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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의 웨딩마치-13화 (13/19)
  • 13.

    "그레트나그린!"

    ?샬로트가 알기에 스코틀랜드 지방의 그 마을은 사랑의 도피를 꿈꾸는 남녀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 과묵한 남작이 그런 엄청난 계획을 짜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랠리라면 몰라도. 로디는‥‥‥ 혹 웬만큼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버기스 경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짧은 찰나 샬로트는 버기스의 계획에 동참해 남편감 사냥에 종지부를 찍을까 하는 유혹에 넘어갈 뻔했다. 이 마차가 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녀는 웬만큼 괜찮은 집안의 성을 물려받게 되고 전원에 자리잡은 적당한 장원 저택에 살면서 가족의 뒤를 받쳐줄 충분한 돈도 가질 수 있게 되리라. 이런 배경 앞에서 감히 등을 돌릴 수 있는 젊은 아가씨들은 많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레트나그린이라니 !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리라. 샬로트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런 경솔한 결혼을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사라는 물론이고‥‥‥맥스도‥‥‥‥거만한 백작의 모습이 뜻하지 않게 뇌리에 떠오르자 샬로트는 찌르는 듯 날카로운 열망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절대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외의 다른 사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샬로트는 진실을 깨달은 여파로 덜덜 떨면서 드레스의 고급 천을 정신 없이 움켜쥐었다. 그녀는 맥스를 사랑했다. 그가 얼마나 짜증스럽고 오만하고 거만한지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은 그녀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모두 압도해 버릴 만큼 강렬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면서 자신을 너무나 열심히 쳐다보는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의 청혼은 절대 수락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아니, 언제까지라도. 그가 아무리 부자고 열렬하게 청혼한다 해도, 아무리 정중하고 친절하다 해도 샬로트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어 버린 채로 매일 매일을 버기스와 함께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차갑고 얇은 입술이 자기의 입술에 와 닿고 그의 손이 자기 몸을 만지는 광경을 그려보고 진저리를 쳤다. 그녀는 부부의 침대 생활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는 않았지만 생식의 기본 원리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친밀한 행위를 눈앞의 이 남자와 한다니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었다. 여태까지 그녀는 자기 가족을 부양해 줄 남편감을 찾는다는 임무를 양심에 꺼림칙할 것 없는 단순하고 쉬운 일로 생각하고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거기에는 한결 심오한 중대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편감을 찾는 행위가 버기스 경 같은 남자에게 자신을 내주어야 하는 것과 동일하다면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혼이란 돈이나 안락한 생활, 출세보다 한결 중요한 것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했다. 그녀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두 분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지만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꾸미셨다. 두 분은 항상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 오셨다. 샬로트는 그녀의 결정이 몰고 올 결과가 점점 명확해지자 심장이 가슴속에서 요란하게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생들은 각자 자기 살길을 찾아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아니던가? 사라는 어퍼비드웰에서 충분히 할만큼 해주고 있다. 그리고 남동생들에게는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눈을 내리깐 샬로트는 초조하게 눈꺼풀을 팔락거려 점점 격해지는 심정을 위장하려 했다.

    "남작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실로 기쁘답니다. 하지만 목사님인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런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버지는 결혼식 주례를 손수 보려 하실 거예요. 남작님도 이해해 주시겠지요?"

    그녀는 버기스가 정말로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제게 청혼을 할 생각이시라면 정식으로 위클리프 백작님께 말씀을‥‥‥"

    "위클리프!"

    버기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고 입매는 화난 듯 팽팽했다.

    "그자는 결코 내 청혼을 인정하지 않을 거요. 그자는 당신을 차지하고 싶어하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샬로트는 자신의 지금 처지에도 불구하고 까르르 웃어 버렸다.

    "장담하지만 위클리프 백작님은 결코 그런 마음이 없으세요"

    그녀는 다소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절차에 관해 백작님과 의논하기 싫으시다면 저희 아버지께 직접 청혼을 넣으실 수도 있어요"

    "그럴 생각은 없소"

    이런 대답이 날아오자 샬로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새삼스레 더욱 경계심을 느끼며 버기스를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내리 덮인 그의 눈길과 입술은 끈끈하고 아니꼬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자 그녀는 그의 분위기가 뭔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에는 한 번도 풍긴 적이 없던 위험한 기색이 그에게서 묻어 나왔다. 샬로트는 깜짝 놀랐다. 뒤늦게야 그녀는 구혼자들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깨달았다. 구혼에 관련된 그 우스꽝스러운 사교계의 규율들은 지나친 친밀감이 조성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런 데에는 아마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가령 연약한 젊은 아가씨가 남편 될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면 결혼에 목숨걸려 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버기스는 연륜 있는 사람답게 조용하고 부드럽고 침착하게 구혼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런 남자야말로 아내를 구타하는 못된 작자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친애하는 남작님."

    샬로트는 되도록 차분하게 말했다.

    "즉시 말머리를 돌려 저를 위클리프 백작 부인의 런던 저택으로 다시 데려다 주세요."

    "그럴 수 없소"

    버기스는 음흉하게 대답했다.

    "그러셔야 해요"

    "그럼 난 거절할 수밖에, 사랑스런 트로브리지 양. 내 성급한 행동 때문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사과하리다."

    아니꼬울 정도의 표정은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미소로 바뀌었지만 그의 눈만은 차가웠다. 샬로트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그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쩌면 당신은 결혼을 원치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는 없소. 우린 단 둘이서 멀리까지 상당 시간 여행을 했잖소 이제 당신 평판은 위태로운 상태요"

    버기스는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듯 짐짓 눈을 내리깔았지만 샬로트는 속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이렇게 되도록 꾸민 것이다! 남작에게 희망을 준 채 계속 놓아주지 말자는 시빌의 생각은 결국 이런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었다! 괘씸한 백작 부인! 샤프롱을 대동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시빌이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곤경에 처할 일은 없었을 텐데 !

    "어느 누구에게도 알릴 필요 없잖아요?"

    샬로트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지금 돌아간다면 변명 거리를 못 지어낼 것도 없어요. 위클리프 백작 부인께서는 제가 없었던 사정을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실 거예요"

    "내 양심상 당신을 그런 불명예스런 상황에 빠뜨릴 수는 없소"

    버기스는 우겼다. 양심이라고? 새빨간 거짓말! 샬로트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그를 살폈다. 그가 그녀의 요청을 재고도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뻔했다. 그의 태도가 하도 요지부동이라 샬로트는 하마터면 이 납치 사건의 배후에 뭔가 다른 동기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부유한 상속녀들이야 그레트나그린으로 도망치

    는 일이 다반사지만 목사의 딸은 그럴 일이 없었다. 남작이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반해 있을까? 그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맹렬한 정열에 몸부림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은 정말 하늘에 감사해야겠지, 샬로트는 생각했다. 지난번 스톨링스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정염에 활활 불타는 숭배자와 몇 시간이나 마차에 갇히게 된다면‥‥‥‥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상대가 맥스가 아니라면. 맥스! 애원과 요구가 실패했을 경우 어쩌면 위협 쪽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샬로트는 생각했다.

    "위클리프 백작님께서는 극히‥‥‥ 마음 상해하실 거예요."

    샬로트가 보기에 이 말은 극히 절제된 표현이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분은 아빠와 아주 가깝게 지내시죠"

    그녀는 한숨지었다.

    "그리고 기질도 불같으시고요. 스톨링스 대위님과도 그때 언짢은 사건이 있었죠‥‥‥‥"

    버기스는 씩씩대며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위클리프는 아무 짓도 할 수 없소!"

    샬로트가 놀라서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린 정식으로 결혼할 테니 그자는 어떤 식으로도 간섭할 수 없소"

    샬로트는 그의 분노 앞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일부러 못 믿겠다는 투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맥시밀리언이 바로 지금 나타난다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런던에 온 이래 난처한 상황에 말려들었을 때마다 항상 그녀를 구해 주었다. 하지만 버기스는 그녀의 불신하는 태도를 보고 화내기는커녕 느긋하게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한층 더 불안해졌다.

    "예식 전에 그자가 나타나리라 기대하고 있다면 그릴 일은 없다는 걸 알려 줘야겠소. 위클리프 백작은 매달 세 번째 금요일에는 마차 몰이 클럽 모임에 나가지. 기상 상태가 극도로 나쁜 날만 아니라면 말이오?

    "이제 버기스는 대놓고 이죽거리면서 보란 듯이 창 밖을 가리켰다. 눈이나 우박은 절대 안 올 듯한 날씨였다. 그는 자기 말의 효과를 한결 높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

    "백작은 그 클럽이 결성된 이래 2년간 한 번도 모임에 빠진 적이 없소"

    샬로트는 그 소식에 실망한 나머지 등받이에 털썩 기대앉았다. 버기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항상 그랬듯 맥스가 구하러 와 주리라고 자신이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의무를 매우 진지하게 이행하는 멋진 기사님이었다. 물론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가 나타나 준다고 믿을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버기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샬로트는 여전히 맥스가 와주리라 기대했다. 그에게 다른 약속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전에도 그녀 때문에 약속을 깬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점을 확신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1주일이 넘었다는 것도, 그들이 서로 안 좋은 상황에서 헤어졌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와줄 거야, 샬로트는 마음속 깊이 믿었다. 버기스는 이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획했지만 결국은 맥스의 제지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샬로트는 비어져 나오려는 미소를 억누르며 창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샬로트는 가까이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와 고함 소리를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다. 맥스의 존재를 가까이에서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을 점점 뒤따라오는 맥스에게서 그답지 않은 강렬한 분노가 힘차게 뿜어 나왔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나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한 그녀의 사랑맥스가 그녀에게 온당치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 주리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버기스는 기절초풍했다. 샬로트는 그의 눈에 언뜻 스치는 공포의 기색을 보았다.

    "노상강도인가?"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마차가 멈추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샬로트는 눈부신 햇살 때문에 눈을 깜박이며 멋지고 늠름한 위클리프 백작을 바라보았다. 문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액자에 담긴 아름다운 초상화 같았다. 그는 말할 수 없이 험악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볼 때면 항상 그렇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눈썹을 험상궂게 찌푸린 낯익은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으므로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인 나머지 헛기침을 했다.

    "시간을 내서 와주셨군요!"

    그녀는 가능한 한 활발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지만 버기스가 팔을 불쑥 내밀어 진로를 차단하고 말았다.

    "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건가, 버기스?"

    맥스가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버기스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샬로트가 숨 한 번 제대로 쉬기도 전에 그를 마차 밖으로 끌고 나갔다. 문간으로 고개를 빠끔 내민 그녀의 눈에 두 사람이 먼지투성이 길바닥에서 시골 소년들처럼 드잡이 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조심스레 치맛자락을 들고 마차 밖으로 뛰어내린 샬로트는 때마침 버기스가 쓰러질 정도로 세찬 강타를 얼굴에 퍼붓는 맥스를 볼 수 있었다. 버기스가 쓰러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불행하게도 남작의 턱은 상당히 단단한 모양이었다. 남작은 상대에게 한방이라도 먹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샬로트는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마부가 백작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마부가 뒤에서 맥스를 덮쳐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자 버기스는 그의 배에 펀치를 날렸다. 맥스는 허리를 꺾으며 신음했다.

    "당장 그만둬요!"

    샬로트는 돌진해 나아가며 외쳤다. 그녀는 마부의 다리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단숨에 걷어찼다. 마부가 비틀대면서 손아귀의 힘도 느슨해졌는지 맥스는 그에게서 벗어나 버기스에게 달려들었다. 마부는 그녀에게 이런 취급을 당한 것이 분했는지 홱 돌아섰다. 하지만 샬로트는 아예 치맛자락까지 걷어올리고 그의 사타구니를 있는 힘껏 차주었다. 마부는 '헉' 소리를 내며 허리를 꺾는 동시에 그녀를 잡기 위해 한쪽 팔을 휘저어댔다. 그는 몇 번 숨을 헉헉대더니 절뚝거리며 다시 그녀를 쫓아왔지만 이번에는 비틀대다가 그만 백작의 말에게 쓰러지고 말았다. 말은 용케 마부의 다리를 걷어차더니 길을 벗어나 들판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마부는 거칠게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이렇게 몸바쳐 봤자 버기스에게서 충분한 사례를 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듯 엉금엉금 마부석에 올라탔다. 샬로트는 도망가는 그의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고삐가 철썩하는 소리를 들은 버기스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멈춰! 기다려! 망할!"

    남작은 고함을 질렀다. 그는 상태가 그다지 시원치 않아 보였지만 겨우겨우 복수의 화신 같은 백작에게서 벗어나 문이 열린 채 흔들리는 마차 쪽으로 뛰어갔다. 마차가 떠나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마차를 붙잡고 안에 탈 수 있었다.

    "겁쟁이 !"

    샬로트는 그의 등에 대고 외친 다음 용감한 구세주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흙투성이에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한들거렸으며 상의는 찢어졌고 입술에서는 피가 났다. 그는 서 있지도 못하겠다는 듯 흔들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렇게 끔찍한 맥스의 모습은 여태껏 처음이었다.

    "괜찮아요?"

    샬로트는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눈이 감기더니 위클리프 백작은 그녀의 발치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혹시 지나갈지도 모르는 통행자들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겨우겨우 그를 길가로 끌고 와 자신의 무릎을 베개로 내어 주었다. 이렇게 앉아서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자니 갖가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특히 가장 가슴 벅찬 것은 그에 대한 그녀의 깊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진실했다. 그녀는 그런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으며 다른 남자를 좋아하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어리석고 고통스런 노고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예쁘장한 딸은 위클리프 백작을 속절없이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샬로트는 그의 얼굴에 손을 얹고 이마에서 머리채를 걷어올렸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길다란 머리카락은 덕지덕지 묻은 먼지 아래에서도 생생하게 반짝였다. 샬로트의 손끝에 거의 비단결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머리카락을 떨어뜨렸다. 이렇게 그를 어루만지기보다는 그가 정신을 되찾도록 간호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지금은 그의 얼굴을 축여줄 물도 없었다. 싸움 때문에 완전 묵사발이 된 그의 모습을 보니 정신을 차리도록 볼을 찰싹 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버기스는 이제 저 멀리 하나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행랑을 친 뒤였고 맥시밀리언의 말은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었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달랑 작은 핸드백 하나와‥‥‥ 맥스뿐이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녀는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즐기며 그의 얼굴을 다정하게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속눈썹이 이렇게 길고 코가 이렇게 반듯한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볼을 쓸어 내리자 꺼끌한 면도 자국이 살짝 느껴졌다. 그에게 손을 댄다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감미롭고 아찔한 온기가 그녀의 몸에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가 뒤척인 순간 그녀는 움찔하며 손을 치웠다. 그의 속눈썹이 파들거리자 샬로트는 똑바로 앉았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근사한 초콜릿빛 눈을 떴다. 그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나긴 순간 그는 꿈을 꾸듯 흐릿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으며 그 빛깔 짙고 그윽한 눈동자에 매혹된 샬로트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설명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맥시밀리언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풀밭위로 쓰러질 뻔했다.

    "맙소사!"

    그는 투덜대더니 다음 순간 신음하며 얼굴을 휴지장처럼 구긴 채 이마에 손을 얹었다.

    "괜찮으세요?"

    샬로트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길다란 속눈썹 너머에서 뿜어 나오는 눈초리였다. 그녀가 여태껏 본 중에 가장 험악한 표정이었다.

    "아니, 괜찮지 않소"

    그는 이를 갈았다. 그의 얼굴을 살핀 샬로트는 먼지투성이의 그에게 멍자국이 잡히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쪽 눈은 입술과 마찬가지로 슬슬 부어오르는 중이었지만 그녀는 절대 얘기하지 않을 참이었다. 때마침 그녀에게는 거울도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안 쑤시는 데가 없소. 겉보기엔 내가 멀쩡한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가 말했다. 그는 일어나 자기 모습을 흘끔 내려다보더니 신음했다.

    "날 봐요. 날 좀 보란 말이오!"

    그가 다그쳤다. 샬로트의 시선이 그의 늘씬한 몸집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남자다운 허벅지, 날렵한 허리, 널찍한 어깨, 흙투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핸섬한 용모 등 전체적인 생김새를 살펴보았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고동쳤다. 그의 찢어진 옷차림새며 완벽과는 거리가 먼 용모에는 어딘가 바람둥이 같은 기운이 감돌았고 그 때문에 한층 탐나면서도 호감 가는 모습이었다.

    "평소보다 한결 매력적인 것 같네요"

    샬로트는 부드럽게 말했다. 맥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믿어지지가 않는군! 이렇게 흙투성이가 되어 치고 받고 싸운 적은 평생 처음이오! 꼭‥‥‥ 일개 시골 촌뜨기처럼!"

    그는 분노 때문에 펄펄 뛰었다.

    "내 말은 어디 있소?"

    그는 문득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내 말이 도망갔다는 소릴 하면 가만 안 있겠소"

    그는 위협 가득한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샬로트는 일어나서 치마를 털었을 뿐 현명하게도 입을 다물었다.

    "말도 도망갔군! 빌어먹을, 샬로트! 말도 도망갔고 난 엉망진창 피투성이가 되었소!"

    맥시밀리언은 붉게 물든 입술로 조심조심 손가락을 가져가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 이상은 안 되오, 샬로트. 이 이상은 어림도 없소! 당신을 만난 이래 난 계속해서 당신을 곤경에서 빼내야 했고 그때마다 상황은 더욱 고약해져 갔소. 이젠 충분하오. 난 더 이상은‥‥‥‥"

    그는 말을 끊고 목 뒷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샬로트는 그가 엄청나게 아프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끔찍이도 혐오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깨달음을 얻자마자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거무스름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꿰뚫을 듯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담긴 표정은 애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뭔가 손을 써야 하오"

    그는 나직이 경고했다. 샬로트는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떻게 하려는 걸까?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보낼까?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자 눈을 깜박이며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자신을 타일렸다. 런던에 있든 서식스에 있든 아니면 달나라에 가든 상관없이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을 바꿀 수 없었다. 그의 검고 깊은 눈망울을 계속 들여다보았자 원래 없던 것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 눈길을 떨꿨다.

    "뭔가 손을 써야 하오. 꼭 그렇게 할 거요"

    맥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이사이 움찔하고 신음하며 자기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행동은 실로 아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샬로트는 생각했다. 마음이 이렇게 찢어지게 아프지만 않았다면 깔깔대고 웃었을 것이다. 맥시밀리언은 중얼중얼 퍼붓던 욕설을 멈추고 우뚝 서서 도로를 노려보았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 거지? 그는 시빌에게 마차로 뒤따라오라고 명령한 뒤 샬로트와 사기꾼 버기스를 뒤쫓아왔다. 그런데 대체 그 마차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저물어 가는 해와 텅 빈 길‥‥‥ 그리고 샬로트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피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샬로트의 평판이 엉망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샤프롱이 이 자리에 나타나야 했다. 그녀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몸이었다. 해질 녘에다가 남자와. 그것도 그와‥‥‥‥머리가 쑤시고 입술과 눈은 쓰라린 데다 전신이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맥시밀리언의 몸에는 옆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한 욕구가 일어났다. 만약 그가 성 불구자가 된다 해도 그녀라면 능히 그를 유혹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눈을 뜬 순간 그녀의 둥글고 풍만한 가슴이 바로 위에 있으며 서로의 입술이 불과 몇 치 사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설을 뇌까린 뒤 맥시밀리언은 어머니의 마차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며 저 멀리 원경을 응시했다. 그는 처음부터 샬로트에게 강렬한 매력을 느꼈으며 그 감정이 집착으로까지 변해 버린 지금은 툭하면 그 감정과 맞붙어 싸워야만 했다. 그는 이 점을 시인했다. 뭔가 손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목사의 딸이 그에게 안겨 주는 골칫거리는 이 당혹스러운 관심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 때문에 그의 생활은 약속 취소와 뒤죽박죽 된 일정과 결투 등등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특히 그녀를 구하러 정신 없이 뛰쳐나와 결국은 길 한복판에서 주먹질을 주고받은 오늘의 사건이야말로 그 가운데 백미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일개 마부에게 당하다니!"

    소리내어 말한 그는 밀려드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런 놈들이야말로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크지."

    뭔가 손을 써야만 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 쪽은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고 도로에만 단호하게 눈길을 못박은 채 대안을 궁리했다. 영구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시안이 떠올랐다. 그녀를 고향으로 내려보낼 수도 있었고 그 자신이 다른 데로 떠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결혼식을 기어이 보고야말든지. 그는 석양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냉혹하게 결론을 내린 맥시밀리언은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겠노라고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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