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11화 (11/19)
  • 11.

    맥스도 오늘밤은 외출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동의했다. 샬로트는 안도감을 숨기지도 않는 그의 태도를 보고 은근슬쩍 웃음을 참았다. 그는 느긋하게 그녀와 나란히 앉아 사생화집의 그림을 놓고 그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만큼 고대 신화 얘기에 쉽사리 빨려 들어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샬로트는 깜짝 놀랐다. 가까이 있는 세련된 백작의 존재 때문에 대화에 몰두하기가 영 어려웠다. 두 사람의 팔이 서로 맞닿거나 그가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세부 사항을 가리키느라 몸을 수그릴 때마다 샬로트는 심장 고동이 빨라지면서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하녀가 차 쟁반을 가져온 덕분에 다행히 기분 전환을 할 거리가 생겼다.

    "고마워, 애나."

    샬로트는 말했다.

    "케이크와 과일 파이를 좀 갖다줄 수 있겠어?"

    샬로트는 차를 따르면서 차분한 자세를 유지하려 했지만 애나

    가 나가고 나니 갑자기 단 둘만 남았고 그것도 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의식되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맥스의 생각을 전혀 감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만약 서굿 양의 거실 한복판에 전기 기계가 놓여 있다 해도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전기의 양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샬로트가 맥스에게 찻잔을 내미는데 손이 떨리는 바람에 그만 잔을 그의 무릎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머나!"

    그녀는 '헉'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휘둥그레진 눈을 본 그녀는 찻물이 델 정도로 뜨겁다는 것을 알아채고 냅킨을 집었다. 그녀가 잔을 치우고 냅킨을 그의 허벅지 안쪽에 갖다 대자 그는 목 졸린 듯한 소리를 토해냈다. 화상을 입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초조하게 그의 다리를 훔쳤다.

    "오, 맥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휘감고 거세게 움켜쥐더니 그 즉시로 동작을 제지시켰다. 그가 입을 열려고 헛기침을 하자 샬로트는 그에게 몸을 기울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이런 행동을 않겠다고 말해요"

    그의 목소리는 팽팽했고 입매는 굳어진 채였으며 커다랗게 뜬눈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차를 쏟은 걸 말하는 건지, 닦아낸 걸 말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샬로트는 어느 쪽이 되었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이러지 않겠어요"

    그녀는 따라 말했다. 마치 예사롭지 않은 고백이라도 하듯 다소 숨가쁜 목소리였다. 뭔가 한층 비밀스럽고 왠지 금지된 행위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왠지는 모르지만 방 안이 다시금 빙빙 도는 불구덩이로 변한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 더워서 숨을 제대로 들이마시기가 힘들었다. 사고 체계에도 이상이 생겼는지 지금 상태에서 상체를 조금만 더 기울이면 맥스와 서로 입술이 닿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손이 그의 손에 덮인 채 여전히 그의 바지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 때문에 흐릿해진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의 옷에 대한 걱정 따위는 순간 접어 버리고 해결되지 않은 열망을 향해 줄달음쳐 갔다. 그녀는 짓궂음이 어느 정도 뒤섞인 대담한 몸짓으로 그의 허벅지를 감싸면서 그의 다리를 친밀하면서도 세차게 움켜쥐었다. 느낌이 근사했다. 맥스의 근육이 그녀의 손길 아래 탄탄해지면서 길고 숱 많은 그의 속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숨가쁘게 속삭였다.

    "샬로트‥‥‥"

    그녀는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따끔거렸다. 특히 가슴이 노출 심한 옷 너머로 금방 터져 버릴 듯한 느낌이었다. 가까이 붙어 앉은 탓에 그녀는 그의 청결한 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 아찔한 충격파가 덮쳐왔다.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에게로 더욱 몸을 기울이고 싶었다. 물러나야 해. 그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맥스를 바라본 순간‥‥‥세련되면서도 까다롭던 맥스가 그녀 앞에 무방비상태로 있는 연약한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아찔하면서도 뭐라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일종의 힘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샬로트는 그의 입술을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천천히 몸을 내밀어 그의 턱선을 따라 잔잔하고 촉촉한 키스를 퍼부었다.

    "샬로트‥‥‥"

    그가 나지막이 신음하듯 속삭이자 그녀의 전신에 흥분이 뭉글뭉글 퍼져갔다. 한층 대담해진 그녀는 그를 끌어안고 싶다는 듯 그의 어깨로 손을 가져간 다음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그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거칠게 뚫고 들어왔으며 그의 양손이 그녀의 허리로 올라와 한층 바싹 끌어당겼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상반신을 뒤로 젖혀 긴 의자의 쿠션에 밀어붙였다. 그녀의 몸을 덮친 그의 육중한 몸이 황홀하게 여겨졌다. 단단한 그의 가슴 아래 그녀의 가슴이 거세게 짓눌리면서 얇은 드레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찰되었다. 가슴이 맞닿을 때마다 그녀의 피부는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내내 키스로 그녀를 공략하며 그녀의 호흡과 감각을 탈취했다. 냉정하고 침착한 그가 마지막 식사를 하는 굶주린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문을 열자 그 안에 갇혀 있던 폭풍우가 풀려 나와 버린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았으면, 샬로트는 빌었다. 언제까지나. 그녀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고급 상의를 양 손으로 쓸어 내렸다. 겹겹이 둘러쳐져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옷감들 때문에 욕구불만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그녀의 두 손이 딱 맞는 바지에 감싸인 그의 엉덩이를 찾아냈다. 그 탄탄한 근육은 그녀의 애무를 받자 곧장 움찔하며 반응을 보였다. 그가 응답하듯 거칠게 몸을 비벼대자 그녀는 욕망으로 터질 듯 굳어진 그의 몸을 감지했다.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열로 빛깔이 짙어진 데다 일종의 경악과 고뇌가 뒤섞여 빛

    나는 눈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다음 순간 그 시선은 그의 얼굴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가 있던 그녀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는 양 손을 내리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고통스럽다는 듯 갈라져 있었다. 샬로트의 욕구는 누그러지기는커녕 계속해서 욱신댔다. 그들이 남자와 여자로 만났을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욕구였다. 이것은 죄악일까? 침묵이 뜨거운 긴장 속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맥스는 내면의 악령과 맞붙어 싸우는 사람처럼 그녀의 가슴을 계속 쳐다보았다. 갑자기 샬로트는 깨달았다.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지금은 그가 그 잘난 자제력을 잃고 폭풍우가 날뛰도록 내버려두었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위로 들어올리고 꼿꼿이 일어선 그의 남성에 몸을 밀어붙였다.

    "샬로트!"

    그는 열기 어린 신음을 낮게 내뱉었다. 환희 때문인지, 아니면 굴복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음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상의로 뻗어왔다. 그의 손끝이 밖으로 드러난 가슴 곡선을 쓸자 그녀의 몸은 그의 손길을 더욱 갈구했다.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드레스를 끌어내리려는 듯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초조한 듯 나직이 신음하며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몸을 덮더니 맨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가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고 젖꼭지를 문지르자 샬로트는 쾌락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확신했다. 황홀경에 찬 한 순간 그녀는 그의 정열적인 신음 소리 속에서 천국을 보았다. 육중한 몸으로 그녀의 몸을 덮친 그가 눈을 감고 그녀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열렬하게 불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역시 천국이었다. 비명 소리와 쟁반이 쨍그랑거리는 소리에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경이를 안겨 주던 맥스의 열기는 서로에게서 떨어져 똑바로 앉아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사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겨우 다시금 제대로 앉을 수 있게 된 샬로트는 여전히 문간에 서 있는 애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하녀의 눈은 유령이라도 본 듯했다. 발치에 널브러진 케이크며 파이 쟁반은 깜짝 놀란 하녀의 소행이 분명했다. 애나는 머리카락 뿌리까지 새빨갛게 된 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백작님! 죄송합니다!"

    하녀는 정신 없이 지껄였다. 맥스는 당연히 애인들 사이의 포옹으로 보이는 그 행위를 그럴 듯하게 침착한 변명으로 얼버무려 상황을 처리했고 샬로트는 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귀족다운 권위를 발휘해 느긋하게 애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오거스타의 귀에 이 사건이한 마디도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양쪽 일을 다 무마시켰다. 샬로트는 홍당무가 된 하녀를 흘낏 보았다. 저 아이가 대체 어디까지 보았을까? 맥스의 몸이 가리고 있던 탓에 최악의 노출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위클리프 백작이 미혼인 아가씨의 몸 위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은 오해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목사의 딸이었다. 그 생각에 얼굴을 붉힐 정도의 체면은 샬로트에게도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백작가 살림의 결산서를 검토 중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런던 저택의 청지기를 만나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지를 감독했다. 아랫사람들이 갑자기 포도주를 세 배나 더 사용했을 경우 그는 그 이유를 캐냈다. 혹은 그의 허락 없이 포도주를 마셔 버린 범인이 있다면 색출해 냈다. 그는 가격대에 관한 최근 정보를 빠삭하게 꿰고 있는 자신에게 자긍심을 느꼈다. 그의 하인들 가운데는 낭비벽을 가진 사람도 전혀 없었다. 줄줄이 기록된 수치에 몰두해 있던 맥시밀리언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논의 중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항상 엄하게 지시를 내려놓았던 터라 그는 짜증난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들어오게."

    계산을 다 끝내고 난 뒤에야 고개를 든 맥시밀리언의 눈에 입구에 서 있는 집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호스킨스 에거먼트는 맥시밀리언이 손수 하인을 뽑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으로 착실하고 강직하며 충성심도 깊었다. 흘끗 파악한 것만으로도 맥시밀리언은 뭔가 엉뚱한 일이 호스킨스의 심기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챘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백작님,"

    집사는 불길한 시선으로 맥시밀리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분이라니 누구 말인가?"

    맥시밀리언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대꾸했다

    "위클리프 백작 부인 말씀입니다. 백작님의 어머‥‥‥"

    "그 혐오스런 호칭을 쓰지 말랬잖아, 이 늙은 멍청이 같으니 !"

    새되지만 힘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호스킨스의 등  뒤에서 터져 나와 방으로 흘러 들어왔다. 맥시밀리언은 어디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어머니의 어조에 움찔했다. 청지기와 집사는 훈련받은 그대로 여인의 악담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맥시밀리언은 아랫사람들의 역량에 잠시 찬탄한 다음 일어났다.

    "나중에 계속해야겠네, 에거먼트."

    그는 말했다. 시빌은 그녀 특유의 끝간 데 없는 활력과 우아함을 발산하며 복도에서 분주하게 서성대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저렇게 작은 체구에 어떻게 저런 활력이 다 들어찰 수 있는지 전부터 종종 궁금해하던 차였다. 그가 보기에 분명 프랑스 최신 유행인 그녀의 암녹색 드레스는 작은 가슴이 주책맞게 다 드러날 정도로 목선이 낮게 패여 있었다. 이런 여자에게 샬로트를 부탁한다고? 그는 순간적으로 불안감을 느꼈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담."

    그녀는 나비처럼 훨훨 날듯 그에게로 다가와 뺨에 입술을 살짝 스쳤다. 철이 든 이후로 맥시밀리언은 어머니와 항상 이런 식으로 애정 어린 장면을 서툴게 연기하곤 했다.

    "오셨군요"

    "당연히 왔지. 그런 편지에 내가 무슨 수로 안 온단 말이냐?"

    그녀는 입술을 살짝 실룩대더니 작은 백에서 그의 편지를 꺼내 흔들어댔다.

    "위대하신 위클리프 백작께서 날 하인처럼 불러들이셨으니."

    그녀는 비꼬았다.

    "백작님의 부름 앞에 총알처럼 달려와야지 달리 무슨 수가 있을꼬?"

    맥시밀리언은 절대로 어머니에게 말려들어 화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네 편지에 커다란 호기심이 생겼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그냥 파리에 있었을 게다. 아아, 맥시밀리언."

    그녀는 숨가쁘게 색색거렸다.

    "클리시 가에 최고로 근사한 호텔이 생겼단다. 게다가 음식은 또 얼마나 훌륭한지! 그런 최고급 정찬을 들다가 영국의 이런 멀겋고 맛없는 음식을 무슨 수로 먹겠니? 겨우 그곳에 안착했건만 어쩌자고 날 끌어낸 거냐, 잔인한 녀석!"

    "파리에 1년도 넘게 계시지 않았나요?"

    맥시밀리언은 쌀쌀맞게 지적했다.

    "하! 난 너처럼 인생을 시계 초침으로 재면서는 못 산단다. "

    그녀는 귀찮다는 듯 태평하게 손사래를 쳤다. 손짓을 섞어가며 호들갑을 떠는 어머니의 말버릇을 맥시밀리언은 경멸했다. 그는 양 손을 얌전히 모은 샬로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디 그녀가 시빌의 버릇을 하나도 닮지 않기를.

    "하지만 이왕에 왔으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 그럼 네가 원한다는 그 도움이 뭔지 말해 보렴."

    맥시밀리언은 조각과 금박 장식이 되어 벽에 일렬로 늘어선 애덤 양식(신고전주의적 가구와 건축 양식의 일종)의 의자를 하나 골라 앉았다.

    "젊은 아가씨 한 사람을 돌봐 주셨으면 합니다. 제 영지 중 한곳에서 봉직하는 목사의 딸이죠."

    일순 격분한 표정을 짓는 어머니를 보고 그는 고소한 기분을 느꼈다.

    "뭐야? 보잘것없는 계집애나 상대하고 놀라고 날 친구들에게서 떼어놓은 게냐? 너무 하는구나! 이번엔 너무 심하구나, 맥시밀리언. 넌 날 모욕했어 !"

    맥시밀리언은 어머니가 녹색 옷을 나부끼며 이리저리 방 안을 서성대는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렇겐 못해! 내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 넌 부탁을 하는 입장이 아니냐?"

    그가 의자에 앉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시빌은 그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공중에 날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뒤로 물러나 서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셔야 할걸, 맥시밀리언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의 애인들인 다혈질 프랑스인이 아니라 그녀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다루는 수법을 오랜 세월 동안 완벽하게 갈고 닦았다. 그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양 손을 세워 끝을 모았다.

    "트로브리지 양이 이미 사교계에 데뷔해서 금년 시즌 최고의 신붓감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비길데 없는 미녀로 사교계의 새로운 여왕이죠‥‥‥‥"

    그는 그녀의 관심을 자극할 만큼의 정보를 살짝 제공하고 일부러 말꼬리를 흐린 다음 창문 너머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난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구나."

    시빌은 항변했다.

    "입만 산 여자도 사교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법이야. 난 그 아가씨를 후원하고 감독하는 역할 따윈 못한다. 하루도 안 돼서 따분한 나머지 죽고 말 거야."

    "물론 그 아가씨에겐 체면이 깎이지 않을 정도의 화려한 오락거리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초대와 구혼자를 챙기고 정리해 줄 사람은 물론이고‥‥‥‥"

    그는 의미심장하게 사이를 두었다.

    "하지만 마담 말씀이 옳을 수도 있지요. 마담께선 옛날과 달리 이젠 젊지 않으시니까요. 마담께 이런 어깨가 무거운 부탁을 드리다니 제가 나빴습니다."

    "흐음."

    시빌은 길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 아들을 이리저리 재듯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눈길을 온건한 시선으로 마주 보자 그녀는 얼굴을 둘러싸고 있던 거무스레한 곱슬머리를 뒤로 홱 넘겼다.

    "그 아가씨를 한번 봐야겠다. 그 이상은 약속할 수 없구나."

    "그렇게 하세요, 마담."

    맥시밀리언은 고개를 숙였다.

    "자금이 필요해. 네가 주는 쥐꼬리만한 돈을 더 올려다오. 네 아버지는 왜 모든 걸 너한테 맡겼는지 정말 모르겠다니까. 하마터면 나한테 아무것도 안 남길 뻔 했잖니!"

    맥시밀리언은 말대꾸하고픈 충동을 억눌렀다.

    "물론 마담께선 돈이 필요하시겠죠. 그것도 아주 많이."

    그가 노골적으로 말하자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보였다. 그는 이제 자신도 나이가 들어서 프랑스산 고양이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머니는 샬로트를 돌봐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아가씨는 오늘밤 해밀턴 하우스에 옵니다. 마담께서 괜찮으시다면 저와 같이 가시죠."

    "하! 난 너와 같이 다니면서 끊임없이 시계로 초나 재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구나!"

    시빌은 대꾸했다

    "하지만 오늘 파티엔 참석해서 네가 말하는 그 여왕을 내 눈으로 봐야겠다. 결정은 그 후에 하자꾸나."

    그녀는 이미 복도 쪽으로 반쯤 향하던 중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아가씨의 피부색이며 특징이 뭐냐?"

    그녀는 물었다. 맥시밀리언은 미소지었다.

    "하얀 피부에 금발이고 가슴이 풍만하지요"

    그는 시빌이 그 질문을 한 이유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무스레한 미모를 지닌 자기 자신과 비교될 염려가 없는 아가씨여야 돌봐줄 마음을 먹을 것이다. "잘됐구나."

    그녀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뚜렷이 대조되겠구나. 금발이라‥‥‥그런데 가슴이 풍만하다고? 넌 그 아가씨에게 관심이 없는 거겠지?"

    그녀는 눈을 예리하게 번득이며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맥시밀리언은 볼로 핏기가 몰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그 뒤를 이어 짜증이 솟구쳤다.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을 당혹시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요?"

    그는 비웃었다.

    "절대 아니지요"

    “물론 아니겠지 !"

    시빌은 말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다니. 위대하신 위클리프 백작과 목사의 딸이? 말도 안 돼!"

    그녀는 쾌활하게 깔깔거리더니 나가 버렸다. 맥시밀리언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혀 우스운 기분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왜 여태 안 오시는 거야?"

    맥시밀리언은 초조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연신 손끝으로 다리를 톡톡 두들기다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맙소사, 위클리프."

    랠리는 안경을 들어 해밀턴 가의 응접실 안을 훑어보며 말했다.

    "자네 자당께서는 항상 늦으시잖나."

    맥시밀리언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오늘밤 그의 어머니는 정말 대책 없을 정도로 늦는 중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복통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망할."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벌써 자네 계획을 후회하는 건가?"

    랠리가 동정의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래. 아니. 망할, 나도 모르겠네."

    맥시밀리언은 그답지 않게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고 경악하는 랠리의 모습을 무시하며 시인했다.

    "그 외엔 방도가 없지 않은가? 샬로트의 친척은 노골적으로 임무를 저버렸고 내겐 그 아가씨를 맡아줄 여자 친척이 없는걸."

    "우리 집안 쪽에서 손을 쓸 수 없다는 게 유감이야."

    랠리는 아쉬운 듯 말했다.

    "우리 집안엔 여자 친척이 남아돌지만 하나같이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지. 다들 내 의상이나 태도도 못마땅해 해. 사실 뭐든 마음에 들어하는 게 없지. 그런 친척들이 트로브리지 양을 받아주었을 리 만무해. 아버지 역시 내켜하지 않으셨을 거야. 아버지는 내가 부잣집 상속녀와 결혼하길 바라시지. 우리 가문에 필요한 건 돈이라면서."

    랠리는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자네가 그녀의 구혼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면 그런 조치는 부적절할 걸세."

    맥시밀리언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랠리는 안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럼 자네 자당께서 그 아가씨를 돌봐 주시는 건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그건 다르네."

    맥시밀리언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난 그 아가씨의 가족과 아는 사이니까,"

    "하!"

    랠리는 소리내어 껄껄댔다. 친구의 재미있다는 기색에 발끈한 맥시밀리언은 쏘아붙였다.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 아가씨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내가 주소만 안다면 직접 데려다 주겠네."

    랠리는 낄낄거리며 빈정댔다. 맥시밀리언은 험악한 눈길로 그를 곁눈질했다.

    "아아, 제발 그러지 말게, 위클리프! 물론 그 아가씨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원치 않네. 빌어먹게 지루한 시즌이 그 아가씨 덕에 활기를 띠었잖나. 그리고 그 아가씨를 자네 자당께 맡기게 되면 재미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질 걸세."

    랠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즐겁게 기대한다는 듯 다시 껄껄대며 웃었다. 반면 맥시밀리언은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이번 조치로 자네들 두 사람에 대한 말들이 많아지리라는 건 알고 있겠지?"

    랠리는 짓궂게 눈을 빛냈다.

    "난 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네."

    맥시밀리언은 뚱하니 대답했다.

    "당연히 말들이 있겠지. 특히 우리 어머니에 관해서,"

    랠리는 친구를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한 발짝 물러났다.

    "그게 아니라 트로브리지 양 얘기일세. 사람들은 그 아가씨와 결혼하는 게 자네라는 데 내기를 걸고 있다고."

    맥시밀리언의 검은 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리는 모습을 보니 랠리의 말이 그의 주의를 끈 것은 분명했다.

    "쓸데없는 짓거리들이야."

    "어떤 작자들은 자네가 결혼 전에 그 아가씨를 사교계에 소개시키려고 수고스럽게 이런 방법을 썼다더군."

    랠리는 그 소문이 진실이라는 암시가 조금이라도 드러날까 싶어 친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이 보인 반응이라고는 조롱 섞인 코방귀뿐이었다. 랠리는 놀란 데다 재미 있는 나머지 숨넘어가게 웃어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삼켰다. 그의 눈에는 한심할 정도로 뻔한 일을 두고 위클리프가 이렇게 황소 고집을 부리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트로브리지 양이 그녀의 친절하고 늠름한 보호자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것은 누가 보아도 확실했다. 그런데도 위클리프는 그 사실에 완전히 눈멀었을 뿐만 아니라 둔감한 나머지 그녀에 대한 자신의 애정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잠시라도 한 적이 없다는 말은 하지도 말게 !"

    랠리는 따졌다. 맥시밀리언은 더할 나위 없이 결백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그의 입꼬리가 경멸하듯 약간 휘어 올라가 있었다.

    "친애하는 랠리, 내가 목사의 딸과 결혼하리라고 믿다니 그건 안 될 일일세."

    랠리는 나직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친구는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다. 로맨스가 꽃피기에는 좋지 않은 징조였다.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군."

    그가 따지자 맥시밀리언은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다.

    "대답이야 당연하지 않나."

    그는 너무나 술술 대답했다.

    "그 아가씨는 너무 어리고 세련되지도 못했고 내가 아내감의 필요 조건이라 생각하는 좋은 집안 출신도 아니야. 물론 이건 결혼을 고려할 경우의 이야기지만 지금 난 그럴 생각이 없네. 전에도 자네에게 설명했지만 난 삶의 방향도 없는 불쌍한 족속들과는 달리 인생의 계획을 세워 두었네. 난 그 계획을 기록해 둘 수 있는 나이가 된 이래 줄곧 거기에 충실해 왔지."

    "그럼 그 인생 계획에는 아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나?"

    랠리는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당연히 포함되지. 난 후계자를 생산해야 하는 내 의무를 뚜렷이 의식하고 있네. 하지만 젊어서 서둘러 결혼할 생각은 없네. 난 서른에 결혼하기로 계획했으니 앞으로 두어 해 동안은 적당한 여자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지."

    랠리는 경악한 표정을 숨기려고 거의 몸부림을 쳤다. 그는 시간의 중요성을 노래하다시피 하는 위클리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위클리프는 진짜 그 말대로 하나도 어김없이 따를 것이다. 그는 이미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사무에 관해서나 의회에서도 그 자신이 계획한 엄격한 일정대로 생활하는 데 성공한 바 있었다. 랠리는 무섭지만 일종의 호기심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보았다. 위클리프는 아내를 고를 때도 우편물이 도착했다는 통지를 살펴볼 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할 것 같았다.

    "그럼 자네가 여자를 고르는 기준은 대체 뭔가?"

    맥시밀리언은 그때서야 처음으로 그 질문을 실제로 곰곰이 따져 본다는 듯 말을 멈췄다. 랠리는 더더욱 경악했다.

    "물론 집안이 좋아야겠지. 적어도 귀족 집안의 딸은 되어야지. 난 내 작위와 이름에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으니 말일세. 그 중에서도 내 생활 방식에 적응할 능력이 있고 자기 일정을 적절히 맞춰줄 수 있는 여자여야겠지. 샬‥‥‥트로브리지 양은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니야.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말이야."

    그는 랠리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 떴다.

    "그 아가씨는 지나치게 충동적이야. 내 아내가 될 여자는 나의 권위를 인정해야만 해. 하지만 트로브리지 양은 내 충고를 거의 듣지도 않아. 그 아가씨는 충동적이고 고집불통이고 입씨름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

    랠리는 맥시밀리언의 손가락 쪽으로 살짝 눈길을 옮겼다. 허벅지를 끊임없이 박자 맞춰 두드리는 그 동작에서 그의 격한 심리 상태가 엿보였다.

    "랠리, 자네도 잘 알듯이 난 평온한 생활을 갈망해. 끊임없이 요란한 생활은 싫네. 난 감정적인 유대 따위는 앞으로 기대하지도 않고 원치도 않네. 현명한 결합에는 서로간에 존경심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사실 난 결혼 이후에도 그리 달라진 생활을 하지 않을 것 같네. 평상시의 일정대로 계속 지내고 싶으니까. 아내가 있다면 아무래도 사소한 점에서 변동은 있어야겠지만. 그러니 꼼꼼하고 시간을 엄수하는 사람이 아니면 상대로 고려하지도 않을 걸세."

    랠리는 이제 허벅지 위에 편안히 놓인 맥시밀리언의 손을 바라보며 헛기침으로 웃음을 얼버무렸다. 그는 웬 불쌍한 여인이'미래의 후계자 수태일 백작 침실에서 매주 금요일 밤 11시~11시 반' 이라고 적힌 일정표를 받아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럼 그런 여자를 어디에서 찾을 생각인가?"

    맥시밀리언은 느긋하게 친구를 곁눈질했다.

    "때가 되면 나와 같은 계층의 집안에서 찾아봐야겠지. 하지만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으니 이렇게 일찍부터 선택의 폭을 고정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일 걸세."

    "물론 그렇겠지."

    랠리는 중얼거렸다. 그는 방 저쪽 편에서 호위대에 둘러싸여 유쾌하게 깔깔대는 샬로트를 몰래 훔쳐보았다. 저 가엾은 꼬마아가씨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 어렴풋이라도 알기나 할까? 샬로트는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자그마한 여인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상품이라도 된 양 이리저리 품평당하며 트집을 잡히고 있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하려 했다. 이 대담하고 몸집 작은 여인이 맥시밀리언의 어머니라고?

    "아가씨 키가‥‥‥ 정말 크군."

    다소 못마땅하다는 듯한 부인의 어조에는 외국어 억양이 약간 감돌았다. 샬로트의 눈길이 잽싸게 맥시밀리언 쪽으로 향했다.

    "시빌."

    그는 낮게 경고하듯 말했다.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샬로트는 어리둥절했다. 그가 처음에 그 여인을 위클리프 백작 부인이라 소개했을 때 샬로트는 일순 숨이 탁 막히면서 공포에 질렸다. 맥스가 유부남이었다고? 여태껏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고맙게도 그들 뒤에 서 있던 랠리가입 모양으로 '이 친구 어머니요'라고 알려 주었다.샬로트는 자신의 가슴 위를 음험하게 더듬는 여인의 눈길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낯익은 불안감이 밀려들었으므로 그녀는 기계적으로 손을 들어 꽤나 드러난 자신의 살결을 가렸다. 위클리프 백작 부인의 드레스는 젖꼭지가 거의 보일 정도로 목선이 지나치게 패여 있었지만 정작 가슴은 눈길을 끌 정도는커녕 조막만했다. 샬로트는 자기 자신의 가슴 크기를 생각하고 문득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당황해서 머뭇머뭇 맥시밀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문제의 그 부분에 집중된 그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전혀 혐오스러운 내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후끈후끈 불타오르는 표정이었다. 문득 샬로트는 몸이 확 더워지면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시빌이 아무리 깐깐한 소리로 못마땅한 점을 피력한다 해도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몸이 좋았다. 맥스가 좋아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의 감정하는 시선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잊었다.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꽂고 있는 남자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찬탄을 더욱더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아주 천천히 손을 치워 몸의 곡선을 드러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쳐 얽혀 들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은데? 샬로트는 그의 손이 뻗어와 자신의 몸에 닿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재빨리 눈길을 피하며 딱딱한 말투로 어머니를 꾸짖었다.

    "시빌, 정말이지 조목조목 따지고 살피는 짓은 그만두시죠. 이 아가씨는 마담의 수집품에 새로 포함될 도자기 인형이 아니란 말입니다. "

    맥시밀리언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더니 독수리처럼 맴돌던 동작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키가 너무 크지만 않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로구나. 저런 눈동자라니‥‥‥‥"

    그녀는 처음으로 샬로트에게 말을 걸었다.

    "매력적인 외모로군, 친애하는 아가씨. 맥시밀리언 말로는 아가씨 친척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그 소식을 들으니 유감이군. 하지만 그 덕에 아가씨를 우리 집에 초대해서 같이 지낼 수 있게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겐 맥시밀리언이 런던에 사준 집이 있다오. 그 애의 집만큼 넓은 건 아니지만‥‥‥‥"

    그녀는 비난하는 눈길로 아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하지만 웬만한 크기지. 와서 지내겠수?"

    샬로트는 맥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냉담하고 어떤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녀가 거절하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 그녀는 딱 잘라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더 이상 위클리프 백작과 연루되는 사태는 피해야만 했다.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심장이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판이니 시즌이 끝날 때쯤이면 아마 심장이 터져 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런던에서 남편감을 찾아내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숙소와 돌봐 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엾은 오거스타는 겉으로 봐도 티가 날 만큼 부담을 느낀 나머지 앓아 누웠고, 그 이후로는 아직껏 어느 누구도 샬로트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샬로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그녀는 여태껏 한 번도 현명하게 굴었던 적이 없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

    샬로트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정말로 기뻐요"

    맥시밀리언은 유쾌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내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샬로트를 어머니에게 맡긴 이래 한층 기분이 좋았다. 이제 목사의 딸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그의 일정은 어느 정도 정상에 가깝게 복구되었다. 시빌은 겉보기에는 못 말릴 정도로 경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어떤 면에서는 극도로 빈틈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샬로트가 누구와 같이 있는지를 내내 확인하고 구혼자들을 관리하며 난봉꾼과 평판 나쁜 자들을 세심하게 솎아낼 능력을 갖췄으므로 그는 믿고 그녀에게 샬로트를 맡길 수 있었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자기 어머니의 보호 아래 샬로트를 둔다는 이 관대한 조치는 모두에게 적절한 것처럼 보였다. 오거스타의 상태는 회복 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병환은 젊은 아가씨를 책임지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야한다는 의무감에 진저리가 난 데서 비롯된 것 같았다. 맥시밀리언은 얼마 전 트로브리지 일가에 두툼한 편지를 보냈고 샬로트가 입은 관대한 후원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편지가 곧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기분은 현관에서 어머니의 하인 슈발리에의 모습을 보고다소 가라앉았다. 맥시밀리언은 그자가 단정한 하인치고는 지나치게 건방지고 괴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자를 곁에 두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백작님! 이렇게 오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실버들처럼 날씬하고 키가 큰 데다 검은머리와 웃음기가 담긴 푸른 눈동자의 남자는 하인치고는 과할 정도의 환대를 퍼부으며 인사했다.

    "백작님을 뵙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지요"

    맥시밀리언은 남자의 기를 죽이기 위해 째려본 다음 그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난 원래 올 예정이었는데 놀라울 게 뭐 있나?"

    그는 자신의 비서가 사전에 방문 예정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정해 그의 어머니에게 연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아, 그러십니까? 부인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거든요. 서재로 안내해 드릴까요?"

    맥시밀리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어머니는 기다리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을 터였다.

    "트로브리지 양은 어디 계신가?"

    "주간용 거실에 계십니다. 백작님."

    슈발리에는 교활한 눈길로 대답했다.

    "그럼 내가 직접 서재로 가겠네."

    맥시밀리언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 샬로트를 만날 일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안정을 찾아 적응할 때까지 거의 1주일 넘게 시간을 두고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향해 끓어오르는 막연하고 초조한 갈망을 억누르며 이것은 다 집안끼리의 친구를 만나고 싶은 자연스러운 심정이라고 둘러댔다. 거실의 커다란 문은 열려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몰래 그녀를 훔쳐보고 싶은 욕심에 걸음을 늦췄다. 그는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고동이 한층 격렬해지는 등 자신의 몸에 미묘하게 일어나는 변화를 무시했다. 그녀는 그가 준 책을 보고 있을까?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머리채를 풀어 내리고 맨발로 의자 위에 동그마니 앉아 햇빛보다도 더욱 찬란한 자태를 뽐내고 있을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는 그녀의 맨발 차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정갈한 발끝과 맵시 좋은 발목을 소박한 드레스 아래로 드러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는 그녀의 발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강한 자극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맥시밀리언은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쫓아내려고 애쓰며 문간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샬로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상상했던 편안한 모습 따위는 자취도 없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버기스 경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손에 입술을 갖다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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