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웨딩-2화 (2/29)

2. 깨지는 아픔

스티브 매리스의 하루는 엉망이었다. 발송한 부품이 중서부 어디에선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비서는 사전 통보도 없이 그만두어 버렸다. 거기에다 이혼한 전처가 다시 데이트를 시작한 것 같았다. 부품 선적은 조만간 어디서든 찾게 될 것이고, 비서도 다시 구하면 되었다. 하지만 메리 린에 대한 소식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는 잔에 커피를 따랐다. 유리 주전자를 닦은 지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다음번 비서는 제대로 된 여자를 고르리라. 이번에 그만둔 비서는 자기는 비서 업무를 하기 위해 고용된 것이라면서 커피 끓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비서 업무나 잘 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면 또 모르겠다. 여기서는 자기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만두어 준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인상을 찌푸렸다. 타드 스태프의 솜씨가 분명했다. 생산부장 타드 스태프는 세상에서 커피를 가장 못 끓이는 인간이었다. 스티브는 커피를 쏟아버리고 머그잔을 헹군 다음 책상에 앉아 잔뜩 쌓인 서류들을 뒤적여 인보이스를 찾아냈다.

타드가 문을 열었다.

[대니엘이 나갔다고 하루 종일 여기 앉아서 씩씩거리고만 있을 건가?]

며칠 전에 그만둔 비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나아.]

타드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커피잔을 찾아 커피를 따랐다.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대니엘 때문이 아니라면 그렇게 뚱한 게 메리 린 때문이겠군?]

그의 친구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데이트를 하고 있대.]

[누구한테 들었어?]

[케니.]

스티브는 하는 수 없이 인정했다.

[아이를 을러 전부인에 대해 알아내고 있는 거야?]

[그럴 리야 있겠나.]

스티브는 약간 자책이 들었다.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 엄마가 데이트를 하고 있냐고 의도적으로 물어 본 것은 아니었다. 케니는 봄에 소프트볼 팀에 들어가 유격수를 맡을 생각에 신이 나서 말을 꺼냈다. 연습을 하려고 엄마한테 공을 던져 달라고 했더니, 엄마는 데이트에 나갈 준비를 하느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대목부터 스티브는 아들의 이야기에 온 귀를 기울였다. 메리 린이 킵 아무개를 만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이름도 킵이 뭐란 말인가? 발레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는 놈 같지 않은가?

[그래, 뭘 알아냈어?]

스티브는 타드의 질문을 무시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이혼은 여전히 힘들었다. 갑자기 기발하고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비서를 구할 때까지 메리 린한테 사무실 일 좀 봐달라고 하면 어떨까?]

[메리는 사무실을 싫어했었잖아.]

타드는 커피 한 방울 한 방울이 꿀맛처럼 달다는 듯이 맛있게 마시며 말했다.

[알잖아.]

친구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녀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만으로도 좋았다. 어쩌면 킵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지도 몰랐다.

[밑져야 본전인데 뭐. 못 물어 볼 것도 없잖아.]

[이혼했잖나.]

[고마워, 아마 내가 잊고 있었던 모양이니까.]

스티브는 자신의 비아냥이 제대로 과녁을 맞추었기를 바라면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잊어버리고 자기 길을 찾아야지, 친구. 메리 린은 떠났어.]

스티브는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서 일해야 하지 않나?]

[알았어. 내가 또 아픈 곳을 건드렸군. 괜시리 목이 잘릴 필요는 없겠지.]

타드는 서둘러 문을 나갔다. 스티브는 이글거리는 분노를 애써 삼켰다. 제길, 그는 아직 메리 린을 사랑했다. 이혼이 이렇게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9년을 같이 살았다. 스티브는 바보처럼 모두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난데없이 메리 린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갖은 힘을 다 썼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밖에는, 결혼을 너무 일찍 해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인생을 다 놓쳐 버린 채 남편과 아이에게 묶여 살고 있다고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건 사태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그를 결정적으로 놀라게 한 건 그녀가 자기만의 침실을 가져 본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그게 무슨 문제일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스티브에게 집에서 나가 달라고 했다.

스티브는 아내가 잠깐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기꺼이 집을 나가며 아내가 '자기를 찾게' 해주는 길이라 생각했다. 아내는 자기 안에 있는 '내적인 아이'와 접촉을 해서 '힘'을 얻어야 한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했다.

스티브는 자신이 여자의 기분을 몰라 주는 둔한 남자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텔레비전 토크쇼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니냐는 말에 그녀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더니 그가 집을 간 지 한 달 만에 이혼을 요구해왔다.

그는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들은 각자 변호사를 고용했고 얼마 안 있어 법정에서 모든 일은 끝났다.

변호사가 끼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스티브와 메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만도 1년이 더 걸렸다. 그는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데 이제 진저리가 났다. 그는 아내가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타드가 한 말은 신경쓰지 말자. 메리 린에게 다른 비서를 구할 때까지만 대니엘의 빈 자리를 메꿔 달라고 말할 것이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실수였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있을 때까지만......

금세 기분이 좋아진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

그녀는 늘 아침잠이 많았다.

[나야, 잘 있었어?]

[스티브! 세상에, 도대체 지금 몇 시예요?]

[9시.]

[벌써?]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혼생활 내내, 그녀는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고 향기 나는 몸으로 그의 품안에 안겨 들어오곤 했기에 그는 아내를 깨우는 것이 좋았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최상의 시간은 그런 아침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녀는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아무 일도. 아, 참, 비서가 나갔어.]

그녀는 조용해졌다. 화가 났다는 사실이 전화선을 통해서도 전해져왔다.

[난 타이핑도 못하는 것 알잖아요, 스티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덕에 메리 린은 그의 속을 거울처럼 들여다보았다. 그 사실에 그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새 비서를 구할 때까지 며칠 동안만 사람이 필요해.]

[임시 비서를 구하면 되잖아요?]

[물론 그렇지. 소개소에 연락을 하면 사람을 보내 줄 거야. 하지만 남한테 헛돈을 주느니 차라리 그 돈을 당신한테 쓰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학교에 가야 해요. 오후 내내 수업 듣고 거기다 집안일에 케니 돌보는 일도 쉽지 않아요.]

[나도 알아. 하지만 2, 3일 정도 오전에만 나와서 일을 좀 봐주면 돼.]

이혼을 할 때 메리 린의 학비를 대주기로 했었기 때문에 그녀의 스케줄에 대해서는 스티브도 잘 알고 있었다.

[또 똑같은 말!]

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뭐가?]

대화는 이혼하기 직전 두 사람이 싸울 때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녀는 화를 냈고, 그로서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한지 안다고 말은 하면서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아니, 정말이야, 알고 있어.]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일을 해달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스티브 매리스, 난 당신을 너무 잘 알아요. 이틀은 결국 2주일이 되고, 난 수업을 따라갈 수 없게 될 거예요. 바로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죠. 내 공부를 방해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하려는 것 말예요.]

스티브는 맞싸우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당시의 수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알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학업을 계속하는데 왜 이혼을 해야 했는가였다. 또 미술사를 전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일자리가 있다면 박물관 같은 곳이 될 것이라고 짐작할 뿐. 물론 그런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정말인가요, 스티브?]

[정말이야.]

그는 아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수업이 1시에 시작하니까 그 전에 좀 도와줄 수 있지 않나 생각한 것뿐이야. 안 된다면 하는 수 없지, 뭐.]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는 기회를 놓칠세라 조여 들어갔다.

[아침에 2시간 정도면 될 텐데.....당신이 못 한다면 괜찮아.]

[내가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지, 또 과제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그래, 이런 부탁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동안도 이런 게 문제였었지 아마?]

[그래요.]

그녀는 금방 동조했다. 그리곤 다시 말을 끊었다. 한숨 소리가 났다.

[이틀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이 점 분명히 해두고 싶어요. 이틀뿐이고, 그 이상은 단 1분도 안 돼요, 알았죠?]

[잘 알아 모시겠습니다.]

스티브는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메리 린에게 전화를 건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킵인지 뭔지 하는 자식을 몰아내는 일도 시간 문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8시 전에 출근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그는 이 질문은 무시했다.

[지금 핑크색 잠옷 입고 있지, 응?]

[스티브!]

[아니야?]

목소리를 고르게 하려고 해도 조금씩 허스키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혼한 후에 섹스를 더 즐기게 됐다. 앞뒤가 안 맞는 일이었다. 메리 린은 그가 집에서 나가 주기를 바라면서도 침대로 오는 것은 계속 환영했다. 물론 그게 싫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맞아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잠옷 입고 있어요.]

그녀는 낮고 섹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 갈게.]

[스티브, 안 돼요.]

[왜?]

[우린 이제 그러면 안 되니까.]

스티브는 순간 이런 변화가 그 킵이라는 작자와 관련이 있다고 느꼈다. 아니, 확실했다.

[이혼했잖아요?]

[전엔 안 했었나? 15분이면 갈 수 있어. 당신도 내가 오길 바라지? 안 그랬다면 그 잠옷 이야기는 안 했을걸.]

메리 린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곤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스티브, 안 돼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심각하게 말했다.

[이제 이혼한 지도 1년이 넘었어요. 이젠 정말 같이 자면 안 돼요.]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결정을 언제 했지?]

[지난번 이후로.]

그는 숨을 훅 내쉬었다. 인내심이 빠른 속도로 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지난번의 만남을 돌이켜보았다. 늦은 아침, 그녀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그리고 아이는 학교에 가 있을 때였다. 그는 핑계를 만들어서 그녀를 보러 갔었다. 메리 린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고, 그녀의 눈에 서린 빛이나 그를 침실로 데리고 갈 때의 열띤 몸짓으로 보아 그녀 역시 그를 원했음이 분명했다.

그 후로 킵이라는 작자와 데이트를 한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 문제에 아이가 끼게 해서는 안 되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케니의 상처는 이미 깊을 대로 깊었다. 그와 메리 린의 문제는 두 사람 선에서 짚어 나가야 했다.

[무슨 일 때문에 마음이 달라졌지?]

메리 린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 일도. 아니, 전부 다. 더 이상 이런 관계를 끌고 가서는 안 되잖아요? 우린 끝났어요, 스티브.]

스티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그러니까 전처를, 잘 알았다. 같이 싸워 봤자 일이 더 악화될 뿐이다. 아는 것은 또 있었다. 메리 린은 성욕이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올 거지?]

그는 확인을 했다.

[그러죠. 다시 말하지만 이틀뿐이에요.]

[핑크색 잠옷도 가져와.]

[스티브!]

[미안.]

그러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그는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 뒤로 모든 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운송회사가 분실된 화물을 알버버크에서 찾아냈고, 48시간 내에 배달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가 받는 주문의 대부분은 그 지역에 있는 항공기 제조업자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그는 항공기 엔진 부품을 납품하고 있었는데, 그 외에 선반 작업, 철제품 제작도 병행했다. 그의 회사는 주문이 늘어 나면서 날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집으로 오면서 스티브는 문득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깨끗했다. 1년 반 전 부터 그는 사무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직접 상품을 다루어 손을 더럽힌 적이 거의 없었다. 메리는 언제나 그가 사무실에서만 일하기를 원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마침내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았다. 기계설비 덕분에 집도 샀고, 아이도 키웠고, 또 그녀의 학비도 댈 수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트럭의 와이퍼가 부지런히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서 유리창의 빗물을 닦아냈다. 이제 그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켄트로 가는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 콘도를 별로 사고 싶어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가족이 사는 집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케니는 거의 매주말마다 그와 같이 지냈다. 그가 혼자 지내던 작은 아파트는 아니가 마음껏 뛰놀기에 좁은 것 같아서 이사를 한 것이다.

제대로 된 주택을 사고 싶었지만 혼자 살면서 여러 집안 일들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콘도가 절충안이었다. 부동산업을 하는 한 친구가 이 콘도를 사두면 투자 효과가 좋다고 알려 주었다. 콘도는 메리 린과 아이가 살고 있는 집에 버금갈 정도로 잘 지어졌다. 좀 좁긴 해도 그런 대로 쓸만 했다. 아이는 콘도를 좋아했고 옆집 여자하고도 어느새 친해져 있었다. 비가 거의 그쳤기에 그는 와이퍼 스위치를 껐다.

스티브는 아직 할리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케니가 이름을 가르쳐 주었었다. 그의 집 부엌 창문으로 그녀의 집 거실이 보였는데, 러닝 머신과 스텝핑 머신에서 벌써 몇 번이나 그녀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좋아서라기 보다는 죽기살기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티브는 윌오우 우즈 단지 안으로 들어가 입구에 나란히 놓인 우편함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그는 할리가 자기 우편함 앞에 서서 커다란 우편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시오?]

그가 자기 우편함 속에 열쇠를 넣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할리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스티브 메리스라고 합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지난 주말에 이 옆집으로 이사를 왔소.]

그녀는 눈을 껌벅거렸다.

[케니의 아빤가요?]

[맞습니다.]

[할리 매카시예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아이가 아주 귀엽더군요.]

[고맙습니다.]

그는 빙긋이 웃었다.

할리는 초조하게 아직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흘깃 내려다보고는 얼른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저......, 아, 그만 가봐야겠어요, 또 뵈요.]

그때 봉투에 인쇄된 로고가 스티브의 눈에 들어왔다. 흠, 데이트라인이라. 엄청난 돈을 받고 데이트를 알선해 주는 서비스에 대해서는 숱하게 들어온 터였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친구 하나가 그런 서비스를 받아 보라고 졸라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트 한 번 하자고 2천 달러씩이나 내야 한다는 사실에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절박하진 않았다.

바로 그때 할리가 고개를 쳐들었다.

[어.....친구가 하도 졸라서........안내서나 받아 보는 거예요.]

그녀는 얼굴이 발개져서 변명을 했다.

[절대로........]

그녀는 어깨를 펴고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뭐 남자를 찾으려고 남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는 아니에요.]

다이애너 공주도 부러워할 만큼 당당한 자세로 고개를 치켜 든 채 할리 매카시는 자기 차로 돌아갔다. 아뿔싸, 그러나 그 황급한 걸음걸이가 조금 전의 기세에서 풍긴 당당함을 실추시키고 말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스티브는 고개를 내저었다. 케니가 그녀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 할 것 같았다. 사람은 좋아 보였지만 어딘지 좀 유별난 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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