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5화 (5/19)
  • 5.

    그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맥시밀리언은 들끓는 성질을 죽이며 콕스베리 연회장 안을 다시금 한 바퀴 눈으로 훑었다. 그는 자신의 일정이 틀어지는 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샬로트와 그 친척 여인에게 초대장을 얻어 주었으니 그들도 그 초대장을 꼭 써야 할 게 아닌가! 그가 이 끔찍한 행사에 할당한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이었지만 이곳에 온 지 이미 한 시간하고도 30분이나 지난 상태였다. 참기가 괴로웠다. 만약 그 둘이 15분 내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냥 가리라, 맥시밀리언은 다짐했다 이제 샬로트는 그 허세꾼 친척 여인네의 손에 온전히 맡겨지는 것이다. 그 할멈이 샬로트에게 퍽도 잘해 주겠다! 그는 그의 가엾은 미녀가 촌스러운 옷차림으로 그 노파의 후원이랍시고 받으면서 시즌 내내 사교계의 중심에는 제대로 끼지도 못할 것을 생각하고 움찔했다. 그는 목사에게 약속했던 대로 그녀가 런던에 무사히 도착해서 잘 지내는지 확인차 들렀을 때 그녀의 주위 환경을 파악하고 기가 막혔다. 그 늙다리 쭈그렁 할멈이 후견인으로 있는 한 그 아가씨가 번듯한 남편감을 찾기란 물 건너간 일이었다. 그 즉시 그는 자신이 직접 관여하기로 결심했다. 목사의 투자가 허사로 돌아가고 샬로트가 뱃속에 거지를 키우는 가게 주인에게 발목을 잡히는 일이 없도록 방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맥시밀리언은 생각했다.

    "백작님 ! 백작님 !"

    맥시밀리언은 신음을 억눌렀다. 저녁 내내 혼인 적령기 숙녀들의 관심을 떨쳐 버리느라 분투했는데 이제 또 다른 여자가 꼬리를 치려 들고 있었다. 그는 못 들은 척했다.

    "위클리프 백작님 !"

    부드럽지만 어딘가 대담한 구석이 있는 목소리는 왠지 귀에 익었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고개를 돌린 그의 눈앞에는 예쁜 분홍색 드레스 차림의 늘씬한 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 옷은 여인의 금발과 하얀 피부색을 더욱 강조했고 최신 유행스타일이었지만 오늘밤 이곳에 모인 다른 여자들의 옷에 비하면 얌전했다. 얌전한 정도가 아니라 가녀린 목까지 감싸고 올라온 옷깃에는 나풀대는 주름 장식이 달려 있어 큰 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여자다움이 더욱 기분 좋게 돋보였다. 내가 아는 아가씨였던가? 그녀는 실로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인이었다. 연분홍빛 입술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초록색 눈동자‥‥‥맥시밀리언은 순간 전신을 강타하는 충격을 받았다

    "샬로트?"

    그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성이 아닌 이름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 우아한 여인이 목사의 딸일 리가! 그녀는 놀란 그의 모습을 보고 쾌활하게 눈을 빛내며 미소지었다. 맥시밀리언은 오늘밤 그녀가 자기 앞을 수십 번 지나갔다

    해도 알아보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촌스럽던 오리 새끼가 그의 눈앞에서 공작새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화려한 깃털을 알아챈 것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이미 숭배자들을 어느 정도 거느렸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크게 당황했다. 그자들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위가 꽥꽥거리듯 시끄럽게 수선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척 보기에 그녀를 졸졸 따르는 풋내기 애송이들은 두 번 볼 가치도 없어 보였다. 맥시밀리언은 다소 오만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무리 변신에 성공했다 한들 그가 용인하지 않는 한 샬로트는 절대 최고 상류층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물론 그녀는 결코 대인기를 끌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미모를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직 소녀 티는 물론이고 촌티조차 벗지 못한 소박한 처녀보다는 자기와 같은 계층으로 세련된 추파를 던질 줄 아는 여인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장 큰 장애물은 출신 배경이었다. 결국 그녀는 목사의 딸일 뿐이다. 확률은 그녀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그의 도움만 있다면 그녀는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트로로브리지 양."

    맥시밀리언은 나긋나긋하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허리 숙였다.

    "다시 만나게 되어 실로 기쁩니다. 이렇게 아리따운 모습 역시 반갑군요"

    "백작님도 멋지신걸요"

    그녀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소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녀가 불러일으킨 급작스러운 열기에 스스로도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 아가씨가 지금까지도 그에게 이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더할 나위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의 평소취향은 웬만큼 나이를 먹은 여자였지 이렇게 보잘것없는 신분의 풋내 나는 소녀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결혼을 해서 빨리 사라져 버릴수록 그의 기분에도 도움이 되리라. 그는 긴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런던의 기혼 부인들이 보았다간 못마땅해 인상을 쓸 정도로 대놓고 그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훈계의 말이 혀끝에서 감돌았지만 그는 주위사람들을 의식해 꿀꺽 삼켰다. 맥시밀리언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오합지졸들을 초조하게 흘끗 바라보며 즉석에서 그들을 내쳤다.

    "실례해도 되겠지요, 여러분?"

    그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풋내기 가운데 한 명이 뭐라 불평을 하려 들었지만 맥시밀리언이 지그시 쏘아보자 꼬리를 감추고 물러갔다.

    "트로브리지 양께서 그렇게 친절한 말씀을 해주시니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미소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는 그녀의 새드레스에 맥시밀리언은 만족했지만 한편 꼭 끼는 옷 때문에 가슴선이 드러나던 때가 아쉽기도 했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내 놓는 일반적인 유행 풍조와는 달리 풍만한 가슴을 지나치다 싶게 풍성한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미소지었다. 이 촌뜨기 오리 새끼는 런던의 유행에 관해 아직 더 배워야겠군.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팔꿈치 안쪽에 끼웠다. 맥시밀리언은 그녀를 올맥의 단골들에게 소개하며 최상류층만 모이는 그 무도회장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뜻을 은근슬쩍 밝혔다. 그녀가 이 숙녀들 중 아무에게서도 인정받지 못

    한다면 올맥 입장권조차 살 수 없었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무도회장에 들이고 말리라 다짐한 터였다. 적당한 혼처를 물색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그녀와 춤을 추는 것이 그의 다음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몇몇 유망한 신사들을 그녀에게 소개하면 그의 임무는 완수될 것이다. 그는 이미 그녀를 댄스 플로어로 데리고 나가는 중이었지만 뒤늦게야 문득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춤은 출 줄 알겠지요?"

    그는 그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제가 발이라도 밟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백작님?"

    샬로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게........"

    맥시밀리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 어린 피후견인과 무도회장을 돌 생각을 하니 망설여졌다.

    "당신 친척이 제대로 가르쳐 주었는지 모르겠군."

    샬로트는 까르르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겨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여기엔 잼 파이나 달걀 바구니 같은 건 보이지 않네요, 백작님. 그러니까 그 깨끗한 옷을 망칠 걱정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말했다.

    "장담하지만 전 백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서툴지 않답니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을 느끼며 맥시밀리언은 미소지었다. 저녁 일정이 엉망이 된 탓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샬로트에게는 그 불쾌감을 덜어 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아리따운 아가씨는 햇살과도 같이 빛났으며 그 광채로 촛불 빛이 어둠침침한 무도회장 구석이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나 때문에 침착성을 잃는 일은 없는 거요?"

    그녀는 봄빛 가득한 눈동자 주위에 드리워진 길고 비단결 같은 속눈썹을 나비 날개처럼 팔락거리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주위를 슬쩍 훑어보고 짓궂게 방긋 웃었다.

    "오늘밤 이곳엔 다른 우아한 신사분들도 많으시니까요"

    "그 말은 내가 빛을 잃었다는 뜻이오?"

    그가 놀렸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백작님."

    샬로트는 부드럽게 말했다.

    "샬로트‥‥"

    성이 아니라 또 이름이 불쑥 나왔다. 맥시밀리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경고해야 한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런 눈으로‥‥‥‥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시선을 돌려 같이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주의를 돌린 뒤였다.

    "즐겁소?"

    "엄청나게요"

    그녀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데 왜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녀의 무심한 어조는 샬로트답지가 않고 그의 주위에서 향수 냄새나 풍겨대는 얼간이들 같기만 했다. 맥시밀리언은 못마땅했다. 그의 오리 새끼가 공작새로 변신했을 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런던의 백조 떼거리를 지나치게 흉내내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그의 앞에서는 더더욱.

    "런던 시내의 우리 집에도 작지만 도서관이 있소. 당신에게 책을 좀 보내 드릴까?"

    그는 갑자기 서식스에서 자신을 그다지도 매혹시켰던 솔직하고 지적인 아가씨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서 물었다. 순간적으로 바뀐 그녀의 표정은 그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어머, 정말요?"

    위로 치켜든 그녀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전 아직도 테베 왕가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에요."

    그녀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러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오거스타 할머님께서는 독서를 못마땅해 하시거든요. 제가 책 읽는 모습을 보신다면 분명 다른 일을 지키실 거예요"

    멍청한 노파 같으니라고, 맥시밀리언은 모질게 속으로 욕했다. 그 늙다리 마귀할멈은 문학이 뭔지도 모를 테지!

    "그럼 내가 직접 가져가면 어떻소?"

    오거스타 서굿이라 할지라도 차마 그런 상황에서는 반대 의사를 나타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건 괜찮겠죠"

    하지만 샬로트는 자신 없는 기색이었다.

    "백작님도 아시다시피 전 학문에 미친 여자가 아니에요, 그건 전혀 득이 될 게 없거든요."

    "남편감을 낚아 올리는 데 불리하다는 거요?"

    맥시밀리언은 신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샬로트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오거스타 할머님 말씀으론 남자들이란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하거나 심지어는 자기 나름의 의견을 피력하는 여자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댔어요."

    "그래서 당신도 그런 작자들 중의 하나와 결혼하고 싶소?"

    맥시밀리언은 심란해진 나머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물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백작님."

    샬로트는 풀기 힘든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듯 하며 대답했다.

    "여기서는 모든 게 너무나 달라요. 그리고 배워 둬야 할 것도 너무 많고요. 오거스타 할머님께선 최선을 다하고 계시지만‥‥"

    당신을 머리 빈 장식품으로 만들기 위한 최선이겠지! 맥시밀리언은 분노에 차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그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음악이 끝나 버렸다. 몇몇 신사들이 그의 파트너와 춤을 추려고 기다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들과 한 번은 춤을 춰도 되겠지. 하지만 두 번째 왈츠는 당신과 같이 출 테니 나중에 다시 오겠소"

    그는 거칠게 명령했다.

    "절 사교계에 데뷔시키는 의무를 이행하시는 건가요?"

    샬로트는 입꼬리를 치켜들었다.

    "그렇소"

    맥시밀리언은 대답했다.

    "난 데뷔한 아가씨들과 항상 춤을 추지만 횟수는 딱 한 번뿐이오 두 번이나 춤을 춘다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특히 주목하고있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알리는 셈이지 하지만 그 이상의 춤은 부적절하게 보일 수 있소"

    "꽤나 복잡하군요. 그렇죠? 온갖 시시한 행동 규범이며‥‥‥‥‥"

    샬로트의 냉소적인 어조는 상상 속의 산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를 슬쩍 훔쳐보는 그녀의 눈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이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멋지고 잘생긴 젊은이가 다가와 춤을 신청했고 그는 멍하니 두 사람의 뒷모습만 지켜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른 숙녀를 선택해 춤추는 무리에 끼어드는 대신 그는 가만히 서서 저쪽으로 멀어져 가는 샬로트와 그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무도회장을 당장 떠나고 싶은 충동이 뭉글뭉글 일었다. 이미 이곳에서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그는 시계를 꺼내 보고는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미 클럽에 갈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맥시밀리언은 짜증과 맞서 싸우면서 아직은 자리를 뜰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춤을 한 번 더 추자고 샬로트와 이미 약속을 했고 춤을 춘다는 것은 그녀를 사교계 최고의 아가씨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첩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그는 만족감으로 뿌듯해지기는커녕 뱃속에 갑자기 납덩이가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모든 것은 극히 간단해 보였다. 일단 제대로 옷만 갖춰 입고사교계의 점잔빼는 원리에 대해서 배우기만 하면 샬로트는 좋은 짝을 찾아내 그의 삶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향하던 이 지겨운 관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거스타 서굿의 작품을 보고 있으려니 맥시밀리언은 사태의 추이가 별로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샬로트의 모습은 성자라도 홀릴 정도였고 그는 이미 그녀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몇몇 남자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는 판국이었다. 악명 높은 난봉꾼 몽고메리가 그녀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모습을 보자 맥시밀리언은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그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이런 종류의 관심을 끌기를 기대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맥시밀리언은 샬로트가 번갈아 가며 여러 남자와 빙빙 도는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기분이 가라앉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그의 안색이 더욱 언짢아졌다. 두 번째 춤을 추러 샬로트에게로 다가가는 그의 몸짓에는 열의 따위란 전혀 없었다. 그녀 역시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울화가 더욱 치밀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스텝을 밟았다. 샬로트는 그의 목덜미 칼라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의 머리에 얹힌 우스꽝스러운 작은 모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레이스와 주름 장식이 달린 연분홍색 모자였다. 머리를 풀어내린 그녀의 모습을 보았던 게 언제였던가? 그는 거품처럼 복슬복슬하게 흐트러진 황금 실타래 같던 그 모습을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절 위해서 이렇게 친절하게 애써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려야겠어요, 백작님."

    비아냥거리는 어조였다. 그는 그녀의 말투에 다소 움찔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녹색 눈동자에 번득이고 있는 것은‥‥‥분노? 대체 그녀가 무엇 때문에 성질을 낸단 말인가? 그녀를 사교계에 입성시키느라 저녁 내내 일정을 완전히 망쳐 버린 쪽은 다름 아닌 그가 아닌가. 구역질날 정도로 비굴하고 들척지근한 청년들과 춤추며 노닥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봐야 했던 것도 그가 아닌가. 그들 중에 믿을 만한 작자는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는데‥‥맥시밀리언은 그답지 않게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괘씸한 목사의 딸 같으니! 처음부터 아예 그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그녀의 코를 완전히 납작하게 해주고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타고난 정중한 성품 덕에 자제할 수 있었다. 다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일이다. 맥시밀리언은 자신을 타일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는 뻣뻣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춤을 빨리 끝내고 클럽에 가서 한 잔 하고 싶었다. 딱히 약속을 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목요일 밤마다 화이트(18세기 초반 세워진 런던 최고의 역사를 지닌 신사 전용 클럽)에 간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랠리자작과 크렌쇼는 그가 왜 이렇게 늦나 의아해하며 기다릴 것이다. 그는 절대 늦는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한테 편지를 드려서 백작님께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셨다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샬로트는 음악이 끝나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그의 곁에서 물러났다.

    "책 문제로 괜히 번거롭게 애쓰실 필요 없어요 ,백작님."

    그녀는 덧붙였다.

    "여태까지도 충분히 힘써 주셨으니까요"

    왜 감사가 아닌 경멸의 말로 들리는 것일까? 뻔뻔스러운 아가씨 같으니 ! 그녀 때문에 곁길로 새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맥시밀리언은 출구로 향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으며 올맥의 단골들에게 그녀를 소개했고 춤도 두 번이나 추었다. 그런데도 은혜를 모르다니 ! 그는 자신의 의무 이상으로 그녀에게 정성을 다했다. 이제 그는 되도록 빨리 그녀가 결혼해서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때만을 기다릴 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맥시밀리언은 낭패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클럽에 가기에도 늦은 시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 곧장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안개 속에 피어난 새싹 같은 눈동자가 자꾸 휴식을 방해했다. 마침내 그는 성가시다는 듯 욕설을 퍼부으며 일어나 서재로 가서 책을 꺼내 들고 앉아 테베 왕가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맥시밀리언은 자신이 왜 브래들리 저택의 복도에 서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곳 방문은 예정에 없었고 그의 비서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일정을 변경하자 거의 기절할 정도가 되었다. 일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샬로트가 여기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날 밤 콕스베리 무도회장에서 레이디 브래들리가 그녀를 초청할 때 그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구경하고 싶었다. 다소 몰염치하던 그녀의 행동을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며칠 동안 짜증도 점점 누그러진 데다 그녀가 사교계에서 진보를 보이고 있는지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과 그녀를 다시 만나고싶은 묘한 욕망이 훨씬 컸다.

    "위클리프! 자네 지난 목요일에 클럽에 오지 않았지?"

    맥시밀리언은 랠리 자작을 보고 미소지었다. 랠리는 지나치게 맵시를 내는 것 외에는 좋은 친구였다. 승마에 능하고 말도 잘 다루는 데다 주량도 대단했고 도박판에서도 거의 항상 운이 좋았다. 랠리는 문학에 취미가 없었지만 맥시밀리언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고전에 대한 그의 열정을 공유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자네의 명석한 머리를 좀 빌릴 일이 있었는데."

    랠리는 맥시밀리언보다 작은 키에 연갈색 머리카락을 여봐란 듯이 빗어 내리고 우스울 정도로 셔츠 깃을 잔뜩 추켜세운 차림이었지만 표정은 친근했다. 그는 노력 끝에 터득한 나른한 몸짓으로 외알 안경을 들더니 방 안을 훑어보았다. 맥시밀리언은 문득 킷을 떠올렸다. 그의 지팡이를 두고 거짓시늉이라고 불렀던 그 아이가 지금 저 물건을 보면 뭐라고 할까? 문득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은 오로지 트로브리지 가 사람들 생각뿐이었다.

    "지나친 과음 탓에 이번 달 용돈을 모조리 날리고 말았다네."

    랠리는 안경을 들여다보며 툴툴댔다.

    "유감이로군, 난 평소보다 더 늦게까지 콕스베리 무도회장에 있었거든."

    "오호!"

    랠리는 말했다.

    "그럼 사실이로군?"

    "뭐가?"

    "자네가 사교계에 갓 데뷔한 아가씨에게 반했다는 것 말일세."

    랠리는 안경을 내리고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위클리프, 런던 전체가 그 소문으로 들끓고 있다고."

    맥시밀리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랠리를 쳐다보았다.

    "내가 누구 다른 사람에게 반한 걸 여태껏 본 적 있나?"

    그는 차갑게 물었다.

    "없지 !"

    랠리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란 말인가? 전부 다 엉터리라이거지?"

    랠리는 다소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 숙녀는 내 새 영지의 녹을 먹고 사는 목사의 딸이라네. 난 그 목사에게 딸을 보살펴 주고 좋은 신랑감을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래?"

    랠리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의무를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이행할 것 없지 않나, 위클리프? 자네가 그런 성인 군자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바람에 우리들만 더욱 힘겹단 말일세. 우리 아버지는 어제도 자네의 미덕을 들먹이시더군. '왜 넌 위클리프처럼 굴지 못하는 게냐?' 하고 물으시더라니까. 어디 그런 사람이 흔한 줄 아시나!"

    랠리는 풀을 먹여 한껏 곧추세운 옷깃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도리질을 해댔다.

    "세상에, 난 내가 부리는 목사가 누군지도 모르는 실정인데 말이야. 그 딸까지는 말할 것도 없지 ! 그런 풋내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척하다니 정말 자네에겐 상이라도 줘야겠군. 아마 칠칠치 못한 뚱보 촌뜨기겠지."

    랠리는 몸서리를 쳤다. 맥시밀리언은 자신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샬로트는 그런 여자가 아닐세."

    그는 되도록 평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물론 그렇겠지. 그냥 저절로 말이 나왔을 뿐이네."

    랠리는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정말이지 자네가 존경스럽네. 나 같으면 아무리 그 딸이 반반한 얼굴이라 해도 그런 수고를 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외알 안경을 다시 들어올려 방 안을 죽 훑어보았다.

    "난 새로 등장한 숙녀들이나 한번 살펴봐야겠네. 아버지가 계속 결혼 얘기를 꺼내시거든. 그러면 내가 정착할 줄로만 아시는거야."

    맥시밀리언은 빙긋 웃었다. 랠리는 깊이는 없었지만 친절했으며 맥시밀리언의 빡빡한 일정을 참고 견뎌 주는 친구였다. 그런 아량을 모두가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 온 것도 의무 봉사를 위해서인가?"

    랠리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이렇게 물었다. 맥시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럼 끝나고 나서 함께 여길 나가자고. 오늘은 브룩스(18세기말에 세워진 화이트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클럽)지, 그렇지?"

    랠리는 맥시밀리언의 오늘 일정을 댔다.

    "맞네."

    맥시밀리언은 대답했지만 랠리는 이번 시즌의 결혼 시장에 나온 싱싱한 매물들을 구경하러 이미 다른 쪽으로 가버린 뒤였다. 맥시밀리언은 랠리의 아버지 말에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젊은 자작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깔깔거리는 아가씨들 중한 사람에게 잡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흠을 잡으려는 듯 그들을 모조리 한 번 훑어본 다음 딱 한 명의 특별한 아가씨 외에는 다들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맥시밀리언이 숭배자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그 아가씨를 발견한 것은 복도 끝자락에서였다. 하지만 그 남자들 가운데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작자는 한 명도 없다고 그는 결론 내렸다. 그는 몇 차례 차가운 눈길을 던져 모두를 내쳐 버렸다. 추종자들이 슬금슬금 도망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채자 그는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입술에 밝은 미소를 띠고 태평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콕스베리에서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그렇게 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늘은 그녀가 그런 기분을 완전히 떨쳐 버린 것 같았다. 그를 본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밝아지자 맥시밀리언의 몸 안에서 뭔가가 솟구쳤다. 눈 색깔과 어울리는 초록색드레스 차림은 여신인 양 눈이 부실 정도였다.

    "백작님 ! 정말 반가워요! 그리고 저 사람들을 쫓아 주셔서 고마워요 다들 다정하긴 하지만 그게‥‥‥‥"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정도가 좀 지나쳐서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런 것 같소"

    맥시밀리언은 대답했다.

    "하지만 구혼자가 너무 많다고 해서 곤란할 건 없잖소"

    샬로트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녀는 부채질을 하고 있다가 그가 다가가자 탁 접더니 손목에 감긴 줄을 타고 내려뜨렸다. 그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다가 가냘픈 손으로 더듬어 올라왔다. 그는 장갑을 끼지 않은 그 손의 생김새가 어떤지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밤은 특별히 더 아름답군요."

    그녀는 무엇을 입어도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아무것도 입지 않고‥‥‥

    "어머나! 저 사람들한테서 절 구해 주러 오신 줄로만 알았는데요"

    샬로트는 놀리듯 방긋 웃었다.

    "그렇소. 당신을 구하게 되어 몹시 기쁘오. 하지만 칭찬말고 내가 어떤 말을 하기를 바라는 거요?"

    맥시밀리언은 느긋하게 농담에 끼어들었다.

    "정직한 말이요, 백작님."

    샬로트는 부드럽게 말했다. 맑은 눈으로 보건대 그녀는 몹시 진지했다. 심금을 울리는 그 표정에 맥시밀리언은 우뚝 멈춰 섰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깔리면서 뭔가 숨겨진 뜻이라도 있는 듯 한층 의미심장한 분위기가 되었다. 맥시밀리언은 천천히 숨을 토해냈다. 묘한 분위기를 더 지속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그럼 정직하게 말하겠소 새 드레스를 입은 당신 모습은 몹시 매력적이지만 그 모자는 별로로군. 머리를 그렇게 꼭꼭 숨겨야만하오?"

    샬로트는 그의 무례한 말에 킥킥 웃으면서 미안하다는 듯 입꼬리를 내려뜨렸다.

    "그런가 봐요, 백작님. 오거스타 할머님 말씀으로는 제 머리카락이 유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대요 그래서 계속 머리를 자르라고‥‥‥"

    "자른다고?"

    맥시밀리언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샬로트, 그분이 당신 머리를 한 올이라도 건드리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샬로트는 노성을 듣고 온순하게 끄덕이기는커녕 깔깔대기만 했으므로 그는 한층 짜증이 났다. 이 화제는 그쯤 해서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 그 늙다리 마귀할멈이 감히 그의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가위를 대려 하다니 !

    "살로트,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요

    "맥시밀리언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녀의 관능적인 입술 한 켠이 옴찔거렸다.

    "좋아요. 하지만 오거스타 할머님께서 계속 몰아붙이시면 그 뒤부터는 백작님께 맡길게요. 그럼 백작님께서 그 문제에 관해 할머님을 설득해 주시면 되겠네요."

    "알겠소"

    맥시밀리언은 전신을 감싸는 안도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당신을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군.".

    샬로트는 다시금 까르르 웃어댔다. 낯익은 허스키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귀에는 신선하게 들렸다. 귀에 즐겁게 휘감기는 소리였다. 그의 아리따운 촌뜨기 아가씨는 런던의 세련된 규율을 터득했지만 여전히 그녀 자신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마귀할멈이 가윗날을 들이대지 못하도록 그녀에게서 멀리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오거스타 할머님은‥‥‥ 좀‥‥‥ 어려운 상대라고나 할까요?"

    샬로트는 말했다. 마치 그에게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양 나직한 목소리였다. 맥시밀리언은 둘 사이가 다시금 친밀해진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자 빙그레 웃었다.

    "그분의 옷에 대한 안목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소."

    그는 그녀의 세련된 드레스 선을 위에서부터 훑어보며 말했다. 상당히 돋보이는 옷이기는 했지만 그 옷도 그녀의 다른 옷과 마찬가지로 온몸을 꼭꼭 감싸고 있었다. 목까지 올라온 옷깃을 보면 야회용 드레스라기보다는 평상복에 한결 가까웠다.

    "당신 새 옷들은 정말 아름답소. 하지만 목선이 좀 높지 않소?"

    샬로트는 완연한 분홍빛으로 볼을 물들이며 부채만 바라보았다.

    "전‥‥‥ 그게 ‥‥‥‥"

    "미안하오 내가 무례했소. 정직하게 말하라는 당신 요구에 지나치게 충실했군."

    맥시밀리언은 자신의 말을 금세 후회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대담한 말을 꺼냈을까?

    "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샬로트는 장갑낀 손을 그의 팔에 얹었다. 맥시밀리언은 부드럽게 달래듯 그의 상의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바라보았다. 마치그녀에게 맨살을 잡힌 기분이었다. 그는 당혹감과 근심으로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빠다운 미소를 지으려 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녀의 보호자라 못박았으니 만큼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황 따위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불처럼 그의 몸을 달구어 오는 지금 그에게는 다른 반응을 보일 정도의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샬로트가 바싹 다가서서 속삭이자 맥시밀리언의 눈길이 부드럽고 농익은 그녀의 입술로 쏠렸다.

    "전 가슴이 너무 커요."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털어놓았다

    "언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전 알아요. 언니는 그게‥‥‥온당치 않다고 여겼어요. 특히 목사의 딸에게는 말이죠."

    오빠다운 태도를 견지하려던 맥시밀리언의 노력은 돌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단순한 몇 마디 말에 심지까지 뒤흔들릴 정도로 영향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의 순진무구한 고백은 그의 혈관을 극한 상태까지 몰아붙일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는 엄청난 의지력을 그러모아 그 문제의 부분으로 향하려는 눈길을 거두면서 그녀의 고백에 대답할 말을 찾느라 머릿속을 헤집었다.

    "샬로트."

    마침내 그는 목 졸린 듯한 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가슴이 아무리 커도 나쁠 것 없소. 난 당신이 그 점을 축복받은 재능으로 알고 충분히 이용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소. 다른 숙녀들과 똑같은 옷차림을 해요. 물론 점잖은 한도 내에서 말이오."

    그는 그의 충고가 빚어낸 결과를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의 드러낸 가슴보다도 비단으로 감싸인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이 그에게는 한결 자극적으로 여겨졌다. 맥시밀리언은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그녀의 후원자일뿐이니 좀더 온건한 화제로 주의를 돌리는 편이 나았다.

    "위클리프!"

    다행히도 그들의 밀담을 방해한 것은 랠리였다. 그는 외알 안경으로 샬로트를 살펴보며 어슬렁어슬렁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문득 솟아오른 소유욕 때문에 맥시밀리언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위클리프, 난 자네가 목사의 딸에게 의무를 다할 작정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곳 최고의 미인을 차지하고 있군. 교활한 친구 같으니 !"

    랠리가 따졌다. 맥시밀리언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는 친구를 잡아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랠리는 샬로트에게 추파를 던지느라 바쁜 나머지 영 알아채지를 못했다.

    "랠리, 트로브리지 양을 소개하겠네. 트로브리지 양, 이 바보는 어쩌다가 제 친구가 된 자입니다. 랠리 자작이지요"

    "위클리프! 이분은 천사이자 여신일세 !"

    랠리는 연극조로 외쳤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절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네. 하지만 제가 천사도 여신도 아니라는 사실을 털어놓아야겠군요"

    샬로트는 말했다.

    "전 단순히 목사의 딸에 불과하니까요"

    경악한 랠리는 그녀의 손을 된 채 화석처럼 굳어진 몸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고소한 상황이긴 했지만 랠리가 샬로트에 게 지분대는 꼴은 맥시밀리언의 눈에 영 달갑지 않았다. 그는 친구를 쿡쿡 찔렀다.

    "백번 천번 사과드립니다. 트로브리지 양. 하지만 이건 전부 위클리프의 과실입니다. 이 친구가 당신이 이번 시즌에 데뷔한 아가씨들 가운데 최고로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랠리는 그녀의 손에 쾌나 오래 입술을 누르고 있더니 겨우 놓아주었다. 맥시밀리언은 샬로트가 명랑하게 웃자 얼굴을 찡그렸다.

    "위클리프 백작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나보죠!"

    랠리는 끔찍하다는 듯 맥시밀리언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라면 이 친구는 실로 괴물입니다그려. 사실 전부터 그런 생각은 했었지요. 이 친구는 일정을 짜고 시간을 지키는데만 바빠서 주위에 미인이 있어도 눈치조차 못 챌 겁니다."

    맥시밀리언은 시계를 보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이 잔인한 친구에게서 아가씨를 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랠리는 졸랐다.

    "저와 춤을 춰주시겠습니까, 여신님?"

    랠리의 변덕에 어지간히 익숙해져 있던 맥시밀리언도 친구의 이런 태도에는 화가 버럭 났다. 지각이 있어서 그런 허튼 소리에 장단을 맞추지 않으리라 믿었던 샬로트마저 키들키들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여태껏 거의 친구에게 이겨본 적이 없던 랠리는 완연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실례해도 되겠지, 위클리프?"

    그는 경쾌하게 물었다.

    "전 어느 쪽인가요?"

    샬로트가 물었다.

    "어느 쪽이라니, 뭐 말입니까?"

    "어느 여신인가요?"

    샬로트는 까르르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야 당연히 제일 아름다운 여신이지요!"

    랠리는 대답하며 그녀를 데리고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맥시밀리언은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랠리가 아프로디테와 아가멤논도 구별 못한다는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시시껄렁한 농담은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그는 알랑대는 친구와 샬로트 두 사람 모두에게 염증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그녀가 랠리를 낚으려고 생각했다면 완전히 헛물만 켜게 되리라. 맥시밀리언은 가혹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백작인 랠리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목사의 딸과 절대 결혼시킬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미모와 매력을 갖췄다 해도 샬로트는 여신이 아닌 인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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