에 올려놓았다.

스티브는 그녀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에 놀랐다. 스티브 역시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했다. 메리 린은 불편하다면서 극구 포크를 사용했었다.

두 사람은 배가 고팠던 터라 말없이 먹기만 했다. 할리와 같이 있을 때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이젠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아이에게도 말했지만, 할리에게 로맨틱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친구였다. 그는 많은 점에서 우정이 영인 감정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요.]

그녀는 마침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접시를 한쪽으로 치우고 손을 배에 댄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스티브.]

[무슨 그런 말을.]

그는 맥주 한 병과 중국 음식 정도로 그녀가 너무 감동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금요일마다 케니에게 너무 잘해 줘서 늘 고마웠소. 이렇게 조촐한 생일 축하는 아무 것도 아니오.]

[서른 살 생일이에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스티브는 어떻게 자기가 할리에게 키스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어제 케니가 한 질문 때문에 생긴 충동이 분명했다.

그건 할리의 집을 떠날 때 일어난 일이었다.

[당신 같은 이웃이 있어서 기뻐요.]

할리는 그를 배웅하면서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나도 그렇소.]

그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놀라움을 보았고, 그것이 자기 눈이 반사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생일 축하하오, 할리.]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생각 외로 달콤했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은 순순히 그의 입술에 반응해 왔다. 그녀의 맛과 냄새가 좋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키스가 깊어갔다. 아드레날린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흠칫 놀라 입을 떼었다.

할리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면서 머리에 키스를 했다.

[할리를 위해 좋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는 속삭였다. 향긋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코를 간지럽혔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 남자도 어디선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하며 기다리고 있을 거요.]

[우습네요.]

그녀가 말했다.

[뭐가?]

[얼마 전에 나도 똑같은 말을 도널리에게 했거든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내가 할 때만큼 곧이듣기지가 않는군요.]

스티브는 킬킬 웃었다.

[할리, 다 잘될 거요.]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고마워요, 스티브. 여러가지로.]

그는 그 여러 가지에 키스도 포함된 건지 궁금했다.

[생일 잘 보냈어요?]

케니는 할리의 부엌 카운터에 삐딱하게 기대었다.

[아주 잘 보냈어.]

그녀는 오븐에서 방금 나와 뜨거운 과자들을 베이킹 판에서 꺼냈다. 초코칩 만드는 법은 다 떼고 이젠 오트밀 건포도 과자를 배우고 있었다. 케니는 그녀의 요리에 열성적으로 감탄하며 격려해 주기는 했어도 감별을 해주는 시식가는 못 되었다. 지금 케니는 과자가 식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아빠가 저녁을 사주셨어.]

[정말?]

이건 빅 뉴스였다.

[너무나 친절하셨지?]

할리는 월요일 밤 이후로 줄곧 그 생각을 했다. 키스에 대해서도. 그건 친구 사이의 키스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엉뚱한 때에도 그 생각을 했다. 지금처럼.

더 기다릴 수가 없어진 아이는 과자 하나를 집었다.

[앗 뜨거!]

케니는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 끝을 혀로 빨았다.

[아빠가 어딜 데리고 갔었어요?]

[중국 음식을 시켜 주셨어.]

할리는 자기가 너무나 울적해서 카펫에 누워 슬픈 블루스를 듣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파이트 연주, 장송곡, 슬픈 발라드 등등 우울한 날을 휘한 슬픈 음악을 잔뜩 쌓아 놓고 들었었다.

[누나, 우리 아빠 좋아해요?]

케니가 뜨거운 과자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던져가면서 물었다.

[물론이지.]

할리는 과자 반죽을 새 쿠키판에 떠 넣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아해요?]

[결혼?]

할리는 과자에서 신경을 끊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케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스티브와 했던 키스를 떠올렸다. 기분이 좋기는 했어도 연인 사이의 키스는 결코 아니었다. 스티브도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우리 아빠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케니가 재촉했다.

할리는 과자판을 오븐 속으로 밀어넣으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스티브와 메리 린이 재결합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난 케니 아빠가 너무나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 일도 열심히 하시고, 좋은 아빠지. 아빠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나도 감탄했단다.]

그녀는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멈추었다. 케니는 그녀를 말똥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유머감각도 있어.]

케니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스티브가 택시 요금을 두 번씩이나 빌려주었던 사살을 기억하며 할리는 더 말을 이었다.

[관대하고 인정도 많으셔.]

또한 스티브는 볼링을 해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아빤 친구, 그러니까 아주 좋은 친구야, 하지만......]

[다 좋잖아. 근데 결혼할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라구요?]

케니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누나가 새엄마라면 좋을 텐데.]

아이는 계속 할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할리는 약간 용기가 없어졌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하지만....]

[하지만 뭐요?]

케니가 날카롭게 물었다.

[난 아빠가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싫어요. 그건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난 아빠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야.]

할리는 아이를 실망시킬 것을 알면서도 솔직하기로 했다.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야, 하지만 나하곤 맞지 않아. 너무 실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케니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식은 과자를 하나 집어먹었다.

[괜찮아요.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할리는 안심을 했다.

[아빠도 비슷하게 말했어요.]

할리는 등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아빠한테도 나하고 결혼하고 싶냐고 물었단 말이니?]

[네.]

[아빠가 정확히 뭐라고 하셨어?]

[누나가 성격이 좋고 뭐가 좋고 어쩌구 저쩌구. 그러더니 지금 누나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했어요. 아빠 타입이 아니라구.]

[아빠 타입이 아니라구!]

할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흥, 자긴 얼마나 잘났다고.]

그녀는 케니가 듣지 못하게 소리를 죽여서 투덜거렸다.

타이머가 울렸다. 그녀는 오븐에서 마지막 과자판을 거칠게 잡아 뺐다.

[자기 타입이 아니라구?]

그녀는 아이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또 중얼거렸다.

과자판에서 과자를 뜯어내는 손길이 험악해서 과자가 하나둘 뭉크러졌다. 잘났어, 정말. 스티브 매리스가 두 번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 같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나 보자!

[누나, 화났어요?]

케니가 물었다.

[화가 났냐고?]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화낼 일이 뭐가 있니?]

그녀는 스티브의 목을 비틀어 주고 싶었다. 감히 아이에게 그녀의 '성격'이 좋다는 말을 하다니. 그건 엄마들이 며느릿감으로 강요하는 여자에 대해 남자들이 하는 말이었다. 성적으로 매력이 없는 여자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기사 남편감을 구하려면 가슴이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한테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전화가 울리자 할리는 벽에 걸린 수화기를 홱 낚아챘다.

[여보세요.]

그녀는 스티브일 것으로 생각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스티브 전화이길 바랐다. 그래야 몇 가지 똑바로 잡아 줄 수 있을 테니까.

[할리?]

도널리가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일 있니?]

[도널리! 하와이에서 돌아왔니? 여행은 어땠어?]

[너무 좋았어. 잘 쉬었고, 얼굴도 많이 태우고, 이제 본연의 나로 돌아온 것 같아. 오늘 밤 무슨 계획 있니?]

할리의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태엽 감는 훌라 인형 사왔겠지?]

[물론.]

도널리가 농담으로 받았다.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도널리가 떠나 있었던 건 겨우 8일밖에 안 되었는데도 할리한테는 한 달이나 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언제든지 놀러와.]

금요일 밤에, 여자 친구와 노닥거리는 것은 그녀의 가련한 신세를 잘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할리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죽였다.

[1시간 후에 갈게.]

도널리가 말했다.

그 날은 결국 스티브와 말할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다. 그게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몰랐다.

케니는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스티브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빠 왔다!]

케니는 소파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곤 배낭을 집어들고 문으로 뛰어 나갔다.

[우리 아빠한데 너무 화내지 마요.]

케니가 문 앞에서 어물적거리며 말했다.

[화나지 않았어.]

할리는 케니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녀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공영한 자존심 때문에 그런 것뿐이었다. 사실 자기가 그렇게 발끈 했던 것에 대해 약간 부끄러웠다.

그래도 케니는 아직 미적거렸다.

[뭐 할 말 있니?]

[다음 주말에 학교에서 '부모님 직장 견학하는 날'이 있어요.]

케니는 말을 잽싸게 쏟아냈다.

[엄마는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직장이 없거든요. 그래서 아빠한테 말하니까, 아빠 사무실에 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난 기계기술자가 되고 싶진 않아요. 미술 쪽에 관심이 더 있거든요. 누나가 일하는 게 보고 싶어요. 누나 일하는 데 가서 보면 안 돼요?]

할리는 자기가 케니의 나이 였을 때 상업미술가가 일하는 것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얼마든지 환영이야. 아빠가 괜찮다고 하실까?]

케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빠도 좋아할 거예요, 고마워요.]

케니는 수줍게 할리를 꽉 껴안은 후 밖으로 달려나갔다.

할리는 문까지 걸어나와 케니가 신이 나서 아빠에게 종알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티브가 그녀 쪽을 건너다보았다. 할리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말 케니가 가도 되겠소?]

그가 외쳤다.

[물론이에요.]

멀리서도 스티브의 안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원수 꼭 갚겠소.]

할리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마세요. 나도 재미있을 거예요.]

도널리는 정확히 30분 뒤에 도착했다. 얼굴이 탔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그녀는 구리빛으로 그을려 있었고 아름다웠다. 휴식을 취한 편안한 얼굴에,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이제 완연히 마음이 정리된 것같았다.

도널리는 초콜릿을 덮은 마카다미아 상자를 내놓았다.

[다음번 비극이 터졌을 때를 대비한 비상품이야.]

할리는 유혹을 이기지 못해 상자를 열고 하나를 자기 입에 넣고, 또 하나를 친구에게 준 뒤 눈에 보이지 않게 얼른 냉장고 안에 꼭꼭 집어 넣었다.

[뭐가 좀 달라졌다.]

도널리가 할리를 유심히 보면서 말했다.

[달라지다니?]

[머리는 그대로지? 근데 뭔가 커진 것 같아.]

할리는 기분이 으쓱해져서 소파에 앉았다.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뭐가 커졌냐 하면, 내 가슴이야.]

[뭐야? 설마!]

[정말이야. 결국 유혹에 굴복하고 유방 커지는 브래지어를 샀어.]

그 말을 스티브가 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도널리는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 브래지어를 한다고 사람이 더 나아진다고, 아니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돼.]

[맞아.]

할리도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 동조했다.

[그런데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돼. 지금은 정말 그런 게 필요하거든.]

[남녀차별주의적인 발상이야. 그런 브래지어는 여성운동을 10년은 후퇴시키는, 아주 치욕적인 물건이라구.]

도널리는 매서운 눈초리를 번뜩였다. 그리곤 말을 잠시 끊은 뒤 깊은 숨을 쉬고 다시 물었다.

[얼마나 줬니? 어디 가면 살 수 있어?]

두 사람은 같이 깔깔거렸다. 또다시 웃을 수 있는 게 좋았다.

[난 이게 남여차별주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화장이나 헤어 스프레이하고 다를 게 없어. 이 브래지어를 하면 재미도 있고, 기분도 좋아. 이게 만약 남자들 눈에 매력적으로 보인다면....꿩 먹고 알 먹는 거 아니니?]

[알았어, 알았어. 근데 이건 뭐야, 과자 냄새 아냐?]

도널리는 코를 킁킁 거렸다.

[요리 강습을 받았어.]

할리는 여기에 대해서도 친구가 한 마디 할 것으로 예상하며 내키지 않게 말했다.

[남자의 마음은 위를 통해서 얻는다는 수법이니?]

[응.]

부인해 봐야 소용도 없을 것이다.

[잘 생각했어.]

도널리가 싱긋 웃으면서 덧붙였다.

[지치고 배고픈 남자를 찾아 보는 게 어때? 그런 남자를 꼬셔서 잘 먹인 다음 네 진짜 성격으로 황홀하게 만드는 거야.]

그 순간 할리는 친구의 눈에 슬픔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도널리의 손을 잡았다.

[샌포드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니?]

[매일 바뀌지. 난 정말 샌포드를 사랑해. 그를 잊는 다는 건 쉽지 않아.]

[그 후에 샌포드가 전화를 걸진 않았어?]

[아니, 안 걸 줄 알았어. 걸지 않는 게 나아.]

그녀는 얼굴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나오려는 눈물을 거두려는 듯 숨을 훅 들이마셨다.

[하와이에 가길 잘한 것 같아. 우린 매일 자고, 해변에 누워 있고, 관광지란 관광지는 모두 돌아디나고,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쇼핑을 했어. 나한테 정말 필요했던 휴식이었어.]

[이젠 집에 왔다.]

할리가 말했다.

[또다시 혼자가 되었지, 다만.......]

[다만 전보다 더 혼자가 된 기분이란 말이지?]

할리는 도널리의 기분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바로 맞혔어.]

[데이트라인에 다시 연락할 거야?]

할리가 물었다. 할리 자신도 다시 데이트를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래야 한다고 굳은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몇 주일 동안 쉬고 나니 이젠 다시 도전해 볼 용기가 생겼다.

[일단 시간을 좀 두려고 해.]

도널리가 생각에 잠겨서 말했다.

[나 혼자만의 시간 말이야. 너도 그랬잖아.]

[좋은 생각이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평가를 해본 뒤 그 결과를 토대로 다시 재도전하는 거야.]

도널리는 좀 조용해졌다.

[나한테 맞는 남자가 꼭 있다고 매일 나 자신에게 말해. 내 꿈을 같이 나누면서 살 남자가 있을 거라고.]

[물론 있고 말고.]

도널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할리 자신에 대해서는 그만큼 자신하지 않았지만.....

[넌 어떠니?]

도널리가 할리의 마음을 읽은 듯이 물었다.

[데이트 라인에 연락할 거야?]

[응, 사실은 벌써 했어.]

그녀는 다음번 데이트 후보의 이름을 떠올렸다. 래리 맥도널드. 어제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이번주에 새 남자의 이력을 받았어.]

도널리는 호기심이 생겨 몸을 똑바로 세워 앉았다.

[나도 보여줘.]

할리는 파일을 꺼내 도널리에게 건넸다. 도널리가 읽어 내려가는 동안 할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감정의 그림자 같은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할리도 그랬다. 그녀도 그 파일을 수없이 읽어 보았지만, 그 남자에 대해 아무런 감동도,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 같기는 했다.--수학과 교수라는 사실이 분명 부모님의 관심을 끌 것이다.--그러나 무미건조한 사람인 것 같았다.

[만나 보기도 전에 사람을 판단하는 건 옳지 않겠지?]

[그래. 만날 약속은 했니?]

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방에서 만나기로 했어. 뭐 썩 멋있는 생각은 아니지만, 우리 둘다 책을 좋아하니까 괜찮을 것 같아.]

[언제?]

[일요일 오후에.]

[만난 다음에 전화해 줘야 해.]

할리는 그러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이 래리 맥도널드라는 남자에 대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아는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질지?

[누나, 뭐해요?]

케니가 이티스틱 라이슨스 사의 넓은 작업실 설계 테이블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할리 뒤에 와서 물었다. 코고 작은 4대의 복사기가 웅웅거렸고, 옆방의 가장 콘 인쇄기는 코를 고는 난쟁이처럼 낮은 소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보니 도와주는 일은 다 끝났니?]

할리가 물었다. 일에 몰두해 있느라 대답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네, 재미있었어요.]

케니는 설계 테이블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난 지금 로고 디자인을 하고 있어.]

할리는 꼬박 1시간 동안 몇 가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씨름하고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일 중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고객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온다. 하지만 그 컨셉들을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일이 어려웠다.

[보니가 컴퓨터 스크린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이동하게 해줬어요.]

할리는 지금 하고 있는 로고 디자인 마감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케니를 어느 학교의 브로셔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보니와 같이 일을 하게 했었다.

[재미있었어?]

할리가 물었다.

케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배운 것도 많아요.]

[꼬마가 일을 잘 하던걸요.]

보니가 방 저쪽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할리, 난 버그먼 사의 광고 레이아웃을 해야 해요. 오늘 3시까지 신문사에 넘겨줘야 하거든요.]

[알았어.]

할리는 시계를 보았다. 점심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프루돔 사의 디자인을 오후까지는 마쳐야 했다.

[의자 하나 끌어와라.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 줄 테니까. 잠깐 행크한테 인쇄 작업에 대해 말 좀 하고 올게.]

행크 데이비스는 인쇄 주문을 전담했다. 그녀는 행크와 일의 우선 순위에 대해 의논을 한 후 다시 점점 늘어나는 작업량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업이 지금 속도대로만 성장해 나간다면, 설비도 중설하고 직원도 더 늘려야 했다. 그러러면 건물을 옮기든지 아니면 다른 사무실을 더 구해야 했다. 사업을 확장할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다시 케니에게로 돌아왔다. 케니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할리의 설계 테이블에 목을 쭉 빼고 있었다.

[난 그림은 잘 못 그려요.]

케니가 걱정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해봐도 되면 해볼게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프랑스 제과점 광고에 쓸 로고를 만드는 거야. 로고를 만들면 제과점 창문, 포장용 상자, 냅킨, 편지지 등등에 다 인쇄되어 나갈 거야. 어떤 사업체든 로고는 광고에 상당히 중요한 도구가 되거든.]

[로고는 뭐든지 다 될 수 있나요?]

[거의 다, 프루돔 부부 경우는 자기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줬어. 영리하면서 귀여운 이미지지. 제과점에서는 커피와 빵을 팔지만, 주 상품은 쁘띠 4라는 것이야.]

[그게 뭔데요?]

[초콜릿보다 조금 크고 케이크치곤 작은, 설탕 크림으로 겉을 칠한 케이크야.]

할리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계속 머리를 굴리면서 에펠 탑 그림을 스케치했다. 그 다음엔 프루돔 부부가 요식 대행도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트럭을 그리고 그 옆면에 제과점 상호를 썼다.

케니는 아무 말 없이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한 번 그려 볼래?]

할리 자신이 이제 아이디어가 바닥 난 상태였다.

케니는 종이를 집어들고 할리가 한 것처럼 연필 끝을 입으로 빨았다. 할리는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안았다. 케니도 웃어 보였다.

[그래픽 아트는 재미있죠?]

케니가 물었다.

[재미있을 때도 있지.]

속상할 때도, 힘들 때도 그리고 그 외에 몇 가지 더 형용사를 붙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하고 많이 달라요.]

[뭐가 다른데?]

할리는 또 새로운 컨셉을 끄적이며 물었다. 생각난 것이 날아가기 전에 그려야 했다.

케니는 할리의 어깨 너머로 실내를 쳐다보면서 큰 숨을 들이쉬었다.

[사무실이 아주 커요. 이따가 아빠가 데리러 오면 깜짝 놀랄 거예요. 누나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냐고 하니까, 잘 모르기는 하지만 직원들끼리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릴 거라고 했거든요.]

[그래?]

할리는 웃음이 나왔다. 불쌍한 스티브. 그녀의 사업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일인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그녀는 편지지, 디자인, 인쇄에서부터 광고용 사진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다 했다. 하긴 할리 역시 스티브가 하는 기계 사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아까 쁘띠 4 이야기를 했을 때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아주 작은 4자를 생각했어요.]

케니는 웃었다.

[작은 4자?]

할리가 물었다.

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는 길게 늘인 4자를 여러 가지 그리면서 그 각각에 눈코입을 그려 얼굴을 만들었다. 머리 위엔 프랑스 베레모를 비스듬히 씌웠다. 작은 4자를 일렬 종대로 세우고 그 주위에 그보다 훨씬 작게 다른 숫자들을 배열했다.

케니는 그림을 보고 깔깔거렸다.

할리도 웃었다. 다른 숫자들이 전체적인 효과를 산만하게 하긴 했지만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다시 그녀는 흰 식탁보를 씌운 테이블 위에 베레모를 쓴 4자들을 정열시켰다. 웃고 있는 커피잔 두 개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빨간 장미 봉오리로 동그랗게 감쌌다. 눈을 끄는 효과면에서는 할리가 잡으려고 하던 바로 그 이미지였다. 좀더 발전시켜야 하겠지만 무언가 잡히기는 했다. 케니가 고마웠다.

할리는 케니를 데리고 린도 식당으로 갔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들 중 할리가 좋아하는 집이었다. 이 식당에 와본 지도 벌써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마감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할리는 점심을 포장 주문을 해놓고 다른 사람이 지나는 길에 가져오도록 해서 때우는 일이 많았다.

이 식당의 메뉴도 할리가 몇 년 전에 디자인해서 인쇄까지 해 주었고 최근에 다시 다듬어 주었다.

할리는 사람들이 밀려드는 점심 시간 1시간 전에 식당에 왔다. 주인 길레모 부인이 반색을 하며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아유,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강한 영국식 억양으로 인사했다.

할리가 케니를 소개하자, 길레모 부인의 얼굴이 더욱 환한 미소로 밝아졌다.

[오늘은 학교에서 부모님 직장 견학하는 날이래요.]

할리가 설명을 해주었다.

길레모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신문에서 봤어. 내 손주딸도 여기 와 있다우.]

[어머, 그러세요.]

[사장님을 닮아 잘생겼군요.]

길레모 부인이 말했다. 할리가 뭐라 설명을 하기도 전에 부인은 메뉴판을 케니 나이 또래의 소녀에게 주면서 덧붙였다.

[로시타가 주문을 받을 거예요.]

자리에 앉자 케니가 얼굴을 내밀며 속삭였다.

[내가 누나 아들이 아니라고 말 안 해줘서 좋았어요.]

아이가 말했다. 그리곤 구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누나가 아빠 타입이면 정말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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