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4화 (4/29)

4. 처음엔 폴, 그 다음엔 조지

방금 저에 봤다는 걸 알면서도 스티브는 또다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일요일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데 메리 린은

아직까지도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엔 없었다.그 킵인지 뭔지 하는 놈팡이와 같이 있는

것이다.

스티브는 메리 린이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인정하게 했다. 그것이 스티브와의 섹스를 거부한

이유였다. 스티브가 코너로 몰지 않았다면 끝까지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리 린에게 비서 일을 부탁한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메리 린은 대니엘보다 열 배는 더 형편없었다. 그녀가

컴퓨터를 잘 못 다룬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전화받는 것도 제대로 못할 줄은 정말 몰랐었다. 며칠 더

있다간 회사 업무가 완전히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녀는 송장을

부치는 게 아니라 얌전하게 파일에 철을 해두었고, 가장

큰 거래처 한 사람에게 모욕을 주고 말았다.

스티브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새 비서를 즉시 채용했고, 메리 린에게는 수고비로 후한

수표를 써주고 점심까지 사주었다.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이제 섹스는 끝났다고 했음에도 --그가 그 시간에

집에 들릴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집에 도착하는 순간

두 사람이 침실로 직행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그러나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일단 다시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자 그녀는

술술 털어놓았다. 그녀는 킵을 책방에서 만났다고 했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스티브는

전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괜찮은 남자를 찾아서 책방을 간 것이었다. 스티브는

독신남녀들이 모이는 곳으로 이전에는 바가 인기였지만 지금은

책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보아하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메리 린은 새 애인을 만난 일에 대해서는 열을 내면서 말했지만,

둘이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케니에게로 옮겨갔다. 아이는 텔레비전 앞에서

디즈니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엄마가 늦는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고 또 상관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거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할리가 밖에서 진공청소기로 자동차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녀가 데이트라인과 연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 당황하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흠, 할리 매카시가 남자 사냥에 나섰단 말이지....

그는 잘되기를 바랐다. 아이를 통해 들은 바로 미루어 보면, 할리가 남편감을 찾는 일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할리는 귀여운 여자였다. 작고, 짙은 갈색 커트 머리에, 인상도 좋고, 부담 없고 다정한 성격인 것 같았다. 몸매 또한 괜찮았다.

할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두어 번 아침에 마주쳤을 때는 프로 직업여성 차림이었다. 나이는 아마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만약 스티브가 데이트에 관심이 있다면 할리보다는 그녀의 친구에게 더 끌릴 것이다. 그 친구는 그가 밖에서 케니와 놀고 있을 때 처음 보았는데 순간 그는 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여자는 온몸이 다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다리와 잘 어울리는 몸매. 하지만 메리 린도 아름다웠다. 생각이 다시 메리에게로 돌아가자 스티브는 창가에서 떨어졌다.

[엄마가 늦는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킵 아저씨가 엄마를 데리고 포도주 시음 파티에 간다고 했었어.]

케니가 말했다. 그리고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눈이 커다래졌다.

[괜찮아. 킵 만난다는 이야기 엄마한테 들었어.]

스티브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하면 안 되는지 가리고 신경써야 되는 것이 정말 싫었다.

[엄마가 킵 아저씨 이야기를 했어?]

그 사실이 케니에겐 놀라운 모양이었다.

[그래.]

그는 아이 옆에 앉아서 한 팔로 어깨를 안았다.

[엄마가 다시 데이트를 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지?]

그가 킵 때문에 속이 뒤집혔다면 아이도 분명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에겐 언제나 믿음직한 아빠로 남고 싶었다.

[아니.]

케니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전에도 많이 했는걸.]

그랬던가? 이건 스티브에겐 금시초문이었다.

[처음엔 폴 아저씨, 그 다음엔 조지 아저씨.]

링고는? 스티브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하고도 오래 가지 않았어.]

케니가 고맙게도 덧붙여 주었다.

[킵은?]

스티브는 이 말을 뱉은 순간 후회했다.

[엄마는 킵 아저씨를 정말로 좋아해.]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것 역시 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스티브는 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좋다, 전처--의 애인이었고, 결국에는 아이도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케니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야구를 잘 몰라.]

그 말에 스티브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킵은 메리 린을 포도주 시음 파티에 데려갔다고 했다. 스티브도 포도주를 좋아하기는 했다. 하지만 뱉어내기보다는 마시는 편이 더 좋았다. 포도주 시음장에서 하는 게 그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결혼 생활 20년 동안 그는 메리 린을 그런 곳에 데리고 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메리가 그런 일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메리의 마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포도주를 뱉어내는 일도 기꺼이 하리라.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벌떡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메리 린이 자동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하려던 말이 혀 끝에서 멈춰 버렸다. 메리 린도 시계는 볼 줄 알았다. 자기가 늦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공연히 그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서 안 그래도 벌어진 두 사람의 사이를 더 벌어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다리를 만들고 싶었지, 부수고 싶지는 않았다.

[오후 잘 보냈어?]

그는 그녀가 킵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물었다.

[아주 잘 지냈어요. 당신은요?]

[나도 아주 잘 지냈어. 케니는 이제 엄청난 유격수가 될 거야.]

메리 린은 웃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그녀는 그를 지나 콘도로 시선을 보냈다. 케니가 문앞에 나와 있었다.

[준비 다 됐니?]

[좀 들어가지 그래?]

스티브가 말했다.

[집안을 꾸민 후론 아직 구경 안 했지?]

메리 린은 코웃음을 쳤다.

[거실에서 빨래를 치운 것을 꾸몄다고 할 순 없죠.]

[왜 그래, 소파하고 의자도 들여놓았다고. 식탁 세트도.]

[들었어요. 테라스의 가구와 카드 테이블을 치운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요. 잘한 일이에요.]

그녀는 케니에게 손짓을 했다. 아이는 가방을 들고 그의 옆으로 걸어왔다.

스티브는 아이에게 쪽 소리나게 뽀뽀를 했다.

[아빠, 안녕.]

그의 가족은 자동차에 올랐다. 스티브만 빼고. 그는 길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두 손을 바지 호주머니 속에 넣은 채 우두커니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그는 힘없이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도널리는 눈에 띄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샌포드라는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싫어서였다. 이렇게 먼저 와 있으면 그가 모르게 몇 분이나마 먼저 그를 평가해 볼 수가 있었다.

13년이 지난 후에 도널리는 드디어 다시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남자들을 만나고 사귀고 연애를 하는 모든 과정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시 사랑에 빠지려면 자기 방어를 늦추고 상처를 받을 각오도 되어 있어야 했다.

바로 그 점이 가장 겁나는 부분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여기까지 왔다. 전보다 노련해졌고, 출세도 했다. 이제는 성숙해진 것이다.

이런 점들이 샌포드의 마음을 끌었다. 전화로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출입구가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사진으로 본 그는 매력적으로 생긴 검은 머리의 남자였고, 강한 고전적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익히 알다시피, 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들이란 실제와는 전연 다를 수가 있으니까........

시애틀 중심지에 있는 이 고급 멕시코 식당은 샌포드가 고른 것이었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군침나는 냄새로 미루어 탁월한 선택인 것 같았다. 비록 도널리가 음식을 한 입이라도 삼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키가 훤칠하고 품위있게 생긴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머뭇거렸다. 도널리는 얼른 무릎 위에 두었던 안경을 집어썼다. 바보처럼 마지막 한 개 남아 있던 일회용 콘텍트 렌즈를 욕실 하수구에 빠트려 버리는 바람에 하필이면 이런 날 구닥다리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샌포드 역시 그녀를 사진으로 보았으므로 그녀가 안경을 쓴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꼭 필요할 때만 쓰기로 했다.

그는 레스토랑 주인과 잠깐 이야기를 하더니 그녀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도널리는 안경을 다시 무릎 위로 내려놓고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침침한 눈으로 봐서 더 멋있어 보이는 게 아닐까.

그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도널리?]

[샌포드?]

그가 천천히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도널리는 그제서야 한숨을 놓았다.

[사진이 잘 안 나왔었군요?]

[그쪽도 마찬가지로군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 밤은 도널리에게는 평생 가장 황홀한 밤이었다. 몇 시간 후 할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도널리는 아직도 꿈 속에 잠겨 있었다.

[너무 멋있어, 할리. 어쩜 그런 사람이 다 있다니. 대화가 끊이질 않았어. 그 레스토랑에 12시까지 있었다니까. 문을 닫아야 한다고 쫓아 내길래 나오긴 했는데 헤어질 수가 있어야지. 다른 데로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더 얘기했어.]

[지금 몇 시야?]

할리가 소리내어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할리는 세 번씩이나 도널리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오는 즉시 전화를 하라는 메시지를 남겨 놓았었다.

[2시.]

[지금 들어왔단 말이야? 처음 만난 남자하고 그렇게 늦게까지 있어도 되니?]

[알아.]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도널리는 아쉬운 내색을 비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지금 그 남자랑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할리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작아졌다.

[아냐. 날 어떤 여자로 보는 거니?]

[어쨌거나 그렇게 오래 같이 있었잖아! 생각했던 것만큼 좋던?]

[기대 이상이야, 할리.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따뜻하고,

우아하고, 로맨틱하고, 게다가 얼마나 재미있다구.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안 났을 거야. 우린 부두를 걸었어. 손을 잡고.]

[키스도 했어?]

[응........사실은 래리 이야기까지도 해버렸어.]

이혼 이야기는 도널리가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꺼내지 않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첫 번째 데이트에서 하려던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말로 하지 않는 것까지도

잘 간파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쥐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에 머리가 날렸고, 검은 파도 위를 배가 미끄러지고 있었다. 배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칠흑 같은 밤과 대조되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자기와 눈이 마주치게 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너무나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도널리는 키스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또 만나기로 했어?]

[내일. 아니, 오늘.]

도널리는 이번에는 조심하기로 했고 또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이남자가 좋은 걸 어쩌란 말인가.

겁이 날 정도로 좋아진 것을.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나고 있었다.

[너 정말로 홀딱 빠졌구나?]

할리는 약간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도널리는 그것을

이해했다. 할리가 자신의 행복을 시기할 친구가 아닌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가 이렇게 쉽게 짝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넌 어떻게 됐어?]

도널리가 물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을 때, 할리는 리타의

남편 친구를 만나기로 한 상태였다. 리타 말로는 할리와

천생연분이라고 한 남자였다.

[마브가 전화했니?]

[정확히 7시에.]

[리타가 말한 시간이었지?]

[맞아. 그래서 걱정이야. 무슨 일이든 제시간에 딱딱 맞춰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 같은 인상을 받았거든.]

[그 사람은 회계사야. 그러니 당연하지 않니? 그래, 얘기해

보니까 어때?]

할리는 깔깔 웃었다.

[정말 회계사답더라. 다음주 목요일 밤까지 시간이 꽉 차

있다더라.]

[세금 신고하는 기간이라서 그래.]

도널리가 참고 조로 말했다.

[몰라. 하여간 이 마브라는 이름부터가 고리타분한 것 같아.]

[만나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나도 샌포드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졌었잖아.]

[이름을 정말 샌포드라고 불러?]

[아닌가 봐. 어렸을 때는 친구들이 샌디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그런 약칭이 어울리지 않아. 샌디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그 사람 샌디 같진 않거든. 샌포드가 어울려.

중후한 이름이잖니? 마브도 그래.]

[마브.......]

할리는 천천히 되뇌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괜찮은 것도 같다.]

[그래.]

할리가 2천 달러를 내지 않고도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서로 거론하지 않았다.

[둘이서 얼마나 이야기를 했어?]

[1분. 기껏해야 2분? 약속이 있다더라.]

도널리는 할리가 뚱한 것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너무 속단하지 마. 만나 보면 괜찮을지도 모르잖아.]

[난 왜 그 말이 기대가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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