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9화 (9/19)
  • 9.

    샬로트는 온몸을 던져 맥스에게 자비를 갈구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새벽녘에 이뤄질 약속을 행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와 그녀 모두에게 모욕이 될 그런 탄원을 삼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투가 벌어질 공터 옆의 잡목 숲에 서 있는 것뿐이었다. 만남이 이루어질 시간과 장소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다른 구혼자들이 그녀의 설득에 못 이겨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그 결투가 어떻게 끝날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비록 맥시밀리언이 스톨링스를 쏘아 죽일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기는 했지만 일부는 대위의 복무 경험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백작이 죽을지 모른다고도 했다. 샬로트는 긴장한 나머지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어느 쪽도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추운데도 그녀의 드레스와 속옷은 땀으로 축축했다. 구두를 통해 스며드는 아침 이슬의 냉기와는 참으로 대조되는 느낌이었다. 말발굽 소리며 마차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나무 뒤로 더욱 깊이 숨었다. 다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녀는 맥시밀리언과 스톨링스 대위가 한 뼘 정도 넓이로 손질된 잔디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둘 다 각각 증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나직이 말을 걸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괘씸할 정도로 침착했다. 샬로트는 화가 벌컥 치밀었다. 그녀는 이렇게 격하게 떨고 있건만 저 둘은 서로에게 총질을 하려 들면서도 양심의 가책 하나 없다니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을 수가! 그녀는 어느 쪽도 다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불안하게 전후좌우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더욱 오래 머문 곳은 그녀에게서 제일 가까이 서있는 키가 큰 남자. 맥스였다. 그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훤칠한 그는 등줄기를 곧게 펴고 우아한 몸짓으로 침착하게 행동했다. 마치 매일 아침 겪는 일이라도 되는 듯 전혀 동요가 없었다. 샬로트는 그처럼 태연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 자리에 서자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눌렀다. 누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음 순간 꿈결처럼 맥스가 돌아서서 총을 겨냥해 쏘았다. 그의 권총 소리가 새벽녘의 정적 속에 귀가 멍해질 정도로 울려 퍼졌고 또 다른 총성이 거의 차이 없을 정도로 뒤이어 났다. 모든 것이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져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샬로트는 공포에 질려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맥시밀리언이 총에 맞았다는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거나 움찔하지도 않았고 그제서야 그녀가 참고 있던 숨이 확 터져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대위 쪽으로 다급히 향했다. 그도 여전히 용감하게 서 있었지만 어깨를 움켜쥔 채 무슨 소린지 바람결에 묻혀

    들리지 않는 외침을 내질렀다. 다음 순간 그의 증인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는 분명히 부상을 입었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다는 것을 샬로트는 깨달았다. 어느 쪽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찔할 정도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샬로트는 랠리 경이 맥시밀리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모습을 보았다.

    "살만 관통했네!"

    그가 말했다.

    "언제나처럼 아주 훌륭한 겨냥이었네, 위클리프."

    샬로트는 저도 모르게 기쁜 나머지 목 졸리는 듯한 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랠리와 맥시밀리언이 즉시 그녀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무 그늘 밖으로 나왔다.

    "샬로트!"

    맥시밀리언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트로브리지 양!"

    랠리는 기쁘다는 듯 싱긋 웃었다.

    "이리 오십시오. 집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법에 어긋나는 결투니 이런 장소에는 어슬렁대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그는 그녀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샬로트는 맥스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슬쩍 훔쳐보았다. 검은 눈썹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를 본 것이 반갑지 않다는 기색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녀와 나란히 마차로 걸어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새벽녘의 모임에 자신이 출석했다는 것은 극히 부적절한 일로 여겨질 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서 기다리면서 맥스가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하느라 속병이나 앓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사교계의 온갖 규율을 들먹이더라도 그녀는 개의치 않을 터였다. 규율 중에는 그녀가 절대 따르지 못할 것도 있었다. 잡목숲 근처에 위클리프 백작가의 마차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샬로트는 편안히 오거스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었다. 맥시밀리언은 마차에 타는 그녀를 거들어 준 다음 자신도 올라타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푹신한 쿠션에 기대앉자 그동안 긴장했던 사지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랠리는 맞은편 자리에 앉는 대신 마차 문을 잡고 바깥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위클리프, 트로브리지 양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게. 그렇게 하겠지?"

    그는 씩 웃으며 당부했다.

    "난 집에 가서 눈 좀 붙여야겠네. 아침 일찍 일어나 설쳤더니 너무 피곤한걸."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문을 쾅 닫았고 마차 안에는 그들 둘만이 남겨졌다. 널찍하던 마차가 갑자기 너무나 비좁게 느껴졌다. 샬로트는 옆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그의 훤칠하고도 남자다운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와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있었고 그의 허벅지도 자칫하면 그녀의 다리와 스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눈길을 피했다. 그녀의 기도가 이루어진 덕에 이제 그는 온전한 몸으로 살아서 무사히 이곳에 있었다. 그녀는 마땅히 감사해야만 했다. 그녀는 실로 감사하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이 아무런 위해도 입지 않은 것은 하늘에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일 뿐, 전체 상황을 돌이켜본 샬로트는 그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그렇게 겁에 질리게 만들어 놓고도 이렇게 침착하고 초연하게 앉아 있다니! 게다가 스톨링스 대위는 대체 무엇 때문에 피를 흘리고 체면 깎일 짓을 했단 말인가? 샬로트는 두 남자에게 따귀라도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둘 다 어른이면서 제임스와 토마스보다도 분별이 없는 남자들이었다.

    "이 우스운 결투를 벌여야만 했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저한텐 전혀 기쁜 일이 아니군요, 백작님."

    그녀는 가능한 한 담담하게 말했다. 맥시밀리언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자신이 감점당한 것을 똑똑히 알아차렸다. 샬로트는 그에게 화가 났을 때마다 호칭을 '친애하는 맥스'에서 백작님'으로 깎아 내리곤 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불쌍한 대위님도요! 이제 그분은 어떻게 될까요? 군인이 칼을 써야 하는 팔을 다쳤으니!"

    그녀가 물었다.

    "난 그자의 겨냥을 빗나가게 하려고 한 것뿐이오. 그자가 내 가슴에 총을 쏘려고 계획했을 경우에 대비해서 !"

    맥시밀리언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아니, 그녀는 어깨에 힘만 들어간 그 겉멋쟁이를 좋아했단 말인가?

    "당신이 차라리 내가 총에 맞기를 바랐을 줄은 몰랐군!"

    "난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고요!"

    샬로트는 되받아 쳤다.

    "맥스, 나 때문에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느낌이 어떨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 사람의 유일한 죄는 나한테 청혼한 것뿐이라고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녹색 불길이 번득였다. 대위의 온갖 나쁜 점을, 특히 그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허세를 부렸던 것을 생각하니 맥시밀리언의 성미가 다시 끓어올랐다. 스톨링스는 자신의 상처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맥시밀리언에게 빈정댔었다.

    "당신은 그 여자와 천생연분일 거요, 백작 나리. 키스할 때 보니 그 여자는 나무토막과 다를 바 없더군!"

    그가 여기까지 내뱉자 주위의 증인들은 결투가 다시 되풀이될까 봐 두려운 나머지 그를 말렸다. 맥시밀리언은 그때 격노했다. 차라리 그 개자식의 다리 사이에 총을 쏘았다면 그 호색적인 행각도 영원히 종말을 고했을 텐데 아쉬웠다. 험악한 생각을 몰아내려 애쓰던 맥시밀리언은 곤혹스러운 나머지 볼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자신을 노려보는 샬로트의 눈길을 깨달았다. 순간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을 때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때도 그녀는 얼굴을 붉혔었다. 분노가 아니라 그에게 느꼈던 강렬한 욕망 때문에. 그녀는 그를 절대 나무 말뚝취급하지 않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맥시밀리언은 스톨링스가 적어도 샬로트의 말을 확증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연애 기술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온실에서 대위와 만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자는 그녀를 반응 없는 여자라고 비난했을 턱이 없었다. 순간 맥시밀리언은 샬로트의 순진무구한 정열이 순전히 그에게만 발휘된다는 사실을 즐겁게 음미했다. 그녀의 야들야들한 입술은 그를 위해서만 열렸고 그녀의 감미롭고도 뜨거운 한숨 역시 그의 손길 아래에서만 터져 나을 수 있었다. 다음 순간 그는 그런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다니 당혹스러웠다.

    "스톨링스의 죄는 극악무도하오"

    맥시밀리언은 쌀쌀맞게 말했다.

    "당신은 그자가 자기 여동생을 시켜 당신을 부적절한 입장으로 몰아넣고 선택을 강요했던 일을 벌써 다 잊었소 ? 내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소? 그자가 키스를 그만뒀을까?"

    맥시밀리언은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 샬로트의 눈길을 느꼈다. 그의 말이 그녀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누구 다른 사람이 왔더라면 무슨 일이 있었겠소? 당신은 정신차릴 틈도 없이 그자와 결혼해야 했을 거요. 당신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오"

    그녀의 얼굴에 오싹한 표정이 스쳐갔다. 그는 그녀도 그런 가능성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 내렸다.

    "남녀 사이의 온갖 규율 따윈 전부 다 너무 바보 같아요"

    샬로트는 장갑 낀 손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면서 투덜거렸다.

    "남자는 자기 상치도 벗지 못하고, 친구 사이면서도 잠깐만이라도 단 둘이 있지 못하고‥‥‥‥"

    맥시밀리언은 그런 지침이 그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녀에 관한 한 그 지침을 너무나 자주 무시했던 것이다. 사실 샬로트 역시 이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입에서는 새로운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당신 결투 소문을 들으신다면 아빠도 기뻐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는 부루퉁하니 지적했다. 맥시밀리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골뜨기 목사가 실망을 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샬로트의 아버지라면 분명히 고민할 것이다. 왠지 그는 후회가 되었다. 마치 그 자신이 목사를 실망시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 버렸다.

    "당신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상황을 설명드리겠소"

    그는 퉁명스레 말했다. 마차가 덜컹하면서 그의 몸이 샬로트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그녀의 눈길이 슬쩍 그의 검은머리에서 어깨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광경을 보았다. 맥시밀리언은 둘 사이에 돌연 타오른 이끌림을 떨쳐 버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이제껏 자신의 머리카락에 욕망을 자극할 만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앞에 그의 근육 전체가 긴장했다. 그는 샬로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숱 많은 머리채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움켜쥐는 광경을 그려볼 수 있었다.

    "왜 머리를 기르나요?"

    그녀는 물었다.

    "이러는 게 좋아서."

    그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샬로트는 눈을 반짝이며 미소지었다.

    "맥스. 난 당신이 확실한 이유 없이는 어떤 행동도 안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자, 그럼 생각해 봐야겠군요"

    그녀는 궁리하듯 잠깐 사이를 두더니 가냘픈 손가락을 하나 꼽았다.

    "일정이 바빠서 머리 자를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맥시밀리언은 입꼬리를 뒤틀며 고개를 저었다. 샬로트는 또 다른 손가락을 꼽았다.

    "수전노라 이발사에게 줄 돈이 아까워서?"

    맥시밀리언은 그녀에게 인상을 쓰려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숨겨야 할 만큼 사연 깊은 비밀이라도 되나요?"

    그녀는 물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그야말로 춤을 추었고 관능적인 입술은 뭔가 묻듯 벌어져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에게 키스하고픈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죠? 말해 봐요. 내 명예를 걸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맥시밀리언의 눈길이 그녀의 손가락을 지나 상의 앞자락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가슴 굴곡으로 향했다. 그녀의 가슴은 목선이 너무 낮게 패인 상의 위로 하얀 둔덕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못 본체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우리 어머니를 괴롭히기 위해서요."

    그는 거칠게 대답하고 크림빛 곡선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휘둥그레진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더니 다음 순간 까르르 웃어대기 시작했다. 기쁨이 넘쳐나는 사랑스러운 환성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다가 침착하게 덧붙였다.

    "내 행동의 상당부분은 어머니를 괴롭히기 위한 거요."

    "그럴 리가요! 당신이 의무에 충실한 아들이 아닐 리가 없잖아요!"

    맥시밀리언은 씁쓰레한 웃음소리를 냈다. 마차가 바로 그때 오거스타의 집에 도착했다. 맥시밀리언은 이 대화가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얼른 마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들어갈 때까지 지켜봐도 되겠소?"

    그는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점검하며 물었다. 잠간 들르기만 하는 데도 시간이 지체될까?

    "괜찮아요"

    샬로트는 대답했다. 그녀의 짓궂은 미소에 순간 그는 그녀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만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는 그에게서 물러났지만 다음 순간 다시 돌아서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런던에 있는 동안 오늘 아침의 결투 같은 엉터리 소동 따위는 더 이상볼 일이 없기를 바라겠어요."

    맥시밀리언은 그녀를 놓고 다투는 수많은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는 평소의 명료하던 사고 회로와는 전혀 상반되는 극히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친애하는 나의 샬로트."

    그는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러길 바라오"

    아니꼬운 하인 녀석이 현관 계단에서 그들을 맞았다.

    "트로브리지 양! 트로브리지 양!"

    애처롭게 울부짖는 하인의 크나큰 동요는 맥시밀리언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주인 마님께서 걱정 때문에 병이 나셨어요!"

    샬로트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는 노부인이 그녀의 행선지를 알면 겁을 먹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거스타는 정오 전에 일어나는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녀가 집에 없다는 사실이 들통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샬로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맥시밀리언에게 눈길을 던질 틈도 없이 서둘렀으므로 등  뒤에서 그가 따라오는 기척이 들려왔을 때 놀라고 말았다.

    "정말이지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는 되풀이해 말했지만 그는 입씨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샬로트는 맥시밀리언이 보호자다운 태도를 취할 때면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미소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오거스타는 어수선한 옷차림으로 긴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방안이 거의 숨막힐 정도로 더운데도 그녀의 몸은 담요로 칭칭 감싸여 있었다. 샬로트는 자기가 오거스타를 고뇌에 빠뜨렸다는데 대해 새삼스레 후회가 밀려들었다.

    "샬로트!"

    오거스타의 얼굴은 파리했다. 레이스 손수건을 극적인 태도로 흔드는 그녀를 보자 샬로트는 오거스타가 더 이상 젊은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녀는 오거스타이 품에 뛰어들어 힘없는 포옹을 받았지만 사실은 여인의 거대한 가슴께에서 짙게 풍기는 향수 냄새 때문에 기절 직전이었다.

    "어디 갔었던 게냐?"

    오거스타는 강한 어조로 따져 물었다. 샬로트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노부인은 맥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위클리프! 이 비열한 장난에 백작님이 연루되어 계실 줄은 결코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조카손녀와 단 둘이 계셨던 건가요? 이 애한테 오늘 아침의 그 수치스러운 총질을 구경시키려고 집에서 끌고 나갔다는 말씀은 듣고 싶지 않아요!"

    "전 절대 샬로트를 어디에도 끌고 간 적이 없습니다. 서굿 양."

    맥시밀리언은 길게 누운 여인 쪽으로 다가갔다. 오거스타는 머뭇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 손을 잡고 허리를 굽혔다.

    "심각한 병환은 아니시겠지요?"

    "흥"

    그녀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로 대꾸했다. 샬로트가 보기에 오거스타는 백작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어떻게든 그를 모욕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제 병환의 장본인인 백작님이 걱정을 해주시는 건가요? 조카손녀를 놓고 결투를 하시다니! 이 애는 이제 끝났어요! 끝났다고요!"

    오거스타는 베개에 고개를 떨궜다"말도 안 됩니다.

    "맥시밀리언은 매끄럽게 말을 꺼냈다. "전 아가씨의 명예를 욕되게 한 게 아니라 보호하고 지켰던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번 시즌 최고 미녀의 앞길이 더더욱 빛나게 되었지요"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샬로트가 보기에는 거의 빈정대는 표정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오거스타는 한숨을 쉬며 인정했다.

    "하지만 전 그런 소문을 견디기에는 너무 몸이 안 좋아요. 이젠 늙어서 흥분하는 것도 무리고요. 게다가 이번 일로 전 완전히 녹초가 되었답니다. "

    그녀는 질문에 대답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는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백작님과 동행한 게 아니었다면 샬로트는 오늘 아침에 어디 있었지요?"

    오거스타의 턱은 강한 불안감 때문에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가 아가씨를 초대한 건 아닙니다만."

    맥시밀리언은 험상궂은 눈으로 샬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투 장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나무숲 사이에 숨어서 보고있었습니다."

    "세상에!"

    오거스타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쓰러졌다.

    "이 애는 완전히 끝났어요! 끝났어 !"

    "말씀드리지만, 서굿 양."

    맥시밀리언은 저항 따위는 용납 않겠다는 어조였다.

    "이 아가씨는 절대 끝난 게 아닙니다. 저와 증인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트로브리지 양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 증인은 발설하고 다닐 사람이 아닙니다."

    오거스타는 미심쩍어했지만 그의 말에 토를 달 정도로 대담하지는 않았다.

    "샬로트, 즉시 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이번 일은 고령인 내게 너무나 벅차구나. 어쩌면 네 혼사 문제는 다음 시즌으로 연기해야겠다. 내가 좀 쉬고 나서 내년에나‥‥‥‥"

    샬로트를 묵묵부답으로 만들던 통렬한 죄의식도 공포 앞에서는 빛이 바래고 말았다. 오거스타는 그녀를 집으로 보내 버릴 참일까? 샬로트는 시즌에 필요하다는 오거스타의 주장대로 의상이며 시시한 장신구를 장만하느라 들인 엄청난 돈을 생각했다. 아빠의 돈은 그럼 이대로 허공에 사라지는 것일까? 지금 서식스로 돌아간다면 가족 전체가, 아빠와 사라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가 실망하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이 황급히 맥스 쪽을 향하더니 어떻게든 도와달라는 애원의 빛을 띤 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뜻대로 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어 그녀의 커져가는 불안을 제지시켰다. 오거스타의 눈에 뜨이지 않은 극히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샬로트는 다시금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맥스, 친애하는 맥스가 상황을 주도해 주리라는 확신이 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맥시밀리언은 전혀 주도권을 쥔 기분이 아니었다. 평상시의 여유로운 자신감은 샬로트가 옆에 있을 때면 종종 그렇듯 그를 저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그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그런 고통에 처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지만 한편 매우 솔깃하기도 했다. 노부인의 성화에 동조해 샬로트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그렇게 되면 샬로트는 스톨링스보다도 한결 방탕한 런던의 작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을 테고 그의 의무 역시 청산될 것이다. 물론 그녀 아버지의 돈이 헛되이 낭비되었다는 사실은 되돌릴 수 없었다. 어퍼비드웰은 엄청나게 좋은 조건을 가진 신랑감을 품고 있을 지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개입해 목사 가족을 도울 수는 있었다. 적어도 사내아이들에게 직업을 구해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림 샬로트는? 그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농부나 빵가게 주인, 혹은 앨프 같은 점방 주인과 결혼을 하게 될까? 그러기에는 그녀가 아까웠다. 그녀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감 사냥에 관해 회의를 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낙향하게 되면 너무나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사교계의 여왕이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하다니. 그는 사교계의 입방아를 족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뱃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뒤틀렸다. 그녀를 멀리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굴뚝같다지만 그도 양심이 있었으므로 그녀의 유일한 시즌을 망칠 수 없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다. "

    그는 자신이 언쟁에 익숙지 않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는 말투로 오거스타를 타일렀다.

    "새로운 소문이 떠오르는 즉시 오늘 아침의 일은 1주일 내로다 잊혀질 겁니다. 샬로트에게도 말했지만 이 불행한 사건에 관해서는 제가 직접 목사님에게 진심으로 후회하는 편지를 띄울 참입니다. "

    "하지 만‥‥‥"

    맥시밀리언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오거스타를 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샬로트가 아닙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스톨링스지 그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즌에 데뷔한 인기 최고의 젊은 아가씨에게 있어서 그런 사건은 불가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억지로 미소를 띠며 샬로트 쪽을 바라보았다.

    "서굿 양은 당혹감 때문에 이러시는 거요. 아마 며칠간 휴식을 취하시면 차도를 보이실 거요. 그동안에는 서굿 양의 지인들 가운데 한 분을 골라 당신과 행사에 동행해 달라고 부탁드리면 될거요."

    맥시밀리언은 오거스타를 다시 곁눈질했다.

    "건강이 회복되지 않으신다면 당연히 다른 조치를 취해야겠지요"

    그는 다시 노부인의 손을 잡고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그녀의 연푸른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이야말로 여태껏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떤 행동이든지 진압할 수 있었던 방책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굿 양"

    "그러세요, 백작님."

    그녀는 힘없이 대답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에게서 물러나며 고갯짓으로 살짝 샬로트에게 신호를 보냈다.

    "백작님을 배웅해 드리겠어요."

    샬로트는 오거스타에게 말하며 그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상대적으로 사적인 대화가 보장되는 현관 입구에 단 둘만 남게 되자 맥시밀리언은 사무적인 태도로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서굿 양은 정말로 아픈 거요?"

    "모르겠어요."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서린 고뇌의 빛을 무시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아파왔다.

    "할머님께서는 연로하시니‥‥‥‥"

    맥시밀리언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는 노부인의 병세 때문에 그녀가 죄의식으로 허우적대기를 원치 않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 며칠 뒤에 들르겠소. 그동안엔 평상시대로 지내도록 하시오. 당신이 결투 직후에 모습을 감추면 분명 다들 알아챌 거요."

    샬로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할머님께서 정말로 아프신 거라면 난 더 이상 할머님께 신세를 질 수 없게 돼요."

    "그릴 리 없소"

    맥시밀리언은 말했다.

    "아아, 맥스! 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탄식하며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도톰한 입술은 부들부들 떨렸다. 맥시밀리언은 그녀를 끌어안고 달래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바로 며칠 전 밤에 한 것처럼. 하지만 그래 봤자 좋을 것 없었다. 그녀는 그의 책임하에 맡겨진 의무였고 그는 거기에 걸맞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 욕망을 결연히 억눌렀다.

    "쉬잇."

    그는 속마음보다 한결 날카롭게 말했다.

    "서굿 양의 상태가 계속 좋지 않을 경우 다른 사람 집에 묵으면  그만이오"

    "누구요?"

    샬로트는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런던에는 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걸요‥‥‥ 당신말고는요“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맥시밀리언은 일그러진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우리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겠소"

    맥시밀리언은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종이를 바라보며 오른손가락으로 멍하니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샬로트에게 그런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머니를 그의 생활권에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진배없는 행위였다. 그는 어머니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 일단 어머니는 이곳에 나타나면 못 말리는 골칫거리가 되어 버릴 터였다. 그의 머리에 금이라도 간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미친 짓을 덥석 자청했단 말인가? 그는 앉은 채 초조하게 몸을 들썩였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신록 빛을 띤 샬로트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기만 하면 그의 탁월한 판단력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공백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박자 맞춰 책상을 두들기는 손가락 소리에 마침내 머리가 깨질 듯한 상태가 되자 그는 깃털 펜을 집어들었다. 그는 목사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그 자신밖에 없다고 자신을 타이르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마담"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이 밀려들었지만 그랬다간 어머니의 분노만 더 돋구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되면 어머니는 그의 부름에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다. 시빌이 어머니라는 호칭을 경멸하는 이유는 나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맥시밀리언은 언제나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완고하고 답답한 남자로 그가 평생 유일하게 충동적인 행동을 저지른 것은 시빌 몰리누와 결혼한 일이었다. 맥시밀리언은 아버지가 그답지 않게 충동적인 기질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가끔 유감스럽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는 남자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다음 인사말 아래용건을 짧게 써 내려갔다.

    "도움인 필요합니다. 즉시 와 주십시오."

    문구에 담긴 고압적인 분위기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맥시밀리언은 서명을 하고 인장을 찍었다. 다음 순간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편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그동안 그의 손가락은 반질반질한 책상 표면을 다시금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는 이 편지가 목적을 다해 어머니를 런던으로 불러오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행동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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