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12화 (12/29)
  • 12. 팬티 스타킹 신은 남자

    4월 16일

    도널리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백마 탄 기사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신데렐라처럼 행복해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손가락에 육중한 다이아몬드를 끼고 다니면서도 미소는 억지스러웠다. 이야기를 해보라고 해도 교묘하게 피하기만 한다. 내가 엉뚱한 상상을 한다나. 하지만 난 도널리를 잘 안다.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 그게 뭔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

    마크 프리랜더와 결판을 낸지 꼬박 2주일이 지났다. 며칠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걸어왔을 땐 정말 어이가 없었다. 참, 얼굴도 두껍기도 하지.

    데이트라인에서도 전화를 걸었다. 다른 남자를 만나 보겠냐고. 스티브와 도널리에게도 말했듯이, 생각을 재정리하고 지금껏 생겼던 일을 분석할 시간이 필요하다. 유감스럽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가고 다음에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스티브가 충고랍시고 해준 말에 아직도 화가 난다. 남자들은 정말로 잘빠진 여자를 좋아하는 게 사실인가 보다. 그게 진실이니까. 여성 잡지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지 않는가. 리타 같은 여자--그리고 도널리도!--가 부럽다.

    게다가 남자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우선 배부르게 해줘야 한다는 말은 분명 근거있는 말이었다. 스티브한테 공연히 창피만 떤 것 같다. 하나도 새롭거나 유익한 사실을 알려 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스티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메리 린은 금요일 오후에 스티브가 퇴근하기 전에 케니를 데려다주기 시작했다. 몇 번 이야기해 보니, 깊이 있는 여자 같지는 않았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경박하기 그지 없다. 내가 스티브를 좋아하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수 있다 치더라고 그렇게 듬직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를 둔 여자가 '자기를 찾기 위해서' 결혼을 파괴한 다는 것부터가 정신 나간 짓이 아닌가. 하긴 혹하기는 쉬운 여자다. 어쨌거나 잘되길 바란다. 스티브도.

    케니는 스티브의 집 열쇠를 한 벌 갖고 있다. 그리고 한두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혼자 있을 만큼 컸다. 그런데도 그 애는 우리 집으로 쪼르르 달려온다. 사실 나도 케니가 오는 게 좋다. 참 귀여운 아이란 말이지.

    데이트는 잠시 끊기로 했다. 내 자존심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일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 벌써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내 목표를 읽는다.

    난 가능하다, 난 할 수 있다. 난 하고야 말겠다.

    샌포드가 약혼 반지로 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손가락에 끼워 줬을 때에도 도널리의 가슴에 뭉쳐 있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불편한 심경을 무시하고 행복한 척했지만, 할리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할리를 피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샌포드는 그녀와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들은 시내 백화점에서 도자기를 고른 후 오랜만에 시애틀 해안을 한가로이 산책했다. 도널리는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에 주의를 집중하고 다른 생각은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4월의 바람이 나무로 만들어진 선창으로 불어와서 천막 휘장과 소방서 밖에 걸린 성조기를 휘저었다. 해초와 튀김 생선 냄새가 찝찔한 바닷물 냄새와 같이 어우러졌다.

    샌포드가 도널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요즘 조용한 것 같아?]

    도널리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난데없이 눈물이 고였다.

    [도널리?]

    도널리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 남자가 자기가 꿈꾸는 것과는 다른 미래를 원하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양 더 이상 가장할 수는 없었다. 샌포드가 그려 주는 삶은 자기 도취의 삶일 뿐 도널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공허한 삶이었다. 아이들 없이 사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삶의 방식일 수 있겠지만, 도널리는 그런 부류에 속하지를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흔들거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간신히 말을 밖으로 냈다.

    [미안하다니?]

    샌포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널리는 가슴이 아려 왔다. 그는 멋진 남자이며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도널리는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 한 가지 문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든 것이다. 그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말이 나오지 않아서 도널리는 반지를 빼서 샌포드에게 내밀었다.

    그는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러는 거야? 반지가 마음에 안 들어?]

    [오, 아니에요. 반지는 아주 예뻐요. 그게 아니라.....오, 너무나 어려워요.]

    그녀는 아랫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날 정도였다.

    [우리 결혼.......실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말 진담으로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저도 정말 좋겠어요. 아이를 갖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래, 그게 문제였군.]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그가 도널리에게 문을 닫음을 의미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을 탓하는 건 아니에요.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면 그게 옳은 행위가 아니죠. 당신도 그 사실은 알 거예요. 그 점이 바로 당신이란 사람을 잘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죠. 솔직하고, 성숙하고.....]

    [그럼 뭐가 문제란 거야?]

    [내가 문제예요.]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거죠. 당신을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도널리,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어.]

    도널리는 과연 설명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난 항상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가정을 꿈꾸었어요.]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혼을 하면서 그 꿈도 죽었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당신이 그 꿈을 다시 일깨워 주었어요. 당신은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준거예요. 전남편이 나에게서 훔쳐간 것을 당신이 다시 회복시켜 준 거예요. 샌포드,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지만 난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 갈망이 이렇게 강렬한 것이었는지 지금까지 몰랐어요. 당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당신과 결혼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한가?]

    [네.]

    고통으로 일그러져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럼 더 할 말도 없겠군, 안 그래?]

    [맞아요.......]

    [당신이 원하는 걸 찾길 바라겠어, 도널리.]

    [당신도요.]

    그녀는 샌포드의 눈에서 아쉬움, 아니 고통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나가 버렸다. 도널리는 이제 그를 영영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마음 깊숙이로부터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도널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 탄 것도, 운전을 한 것도, 집 안으로 들어온 것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거실에서 두 팔로 자기 몸을 감싸안고 웅크리고 앉았다. 이혼했을 때처럼 온몸과 정신이 마비된 것처럼 멍했다.

    결국 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대어서 울 어깨, 말을 들어줄 사람, 다시 말해서 친구가 필요했다.

    [그래, 안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 했어.]

    도널리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할리가 다짜고짜 말했다.

    [나 파혼했어.]

    도널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할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도널리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할리는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며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해가면서 차를 끓이기 위해 주전자를 스토브에 얹었다.

    [우리 엄마 말씀이 차를 마시고 나면 이 세상에 안 좋은 일이 없다고 했어.]

    도널리는 할리가 제멋대로 하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좋아.]

    할리가 김이 나는 도자기 잔 두 개를 테이블에 가져다 놓으면서 말했다.

    도널리가 구겨진 휴지에 대고 코를 힝 풀었다.

    할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샌포드가 무슨 짓을 했길래? 팬티 스타킹을 신고 잠을 자대?]

    도널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상상만 해도 우스웠다. 팬티 스타킹을 신은 샌포드라...

    [가정 환경에 문제가 있니? 어머니가 아들을 빼앗기기 않겠다고 나온 거야?]

    [아니야.]

    도널리는 또다시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새 휴지를 하나 뽑아서 깊은 숨을 들이쉰 후 말했다.

    [샌포드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

    할리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야?]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 아이를 갖지 않겠대.]

    [자기 아이도?]

    도널리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응. 우리가 결혼한다면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하는 일이야.]

    [나도 동감이야.]

    할리는 도널리의 손을 잡고 꽉 쥐었다.

    [아이만 원해서 남편 없이 아이를 낳은 여자들도 있긴 하지.]

    도널리는 뜨거운 차가 서서히 기운을 회복시켜 주고 있음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난 전부를 원해. 남편, 전통적인 가정, 아이, 그 전체를 원해. 내가 욕심이 많은 거니?]

    [아니.]

    할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샌포드는 어떻게 받아들였니?]

    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상처를 받았겠지. 나 역시 그런걸. 약혼반지를 받지 말았어야 했어. 그땐 그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거든. 내 아이 대신 조카들한테 사랑과 관심을 쏟으며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두어 주일 전 토요일에는 조카들을 집에 오게 했었어. 샌포드가 만나볼 수 있도록 말이야. 실은 마음 한구석에선 샌포드가 조카들을 보고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했던 거야.]

    [안 바뀌었어?]

    [전혀.]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악몽 같았어. 조카들은 6살, 8살인데 샌포드하고 서로 무시하면서 잘도 지내더라. 조카들은 집에 데려다준 후, 샌포드가 묻더라고 조카들을 얼마나 자주 보느냐고, 그리고.......]

    도널리는 말을 하기가 괴로웠다.

    [........나한테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하면서, 앞으로는 조카들을 집에 데리고 오려면 자기가 없을 때 해달라는 거야.]

    [그럴 수가.]

    [그를 이해할 순 있어. 형제도 없이 자라서 더 그럴 거야.]

    [더 좋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할리가 얼마나 자신있게 말했던지 도널리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 하지만 앞으로도 또 13년이 지나야 그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니?]

    [아니야.]

    할리는 손가락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쓸어나갔다.

    [분명히 네 짝도 어딘가에서, 과연 내 여자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거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난 그런 생각을 한다. 다음번에 너와 미래를 나눌 수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될 거야. 난 확실히 믿어.]

    [내가 뭘 할 건지 알아?]

    도널리는 한결 나이진 기분으로 물었다.

    [뭔데?]

    [1주일 휴가를 내서 엄마하고 하와이에 갈 거야. 하와이엔 아직 한 번도 안 가봤거든. 엄마도 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잘 생각했다.]

    할리는 일어나서 다시 잔에 차를 부었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꿈을 타협하지 않는 네 용기를 내가 얼마나 존경하는 줄 알아? 너한테 꼭 맞는 남자를 반드시 찾게 될 거야.]

    도널리는 할리를 보았다. 그녀의 우정이 고마웠다.

    진정한 우정은 어려울 때 견딜 힘을 준다. 기쁠 때나 힘들 때나 같이 있어 주는 게 친구였다.

    로맨스는 그렇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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