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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의 웨딩마치-10화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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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굿 양은 회복되지 않았다. 맥시밀리언은 체념하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의 병세가 정말인지 꾀병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샬로트는 그녀의 발병을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의 아리따운 아가씨는 종종 행사에 참석했지만 호위대들에게 던지는 인사말은 예전보다 활기가 덜했고 미소는 억지였으며 눈동자는 생기 없이 둔했다.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 모든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알 바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사실은 그녀의 고민을 덜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이런 이타적인 욕망은 실로 어울리지 않는 순간마다 찾아왔다. 한참 사무적인 의논을 하고 있을 때, 카드놀이를 하고 있을 때, 심지어는 어떤 미인의 말상대를 하고 있을 때에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그는 샬로트를 행복하게 해줄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그 자신이 샬로트에게 갖는 애착은 그녀의 막내 동생 제니에

    게 품고 있는 감정과 다를 것 없었다. 그는 이런 논리로 자신의 묘한 감정을 정당화했다. 사실 그는 심정적으로는 트로브리지 가족 전체를 입양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제는 가족들 거의 전부에게서 편지를 받는 실정이었다. 제임스와 토마스의 편지에는 말이며 권투 시합, 마차 몰기에 대한 온갖 질문이 잡탕처럼 뒤범벅되어 있었고, 제인의 편지는 아주 진지하면서도 근황이 자세히 쓰여 있었다. 캐리는 별 내용 없지만 귀여운 편지를 썼고, 킷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쓰려고 고군분투 중이었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의 마음에 제일 든 것은 제니가 그린 그의 초상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이런 감동적인 선물을 보낼 엄두를 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랫사람들은 친해서가 아니라 묵묵히 일을 잘하기 때문에 뽑힌 일손들이었고 그들은 그의 눈에 어린아이들이 띄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의 정부들은 그가 애정 표현이나 감상적인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소작인들은 항상 격식을 갖춰 그를 대했다. 쉽게 말해 모두가 위클리프 백작에게는 일정 거리를 두었다. 목사와 그 일가족을 제외하고는. 제니가 그려 보낸 그의 초상화는 거대하고 찌그러진 머리통에 몸통과 손발이 달린 기가 막힌 낙서에 불과했지만 맥시밀리언은 그 그림을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누구나 볼 확률이 큰 서재에 그 그림을 놓아두기는 곤란했으므로 그는 침실을 빛내 주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 액자 한쪽 구석에 제니의 선물을 끼워 놓았다. 그 바람에 값을 따질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이 상당 부분 가려지고 말았다. 프로메테우스! 문득 맥시밀리언은 샬로트의 우울증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해답을 알아냈다. 그는 그녀가 런던에 온 이래 학문에 미친 여자로 찍힐까 봐 두려워서 열렬한 취미를 접어 두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녀의 그런 태도를 뭐라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의 아가씨가 학식이라곤 없는 지주 나부랭이와 결혼하는 상상을 해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는 샬로트의 혼사에 관한 한 목사로부터 백지 위임장을 받은 몸이니 그녀가 그런 남자에게 정착하는 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할 작정이었다. 책을 몇 권 보내 줄까? 아니, 고전 서적을 몇 권 직접 갖다 주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서리는 놀라운 표정을 음미하는 편이 더 솔깃했다. 그는 마부와 한참 대화 중이었는데도 그 생각을 하자 바보같이 빙그레 웃으며 사과를 하고 곧장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는 일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서재로 향했다. 그는 테바이 왕가에 대한 샬로트의 관심을 염두에 두고 그녀가 좋아할 만한 책을 몇 권 골랐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그리스 유적지를 스케치한 사생화집에 살짝 스쳤다가 한동안 머물렀다. 물론 그는 유럽 대륙을 여행하면서 최고의 명승지로 손꼽히는 곳들을 가보았지만 그것도 오래 전 일이었다. 그는 샬로트에게 그 광경을 보여 주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그의 정열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세계를 구경하는 광경을‥‥‥‥맥시밀리언은 샬로트가 그와 나란히 고대 도시의 언덕을 오르고 폐허에 서 있는 신상들을 구경하며 유명한 아테네 신전의 늠름한 주랑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뚜렷이 그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그가 샬로트와 함께 그리스에 갈 수 있는 길은 트로브리지 일가족을 모두 데려가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캐리나 사내아이들은 고대 그리스를 경멸하고 있으니 몹시 끔찍한 여행이 될 것이 뻔했다.

    맥시밀리언은 사생화집을 보고 얼굴을 찡그린 다음 그 앞을 떠났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와 그 책을 빼내 다른 책들과 한데 합쳤다. 샬로트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풍경을 평생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자 그는 묘하게 침착성을 잃었지만 그런 기분을 억눌렀다. 적어도 그녀에게 이 그림들을 원 없이 보게 해주자고 그는 다짐했다.

    "트로브리지 양은 출타하셨습니다. 백작님."

    하인의 말은 맥시밀리언의 뇌리에 곧바로 접수되지 않았다. 출타? 맥시밀리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후 일정까지 젖혀 두고 찾아왔건만 출타라니?

    "어디로 가셨나?"

    그가 물었다. 서굿 양의 하인은 그를 재보듯 흘끔 바라보더니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맥시밀리언은 그자에게 따귀라도 갈겨 주고 싶었다.

    "신사분 한 분과 함께 공원으로 승마를 하러 가셨습니다. "

    그는 대답하더니 문을 닫으려 했다.

    "신사분이라고?"

    맥시밀리언은 언성을 높여 그를 몰아내려는 하인의 계책에 선수를 쳤다.

    "어떤 신사분인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인은 능청맞게 대답했다.

    "서굿 양에게 여쭤 보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겠네,"

    샬로트가 정체 모를 작자와 단 둘이 있다는 생각을 하자 분노가 치밀었지만 맥시밀리언은 꾹 눌러 참았다. 양심이라곤 없던 스톨링스의 작태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했다. 그는 그녀가 웬 녀석의 포옹을 억지로 받으며 나무 말뚝처럼 뻣뻣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지우려고 애썼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하인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서굿 양은 지금 몸이 불편하십니다."

    하인은 고개를 냉큼 까딱하더니 문을 닫았다. 맥시밀리언은 문간에 선 채로 이글이글 분노를 불태웠다. 그는 자신이 방문할 때마다 샬로트가 멍청한 구혼자 중에 아무나 데리고 시시덕거리는 일 없이 집에 얌전히 있기를 단연코 바랐다. 그리고 그녀가 누구와 시시덕거리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고 말 터였다! 목사의 딸에게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그말고 누가 또 있단 말인가? 그는 불끈 쥐었던 주먹을 내리고 심호흡을 했다. 그는 복수심이 강한 천성이 아니었고 어떤 종류의 폭력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양심의 가책은커녕 저 뻔뻔한 하인을 계단으로 끌어 네 거리로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전갈을 남길까 하는 생각은 다시 문을 노크해야 한다는 치욕스러운 현실 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부도 겁을 먹을 정도로 험악한 낯빛을 한 채 획 돌아서서 대기시켜 두었던 마차로 돌아왔다. 저 불손한 하인이나 조카손녀를 위험한 런던에 그냥 방치해둔 여주인 따위에게서 돼먹지 않는 취급을 받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는 맹세했다. 이제부터는 그가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살로트를 두고 싶었다.

    그런데 망할, 어머니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피터 월크스는 수심에 찬 표정으로 백작의 저택을 나섰다.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시는군요. 그렇지요?"

    누군가 물었다. 피터가 고개를 돌리자 위클리프 밑에서 일하는 마부 해리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중이었다. 해리는 오래 전 낙마한 까닭에 한쪽 다리를 살짝 저는 반백의 노인이었지만 말 다루는 기술만큼은 아직도 빼어났다.

    "그렇네. 백작님께서‥‥‥ 오후에 외출하시는 모양이라서."

    피터는 말하면서도 살짝 일그러지는 인상을 숨길 수 없었다. 뒤죽박죽 된 일정에 대해 그가 어떤 느낌을 품고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가는 표정이었다. 한패 그는 백작과 자신이 성격상 닮은꼴이라고 여겼지만 최근 백작의 행동거지는‥‥‥

    "그렇군요. 백작님께서 급히 출타하시는 걸 봤습니다."

    해리의 어조에서 뭔가가 느껴졌으므로 피터는 그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부는 움켜쥔 모자를 초조한 듯 양손에서 왔다갔다 놀리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가, 해리?"

    "그게.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해리는 상대가 물어줘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백작님 얘기입니다. 백작님이 걱정되어서요. 오늘은 평소 일과대로 말 관리에 관해 저와 한참 얘기를 나누시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지으시더니만‥‥‥‥"

    "어떤 표정 말인가?"

    피터는 대경실색해서 물었다. 그의 친척 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소화불량으로 쓰러져 다음날 아침해를 보지 못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저기, 뭐라 형용하기가 어려운 표정이었지요"

    해리는 거칠어진 손을 들어 회색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있는 정수리를 벅벅 긁었다.

    "그 뭐냐‥‥‥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랄까요"

    그는 마침내 말했다.

    "그러더니 의논 도중에 갑자기 튀어 나가시지 뭡니까. 아시겠지만 전혀 백작님 다운 태도가 아니었지요"

    피터는 백작이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는 소식에 일단 한시름 놓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떨칠 수 없었다. 백작의 태도가 극히 예사롭지 않다는 것에는 피터 역시 동감이었다. 해리는 모자를 만지작거리던 손놀림을 멈췄다. 다소 거북한 표정이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주인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마부의 주제에서 벗어난 행위였다. 하지만 이런 행동도 다 백작에 대한 노인의 애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피터는 계속 얘기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조금 전에는 급하게 마구간에 오셔서 말을 준비하라고 고함을 치시더니 악마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황급히 말을 몰고 달려나가셨지요"

    "백작님은 절대 내달리시는 적이 없지."

    피터는 해리가 전해준 정보를 듣고 어리둥절해진 나머지 멍하니 말했다. 백작은 결코 약속을 잊는 적도 없고 언제나 시간 엄수에 철저했으며 항상 일정하고 차분한 속도를 고수했다. 그가 속도를 내고 싶어하는 때는 마차 경주를 할 때뿐이었다.

    "분명 자네가 허풍을 떠는 게야."

    해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월크스 씨, 하지만 정말로 백작님은 총알처럼 튀어 나가셨다니까요"

    그는 설명을 거들듯 손을 크게 휘저어 보이며 말했다.

    "백작님을 오래 섬겼지만 그런 적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피터는 런던 저택의 정원을 쪽 고른 높이로 저 멀리까지 둘러친 당당한 담 벽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손질이 끝난 잔디는 정원석 바로 옆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위클리프 백작의 집과 재산, 사업, 여행 등등 그의 모든 것은 극히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대체 무엇이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일까? 피터는 자신이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무거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는 또한 비천한 마구간 일손 같은 백작의 하인들과 소문얘기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해리의 의혹에 제동을 걸려 했지만 노인의 눈에 서린 뭔가가 그를 막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과묵한 태도를 벗어 던지고 말았다.

    "자네도 거기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걸세, 해리. 내 생각엔 앞으로 좋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질 걸세."

    "백작님이 병이라도 나신 겁니까, 월크스 씨?"

    해리는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피터가 대답했다.

    "그럼 뭡니까? 월크스 씨는 알고 계시나요?"

    "확신은 없네, 해리."

    피터는 지친 듯 대답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여자 문제가 아닌가 싶네."

    해리는 놀란 나머지 작고 까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다음순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던 거군요!"

    그는 숨가쁘게 웃어대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기쁜지 모르겠군"

    피터는 딱딱하게 말했다.

    "기쁘고말고요! "

    해리는 득의만면한 표정이었다.

    "이제 이곳도 달라지겠군요. 두고 보십시오! 남자들의 습성을 바꾸는 덴 숙녀가 그저 제일이지요!"

    피터는 냉랭한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해리의 환희를 억누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해리는 몇 마디 더 예언하듯 중얼거리더니 절룩절룩 마구간 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연신 껄껄대며 모자를 허벅지에 대고 철썩 갈기기까지 했다. 피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해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두고 보라니. 정말이지 무슨 소리인가! 그는 침착성을 되찾고 대기 중인마차로 걸어갔다. 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아마 그는 그 광경을 보기도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었다. 여태껏 그는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도 전혀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이직을 고려해야 할 때일지도 몰랐다. 그 여자가 백작을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기 전에.

    맥시밀리언은 말을 달려 하이드파크로 향했다. 그는 어쩌면 샬로트와 길이 엇갈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파처럼 마차 안에서 우두커니 그녀를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말에 박차를 가하던 중 샬로트가 승마를 한다는 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청한 구혼자 녀석이 그녀의 능력에 관해 그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불쾌했다. 그녀는 어디에서 승마를 배웠을까? 목사관에 말

    이라고는 씨도 없다는 것을 맥시밀리언은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 그는 미리 혜안을 발휘해 그녀가 돌아오는 즉시 알려 달라고 심부름꾼 소년을 그녀의 숙소로 보내 두었다. 그래야 그녀가 집에 돌아왔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시간을 허비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운만 좋다면 이 어리석은 헛고생을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맥시밀리언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런 행동이 어리석은 헛걸음이라면 맥시밀리언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은 바보였다. 그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나다니는 것이 아니면 어떤 이동도 질색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시달리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목사의 딸을 찾아다니느라 일정을 허공에 날려 버린 자신의 행위 역시 몹시 혐오스러웠다. 이 모든 짓거리를 다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아갈까 싶어질 때마다 웬 불한당이 시즌 최고의 여왕을 조금이라도 차지해 보겠다는 속셈으로 샬로트를 꼬드기는 광경이 그의 뇌리에 자꾸 떠올랐다. 대체 그녀는 누구와 같이 나갔을까? 로디 블랙과 스톨링스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자리는 금세 다른 애송이들로 채워졌다. 대부분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자들을 보면 맥시밀리언은 어느새 자신이 노약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물론 랠리도 있었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이 보기에 그 친구는 단순히 유쾌한 도락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적어도 랠리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의 이런 감정은 그 외 샬로트의 추종자들에게는 일절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맥시밀리언은 샬로트의 유혹 앞에서는 성자도 능히 추잡한 짓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그녀는 너무나 자주 그를 그런 유혹에 몰아넣지 않았던가. 맥시밀리언은 자신의 어리석음이 빚어냈던 행동들을 기억 속에서 떨쳐 버리고 샬로트의 숭배자들만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 버기스란 작자는 처음부터 그녀를 점찍었으며 아직까지도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작이란 사람에게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라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태까지 꼽은 인물들은 그나마 제일 진지한 구혼자들에 불과했다. 중년이나 구제불능의 난봉꾼까지 포함된 나머지 녀석들은 꿀을 탐하는 벌처럼 계속해서 그녀에게 치근거리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들 때인 5시를 이미 넘긴 시각이었는데도 아직 하이드파크는 서로서로 추파를 던지는 상류층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그런 의식과도 같은 행동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일정표에 따라 목요일에는 높은 콧대를 려고 승마 행사에 참가하곤 했다. 오늘은화요일이었으므로 그가 출현하자 여러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해댔고 당연히 그의 수색 작업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늘은 그를 아는 사람마다 의무감에라도 사로잡힌 양 멈춰 서서 인사말을 교환하려 들었으므로 그는 평소 같았으면 세련되게 응대했을 예의범절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미소와 고갯짓이 그나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는 몰려든 인파를 샅샅이 뒤져 샬로트를 찾아내야만 했다.

    “이봐, 위클리프! 자네 일정을 바꾼 건가?”

    사륜 포장마차에 랠 리가 웬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광경이 눈에 띄자 맥시밀리언은 주저 없이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샬로트가 승마를 하러 갔다고는 했지만 그 불손한 하인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맥시밀리언은 랠리 곁의 숙녀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는 얼굴이 가려지는 큼직한 모자 차림이었지만 챙 밖으로 삐져나온 갈색 머리 덕에 랠리의 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에게 잽싸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던진 다음 랠리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샬로트를 못 봤나?"

    랠리는 활짝 웃었다.

    "이런, 못 봤네. 그 아가씨를 찾는 중인가?"

    맥시밀리언은 고개만 끄덕이고 변변한 작별 인사도 않은 채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 아가씨를 보게 되면 전해 주지."

    랠리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세상에! 대체 위클리프가 왜 저러는 거냐?"

    짜증이 버럭 난 듯한 여자목소리가 물었다. 랠리는 엄청나게 화난 표정으로 격하게 부채질을 해대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엔 저 사람이야말로 그래도 네 친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절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잘못 봤구나."

    "신경 쓰지 마세요, 리즈베스 누님."

    랠리는 득의만면하게 웃으며 타일렀다.

    "위클리프는 사랑에 빠진 나머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니까요"

    "위클리프가 사랑을 해? 거짓말 말아라!"

    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따졌다.

    "아닙니다! 사실이에요 맹세라도 하지요! 하지만 위클리프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답니다. 그러니 절대 그 친구에게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

    등받이에 기대고 앉은 리즈베스는 그의 어리석은 작태가 못마땅하다는 듯 새침한 입술을 꼭 다물었다.

    "허튼 소리!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뭣 때문에 너랑 같이 마차를 타고 나오겠다고 했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마침내 샬로트를 찾아낸 순간 그때까지 맥시밀리언을 괴롭히던 불안감은 사라지고 대신 감미로운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어디서든 오인할 리 없는 풍만한 몸매와 진홍색 승마복 덕에 그는 즉시 샬로트를 알아보았다. 그녀가 탄 말의 양순한 움직임으로 보아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승마 실력이 중급 정도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북한 기색이 아니었고 동행에 의해 당장 무슨 위험한 일을 당할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맥시밀리언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녀는 동행한 남자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환하게 깔깔대는 등 극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을 몰아 다가간 그는 그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곳에 닿은 순간 하마터면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로스! 맥시밀리언은 후작이 런던을 떠난 줄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이곳에 있었다. 돌아온 데다 샬로트와 함께 있기까지 했다. 맥시밀리언은 그 남자가 샬로트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들끓는 분노를 느끼며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는 애써 손의 힘을 뺐다. 자신의 반응이 지금이 안온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깨달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와 샬로트도 겉보기에는 안온하지만 결국은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빠져든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자신에 비해 로스는 자기 자신을 절제해야 하는 부담이 훨씬 덜하지 않은가. 샬로트는 저 호남아 후작과도 키스를 했을까? 나무토막처럼? 아니면‥‥ 그의 품안에서 녹아 내렸을까? 맥시밀리언은 말을 그쪽으로 몰아갔다.

    "좋은 하루입니다. 트로브리지 양, 로스 후작."

    후작의 이름을 입 밖에 내자니 어색하고 껄끄러웠다.

    "백‥‥‥ 백작님 !"

    샬로트는 기쁜 듯 홍조를 띠었다. 그를 보고 반가운 것일까? 아니면 또 자신의 성적 매력을 시험해 보는 것일까? 그녀가 저렇게 노련한 상대와 기술을 연마한다고 생각하자 맥시밀리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클리프 백작."

    로스는 불쾌한 기색을 거의 숨기지 못한 맥시밀리언을 보더니 재미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떴다. 맥시밀리언은 침착성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트로브리지 양, 우연히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군요."

    맥시밀리언은 가능한 한 매끄럽게 말했지만 자신의 귀에도 쥐어 짜낸 목소리처럼 들렸다.

    "당신에게 전해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저기, 그게‥‥‥‥"

    샬로트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맥시밀리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는 동행 쪽을 흘끔 바라보더니 다시 맥시밀리언을 쳐다보았다.

    "요즘 할머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웬만하면 방문을 사절하고 있어요. 하지만 백작님은 우리 가족의 절친한 친구분이시니 아마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다소 신경질적인 미소를 지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기묘한 태도의 이면을 꿰뚫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로스가 보고 있는 한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 자명했다. 맥시밀리언은 후작 따윈 지옥에나 가버리라고 속으로 빌었다. 안 그래도 울화통이 터지는 마당에 예의바른 대화를 억지로 나누자니 더욱 신경질이 치밀었다. 빌어먹을. 그는 샬로트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좋습니다. "

    맥시밀리언은 딱딱하게 고갯짓을 했다.

    "7시경이면 어떻겠습니까?"

    샬로트는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대체 맥스가 왜 이럴까? 7시라면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빠듯한데 ! 그녀는 이의를 제기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의 입매에 서린 알 수 없는 기운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괜찮겠네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트로브리지 양, 로스 후작."

    맥시밀리언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샬로트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리고 줄 게 있다니 대체 무엇일까? 목사관에서 누가 뭘 보내온 것일까?

    "고향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면 좋겠군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전혀 그런 것 같지는 않소만."

    로스가 쌀쌀맞게 말했다. 그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던 샬로트는 깜짝 놀라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맥스에게는 그녀의 감각을 모조리 압도해 버리는 고약한 습성이 있었다.

    "아아, 후작님,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사과드립니다. 용서해주시겠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트로브리지 양."

    후작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치키고 있었지만 샬로트는 로스가 자기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을 그다지 겪어본 적이 없으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경험은 그에게 좋은 약이 될 것이다. 그는 아는 여자들로부터 너무 지나치게 떠받들리며 지내온 귀공자였다. 남자들이란 이렇게 골치 아픈 족속이라니까! 샬로트는 그 점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요즘은 남자들을 상대하기가 점점 더 피곤했다. 가끔 그들은 킷이나 제인보다도 더욱 어린애처럼 굴었다. 그리고 로스나 위클리프 경처럼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야말로 그 중에서도 제일 버릇이 잘못 든 부류였다. 그들은 세상이 항상 자기를 위해 멈춰 서서 기다려 주리라 믿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맥시밀리언을 만나서 어느 정도 놀란 터였다. 다른 구혼자들과 달리 그는 그녀를 찾아다니는 것을 경멸한 나머지 보통 때는 그의 수많은 하인들을 시켜 그녀에게 편지를 전하기만 했다. 말을 타는 중이니까 몸소 오셨겠지, 안 그랬다면 또 심부름꾼을 시켜서 말을 전했을걸? 샬로트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일정 변경만큼 맥스의 짜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은 세상에 없지 않은가. 그 생각에 그녀는 문득 멈춰 섰다.

    "후작님."

    샬로트는 불쑥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로스가 그녀의 부름에 선선히 대답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요?"

    "화요일 입니다. "

    그의 대답에 샬로트는 고개를 파묻어 슬그머니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감췄다. 맥스가 그렇게 언짢아한 것도 당연했다! 그의 일정이 어긋난 것이다. 하지만 왜? 샬로트는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희망을 단호하게 억누르며 항상 그랬듯 자신에게 타일렀다. 맥스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위클리프 백작이고 그녀는 한낱 시골 목사의 딸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결코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맥스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샬로트를 맞이한 것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검은 눈썹과 뭐라 집어 말하기 힘든 빛으로 이글대는 눈동자였다. 그녀의 심장 고동이 미친 듯 빨라졌다. 그녀는 두려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공포라면 차라리 견디기 쉬우리라. 그녀의 호흡을 가로막는 것은 흥분이었다. 이런 그를 바라볼 때면, 평소에는 세상에 들키지 않게 숨겨져 있는 그의 격렬하고 정열적인 면을 볼 때면 왠지 그녀의 맥박은 빨라지곤 했다. 샬로트는 의지력을 총동원해 차분한 모습을 보이며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어났다.

    "맥스! 오셔서‥‥‥‥"

    그는 그녀의 말을 도중에 뚝 끊었다.

    "다시는 그자를 만나지 말아요."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누구를요?"

    샬로트는 전혀 종잡을 수가 없어 물었다.

    "로스 말이오! 당연히 그자 얘기지. 오늘 오후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 누군지 벌써 잊었소?"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고 여유롭던 입매는 딱딱하기만 했다.

    "아뇨, 잊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녀의 항변은 다시 제지당했다.

    "당신 할머님은 혹시 로스도 남편감 후보가 될까 싶어 기대에 부풀어 있는지 모르지만, 내 충고하건대 그자는 절대 청혼하지 않을 거요. 로스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사교계 최고의 신랑감이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생활을 저버릴 기미가 없소.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자의 몸 속에 흐르는 건 피가 아니라 얼음장이고 그자는 집에 육아실을 꾸밀 마음도 전혀 없소. 그자와 어울려 시시덕거려 봤자 아무 결실도 얻지 못할 거요. 다시는 그 남자를 만나지 마시오"

    맥시밀리언은 명령했다. 그의 위압적인 태도 때문에 샬로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 남자는 자기가 아버지라도 되는 줄 아나? 천만에 !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극진히 사랑하는 다정하고 이성적인 남자였다. 버릇없는 망나니에 완고하고 오만한 귀족 따위가 어딜 감히 !

    "제게 그런 식의 말씀은 삼가 주세요, 백작님! 전 당신의 하인이 아니에요! 당신 기분이 뭣 때문에 고약해졌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자, 그럼 이만 실례해도 되겠죠?"

    그녀는 거실을 나서려고 돌아선 순간 맥스에게 팔을 붙잡혔다. 샬로트의 심장이 가슴에서 뛰쳐나갈 정도로 뛰어대며 갈비뼈가 부서질 정도로 호되게 쿵쾅거렸다. 지금 돌아선다면 그는 예전처럼 그 탄탄한 몸에 끌어안고 키스해 줄까? 그녀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고 가슴은 격렬한 상태를 반영하듯 오르락내리락했다. 샬로트는 그에게로 돌아서서 여전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머뭇머뭇 그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그윽한 그의 눈을 보자 그녀는 기대감이 등골을 스멀스멀 올라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탄원을 하듯 그녀의 눈길이 그의 입술로 떨어졌다. 키스해 줘요, 맥스‥‥‥‥ 맥스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녀의 팔을 놓고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펄쩍 뒤로 물러섰다. 샬로트는 이제 그와 떨어져 선 채로 바보처럼 떨면서 그를 응시했다. 그들은 끝없는 것 같은 순간 동안 그렇게 서서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한 욕망과 맞서 싸웠다. 숨막힐 듯 답답하던 침묵은 문간에서 바스락대는 기척으로 인해 한참 만에 깨졌다.

    "차 드시겠어요, 아가씨?"

    부드러운 목소리가 물었다. 맥스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뗀 샬로트의 눈앞에는 오거스타가 최근에 고용한 어린 하녀의 모습이 있었다.

    "그래요, 부탁할게요."

    샬로트는 간신히 말했다. 그녀는 하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맥스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그는 두 사람이 서로 나눈 감정 따위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 이제는 종이에 싼 꾸러미를 집어들고 있었다. 묘한 분위기는 분명 사라져 버렸지만 샬로트는 그 점에 안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이렇게 압도해 버리는 이 남자의 능력에 저주를 퍼부으며 긴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맥스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꾸러미를 내밀었다. "당신 주려고 가져왔소"그의 말에 샬로트의 짜증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맥스가 선물을? 그녀는 심장에 날개라도 돋아난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 할머님이 이 자리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라 포장을 해 왔소. 당신이 그분께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게 기억나더군."

    샬로트가 생일 선물을 뜯어보는 제니처럼 열성적으로 포장을 뜯는 동안 그는 벽에 기대서서 빙그레 웃었다. 책이구나. 그녀는 무게로 알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런던 상류 사회의 경박한 분위기에 휩쓸린 나머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학구적인 열정을 그새 잊어버린 뒤였다. 샬로트는 책을 하나하나 들고 제목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경외감이 담긴 몸짓으로 장정 부분을 어루만졌다. 이 바보 같은 시즌이 끝나고 먼 훗날이 되면 그녀는 이 책들을 보물처럼 간직하면서 영혼을 살찌우리라.

    "아아. 맥스!"

    샬로트는 그에게 미소지었다.

    "근사해요! 이 책들은 번역이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읽을 시간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녀는 아쉬운 듯 덧붙였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사생화집이군요! 정말 세심하게 배려해주셨군요."

    "훑어보기만 해도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왔소"

    맥스는 중얼거렸다.

    "그 책의 화가는 최고의 명승지들을 제대로 재현해 놓았지."

    "아아, 맥스! 당신은 이런 곳에 가본 적이 있는 거예요?"

    샬로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맥스는 문득 숨이 막히는 듯 목덜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렇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유럽 대륙을 한 바퀴 돌았지."

    경외감과 흥분에 가득 찬 나머지 샬로트는 오거스타에 대한 걱정이며 가족에 대한 의무 같은 건 깡그리 잊은 채 고대 그리스라는 경이로운 세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앉아요, 맥스. 그 멋진 장소들 얘기를 남김없이 해줘요."

    그녀는 옆자리를 마구 두들기며 재촉했다.

    "당신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소. 오늘 저녁에도 외출하기로 되어 있을 것 아니오."

    맥스는 다소 부루퉁해져서 물었다.

    "난 아무 데도 안 가요."

    샬로트는 그를 안심시켰다.

    "오거스타 할머님께서는 계속 상태가 안 좋으시고 친구분들도 날 따라다니며 챙기는 데 지치셨을 거예요"

    그녀는 맥스의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고 다시 옆자리에와 앉으라는 몸짓을 했다.

    "오, 제발요, 맥스."

    그녀는 구슬픈 어조로 청했다.

    "하룻밤쯤은 외출을 안 해도 상관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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