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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의 웨딩마치-19화 (19/19)
  • 19.

    다음날 샬로트는 프랑스어가 서툴러 마을 사람들과 제대로 의사 소통을 하지 못하는 한 영국인 부부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가 도와주겠다고 나서자 그들은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마침 그들이 말을 바꾸려던 여인숙에서 한 끼 푸짐하게 먹고 가라고 붙들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꺼려 왔지만 위장이 우렁차게 동의하는 바람에 결국은 경계하면서도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모자며 제대로 맞지 않는 옷차림을 보고 이상한 청년이라고 생각했을 법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 부부도 이상하기로는 지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지방의 대지주라는 티트워시는 땅딸막하게 살찐 나이 든 남자로 너무 딱 달라붙는 조끼며 바지 차림은 샬로트보다도 둔해 보였다. 그 부인은 젊고 여위었는데 키득거리는 품이 자기 도취증에 푹 빠진 멍청한 여자가 분명했다. 프랑스 여행을 부인이 제안했으며, 그녀가 남편을 졸라 프랑스 여행을 오게 된 것은 절대 유럽 대륙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근사할 것 같아서였다는 사실을 샬로트는 곧 알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샬로트는 음식이며 길 ,언어, 그 외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해 트집을 잡아대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억눌러야 했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은 채 남동생들의 태도를 그대로 흉내내 음식을 먹었는데 그 양은 남동생들조차도 낯뜨거워할 정도였다. 식사가 끝나자 티트워시 부부는 새로 알게 된 영국인 친구를 절대 그냥 보내지 않으려 했다.

    "젊은이. 자네는 우리가 신께서도 버리신 이 땅에 도착한 이래 처음 만난 현명한 사람일세."

    "아이, 여보."

    그의 아내는 달래듯 남편의 팔에 손을 얹더니 샬로트를 보고 키득키득 웃어댔다.

    "이이는 외국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어디 외국인뿐인가? 헹!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프랑스 놈들처럼 건들거리더구만. 분명 여기 물이나 포도주가 이상한 게야. 최고급 포도주라고? 에일 맥주보다 맛있는 것도 아니더구만‥‥‥"

    티트워시 부인은 다시 킥킥거렸다.

    "사실 어제 길에서 어떤 영국 사람과 안 좋게 부딪혔거든요"

    "헹 ! 그 괘씸하고 건방지고 난폭한 놈!"

    지주는 새록새록 화가 나는지 중얼거렸다.

    "우리 마차를 세우고 안을 뒤져봐야겠다고 명령해? 자기 마누라를 찾는다는 이유로! 그 여자는 아마 프랑스 놈과 줄행랑을 쳤을 게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절대 그런 짓 따윈 않지."

    "귀족이란 원래 다르다고 저도 이이한테 말했죠"

    귀족의 혈통이야말로 온갖 비정상적인 행동을 변명할 거리가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샬로트는 미소지으려 했지만 그 얘기의 요점이 명확하게 입력된 순간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관절이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아내를 찾는 귀족이라니! 맥스일까? 맥스가 이렇게 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오다니!

    "귀족이라고 하셨습니까?"

    샬로트는 최대한 흔들림 없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헹! 자기 말로는 남작이라지만 누가 그 말을 믿겠나. 남작이면 타의 모범이 되어야지. 그런데 도망간 마누라를 찾는답시고 부하들을 못살게 굴면서 촌구석이나 샅샅이 뒤지고 다니다니! 그자도 예의범절을 좀 배워야 한다니까."

    지주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행동거지에 분개한 나머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버기스! 가슴 아래 괴어 놓은 베개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샬로트의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그녀는 지나온 길을 흘끔 뒤돌아보았지만 느릿느릿 지나가는 건초 마차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버기스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그 사람을 만나신 곳이 어디인가요?"

    "그자를 만나? 헹! 우리를 들볶는 품이 완전 미친 사람 같더구만!"

    지주는 툴툴댔다.

    "어디였습니까?"

    샬로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상대의 주의를 끌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아야만 했다. 버기스는 해안 쪽으로 갔을까? 아니면 지금도 그녀를 뒤쫓아오고 있을까? 그녀는 밤 동안에는 잠을 잤고 오늘도 티트워시 부부와 식사를 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힘 좋은 말을 탄 남자라면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포 때문에 날이 선 목소리로 샬로트는 다시금 캐물었다.

    "어디였나요?"

    "어제 언제쯤이었는데."

    티트워시 부인이 대답했다.

    "출발 직후였나요?"

    "아니. 오후였지. 마차 때문에 낑낑댄 뒤였으니까. 바보 같은 프랑스 놈들이 나한테 낡아빠진 바퀴가 달린 마차를 줬지 뭐요! 하마터면 도랑에 빠질 뻔했다니까!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 그런 놈들은 호되게 매질을 시켜야 해. 프랑스 놈들은 죄다 영국인을 노리고 가짜를 팔아 돈푼이나 챙기려고‥‥‥‥"

    "조그만 마을을 떠난 직후였어요. 우스운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는데 ‥‥‥"

    티트워시 부인은 희망을 주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샬로트는 더할 나위 없이 낙심했다. 이들 부부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줄 수 없었다. 버기스는 저 뒤편 어딘가에서 그녀를 찾고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그녀는 도통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대로 말에 올라타 들판으로 접어들어 버기스를 따돌려야겠다는 충동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길을 잃을 뿐이다. 특히 먹을 것도 돈도 없으니 성공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샬로트는 충동을 억누르며 억지로 말 옆에 계속 서 있었다.

    "그자가 누군지 알게 뭐람"

    지주는 아내에게 발끈 화를 냈다.

    "두 번 다시 우리 앞길을 막았다간 두고 보라지! 그자에게 내권총을 들이대 주겠어 !"

    "우리 둘이서만 여행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

    "헹!"

    "하지만 이제 당신을 만났으니, 말을 타고 우리와 동행하시지 않겠어요? 그러겠다고 해주세요, 린리 씨."

    티트워시 부인이 졸랐다. 샬로트는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그들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간신히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추적자들 생각은 억지로 접어둔 채 그녀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준 영국인 부부를 염두에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과 잠시나마 동행할 수 있다니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답했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뒤에서 버기스가 그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낯선 이국의 농촌 지방에서 지름길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냥 파리로 계속 전진해야만 헌다. 그리고 동행이 있는 편이 더 나았다. 영국인 여행객에 끼여서 길을 간다면 버기스가 접근하더라도 혼자인 경우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길거리에서 혼잣몸으로 있다가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샬로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억지로 전방에만 시선을 못박았지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와 지나칠 때마다 버기스가 그녀를 다시 성으로 잡아가려고 부하들과 온 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몸이 얼어붙었다. 지주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그 노인의 권총이 머리끝까지 분노해 펄펄 뛰는 미치광이를 제지시킬 수 있을지 샬로트는 영 미심쩍었다. 오후가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녀는 초조해진 나머지 말을 더 빨리 몰고 싶었다. 자유의 도시를 향해 마지막 전속력을 내서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싶은 마음에 좀이 쑤셨지만 꾹 참고 동행들과 속도를 맞췄다. 마차 안으로 들어와 앉아 가라는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티트워시 부부가 아무리 멍청해서 그녀의 남장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들 그녀는 한층 제한된 공간에서 연기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녁이 다가오자 너무나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이제 그녀는 무슨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피난처가 손짓하며 부르는 듯한 느낌은 실제처럼 너무나 강했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한 지금에 와서 만약 붙잡히게 된다면 그것은 견뎌내기에 너무나 끔찍한 고통이 될 것이다. 샬로트는 너무나 긴장해서 피곤이나 허기도 모두 잊을 정도였지만 티트워시 부부는 그렇게까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파리 외곽에서 그만하면 괜찮다 싶은 여인숙을 발견하자 하룻밤 묵어 가겠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새로 사귄 친구에게도 같이 묵었다 가자고 애써 설득했지만 공짜로 밥을 한 끼 더 먹을 수 있는 초대도 샬로트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두워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낯선 이국의 대도시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붙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못지 않게 겁이 났다.

    "묵었다 가시면 좋을 텐데요, 린리 씨."

    티트워시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있어 주셔서 우린 정말 마음이 놓였거든요."

    "앞으로는 멋진 여행이 되실 겁니다."

    샬로트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파리 시내에는 영국인들의 대규모 집단 거주지가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소, 젊은이?"

    샬로트는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묵을 곳이 아직 확실하지가 않군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뒤쫓아올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어떤 단서도 남겨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린리 씨를 위해서 뭐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티트워시 부인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하고 물었다. 샬로트는 눈물을 참았다. 그냥 이 자리에서 무너져 이해심 많은 그들에게 사연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지만 결국그녀는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머리는 좀 나쁠지 몰라도 사람 좋고 친절한 부부였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친 신부에게 어떤 혐오감을 품고 있었는지 샬로트는 떠올렸다. 그런 판국에 그 들이 남장 여인이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경우 얼마나 끔찍해할지는 안 보아도 뻔했다. 샬로트는 힘들게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안 되는 생애 동안 이렇게 외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친구가 있습니다. 이쪽 방향으로 올지도 모르는데, 혹시 그 친구를 만나게 되시면 절 보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부부는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그분 성함은요?"

    티트워시 부인이 미소지으며 물었다.

    "위클리프 위클리프 백작입니다. "

    샬로트는 되도록 떨지 않고 대답했다.

    "그 사람에게‥‥‥ 린리가 이 길을 지나갔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녀는 뒤를 흘끔 바라본 다음 자신의 말로 다가갔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맥스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티트워시 부부 없이 혼자서 가는 길은 외로웠다. 그들은 비상사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도덕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같은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녀의 불안은 다른 차원으로 바뀌었다. 도시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길은 점차 북적거렸다. 파리로 몰려드는 군중들을 헤치고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막상 파리에 도착하고 보니 호텔을 찾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여태껏 떨어졌던 임무 가운데 가장 어려웠다. 파리는 대로와 골목길이 이리저리 꼬이고 뒤섞인 도시였다. 목적지에 왔다는 승리감에 아무리 도취되었다 한들 샬로트는 경계심을 버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버기스가 바로 옆에 숨어 있다가 피신처 입구 바로 앞에서 그녀를 낚아채 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샬로트는 이국적이고 매혹적인 주변 풍물과,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압도당했을 정도로 활기찬 도시의 흥분 따위를 무시한 채 조심조심 이동했다. 그녀는 목적지를 찾겠다는 일념에만 매달린 끝에 마침내 성공했다. 클리시 가,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 이름이 남아 있는 고급 호텔이 바로 그곳이었다. 노크 소리에 대답한 것은 슈발리에였다. 그는 이상야릇하다는 듯 그녀를 흘끔 쳐다보더니 장사꾼이면 뒷문으로 들어오라고 일침을 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까지 왔는데 코앞에서 문이 닫혀 버리는 사태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문지방을 넘어섰다.

    "누구지, 슈발리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아하게 흔들리는 시빌의 치맛자락이 샬로트의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어머니를 보자 샬로트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안전한 곳에 왔다는 느낌과 무엇보다도 맥스 생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황당해하는 하인을 재빨리 따돌리고 가냘픈 백작 미망인 앞으로 다가갔다. 샬로트는 우아한 몸짓으로 모자를 벗고 머리채를 확 풀어 내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샬로트도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시빌은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샬로트를 바라보더니 극적으로 숨을 허덕이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슈발리에가 즉시 부인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부축했다.

    "백작 부인, 앉으십시오!"

    그는 그녀를 진홍색 다마스크 의자에 앉히고 브랜디를 한 잔 가져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한 잔 더. 샬로트는 이렇게 말하고싶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샬로트, 네가 맞니?"

    시빌은 격렬한 어조로 속삭였다. 샬로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벅찬 감정 때문에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는 안전했다. 마침내 안전한 곳에 도착한 것이다.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 여행길에 더러워진 남자 옷이며 진흙투성이 신발까지 훑어 내리는 시빌의 시선을 지켜보며 잠시 행복했던 마음도 사그라 들었다. 샬로트의 냄새가 자못 불쾌하다는 듯 백작 부인의 자그마한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순간 크게 숨을 들이쉰 샬로트는 그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도 맥시밀리언이 새로 고안해낸 한심한 장난이냐?"

    시빌은 화난 어조로 따져 물었다.

    샬로트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맥스가 필요했다. 남편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아버지나 혹은 다른 식구들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곁에 있는 친척이라고는 시어머니가 유일했고 그런 시어머니가 포옹을 반기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샬로트는 알고 있었다. 샬로트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 전 결혼 피로연에서 버기스 경에게 납치되어‥‥‥ 약을 먹고 끌려갔어요. 그 사람은 미친 게 분명해요"

    샬로트는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던 그의 논리를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그 사람은 제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저와 강제로 결혼해 지금 공석으로 되어 있는 어떤 작위를 받을 생각이었어요. 그자가 절 프랑스로 데려왔지만 전 탈출했어요. 제 머릿속에 생각나는 방법이라고는 어머님께 오는 것뿐이었어요."

    샬로트는 힘없이 벽에 기대섰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시빌은 최신 유행 옷차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내쫓을 수도 있었다.

    "이런! 가엾은 것."

    시빌이 말했다. 동정적인 말을 듣고 놀란 샬로트는 시어머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걱정하는 기색과 애정까지도 언뜻 엿보였다. 그리 강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샬로트로 하여금 시빌의 품에 뛰어들게 하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흙투성이남자 옷차림을 한 채 시빌보다도 훨씬 껑충한 키로 가냘픈 시빌의 가슴에 안겼다. 마침 자리에 나타난 슈발리에는 그 광경을 보았다. 안도감으로 흐느껴 우는 샬로트와 어색하게나마 그 등을 토닥여 주고 있는 백작 부인의 모습을.

    "자아, 이리 오십시오, 두 분."

    슈발리에는 샬로트를 의자에 앉힌 다음 그녀에게 잔을 주면서 마시라고 권했다. 생소한 액체가 목구멍을 따갑게 자극했다. 하지만 몸이 후끈해지면서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하인은 시빌에게도 브랜디를 권했지만 쟁반에는 아직 한 잔이 더 남아 있었다. 슈발리에가 자기 몫으로 가져왔다는 것을 깨닫고 샬로트는 미소지었다. 그는 사과의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백작부인?"

    그는 다 마신 자기 잔을 쟁반에 내려놓으며 시빌에게 물었다.

    "우선 이 아이를 목욕시키고 고상한 옷으로 갈아 입혀야지,"

    시빌이 대답했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이 앤 체형이 완전 여장부라 내 옷이 하나도 맞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 악당 놈이 이곳까지 쫓아온다면 어떻게 하죠?"

    슈발리에는 그 생각을 하자 자못 불안한 듯했다. 세 쌍의 눈이 그들의 등 뒤에 있는 문으로 천천히 향했다. 제일 먼저 좌중을 둘러본 것은 시빌이었다.

    "감히 그런 짓을 하지는 못할 거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사람들을 몇 명 고용해 망을 보도록 시키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뭔가 가만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샬로트를 힐끔 바라보았다. "버기스 같은 작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왜냐하면 너를 지켜 주는 멋진 기사님이 곧 나타나지 않겠니?"

    샬로트의 멍한 표정을 보고 시빌은 짓궂게 미소지었다.

    "의심할 것 없이 맥시밀리언은 널 쫓아 여기까지 올 게다."

    맥스! 그의 이름이 거론된 것만으로도 샬로트의 심장이 마구 뛰놀았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시빌은 끄덕였다.

    "나한테 맹목적인 감정밖에 없던 제 아버지와는 달리 맥스는 널 열렬히 사랑한단다. 아마 그 앤 언제라도 널 위해 자기 목숨 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을걸. 그 애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변할 줄 누가 알았겠니?"

    시빌은 너무나도 수수께끼라는 듯 검은 곱슬머리를 휘젓더니 샬로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그녀가 평생 찾아 헤매던 어떤 비밀이 남장을 한 이 아가씨에게 숨겨져 있다는 듯한 눈길이었다. 이어진 침묵을 깬 사람은 슈발리에였다.

    "그렇다 해도 백작님께 연락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그분이 지체하고 계시거나 다른 곳을 잘못 짚고 계실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시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내내 샬로트에게 향한 패였다.

    "그러고 싶다면 하게나. 하지만 내 확신하는데 세상의 그 무엇도 그 애를 자기 아내에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을 게야. 그 앤 샬로트를 사랑해. 자네도 알겠지만 여태껏 어느 누구도 날 그렇게 사랑해 준 사람은 없었지."

    슈발리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빌은 초조한 듯 손사래를 쳐서 물러가라고 명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샬로트는 맥스를 연상했다.

    "아니, 그런데 그 조촐한 시골 결혼식이 이렇게 엄청난 결말로 이어질 줄 그 누가 알았겠니?"

    "어머님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샬로트는 부드럽게 말했다. 시빌은 입술을 뽀로통 내밀었다

    "뭐야? 주인공 대접도 못 받을 텐데 거길 가? 내가 그런 건 도저히 참지 못한다는 걸 너도 지금쯤이면 파악했어야지."

    "꼭 주인공이 되셔야 하나요?"

    샬로트는 다정하게 물었다. 시빌은 우쭐하던 태도를 순간 허물어뜨리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너와 난 사실 많이 닮았단다."

    그녀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너처럼 아름답고 귀염둥이였지만 학자의 딸이었지. 하지만 난 학문에는 참을성이‥‥‥ 아니지, 재능이 없었단다. 내 얼굴은 먼지투성이 장서들뿐인 세상을 뛰어넘어 부유하고 매혹적인 사교계로 향하는 직행표였어. 위클리프 백작이 관심을 보였을 때 난 그 사람이 늙고 지겹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사실 같은 건 전혀 염두에 없었단다."

    시빌은 손가락을 튕겼다.

    "흥!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난 그이를 홀려서 청혼을 받아냈지. 그래서 졸지에 백작 부인이 된 거야! 그리고 너 같은 바보와는 달리 난 그 지위를 사랑하고 동경했지."

    그녀는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아아, 그 파티들에 춤, 음식. 카드 게임‥‥‥‥ 게다가 저택들! 의상! 보석! 난 그 모든 걸 원했지. 하지만 레지널드는 금세 그런 것들에 싫증을 냈어. 그이는 날 어리석고 자기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 취급을 하기 시작했지. 난 단지 남편에 대한 앙갚음으로 애인들을 만들었단다. 하지만 그이는 신경 쓰지 않았지. 일단 맥시밀리언이 태어나자 그 아이는 항상 그이의 유일한 재산이었어. 너도 알겠지만 말이다"

    시빌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보기에 맥시밀리언은 나에 대한 경멸감을 아예 내 뱃속에서부터 품고 태어난 것 같아. 제 아버지처럼 날 경멸하는 게지."

    "그렇지 않아요."

    샬로트는 속삭였다.

    "아니, 사실이란다.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난 그 둘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난 쾌락만을 좇았고 그 덕에 유명해졌지. 가난한 학자의 딸인 내가 말이야! 이제 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인인 데다 날 따를 여자가 없는 최고의 파티 주최자이기도 하고 내가 호의를 베풀었던 남자들에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애인이란다. 난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자야!"

    하지만 사랑은 없었다. 샬로트는 평생 성인이 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한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지금까지도 다루기 힘든 아이처럼 돌발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애쓰는 그 여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하지만 샬로트는 시빌이 그녀의 동정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시어머니의 손을 따스하게 힘주어 잡았다.

    "어머님은 실로 놀라운 분이세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 그렇지?"

    시빌은 아이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브랜디를 몇 잔 더 마신 뒤 샬로트는 침실에 들여놓은 욕조의 향내나는 목욕물에 편안히 잠겼다. 빈 잔을 물리자 프랑스인 하녀가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머리를 감겨 주었고 다 끝난 뒤 그녀는 하녀가 준비해 둔 길고 묵직한 로브를 입었다. 분명 시빌의 것은 아니었다. 남자용 로브가 분명했으므로 샬로트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 묻기가 껄끄러웠다. 아마 시빌의 정부중 한 명이 입던 것일 테지만 샬로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긴소매를 걷어올리고 하녀를 내보낸 뒤 화려한 거울 앞에 앉아 물기가 말라 가는 머리를 빗질했다. 천천히 머리를 빗으며 긴장을 풀고 있는데 다른 방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공포와 불안 때문에 빗을 떨어뜨리고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맨 처음 든 생각은 버기스였다. 그 미친 남자가 호텔로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훤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방 안을 훑어보며 뭔가 몸을 지킬 만한 것을 찾았다. 싸워 보지도 않은 채 끌려갈 수는 없었다. 그자에게 등잔불을 던져서 아예 불을 놓아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은 난로가를 보고 반짝 빛났다. 그녀는 즉시 난로가로 달려가 길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부지깽이를 집어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그와 동시에 경첩이 덜걱거릴 정도로 침실 문이 콰당 열렸다. 샬로트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졌고 그동안 억눌렸던 숨이 그녀의 입에서 길게 터져 나왔다.

    "맥스!"

    그녀는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녀의 막내 동생 제니를 안듯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그녀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꼭 끌어안았다. 그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의 그윽하고 낯익은 목소리는 평생 듣고 있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의 귀에 너무나 근사하게 와닿았다. 그의 포옹이 점점 더 거세어지자 샬로트는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는 그의 우아하고 귀족적인 몸에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그 생각을 하자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포옹을 늦추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듯

    "그 개자식이‥‥‥‥"

    "걱정 말아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난 괜찮아요"

    샬로트는 떨리는 미소를 그에게 보였다.

    "샬로트."

    그는 자기 입에서 과연 말이 나올 수 있을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떨면서 말했다.

    "당신은 결혼식장에서 납치되어 며칠 동안이나 미친 자의 손아귀에서 지냈잖소. 프랑스로 끌려오기까지 하고. 그런데 괜찮단 말이오?"

    샬로트는 그의 얼굴에 서린 불안한 빛을 보고 미소지었다.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지금 당장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있고 그녀가 그의 팔에 안겨 있는 지금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그는 거칠게 물었다. 갑자기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겪은 고뇌가 그의 얼굴에 남긴 흔적을 눈치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으며 몸은 경직된 상태였고 갈색 눈동자는 근심으로 인해 퀭했다. 그녀는 그를 안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꾹 참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남장을 했어요."

    못 믿겠다는 듯 코웃음치는 맥스의 반응을 보고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래도 이번엔 좀 나았어요."

    "그럼 여기까지 혼자서 말을 타고 왔소?"

    "오늘 어떤 영국인 부부를 만나서 거의 내내 같이 왔어요."

    그녀는 그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설명했다.

    "그 사람들이 당신 변장을 눈치채지 못했소?"

    샬로트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그럼요, 맥스. 괜찮았어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그를 위안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애무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편안해진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완전히 잘못 짚고 헛수고를 한 셈이군."

    그는 나직이 말했다.

    "난 당신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샬로트는 그의 행동에 놀라서 눈을 깜박이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남자의 자존심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맥스는 멋진 기사 노릇 따위는 귀찮다고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사실은 그 역할을 즐기고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 샬로트는 마른침을 삼키며 양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아아, 맥스 당신이 와 주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면서 그냥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너무 무서웠어요.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거든요"

    그는 그때서야 후회하는 빛을 띠었다. 사과하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는 다시 그녀에게 팔을 벌렸다. 그의 외관은 침착할지 몰라도 점잖은 백작의 깊은 내면에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었다. 어쩌면 맥스 쪽에서야말로 더욱 더 그녀를 필요로 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난 여전히 당신이 필요해요, 맥스. 당신은 날 언제까지나 곤경에서 건져 줘야 하니까요"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엄숙한 눈으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그의 거무스레한 눈동자 저편에는 연약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이만한 강도의 사건이 그리 많지 않기를 기원합시다. 내가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마침내 그는 말했다.

    "그 성에 도착해서 당신과 그자가 둘 다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  난‥‥‥‥"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그녀가 움찔할 정도로 더욱 세게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때서야 난 당신이 내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깨달았소, 샬로트"

    그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녀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너무나 강렬한 감정 탓인지 샬로트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가슴은 터져 버릴 정도로 벅차 올랐다.

    "아아, 맥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몸을 감싸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가 목에 대고 내뿜는 거친 한숨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잘 해냈소. 당신이 몹시 자랑스러워. 이젠 나도 당신을 구하러 달려오는 데 웬만큼 익숙해졌지만 사실 내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는 몸을 뒤로 빼고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 사실을 증명할 훨씬 더 즐거운 방법이 떠오르는군."

    살로트는 그의 어조가 바뀌자 방긋 웃었다.

    "우선 문부터 닫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세심한 것까지 챙기기를 좋아하는 꼼꼼한 남편이 방문을 훤히 열어 방치해 두었다는 데에 다소 놀랐다. 맥스가 뭔가 중얼거렸다. 얼핏 듣기에, '저 놈의 망할 문 따윈 그냥 내버려두지.' 하는 소리 같았으므로 샬로트가 직접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녀는 문에 기대서서 그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근사했다. 훤칠하고 늠름하고 남자답게 거무스름했다. 그의 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도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샬로트는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우선 앉아요."

    그녀는 설명하면서 그의 등을 떠밀어 거울 앞에 앉혔다. 그녀는 아까 떨어뜨렸던 빗을 집어들고 그의 검은머리를 묶고 있는 끈을 풀어냈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그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손 안에서 유연한 비단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관능적인 느낌과 동시에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으므로 그녀는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빗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빗겼다. 한 번, 두 번, 그리고도 계속해서 빗기다가 결국 거울 속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검은 석탄처럼 그녀의 영혼을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브랜디 기운이 그녀의 몸 속을 타고 흘렀다. 샬로트는 빗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그의 머리카락 속에 넣어 천천히 빗어 내렸다. 이런, 그의 머리카락 감촉은 너무나 근사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널따란 어깨로 떨어졌다. 그녀는 그의 귓등에 입술을 갖다댄 다음 상체를 숙여 그의 넥타이를 풀었다. 그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자 앞으로 벌어질 일이 기대되면서 강렬한 현기증이 덮쳐왔다. 그는 그녀를 덥썩 끌어다 무릎에 앉힌 다음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둘 사이의 공기는 불꽃이 일 듯 강한 전류가 흘렀다. 샬로트는 그의 욕망의 증거를 하반신으로 느꼈다. 문득 그녀는 자기가 얇은 로브를 걸친 것 외에는 알몸인 데 비해 그는 옷을 다 갖춰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 옷을 벗기고 싶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동의의 뜻이 담긴 소리를 냈다. 깊고 잔잔한 검은 눈에 나른한 빛이 감돌면서 그 위로 눈꺼풀이 살짝 내리 덮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관능적인 욕구가 가득했다. 그는 그녀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대신 그녀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녀는 그의 상의를 잡아당겨 소매를 빼내기 시작했다. 그는 잽싼 어깻짓으로 옷에서 빠져나왔다. 샬로트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계속 마주 보며 도발적인 애무의 몸짓으로 그의 조끼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그녀는 조끼를 벗긴 다음 셔츠 자락을 허리춤에서 빼내고 그의 머리 위로 벗겨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가슴에 검은 털이 빽빽하게 뒤덮인 광경을 보고 그녀는 몸 깊은 곳에서부터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부위가 바짝 긴장하면서 그에게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샬로트는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근육을 비벼대고 손끝으로 그의 가슴털을 쥐었다. 샬로트는 자신의 힘을 느끼고 대담해졌다. 그녀에게는 이 강인하고 세련되고 부유한 귀족을 무릎 꿇게 할 힘이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결합되어 있을 때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음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샬로트는 그의 무릎에서 살짝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그의 장화에 손을 댔다. 그녀는 장화와 스타킹을 차례차례 벗긴 다음 마침내 그의 맨발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그녀는 맨살을 손으로 쓸면서 발목을 지나 남자다운 장딴지로 올라왔다. 맥스 외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상체를 숙여 가슴을 일부러 그의 허벅지에 갖다댄 다음 바지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신음했다. 샬로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구명줄인 양 붙드는 그의 손길을 의식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당기는 아픔을 무시한 채 하던 일을 끝냈다. 그러자 그의 남성이 그녀의 손 안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 부분을 만져줄 때 그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녀는 똑똑히 기억했다.

    "샬로트!"

    전혀 예고도 없이 그녀는 와락 밀려 바닥에 넘어졌다. 맥스가 기대앉아 있던 호화로운 의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샬로트가 숨쉴 겨를도 없이 그가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그의 입술이 샬로트의 입술을 게걸스레 탐하는 동안 그의 손이 그녀의 로브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혀가 입 안으로 파고 들어와 그녀의 혀에 감겼고 동시에 그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맹렬하고도 기나긴 애무를 퍼부었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자신에게서 고통을 덜어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는 듯 그녀의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맥스가 키스를 멈추고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자 샬로트는 실망한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을 받자 그녀는 못박힌 것처럼 동작을 멈췄고 그가 그녀의 헐렁한 로브 앞자락을 풀어 넓게 펼치자 마침내 조용해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에는 그녀가 움찔할 정도로 강렬한 욕망이 활활 타올랐다. 그는 양 손으로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시작해 가슴,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길게 쓸어 내리며 어루만졌다. 다음 순간 그는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그녀의 몸을 들어 자신의 몸에 맞댔다. 그가 자신의 몸을 그녀의 몸 안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동안 샬로트는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숨이 가쁜 나머지 그녀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세상에나."

    그녀는 흐느끼듯 외쳤다. 이런 광경은 평생 처음이었다. 맥스는 그녀에게 미소지었다. 어느 정도는 사악하고 음흉한 웃음이었지만 그 나머지는 광란 상태의 황홀경 속에서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의 몸 깊은 곳을 문지르며 단단하게 그 안에 자리잡았다. 그녀는 양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고 꼭 조였다. 그녀의 쾌락이 황급히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 감각에 몸을 맡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남편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라곤 자취도 없었고 대신 죽기 직전의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혔고 그의 모든 근육이 팽팽하게 모여들었다. 그는 그녀가 작열하는 쾌락을 느끼며 신음할 때까지 끊임없이 그녀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가락이 값비싼 카펫 자락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녀는 다시금 강하게 분출되는 쾌락 앞에서 울고 말았다. 그도 가슴 깊은 곳에서 독특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자신을 자유롭게 방출하며 마지막 전율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쾌락에 동참했다. 그는 푹 쓰러지더니 똑바로 누워 그녀를 끌어안았다. 둘 중 누구도 입을 열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몇 분, 혹은 몇 시간인지 모를 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다시 숨결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눈을 뜬 샬로트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뒤집혀진 의자의 아랫부분이었다.

    "비닥에 누워 있었군."

    맥스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걸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에도 바닥에 누워본 적이 있나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대고 미소지었다. 맥스는 투덜대며 격하게 부인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이쪽 구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소. 하지만 이제 내겐 익숙해진 장소가 되었지,"

    그는 불평했다.

    "하지만 당신이 날 땅에 넘어뜨렸던 수많은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예전 수법보다는 이 신기술 쪽이 더 낫다는 걸 시인해야겠군."

    샬로트는 그가 음식이며 마실 것에 미끄러져 넘어졌던 때를 떠올리고 웃음 지었다. 그녀는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지만 다음 순간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슬슬 생각났다.

    "맥스"

    그녀는 한숨처럼 나직이 불렀다.

    "집에 돌아가면 옷을 다 벗고 샴페인으로 장난치고 싶어요."

    그녀의 남편은 대답 대신 신음했다.

    "꼭 샴페인이 아니라도 돼요"

    샬로트는 고쳐 말했다.

    "샴페인은 너무 비쌀 테니까요."

    "값 따위 알게 뭐요."

    맥스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좋아요"

    샬로트는 대답했다.

    "왜냐하면 너무 근사했거든요. 당신 몸에 흐르는 샴페인을 혀로 핥는 생각도 했었는데‥‥‥‥"

    맥시밀리언은 더욱 큰 신음 소리를 내며 자못 힘들다는 듯 고개를 들고 한쪽 눈만 뜬 채 곰곰이 생각하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랑스런 샬로트."

    그는 속삭였다.

    "당신이 목사의 따님이라니 정녕 믿기가 힘들군."

    20

    "예정대로 신혼여행을 가야 해."

    시빌은 토스트 위에 맛좋은 잼을 살짝 얹으며 꾸짖었다.

    "네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납치되어서 몇 날 몇 밤을 같이 보낸 셈이라고 분명 안 좋은 말들이 퍼질 게야. 너도 알지 않니, 맥시밀리언. 샬로트에게 그런 짐을 지워서는 안 돼."

    샬로트는 두 사람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끼고 마지막 남은 음식을 꿀꺽 삼켰다.

    "저도 안 가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근심이 살짝 어린 맥스의 따스한 갈색 눈을 바라보며 그가 원하는 바가 어느 쪽일지 추측하려고 애썼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더 복잡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동안 증명되었던 것이다. 전 같았으면 샬로트는 남편이 일정표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필요에 의해서 억지로 일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혹시 여행을 연기하면 그가 싫어하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그리스의 아름다움을 마음놓고 즐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고향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을 만나는 게 좋겠어요."

    시빌이 찬성 못하겠다는 듯 콧소리를 내자 맥스는 냉소적인 눈길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사교계의 예의범절이나 입방아를 신경 쓰셨나요?"

    자기에 대한 비난을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시빌은 까르르 웃어댔다.

    "네가 예전과는 달리 이젠 둔하고 따분한 사람이 아니니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이젠 네 아내가 날 능가하니 앞으로는 누구한테 충격적인 행동을 과시하지? 이젠 은퇴해서 사교계의 규범에 맞춰 안정된 생활이나 해야 할까 보다!"

    맥스가 어머니의 농담을 듣고 미소를 지었으므로 샬로트는 놀라고 말았다. 그녀도 뜻밖의 광경을 보고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상 긴장으로 터질 듯이 팽팽했던 맥스와 시빌 사이는 파리의 호텔에서 체재하는 동안 한결 누그러진 상태였다. 샬로트는 자신이 서로간에 최악의 독설이 오가지 않게끔 다독거리며 완충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존재만이 분위기변화에 기여한 유일한 요소는 아니었다. 샬로트에게 과거를 털어놓은 날 밤 시빌의 내면에도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시빌은 아들 앞에서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한풀 꺾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한결 기분 좋게 응대했다. 별 것 아닌 양보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물꼬가트인 것이다. 샬로트는 언젠가 모자간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럼 저도 일부러 심란하게 해드리려고 애쓰던 버릇을 고쳐야 할까요?"

    맥스의 입매는 자신의 죄를 시인하듯 위로 휘어 올라가 있었다.

    "그럼 이제 저도 유행에 맞춰 머리를 짧게 잘라야겠군요."

    "그러기만 해봐요!"

    샬로트가 충격을 받은 어조로 항변했다. 모자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제일 근사한 모양새가 아니면 난 싫어요. 난 당신 머리가 긴게 좋다고요"

    "제 아내 말이 이렇군요"

    맥스는 놀리듯 샬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빌은 재미있으면서도 일부러 못마땅하다는 듯 신음했다.

    "실컷 웃으려무나. 하지만 사람들은 최신 유행을 따른 사림에게 한층 더 너그럽지."

    그녀는 유쾌하게 말했다. 순간 샬로트는 백작부인의 말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게 아닐까 궁금했다. 시빌은 그녀가 한때 그다지도 부러워했던 사교계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것일까? 샬로트는 자신이 갑자기 억지로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어색했던 기분을 떠올렸다. 샬로트는 가난한 학자의 딸에서 백작부인으로 변신한 것이 맥스의 어머니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내 생각에 너흰 그리스로 가야 해."

    시빌은 졸랐다.

    "소문이 가라앉을 틈을 줘야지, 맥시밀리언."

    맥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정을 다시 짜는 한이 있더라도 버기스 일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은 채 여행을 한다는 건 썩 내키지 않아요."

    "네가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게 나로서는 영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시빌은 곤혹스러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겁쟁이가 도망만 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

    맥스는 극히 조용하지만 너무나 격렬한 어조로 대답했다. 샬로트의 등골에 오한이 찌르르 스치고 지나갈 정도였다. 세련되고 다소 과묵한 그녀의 남편이 위험한 남자라는 사실을 샬로트는 문득 깨달았다. 버기스 경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백작을 과소 평가한 사람은 큰 화를 입고 말 터였다.

    "성이나 길에서도 그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더군요"

    그는 쓰디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을 풀어 찾고 있으니 조만간 그자를 잡고 말 겁니다. 그자가 다시는 아내에게 손을 대지 못할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어요"

    시빌조차 아들의 맹렬한 눈빛에 놀란 것 같았지만 결국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맥스는 그때서야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듯 미소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스 여행을 강행해 스스로 표적이 되느니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그 유명한 아테네 신전을 구경하면서도 적을 경계하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하는 건 싫습니다. 전 캐스털리에서 당분간 지내는 걸로 만족할 테고 그곳이라면 사교계의 험한 입방아도 날아오지 못할 만큼 런던에서 떨어져 있으니까요"

    샬로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염원이 그의 일정을 망치는 사태가 빚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럼 넌 그자가 다시 샬로트를 뒤쫓아오리라 생각하니?"

    시빌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맥스의 눈썹이 험악한 표정을 띠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반의 준비는 해두고 있어야죠. 아내가 용감하게 탈출한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또다시 그런 엄청난 곤경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하지만 그런 시골에서 어떻게 오랫동안 지내겠니?"

    시빌의 어조에는 서식스 지방에 대한 경멸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런던은 어쩌고? 네 일정은 다 어쩌고?"

    맥스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식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눈길로 아내를 훑어 내렸다. 샬로트는 볼에 열기가 확 끼치는 것을 느꼈다.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던 기나긴 밤이 뇌리에 느닷없이 떠올랐다.

    "일정은 정리했어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목사의 따님만 제외하고 전부 말입니다. "

    그들은 트로브리지 일가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샬로트는 다시 가족들을 만나게 된 기쁨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 역시 딸을 꼭 안아 주며 눈물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맥시밀리언의 등을 계속해서 토닥이며 백작님이 우리 딸을 구해 주실 줄 알았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마침내 샬로트는 남편에게 속삭였다.

    "아빠는 당신도 안아 주고 싶으신 거예요"

    맥시밀리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돌아섰다. 노인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와락 울음보를 터뜨리며 어색하게나마 백작을 끌어안았다. 순간 맥스는 너무나 강렬한 감정 때문에 눈을 감았다. 떨리는 그의 손만이 어느 정도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족들이 보여 주는 애정 앞에 가슴이 뭉클했다. 맥시밀리언은 파리에 있는 어머니나 런던에서 그를 기다리는 친구들과는 항상 냉담한 관계였다. 이런 감정은 생전 처음이었다. 이 사람들은 진실로 그를 사랑했다. 그 사실은 여전히 그를 놀랍게 했다.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받아들였고 또 자신들의 애정을 선뜻 무한정 베풀어 주었다. 목사관은 토끼굴처럼 비좁고 발에는 동물들이 밟히며 사방에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곳이었지만 맥시밀리언은 이곳에 눌러앉아 있을수록 점점 더 즐거워진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이들의 요란스러운 목소리며 끈적거리는 손과 말다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족스러웠다. 이 증상을 광기라고 한다면 그는 특히 중증이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으므로 맥시밀리언은 몇 시간이 지나자 샬로트에게 집에 가서 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환영하듯 창문마다 불빛이 빛나는 그레이트하우스로 향했다. 문지방을 넘은 순간 그는 일찍이 몰랐던 행복감이 낮은 노랫소리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현관 한가운데 서 있는 샬로트를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너무나 온당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아아, 맥스."

    샬로트는 조용하고 웅장한 건물을 가만히 둘러보며 숨가쁘게 말했다.

    "난 이 집이 정말 좋아요. 당신이 여길 너무 작다고 생각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여기 종종 머물도록 해요"

    그녀는 간청했다. 물론 그는 그녀의 어떤 부탁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아내와 같은 마음이었다. 마치 고향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하인들이 모두 그들을 맞이하러 나왔다. 샬로트는 한 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말을 걸면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소개를 했다. 복도가 그녀의 온기로 따스하게 밝혀지는 것 같았다. 문득 맥시밀리언은 하마터면 그녀를 영영 잃어버릴 뻔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순간 몸 안이 불에 타듯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그는 솜털 같은 머리카락과 찬란한 미소를 지닌 이 여인 없이는 살아 나갈 수 없으리라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자고 그녀를 재촉하며 시중들 필요는 없다고 하인들에게 말했다. 그들이 주인용 스위트룸에 닿았을 때도 여전히 그녀는 발랄한 기분이었다

    "이 방이 너무 좋아요."

    그에게는 세련되게 장식한 보통 침실에 불과했지만 샬로트는 이곳을 품에 간직하고 싶다는 듯 팔을 활짝 벌렸다. 문득 그는 결혼 전날 여기서 샬로트와 보냈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그도 어느 정도 애정을 담은 눈길로 새삼스레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침대도 너무 좋아요"

    그의 아내는 말했다. 그녀는 기쁜 듯 한숨을 쉬며 침대로 달려가 휘장을 젖히고 이불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가 아내의 장난을 보고 믿어지지 않아 빙그레 웃는 동안 샬로트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일어났다.

    "여태껏 내가 본 가운데 제일 큰 침대예요."

    그녀는 매트리스 위에서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내 침대에서 뛰면 안 돼."

    맥스가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씩 지었다.

    "맥스, 올라와요! 한 번 뛰어 봐요."

    그녀는 같이 뛰자고 그에게 손짓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대대로 위클리프 백작가의 주인들은 이런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행하는 적이 없었다.

    "내가 뛰면 침대가 완전히 부서질 거요."

    "그럴 리 없어요!"

    샬로트는 우겼다. 맥시밀리언은 자신이 무엇에 씌웠는지 결코 알 수 없었지만 돌연 그녀의 옆으로 올라갔다. 그는 뛰었다. 한 번. 두 번‥‥‥‥ 그지없이 묘하게도 자유로운 느낌이 밀려들었지만 다음 순간 침대가 폭삭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맥시밀리언은 침대의 잔해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기둥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커튼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가 한 쪽 눈을 떠보니 얼굴 위에 아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걱정 때문에 동그랗게 뜬 초록색 눈동자에 머리카락은 당연히 풀어져 얼굴 주위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맥스! 맥스! 괜찮아요? 말 좀 해봐요!"

    그녀가 간청했다. 그는 껄껄대며 웃었다. 한때 그의 침대였던 공간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대신 뭔가가 그의 몸 속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사랑하오, 샬로트"

    기분 좋은 여름날 샬로트는 그레이트하우스의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동안 비만 내렸던 끝에 하늘은 새파랗게 개었고 대기는 싱싱하면서도 청명했다. 저택 옆쪽의 잔디밭 저 아래쪽에 연못이 보였다. 탁자 곁에 뻣뻣하게 서 있는 하인만 없었더라면 완벽한 전망이 되었을 터였다. 결혼식 이후로 한 달이 지났다. 샬로트는 남편이 정해 놓은 갖가지 제약 사항에 슬슬 신경질이 뻗치는 중이었다. 어퍼비드웰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자라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마을까지 혼자 걸어가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항상 누군가 다른 사람을 달고 가야 했다. 언니를 방문하러 간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조치는 점점 참기가 힘들어졌다. 샬로트는 불쾌한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버기스에게 만은 온갖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도 지난날이지만 그의 악행으로 인한 여파가 더욱 큰 이유였다. 가끔은 그녀 자신의 생활이 예전처럼 정상으로 돌아갈 날이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안녕 !"

    언덕 아래에서 제인의 외침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거의 매일 가족들은 최소 한 명씩 꼭꼭 찾아왔다. 사실 오후만 되면 온갖 이유를 가지고 우르르 몰려온다는 표현이 옳았다. 샬로트는 왠지 죄의식을 느꼈다. 새신랑인 남편이 귀찮아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맥스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그도 그녀 못지 않게 처가 식구들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제인의 뒤로 캐리와 킷과 제니가 줄줄이 따라왔다. 아이들은 연못으로 달려가 거위를 두어 마리 놀래켰고 그동안 제인은 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늘 피크닉 갈 거지?"

    "물론이지!"

    샬로트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마을의 목초지로 외출할 오늘을 손꼽아 기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맥시밀리언이 과연 동의해 줄까 자신이 없었지만 가족들과 이웃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 절대 안전하다고 마침내 그를 설득할 수 있었다. 하인들은 집에 남아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샬로트는 생각했다.

    "요리사가 아침 내내 바빴는걸. 어떤 먹거리를 준비했는지 보러 갈까?"

    너무나 진지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제인은 언니를 따라 캐스털리의 드넓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요리사는 접시를 리넨 천으로 싸고 있었다.

    "우리에게 어떤 진미를 마련해 주셨어요, 스타우트 부인?"

    샬로트가 물었다. 살집 좋은 여인은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이었지만 트로브리지 가의 막내가 오기만 하면 별미를 먹이고 재롱을 받아 주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흐음, 여섯 가지 코스 요리에 도자기 그릇, 크리스털 잔, 그리고  또‥‥‥"

    "뭐라고요?"

    샬로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스타우트 부인이 가리키는 길다란 의자를 바라보니 바구니가 일렬로 주욱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건 만찬 파티가 아니라 피크닉이라고요!"

    샬로트가 항변했다. 스타우트 부인은 눈을 허공으로 치떴다.

    "백작님의 명령이셨어요, 백작 부인."

    샬로트는 재미있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항상 뚱한 표정인 요리사조차 그 웃음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스타우트 부인. 하지만 백작님은 모르고 하신 말씀이에요. 우리가 백작님께 제대로 알려 드리면 돼요. 그렇지, 제인? 도자기랑 크리스털이랑 그런 건 다 빼주세요. 닭고기를 몇 마리 종이에 싸고 냉육 햄이랑 과일도 좀‥‥‥‥ 아아, 어떤 메뉴가 어울릴지는 부인이 더 잘 아시겠죠."

    "네, 백작 부인."

    스타우트 부인은 맞다는 듯 끄덕였다.

    "백작 부인 말씀 들었지, 리지? 그 시시껄렁한 것들일랑 다 치워 !"

    맥스는 대만찬이 완전 축소된 것을 보고 다소 투덜거렸지만 샬로트는 까르르 웃기만 했고 아이들도 놀려댔기 때문에 그는 마침내 느긋이 앉아 야외에서 먹으니 한결 꿀맛인 소박한 음식을 즐거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사를 하는 동안 땅바닥에 담요를 깔고 앉았다. 그는 속으로는 잔디밭 위에서 노닥거리는 행위가 자신의 위엄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했을지언정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샬로트가 보기에 그는 정말 편안해 보였다. 식사가 끝나자 어른들은 각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자기들끼리 모였고 아이들은 초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다. 남자들은 크리켓경기를 하겠다고 나섰다.

    "같이 하실 거죠, 백작님?"

    토마스가 물었다.

    "그래요, 하세요!"

    제임스가 졸랐다.

    "우리 팀에 끼셔야 돼요."

    "아니야, 우리 팀이야!"

    토마스가 우겼다.

    "아니야, 우리 팀이야!"

    "얘야, 너희는 좋을지 모르지만 난 백작님과 한 편을 안 하겠다."

    억센 몸집의 농부가 영 마뜩치 않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점잖은 분이라 경기를 잘 하실 수 있으려나, 그리고 백작님 옷도 엉망이 될 테고‥‥‥‥"

    그 말에 담긴 도전적인 의미 때문에 트로브리지 남매들 사이에 난상토론이 벌어져 정신 없이 떠들썩한 입씨름으로 번졌고 마침내 맥스는 자기 계층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선수로 나서게 되었다. 샬로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면서 몇 년은 젊어진 듯한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몸놀림은 처음에는 뻣뻣했지만 금세 고급 장화나 그녀의 옆에 놓고 간 시계 따위는 아랑곳 않게 된 듯 그는 어린 소년처럼 자연스럽게 경기에 동화되었다. 아이들은 목이 쉴 때까지 그를 응원했고 샬로트는 까르르 웃어대며 남은 음식을 챙겼다.

    "참 좋은 분이로구나, 샬로트."

    아버지가 말했다.

    "네, 그이는 정말 좋은 사람이죠?"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너무나 행복해서 눈가에 물기가 고일 정도였다.

    "제니는 어디 있지?"

    아이들을 불러모으던 사라가 물었다.

    "킷, 가서 동생을 찾아봐. 시간이 많이 늦어졌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있고 싶어!"

    킷은 반항했지만 큰누나의 화살 같은 눈길을 한 번 받고 나더니 조용해졌다. 아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이웃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킷은 금세 돌아왔지만 혼자였다. 하지만 사라가 미처 아이를 꾸짖기도 전에 아버지가 결연한 몸짓으로 일어났다.

    "내가 찾아보겠다. "

    아버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사라를 바라보더니 그의 책임인 양떼들 사이로 천천히 한가롭게 걸어 들어갔다.

    "아무 데도 없었어."

    킷이 인상을 썼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샬로트 누나한테 전하라고 쪽지를 줬어,"

    그는 작게 접은 종이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샬로트는 마을 사람 중 누가 보냈겠거니 여기고 별 생각 없이 집어들어 펼쳤다. 하지만 내용을 읽은 순간 그녀의 심장이 딱 멎고 말았다.

    '동생을 데리고 있다. 지금 당장 느릅나무 숲으로 오라. 위클리프에게 말하면 아이는 죽는다.'

    샬로트는 마비된 듯한 손에서 종이를 떨어뜨리고 나지막이 신음했다.

    "뭔데 그러니, 샬로트?"

    사라가 물었다. 샬로트는 언니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자가 제니를 데려갔어."

    그녀는 무표정하게 대답하며 일어났다.

    "샬로트! 기다려! 남편에게 먼저 말해야지. 네 남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을 거야."

    사라는 동생을 말리며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샬로트는 사라가 이제 맥스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안 돼."

    그녀는 언니의 손길을 떨쳐 버렸다. 그녀는 이웃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뚫으며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가슴에 품고 잽싸게 빠져나갔다. 제니가 그 정신병자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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