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18화 (18/19)
  • 18.

    맥시밀리언은 신부가 친구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은 행복으로 빛났고 그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듯한 벅찬 감정을 느꼈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적어도 그가 한때 정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비슷한 점이 없었다. 캐스털리의 광대한 잔디밭에는 식탁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랠리 남매가 앨프며 빵집 아들과 함께 뒤섞여 앉아 있었다. 사실상류 사회 하객보다  을 사람들이 더 많았고 어딜 가나 손님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듣기 좋은 웃음소리로 깔깔거리고 새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대는 아이들투성이였다. 런던에서 거행되는 전형적인 결혼식에 비교하자면 왁자지껄한 대소동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관에서 그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점점 마음이 열렸던 것처럼 지금도 맥시밀리언은 처가 식구들의 명랑한 성격을 유쾌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는 하객들 중 나인핀(현재의 볼링의 시초가 된 놀이)을 하자는 사람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귀여운  마 계집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았다. 마침내 아이가 잠들어 버리자 아이의 엄마가 크게 당황하며 아이를 데려갔다. 전체 분위기는 시끄럽지만 그가 숱하게 참석했던 어떤 결혼식보다도 한층 따스하고 친근했다. 어느새 그는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는 원래 나이보다 절반은 더 젊어 보일 정도로 정정하고 건강한 오거스타가 조카인 목사와 소리내어 웃는 광경을 보고 미소지었다. 결혼식이 그녀의 건강에 엄청난 공헌을 한 게 분명했다.

    "킷."

    그는 옆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려던 갈색 뭉치를 불렀다.

    "네 , 백작님?"

    "등뒤에 숨긴 그 케이크를 내놓아라. 이미 오늘 하루치로는 충분할 만큼 먹었잖니.  가 마음껏 먹는 것은 좋다만 내 결혼 피로연에서 음식을 슬쩍 빼돌리는 건 허용하지 않겠다."

    "네, 백작님"

    킷은 불만스런 기색이었지만 작은 손에 쥐고 있던 엄청나게 큰 결혼 케이크 조각을 내놓았다.

    "식탁에 올려놓으렴."

    맥시밀리언은 지시에 따르는 킷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이 미처 숨 한 번 제대로 쉬기도 전에 아이는 크림과 장식으로 끈적끈적한 손을 새 상의에 쓱싹 닦아 버렸다. 맥시밀리언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해도 내가 항상 한 발 늦는구나, 그렇지? 하지만 나도 차츰 배워가는 중이란다. 얼른 집으로 들어가서 손 씻고 요리사에게 옷을 닦아 달라고 하렴. 신사란 디저트를 옷에 묻히고 다니지 않는 법이야. 하지만 가기 전에 한 가지만 가르쳐 다오. 오후 내내 날 잡아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저 기분 나쁘게 생긴 청년이 누구지?"

    "아, 빌리 홉슨이에요. 방앗간집 아들이죠."

    킷이 설명했다.

    "사라 누나 말로는 심술쟁이랬지만 아빠는 남들 험담을 절대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림 샬로트 누나는 뭐라고 하던?"

    킷은 적당한 대답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려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저 남자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맺을 마음이 없다고 했어요"

    "아하! 구혼했다가 퇴짜맞은 게로군. 심술궂은 건 둘째치고 그래서 저렇게 안색이 험악했나보구나."

    킷이 다른 소년에게 고함을 지르며 집 쪽으로 뛰어가 버렸기 때문에 맥시밀리언의 마지막 말은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오랜 세월 익힌 예의범절만 아니었더라면 맥시밀리언은 아이에게 손을 씻으라고 고함을 쳐주었을 것이다. 맥시밀리언은 유쾌하게 한숨을 내쉬면서 목사의 아들에게서 목사의 딸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는 언니와 한참 얘기 중인 신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른한 미소를 보냈다. 심장이 멎을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는 샬로트의 표정에서 그는 두 자매가 무슨 얘기 중이었는지 정확히 집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새침한 언니 쪽은 여동생에게 바람직한 결혼생활의 비결을 일러주는 장면을 들키자 볼을 붉혔다. 맥시밀리언은 일부러 사라를 당혹스럽게 만들려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이것도 약과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에 게 한 번도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형이 친절하게도 여동생에게 전수해 준 정보를 고맙게 생각했다. 지금 처형은 샬로트의 지식을 더욱 늘려 주고 있을까? 맥시밀리언은 그 생각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샬로트에게는 따로 교육이 필요 없지‥‥‥‥그의 사랑스러운 신부는 어떤 고급 창부와 맞서도 지지 않을 정도의 본능적인 기술을 타고 태어난 여인이었다. 또한 어젯밤에 세웠던 그녀의 계획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는 오늘 그녀와 침대에 들고 싶어 안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명분으로 그를 유혹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격렬했던 유희는 그의 욕망을 더욱 자극했을 뿐이었다. 그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려면 둘이서 1주일은 침대에서 꿈쩍도 않고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스로 떠나는 신혼 여행을 연기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잔디 건너편에 서 있던 샬로트는 새신랑을 바라보았다. 도발적인 미소를 띤 그의 입술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갈비뼈에 부딪혔다.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런던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잘생기고 세련되어 보였다. 어쩌면 이곳에서는 긴장을 풀 수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런던에서는 부족했던 여유만만함과 우아함이 그의 몸에 깃들여 있었다.

    "샬로트!"

    사라의 목소리 때문에 결국 그녀는 남편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너 정말‥‥‥‥설마 우리가 한 얘기를 네 남편에게 한 마디라도 한 건 아니겠지?"

    평소에는 항상 낮고 침착하던 사라의 목소리가 긴장되어 높이 올라갔다. 샬로트가 흘끔 바라보자 언니의 얼굴은 아예 진홍색이 되었다.

    "대체 왜 그래?"

    샬로트가 물었다

    "왜 그러냐고? 네 남편이 날 이상한 표정으로 보고 있잖니."

    "아아, 그이한텐 신경 쓰지 마. 그이는 아마 빨리 파티를 끝내고 첫날밤을 맞고 싶은 나머지 안달이 나서 그럴 거야."

    "샬로트!"

    사라는 '헉' 하며 숨을 들이켰다.

    "네 그 노골적인 말투는 나와 단 둘이 목사관의 부엌에 있을 때도 적절하지 않았지만 손님들이 가득한 이곳에서는 정말로 경우를 벗어난 거야!"

    "아이, 성가셔! 지금 자리를 뜨면 좀 이르려나?"

    "샬로트!"

    "어머, 저기 빌리가 있네. 맥스를 목이라도 졸라 죽일 기세야. 누가 저 사람을 초대했지?"

    "누구? 아. 방앗간집 아들 말이구나. 저 사람한테는 가까이 가지 마, 샬로트 저 사람은 해가 갈수록 난폭해지는 데다 청혼을 거절당한 뒤부터는 너한테 앙심을 품고 있어."

    샬로트는 과히 우아하지 못한 콧소리를 냈다.

    "내가 빌리처럼 천한 남자랑 산책이라도 하고 싶어할 줄 알아? 저 사람은 예전부터 항상 심보가 고약했어 !"

    그녀는 잠시 멈추고 그 젊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저 사람이 결혼식을 망쳐 놓을 계획이나 품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래야지. 맥스는 오후 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중이야. 마침내 날 손에 넣어서 나 때문에 곤경에 빠질 일이 더 이상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

    "흥!"

    사라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네 남편은 널 아직 잘모르는구나. 그렇지 않니?"

    샬로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왓킨스 가족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키스하고 값진 드레스를 가까이에서 구경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지만 머릿속은 맥스와 다시금 단 둘이 될 시간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나중에 샬로트는 그때 좀더 주위를 경계하지 않았던 점을 자책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결혼식 날이었고 친구며 친지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데다 멀지 않은 곳에는 겉보기에는 우아하지만 실상은 드잡이부터 결투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척척 해낼 남편도 있었다. 그녀가 런던에서 내내 발동시켰던 조심성은 이곳 서식스에 와서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고 그 덕에 그녀는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녀가 드레스에 묻은 얼룩을 닦고 머리에 다시 핀을 꽂으려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오전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이젠 주위에 축하 인사를 건네는 하객들도 없었다. 그녀는 조용한 자기 방에 혼자 있게 되자 안도감을 느꼈다. 지난밤 격렬하게 보냈던 데다가 하루 종일 바빴던 여파가 갑자기 확 몰려들었다. 순간 묘한 냄새가 나더니 뭔가가 그녀의 입을 덮고 이상한 연기를 억지로 들이마시게 했다. 짧은 순간 그녀를 덮친 공포는 이상한 무력감에 흡수되고 말더니 다음 순간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구름처럼 주위를 감쌌다. 샬로트는 깨어났을 때 주위에 감도는 역겨운 냄새 때문에 속이 왈칵 뒤집히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야 그녀는 자기가 있는 곳이 배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템스강에서 유유하게 뱃놀이하는 꿈이 악몽으로 바뀌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꿈이 아니었고 그녀가 있는 곳도 템스강이 아니었다. 샬로트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은 없었지만 파도 때문이 아니고서야 배가 이렇게 까딱거릴 리가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기억이 천천히 돌아왔다. 벌써 그리스로 가는 중일까? 그녀는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맥스?"

    그녀의 떨리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부인하는 낮은 말소리였다.

    "그자 생각은 이제 그만두시지, 샬로트. 그자는 더 이상 당신을 어쩌지 못해. 마침내 당신은 그자에게서 자유로워진 거요. 우린 이제 함께 있게 됐소. 처음부터 이렇게 됐어야 하는데 말이야."

    샬로트는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목소리의 임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기스 경은 아편이 분명한 파이프를 물고 등을 기댄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피로연에서 먹었던 음식물을 게우고 말았다. 어찌어찌 하여 샬로트는 죽지 않고 도버 해협을 건넜다. 하지만 너무나 몸이 좋지 않아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담요로 꼼꼼하게 감싸더니 어슴푸레하게 황혼이 감도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녀는 마차에 누워서 흔들리지 않는 땅을 밟아 봤으면 하는 소원이나 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는 버기스 경에게 이끌려 어떤 성으로 갔을 때도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여인숙치고는 너무나 괴괴한 그곳은 아마도 그의 사유지 같았다. 어차피 그들은 이제 예의범절 따위와는 완전히 결별하다시피 한 처지였으므로 그녀는 그저 침대가 움직이지 않는 바닥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문에 든든한 자물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녀는 문을 잠근 뒤 엉망으로 구겨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누워 죽은 듯이 잠들었다. 눈을 뜬 샬로트는 말수 적고 뚱한 표정을 한 프랑스인 소녀의 시중을 받았다. 소녀는 목욕 준비를 해주고 그런 대로 몸에 잘 맞는 새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하지만 하녀는 어떤 질문이나 대화도 거부한 채 다만 '무슈'께서 주간용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만 전했다. 샬로트는 창문으로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지만 지금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잘 몰랐고 그녀의 프랑스어도 그렇게까지 유창하지 않았기에 일단 버기스 경과 얼굴을 맞대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가 이성을 되찾도록 잘 구슬려볼 수도 있다. 혹시 그녀를 유괴한 것은 아편 때문에 잠깐 발작증세를 일으켰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는 그녀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을 몰랐거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맥스에게 가차없이 죽임을 당하리라는 사실을 몰라서‥‥‥‥

    "안녕하시오, 아가씨."

    창가 식탁 앞에 앉아 있던 버기스는 커피를 다 마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오늘 아침에는 한결 제정신으로 보였고 항상 따라다니던 역겨운 냄새도 풍기지 않았으므로 그녀에게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같이 아침을 들겠소?"

    "고맙지만 됐어요."

    샬로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지금 즉시 남편에게로 돌아가고 싶어요."

    버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 참 처치 곤란한 행사였지. 내가 좀더 일찍 그곳에 도착하지 못한 점은 사과하겠소 하지만 당신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금방 알아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식이 시작되기 전에 도착했으면 했지만‥‥‥‥뭐, 어쨌든 간에 혼인 무효 선언은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거요."

    샬로트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자가 정신이 나갔나?

    "난, 혼인 무효를 원치 않아요.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요!"

    "이거, 진정해요, 샬로트."

    버기스의 입술에 아니꼬운 선웃음이 서렸다.

    "위클리프가 당신과 결혼한 유일한 이유는 당신들 둘이 미묘한 상황에 처한 광경을 들켰기 때문이라는 걸 당신도 나도 알고있잖소,"

    "그렇지 않아요. 바로 얼마 전에도 당신은 그 사람이 날 차지하고 싶어한다고 했잖아요. 당신 말이 분명 옳았던 거예요."

    "당신을 원했을 지는 모르지. 하지만 당신을 차지한 건 아니잖소, 그렇겠지? 난 결혼식에는 늦었지만 그래도 첫날밤 전에는 도착했지. 결혼은 별 말 없이 취소될 테니 모든 게 다 조용해지면 그때 영국으로 돌아가는 거요."

    샬로트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당신 미쳤군.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없었던 일이 될거라 생각하고 남의 신부를 유괴까지 한단 말인가. 그것도 위클리프 백작의 신부를. 백작은 아마 격노할 것이다. 샬로트는 그가 정성 들여 계획한 그리스 여행을 생각하니 울고 싶어졌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면 더 이상은 곤경에 처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기대했을 텐데 지금 그녀는 또 다른 곤경, 그것도 최악의 곤경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침착하고 냉정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에게 절대 지지 않겠다. 여태껏 혼란스러운 감정과 동요를 견뎌내고 결국 꿈에 그리던 결혼을 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 방해꾼이 죄다 망쳐 버리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혼인 무효는 없을 거예요."

    샬로트는 나직이 말했다.

    "당신은 진짜로 늦은 거니까요, 버기스 경.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맥스는 이미 애인 사이였고, 결혼한 건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어요."

    버기스의 얼굴에서 아니꼬운 웃음이 싹 사라지더니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더니 화가 나서 마구 지껄여댔다. 샬로트는 뒷걸음질쳤다.

    "오호, 그랬군! 그자가 알아낸 거지, 그렇지? 그 개자식이 !"

    "뭘 알아내요?"

    샬로트는 자기를 절대 겁쟁이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광란에 불타는 버기스의 눈동자를 보니 오싹해졌다. 그녀는 그의 광기에 대한 화신이 열 곱절로 늘어났다.

    "날 바보 취급하지 마시지, 트로브리지 양."

    버기스는 씩씩댔다.

    "위클리프 녀석은 내내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갑자기 얼토당토않게 목사의 딸년에게 관심을 품은 게지. 그자가 당신을 유혹해서 아이를 배게 하고 결혼한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어. 애번들 백작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지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망할, 작위 말이오! 당신 외가쪽 종조부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작위는 공석이 되었지. 당신도 알겠지만."

    "외가요?"

    "그 작위는 우리 아버지에게 왔어야 했소. 당연히 우리 아버지 것이었는데 당신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차버리고 시시껄렁한 목사 나부랭이를 택했지. 난 평생 아버지가 놓쳐 버린 기회를 아까워하면서 우리 어머니를 탓하느라 고래고래 악을 쓰는 소리를 듣고 살았소. 그렇지, 아이를 가져서 아버지에게 억지로 결혼을 강요했던 건 전부 어머니의 잘못이었지. 하지만 이제 모든 게 완벽하게 제자리로 돌아왔소. 아버지가 차지했어야 마땅한 것이 이젠 내 손에 들어올 거요. 위클리프 같은 자식에게 넘겨줄 줄 알아! 아이 따윈 상관없이 이 결혼은 취소될 테고 당신은 법적으로 내게 속하게 될 거요"

    샬로트는 그의 두서 없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말을 이치에 맞게 조합해 보려고 애썼다. 커루 집안 사람이던 외할머니가 언뜻 기억에 남아 있긴 하지만 외가 쪽에 백작위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과부가 되신 뒤 외할머니는 어퍼비드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서식스의 작은 집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샬로트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하지만‥‥‥ 왜 당신이?"

    샬로트도 흥분해서 마구 지껄여댔다.

    "정말로 주인 없는 백작위가 있다면 제임스나 토마스나 형부에게 돌아가야 하잖아요? 형부는 우리 집안 맏이의 남편이니까요"

    덩치만 크고 말 없는 앨프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백작님' 소리를 들으며 시중을 받는 모습을 그려보니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와 침착성을 잃어버릴 뻔했다. 버기스는 역겹다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하! 고상한 피 한 방울 제대로 흐르지 않는 목사네 애새끼들한테? 그것들은 작위 복원을 요청하려면 어떻게 청원해야 하는지 방법도 모를걸! 그리고 무일푼인 목사네 아들한텐 절대 그런 작위가 내려지지 않아, 이 건방진 멍청이 아가씨. 내겐 고귀한 핏줄이 있고 돈도 있지. 난 이미 남작이니까. 하지만 난 훨씬 더 높은 작위를 가질 자격이 있어. 두고 보라고 난 손쉽게 그 작위를 차지하고 말 테지만 위클리프에겐 어림도 없지."

    버기스는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샬로트는 위클리프 백작에게는 이미 자작이며 남작이라는 작위가 있으니 안 그래도 기나긴 이름에 굳이 작위를 하나 더 덧붙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줄까 싶었지만 망설였다.

    "그럼 왜 날 노렸던 거죠?"

    샬로트는 끈질기게 캐물었다.

    "난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요. 왜 제인이 혼인 적령기가 될 때까지 못 기다리는 거죠?"

    그리고 당신은 그동안 감옥에서 썩으면 딱 좋을 텐데. 사실 샬로트는 여동생 중 누구라도 버기스와 결혼하는 꼴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쨌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녀가 시간을 조금만 벌 수 있다면 그동안 맥스가 나타나 다시는 남작이 그들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손을 봐줄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제인? 제인! 그 못생긴 년 얘긴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

    버기스는 격노한 나머지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계집애들 중 어느 하나도 필요 없어 !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야, 샬로트. 당신 하나뿐이라고! 당신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지. 그건 알고 있겠지?"

    그는 어조를 누그러뜨리더니 느긋이 앉아 그녀를 살펴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침실에 당신 어머니 초상화를 모셔 두었소. 그 덕에 우리 어머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아버지의 기준에 맞출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의식하셨지. 물론 어머니는 절대 그러지 못하셨고 그렇게 애만 쓰다가 돌아가셨지만‥‥‥‥"

    버기스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말꼬리를 끊더니 다음 순간먹이를 눈앞에 둔 고양이처럼 다시금 그녀에게 시선을 못박았다.

    "아직도 그 그림은 내 손에 있지. 하지만 실물을 손에 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어. 당신이 브래들리하우스에서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난 당신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지. 그때 당신은 마치 환상처럼 나타났어 환상처럼."

    그는 속삭였다.

    "난 수많은 환상을 보지. 가끔은 확실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실재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거야."

    샬로트는 굳이 입씨름을 벌이지 않았다. 버기스에게 이성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녀는 단지 그가 런던에서 이런 이상한 면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때 그는 부드럽고 과묵하고 예의바른 태도에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람 같았다. 하마터면 자발적으로 그와 결혼할 뻔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몸서리쳤다. 맥스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평생을 이 미치광이와 살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그 생각을 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그를 이성적으로 설득시키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 점은 너무나 명백했다. 그녀는 그래서 그를 구슬리기로 했다.

    "좋아요"

    샬로트는 말했다.

    "그럼 남작님께서 모든 걸 알아서 해주셔야겠군요. 지금은 몸이 좀 불편한 상태라서 괜찮다면 이만 방으로 돌아가고 싶군요."

    버기스는 그녀가 갑자기 순종적으로 돌아서자 어리둥절하다는 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그가 과연 물러나도 좋다고 허락할지 불안해졌다. 야수에게 쫓겨 구석으로 몰린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조금이라도 무섭다는 기색을 내비치면 공격당할 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양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침내 그의 숨결이 고르게 잦아들더니 눈에서도 굶주린 빛이 사라졌다.

    "그럼 가 보시오. 당분간은 여기 머무를 테니 쉬도록 하고 저녁 식사 때 내려오시오

    "샬로트는 끄덕였다. 그녀는 남작이 프랑스로 온 이유를 깨달았다. 화날 때야 용감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아직도 위클리프 백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괴상망측한 행동을 남발한다 해도 그에게는 추적을 피하려는 이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은 마음을 진정시켜 주지 못했다. 샬로트는 맥스가 와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불변의 진리 못지 않게 그 사실을 확신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기였다. 그는 언제 도착할까? 그가 그녀의 실종을 알아차리고 버기스를 의심해 뒤쫓기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남작은 분명 자신의 자취를 교묘히 지웠을 테니 맥스는 아마 지금쯤 버기스의 영지에 그녀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곳을 열심히 뒤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이곳 유럽 대륙에서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남자에게 갇혀 있는 몸이었다. 아래층에서 버기스가 보인 무시무시한 행동을 보면 그에게 이성을 유지할 만한 힘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만약 버기스가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예 그녀를 감금해 달아날 기회를 모두 차단시킨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지만 그녀는 다가올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버기스는 다른 구혼자들과는 달리 예전에

    도 키스 한번 하려 든 적이 없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해협을 건널 때는 그녀의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그의 눈길을 끌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하려 든다면?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샬로트는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맥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했다. 혼자 힘으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결심을 곧장 행동에 옮기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나 하고 방 안을 뒤졌다. 하지만 버기스는 그녀를 가두는 감옥에 대해서도 이성을 단단히 발휘한 게 분명했다. 방은 가구와 옷장 안에 걸린 드레스 몇 벌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휑뎅그렁했다. 뭔가 있어 보일 듯한 트렁크가 안쪽에 처박혀 있었지만 옷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샬로트는 혹시 장식용 검이나 성능 좋은 권총이라도 나올까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서랍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한때 시골 신사의 고급 상의에 달렸음직한 낡은 단추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그녀는 바지 한 벌을 꺼내 자기 몸에 대본 다음 더 작은 옷을 찾아 뒤졌다. 단이 너무 길고 허리가 무척 컸지만 그나마 거기 있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나았다. 그녀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한때 위클리프 백작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선사했던 풍만한 가슴을 천으로 꽁꽁 묶은 다음 셔츠와 조끼, 상의를 입었다. 아래쪽을 씁쓸한 눈길로 훑어본 그녀는 그 결과가 상당히 미덥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전날 밤을 제외하면 그녀가 남장을 했던 것은 너무나 오래 전 일이었고 그녀의 몸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래 가지고서는 어느 누구의 눈도 속일 수 없었다. 뭔가 남장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방 안을 훑던 샬로트의 눈길이 침대에 멎은 순간 빛났다. 그녀는 환호성을 억누르며 겉옷을 벗고 베개를 집어들어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그녀는 다시 옷을 다 갖춰 입고 평가하듯 자기 몸을 훑어보았다. 이제는 적어도 여자 같은 모습은 덜해졌고 땅딸막한 남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되도록 꽁꽁 말아 올려서 테가 넓은 구식모자 속으로 집어넣은 다음 어느 누구에게도 가까이 다가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창문으로 기어 나갔다. 어릴 때부터 목사관을 몰래 빠져나갔던 전력 덕에 그녀는 가까이 있는 나무로 풀쩍 뛰어내릴 수 있었다. 동작이 좀 서투르긴 했지만 그녀는 아무 탈 없이 나뭇가지 사이에 착지할 수 있었다. 아래쪽의 지면에는 황량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버기스는 그녀를 가두어 놓았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기 싫었겠지만 도리어 그런 조심성이 샬로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샬로트는 혹시 성에서 누가 내다보고 알아챈 기척이 나나 싶어 내내 신경을 쓰면서 조심조심 땅으로 기어 내려와 마구간 쪽으로 내달았다. 그녀는 외따로 떨어진 마구간 건물에 닿은 뒤에도 혹시 마부와 마주치게 될까봐 두려워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구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있는 것은 말 몇 마리뿐이었다. 그녀는 순해 보이는 암망아지를 골랐다. 실행에 옮겨 보니 너무나 간단했다. 문득 샬로트는 깨달았다. 런던에 있을 때 독불장군 후견인처럼 굴었던 맥스 때문에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자기 한 몸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연약한 아가씨라고 생각했었다. 버기스도 그녀가 오지도 않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방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으리라 단단히 믿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엄한 감시를 붙이지 않은 것이다. 아마 시즌의 여왕들은 대부분 창문으로 넘어 다니지 말라고 교육받았겠지, 그녀는 말등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그런 아가씨들은 주위 상황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낯선 나라에 홀몸으로 떨어졌을 때 기절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리라. 하지만 서식스의 아가씨들은 꿋꿋했다. 그녀는 멋진 백작에게 구조받는 것도 좋았지만 자기 힘으로 곤경을 훌륭하게 헤쳐 나갈 능력도 갖고 있었다. 안장에 올라탄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버기스는 그녀가 영국의 남편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해안가로 도망갔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방향을 바꿔 내륙 쪽으로 말을 몰았다. 샬로트는 세계 지리에 대해서 아주 깜깜하지는 않았으므로 파리가 도버 해협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의 정확한 위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파리 쪽으로 진로를 잡아 전진하면서 강도를 만나지나 않기를 빌 뿐이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파리였다. 버기스가 꿈에도 예상치 못할 곳이었다. 그녀가 도망갔다는 사실이 발각될 때까지는 아직 몇 시간 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다면 버기스가 끝없이 아편에 취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녀는 거기에 큰 기대를 걸 수 없었다. 버기스가 그녀의 탈출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그녀의 진로를 예측하지 못하기를. 그리고 또‥‥‥‥ 샬로트는 눈을 깜박이면서 속으로 계속 소원을 빌며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였다. 그녀를 찾아냈을 때 버기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니 몸서리가 처졌다. 어둠이 깔리자 샬로트의 숨결도 다소 편해졌다. 그녀는 화재로 소실된 어떤 집의 낡은 헛간을 찾아내 밀짙 위에 동그마니 누웠다. 용감하고 기특한 암망아지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 말이 지치지만 않았으면 그녀는 달과 별을 벗삼아 계속 길을 갔을 것이다. 너무 마음이 격하고 배가 고파서 잠을 잘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먹은 것이라고는 중천경에 찾아낸 나무 열매 조금과 잡초가 무성한 어떤 정원에서 훔쳐낸 당근 몇 개가 전부였다. 지금은 아까 떠나기 전에 버기스가 권하는 대로 앉아 아침을 든든히 차려 먹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전날 몸이 안 좋아서  뱃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냈고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트로브리지 가의 살림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배를 곯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뱃속을 좀먹는 이 낯선 공복감은 자꾸 그녀를 잠 못 들게 방해했다. 하지만 결국 피로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렸다. 그녀의 머리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맥스였다. 맥스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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