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8화 (8/29)
  • 8. 빙고

    3월 20일

    세번째가 마력의 숫자라더니, 나도 마력에 걸렸다. 데이트라인에서 오랜 시간을 걸려서 남자를 찾아냈다. 마크 프리랜더, 그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그와는 어제 처음 만났다. 도널리의 충고대로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보니 마크가 먼저 와 있었다. 우린 같이 웃었다.

    나는 초조했다. 하지만 마크에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마크가 마음에 든다. 위험한 생각이다. 아직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지만,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지적이고, 매너도 좋고, 좌우지간 멋있다. 딱 엄마가 좋아할 타입이다. 아빠도 살아 계셨다면 좋아할 것이다.

    마크는 엔지니어이다. 이혼한 경험이 있고, 아이는 없다. 자기한테 맞는 여자를 찾기 위해 2천 달러나 투자했다는 사실은 그 역시 이 결혼 문제를 나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린 곧 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할리는 토마토 진열대 쪽으로 카트를 밀고 가서 주의깊게 골랐다. 오늘 저녁 식사는 무엇이든 완벽해야 했다. 데이트를 시작한 지 2주일이 되자, 마크는 할리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하라고 졸라댔다.

    할리가 할 수 있는 요리는 많지 앓았지만, 스테이크만은 자신 있었다. 또 안티파스토 샐러드(두껍게 썬 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그리스 올리브, 빨간 고추와 살라미를 섞음)도 남들이 알아주는 요리였다. 여기에 구운 감자요리와 찐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이면, 일급요리 뺨치게 훌륭했다.

    [아빠, 저기 할리 누나 있다!]

    자기 이름이 불리자 할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티브가 케니와 함께 쇼핑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카트엔 냉동 피자, 스파게티 통조림, 그리고 냉동 앙트레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안녕하쇼, 이웃사촌!]

    스티브가 멀리서 외쳤다.

    [안녕하세요!]

    할리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요즘 잘 안 보이시더군요.]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 때문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요.]

    [누군데요?]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고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결국 데이트라인에 등록을 했거든요. 거기서 마크라는 남자와 연결을 해주었어요.]

    [축하합니다! 잘될 줄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만난 지 두 주일 정도 되었나 봐요. 지금까진 잘돼 가고 있어요.]

    [아빠, 누나한테 물어 봐.]

    케니가 아빠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채근했다.

    [누나가 딱 맞아.]

    스티브가 아이의 말을 무시한 채 그냥 가려고 하자 할리가 그를 붙잡았다.

    [뭘 물어 보라는 거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스티브!]

    [알았어요, 알았어. 커피라도 하면서 이야기 할까요?]

    그는 샌드위치와 음료를 파는 델리점을 가리켰다.

    [좋죠.]

    할리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는 그들을 따라 델리로 갔다. 할리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을 막지 앓게 카트를 한 옆으로 치우는 동안 스티브는 커피 두 잔과 핫 초콜릿 한 잔을 들고 왔다.

    케니는 아버지가 입을 열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의자 다리를 발로 툭툭 찼다.

    아들에게 이맛살을 찡그려 보인 스티브는 할리에게 물었다.

    [볼링 합니까?]

    [볼링이요? 하긴 하지만, 안 한 지 몇 년 되었어요.]

    할리는 볼링을 썩 잘 하진 못했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애버리지가 몇 점입니까?]

    [글쎄요, 핀 서너 개 넘어뜨리는 정도죠. 왜요?]

    [볼링할 줄 아는 여자가 필요하거든요.]

    케니가 설명했다.

    스티브는 아들을 야단치듯 쳐다보았다.

    [아빠가 말할게, 알았니?]

    그리고 다시 할리를 향했다.

    [커플 대항 볼링팀에 소속이 되어 있거든요. 이혼을 한 후엔 여동생이 같이 출전해 줬는데, 동생 부부가 지난 달에 위치타로 전근가는 바람에 이번 시합부터는 나갈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아빤 이번 토너먼트에 같이 출전할 여자 파트너가 필요한 거예요.]

    케니가 보충 설명을 했다.

    [아.]

    할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득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점수만 깍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스티브도 할리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챘다.

    [걱정하지 마세요. 별 것도 아닌데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면 돼요.]

    [내가 도움이 못 될 것 같아서 그래요. 몇 년 동안 안 해봤거든요.]

    [하루. 그것도 오후만 하면 돼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누나?]

    또다시 케니가 끼어들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야.]

    할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니한테 도와주라고 할까? 바니는 죄를 진 게 있으니까 벌을 받아야 해.

    [아니야. 아빠가 아는 사람들은 벌써 다 물어 봤어요.]

    [케니, 그만 좀 해라. 누나가 못 하신다고 하잖니.]

    스티브가 엄하게 꾸짖었다.

    [하지만....우리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그렇게 못 하진 않으니까 금방 배울 거야.]

    케니가 고집을 피웠다.

    [글쎄.......]

    할리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두 번씩이나 그녀를 구해주었고 그녀가 한 바보짓을 단 한 번도 들먹이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할리는 이 부탁을 고려해야 했다.

    [한 번 해볼게요.]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케니 말이 맞아요. 연습을 하면 좀 낫겠죠. 어쨌거나 반나절이면 되는 걸요, 뭐. 내가 신세진 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말했듯이. 먼저 좀 가르쳐 주셔야 해요.]

    [물론이죠. 금요일 밤이 어떻습니까? 케니 데리고 볼링을 한 후 피자를 먹으로 가죠.]

    [시합은 언제죠?]

    [그 다음날......토요일 오후.]

    할리는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랬다.

    [누나가 한다고 할 줄 알았어요!]

    [나도 도와줄 수 있어서 좋구나. 이웃 좋다는 게 뭐겠니?]

    할리는 초조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마크와의 저녁은 할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근사했다.

    그는 할리가 좋아하는 와인 한 병과 봄꽃 한다발을 안고 찾아왔다. 그리고 할리가 만든 음식을 정신없이 먹으며 특히 안티파스토 샐러드는 정말 최고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텔레비젼 앞에 앉아서 할리가 가장 아끼는 크리스털 잔으로 와인을 마셨다. 최신 액션 영화 비디오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화면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마크는 할리의 어깨 주위에 한 팔을 두른 채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날 감쪽같이 속였군.]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그의 반듯한 얼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 사각형의 턱 그리고 완벽한 남성적인 이목구비.

    [무슨 말이죠?]

    그녀는 그의 손가락에 자기 손가락을 깍지끼었다.

    [성공한 캐리어 우먼일 뿐만 아니라 요리까지도 이렇게 잘하니 말이오. 요즘 그런 여자가 얼마나 드문지 알아요? 대개의 여자들은 부엌에서 멀리 있으려고 별의별 수를 다 쓰지.]

    할리는 그가 오해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스테이크와 감자 구이 요리는 잘해요. 하지만 그 외에는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어요.]

    그는 킥킥 웃으며 그녀의 콧등에 살짝 키스했다. 그의 눈이 다시 심각해졌다.

    [할리, 당신과 같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느껴져요. 지금 이렇게 당신과 같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할리는 시선을 낮추었다. 자기가 그에게 얼마나 반해 있는지 아직 알려줄 수 없었다.

    [나도 그래요. 데이트라인에 낸 돈이 조금도 아깝지 않아요.]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었다.

    [당신이 약속 시간 30분 전에 왔을 때부터 우리가 잘 맞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봤었소.]

    할리는 그에게로 더 바짝 몸을 붙여 앉았다.

    [그땐 너무 초조했어요.]

    마크는 신중한 동작으로 포도주잔을 그녀의 손에서 빼내어 옆으로 치우고는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고 천천히 입술을 겹쳐왔다.

    할리는 그 키스를 발가락 끝까지 느꼈다. 전에도 키스는 많이 해봤지만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그의 감촉, 그의 키스는 진정으로 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욕망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당신 입술은 정말 달콤하군.]

    그가 그녀의 귓속에 대고 소곤거렸다.

    [포도주 맛이에요.]

    [아니, 당신이요. 당신이 나를 취하게 하는 거요.]

    할리는 그들이 포도주 한 병을 송두리째 다 마셨으니 취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키스했다. 키스는 깊고 강렬했다.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숨을 거칠게 쉬었다.

    [오, 이런.]

    할리는 눈을 감은 채로 속삭였다. 그의 입술에서 느껴진 맛이 아직도 입 안에서 감돌도 있었다.

    마크는 그녀의 턱 아래와 목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전율 같은 감흥이 할리의 등골을 타고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난 당신이 바로 내가 찾던 여자란 사실을 알았소.]

    마크가 소근거렸다.

    할리도 그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크를 만남으로써 그 이전의 불쾌한 경험이 다 보상되고도 남았다. 그는 할리가 남자에게서 바라던, 남편감으로서 바라던 모든 것이었다.

    그는 계속 키스하며 그녀의 스웨터 앞부분으로 손을 움직여 가슴을 손 안에 감쌌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젖꼭지를 비벼대기 시작하자 이내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몸이 얼마나 빠른지를 좀 봐.]

    그의 목소리는 성적인 흥분으로 약간 새되어 나왔다.

    [당신이 얼마나 완벽한 여성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소.]

    그는 그녀의 스웨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가락으로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더듬기 시작했다. 5킬로그램을 줄이기 위해 쏟았던 모든 노력이 아깝지 않았다. 마크가 그녀의 배를 더듬으며 내는 감탄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며 그 피나는 운동을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혀로 그녀의 입술을 가르며 입 속으로 들어왔다. 키스가 끝났을 때 그의 호흡은 거칠고 가빴다.

    [할리, 오, 사랑스러운 할리......]

    [오, 마크........]

    [생각해 보니 우리가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군.]

    [두 주일.]

    할리는 그를 안지 몇 달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밤 여기서 지내게 해주겠소? 너무 빠르다는 것은 알지만, 당신을 너무 원해.]

    할리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따뜻한 관능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 이런 일이 생기리라 예상했었다. 오히려 이런 순간을 바라는 마음에서 몇 달 전에 실크 잠옷까지 새로 사두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일렀다.

    [당신을 갖고 싶어.]

    그는 다시 할리에게 키스를 퍼부었고 그녀의 결의는 약해지고 있었다. 그의 키스는 그녀를 흥분의 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했다. 할리는 이유, 아니 핑계 거리를 절박하게 찾았다.

    [할리, 당신이 날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

    [알아요, 하지만.......]

    [좋을 거야, 약속할게.]

    [마크, 생각 좀 해봐야 해요.]

    [생각하지 마, 할리, 그냥 느껴요.]

    그는 할리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브래지어를 풀었다. 자신의 진바지 지퍼가 내려가자, 할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은 안 돼요.]

    그의 눈에 실망의 빛이 서렸다.

    [하지만 곧 허락해 주겠지?]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키스했다.

    [그래요.]

    마크는 그녀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녀가 옷을 가다듬도록 도왔다. 욕정이 조금 가라앉자, 그녀는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커피를 앞에 두고 거실에 앉았다.

    [이번 주엔 여행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혀 있어서 며칠 동안 떠나 있을 거요. 자주 전화 걸게.]

    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만 빼고는 매일 집에 있을 거예요.]

    [금요일?]

    그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그녀는 장황한 설명을 생략하고 간단히 말했다.

    [친구를 도와주기로 했어요. 토요일 오후에도요. 아마 4시경에는 집에 와 있을 거예요.]

    [친구라고?]

    [그래요.]

    그녀는 별 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그녀를 세심히 뜯어보았다.

    [토요일 밤은 나를 위해 남겨 둬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왜 인상을 찌푸렸는지 마음에 걸렸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안 될 게 뻔했다. 할리가 볼링 공을 잡고 핀을 맞추려고 달려나가는 모양새를 보는 순간 스티브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할리는 발끝으로 뛰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공은 옆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다.

    할리는 미안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걱정 말아요. 마음 편히 갖고 하세요.]

    너무 충고를 하려들면 그녀가 마음을 바꾸어서 달아나 버릴까 봐 용기를 주었다.

    할리는 볼링 공을 잡아 재도전했다. 발을 왼쪽으로 몇 인치 끌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끌었다가 또다시 처음 위치로, 결국 야릇한 위치에 발을 놓았다. 그리고는 발뒷꿈치를 번쩍 들고, 핀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무슨 테러리스트 발레리나처럼 맹렬하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핀을 겨냥해 보시죠.]

    그녀가 던진 공이 다시 옆으로 빠져 버리자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엔 그녀에게 점수를 주긴 줘야 했다. 첫 번째 공보다 좀더 멀리 나간 후에 빠졌으니까.

    [그렇게 한 건데요.]

    그녀는 팔을 한 바퀴 돌리고는 손을 앞뒤로 흔들며 손목 운동을 했다.

    [내 차례야.]

    케니가 말하고는 앞으로 달려나왔다. 아이는 아빠의 운동신경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케니는 프로 선수처럼 레인 위로 걸어올라가 스티브가 설명해 주었던 동작 그대로 공을 미끄러뜨려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8개의 핀을 넘어 뜨렸다.

    스티브는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대고 요란하게 휘파람 소리를 내며 축하했다. 스페어 하나는 못 넘어 뜨렸지만, 아직 워밍업도 안 된 상태에서 그 정도면 잘한 것이다.

    이제 스티브의 차례였다. 그의 공은 핀에 폭죽처럼 부딪히며 스트라이크를 냈다. 그의 볼링 솜씨는 뛰어났고 많은 트로피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할리는 핀이 다시 정렬될 때를 기다렸다가 공을 잡고 레인 위로 올라섰고 왼쪽, 오른쪽으로 발을 움직이더니 뒤를 돌아 케니를 쳐다보았다.

    케니는 고개를 저으며 할리에게 왼쪽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할리는 케니가 가르쳐 준 대로 했지만 공은 전처럼 곧장 오른쪽 홈으로 빠져 버렸다.

    스티브는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도 출전을 취소하면 늦진 않을 것이다. 그가 눈을 뜨는 순간 할리의 공이 레인의 바깥쪽 경계선까지 위태롭게 굴러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헤드핀 쪽으로 굴러갔다. 공은 헤드핀을 비껴서 왼쪽에 있는 핀 두 개를 맞추었다. 2초 전만 해도 레인의 오른쪽 경계선 쪽으로 가던 공이 말이다.

    두 번의 시도로 할리는 핀 6개를 넘어뜨렸다. 스티브도 한때는 변화구를 많이 던졌지만 이건 문제가 달랐다. 할리는 스페어를 놓쳤지만 흡족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스티브는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이제 좀 감이 잡히네요. 뭐 그렇게 어려운 운동은 아니잖아요.]

    [맞아요.]

    그들은 세 게임을 했고 할리는 그 때마다 조금씩 나아졌다. 스트라이크는 한 번도 하지 못했지만, 몇 번은 거의 스트라이크를 낼 뻔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핸디캡이 시합에서는 그를 도와줄 것이고, 그는 체면을 살릴 것이다. 마지못해서 하는 일처럼 보이긴 해도, 사실은 할리가 도와주는 것이 고마웠다.

    혹시 할리를 그의 애인으로 오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만약 그런 오해가 생긴다면 최소한 볼링 친구들은 그에게 여자를 소개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할 것이다.

    메리가 킵이라는 인물을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메리를 단념할 수 없었다.

    메리 린의 생일이 다음 주일에 있다. 그는 이미 빨간 장미 9송이와 흰 장미 2송이를 주문해 두었다. 메리는 장미를 좋아했다. 흰 장미 두 송이의 의미를 메리 린이 알까. 그들은 9년 동안 같이 살았고, 2년째 별거를 한 것이다. 그 2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는 다시 가정적인 남자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일을 꾸며대는 여자가 아니라 변하기 전의 사랑스러운 아내로서의 메리 린을 원했다. 물론 자신도 변화해야 한다. 그는 단연코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제 피자 먹으러 갈까?]

    아이가 볼링화를 돌려주고 돌아오자 그가 물었다.

    [응!]

    [오늘은 동전 몇 개 줄 거야?]

    스티브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누가 동전 준다고 했어?]

    [아니, 아빠.]

    [걱정 마, 줄 테니까.]

    스티브는 케니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9시가 다 된 시각인데도 피자집은 10대 청소년들이 지난번에 왔을 때만큼 북적거렸다. 피자를 주문한 스티브는 할리와 마실 다크 에일과 콜라 한 잔을 가져왔다.

    케니에게 동전을 건네준 후, 그는 할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신세를 갚을 수 있어서 나도 기뻐요.]

    할리의 갈색 눈이 정말 아름답다고 스티브는 새삼 생각했다. 평소 스티브는 여자의 눈동자 색에 관심을 갖는 편이 아니었다. 만약 할리가 이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할리의 눈동자는 보기 드문 색이었다. 그들이 지금 마시고 있는 에일 색깔과 비슷했다. 깊고, 짙고, 인상적이었다.

    [내 얼굴에 수염이라도 났나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윗입술을 가리켰다. 그가 고개를 가로 젓자 할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죠?]

    [너무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서요.]

    [맞아요. 데이트라인을 통해서 남자를 만났다고 했었죠? 아무래도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정말이오?]

    그렇게 못마땅한 투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너무 빠른 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스티브도 할리의 집에 찾아온 그 남자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스티브는 그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할리에게 맞는 타입이 어떤 건지 물어 본다면 대답할 말이 없기는 했지만 할리의 타입이 아닌 것 같았다.

    [요즘엔 못 본 것 같군요.]

    스티브가 덧붙였다. 지난번, 그러니까 할리와 수퍼에서 만났던 날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지금 출장 갔어요.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도 몇 달은 된 것 같아요. 우린 매일 밤 장거리 전화로 1시간씩 이야기를 해요. 그 사람 전화요금이 얼마나 나올지, 엄청날 거예요.]

    [할리, 정말 축하해요.]

    스티브는 진심으로 말했다. 아직 할리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할리가 좋았다. 지금 그녀에겐 남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 같으므로, 이 마크라는 친구와의 일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고마워요.]

    할리는 차가워진 머그 잔을 손으로 잡았다.

    [마크는 내가 바라던 남편감이에요. 다정하고, 솔직하고, 똑똑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친절하죠. 그런 남자는 본 적이 없다니까요. 게다가 마음 씀씀이도 자상해요. 그리고 로맨틱하고......]

    할리는 꿈에 취한 표정이었다. 그만둔 비서 대니엘은 3년 동안 일하면서 연애를 대여섯 번은 족히 했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지금 할리가 짓고 있는 황홀한 꿈 속 같은 표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스티브는 비로소 그날 저녁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깨달았다. 지난번에 같이 왔을 때에도 그랬다. 너무나 편안했다. 그 이유는 바로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가 끼여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했다.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상대방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안달할 필요 없이 그대로의 모습만 보이면 되는 것이다.

    [내일 11시 30분까지 괜찮겠습니까?]

    스티브가 윌로우 우즈의 입구를 지나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길로 접어들면서 물었다.

    [그럼요, 좋아요.]

    [좋습니다.]

    할리는 숨을 훅 들이쉬었다.

    [저건 마크의 차 같은데요!]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정보다 더 빨리 돌아온 모양이에요.]

    스티브가 자기 집 앞쪽으로 차를 들이댔다.

    [마크 만나 볼래요?]

    그녀가 물었다.

    [좋습니다.]

    스티브는 유쾌한 척하며 대답했다.

    할리는 차에서 나오면서 마크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크! 일찍 왔군요!]

    스티브는 트렁크에서 볼링 공을 꺼내면서 마크가 하는 말을 들었다.

    [저 친구가 당신이 도와준다는 그 친구요?]

    스티브는 그의 목소리에서 불쾌한 냉소를 감지했다. 그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마크는 그 손을 무시했다.

    [얘기 좀 해야겠소.]

    마크는 얼음 같은 어조로 할리에게 말을 건넸다.

    스티브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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