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이스크림
도널리를 직접 만난 것은 일요일 오후나 되어서였다. 그때쯤엔 할리도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른 상태였다. 마크 프리랜더는 할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겨 주고 떠난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도널리는 벌써 세 번째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할리가 자초지종을 들려주는 동안 그녀의 표정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할리는 소파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릇을 한 옆으로 기울여 다 녹은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긁어 담아 숟가락을 싹싹 핥았다.
[그렇게 화가 난 건 평생 처음이었어.]
[화를 냈어? 그럴 만도 하다, 얘. 그래도 넌 위기가 닥치면 더 냉정해지지 않니? 네 그런 면을 늘 부러워했었거든.]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어. 화가 난 건 그 후였지.]
[무슨 뜻이야?]
[냉장고를 한 번 열어 봐.]
할리는 턱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냉장고?]
도널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을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야.]
도널리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위칸 문을 열었다. 이어서 도널리의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냉동칸의 앞면 전체가 아이스크림 통으로 재여 있었다. 옆으로 네 개씩 두 칸으로.
[그게 바로 내가 화를 낸 결과야. 베스킨 라빈스에 있는 더블 핏지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을 동을 냈지. 또 있어.]
할리는 벽난로 선반 위를 가리켰다.
[내 트로피 봤니?]
[그래. 언제부터 볼링을 한 거야?]
[한 게 아냐. 어제 스티브의 여동생 대신 나가 준 것뿐이야. 그런데 우리 조가 3등을 했지 뭐니.]
[너하고 스티브가 3등을? 대단하다!]
도널리의 목소리에 부러움이 배어 있었다. 아니면 경탄인가? 사실 할리 자신도 경탄해 마지 않았다.
[네가 볼링을 그렇게 잘하는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어.]
할리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스티브도 저으기 놀라워했다. 금요일 밤에 연습 게임을 했을 땐 세 게임 중 한 번도 100점을 넘어 보질 못했었다. 그런데 토너먼트에서는 무려 평균 160점을 받은 것이다. 갑작스레 성적이 향상된 것이 누구의 공인지를 굳이 따지자면, 그건 마크 프리랜더였다.
그녀의 분노는 그 다음날까지 이어져서, 볼링장에서도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스포츠에 그렇게 정신 집중이 잘되었다. 아마 그 핀 하나하나를 마크의 얼굴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모르긴 해도 스티브는 그녀가 자기 친구들이나 다른 선수들로부터 그렇게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 기분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3등을 했을 때는 아주 기뻐하며 트로피도 할리에게 넘겼다.
[너하고 스티브하곤 어떤 사이야?]
도널리가 어마어마하게 큰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물었다.
[우리? 아무 사이도 아냐. 그냥 친구지, 뭐.]
할리는 스티브와의 관계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니 거북함을 느꼈다.
[아주 좋은 사람이긴 한데 전 부인한테서 벗어나질 못해.]
[그래도 그 남자 싱글이야, 잊었어?]
그러나 그가 전처에게 얼마나 마음이 가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할리는 스티브를 데이트 상대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도널리에게 말한 그대로 친구일 뿐이었다.
[스티브하고 데이트해 볼 생각 없어?]
도널리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물었다.
[친구가 사실은 애인으로도 가장 좋다잖니.]
[아니. 스티브를 좋아하긴 하지만 오해하진 마. 내 타입이 아니야.]
[너한테도 좋아하는 타입이 있니?]
[물론이지. 없는 사람이 어딨어?]
도널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가? 니가 좋아하는 타입이 어떤 건데?]
할리는 머리 속으로 자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이상형에 대해 무진 많이 생각을 했었다.
[뭐 꼭 키가 크고 미남이어야 하는 건 아냐. 다른 점들만 좋다면 말야.]
그녀는 의자 아래로 발을 떨어뜨리고 손으로 진바지를 문질러 폈다.
[외모가 좋은 게 못한 것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솔직히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곤 생각 안 해.]
[나도 동감이야.]
도널리가 맞장구쳤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 주는 남자, 고나대하고 정직한 남자, 바르고 가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책임감이 있는 남자,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을 위험스럽게 만들면서까지 무모한 모험을 하지는 않는 남자.]
[흠.]
도널리는 숫자가 맞지 않을 때의 은행 직원처럼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흠?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런 남자가 이 세상에 있대?]
[물론 있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지.]
할리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결혼을 할 희망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빈 아이스크림 그릇을 부엌으로 가지고 갔다.
[넌 쉬웠잖아.]
부엌에서 다시 돌아오면서 할리가 말했다.
[쉬웠다고?]
[완벽한 남자를 쉽게 구했잖아. 샌포드를 만나 대번에 성공했으니까.]
할리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한때는 할리도 그렇게 쉽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자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남자한텐 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의적이었다. 성격도 서글서글했다. 지성도 갖추었다. 자기 사업까지 꾸리면서 그만하면 매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빚도 없다. 뼈아픈 과거로 괴로워할 일도 없었다.
도널리가 이상하게 말이 없자 할리가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되어 가니?]
[잘돼 가. 다음 주말에 약혼 반지를 사러 가기로 했어.]
할리는 도널리가 그런 빅뉴스를 지금까지 터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큰 결정이라 불안해하고 있는 건가?
[너 행복한 거지, 응?]
할리가 물었다.
[물론이지. 약혼 반지를 받는다는데 누가 안 그렇겠어.]
[오, 도널리. 드디어 네가 결혼을 하는구나.]
할리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 너무나 잘됐다, 얘. 샌포드는 괜찮은 남자야. 나도
그 사람 좋아해.]
그들은 두어 주 전에 만난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샌포드는
할리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무릎 뒤에서
땀이 나오게 하는 남자였으며 그가 도널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눈에 보였다.
할리는 금방 기분이 바뀌어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이런 데이트 서비스 이제 그만 빠질까 봐.]
[할리, 벌써부터 포기하는 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니니?]
[완전히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봐야겠어. 지금까지 방법이
틀렸던 것 같아.]
[데이트라인을 포기하진 마. 그리고 스티브한테 친구 중에서
누구 좀 소개해 달라고 하면 어때?]
할리는 도널리가 한 말을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스티브에게 그런 부탁까지 한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가 먼저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면 또 모를까.
게다가 리타가 '완벽'하다는 남자를 소개해 준 이후로 할리는 친구들이 해주는 소개팅에 대해서는 재고를 해보기로 했다. 적당한 데이트 상대자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것 같았다.
[내 생각엔 너와 스티브가 잘 맞을 것 같아.]
도널리가 말했다.
[너도 스티브를 좋아하잖니. 허구한 날 그 집 아들 이야기만 하더라 뭐.]
[됐어.]
할리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빠하고 데이트하는 기분일걸. 그 남자하고 키스하는 게 상상조차 안 되는 걸 어떻게.]
[진심이야?]
[진심이야. 무엇보다 그 사람, 전 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했잖아.]
도널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스티브를 같은 편으로 만들어 봐. 도움이 될 거야. 남자들이 뭘 생각하는지, 남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은지 가르쳐 줄 순 있잖아.]
그건 좋은 생각이었다. 바로 이런 점이 도널리가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이다. 상황을 잘 판단해서 자원을 확보한 후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할리가 미소를 짓자 도널리의 눈이 밝게 빛났다.
[좋아, 내일 스티브하고 이야기를 해보는 거야.]
월요일, 퇴근 후 그녀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을 후 두 집 사이의 잔디밭을 지나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는 할리를 보고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들어오시죠.]
그가 거실을 가리켰다. 할리는 그의 집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실내장식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벽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고, 벽난로 선반에 즐비한 스포츠 트로피가 전부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실내 풍경은 정말 아니었다.
대형 텔레비젼 위에 그의 아내와 아이 사진이 눈에 띄었다. 눈에 띄었다고? 그 사진은 도저히 놓칠 수가 없었다. 그 방에서 텔레비젼 외엔 달리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가구도 얼마 없었지만 있는 가구마저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완전히 실용 위주였다. 소파, 의자, 커피 테이블, 전등. 이 집에서 사는 건 잠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해요.]
아무래도 찾아온 목적부터 밝혀야 그가 편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녀는 요점부터 말했다.
[돈이 또 필요한가요?]
빙그레 웃으면서 그가 물었다. 그는 할리의 맞은편 의자에서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 위에 걸치고 앉았다.
[아니요.]
그녀로서는 그 질문에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난 지금 결혼할 남자를 찾고 있어요. 교외에서 살면서 아이들도 낳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뭐 이런 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거야 이제 새삼스러운 비밀도 아닌 것 같군요.]
[그래요. 최근에 난, 특히 마크 프리랜더를 만난 뒤로 내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요?]
그는 할리가 무슨 겁나는 소리라도 할까 봐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근본적인 실수를 했더라구요. 지금까지 난 남자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지만 본 것 같아요. 그가 지적인가, 친절한가, 경제력이 있는가, 정직한가..... 이런 것들 말이에요.]
[그게 뭐 잘못됐소?]
[아니,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 남자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것이 뭔지 살펴보는 것처럼 나 또한 내가 뭘 줄 수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죠.]
[아.]
그는 의자 등에 기대어 앉았다.
[예를 들면?]
[기본적으로 같은 것들이겠죠. 지성, 정직함 등등. 내가 알고 싶은 건요, 어떻게 하면 나를 가장 좋게 보여 보느냐 하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을 갈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날을 갈아요?]
[요령 같은 거요.]
찌푸린 인상이 더욱 깊어졌다.
[나한테 그걸 가르쳐 달라고요?]
[바로 맞혔어요. 사실 이런 생각을 한 건 도널리였어요. 근데 도널리 말이 맞아요. 결혼을 목적으로 남자를 사귀려고 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마음을 열었으면, 그에 맞는 노력도 해야죠. 내가 만나고 싶은 남자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기술 같은 걸 익히는 거예요.]
스티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를 유리하게 해주는 것, 예를 들면 그 남자한테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려 주면서도 그로 인해 남자가 도망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기술 말이에요. 남자들은 묶이는 걸 싫어하잖아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서워하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세상에 남자가 5천 3백만 명이 사는데 그 중 영원한 관계를 원하는 남자는 12명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소꿉장난이나 하려는 남자하고 시간 낭비할 수는 없으니 좀 배워서라도 해야겠어요.]
[내가 뭘 해드리면 되오?]
스티브가 물었다.
[간단해요.]
스티브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렸다.
[남자들이 자기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한테서 정말로 바라는 게 뭐죠? 첫 번째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 뭔가요?]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게서 남자가 바라는 것이라......]
그가 천천히 되뇌었다.
[생각을 좀 해주세요. 서둘 건 없으니까요.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던진 질문이 복잡한 내용인 만큼 그에게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 뒤에 답을 듣고 싶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소, 대답은 뻔하니까.]
할리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그는 싱긋 웃었다.
[물론.]
할리는 조용히 기다렸다.
[외적인 것부터 시작하죠.]
그게 가장 우선적인 문제일 것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좋아요.]
스티브는 자기가 어느 정도까지 솔직해도 되는지 가늠하려는 듯이 할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큰 가슴......]
그리고 그는 얼른 할리를 쳐다봤다.
[긴 다리에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소.]
그는 말을 멈추고 할리의 반응을 기다렸다. 할리는 입술을 깨문 채 반응을 감추었다.
[요리를 잘하는 것도 나쁠 건 없지. 특히 요즘엔 그게 플러스가 됩니다. 솔직히 나라면 우리 할머니만큼 로스트 치킨 요리를 잘하는 여자라면 당장 결혼하겠소.]
할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남자한테는 결국 여자가 육체뿐이란 말인가요? 그리고 요리를 잘하면 더 좋다고요? 정말이지 구역질이 나는군요. 난 심각하게 물어 본건데.]
[이봐요, 할리.]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솔직하게 말해 주는 거요. 남자들은 우선 장비부터 살펴보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해놓구선 날 욕하면 어떡합니까?]
[농담이 아니라구요?]
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니고 말고.]
적어도 그는 진지한 표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할리는 아직도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직함과 책임감은요? 성실함과 솔직함은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아, 중요하죠. 하지만 그런 건 누구나 아는 것 아니오. 당신이 모르는 걸 가르쳐 다라니까 말한 것뿐입니다.]
[남자들이 정말 그렇게 피상적인가요?]
[아.....그렇게 되나요?]
할리는 눈을 부라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할리한테는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그녀는 키도 작고, 가슴도 작았으며, 스테이크와 샐러드 외엔 만들 줄 아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