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5화 (5/29)

5. 총각 No. 1

2월 20일

오늘이 그 날이다. 마빈을 만나는 날. 이런 식의 미팅에 기대를 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남자가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여자로 탈바꿈하기 위해 그렇게 공을 들였으니.....

마빈은 클링프행어 레스토랑으로 데려갈 것이다. 좀 놀랐다. 내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약간 흥분이 된다. 그것도 리타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라니! 도널리는 2천 달러나 바친 데이트라인에 만족해하지만 난 나 혼자 힘으로 데이트를 하고 싶다. 아직 마빈을 만나 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마브, 두어 번 전화로 이야기를 해봤는데, 재미있는 남자 같았다.

지난 6년을 완전히 혼자서 보낸 건 아니다. 데이트도 해봤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남자를 남편감 그리고 내 아이의 아버지감으로 생각하고 재본다. 내가 남자한테서 바라는 것은 책임감이다. 결혼은 한 번으로 족하고 선택을 잘해야 한다.

그 여행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모르지만.....마브와의 데이트는 이 여행의 시작이다. 지금 내가 무슨 시를 쓰고 있지?

내일 마브를 만난 후에 다시 써야겠다. 미타가 날 잘 파악했기를 바라는 수밖에...

할리는 리타를 죽이고 싶었다. 문을 열고 마브를 만나는 순간부터 미심쩍다 했더니, 우선 생긴 모습이 리타가 말한 것과 달랐다. 숀 코널리라니. 체크 무늬 나비 넥타이까지 하고 있었다.

마브 역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타가 할리에 대해서도 엉뚱한 말을 했던 것이 분명했다.

[할리 맞죠?]

마브는 할리의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확인했다. 그리고는 가구의 값을 매기는 감정사처럼 집 안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는 키가 작았다.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리타는 그 말을 해 주었어야 했다. 힐을 신지 않은 상태에서도 할리가 5센티미터는 족히 더 컸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매너가 더 문제였다. 할리를 처음 보았을 때 미소를 지었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그는 단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감정하듯이 뜯어보았다.

[나가기 전에 포도주 한 잔 할래요?]

첫인상이 틀렸기를 바라며, 최소한 새 옷을 사는 데 들인 100달러의 본전이라도 뽑으려면 노력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물었다. 게다가 그는 비싸서 잘 가지 못하는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갈 거니까. 클리프행어로 초대하는 남자라면 그래도 좀 수준있는 남자가 아닐까.

그는 할리가 권한 포도주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운전을 해야 합니다.]

[그럼, 커피는 어때요?]

[디카페인으로 주십시오.]

그녀가 그의 커피와 포도주 한 잔을 들고 돌아오자 그는 못마땅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저녁을 견디려면 그녀는 포도주가 필요했다. 아예 병째로 들고 가야 하지 않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의 기분을 낫게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기분은 낫게 해줄 테니까.

[리타의 남편이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한다면서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타의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어........네, 맞아요.]

[서로 안 지가 얼마나 됩니까?]

그는 양복 재킷 안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리타요?]

그녀는 왜 그런 것이 메모를 해둘 정도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없어 얼굴을 찡그렸다.

[오, 여러 해 됐어요. 대학에 다닐 때부터 알았으니까 한 9, 10년 됐겠죠.]

[그렇군요.]

그리고 그는 수첩에 끄적였다.

[나이는 어떻게 되시죠?]

[스물 아홉 살이요.]

할리는 숨을 고르기 위해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결혼하신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그 쪽은요?]

그녀는 이를 악물면서 질문했다. 이건 가히 취조에 가까웠다.

그는 할리의 질문을 무시해 버렸다.

[그래픽 회사를 경영하신다고요?]

[그래요.]

신용카드 신청서를 작성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건 왜 묻죠?]

[데이트를 하려면 적어도 그 여자의 배경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아.......그렇군요.]

그렇다면 체중이 얼마나 나가는지나 물어 볼 것이지.....

평생 처음 그녀는 자신의 체중을 남에게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수첩을 닫고 커피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총점 7.5점을 드리죠.]

[지금 나를 점수 매긴다는 건가요?]

그녀는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 분개했다. 만난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내가 데이트하는 여자는 모두 점수를 매기니까요.]

그는 느닷없이 싱긋 웃고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 번 해보세요.]

할리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는 반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웃어 보세요.]

그녀가 요구했다.

그는 순순히 그렇게 하고는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할리는

그가 수줍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런 질문과 평가와

불쾌한 태도 뒤로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할리는 그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그는 할리가 코트 입는 것을 도와주고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신사다운 매너에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고속도로로 진입했고 짐작대로 마브는 조심스러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그때 엔진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마브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이나 엔진 소리를 못 들은 시늉을 했다.

[차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요.]

할리가 다그쳤다.

그는 그녀를 향해 이글거리는 시선을 쏘았다.

[내 차는 완벽한 상태입니다.

[물론 차 관리를 잘하실 줄은 알아요.]

그녀가 달래듯이 말했다.

[좀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것뿐이죠.]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이었건 간에 그들은 예약 시간 5분 전에 도착했다. 마브가 엔진 이상을 무시하기로 했다면 할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클리프행어는 타코마의 코멘스먼트 만을 내려다보는 높은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모든 것이 일류급이었다. 할리는 흡족해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고 나자 마브는 주머니에서 펜과 수첩을 다시 꺼냈다. 그는 메모한 내용을 죽 일고 나서는 말을 이었다.

[몇 가지 더 물어 볼 게 있습니다.]

[더요?]

그녀는 이제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가능한 빨리 끝내도록 하죠.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나중에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이 되거든요.]

결정을 내릴 때? 이 남자는 내가 결혼하자고 응모라도 한 줄로 생각하는 건가?

[결정이라니, 무슨 결정 말이죠?]

[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감정보다는 현실에 입각해서 아내를 고르고 싶습니다. 감정은 믿을 게 못 되니까요. 결혼은 장기 계약이므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아하니 할리 당신도 결혼에 뜻이 있는 것 같으니, 오늘 저녁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겠죠.]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리, 당신은 성격이 좋아요.]

그 말을 하면서 그의 귀가 빨개졌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당신은 아주.......매력적입니다.]

칭찬을 듣자 할리는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지만 그가 이 데이트에 대해, 그리고 결혼 문제에 대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접근하다니 놀라왔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도 나쁘진 않습니다.]

그의 말은 방금 그가 딴 점수를 순식간에 깎아 내렸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니요?]

정말 웃기는 말이었다.

[자영회사 사장이 아닙니까? 그 사실이 벌써 다른 여자들보다 몇 점 앞서게 해주는 거죠.]

[다른 여자들이 정확히 몇 명이죠?]

[그건.......어.........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곱게 접혀 있는 컴퓨터 출력지를 펼치면서 미소지었다.

[자, 그럼, 이제는 가족에 대해 물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구요?]

[병력이나 뭐 그런 거 말입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중요한 일이니까요.]

[좋아요, 좋아.]

이제부터 긴 인터뷰의 시작이라는 사실에 체념하듯 할리가 중얼거렸다. 다행히 바로 그때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할리는 웨이터에게 포도주 한 잔을 주문했다. 마브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뭐라고 끄적였다.

[뭘 알고 싶으시죠?]

심장병, 알콜중독, 그리고 정신질환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즈음 샐러드가 나왔다. 이제 앙트레 요리가 나오기까지도 멀지 않았다! 그녀가 채 한 입을 맛보기도 전에 그는 성병과 가임 여부, 어린 시절의 병에 대해 물어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할리는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 자식은 수줍음을 타는 것도 수첩과 펜 뒤에 자신을 숨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팬티 스타킹 사이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계산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두 손을 쳐들었다.

[그만 하세요!]

[그만 하라구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이젠 지쳤어요. 전 저녁을 같이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데이트를 하는 줄 알고 나왔어요.]

[아, 맞아요. 질문을 해서 당신에 대해 알아가는 겁니다.

그게 뭐 잘못입니까?]

그는 분주히 수첩에 무엇을 또 갈겨썼다.

[지금 뭐라고 쓴 거죠?]

할리는 물었다.

[태도입니다. 태도 면에서는 좀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할리는 아직 절반도 손대지 않은 샐러드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난 더 이상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어요. 이런 경우는 없는

거예요. 여자는 자기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는 남자를 원하는

것이지, 자기 유전자 때문에 좋아하는 남자를 원하지는 않아요!]

그녀가 성질을 폭발하자 그는 놀란 것 같았다.

[할리, 당신이 바로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상태에선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할아버지 신경통 이야기나 하면서 오늘

저녁을 보낼 생각은 없어요.]

이쯤에서 끝내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미안해요, 마브. 우린 안 될 것 같군요.]

[나라면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하진 않겠소. 태도는 좀 문제가

있지만 그 외에는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 우리가 좀더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그때 가서는 내가 이런 수고를 한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게 될 겁니다.]

[난 이미 결정했어요. 애석하게도 우린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나왔군요.]

할리는 그가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나 역시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잘 될

수가 없겠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네.]

더욱 강조하기 위해 할리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마브는 눈도 껌뻑하지 않았다. 그는 수첩을 닫아 재킷 호주머니 안에 넣고 컴퓨터 출력지를 접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빨리 결정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겠소. 공연히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오.]

할리는 참고 있는 자신이 대견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마브가 다시 수첩을 꺼냈다. 이번에는 무슨 숫자를 적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할리는 물어 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눈을 들었다.

[혹시 궁금하다면, 100점 만점에 당신의 첫 인터뷰 성적은 76점이오.]

[정말이요?]

이런 건 확실히 알아 두었다가 다음번에 만날 남자에게 말해 주리라.

[하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오. 우린 안 되겠군요.]

저녁 식사가 나왔다. 할리는 침묵이 연어 요리만큼이나 감미롭게 느껴졌다. 마브 역시 식사를 즐기는 것 같았다. 스테이크와 해물 요리로 유명한 식당에 와서 그는 하필 간요리를 시켜서 먹었다.

디저트를 사양하고, 할리는 이제 순번을 바꾸어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로 결정했다.

[당신 가족의 병력은 어떻죠?]

그의 집안에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한두 명 있었다 해도 놀랄 것 같지 않았다.

[완벽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90세까지 사셨습니다.]

[가족들이 장수하는 편인가요?]

[엄마 쪽으로 그렇죠. 아버지 쪽은 잘 모르겠습니다.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오자 마빈이 그것을 잡아챘다.

[우리 아버지 쪽 식구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는 그 사정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설명은 10분도 넘게 계속되었고 할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하품을 했다.

마빈은 그대로 말을 멈추고는 소형 계산기를 꺼냈다.

[게살 버섯요리를 몇 개 먹었습니까, 세 갭니까, 네 갭니까?]

[세 개요.]

[확실합니까?]

[그걸 정확히 세면서 먹어야 하나요?]

[그럼요.]

그는 오히려 그런 걸 물어 보는 것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먹은 건 45달러 13센트가 나왔군요, 팁을 포함해서.]

[내가 먹은 거라니요?]

[우리가 안 될 거라고 했잖소?]

[그래요, 하지만.......당신이 먼저 식사를 하자고 했잖아요.]

[그건 사실이오. 그렇지만 이 데이트는 결혼을 추구하는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오. 당신은 결혼할 마음이 없소, 따라서 오늘 저녁 식사비 중 당신이 내야 할 돈은.....]

그는 잊어버린 듯 다시 계산기를 내려다보았다.

[45달러 13센트요.]

할리가 대신 말해 주었다.

[그건 당신 몫의 팁을 포함한 액수요.]

역겨움마저 느껴진 할리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싸워 봤자 달라질 것이 없었다. 다행히 20달러 짜리가 두 장에 비상시를 위해 감추어 둔 5달러도 있었다. 나머지 13센트를 긁어주고 나니 그야말로 그녀의 지갑은 바닥이 났다.

더 할 말도 없던 두 사람은 곧 레스토랑을 나왔다.

레스토랑 직원이 차를 대기하기 한참 전부터 할리는 그 엔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저 철컹거리는 엔진 소리를 무시하려는지 궁금해서 마브를 힐끗 쳐다보았다. 과연 예상대로 그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할리는 아무 말 없이 차 안으로 들어가 불안한 드라이브를 각오했다. 그들의 차가 고속도로 진입로에 이르렀을 때쯤 엔진의 소음은 점점 커져서 급기야는 마브도 그 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그게 뭐지?]

마치 엔진에서 그런 소음이 나는 것이 할리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이 그가 물었다.

[차요?]

그녀는 냉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게 차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

[무슨 걱정이에요. 당신의 차는 완벽한 상태라면서요, 기억나요?]

[맞았소. 잘못된 게 있을 수가 없어.]

그는 욕을 내뱉으면서 차를 고속도로 한편으로 댔고 후드 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맙소사.]

할리는 신음을 했다. 이건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견인 비용도 할리에게 절반을 내라고 할 것 같았다.

마브는 주먹으로 운전대를 내리쳤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나 보쇼!]

[내가 무슨 짓을 하다니요?]

정말이지 그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이 차에 오일을 교환한 지 얼마나 됐죠? 튠업은? 이번 겨울에 결빙은 해뒀나요?]

마브는 차 밖으로 나가며 문을 쾅 닫았다.

할리도 그보다 더 세게 문을 쾅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후드 너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재미있으라고 한 말인가 본데 내가 볼 땐 하나도 재이없소.]

[오늘 밤에 가장 재미있었던 일은 당신 같은 남자하고 데이트를 하겠다고 한 일이었어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자 할리는 손을 코트 주머니 안에 넣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새로 산 드레스와 색이 잘 맞는다는 이유 때문에 홑껍데기에 불과한 얇은 코트를 입었다. 울 코트는 옷장 안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그녀는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분노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효과도 괜찮았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멀쩡했었단 말이오!]

[그럼 내가 이 자동차를 고장냈단 말인가요?]

[누가 압니까?]

할리는 분이 나서 씩씩거리며 팔짱을 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남자예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입술을 물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댁까지 혼자 찾아가시는 게 좋겠소.]

마빈은 뻣뻣하게 말했다.

[얼마든지요!]

할리는 아무렇게나 말을 뱉어내고, 이사도라 덩컨처럼 스카프를 목주위에 던져 걸치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음을 할리는 곧 깨달았다.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왔고, 지나치는 자동차 불빛에 앞이 안 보였다. 게다가 젠장할 하필이면 이럴 때 하이힐 한쪽이 부러질 건 뭐람.

다행스럽게도 최소한 비는 오지 않았다.

벨 소리에 스티브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자명종 소리라고 생각하고 스위치를 더듬어 눌렀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댔다. 어렵게 뜬 눈으로 들어온 시간은 11시 30분. 도대체 이 시간에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일어나 앉았다. 이 집요한 소리는 자명종 소리가 아니라 초인종 소리였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그를 찾아올 사람이 이웃집 여자일 거라는 생각은 정말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청바지를 입으면서 거실로 나갔다.

[깨워서 미안해요.]

희미한 현관 불빛 아래에서 절박한 눈으로 할리가 속삭였다. 그녀의 뒤에 거칠게 생긴 남자 하나가 서성거리고 있었고, 집 앞에 택시가 서 있었다.

[20달러만 꿔줄 수 있어요?]

그녀는 애원조로 말했다.

[내일 저녁까지 갚을게요.]

[그럼요.]

그는 바지 뒷주머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내주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택시 기사에게 그 돈을 건넸다.

[자, 받아요. 줄 거라고 했잖아요!]

그녀는 화난 목소리였다.

[말 탓하지 말아요. 벌써 몇 번이나 속았단 말입니다.]

[하여간 고마워요.]

택시 기사는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다음번에 또 어떤 놈이 고속도로에다 버리고 가버리면 전화하십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테니.]

[고마워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스티브 쪽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택시 기사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는 설명했다.

[그 정도로 나쁜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녀는 불안하게 떨리는 한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내일 퇴근해서 같아 드릴게요. 얼마 전부터 크레디트 카드를 안 가지고 다니기로 한데다 현금 카드도 없었지 뭐예요. 저녁 식사 값 절반을 내고 나니까 돈이 한 푼도 안 남았어요.]

[걱정 마십시오.]

[내일 꼭 돌려 드리겠어요. 정말 꼭이요.]

그는 빙긋이 웃었다.

[걱정 말리나까요.]

[제 자존심 문제거든요.]

그녀는 뒤로 돌아 자기 집 쪽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그제서야 그는 할리의 구두 굽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았다.

[할리?]

그가 외쳤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들어와서 커피 한 잔 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래요?]

할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스티브는 그녀가 망설이고 있음을 눈치챘다.

[괜찮으시다면, 그 커피 다음 기회로 연기할게요 난 정말 괜찮아요. 데이트가 잘 안 된 것뿐이에요.]

[데이트라인에서 해준 거요?]

[아니요. 데이트라인은 안 하기로 했어요....이건 친구가 해준 거였어요. 이젠 친구도 아니지만.]

그녀는 잠깐 동안 푸념을 늘어놓았다. 마브가 해댄 질문들과 식사 요금과 차 사건에 대해서, 그는 동정어린 눈으로 조용히 들어주었다. 이따금 고개도 끄덕여 보이며, 그녀가 그런 상황을 웃어넘길 수 있는 것에 감탄했다.

[낙심하지 말아요.]

그가 위로했다.

[낙심 안 해요.]

헝클어진 머리에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까짓 멍청한 회계사 한 명 가지고 낙심할 내가 아니죠.]

[좋아요.]

그는 할리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그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할리 매카시는 여장부였다.

[뭐가 그렇게 우습나?]

다음 날 아침 타드가 스티브에게 물었다.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스티브는 친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철 부속 더미 위에 몸을 기대면서 물었다.

타드의 말은 옳았다. 그는 기분이 한결 좋아져 있었고 그건 할리 때문이었다. 할리와 그 못된 회계사 생각을 할 때마다 우스워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데이트다 뭐다 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전처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다만 메리 린이 할리가 차버린 남자들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메리는 스티브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그렇게 바보처럼 웃고만 있으니 말이지.]

타드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그럼 무섭게 쾅쾅거리며 뚱해 가지고 다니면 좋겠단 말인가?]

[아니.]

타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점심이나 할까?]

[좋아.]

스티브는 출근길에 제과점에 들러 점심거리를 사들고 오곤 했다. 그와 타드는 사무실 옆에 붙은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는 새로 온 비서 애플게이트에게 점심을 먹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새로 온 비서는 어느 비즈니스 대학을 통해 찾았는데 일을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스티브보다 나이가 더 많았고, 이 일을 좋아했으며 열심히 일했다.

[커피 좀 드릴까요?]

그녀가 물었다.

[좋아요.]

[저 여자 때문에 이제 자네 버릇 나빠지겠어.]

타드가 스티브 앞자리에 앉아 도시락통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포장을 벗겨냈다.

[좋지 뭘 그래.]

대니얼이나 메리 린과는 달리 애플게이트는 모범적인 비서의 원형이었다. 조직적이고, 능률적이며, 협조적이었다. 지금까지 그녀 없이 어떻게 일을 해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자, 이제 말해 보게.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야?]

타드가 다시 물었다.

[나도 좀 같이 웃어 보게.]

[우리 옆집에 이사온 여자 말이야.]

스티브는 못할 이유도 없다고 결론 짓고 말을 꺼냈다.

[아마 남편감 사냥을 하고 있는가 봐.]

[어떻게 생겼어?]

[왜? 관심있어?]

타드는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물어 씹으면서 뭐라고 대답을 할지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

[자네가? 여자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할 땐 언제고?]

[모든 여자한테 관심없다는 게 아니었지. 하여간 계속해 봐.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어젯밤에 자고 있는데 11시 반에 나를 깨워가지고는 20달러만 빌려 달라는 거야. 엊저녁에 데이트를 했던 녀석이 저녁 내내 역겹게 굴더니 저녁값까지 내게 했다더군. 그뿐만 아니라 자동차에 이상이 생긴 걸 할리의 탓으로 돌리고는 혼자 집에 가라면서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버려두고 가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했대.]

[잘했군.]

[나도 그렇게 말했어.]

할리 생각을 하자 그는 또다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사십 몇 달러인가를 내라고 하는 마브 흉내를 기가 막히게 냈다.

[옆집 여자를 좋아하는군. 그렇지?]

[좋아한다고? 그게 무슨 뜻인가?]

물론 그는 할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여자로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데이트 신청 해볼 건가?]

[아니, 내 타입이 아냐.]

[자네 타입은 어떤 건데?]

[알면 좋게.]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메리 린밖에 없었다. 메리 린은 그가 원하는 전부였고, 그가 생각했던 전부였다.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대답에 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 역시 앞으로 데이트를 할지 안 할지 모르겠어. 확실한 것은 내가 좀 심각해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긴다는 거야. 지난번에도 그랬거든. 누굴 만나는 거야 좋지만 내 길에서 벗어나진 않겠어.]

스티브는 타드의 말을 들으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메리 린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케니 말에 의하면 데이트를 해온 것도 꽤 된 모양이었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

식욕을 잃어버린 스티브는 샌드위치를 한 옆으로 치웠다.

[메리 린이 누구를 만나고 있어.]

[알아, 지난번에 이야기했잖나. 이제 이혼한 지도 1년이 넘었어. 어쩌겠나?]

[시간이 지나면 눈이 뜨일 줄 알았더니만.]

스티브가 중얼거렸다.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

[자네 언제부터 우리 관계에 전문가가 되었나?]

스티브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타드는 스티브가 이혼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스티브가 메리 린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혼식을 올리던 그때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드는 화가 난다는 듯이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만두세, 그럼 됐나? 내가 공연히 주제 파악을 못하고 끼어들었어. 자넨 앞으로 죽을 때까지 메리 린만 바라보면서 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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