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12화 (12/19)
  • 12.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문간에서 노성이 터져 나오자 샬로트는 깜짝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문간으로 재빨리 눈길을 던졌다. 그거친 고함소리의 장본인이 맥스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한층 더 경악했다. 그가 이렇게 언성을 높인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 하는 짓이냐니까!"

    여간해선 동요하지 않는 백작이 실로 벼락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샬로트는 도와 달라는 뜻으로 버기스 경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그는 일어나 그녀의 곁에서 슬금슬금 떨어지면서 마치 숨을 곳이라도 찾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방 안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차라리 저 창문으로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고 샬로트가 충고하려던 순간 남작은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는 등을 펴고 맥스에게 시선을 못박았다.

    "트로브리지 양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소이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샬로트는 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본 대로 자존심 강하고 차분한 사람이라면 맥스의 무례하고 모욕적인 심문투의 말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맥스는 결코 버기스의 설명에 누그러진 기세가 아니었다. 그의 검은 눈썹은 눈동자 바로 위에 먹구름처럼 음험하게 내리깔려 있었고 아예 노골적으로 사납고 험악한 낯빛이었다. 샬로트는 그의 이런 태도를 그녀에 대한 보호 본능 때문이라고 해석해 박수갈채를 보내야 할지, 아니면 얼토당토않은 분노라면서 까르르 웃어넘겨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사실 여태껏 버기스의 행동 가운데 바람직하지 못한 점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트로브리지 양에게 청혼하고 싶거든 나에게 청을 넣으시오. 그럼 내 선에서 아가씨의 아버지께 전달해 주겠소"

    맥스는 말했다. 가엾은 버기스 경조차도 맥스가 이를 악물고있다는 것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이를 가는 말소리였다.

    "그분은 내게 전권을 위임하셨소"

    맥스는 자기 주장에 토를 달기라도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 위협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버기스 경은 토를 달기는커녕 그 흉내조차도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작의 시선은 맥스를 피해 방안을 초조하게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었다. 버기스 경은 어떤 종류의 대결도 피하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경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맥스의 이런 괴벽에 시달려야만 할 짓 따위는 전혀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샬로트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맥스의 행동이 왠지 멋지다는 사실은 시인했지만 맥스 쪽에서 청혼이 들어올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검에 질려 꽁무니를 빼려는 남자쪽이 유망한 신랑감이었다. 그래서 샬로트는 바짝 겁을 먹은 버기스를 달래 주는 편이 현명하겠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모두 해결되었으니 앉아서 차라도 드실까요? 신사분들은 포도주라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권유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버기스의 얼굴은 불끈대는 뺨 근육을 제외하면 돌처럼 딱딱했다. 아이 참, 샬로트는 짜증이 났다. 그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나무라듯 맥스를 바라보았지만 백작은 여전히 잡아죽일 듯한 눈으로 남작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럼‥‥‥ 브랜디라도?"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고맙지만 됐소."

    버기스는 말하더니 맥스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섰다.

    "그럼 지금 정식으로 당신에게 청혼을 넣겠소"

    그는 이를 벅벅 갈며 말했다.

    "내 비서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으시오"

    맥스가 대답했다. 버기스는 창백해졌다. 순간 샬로트는 평소에는 굼뜨던 남작이 맥스에게 달려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차라리 그렇다면 백작부인의 주간용 거실에서 싸움판이 벌어지는 게 나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녀를 놓고 또 결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녀는 제임스와 토마스의 싸움을 종종 말렸던 것처럼 겨우겨우 두 남자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백작님의 친애하는 어머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그녀는 알아들으란 듯이 질문하며 맥스 쪽으로 다가갔다 남동생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주의를 교란시키는 방법이 대부분 먹혀 들었다.

    "우리와 함께 다과를 들면 백작 부인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거예요 가서 모셔 오시겠어요?"

    맥시밀리언은 입을 딱 벌렸다. 그녀는 그를 반갑지 않은 골칫덩이 취급하며 몰아내려는 것인가? 귀족을 사칭하는 이 저질 녀석과 단 둘이 있고 싶어서? 제길, 그는 그녀의 지시에 복종할 수 없었다.

    "종을 울려 하인에게 시키겠소"

    그는 거칠게 대꾸했다. 그가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버티자 샬로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시겠어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앞에 그는 잠시 주춤했다. 화가 난 것일까? 맥시밀리언이 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는 버기스 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무분별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 그의 현명한 판단력 따위는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납빛이 된 남작의 희멀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실례합니다. 트로브리지 양. 하지만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버기스는 샬로트가 가까이 다가가자 말했다. 저 작자도 자기 방어 본능은 있는 게로군, 맥시밀리언은 왠지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잭슨 룸(18-19세기에 활약한 권투선수 잭슨이 런던에 세운 교습소)에서 배운 뒤 아직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권투 기술을 써먹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버기스가 샬로트의 손을 잡을 기제로 나서자 맥시밀리언은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의미가 뚜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 가셔야 하나요?"

    샬로트가 이렇게 묻자 맥시밀리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작이 간다니까 실망했나? 버기스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들러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햇살 같은 미소까지 짓는 은총을 내렸다. 맥시밀리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버기스가 나가려고 옆을 지나치자 맥시밀리언은 그자의 행동에서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덤벼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어느 정도 품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하지만 남작은 맥시밀리언을 저만치 피해 지나갔다. 내가 으르렁대며 달려들기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인가? 우스워야 마땅했건만 사실 맥시밀리언은 정말로 달려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버기스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까지 안전하게 도망가더니 말했다.

    "나중에 연락하겠소, 위클리프."

    맥시밀리언이 예의바른 인사를 할까 보냐 하는 분위기로 고개를 까딱하자 남작은 얼굴이 거의 백지장이 되어 나가 버렸다. 맥시밀리언은 잠시 잔인한 만족감을 누린 다음 샤프롱도 없이 신사 방문객과 노닥거린 샬로트를 혼내 주리라 결심하며 거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 틈도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무례한 짓을 할 수가 있는 거죠? 대체 뭐에라도 씌운 건가요?"

    샬로트는 구제 불능이라는 듯 양손을 휘저으며 따졌다.

    "날더러 뭣에 씌웠냐고?"

    맥시밀리언은 대꾸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요! 내가 당신을 어머니에 맡긴 건 더 이상 이런‥‥‥ 사고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당신을 맡긴 이후 맨 처음 찾아온 자리에서 당신은 또 웬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더군."

    샬로트는 커다랗게 뜬 눈에 불꽃을 튀기며 획 돌아섰다. 그 바람에 곱슬머리가 핀에서 빠져나왔다.

    "난 버기스 경에게 안기지 않았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감히 날 그런 식으로 모욕하다니요!"

    화가 난 나머지 그녀의 어조가 높아졌다.

    "흥!"

    맥시밀리언은 코웃음을 날렸다.

    "내가 들어온 바로 그 순간에야 아니었겠지만 그 전에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게 뭐요? 그렇게 헌신적인 애정을 쏟는 자니 당신의 대답을 들었을 때 어떻게 나왔을지 알게 뭐냐고! 대체 그자에게 어떤 대답을 할 참이었소?"

    그 역시 언성을 높였다.

    "백작님, 그건 당신이 상관하실 바가 아니죠!"

    샬로트는 외쳤다. 양 손을 허리에 걸치고 얼굴을 진홍색으로 물들인 그녀는 남동생을 꾸짖을 때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태도 때문에 짜증이 났다

    "다시는 버기스를 만나지 마시오. 알아들었소?"

    그는 내던지듯 명령하면서도 언제 정강이를 걷어차일지 몰라 그녀의 다리에서 경계의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 대신 손이었다. 샬로트는 온 힘을 다해 양손으로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마침 그녀를 피해 물러나던 맥시밀리언은 그 바람에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그때 슈발리에의 말소리가 들렸다.

    "다과 드실 분 계십니까?"

    맥시밀리언은 쟁반을 든 하인과 평소와는 전혀 달리 우아하지 못한 모양새로 부딪혔다. 그는 크리스털과 도자기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쟁반 위에 있던 것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면서 물기가 철벅 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애써 중심을 제대로 잡은 것도 잠시, 그는 뭔가를 밟고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평생 이렇게 엄청나게 망신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체 모를 액체가 축축하게 배어든 상의 차림으로 주간용 거실의 반들반들한 나무 바닥에 주저앉은 맥시밀리언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정말로 눈앞에 붉은 기가 왔다갔다했다. 진홍색으로 타오르는 섬광 속에 주변이 녹아들어 사라지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시야가 제대로 밝아졌다. 그리고 나서 그는 슈발리에가 뭔가 나직이 웅얼거리며 등 뒤에서 수선을 떠는 기척을 들었다. 하지만 샬로트는 오물 제거 작업에 절대 동참하지 않았다. 맥시밀리언은 일부러 그녀 쪽을 보지 않았다.

    "샬로트, 얘야! 대체 가엾은 무슈 버기스에게 어떻게 대한 게냐?"

    재미있다는 기색이 희미하게 깔린 어머니의 외국어 말투는 안그래도 끓어오르던 맥시밀리언의 심장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었다 맥시밀리언은 나직이 욕설을 퍼부으며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뭔가 찐득거리는 것이 잔뜩 발려 있었다.

    "정말이지 끔찍한 고함 소리가 들리더군요. 우리 집에서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시겠다는 거예요, 남작님?"

    시빌은 따졌다. 맥시밀리언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고집스럽게 시선을 들지 않았다.

    "아니, 맥시밀리언!"

    시빌은 기절할 듯 새된 소리를 질러댔다. 더 이상은 피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는 천천히 어머니에게로 눈길을 들었다. 그녀는 충격으로 혼절이라도 할 듯 가냘픈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맥시밀리언, 네가 맞단 말이냐? 그럴 리가! 대체 거기서 뭘 하는 게냐? 그리고 왜 머리에 케이크를 덕지덕지 발라놓았지?"

    시빌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샬로트를 바라보았다.

    "소리지른 사람은 분명 맥시밀리언이 아니었겠지? 이 애는 결코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으니까. 맥시밀리언은 항상 자제력이 강하지. 하긴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어?"

    그의 어머니는 실로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샬로트는 달랐다. 게다가 자기 손으로 이런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서도 손톱만큼도 후회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부인. 여태껏 저한테 친절만을 베풀어주신 부인께 이런 말씀을 드리자니 망설여지지만 제가 보기에 부인 아드님은 완전히 미쳤어요!"

    샬로트는 격해진 나머지 위풍당당한 가슴을 들썩이며 설명했다. 시빌은 그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쾌활하게 웃어댔고 그동안 맥시밀리언은 겨우겨우 침착을 가장하며 일어나려 했다.

    "얘야, 맥시밀리언에겐 갖가지 특징이 있지. 대부분이 남의 성질을 긁는 것이긴 하지만‥‥‥‥그렇긴 해도 그 애를 미쳤다고 하기는 힘들 게야."

    맥시밀리언은 어머니가 미약하게나마 편들어 주는 것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발리에가 깨끗한 냅킨을 내밀었다. 하인의 입가가 움찔거린 듯이 보인 것은 상상 때문일까? 슈발리에가 껄껄대며 웃기라도 한다면 그는 그 건방진 낯짝에 기꺼이 주먹을 먹여 줄 심산이었다. 샬로트는 시빌의 항변을 듣자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게, 백작님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분은 말로는 절 도와 유리한 혼처를 찾아 주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제게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구혼자들을 모조리 내쫓고 있다고요!"

    샬로트의 말을 듣자 맥시밀리언은 손에서 크림과 케이크를 닦아내던 중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체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녀는 그를 슬쩍 훔쳐보았다. 그녀는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 그의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시빌의 경악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백작 부인.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방을 나섰다. 맥시밀리언은 코방귀를 뀌었다. 그는 자신의 옆을 황급히 지나치는 샬로트의 의기소침한 눈길에 속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팔을 붙들고 마구 흔들며 그녀에게 분별을 심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니면 똑같이 격한 몸짓이지만 좀더 은밀한‥‥‥‥

    "그게 사실이냐?"

    시빌이 물었다. 맥시밀리언은 애써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라도 본다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뇨, 사실이 아닙니다. "

    맥시밀리언은 대답했다.

    "망할, 도움이 되려면 제대로 하게, 슈발리에. 상의 좀 벗게 도와주고."

    그는 쏘아붙인 다음 흠뻑 젖어 엉망진창이 된 상의에서 몸을 빼냈다. 그가 흘끔 쳐다보았을 때 시빌은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반짝이는 검은 눈으로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뭡니까?"

    그는 짖어댈 듯 따졌다.

    "음식 범벅이 된 남자를 생전 처음 보기라도 하셨습니까? 난 이런 짓거리에 아주 익숙해졌는데요"

    "잘 어울리는구나."

    시빌의 입꼬리에 미소가 번졌다.

    "가엾은 맥시밀리언."

    그녀는 손가락을 그의 이마에 갖다대 크림을 찍어내더니 냉큼 맛을 보았다. 어머니가 일부러 자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맥시밀리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시빌의 행동에는 손톱만큼도 어머니다운 점이 없었다. 그녀는 쾌활하게 깔깔대며 아들을 내버려두고 거실에서 나가려 했지만 문득 문지방에서 멈춰 서더니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조심해라, 맥시밀리언. 너희 아버지처럼 안 어울리는 상대에게 빠지는 일은 없어야지."

    맥시밀리언은 나지막이 낄낄대는 슈발리에를 무시한 채 상의를 벗은 차림으로 쿵쾅대며 하인과 어머니를 두고 나와 버렸다. 이 집구석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집에는 하나같이 제정신인 사람이 없었다.

    샬로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순간 목을 조여오는 비참한 기분에 몸을 맡겨 버릴까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똑바로 누워 이제는 자기 것이 된 화려한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침대였다. 그녀가 집에서 쓰던 바퀴 달린 좁다란 침대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아무리 떠올려도 그녀는 이 침대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나 쏜살같이 흘러가 버리고 있었다. 샬로트는 눈을 감고 그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머리카락이 당겨서 아팠다. 아무리 제대로 손질해도 위태위태할 뿐이었다, 그녀는 손질로 깔끔한 척 위장한 머리카락을 마구 풀어 내렸다. 흘러내린 고수머리가 제멋대로 굽실거렸다. 외모 중에서 제일 고약한 게 바로 이 머리야,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경멸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큰 가슴도. 아무리 맥스가‥‥‥‥백작을 떠올리자 성질이 울컥 치민 나머지 그녀는 머리핀을 뽑아 방 저쪽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는 항상 그렇듯 며칠 동안이나 그녀를 본 체도 않고 방치해 두다가 불쑥 나타나서 그녀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 놓았다. 샬로트가 생각하기에 그가 오늘 보여준 행동은 한 가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맥스는 그녀를 아내로 맞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그녀를 차지하는 것도 싫은 것이다. 샬로트는 분노로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잘난 백작 때문에 흘릴 눈물 따위는 없었다. 일정표에 깔려 죽기라도 하라지 ! 그것만이 그녀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구혼자들이 청혼을 할 때마다 맥스는 무슨 수로든 그들을 겁줘 쫓아냈다. 자신이 남편감도 얻지 못한 채 무일푼으로 낙향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것도 다 백작의 관대하신 후원 덕분에!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나서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얼굴을 닦았다. 한 순간 맥스가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스라면 전혀 거리낌 없이 그녀 혼자 쓰는 침실로 유유자적 들어와 아버지다운 설교를 늘어놓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이 손위친척다운 성질의 것이라고 느껴졌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네"

    그녀는 숨가쁘게 대답했다. 들어온 사람은 맥스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까 거실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해 전혀 걱정스럽거나 불쾌하다는 기색이 아니었다.

    "안달하지 말렴, 얘야."

    그녀는 특유의 극적인 몸짓으로 손사래를 쳐댔다.

    "꽉 막힌 우리 맥시밀리언 때문에 네 구혼자들이 전부 달아나게 두진 않을 테니까. 네가 원하는 상대가 남작이라면 그 사람을 차지하게 될 게다."

    시빌은 교활한 미소를 띠며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난 조금만 머리를 쓰면 네가 어느 누구를 원하건 상관없이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맥시밀리언은 브랜디를 두 잔 째 들이킨 다음 한 잔을 더 청했다. 하지만 이곳 화이트 클럽에 출입하기 시작한 이래 그의 저녁주량은 항상 두 잔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세 잔 째를 얻어 마시기란 쉽지 않았다.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빤히 바라보던 급사는 한참 뒤에야 황급히 끄덕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던 차에 이런 일이 있자 맥시밀리언은 한층 언짢았다. 오늘 오후 예기치 않게 분노를 터뜨려 불쾌했는데 게다가 꼴사납게도 찻 쟁반에 충돌하고 넘어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일개 녹색 눈동자의 미녀와 알게 된 것만으로 이런 재난을 줄줄이 지게 되다니 평생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버기스를 솜씨 좋게 떼어내 버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더 많은 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맥시밀리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도 계속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 자신 없을 정도로 너무나 숫자가 많았다. 그녀의 매력에 굴복한 사람을 꼽자면 최근만 하더라도 랠리가 있고 그 외에 캐벌리, 머턴, 보텀‥‥‥‥ 그리고 하다 못해 로스까지 !순간 그의 생각에 의해 홀연히 불려온 것처럼 로스 후작이 언제나처럼 냉담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옆자리에 나타났다. 오만한 미소가 걸린 후작의 입꼬리를 보자 맥시밀리언은 분노와 짜증이 와락 밀려들었다. 로스는 냉소와 경멸로 악명이 높았지만 여태껏 맥시밀리언이 그 희생물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똑똑하고 정상적인 남자가 여자 때문에 바보짓을 하는 꼴은 질색이네."

    엄청난 장신인 로스가 곤충이라도 관찰하듯 내려다보자 맥시밀리언은 움찔했다. 왠지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았다. 그를 두고 하는 말일까?

    "무슨 말이오?"

    맥시밀리언은 불쑥 따졌다.

    "트로브리지 아가씨한테 홀딱 빠진 자네 얘기일세."

    로스는 앉으며 선선히 대답했다. 맥시밀리언은 분노와 당혹감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전혀 그답지 않고 역겹기까지 한 반응이었다. 로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에게 충고를 하지. 그 아가씨가 자네 사유 재산인 양 구는 건 그만두게."

    가벼운 말투였지만 맥시밀리언은 그 어조에서 불굴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고 다른 일로 이미 치밀어 있던 성질이 그 바람에 더욱 끓어올랐다.

    "당신이나 그 아가씨에게 가까이 가지 마시오"

    맥시밀리언은 쏘아붙였다.

    "당신은 그 아가씨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잖소!"

    로스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회색 눈이 은색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로스는 절대 그런 적이 없었다. 아니, 여태까지는 맥시밀리언도 자기가 그런 점에서 후작과 똑같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말을 꺼내는 후작의 입술에는. 경멸조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물주의 생각이 어떠신지는 모르겠네만 대체 자네는 왜 내가 그 아가씨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가?"

    맥시밀리언은 코방귀를 뀌었다. 그 대답은 너무나 쉬웠다.

    "그 아가씨는 목사의 딸이니까."

    놀랍게도 로스는 그 차가운 태도가 허용하는 안에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재미있다는 기색이었다.

    "친애하는 백작. 만약 내가 백정의 딸과 결혼하고자 한다면 난할 걸세. 감히 런던에서 내게 딴 소리를 할 사람이 있다면 해보라고 하게."

    그의 차가운 눈이 맥시밀리언의 따뜻한 눈동자를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겠지. 난 나의 위치와 신분에 대해 극히 편안하고 자신만만하네. 자네는 어떤가?"

    너무나 가혹한 질문과 차가운 회색 눈동자 때문에 맥시밀리언은 하마터면 움찔할 뻔했다.

    "자네는 젊으니까 내 이해는 하겠네."

    하지만 사실 그는 맥시밀리언보다 겨우 몇 년 연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려 주고 가지. 난 트로브리지 양이 좋네. 보기 드물게 참신하고 재미있는 아가씨더군. 그러니 만약 누구든, 설령 자네라 하더라도 그 아가씨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난 극도로 불쾌할 걸세."

    후작이 샬로트에게 그토록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니! 의미심장한 그 말을 듣자 맥시밀리언은 공포가 와락 밀려들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는 격하게 따졌다. 로스는 나직이 껄껄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이란, 오늘밤엔 더 나은 말벗을 찾을 생각이라는 걸세. 하지만 자네가 정말로 트로브리지 양을 걱정한다면 그 아가씨에게 구애하는 남작을 조사해 보게나."

    "버기스?"

    그런 말을 한 것이 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맥시밀리언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이 그의 청혼을 솜씨 좋게 무마시켜 남작을 쫓아 버리는 데 성공했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로스는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

    "내 정보원에 따르면 그자는 예전부터 머리가 좀 이상했고 이젠 더 나아가 혐오스러운 물건에까지 손을 대서 더더욱 현실과 괴리된  상태라는군. 그자는 샬로트에게 점점 집착을 보이고 있어. 게다가 샬로트는 접어 두고라도 그 아가씨의 가족에게 해묵은 감정이 좀 있다더군."

    "버기스가?"

    맥시밀리언은 다시 물었다. 그의 손에 의해 어머니의 저택에서 거의 내쫓기다시피 한 그 온화한 태도의 신사가 마약 중독에 다 중증의 정신병까지 앓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순간 맥시밀리언은 로스가 수고스럽게 대답 따윈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장갑으로 손바닥을 찰싹 때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가끔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도 있지, 위클리프. 자네도 현명해지려면 시계나 들여다보지 말고 사람들을 연구하는 데 힘을 쏟게나. 진정한 권력이란 다른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에 숨어 있다네,"

    후작은 격식을 갖춰 고갯짓으로 인사한 다음 인파로 붐비는 클럽 안을 쉽사리 헤치고 가버렸다. 맥시밀리언은 극한까지 치달은 감정을 안은 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생 처음으로 그는 압도당한 기분이었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피크닉이라니 ! 얼마나 즐겁겠니, 얘야. 꼭 가야만 한단다."

    시빌이 말했다. 그녀는 매일처럼 샬로트에게 해주는 화장을 마무리짓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치장은 샬로트가 보기에 끝없이 이어지는 지겨운 과정일 뿐이었다. 시빌이 새로 장만한 드레스를 앞뒤로 돌려가며 보여 주었다. 샬로트는 시빌의 수많은 결점 가운데 경박한 성격이 특히 난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명랑함은 주위 사람들의 기분까지 쉽게 띄워 주곤 했으며 어느 누구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세요?"

    샬로트는 버기스 경에게서 온 초대장을 보면서 재차 물었다. 그녀는 시빌처럼 무심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맥시밀리언의 뜻을 정면으로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그 뜻이 아무리 비이성적인 것이라 해도 불안했다.

    “난 확신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단다."

    시빌은 쾌활하게 대꾸했다

    "물론 맥시밀리언 같은 사람들이야 다르겠지. 하지만 이 피크닉은 버기스 경과 더 친해질 절호의 기회가 될 게야. 이 시점에서는 그 사람이 최고의 신랑감이니까. 내가 보기에 랠리의 행동은 그냥 재미일 뿐이고 로스에겐 전혀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단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성공일 텐데 !"

    시빌은 아쉬운 듯 말했다.

    "두고 보자꾸나."

    백작 부인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덧붙였다.

    "사실 서두를 건 전혀 없지. 버기스 경이 맥시밀리언에게 계속 시큰둥한 취급을 받는다 해도 우리가 기분 좋게 해주면 되니까. 그러다가 만약 로스 경이 구혼자 대열에 낀다면 그 사람을 받아들여도 뭐 나쁠 것 없잖니?"

    샬로트는 후원자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시빌은 열성적으로 계획을 늘어놓았지만 샬로트는 거기에 동참할 수 없었다. 남편감을 꼭 찾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버기스에게 희망을 주는 척하면서 더 큰 고기를 잡으려 들다니 온당치 않게 여겨졌다.

    "그게 공정한 일일까요?"

    "공정?"

    시빌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음 순간 까르르 웃어댔다.

    "사랑에 공정한 게 어디 있니, 얘야?"

    그녀는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샬로트의 엄격한 기준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리더니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에 경탄했다. 사랑. 하지만 사랑이 끼어 들 데가 과연 있을까? 샬로트는 궁금했다. 이곳 런던에서는 결혼이 사무적인 문제였으며 그녀가 꿈꾸

    어 왔던 것만큼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멋도 모르고 꿈꾸었던 사랑이 이곳에서는 아예 거론될 구석이 없었다.

    "내 모습 어떠냐, 얘야?"

    시빌의 말에 샬로트는 음울한 생각에서 벗어났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우세요"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

    "넌 상냥한 아가씨야."

    시빌은 그녀의 볼을 토닥여 주었다.

    "백작부인, 피크닉에 함께 가지 않으시겠어요?"

    샬로트는 자꾸 곁길로 새는 시빌의 주의를 다시 원래 줄기로 돌려놓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꽤나 힘든 과업이었다. 맥시밀리언의 어머니는 쾌활하게 웃어댔다.

    "그렇게 소박하고 촌스러운 놀이는 내게 맞지 않아. 얘야."

    그녀는 손사래를 치떠 무시해 버렸다. 샬로트는 초대장을 든 채 시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심결에 심한 말을 해버리는 그녀의 버릇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 집에서 2주 동안 지내는 사이 샬로트는 맥스가 왜 자기 어머니와 사사건건 대립하는지 점점 알 것 같았다. 위클리프 백작 부인은 모성애가 충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친절한 데다 재기발랄했지만 동시에 허영심 많고 이기적이었다. 샬로트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소중한 가족들, 그리고 이미 돌아가셨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어머니를 떠올리고는 백작을 가엾게 생각했다. 그는 호화로운 여러 채의 집과 말이며 평생 써도 다 못 쓸 재산을 갖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가족만은 가지지 못했다. 샬로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가족을 부와 바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샤프롱은요? 맥스‥‥‥ 그러니까 백작님 말로는‥‥‥‥"

    샬로트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어머니는 가냘프고 하얀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말을 중도에 끊었다.

    "맥시밀리언? 하! 누가 그런 답답한 퇴물 말을 들어줄 줄 알고? 그 애가 구혼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있단 말이냐? 규칙에 살고 규칙에 죽는 애인걸! 그 앤 네 말대로 미쳤어."

    샬로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마구 내뱉은 언사를 남의 입으로 다시 듣고 떠올리자니 거북했지만 시빌은 그 비난을 아주 재미있게 생각해 틈만 나면 입에 올리곤 했다. 맥스가 어머니에게 애정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아들을 그런 식으로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샬로트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식들 험담을 하는 광경을, 아니 놀림감으로 삼는 광경이라도 상상해 보려 했지만 절대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사내아이들이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엄하게 다스리는 법이 거의 없었다. 샬로트는 맥스가 그녀에게 고압적으로 행동한 데 대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지만 이제는 그에 대한동정심이 싹트면서 아직 남아 있던 나쁜 감정마저 빠른 속도로 엷어졌다. 더 고약한 것은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에게 맞서서. 시빌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샬로트는 샤프롱 없이 버기스 경과 피크닉을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영 찜찜했다. 다소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은 마차로 공원을 드라이브하는 것과는 달랐다. 피크닉 목적지에 가면 다른 사람들도 있다지만 그래도 샬로트는 계속 불안했다. 맥스는 한 번의 실수로 곧장 상류 사회에서 추방될 수 있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골칫거리를 자초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버기스 경이 뭔가 문제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과묵하고 다소 울컥하는 면은 있지만 스톨링스처럼 뻔뻔스럽게 나올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와 있다 해서 위험해질 일은 없다고 샬로트는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책잡힐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는 프랑스인답게 호들갑스러운 시빌을 최고의 심판관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들고 있었다. 맥스가 알게 되었을 경우‥‥‥샬로트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사실 맥스가 신경이라도 쓸까 싶었다. 그는 말다툼을 벌인 이후 그 주 내내 그녀를 죽어라 피해 다녔으며 아마 그녀 좋을 대로 완전히 방치해 두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아팠지만 그녀는 간신히 눌러 참고 마차에 오르도록 도와주는 버기스 경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이려고 애썼다. 그녀는 단단히 매듭지어 묶은 머리 위에 앙증맞게 얹은 모자를 고쳐 쓰며 드라이브를 즐기기 위해 편하게 앉았다. 그들은 정중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마차 안이 따뜻한 데다 요즘 시빌 때문에 계속 늦게 잔 탓에 샬로트는 자꾸 졸음이 왔다. 그녀는 볼썽사납게 조는 사태를 막기 위해 계속해서 치맛자락을 매만지고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맥스였다면 전혀 거리낌 없이 그냥 앉은 자리에서 잘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이런 어리석은 상상까지 했다. 아니, 그보다 아예 옆자리로 옮겨가 그의 탄탄한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그의 낯익은 체취를 들이마시면서‥‥‥‥샬로트는 멍하니 어리둥절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버기스 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잠이 들었었나? 그들은 이제 전원에 나와 있었으며 태양은 중천을 넘겨 하늘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피크닉 장소를 지나친 게 분명했다.

    "왜 아직도 도착을 안 했죠?"

    샬로트는 아직 잠기가 덜 가신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버기스 경은 대답 대신 자기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더니 엉뚱하게도 좌석 사이의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쥐더니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트로브리지 양."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렇게 대담한 내 행동을 용서해 주시오. 우리의 행선지를 바꾸고 싶었소이다. "

    샬로트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고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관자놀이께에 드문드문한 백발이 갑자기 불길하게 보였으며 회색 눈동자도 기묘하게 빛났다. 그의 이마에는 세월의 흔적이 서려 있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눈가에는 주름이 없었다. 그는 지나치게 진지했지만 맥스와는 또 달랐다. 무자비하게 엄격하다고나 할까. 그녀는 거북한 듯 뒤척였다.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남작님?"

    버기스는 그녀의 손을 열렬히 잡았다.

    "내가 당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알고 계셨겠지요. 사랑스런 트로브리지 양. 전날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당신이 내 청혼을 호의적으로 여기는 것 같아 난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는 벅찬 감정 때문에 말을 잇기가 힘들다는 듯 잠시 쉬었다.

    "더 이상은 우리를 갈라놓는 어떤 장애도 참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사태를 해결하기로 한 겁니다."

    다시금 그녀의 눈으로 올라온 그의 시선은 대담하고도 강렬했다.

    "트로브리지 양. 우린 그레트나그린으로 가는 중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