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7화 (7/29)
  • 7. 총각 No. 2

    또 데자뷰(실제로는 처음 보거나 경험하는 것을 이미 경험한 것으로 여기는 착각)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할리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길에서 마주치면 피해 다녔을 법한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불량'하다는 말이 떠오르는 남자였다.

    채드 엘리스는 한쪽 머리 아랫부분에서부터 머리를 넘겨 빗어 대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머리엔 한 해 동안 기름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한 기름이 철철 흘렀다. 밝은 꽃무늬 셔츠의 단추를 거짓말 안 보태고 배꼽까지 풀어 두고 있었고, 길이가 다른 금 팔찌를 최소한 15개는 차고 있었다.

    그는 메뉴를 보고 있던 눈을 들어 마치 자기 같은 남자와 같이 앉아 있는 걸 행운인 줄 알라는 듯이 미소지어 보였다. 할리는 그래도 자기를 알고 또 좋아한다는 회사 비서가 이런 광대 같은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할리는 특히 가격에 주의하며 메뉴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음식값의 반을 내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서 돈이 모자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음식을 시키기로 했다.

    채드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고르고 메뉴를 한 옆으로 치웠다.

    [좀 긴장을 풀어 줄 만한 걸 드시죠?]

    이런 인간과 같이 있으면서 긴장을 푼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더블 마티니 같은 것 말입니다.]

    할리는 전에 마티니를 마신 적이 있었는데, 올리브밖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난 물이나 마실래요.]

    그는 눈썹을 두어 번 찡긋거렸다.

    [술을 마시는 편이 훨씬 빨라요.]

    할리는 채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뱃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거지 같은 사람이 바니의 삼촌이라고? 정말이지 바니는 내가 이 정도로 절박하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채드는 더블 마티니를 주문하고 할리는 페리어를 시켰다.

    [불안하거나 하진 않죠, 컵 케이크?]

    할리는 이를 악물었다.

    [내 이름은 할리예요.]

    [여자들은 애칭을 좋아하잖습니까?]

    [전 안 그래요.]

    할리는 이 작가가 음식값을 다 낼 때까지는 싸움을 하지 않기로 이를 악물고 결심했지만 과연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지 벌써부터 의문이었다.

    [채드, 당신은.......]

    [채드라니요?]

    뭔가 어렴풋이 잡히기 시작했다.

    [당신이 채드 엘리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죠?]

    할리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런, 알았어요, 알았어. 젠장할. 이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채드는 갑자기 또 출장을 떠나야 해서 나한테 부탁한 겁니다. 난 탐 체더스라고 하죠.]

    [난 채드 엘리스와 저녁 약속을 했단 말예요!]

    할리의 피는 이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망할 놈의 채드란 작자는 약속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을 직접 하는 예의조차 없이 엉뚱한 놈을 보냈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알 건 다 안 셈이다.

    [걱정 마십쇼. 나하고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겁니다.

    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채드가 날 보증하죠. 우린 오랫동안 친했죠.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죠?]

    [말을 하면 나하고 저녁을 같이 안 할까 봐서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괜찮은 녀석입니다. 이왕 이렇게 됐는데 모양 구길 필요 없잖습니까, 안 그래요?]

    그러면서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어요.]

    그는 최소한 약간은 미안한 내색을 보였다.

    [맞아요, 처음부터 말했어야 했죠. 약속을 취소해 버릴까 봐 그런 것뿐이었습니다. 내가 부탁하는 건 그저 기회를 달라는 것뿐입니다.]

    할리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솔직하기로 해요, 알았죠?]

    [스카우트의 명예를 걸고.]

    [스카우트였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걔들은 기집애 같잖아요.]

    [아, 네.]

    할리는 어서 나가고 싶은 심정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또 하나의 지루한 저녁이 될 것 같았다.

    [이혼을 하셨다면서요?]

    팀은 칵테일을 가져온 웨이트리스에게 윙크와 25센트 팁을 건넨 뒤에야 할리에게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아니요, 채드가 잘못 들은 모양이군요. 난 결혼한 적이 없어요.]

    탐에 대해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할리가 본 중에 가장 표정이 풍부한 눈썹을 가졌다. 지금 이 순간 그 눈썹은 머리선까지 치켜올라갔다.

    [결혼을 한 적이 없다고요? 뭐가 문제죠?]

    [문제라니요?]

    [당신처럼 이쁜 여자가 아직 결혼을 한 번도 못 해봤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하기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걱정 말아요, 내가 잘 돌봐 줄 테니까, 스윗 파이. 우리 둘은 재미있을 거요.]

    [내 이름은 할리라고 했어요.]

    이제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는 더블 마티니를 한 모금에 다 마셔 버리곤 바 쪽으로 잔을 들어 보이며 한 잔 더 가져오라는 신호를 했다.

    [하라는 대로 합죠, 달링.]

    할리는 침착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의료기기는 언제부터 팔았나요?]

    그녀는 관심이 있는 척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의료기기는 팔지 않아요. 아, 화내기 전에 들어 보세요. 거짓말을 한건 아니니까. 채드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건 사실이에요. 다만 난 의약쪽이죠. 난 콘돔을 팝니다.]

    얼음 덩어리가 통째로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콘돔이요?]

    [맞습니다. 가지각색 종류별로 다 있죠. 2월의 상품은 솜사탕 맛이었죠.]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할리는 진저리를 쳤다.

    [흰색이 제일 잘 팔리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새빨간 색을 놔두고 흰색을 더 좋아하는지 말입니다.]

    [난 잘 모르겠네요.]

    할리는 다른 사람이 이런 대화를 듣지 않기를 바라며 좌우를 돌아보았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요?]

    [좋습니다.]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난 변비약도 팔고 있습니다. 2년째 줄줄이 최다 판매 세일즈맨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주 웃기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변비약......줄줄이.......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아뇨.]

    할리는 감정없이 말했다. 이제 할리의 머리 속에서 망치질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저히 계속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음식값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남자와 단 한순간도 더 같이 있을 수는 없었다.

    [탐, 정말 미안하지만 난 가야겠어요.]

    그녀는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는 상처받은 어린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죠?]

    [난 채드 엘리스를 만나러 온 거지, 탐을 만나러 온 게 아니었잖아요.]

    [우리가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뭣 땜에 그럽니까? 말만 해주면 고치겠어요.]

    [아니요,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게 좋겠어요.]

    [난 우리가 나중에 같이 갈 걸로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는 다시 눈썹을 찡긋거렸다.

    [같이 가다니요?]

    [침대 말이죠.]

    [침대?]

    할리가 너무 큰 소리로 소리치는 바람에 웨이터까지 쳐다보았다.

    [분명히 말하는데, 난 당신과 같이 침대에 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채드 말과는 다른데요?]

    [채드가 뭐라고 그랬는데요?]

    바니도 들어야 할 것이다.

    [진짜 남자를 찾고 있다고. 베이비, 내가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그 남자란 말이오.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걸 내가 가르쳐 준다니까. 이 콘돔 산업에서 일하면서 고스란히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거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탐. 잘못 짚었어요. 난 당신에게 관심없어요. 그리고.......그 레슨이란 것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 없어요.]

    [내가 이렇게 식사와 술까지 사주는데 나한테는 아무 것도 안 해주겠단 말이오? 난 이 정도 하면 같이 자러 갈 줄 알았단 말이오.]

    [내가 줄 게 있긴 있어요. 내 식사값이요.]

    그녀는 지갑을 꺼내서 50달러짜리 지폐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가방 끈을 꽉 부여잡았다.

    [안녕.]

    도저히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일평생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일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앞으론 이런 소개팅은 안 하리라고 맹세했다. 잘 안 될 뿐만 아니라 돈도 너무 많이 들었다.

    [좋아. 나도 남자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여자를 찾을 거야!]

    할리가 내던진 50달러짜리를 주머니에 넣는 것이 보였다.

    레스토랑을 나올 때, 할리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것을 느꼈다.

    [택시를 불러 드릴까요?]

    접수계원이 물었다.

    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가슴이 철렁했다. 택시 요금을 낼 만한 돈이 있어야 할 텐데......역시 없었다. 그 50달러가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그렇다고 탐 체더스한테 다시 가서 거스름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또다시 스티브한테 돈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2, 3분 안에 택시가 올 겁니다.]

    접수계원이 동정의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문득 스티브가 집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전화를 걸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스티브의 전화번호를 몰랐으므로 할리는 전화번호 안내에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스티브는 마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첫 번째 벨 소리에 응답했다.

    [여보세요.]

    그녀는 한심스런 이야기를 모두 다 털어넣고 그의 자비로운 은혜를 기다리기보다는 그냥 돈이 필요하다는 말만 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할리는 그가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난 옆집에 사는 할리예요.]

    [네, 압니다.]

    그는 키득거렸다.

    [전화를 거는 것보다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지르는 게 낫지 않습니까?]

    [집이 아니에요. 또 데이트하고 있어요.]

    [지난번 그 놈은 아니겠죠?]

    [물론이죠. 완전히 다른 놈팡이를 만났어요. 방금 나와 버렸는데 또 택시 요금이 없는 거예요. 돈 좀 또 빌려 줄래요?]

    자존심이 상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지금 어딥니까?]

    [무슨 레스토랑이요. 어디 있는 건지도 몰라요.]

    이런 바보. 다음번엔 좀 신경을 쓰리라. 아니, 다음번엔 아예 차를 가지고 오리라.

    [내가 데리러 가죠.]

    [아니에요. 고맙지만, 그럴 순 없어요.]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택시 안에서 할리는 눈을 감았다. 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이런 일이 두 번씩이나 생길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택시가 그녀의 집 앞에 닿는 순간 스티브의 집 문이 열리며 그가 잔디밭을 뛰어와서 지갑을 꺼냈다.

    [얼마가 필요하죠?]

    [18달러. 내일 아침에 갚아 드릴게요.]

    그는 기사에게 돈을 주었고, 기사는 금세 떠나갔다.

    [괜찮아요?]

    그가 물었다.

    [아니요. 곧 괜찮아지겠죠. 돈 또 꿔줘서 고마워요.]

    [이웃사촌이라는 게 뭡니까?]

    그는 웃으면서 할리의 등을 토닥였다.

    할리는 문을 열고 컴컴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소파 위에 던지고 불을 켠 다음 곧장 부엌에 있는 전화기로 달려갔다.

    도널리는 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네 말이 맞았어.]

    할리는 거두절미하고 선언했다.

    [기분 좋은 말이구나. 그런데 내가 뭐가 맞았다는 거야?]

    [데이트라인. 내일 아침에 전화 걸 거야.]

    할리의 선언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

    [알 필요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바라는 남자의 반만큼이라도 되는 남자를 구해 준다면 보통 회원비의 두 배라도 낼 거란 사실만 알아 둬.]

    [오, 가엾은 할리. 분명히 좋은 남자가 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돈을 내겠다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