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14화 (14/19)
  • 14.

    샬로트는 눈을 깜박이며 인쇄된 활자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몰두하려 해도 그럴수록 눈앞의 책을 갖다 준 장본인에게만 끊임없이 생각이 쏠렸다.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듯 장정을 어루만지면서 책갈피마다 꽂혔을 그의 거무스름한 눈동자, 책을 든 단정한 손을 상상했다.

    "괘씸한 사람!"

    샬로트는 아무도 없는 방에 대고 쏘아붙였다.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혹시 우아하게 성큼성큼 저택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이나 마차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래 정원은 완전히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열망을 저주하며 돌아섰다. 조기 진압된 그녀의 도피 사건 이후 길고 힘든 한 주가 지났다. 샬로트는 갖가지생각을 돌이켜 곱씹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에게는 생소하다시피 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필요했다. 그녀는 자칫하면 완전히 실패할 참이었다. 시즌이 막바지로 치닫는 지금 그녀는 아무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돈은 공중에 뿌려지듯 그렇게 낭비되어 버렸다. 그녀는 절대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제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를 믿고 의지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가족들에게 무슨 수로 보상을 해야 할지 샬로트는 막막했다. 가족들이 그녀를 꾸짖을 리는 없었다. 샬로트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의 얼굴을 보기가 더욱 두려웠다. 그들은 그녀가 돌아온 것에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의 사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고 사랑스럽고 현명한 사라조차도 별 말 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아버지의 돈을 얼마나 썼는지 점검하고 정원에 채소밭을 가꿔야 한다고 말하리라. 샬로트는 눈을 깜박여 눈물을 참았다. 가족들의 친절은 사태를 한층 악화시킬 것이다. 차라리 맥스처럼 그녀에게 고래고래 퍼붓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하면 맞서 싸울 수라도 있다. 하지만 가족들의 상냥한 미소 앞에서라면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자책만을 거듭하게 되리라.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앓았던 우울증의 초기 단계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극복할 방도란 없는 것 같았다. 오거스타가 쾌차했다는 소식도 그녀의 기분을 고조시켜 주지 못했다. 맥스를 만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만이 그녀의 기분을 밝게 해줄 수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맥스는 단호하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샬로트는 그날 이후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 날 노상에서 팽팽한 분위기를 연출한 두 사람은 시빌의 마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들 앞에 다친 모습으로 나다녀야 하다니 그 무슨 망신이냐면서 쾌활하게 깔깔댔지만 샬로트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부어오른 건 아닐까? 그 아름다운 입술이 검푸르게 멍들지는 않았을까? 그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고 약을 발라 주며 극진하게 간호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여기가 캐스털리였다면 그를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방문을 가로막는 런던 생활의 제약이 저주스러웠다. 인습 따위는 무시한 채 무작정 그의 집으로 가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맥스가 반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는 달리 그는 규율을 깨거나 그레트나그린 미수 사건으로 인해 빛이 바랜 그녀의 평판을 위험에 빠뜨릴 행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끔 샬로트는 차라리 평판이 망가졌으면 하는 비겁한 소원을 품기도 했다. 그러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 없이 귀향할 수 있고 남편감을 못 얻었다는 책망을 들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그녀의 평판은 여전히 건재했다. 물론 수군대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시빌은 남작이 갑작스럽게 고향으로 내려가야만 했다고 둘러댔다. 실로 갑작스러웠지, 샬로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스운 일이긴 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초대를 받고 외출했지만 이제는 소규모의 행사에만 참석했고 그나마 항상 그녀를 감독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과 동행했다. 시빌이 여의치 않을 때는 랠리가 주로 그 역할을 맡아 주었다. 한때 그녀의 넋을 빼놓았던 호화로운 장소, 넘쳐나는 음식과 화려한 의상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비참했다. 숭배자들은 여전히 그녀의 주위에 몰려들어 다과를 갖다 주고 같이 춤추자고 애원하며 미소라도 한 번 받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샬로트가 보고 싶은 얼굴은 딱 하나였다. 그것도 얻어맞아 멍투성이가 된 얼굴. 하지만 그녀는 그를 보지 못했다. 맥스는 그녀를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주 초반에 그는 시빌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 의무를 방치한 그녀에게 따끔한 설교를 하고 만약 앞으로 손님을 더욱 더 신경 써서 지켜보지 않는다면 연금 지급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샬로트는 그 경고는 물론이고 시빌이 그런 얘기를 자신에게 술술 해줬다는 점에서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그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모두 재미있게만 생각하고 맥시밀리언다웠다고 웃어넘겼다. 심지어는 엉망이 된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들의 꾸중을 듣는 동안에 그나마 잠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었다고까지 했다. 얘기는 시빌의 잡담이 항상 그렇듯 유쾌했지만 알아듣기가 힘들었으므로 샬로트는 그다지 주의해 듣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밤 시빌이 주최하는 소규모 축하연에 맥스가 온다고 했을 때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한 번 더 춤을‥‥‥‥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마지막 키스였지만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아주 드물게나마 맥스가 그녀를 갖고 싶은 여인처럼 대했던 적이 샬로트의 기억 속에 생생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뜨거운 포옹보다는 꾸지람을 들을 공산이 한결 컸다. 샬로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런 사이로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맥스의 그윽한 갈색 눈동자에 그녀를 원하는 감정이 가득했던 모습 같은 즐거운 기억을 지니고 귀향하고 싶었다. 그에게서 결코 그 이상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치유될 때까지 의지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밤은 그런 추억을 만들 마지막 기회였다. 시빌은 아직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시골의 저택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사교계에서 여름은 대규모영지의 저택에서 며칠씩 접대 파티를 열거나 바스처럼 유명한 온천지 관광을 떠나는 철이었다. 이미 샬로트는 그런 곳에 같이 가자는 초대장을 여럿 받았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런 여흥에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맥스였다. 오늘 저녁은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뭉글뭉글 일어나는 열기를 느낄 마지막 기회였고 그녀의 심장이 가슴속에서 뜀박질을 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평생의 마지막 기회. 그래서 샬로트는 매순간을 음미할 생각이었다. 맥시밀리언은 현관에 우아하게 걸린 금박 장식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흘끗 비춰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눈가와 입 주위가 얼마 전에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얼룩덜룩했으므로 언짢은 기분은 더욱 커져 가기만 했다. 슈발리에의 눈길을 느낀 맥시밀리언은 천천히 돌아서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참이냐는 눈길로 프랑스인 하인을 압도했다. 일단 하인은 현명하게 침묵을 지키기는 했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마구 뛰어 놀았다.

    "백작님의 어머니께서는 아직 내려오지 않으셨지만 트로브리지 양은 정찬용 식당에서 다과를 점검하고 계시는 걸로 압니다. "

    맥시밀리언은 고맙다는 표시로 퉁명스레 고개를 까딱하며 엄한 눈길로 쳐다보았지만 슈발리에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 그의 권위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조차 사방팔방 도전을 받고 있었다. 샬로트를 알게 된 이래 그는 끊임없이 불안에 떨게 된 것 같았다. 이제 그에게서 권위란 영영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털어 버리려고 등을 곧추세운 다음 식당으로 향했다. 그 식당에는 어느새 그에게 있어 찢어진 입술과 멍든 눈보다도 한층 속을 긁는 눈엣가시가 된 여인이 있으리라. 그는 지난번 예고 없이 시빌의 집에 들렀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너무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식당 안을 바라보았다.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가 정열로 불타는 구혼자에게 안겨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밀려든 강렬한 안도감은 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휘저어 놓았다. 그는 그 점을 확신했다. 제정신을 찾을 날이 다시 오기는 할까? 맥시밀리언은 아무 말 없이 탁자에 놓여 있던 샴페인 잔을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여태껏 굳이 억지로 안정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녀는 여느 때보다도 한층 아름다웠다. 튀는 디자인의 호화롭고 값진 공단 드레스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를 더욱 강조해 주었다. 파티에 참석한 모든 남자들의 눈길을 끌만큼 목선이 가슴 위까지 푹 패여 있었으므로 안 그래도 황홀한 모습이 그 덕에 세련되면서도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 맥시밀리언은 경악한 나머지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의상이 자기 어머니의 화려한 취향대로라는 것을 알아챘다 오거스타 서굿이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옷이었다.

    "샬로트!"

    그는 노성을 내질렀다. 원래는 그렇게 고함을 칠 생각이 아니었다. 세상에, 여태껏 큰 소리 한번 낸 적 없던 그가! 하지만 그 드레스를 본 남자들이라면 하나같이 그 옷을 벗겨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소리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소리를 들은 샬로트는 깜짝 놀라 황급히 돌아섰고 그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잔이 그의 조끼에 철벅 쏟아졌다.

    "망할, 샬로트!"

    그때는 무엇에 씌웠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맥시밀리언은 목사의 딸 때문에 음식물 세례를 받는 것이 정말로 싫었던 고로,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성이 딱 멈춰 버리고 말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머뭇거릴 새도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도발적인 드레스 앞자락에 몽땅 퍼부었다.

    "맥스!"

    샬로트는 새된 소리로 나직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자신이 예의에 어긋나게 이렇게 끔찍하고 추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맥시밀리언은 들고 있던 잔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들어올려 마치 잔이 저 혼자 그런 짓을 했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책임이 있는 쪽은 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그는 다시 샬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아연실색해 있거나 거의 혼절 직전이거나, 혹은 우는 등의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했다. 아니, 그가 아는 샬로트라면 펄펄 뛰며 번개같은 발길질로 그를 걷어찰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종류의 반응을 일절 보이지 않았으므로 맥시밀리언은 무한히 안도하는 한편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재미있어하며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금발이 아래위로 흔들리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응은 그의 행동 못지 않게 너무나 놀라웠다. 다음 순간 그가 사과의 말을 입에 채 담기도 전에 그녀는 탁자에 놓인 다른 잔을 들더니 그를 겨냥해 뿌렸다. 술은 그의 검은색 상의 어깨춤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망할. 샬로트. 정신 나갔소?

    "맥시밀리언은 마음속에서 불신과 격노가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샬로트는 대답도 없이 어린 소녀처럼 킥킥대며 탁자끝 쪽으로 달아나더니 샴페인을 그에게 더 뿌려댔다. 술은 그의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고 눈으로 주르르 흘러 들어갔다. 맥시밀리언은 나지막이 욕설을 퍼부으며 제일 가까이 놓여 있던 잔을 낚아채 그녀에게 퍼부었다. 그녀는 획 피하더니 까르르 웃으며 대담하게 다가와 그의 머리에 술을 더 끼얹었다. 얼굴이 온통 젖은 그는 마구 푸푸거리며 탁자 저편에 서 있는 그녀에게 한꺼번에 두 잔을 퍼부어댔다. 술은 그녀의 목과 상의에 정통으로 맞았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가슴에 찰싹 달라붙은 얇은 천 위로 단단한 젖꼭지 윤곽이 드러나는 광경을 홀린 듯 지켜보았다. 그가 우뚝 서서 그녀의 농익은 곡선미를 정신 없이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두 잔을 더 집어들어 그럴듯하게 속임수까지 써가며 그의 바지 사이에서 솟아오르고 있던 부분에 잔의 내용물을 명중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는 제대로 맞춘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너무나 정신 없이 웃느라 잠깐 숨돌릴 틈을 찾아야 했다. 맥시밀리언은 그 틈을 타서 가까이 놓여 있던 병을 들고 소리나게 흔들었다. 샬로트는 그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그가 서서히 다가오자 양 손을 쳐들고 뒷걸음질칠 수밖에 없었다.

    "안 돼요, 맥스. 안 돼요!"

    그녀는 헉헉거리는 사이사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악한 미소를 날리며 뿜어져 나오는 샴페인 줄기를 그녀에게 온통 퍼부었다. 폭삭 짖은 그녀는 깔깔대고 푸푸거리며 바닥에 넘어졌고 맥시밀리언은 우습게도 의기양양한 심정으로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는 즐기고 있었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면서 맥시밀리언은 갑자기 들뜬 기분에 젖었다. 자신이 나약하면서도 동시에 강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목사의 딸을 내려다보았다. 눈부신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뜨린 채 드레스 자락이 피부에 착 달라붙어 가슴이, 그 멋진 가슴이‥‥‥젖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 가슴을 맛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유혹 때문에 머릿속이 웅웅대면서 욕망으로 그의 몸이 묵직해졌다. 하인들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고 손님들이 금방이라도 도착할 시간이었건만 그런 생각조차도 들끓는 그의 피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샬로트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초대의 몸짓일까? 숨을 들이키며 그 손을 잡은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끌어당겨 옆에 앉히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앉고 나자 그는 샬로트가 그의 욕구 따위는 눈치도 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던지기는커녕 병을 낚아채더니 남은 술방울을 그의 머리에 털어냈다. 하마터면 금세 다른 사태로 번질 수 있었던 이 사건이 다시금 웃음거리로 변했다. 그들은 흠뻑 젖어 여전히 마룻바닥에 주저앉은 채 미친 사람들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샬로트!"

    그들은 입구에서 부르는 시빌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체 같이 계시는 분은 누구냐? 두 사람 다 일어나야지! 맥시밀리언은 네가 재미있게 즐기기만 해도 득달같이 날 혼낼 게야. 그리고 네가 그 애 카펫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면 졸도라도 할걸! 내 말이 안들리는 게냐?"

    시빌은 앙증맞은 발을 아예 동동 굴러댔다. 샬로트는 야단맞을 짓을 했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지만 맥시밀리언은 웃는 통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거기, 신사분!"

    시빌이 불렀다.

    "빨리 일어나세요. 아니면 맥시밀리언을 시켜서 당신을 쫓아가게 시키겠어요! 그랬다간 새벽에 정신을 차려 보면 총부리가 코앞에 다가와 있을 거예요"

    맥시밀리언은 신음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어머니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깜박거렸다.

    "세상에 ! 맥시밀리언! 너란 말이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

    그녀는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비틀거렸다.

    "네가 아닐 거야!"

    맥시밀리언은 이 상황 하에서 가능한 한 최대로 우아하게 일어난 다음 샬로트를 도와 일으켜 세웠다.

    "접니다. 마담."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실망시켜 드리긴 싫지만 전 제 자신과 결투할 생각 따윈 없습니다."

    낭만적인 저녁이었냐고 따진다면 높은 점수를 매길 수는 없지만 기억에 남을 만은 했다. 샬로트는 침대 기둥에 드리워져 있는 얇은 비단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며 회상했다. 그에게서 키스는 받지 못했지만 둘 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에서 마지막 왈츠를 함께 출 수 있었다. 너무나 짧았던 그 순간 그는 평소의 초연한 태도와는 다소 다른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초저녁의 사건까지 치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샬로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급 포도주를 뿌려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신나게 장난치던 맥시밀리언의 모습을 떠올렸다. 샴페인 범벅이 되어서‥‥‥ 다시는 누리지 못할 호사였다. 그 생각을 하니 비용 때문에 느껴지던 죄의식이 다소 가라앉았다. 물론 시빌은 개의치 않았다.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에 카펫은 둘둘 말려 자취를 감추고 바닥도 걸레질로 말끔해졌다. 사건의 유일한 잔재라고는 샬로트를 바라보던 시빌의 묘한 표정뿐이었다. 마치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가 한층 더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얼굴이었다. 시빌은 자기 아들이 그런 장난을 치는 광경을 보고 눈에 띄게 놀라워했다. 너무나 놀라는 그 모습으로 미루어 보면 가엾은 맥스는 한 번도 어린 소년처럼 굴었던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낙천적인 활기와 사랑이 분출되기만을 기다리며 그 모습 그대로 숨어 있는 것이다. 샬로트는 제니와 함께 있던 맥스의 모습이 떠오르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그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아이를 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킷을 놀리던 모습도 기억났다. 백작이 자기 자식들과 쾌활하게 웃으며 뛰어가는 광경을 떠올리며 샬로트는 눈물로 뺨을 적셨다. 아아, 맥스, 당신이 누구를 아내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 여자가 당신의 숨겨진 부분을 활짝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 샬로트는 죄라도 짓다가 들킨 양 재빨리 얼굴을 훔쳤다.

    "들어와요."

    하녀인 아네트가 들어와 아침 식사 쟁반을 그녀의 앞에 솜씨좋게 내려놓았다. 침대에서 아침을 먹다니! 고향집에서 안다면 남동생들은 놀려대고 여동생들은 황홀해서 기절하겠지만 샬로트는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호사를 즐기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이런 즐거움을 누릴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항상 시빌보다도 훨씬 일찍 일어났고 이런 시간에 식당은 너무 넓고 썰렁해서 방에서 식사를 하는 편이 한결 아늑했다.

    "잘 잤어, 아네트? 고마워."

    샬로트는 하녀가 베개를 부풀려 등받이로 대주자 인사했다.

    "편지가 왔어요. 어제 소란 법석 때문에 전해 드리는 걸 깜빡한 모양이에요. 쟁반에 얹어 놓았어요"

    아네트는 미소지으며 일러 주었다.

    "어머나, 고마워요!"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였다. 향수가 왈칵 밀려들면서 동시에 가족들 소식을 알고 싶은 열망이 솟구쳤다. 그들은 그녀라는 인간자체를, 가난한 목사의 딸일 뿐인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샬로트는 초조하게 쟁반을 밀어 놓은 다음 봉함지를 뜯고 편지를 펼쳤다. 그녀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아네트가 말 없이 물러가는 것도 전혀 모른 채 편지를 읽었다. 거듭해서 읽고 또 읽은 뒤 마침내 그녀는 믿어지지가 않아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샬로트 위클리프 백작님께서 전해 주신 반가운 소식에 우리 모두 기뻐하고 있단다. 그분 말씀으로는 수많은 신사분들이 너를 달라고 청혼해 왔지만 린리 자작님이라는 제일 유망한 혼처만을 내게 알려 주겠다고 하시더구나. 신랑 될 사람의 재산이 엄청난 것은 물론이고 평판도 흠 잡을 데 없다는 게 백작님의 말씀이셨단다. 그리고 사실 그쪽에서는 나의 승낙을 얻기 위해 놀라운 조건까지 제시했단다. 우리 모두가 너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한단다. 얘야. 네 여동생들은 네가 뜻하지 않던 작위까지 얻게 되었다면서 모두들 흥분해 버렸지. 남동생들은 그만큼 신나하지는 않지만 자작님의  마구간이며 그 밖의 것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고 애원이란다. 자작님께서 아이들을 싫어하는 분이 아니시라면 좋겠구나. 네 동생들은 자작님 댁을 방문할 날을 손꼽는 게 분명하거든. 위클리프 백작님 말씀으로는 네가 몹시 결혼을 원하고 있다기에 난 그분께 내 대신 그 청혼을 수락해 주십사 말씀드렸단다. 이편지가 네게 반가운 소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새삼 말하지만 네가 그동안 너무 조급하게 안달했던 게 아니기를 바란단다‥‥‥

    편지는 그 뒤로도 고향 소식이며 그녀의 정혼에 대한 축하 인사말로 이어졌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어도 편지는 쓰여진 그대로였다. 그녀는 이 모든 내용이 장난이 아닌가 의심까지 했지만 맥스가 관련되어 있는 문제였고 맥스는 믿음직한 점과 책임감을 빼면 시체인 사람이었다. 결국 편지를 네 번째 읽고 나서야 샬로트는 이 기묘한 소식을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시킬 수 있었다. 놀랍게도 편지에는 그녀가 갑자기 린리 자작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가 평생 들어본 기억도 없는 사람과. 샬로트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녀의 주위에 나타났다 사라져간 신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를 놀리며 이야 기를 나누었던 사람, 이것저것 가져다 주면서 춤이라도 한번 추자고 애원했던 사람 등등 그 이름을 전부 기억해 내기란 불가능했다. 이 베일 속의 자작은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접근했던 구혼자중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점은 확실했다. 그랬더라면 단번에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디 블랙, 스톨링스 대위, 버기스 경‥‥‥‥ 랠리 자작? 샬로트는 눈을 깜박이며 아버지의 악필을 다시 내려다보았지만 잘못 읽은 것이 아니었다. 랠리가 아니었다. 열 명도 넘는 다른 구혼자들이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지만 그중에 린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샬로트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정혼녀가 된 것이다. 이 얄궂은 상황을 생각하니 목이 메일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1년전, 아니 한 달 전만 해도 흠 잡을 데 없는 평판과 막대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 청혼했다면 그녀는 가족에 대한 의무로 알고 수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 모를 구혼자와 어떻게든 행복해지기 위해서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 린리라는 사람에게도 부당한 짓이고 그녀 자신에게는 고문밖에 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그녀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선 그녀의 사랑은 너무나 생생하고 뜨겁고 찬란해서 그녀의 인생에‥‥‥ 그리고 그녀의 침대에 맥스말고 다른 사람이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맥스. 샬로트는 편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부정하고픈 흐느낌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의 배신을 알아챈 지금 전신이 칼로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 위클리프 백작님 말씀으로는 네가 몹시 결혼을 원하고 있다기에‥‥‥‥ 그 구절로 인해 그녀는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동안 내내 그녀는 그가 자신을 낮추어 목사의 딸과 결혼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고 싶어하지 않는 게 아닐까하는 짐작도 했다. 샬로트는 그가 질투로 분노했을 때 받았던 인상,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있는 광경을 보았을 때마다 그가 발끈 화냈던 때를 기억해 냈다. 혹시 그는 그녀가 불순한 동기를 품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걸까? 구혼자들을 내쫓아 버렸다고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일을 떠올리자 그녀는 뱃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는 단지 더 좋은 혼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건만! 그녀는 애초부터 애정 따위는 없었던 맥스의 행동을 확대 해석했던 것이다. 진실을 깨달은 순간 당혹감과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그의 관심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신분 낮은 백성에 대해 귀족이 베푸는 배려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럼 그의 키스는? 이 부분은 해답을 찾아내기가 한층 힘들었지만 결국 그녀는 오래 전 사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남자들은 가끔은 자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는데,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키스를 애걸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맥스도 똑같은 경고를 하지 않았던가? 몇 번 되지는 않지만 그는 내로라 하던 자제력을 잃고 그녀에게 손을 댈 때마다 그런 충동에 속절없이 지고 말았다. 샬로트는 이불을 홱 젖히고 자리에서 뛰쳐 일어났다. 피부가 따가웠고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양 팔로 가슴을 끌어안았다. 지난밤의 사랑스럽던 추억들이 이제는 입 안에 씁쓸한 맛만을 남겨줄 뿐이었다. 지난밤. 샬로트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제 거실에서 위엄 따윈 내던져 버린 채 그녀와 샴페인으로 장난을 치던 그 남자와 그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청혼을 수락해 버린 냉혈한을 동일인으로 보기가 도저히 힘들었다. 그는 내내 알고 있었다! 맥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젯밤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면서 그녀와 재미있게 장난을 쳤던 것이다. 샬로트는 진저리를 치면서 기억을 떠올렸다. 바닥에 앉아서 그를 올려다본 순간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뭔가를 보았다. 뜨겁게 번득이는 그 눈을 보자 그녀의 전신에 묘한 느낌이 넘쳐흘렀다. 젖어서 엉망이 된 옷가지가 갑자기 자극적으로 느껴지면서 피부에 미끌미끌한 샴페인 역시 뭔가 매혹적이고 압도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베일 속의 린리 자작에게 샴페인으로 목욕하는 취미가 있다면 모르지만. 그 생각에 그녀는 움츠러들었다. 자작도 어젯밤 파티에 왔을까? 샬로트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오직 맥스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이 춤을 추고 공통의 관심사인 신화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이야기를 나뒀다. 그동안 내내 그는 그녀의 정혼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뭔가 손을 써야 하오. 맥스의 위협이 불현듯 뇌리에 되살아나자 그녀의 몸이 뻣뻣이 굳어졌다. 그 날 흙투성이에 퉁퉁 부어올라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그는 그녀의 탈선 행위에 종지부를 찍고야 말겠다고 길에서 맹세한 바 있었다. 샬로트의 눈이 침대에 놓인 편지로 슬며시 쏠리면서 통렬한 분노가 고통 사이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백작은 그녀를 영원히 쫓아내 버릴 수 있는 상당히 편리한 방법을 찾아낸 듯했다. 맥시밀리언이 옷을 입고 있는데 호스킨스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호스킨스의 얼굴에는 일종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젊은 여자분께서 기세 등등한 태도로 백작님을 뵈어야겠다고‥‥‥"

    "맥스!"

    샬로트의 목소리를 듣자 맥시밀리언은 비어져 나온 셔츠 자락을 황급히 바지춤에 쑤셔 넣고 스타킹만 신은 맨발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내실로 쳐들어 와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면 당연히 상의를 입지 않은‥‥‥아니, 그보다 더 벗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영원한 짐을 떠맡게 된 기분이었다. 그는 한숨을 토해 내면서도 미소로 인사했다.

    "맥스!"

    샬로트는 다시 외쳤다. 호스킨스는 혹 그녀를 제지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문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지만 샬로트는 그런 그를 수월하게 피해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세상에, 아가씨 !"

    놀라서 중얼대는 호스킨스는 관습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그녀의 행동에 질렸는지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한 표정이었다.

    "괜찮네, 호스킨스, 레버링. 가도 좋네."

    맥시밀리언이 말했다. 시종 레버링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샬로트를 흘끔거리며 사라졌지만 호스킨스는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가도 좋다니까, 호스킨스."

    맥시밀리언은 한층 단호하게 말했다. 집사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자 맥시밀리언은 그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맙소사, 샬로트 정말이지 당신 때문에 우리 집 집사의 동맥이 막혔을 거요."

    맥시밀리언은 놀랄 만치 담담한 어조로 투덜댔다.

    "대체 여기엔 뭐 하러 온 거요? 내 침실에, 그것도 이렇게 아침 일찍?"

    "모르는 체하는 거예요?"

    샬로트는 그를 잡아죽일 듯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녀는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눈에서 초록색 불꽃을 튀기며 더할 나위 없이 호전적인 태도로 서 있었다. 그의 간이라도 도려낼 정도로 사납게 펄펄 뛰는 기색이었다. 혹시 무기라도 가져온 건 아닐까? 그는 여유롭게도 그런 생각까지 했다.

    "맥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뭘 말이오?"

    "날‥‥‥ 낯선 사람과 결혼시켜 보내 버리려고 했잖아요!"

    그가 지켜보고 있는 사이 샬로트의 사랑스러운 분홍빛 입가가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심란하게 만든 것에 대해 날카로운 죄의식을 느꼈다. 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샬로트가 그의 가슴팍에 종이를 들이밀었다.

    "맥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하고는 의논도 없이 아빠한테 편지를 보내서 식구들에게 희망만 잔뜩 심어 놓다니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서둘러 핀으로 틀어 올린 것이 분명한 곱슬머리 몇 오라기가 풀렸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얼굴 주위에서 흔들리는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잠시 경탄하며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것 때문에 런던에 온 게 아니오? 남편감을 찾으러 말이오"

    맥시밀리언은 차분하게 물었다.

    "그랬죠. 하지만‥‥‥ 난 이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걸요!"

    샬로트는 항변했다. 맥시밀리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금세 잘 알게 될 거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음성에 담긴 확신을 듣고 그는 잠시 사이를 둔 채 그녀를 곁눈질했다.

    "오, 맥스"

    그녀는 비참한 어조로 속삭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방패처럼 내두르던 분노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고 속눈썹은 뭔가 감정을 참으려는 듯 자꾸 깜박였다.

    "할 수 없어요. 난 노력했어요. 정말로 노력했지만 결혼은‥‥‥애정 없이는 불가능해요. 난 이 린리 자작이란 사람에게 전혀 애정이 없는걸요"

    "확실하오?"

    맥스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끄덕였다. 돌돌 감겨 정수리에 얹힌 그녀의 머리카락이 깃털처럼 아래위로 까딱거렸다.

    "가족들을 실망시키긴 너무나 싫지만 난 구혼자들 중 어느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고 하지도 않겠어요. 이게 내 최후 통첩이에요. 당신이 자작님께 파혼 의사를 전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말미에 갈라졌다. 맥시밀리언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당신은 구혼자 중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감정도 없소?"

    그는 다시금 다가서며 물었다.

    샬로트는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꼽았다.

    "랠리는 상당히 좋아요. 하지만 그 감정은 다른걸요"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일부러 눈길을 피했다.

    "뭐하고 다르단 말이오?"

    그는 가까이 다가와 달래는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마주 보게끔 다정하게 돌려세웠다.

    "그게‥‥‥ 마음을 주어 버리는 것하고는 달라요."

    그녀는 노란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결론을 맺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맥시밀리언은 미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에게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그 무리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쓰디쓴 패배감이 다시금 다가왔다. 그는 들끓는 감정을 애써 절제했다.

    "대안이 있소"

    그는 나직이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배어 있는 신선한 향기를 맡자 햇살과 푸른 초원과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나무가 떠올랐다. 정신나간 생각 아닌가! 이 즉흥적인 아가씨와 평화로운 풍경을 연결시켜 생각하다니 영 논리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 역시 전혀 말이 안 되지 않던가?

    "어떤 대안인데요?"

    샬로트는 조용히 물었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요"

    그 즉시 그녀의 시선이 그의 눈동자로 날아왔다. 그의 눈빛을 살피는 동안 그녀가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감지했다.

    "놀리지 말아요, 맥스."

    "놀리는 게 아니오"

    그는 대답했다. 그의 양손은 아직 그녀의 어깨에 놓여 있었고 그의 엄지손가락은 무의식중에도 집요하게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중이었다.

    "우린 평판이 위험해질 만한 상황에 여러 차례나 처했고 결국은 이런 아침 시간에 내 침실로 찾아오는 극한 상황까지 치달았잖소"

    샬로트는 실로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오, 맥스. 내가 온 건‥‥‥ 당신 평판을 위태롭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정말로 그럴 뜻은 없었다고요."

    그녀는 항변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그녀는 이런 계략을 꾸미기에는 너무나 순진했다. 아마 그녀는 그의 침실로 쳐들어오는 행위가 할아버지의 병 문안을 가는 것과 다름없이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생각에 맥시밀리언은 얼굴을 찡그렸다.

    "알고 있소"

    그는 다소 씁쓰레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샬로트에게 유혹을 당하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그의 몸에 닿고 그녀의 젖가슴이 그의 가슴에 세차게 밀착되면서 ‥‥‥그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그의 허벅지 사이가 딱딱해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만 초점을 맞췄다.

    "당신이 날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었소"

    샬로트의 밝은 웃음소리에 그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그렇게 믿었다니 그럴 리가 없어요. 설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 이후로‥‥‥‥"

    그녀는 자기 생각을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듯했다. 그녀는 홍조를 띠고 속눈썹을 내리깔면서 한 손을 그의 가슴에 얹었다. 그는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를 느꼈다. 그의 심장이 희망을 안고 고통스럽게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소?"

    그는 딱딱하고 형식적인 질문을 한 자신을 저주했다. 그는 마음을 좀먹는 공포 앞에서 동요하며 그녀의 팔을 더욱 힘주어 움켜쥐었다.

    "물론이죠"

    샬로트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점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그의 눈을 향해 들어올린 그녀의 눈은 그가 감히 이름 붙이기 두려운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럼 우리 결혼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는 것 같군."

    "오, 맥스."

    찌푸린 그녀의 이맛살이 바르르 떨렸다.

    "당신은 날 원치 않잖아요"

    "내가?"

    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