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6화 (6/29)
  • 6. 내 건 더블로

    [2번 선에 도널리 쿠퍼의 전화가 와 있습니다.]

    할리는 깜박거리는 전화통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미루어도 소용없었다. 도널리도 알 권리가 있었다.

    [안녕, 도널리.]

    할리는 억지로 기분이 좋은 척하며 인사했다.

    [왜 전화 안 해줬니? 어떻게 됐어?]

    [안 듣고 싶을 걸.]

    [그럼 뭣 땜에 전화를 했겠니? 나도 시간 없어. 5분 후에 손님들이 올 거야. 그러니까 요점만 빨리 말해, 알았어?]

    [알았어. 한마디로 쓰레기 같은 남자였어......]

    할리가 모든 이야기를 다 끝냈는데도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도널리는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킥킥대고 있으리라.

    [무슨 말이라도 해봐.]

    할리가 재촉했다.

    [좋아, 그럼 이제 데이트라인에 연락해 볼 마음이 생겼겠네?]

    [아니.]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데이트 건이 또 하나 있어.]

    [누군데?]

    도널리는 회의적인 톤으로 말했다.

    [바니의 삼촌 채드.]

    바니는 일찍이 1월에 채드라는 남자에 대해 말했었다. 하지만 할리가 체중 조절을 한 후에 만나겠다고 지금껏 미루어 왔다.

    [오늘 아침에 만나겠다고 말했어.]

    [그래서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할리는 도널리의 말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또한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월요일 밤.]

    월요일은 겨우 3일밖에 안 남았다.

    전화로 듣기에는 채드 엘리스는 괜찮았다. 또 바니는 삼촌들 중에 채드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가 신임하는 직원의 친척을 만나는 것은 그나마 안전한 모험이 될 것 같았다. 최소한 마브를 만났을 때처럼 끔찍한 꼴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어젯밤에 샌포드 만났니?]

    할리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응, 너무 좋았어. 꿈이 실현된 것 같아.]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도널리의 말투가 아련해졌다.

    [오늘도 전화했어?]

    할리는 왜 이런 식으로 자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장미 열두 송이를 보낸 거 있지?]

    [장미?]

    할리는 부러워서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도널리는 남자로부터 끔찍하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자신은 몇 시간 동안 시달리다가 결국 고속도로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니!

    [나 이 남자한테 빠진 것 같아. 정신을 못 차리겠어.]

    도널리가 털어놓았다.

    [나도 그래. 난 아직 만나 본 적도 없는데 말이지.]

    도널리가 깔깔거렸다.

    [데이트라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네가 바니의 삼촌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가 있어?]

    [바니가 해준 이야기 정도. 5년 전에 이혼을 해서 혼자 살고 있고, 의료 장비를 파는 일을 해서 출장이 많은가 봐. 하지만 이번 주말에 돌아온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바니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오늘 아침,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마브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화요일 아침에 전화 안 걸어 주면 널 어떻게든 찾아내서 입을 열게 만들 거야, 알았지?]

    도널리가 협박조로 말했다.

    [전화할게.]

    할리가 약속했다. 설마 마브보다 더 끔찍한 남자가 있을까.

    할리는 완전한 남편감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만족하고도 남았다. 마브와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눈높이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마 탄 기사가 그녀의 집앞으로 찾아오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가면서 할리는 돈을 찾으러 은행에 들렀다. 그녀의 현금 카드와 크레디트 카드는 유혹으로부터 안전하게, 맨 아래 서랍장에 고이 들어 있었다.

    옆집 남자에게 빚진 돈을 우선 갚으려고 할리는 차를 주차한 후 곧장 그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집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을 연 것은 케니였다.

    [안녕하세요!]

    [안녕, 케니. 아빠 계시니?]

    [네, 샤워 중이에요. 좀 기다리실래요?]

    [아빠를 꼭 만나지 않아도 돼.]

    그녀는 가방에서 20달러를 꺼냈다.

    [아빠한테 이것 좀 전해 줄래?]

    [알았어요.]

    [나한테 뭘 준다는 거야?]

    스티브가 청바지에 셔츠를 풀어헤친 채 맨발로 걸어나왔다. 목에는 수건이 걸려 있었고, 검은 머리가 물기로 반짝거렸다.

    [아, 할리, 안녕하시오?]

    [안녕하세요.]

    그녀는 간밤의 일로 좀 머쓱해서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아빠.]

    케니가 껑충 뛰어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할리 누나가 20달러 줬으니까 우리 피자 먹으로 가, 응?]

    [글쎄.........]

    스티브는 망설였다.

    [누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난.......안 돼.]

    할리는 어깨 너머로 텅 빈 자기 집을 바라보았다.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난 그냥 빚진 돈을 갚아 드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온 것뿐이에요. 어제 집에 안 계셨더라면 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글쎄, 어떻게든 하기야 했을 것이다. 서랍에서 은행 카드를 꺼내서........하지만 스티브 덕분에 시간도 절약했고 그런 귀찮은 고생도 면했던 것이다. 성난 택시 기사와 함께 현금인출기를 찾아 돌아다녔다면 그 꼴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아빠, 우리 피자 먹으러 가, 응?]

    케니가 기도할 때처럼 두 손을 모아 보이면서 다시 졸랐다.

    [아빠, 제발이야, 제발......]

    [그러지 뭐.]

    스티브가 웃으면서 할리를 쳐다보았다.

    [같이 가시죠. 사실 피자집에 가면 아이는 비디오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나 혼자 멀거니 앉아 있어야 하거든요.]

    할리는 마음이 흔들렸다. 달리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의 생활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같이 가요!]

    케니가 재촉했다.

    [좋아.]

    할리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대답해 버렸다. 치즈와 소시지에 올리브를 잔뜩 얹은 피자가 너무도 그리웠다. 두 달 동안 운동을 한데다 몇 주째 야채와 껍질 없는 닭고기 따위나 먹어 왔으니 이제 피자를 먹을 자격이 있다. 피자를 먹을 후 러닝 머신을 평소보다 1시간 더 타야 한대도 지금은 하여간 피자를 먹어야만 했다.

    금요일 밤이어서 피자집은 만원이었고 락 콘서트 장처럼 시끄러웠다. 스티브가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 줄을 서 있는 동안 할리는 아이를 데리고 빈 테이블을 찾아갔다.

    조금 뒤에 스티브가 청량음료 한 잔과 맥주 두 깡통, 그리고 25센트 동전 한 무더기를 가지고 왔다. 케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동전을 집었다.

    [12개만 집어.]

    스티브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로 오늘 밤은 끝이다. 알았지?]

    [네!]

    케니는 동전을 양손에 쥐고 껑충거리며 비디오 게임을 하러 사라졌다.

    스티브는 할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할리는 체크 무늬 냅킨을 무릎 위에 깔았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단 둘이 남은 것이 어색해져서 할리가 입을 열었다. 다시 보니 스티브는 첫인상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잘생긴 편이었다. 아마도 그가 선뜻 그녀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그의 매력을 더욱 상승시킨 모양이었다.

    [오히려 같이 와주셔서 내가 고맙습니다. 메리 린과 같이 살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이곳에 데리고 왔었죠. 아이는 좀더 자주 오고 싶어 하지만, 이렇게 혼자 앉아 있으면 쑥스러워서요.]

    [비디오 게임을 해보시죠?]

    [큰일 날 말씀을! 그건 영토 침해입니다. 아이들은 내가 거기 같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한 번 해봤다가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곤 다른 부모들처럼 여기서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라는 선고를 받았죠.]

    할리는 웃었다. 그가 전날 밤의 끔찍했던 데이트에 대해 더 물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그들은 일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했다. 날씨 이야기는 1분도 안 걸렸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스티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당신 같은 여자가 왜 그런

    한심한 놈을 만나고 다니죠?]

    할리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스티브한테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한밤중에 그것도 돈을 꾸어 달라고 집 앞에서 궁색한 꼴을 보이지 않았는가.

    [내가 남자를 만나려고 노력하는 건 눈치챘죠? 난, 그러니까,

    금년 안에 결혼을 하기로 결정했거든요.]

    그는 고개를 쳐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들은 그런 일을 '결정'해서 정합니까?]

    [모든 여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죠. 4월이면 서른 살이 되고 해서......]

    [서른 살이 뭐가 많습니까?]

    [알아요. 20대가 어떻게 가벼렸는지 모르겠어요. 일에 파묻혀 바쁘고 행복하게 살았죠.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했더군요. 결혼을 두 번이나 한 친구들도 있고요. 최근에 아빠가 돌아가셨고, 얼마 전에 동생이 엄마가 되었어요.]

    할리는 설명을 하려고 고전했다.

    [왜인지 몰라도 갑자기 모든 게 변하더군요. 내 목표 말이에요.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한 거죠. 내 인생을 같이 나눌 사람이 필요해요.]

    [그 답이 결혼이라 이 말이군요.]

    [그런 셈이죠.]

    할리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데이트를 했는데, 마브 같은 남자는 정말 처음이었어요. 적당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죠. 도널리는 쉽게 사람을 만났지만.]

    도널리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데이트라인에

    신청하는게 나을 듯싶었다.

    [몇 주 전 토요일에 왔던 그 친구 말입니까? 다리가 긴......아니, 키가 아주 큰 그 여자?]

    남자들은 도널리를 잘 기억했다.

    [맞아요. 도널리는 데이트 한 번 만에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났어요.]

    [그럼 아직 결혼을 안 했단 말입니까?]

    [네. 나한테 데이트라인에 접수하라고 한 친구가 바로 도널리였죠.

    도널리는 접수를 했고, 대번에 그 꿈 같은 남자를 만난 거예요. 그 친구 말로는 괜찮은 남자 같더군요.]

    할리는 목소리에 부러움이 배어나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 결혼을 할 것 같아요.]

    [사람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스티브가 할리의 말을 되풀이했다. 할리는 스티브가 그 말 외엔 들은 말이 없는 게 아닌가 의아했다. 스티브는 자기가 딴 데 정신을 두고 있었음을 깨닫고 사과의 시선을 보냈다.

    [방금 하신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혼한 제 아내도 지금 어떤 남자와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는 말을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당신이 어제 만난 그런 녀석이나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죠. 그럼 당장에 다시 합치자고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럼 전부인과 다시 잘 되기를 바라는 건가요?]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리로부터 설전이 올 것을 기다리는 듯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존경스럽군요.]

    할리는 요즘 이혼으로 파탄나는 가정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정을 온전하게 지키고 싶어하는 스티브 같은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할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파지가 나오자 부리나케 케니가 달려왔다. 할리는 그렇게 큰 피자는 처음이었다. 페파로니, 소시지, 버섯, 검은 올리브. 할리가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했다. 모두들 커다란 피자 조각에 정신을 파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배불리 먹고 나서 스티브는 남은 피자를 담을 상자를 가지러 갔다. 케니가 할리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가 같이 와서 좋아요.]

    [네가 같이 가자고 해줘서 나도 좋아.]

    [난 여기가 좋은데, 엄마가 없으니까 아빠 혼자 심심해서 자주 못와요.]

    케니가 아빠 걱정을 하는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린 소년이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할리는 케니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합쳤으면 좋겠구나.]

    할리가 말했다.

    [너의 아빠는 엄마를 정말 사랑하시더구나.]

    [알아요.]

    순간 케니의 눈이 흐릿해졌다.

    [엄마는 킵 아저씨하고 데이트를 하고 있어요. 아빠도 알아요. 난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아빤 벌써 알고 있어요. 엄만........나도 몰라요, 하지만 엄만 아빠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아요. 엄만 킵 아저씨를 아주 좋아해요. 내가 아빠 이야기를 하면 막 화를 내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했다가 그 사랑이 식을 수 있는데, 엄마와 아빠가 바로 그런 가라고 했어요.]

    할리는 케니가 이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하는 것에 약간 불편해졌다.

    [모든 일은 다 순리대로 잘될 거야.]

    할리는 케니를 위로하고는 싶었지만 행여나 잘못 말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케니는 부모가 다시 합치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 말 맘에 들어요. 순리대로 잘될 거라는 말이요.]

    미소가 번지면서 케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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