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4화 (4/19)
  • 4.

    맥시밀리언은 캐스털리 저택의 대식당에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목록을 훑어보았다. 출발 시간인 정오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행이 아니라 주위 상황에 자꾸 신경이 쏠리고 있었다. 수렵화가 걸려 있는 칙칙한 색깔의 벽이며 창문을 뒤덮고 있는 묵직한 커튼 때문에 실내 분위기는 살풍경 그 자체였다. 맥시밀리언은 채광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건축가에게 전하는 지시 사항에 이 낡은 저택의 창문이 해야 할 역할을 최대한 활용하게끔 써넣었다.

    "백작님"

    전부터 이 집에서 일하던 집사가 불쑥 나타나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리처드슨?"

    "트로브리지 양이 백작님을 뵈러 오셨습니다. "

    살짝 일그러진 집사의 입술에는 재미있다는 기색이 내다보였다. 주제넘은 작자 같으니! 맥시밀리언은 이 남자를 반푼어치도 좋아하지 않았다. 맥시밀리언의 취향대로라면 집사란 모름지기 침착하고 과묵하고 웃음기가 없어야 했다.

    "아가씨를 모실까요?"

    여기로? 샬로트를? 이곳에 단 둘만 있게? 맥시밀리언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식탁을 두들겼다. 그는 깜짝쇼를 좋아하지 않았고 예기치 않은 손님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것도 아침 식사 중인데 ! 하지만 리처드슨의 뒤편에서 어른거리는 분홍빛이 그의 빠른 결단을 재촉했다.

    "그러게."

    맥시밀리언은 말했다. 예의상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중에 집사에게 한 소리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손님이 왔으면 거실로 안내해야 하거늘 집 안을 휘젓고 다니게 두다니.......하지만 골칫거리 하인에게 쏠려 있던 그의 생각도 유연하고 우아한 태도로 들어서는 샬로트의 모습을 보자 쉽사리 방향이 바뀌어 버렸다. 그녀는 오늘도 머리를 틀어 올려 분홍빛 리본을 맨 작고 납작한 밀짚모자 안에 감춘 채였다. 리본 색깔에 맞춘 드레스는 예쁘기는 했지만 어딘가 어린애 옷 같은 느낌이었다. 가슴에의 옷자락이 팽팽한 걸로 보아 몸이 자랐는데도 옛날 옷을 그대로 입은 게 분명했다. 맥시밀리언은 그 반응으로 바지춤 안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의 지팡이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걸 저희 집에 두고 가셨더군요"

    그녀는 미소지었다. 불쑥 찾아든 손님 따위는 냉대하는 것이 그의 신조였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녀의 인사에 응하고있었다. 음울하던 대식당이 갑자기 밝은 햇살과 활기로 가득 찬 듯했다. 샬로트는 봄의 여신처럼 주위에 자신의 정기를 흩뿌리는

    "고맙소"

    맥시밀리언은 나긋나긋하게 대답한 다음 지팡이를 그녀에게서 받아 들었다.

    "굳이 이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는데. 다른 지팡이가 많이 있으니 말이오"

    그는 '거짓 시늉'용 도구를 치우면서 앞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다닐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샬로트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키가 커서 정수리가 그의 어깨 위로 올라올 정도였다. 양손을 모으고 서서 천사 같은 얼굴을 차분하게 들어올린 젊고 상냥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보건대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꿈에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서 오면 안 돼요, 샬로트. 극히 부적절한 행동이오"

    "아, 킷과 제니와 캐리도 같이 왔지만 거위를 쫓아 연못으로 달려가 버렸답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녀는 입구 쪽을 무심하게 손짓했다. 맥시밀리언은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이런 생활 방식은 그에게는 전적으로 생경하기만 했다. 그에게 있어 습관처럼 되어버린 일정과 엄격한 규범에 따르자면 상류층의 숙녀가 샤프롱(젊은 여자가 외출할 때 따라다니며 보살펴 주는 사람)도 거느리지 않고 난데없이 신사의 집으로 쳐들어오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서식스에서는 그런 행동이 용인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샬로트를 위해서라도 그만 가라고 말해야겠다고 맥시밀리언은 결심했다. 여느 여자였다면 그는 이런 방문이 결혼을 획책하기 위한 덫이라고 의심했을 터였다. 하지만 샬로트는 그럴 여자가 아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식당을 둘러보는 그녀는 간계 따위는

    모르는 순진무구함 그 자체였다.

    "좀 음침하네요 그렇죠?"

    그녀가 물었다.

    "개선하도록 조치했소"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의견이 그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초조해진 나머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는 혼잣몸으로 이곳에 휘젓고 들어온 그녀를 당장 호되게 내쫓아야만 했다. 이 가엾은 꼬마 아가씨가 무슨 수로 런던에서 인기를 얻는단 말인가? 격식에 대한개념이라곤 전혀 없으니‥‥‥‥ 문득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별 생각없이 태평하게 런던의 신사 집을 방문하는 광경을 상상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에게 사교계의 규율을 깨우쳐 줘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앉지 않겠소?"

    그가 물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기쁘게 대답했다. 그녀가 해맑게 웃자 맥시밀리언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솔직한 기쁨에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식사를 가져오게 하겠소"

    그가 부르자 달려온 하인은 백작의 아침 식탁에 난데없는 아가씨가 출현한 사실을 다행히도 그다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커피? 아니면 홍차?"

    그의 질문에 샬로트는 홍차를 택했다. 맥시밀리언은 서류를 다소 초조하게 치우고 나서 하고 싶었던 얘기를 꺼냈다.

    "친애하는 아가씨, 런던에서 지내려면 몇 가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오. 그걸 깨우쳐 주는 게 내 의무인 것 같소"

    맥시밀리언은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그녀의 주의를 완전히 끌수 있게 되어 기뻐하며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이곳 시골에서는 만사가 좀‥‥‥ 격식을 따지지 않는 것 같소. 그러니 당신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남자를 방문하는 것도 용인될 수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런던에서는 젊은 숙녀가 샤프롱이나 적어도 어엿한 하녀 하나 없이 외출하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오."

    하인이 들어와 그녀 앞에 음식을 차려 주고 나가는 동안 맥시밀리언은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말을 계속하려고 숨을 들이킨 순간 그는 샬로트의 봉긋한 가슴을 보고 그만 딱 멈추고 말았다. 토스트를 집어든 그녀의 동작 덕분에 가슴을 감싼 드레스 자락이 팽팽해졌다. 그는 토스트 가장자리에 마멀레이드를 발라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느라 생각의 끝자락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샬로트가 빵을 막 한 입 씹으려는 순간 부엌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대체 뭐지? 맥시밀리언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엉거주춤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부엌 쪽으로 나 있는 문이 활짝 열리면서 킷이 뛰어들어왔고 킥킥대는 캐리와 엄숙한 표정의 제니가 그 뒤를 이었다. 킷은 뭔가 잔뜩 입에 넣고 우물대더니 앉으라는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태평하게 손짓을 하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넌 절대 걷는 법이 없구나."

    맥시밀리언이 말했다. 킷은 음식을 꿀꺽 삼키더니 이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건 재미가 없어요"

    맥시밀리언은 입가에 떠오르려는 미소를 가차없이 억눌렀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걸어다녀야 한다. 꼬마 친구아."

    그가 말했다.

    "네, 아저씨. 아니, 백작님."

    킷은 눈에 띄게 원통해하면서도 대답했다.

    "백짱님, 백짱님."

    제니가 읊어댔다. 아이는 맥시밀리언의 의자로 다가와 거두절미하고 그의 무릎에 올라오더니 그의 가슴에 기대앉았다. 맥시밀리언은 아침 시간을 방해한 이들에게 느꼈던 짜증이 사라지면서 따스한 감정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를 따르는 아이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트로브리지 가 사람들에게는 소탈한 친근미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이 위클리프 플레이스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주위에 바글대는 가운데 무릎에 아이를 편안히 앉힌 그의 모습을 본다면 저택의 하인들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터였다.

    "이 장난꾸러기가 부엌에서 대체 뭘 훔쳐 왔나?"

    맥시밀리언은 킷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인은 빙긋 웃었다.

    "요리사한테 계피 롤빵을 얻어먹었을 겁니다. 백작님. 빵을 더가져올까요?"

    "그렇게 하게. 토스트와‥‥‥우유도 더 가져오게."

    묻듯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 앞에 샬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하인은 허리 굽혀 절하더니 부엌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금세 푸짐한 성찬을 마주하게 되었다. 요리사가 인심 좋게 넉넉히 내어준 잼 파이도 있었다.

    "킷, 음식은 씹어서 삼켜야지."

    맥시밀리언은 탐탁지 않다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가 없으니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겠지만 신사는 음식을 그냥 꿀꺽 삼키는 법이 없단다."

    "흥"

    킷은 투덜대며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샬로트는 가느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키득거렸다. 맥시밀리언은 꾸짖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반짝이는 녹색 눈 앞에서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는 의자에 느긋이 기대앉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맥시밀리언은 주위를 둘러보고 식당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바뀐 것을 알아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내는 정적과 위압적인 분위기로 가득했건만 지금은 목사관에서만 가능할 줄 알았던 소음과 원기왕성한 활기, 그리고 친근한 느낌으로 충만해져 있었다. 문득 그는 적절한 행동에 관해 샬로트에게 설교를 하다 말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녀 쪽을 흘깃 바라본 순간 그는 금방이라도 핀에서 빠져나을 듯한 연한 빛깔의 곱슬머리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저 부드러운 뭉게구름 같은 머리채를 풀어 버리는 사람이 그 자신이었으면 하고 그는 간절히 바랐다.

    "백작님 !"

    맥시밀리언은 숨가쁘게 놀라는 소리에 고개를 획 돌렸다. 여행을 떠나기 전이면 항상 사소한 것을 챙겨 주는 그의 시종 레버링이 입을 딱 벌린 채 패거리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레버링?"

    맥시밀리언이 온화한 어조로 물었다.

    "백작님, 저기 ‥‥‥‥"

    시종이 정신을 되찾기까지는 족히 1, 2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백‥‥‥ 백작님께서 떠나실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떠나시나요?"

    충격받은 킷의 말소리야말로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 우렁찼다. 맥시밀리언은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길을 보냈다.

    "알겠네, 레버링. 이제 가도 좋네."

    가엾은 시종은 멍한 듯 돌아서서 비척비척 사라졌다. 그는 주인 밑에서 여러 해를 일했건만 맥시밀리언이나 선대 백작이 말하는데 여섯 살짜리 소년이 끼어드는 광경을 보기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이 도중에 끼어든 킷을 꾸짖을 틈도 없이 요리사가 부엌문을 열고 나타났다.

    "샬로트, 사내아이들이 부엌에 있는데, 여기로 들여보낼까?"

    샬로트는 그래도 맥시밀리언을 곁눈질할 예의는 갖추고 있었다.

    "백작님?"

    맥시밀리언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것 참 친절하군."

    그는 요리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질문이 있으면 내게 하도록 하시오."

    "네, 백작님."

    하지만 요리사는 뉘우치기는커녕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맥시밀리언은 한숨을 쉬었다.

    "들여보내요"

    모습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입씨름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제임스와 토마스였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

    아이들은 큰 소리로 인사하면서 들어오더니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샬로트를 째려보았다

    "우리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 주면 좀 어때서 !"

    토마스가 말했다.

    "여기 온다는 말을 왜 우리한텐 하지 않았지?"

    "너희들이 전부가 날 따라오면 백작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았어, 이제 와서 보니 내 생각이 분명 맞은 것 같구나."

    샬로트는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대답했다. 제니를 제외한 식탁 주위의 고개가 전부 맥시밀리언 쪽으로 향했다. 열 개의 눈동자가 쥐 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그를 주시했다. 가족들의 결점 앞에서 그녀가 당혹스러워하는 심정은 맥시밀리언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샬로트가 권위를 찾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어울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쫓아낼 기회를 그에게 안겨준 것이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아이들의 눈에 그는 평생 괴물딱지로 낙인찍히고 말 터였다. 비록 집안의 질서가 무너지기는 했지만 맥시밀리언 자신이 이 상황을 즐겼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제인은 왜 안 왔지?"

    그는 퉁명스레 물었다. 팽팽해졌던 분위기가 일시에 누그러지면서 그를 둘러싼 잡담소리가 점차 시끌벅적해졌다. 하인은 수고스럽게도 접시를 더 가져와야 했다. 제임스와 토마스는 마치 이런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 본다는 듯 달걀과 햄을 잔뜩 덜어냈다.

    "우리 때문에 떠나시는 건가요, 백작님? 우리가 계속 귀찮게 할까 봐 걱정되셔서요?"

    킷이 불쑥 물었다.

    "물론 그렇지 않단다."

    맥시밀리언은 대답했다.

    "난 몹시 바쁜 사람이고 일 때문에 런던에도 가봐야 하거든."

    그들의 얼굴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맥시밀리언은 실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여태껏 어느 누구도 그가 떠나는 것을 가슴아파한 적이 없었다. 물론 런던에 있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떠날 때면 붙잡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서처럼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슬픔과 진심은 없었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이 뭉클했다. 그렇다면 샬로트는? 그녀는 그 소식에 제일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킷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무시무시한 수렵화를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다른 가족들처럼 실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소 서운했다.

    "우리도 런던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임스가 말했다.

    "형은 평생 못 갈 거야."

    토마스가 말했다.

    "아니, 갈 거야!"

    "절대 못 갈걸."

    "샬로트 언니는 언제 가?"

    캐리가 물었다.

    "한 달 뒤면 출발할 거야."

    샬로트의 미소는 다소 힘이 없었다. 가고 싶지 않은 것일까? 맥시밀리언은 의아했다. 아니면 사실은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누나를 만나러 가실 건가요, 백작님?"

    킷은 끈적끈적한 빵을 볼이 미어져라 먹으며 물었다.

    "입에 음식을 넣은 채로 말을 하면 안 돼.“

    맥시밀리언은 본능적으로 타일렀다.

    "당연히 백작님은 언니를 보러 가실 거야. 그렇죠, 백작님?"

    캐리가 물었다.

    "근사한 파티며 무도회에 함께 가시겠죠 그렇죠? 그리고 춤도! 생각해 봐, 언니 !"

    캐리는 황홀하다는 듯 한숨지었다. 맥시밀리언은 샬로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다가 문득 고통을 느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차림을 한 이 순진한 젊은 아가씨는 그가 노니는 세계에 절대 끼지 못할 터였다.

    "그래요. 내게 친척분의 주소를 꼭 알려 주시오"

    그가 목소리를 돋워 말했다.

    "그래야 당신을 찾아갈 테니까."

    샬로트는 녹색 눈을 그에게 돌리더니 그가 망설이는 기미를 눈치챘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왠지 그는 이 정직한 촌뜨기 아가씨야말로 거짓말을 아주 똑똑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말이지 그러실 필요 없어요, 백작님."

    "내겐 필요하오."

    맥시밀리언은 초조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그는 입씨름을 벌이는 데 익숙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주소를 모르겠어요, 백작님."

    샬로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요청을 퇴짜놓았다.

    "그럼 나중에 꼭 주소를 보내 주시오"

    맥시밀리언은 말했다.

    "런던에 있는 우리 집 주소를 알려 주겠소"

    그는 종이를 집어 평소의 꼼꼼한 글씨체와는 달리 재빨리 시원시원하게 갈겨써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는 왜 샬로트 때문에 초조해하는 것일까? 더 이상 서로 접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여지없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는 가련한 촌뜨기 아가씨를 졸졸 매달고 다닐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특히 런던에서는 더더욱. 이런 관계는 지금 끊는 편이 낫지. 맥시밀리언은 단호하게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는 샬로트가 런던에서 심술궂고 소문 퍼뜨리기나 좋아하는 숙녀들과 세속적이고 양심이란 찾아볼 수도 없는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댈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호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지, 맥시밀리언은 자신을 타일렀다. 사실 그녀는 캐스털리의 녹을 먹는 목사의 딸이 아닌가. 그리고 맥시밀리언은 그녀를 찾아가 보겠다고 이미 그녀의 아버지에게 약속을 한 몸이었다.

    "주소를 나한테 보내시오"

    그는 그럴 뜻도 없었는데 한결 거칠게 말하고 말았다. 그녀가 놀라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자 맥시밀리언은 겨우 미소를 쥐어짜며 덧붙였다.

    "나한테‥‥‥ 꼭 보내 주시오"

    "내게 온 편지 더 없나?"

    위클리프 백작이 초조하게 캐물었다.

    "없습니다. 백작님,"

    비서인 피터 월크스는 대답했다.

    "기다리는 편지라도 있으신 겁니까?"

    한 달 전 런던으로 돌아온 이래 백작은 나날이 퉁명스러워졌고 특히 우편물을 받을 때면 더욱 심했다. 피터가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신기한 일이었다. 위클리프 백작은 인내심 강하고 어찌보면 냉정하지만 공정한 고용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서식스에선 아무 편지도 없었나?"

    백작이 물었다.

    '네, 백작님."

    피터는 대답했다. 대체 서식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곳은 백작이 새로 얻은 영지를 시찰하기 위해 얼마 전 갔던 곳 아닌가 혹시 그곳사정이 백작의 마음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일까?

    "피터."

    백작이 날카롭게 불렀다.

    "자네에게 맡길 일이 있네."

    '네, 백작님,"

    피터는 긴장했다. 그는 서식스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은 비서가 아닌 관리인의 몫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5년 전 백작 밑에서 일하게 된 이래 그는 자신의 가치를 한껏 높여 놓았다. 백작의 집안 대소사며 사업 투자. 서신 처리‥‥‥‥ 실제로 백작의 생활은 시계로 잰 듯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피터는 만사가 이토록 순조롭게 흘러가는 데는 자신의 공이 크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오거스타 서굿이란 숙녀에 관해서 가능한 한 모든 걸 알아내 주게."

    백작은 말했다.

    "신중하게 처리하고 그 여자의 주소를 알아내게. 그 집을 방문하고 싶네."

    피터는 하마터면 입을 딱 벌릴 뻔했다. 여자라고? 백작의 심기가 이렇게 저조했던 것이 여자 때문이라니! 그런 끔찍한 생각이 들자 그는 순간적이나마 뼈저린 공포를 느꼈다. 그는 백작이 최근에 사귀던 정부와 갈라선 사실을 대충 감잡고 있었다. 그 숙녀에게 할당되었던 시간이 일정표에서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백작이 그녀에게 깊이 빠지지 않았던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이지적인 위클리프 백작이 어느 누구 때문에 허약한

    모습을 보일 리가. 피터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비웃었다. 이 서굿이란 여자는 아마 백작의 새 정부에 불과할 거라고 피터는 결론 내렸다. 과도기이니 만큼 고용주가 다소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더라도 이해해 주고픈 심정이었다. 그는 이번 주의 일정표에 그 숙녀를 방문할 시간을 머릿속으로 할당해 두었다. 피터는 자신의 혜안에 만족스러운 나머지 미소지었다. 그는 백작의 욕구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갖고있었다. 이야말로 초일류급 비서의 자질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차마 백작에게 감히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피터는 자신의 추론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 숙녀는 일개 정부에 불과할 것이다. 서른 전까지는 아내를 맞지 않겠다던 백작의 생각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클리프 백작은 정확한 약속 엄수를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위클리프 백작? 그 사람이 대체 무슨 일로 왔을까?"

    오거스타 서굿은 향수 냄새가 풍기는 베개에 기대앉아 하인이 가져온 명함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 명함이 바로 눈앞에서 둔갑이라도 할지 모른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다시 명함을 읽었지만 화려한 금박 글씨체는 여전히 위클리프 백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잘생기고 부자인 젊은 백작이 그녀의 집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에 그를 본 적이 있지만 그나마 먼발치에서였고 횟수도 극히 드물었다. 그는 그녀가 참석하는 사교상의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모임에도 마찬가지였다. 듣기로그는 춤이나 도박 같은 경박한 오락거리 따위는 경멸하며 대신사업에 힘을 쏟아 지금처럼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고대 세계나 그런 시시껄렁한 것에만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집에 왔는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곧바로 내려간다고 전해라, 밀로 그리고 조카손녀를 나한테 곧장 보내도록 해 !"

    오거스타가 우아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풍만한 몸매를 살피는 동안 시녀가 그녀의 최고급 드레스를 꺼냈다. 밀로가 나가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샬로트가 들어왔다.

    "아아. 얘야! 이것 보렴! 위클리프 백작이 오셨단다."

    오거스타는 도움을 받아 옷에 몸을 우겨 넣으며 말했다. 그녀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조카손녀의 모습을 본다는 듯 찬찬히 살폈다.

    "네가 입은 그 드레스 좀 보렴 !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구제불능이야! 주문한 옷이 다 되기만 했던들! 네가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런 손님을 맞게 되다니."

    오거스타는 탄식하며 흠이라도 잡으려는 듯 샬로트를 뜯어보았다

    "어쩌면 널 아예 소개시키지 말까 보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차버릴 수는 없지, 어쨌든 그럴 순 없다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위클리프! 그 사람이 대체 무슨 볼일인지 도무지 짐작도 안 가는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인데 말이야."

    시녀가 소매를 고쳐 주는 동안 팔을 내밀고 있던 그녀는 그제서야  샬로트의 얼굴에 서린 홍조를 눈치챘다.

    "왜 그러니, 얘야? 어디 아픈 거니?"

    "그분은 절 만나러 오신 것 같아요"

    "너를?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오거스타는 검은 곱슬머리를 뒤로 홱 젖혔다. 샬로트가 보기에는 염색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목사인 아버지가 그런 술수를 알면 뭐라고 생각하실 지 샬로트로서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아버지가 보았다면 결코 묵인하지 않으셨을 오거스타의 갖가지 사정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체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이냐?"

    "그분은 저의 각별한 친구세요."

    "뭐 야?"

    오거스타의 쇳소리가 너무나 우렁찬 나머지 샬로트는 뒤로 물러나 안 그래도 유별나게 파리한 친척 할머니의 낯빛이 더욱 하얗게 질리는 광경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넌 여태 런던에 와본 적도 없잖니. 그런데 무슨 수로 위클리프 백작을 안단 말이냐?"

    "그분은 목사관 근처에 있는 그레이트하우스의 주인이세요"

    샬로트는 설명했다. 오거스타의 우아하고 가냘픈 얼굴에는 공포의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곧 샬로트와 백작이 어떤 사이인지 제대로 알려 주는 게 낫다는 징조였다. 샬로트는 오거스타의 행동거지를 보고 배우면서 슬슬 자기 자신에게 맞춰 응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곳 런던에서 따라야 할 규범에는 바보 같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급속도로 울화가 치미는 중이었다. 어떤 옷만 입어야 하고, 어떤 곳만 가야하며 그나마 일정 시간을 벗어나면 안 되는 데다 동행하는 사람들도 일정 조건에 맞아야 했다. 왠지 그녀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분은 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아빠한테 약속하셨거든요"

    오거스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뿜었다.

    "그렇구나. 하긴 백작은 의무를 철저히 이행하는 사람이지. 빈틈없고 믿음직한 남자란다. 좀 케케묵긴 했지만 말이야."

    샬로트는 그녀의 우아하고 잘생긴 백작이 케케묵었다는 말을 부인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동안 오거스타는 타산적인 표정을 띤 눈으로 뭔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흠, 이건 내 기대 이상인걸. 만약 그 사람이 힘만 써 준다면‥‥"

    오거스타는 말꼬리를 흐리고 지네트가 작은 모자를 머리에 핀으로 고정시키도록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사람의 힘을 빌리면 넌 사교계에 진출할 수 있어, 얘야. 이거야말로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지 뭐냐!"

    샬로트는 지네트가 옷매무시를 바로잡아 주는 동안 참고 기다렸다. 그동안 오거스타와 시녀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오거스타가 마지막으로 온갖 지시를 내리는 동안 그녀는 애써 귀를 기울이려 해보았지만 거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갈 즈음에는 모든 게 헷갈려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천히 걸을 것. 섣불리 나서지 말 것. 우아하고 고상하고 얌전하고 연약하게 굴 것. 이야말로 성공하는 여자들의 비결이라고 했다. 샬로트는 평생 자신을 고상하거나 연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몸집이 작은 오거스타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키만 큰 거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위클리프 백작과 있을 때는 그럴 일이 없었다. 일어나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샬로트는 모든 것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두 사람이 못 만난 지 겨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그동안 더욱 근사해진 게 분명했다. 짙은 적자색 상의는 언제나처럼 그의 늠름한 몸집에 훌륭하게 어울렸고 담황색 가죽바지도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허벅지께에 하릴없이 머물렀고 그녀의 손길 아래 탄탄하게 느껴지던 그의 근육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얼굴로 옮기다가 조목조목 뜯어보는 그녀의 눈길 앞에서 갈색 눈을 크게 뜨는 그의 모습을 포착하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오거스타는 계속 주의할 점을 조잘거렸고 샬로트는 앞으로 나아갔다. 백작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티끌 하나 없는 장갑 차림의 강인하고 늘씬한 손을 응시했다. 그가 입술을 그녀의 손에 살짝 갖다 댔을 때 그녀는 그 접촉이 몸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오늘은 리본으로 목덜미께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고 싶은 극히 부적절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가끔 가족들 모두의 머리를. 심지어는 아버지의 머리까지도 빗겨 주곤 했다. 하지만 백작은‥‥‥ 그 경우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녀는 그가 상의를 벗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면 그녀는 리본을 풀고 그 검은 머리채를 그의 등에 늘어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서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린다면‥‥‥‥

    "트로브리지 양."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잘 지내고 있겠지요?"

    트로브리지 양? 샬로트는 놀라서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았다. 하지만 초연하고 냉정한 그의 모습은 제니를 안아 주거나 눈빛과 도톰한 입술로 그녀를 놀리던 그 남자와는 전혀 달랐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샬로트는 기계적으로 앉으며 대답했다.

    "백작님은요?"

    "저도 잘 지낸답니다. 여행은 즐거우셨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요?"

    "괜찮았어요"

    샬로트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즐거웠어요. 대형 마차를 타고 여행했던 적은 생전 처음이라‥‥‥‥"

    오거스타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끼어 들었다.

    "물론 우리 어린 조카손녀에겐 뭐든지 새로운 경험이지요. 전 그 애가 여기 머무르는 동안 최대한 즐겁게 해줄 생각이랍니다. 볼 것도 할 것도 너무나 많거든요"

    오거스타는 마구 부채질을 해댔다.

    "저도 이 애 못지 않게 즐거울 거예요. 런던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올맥 사교장 입장을 보증해 줄 사람은 있으십니까?"

    백작이 물었다. 오거스타는 더욱 격하게 부채질을 해댔다.

    "아직은요, 백작님. 저런! 우리 조카손녀가 여기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걸요. 우린 아직 제대로 외출한 적도 없답니다."

    "레이디 저지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백작은 말했다.

    "물론 트로브리지 양을 시즌 초반의 행사에 참석시킬 예정이시겠지요?"

    자리에 앉아 있던 오거스타는 그야말로 움찔했다. 샬로트가 보기에 그녀의 친척은 이런 직설적인 방식에 익숙지 못한 것 같았다. 백작은 마음만 먹으면 다소 위협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고 특히 오늘은 더했다. 그는 너무나 준엄하고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사실은 이번 방문을 원치 않았던 것일까? 그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에게 오거스타의 주소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억지로 그녀를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슨 수를 썼는지 직접 주소를 알아냈다. 그것도 그녀가 도착한 지 이틀 만에.그 생각은 그녀에게 기쁨과 동시에 혼란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도 샬로트는 오거스타 없이 그와 단 둘이 되어 예전처럼 따스한 친밀감을 되찾고 싶었다. 어쩌면 시무룩해 있는 그를 잘 달래 애써 찾아온 동기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런 일을 해낼 것인가? 그녀는 산책이나 외출을 제안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무엇보다도 오거스타가나서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지 않았던가. 샬로트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오거스타의 말로 미루어 보면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남자와 단 둘이 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왠지 모두 어리석은 짓거리처럼 느껴졌다.

    "어머나. 백작님! 전 백작님처럼 체계적인 성격이 못 된답니다. 초대장을 몇 통 받긴 했지만 선별해서 적당한 곳을 선택해야지요"

    오거스타는 말했다.

    "콕스베리 파티 말입니까?"

    백작이 물었다.

    "아, 그곳에서 초대장이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네요. 편지가 엄청나게 쌓여 있거든요. 샬로트가 찾아오는 통에 정리할 틈이 없어 그냥 두었죠."

    그녀는 조카딸을 초조하게 곁눈질했다.

    "두 분은 분명 대환영일 겁니다. 그럼 그곳에서 뵙기 바랍니다. 서굿 양, 트로브리지 양,"

    그는 일어나 시계를 보더니 두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샬로트는 뭐라 입을 열고 싶었지만 런던에 와 사뭇 뻣뻣하고 형식적으로 달라진 백작의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그의 옷도 잼 파이나 달걀이나 제니의 잼투성이 손가락 자국은커녕 티끌 하나 없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더없이 친절하시군요."

    오거스타가 고개를 까딱했다.

    "정말로 친절하십니다. "

    그녀의 선웃음은 백작이 사라지자마자 자치를 감췄다.

    "저런 남자가 다 있나!"

    그녀는 외쳤다.

    "날 그렇게 닦아세우다니 누가 보면 저 사람이 네 후원자인 줄로만 알겠구나. 그리고 시계 보는 꼴 좀 봐!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그대로네. 시간에 목숨거는 사람이었어, 그 남자한테서 시계를 빼앗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을 거야."

    오거스타는 부채를 소리나게 탁 접어 내려놓았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널 어디어디에 참석시키라고 잔소리까지 해대는군. 그 남자한테 창피를 주기 위해서라도 나가지 말까 보다. "

    그녀는 툴툴댔다.

    "하지만 우리를 콕스베리 파티에 참석시켜 주겠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거야, 얘야,"

    빙긋 웃는 바람에 주름진 오거스타의 얼굴이 한층 더 쭈그러들었다.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이것만은 칭찬해야겠구나. 너희 아버지를 위해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는군. 콕스베리 파티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지켜보자꾸나, 얘야. 넌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거야!"

    오거스타는 편안히 앉더니 혼자서 웃어댔다.

    "밀로, 세리주를 가져와! 축하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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