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1화 (1/19)
  • 샬로트의 웨딩마치 (The Vicar's Daughter)

    데보라 시먼스 (Deborah Siegnthal)

    신영미디어

    2002

    위클리프 백작이 마침내 제 짝을 찾았다!

    질서와 규율을 중시하는 엄격한 남자 위클리프 백작은 샬로트가 남편감으로 바라던 모든 것이었다. 시골 목사의 딸에 불과한 샬로트는 남몰래 애정을 키워나가면서도 그와의 차이로 갈등하는데‥‥‥  그런 그가 직접 나서서 샬로트의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

    1.

    위클리프 백작은 그 운명적인 날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의 실체를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목사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리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았지만 위클리프 5대 백작인 맥시밀리언 앨리스테어 웬트워스 포테스큐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그렇게 단언하는 것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했다. 하지만 사건의 추이를 알게 되면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그 모든 일은 1816년 초봄 맥시밀리언이 종조부에게서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서식스의 새 영지를 방문했을 때 덜컥 일어나고 말았다. 위클리프 백작령에 비하면 그 땅은 소규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비옥했다. 하지만 침실이 열다섯 개 딸린 수수한 장원 저택은 오랜 세월 동안 전혀 손을 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맥시밀리언은 보수 공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의 질서정연한 습관대로 맥시밀리언은 곧 영지의 가치를 평가하고 어느 부분을 보수해야 할지 결정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영지를 관리하는 아랫사람들 및 소작인들과 인사를 나누었으며, 1주일 예정 체제 기간 중 사흘째 되던 그 화창한 3월의 어느 날에는 목사관을 잠시나마 방문하려고 발걸음을 뗀 터였다. 자신의 책무를 이행하는 것이 그리 즐거울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몸에 밴 책임감에 따라 의무를 이행할 뿐이었다. 그의 일정은 런던을 떠나기 이전부터 주도면밀하게 짜여져 있었으며, 계획한 바를 한 치도 어김없이 지키는 그의 태도는 다른 이들이 보기엔 지나치리만큼 엄격했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질서정연한 삶을 무엇보다 가치 있게 여겼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금시계처럼 정확하게 스스로를 관리했다. 그는 숙련된 몸짓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번 방문에는 30분 정도 할애하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목사관으로 향하는 판석 길을 따라갔다. 무성한 관목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늙은 떡갈나무 숲 속에 자리잡은 목사관은 허름하고 작은 건물이었다. 맥h시밀리언은 몇 군데 석판이 벗겨진 지붕과 모르타르가 드문드문 떨어져 나간 돌벽을 흘끗 바라보고는 처마에 닿을 정도로 건물 한쪽 벽면을 무성하게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에 못마땅한 시선을 돌렸다. 맥시밀리언이 장갑 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사납게 짖어대는 소리가 그를 맞았다. 온갖 혈통이 죄다 뒤섞인 듯한 조그만 잡종 개 한 마리가 생목 울타리 아래에서 뛰쳐나와 집 쪽으로 달려왔다. 그 동물을 곁눈으로 힐끔 관찰한 맥시밀리언은 위협적인 상대가 못 된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그 개를 따라 덤불사이로 기어 나온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견공과 소년 일당은 맥시밀리언의 발치까지 와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이는 발딱 일어나더니 투덜대며 강아지를 들어올려 작은 가슴에 끌어안았다.

    "안녕 하세요!"

    소년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목청을 높여 인사했다. 개는 작은 몸집과는 달리 상당히 맹렬하게 짖어대고 있었다. 소년이 환하게 웃자 위쪽의 앞니 두 개가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새 영주님이신가요?"

    "그렇단다."

    맥시밀리언은 대답했다.

    "아빠가 계속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마 거실에 계실 거예요"

    아이는 현관문을 열더니 맥시밀리언더러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갔다. 개는 그 틈을 타 감옥처럼 옥죄고 있던 팔에서 쏜살같이 뛰쳐나가 좁은 복도를 마구 뛰어갔다.

    "바둑아! 거기 서 !"

    소년은 고함을 지르더니 빛 바랜 녹색 천이 걸려 있는 복도에 맥시밀리언을 남겨둔 채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맥시밀리언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아까 그 소년보다도 더 어린 아이가 복도 저 앞쪽의 방에서 나오더니 엄숙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계집아이는 지나치게 헐렁한 옷차림으로 뭔가 찜찜해 보이는 천 조각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소녀는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더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빠 집에 계시니?"

    맥시밀리언이 물었다. 아이가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통통한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자 맥시밀리언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씩씩하게 나아가던 그는 복도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서

    주춤하고 말았다. 그는 갈림길에 서서 베일에 싸인 문제의 거실이 어느 쪽일지를 가늠하려 애썼다. 그 순간 그는 깩깩거리며 쫓고 쫓기는 아이들 둘과 하마터면 쾅 부딪칠 뻔했다. "안녕 하세요!"한 아이가지나치면서 악을 쓰다시피 했다.

    "아빤 거실에 계세요!"

    맥시밀리언은 이런 격식 없는 대접 따위에는 익숙지 않았으므로 각다귀처럼 날뛰는 아이들의 목을 졸라 주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이 나왔던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복도를 계속 따라가자 가지각색의 자그마한 방들이 나왔다. 그가 보기에 이 목사관은 토끼굴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침내 휘장이 드리워지지 않은 아치형 입구가 나오자 그는 허리를 약간 숙여 살펴보았다. 예쁘장한 어린 소녀가 만찬 식탁을 차리고있었다.

    "거실이 어디니?"

    그가 물었다. 생전 모르는 사람이 집 안을 어슬렁거리는 데에 면역이 되어 있는 게 분명한 소녀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방긋 웃으며 건너편을 가리켰다. 드디어 찾았군! 맥시밀리언은 닳아빠진 카펫을 밟으며 목적지로 향했다. 이 집의 거실이 이렇게 구중궁귈의 내부처럼 으슥한 곳에 숨겨진 것은 방문객의 의지를 꺾어 버리려는 심산임에 분명하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여간한 집념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게 확실했다. 여태껏 마주친 아이들은 다섯이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 목사의 아이들일까? 방안으로 들어간 순간 짜증이 버럭 났다. 아빠라는 사람이 거실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닳아빠지고 빛 바랜 꽃무늬 소파 쪽에서 난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흥미를 느낀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살펴보니 소파 아래에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엉덩이가 쑥 튀어나와 있었다. 얼룩무늬 모슬린에 휘감긴 엉덩이는 상당히 부드럽고 통통해 보였다. 예의바른 사교계의 정석대로라면 그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당연했고 맥시밀리언이야말로 예의범절의 화신이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그의 차분한 외관 밑에 숨겨져 있던 짓궂은 장난기가 자신도 모르게 발동했다 그래서 그는 평소 같았으면 분명히 지켰을 규범을 무시한 채 눈을 즐겁게 해주는 광경 쪽으로 다가갔다. 엉덩이 아래로는 오래 신어 낡은 아이용 단화 차림의 작은 발한 쌍이 보였고 그 위로는 극히 모양 좋은 발목이 하얀 스타킹에 감싸여 있었다.

    "오, 도와줘. 그럴 거지?"

    그녀가 요청했다. 맥시밀리언은 여자다운 목소리에 감도는 화난 기색에 기죽기는커녕 그 애원에 응할 수 있는 갖가지 다양한 방법을 떠올리고 상당히 자극을 받았다. 그의 흥미로운 상상은 여자의 한쪽 손이 문득 나타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하얗고 보들보들한 그 손이 작은 새끼고양이를 맥시밀리언 쪽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맥시밀리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가 내민 동물을 들어올렸다. 녀석은 겁에 질린 듯 가냘프게 울어대며 몸을 비비꼬았다. 또 한 마리가 그에게 건네졌으므로 그 녀석 역시 받아들었지만 속으로는 여자가 계속해서 동물을 들이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했다. 이 두 마리로도 손이 꽉 찬 상태인 데다 그로서는 녀석들의 작지만 날카로운 발톱에 초록빛 최고급 상의며 우아한 줄무늬 조끼를 망가뜨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 그는 그 문제로 골치를 앓을 필요가 없었다. 풍만한 엉덩이가 귀엽게 옴찔거리며 그에게로 후진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소파 아래에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고 맥시밀리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새끼고양이 두 마리를 안아든 어리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맥시밀리언의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연한 벌꿀 빛깔의 머리였다. 숱 많은 그 머리카락은 구름처럼 얼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다음으로 그가 본 것은 초록색 눈동자였다. 봄날 신록의 연둣빛을 띤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얼굴은 이목을 단번에 잡아끄는 미모였다. 그녀의 입술은 놀란 듯 굳어져 있었지만 그는 그 분홍빛 입술이 단연코 관능적이라는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여자의 매력에 맥없이 넘어가는 부류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평소에도 매력적인 여자들에게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여자들 뒤꽁무니나 쫓는 생각 없는 작자들에게 적잖은 경멸을 품고 있었다. 그에게도 욕구를 채워줄 정부 정도는 있었고 언젠가는 아내도 얻어야 했지만 그다지 열의를 갖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이 특정 여성에게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은 꼼짝도 않고 멍하니 서로를 뜯어보기만 했다. 그녀는 쭈그린 채였고 맥시밀리언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어머나!"

    그녀는 나직이 외치면서 꼭 붙들고 있던 새끼고양이 두 마리를 놓쳐 버렸다. 녀석들은 즉시 안전한 소파로 뛰어 달아났으며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려 하다가 균형을 잃고 곁에 놓여 있던 손수레에 부딪히고 말았다. 맥시밀리언은 그녀를 붙잡아 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도 손수레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잼 파이 쟁반을 보았겠지만, 현실은 잔인해 그가 잼 파이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잼 파이가 무릎 위로 와르르 쏟아지면서 축축한 느낌이 피부로 스며든 뒤였다. 그는 극도로 낭패감을 느끼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파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파이가 좀 전까지만 해도 티끌 하나 없던 담황색 사슴가죽 바지에 검푸른 자국을 방울방울 남겨 놓은 뒤였다.

    "어머나! 어머나, 이런!"

    잼투성이가 된 그의 다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아가씨는 해맑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외쳤다. 다음 순간 맥시밀리언은 허벅지에 스치는 따스한 손을 느꼈다. 너무나 놀란 그는 아가씨가 그의 바지에서 잼을 닦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걸레질은 얼룩을 더욱 번지게 할 뿐이라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는 얇은 옷감을 뚫고 스며드는 그녀의 손길에 젖어 들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사과의 말을 늘어놓으며 걱정스럽다는 듯 감미로운 손길로 그의 다리를 닦아대는 동안 맥시밀리언은 숨을 멈춘 채 손아귀의 고양이들을 더욱 꽉 틀어쥐었다. 그는 눈앞의 이 미녀가 불편하게 솟아오른 옷자락을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손가락이 실수로 그곳을 스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게끔 몸을 살짝 뒤로 빼는 것뿐이었다. 소녀 티를 채 벗지도 못한 아가씨한테 이렇게 강하게 이끌리면서 지금 당장 이 거실 바닥에서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그 흔치 않은 풍성한 머리채가 그의 무릎 바로 위에 놓인 모습을 내려다보며 상상에 잠겼다. 그녀를 카펫 위에 눕히고 양손으로 저 날씬한 발목부터 더듬어 올라와 풍만한 엉덩이를 꼭 움켜쥐고 그녀의 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상상을.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설령 그가 마음가는 대로 행한다 한들 이 정신 없는 집안에서 그 사실을 알아챌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지만 부적절한 그녀의 이런 봉사를 언제까지 가만히 받고있어야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나면서 그의 끈끈한 상상을 깨뜨렸다. 그때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 이 사람이 목사이리라.

    "아아, 우리 딸애 샬로트를 만나셨군요"

    그가 말했다. 이 남자는 자기 딸이 낯선 사람의 허벅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광경을 보고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맥시밀리언은 자신이 얼떨결에 들어선 이곳이 과연 목사관인지 아니면 사창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머나, 아빠!"

    샬로트는 탄식했다.

    "제가 사고를 치고 말았어요"

    맥시밀리언을 흘끔 바라본 그녀는 그가 아직도 새끼고양이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새삼스레 숨을 들이켰다.

    "어머나, 세상에! 이리 주세요"

    그녀가 냅킨을 내려놓고 고양이를 받아 들자 녀석들은 금세 작은 발톱을 그녀의 상의 옷자락에 쑤셔 박았다. 그 바람에 맥시밀리언은 풍만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녀의 가슴 위로 담갈색 옷자락이 더할 나위 없이 팽팽해져 버린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몸이 한층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낀 그는 긴 상의 자락 덕에 목사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맥시밀리언은 아가씨의 팽팽한 가슴에서 힘겹게 시선을 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는 자신이 장갑을 끼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으며 게다가 얼빠진 바보처럼 그녀의 손을 필요 이상 오래 잡고 있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그는 몸을 곧추세웠지만 그 바람에 바지춤만 더욱 의식하게 되고 말았다. 맥시밀리언은 심호흡을 했다. 이젠 자신을 다잡아야 할 때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황급히 놓은 다음 목사의 딸에 대해서 경건한 생각을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제가‥‥‥ 이분을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샬로트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소 걱정하지 말아요"

    맥시밀리언은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사실 나로선 즐겁기까지 했다오.

    "그건 사고였잖소 그나저나 당신이 애써 잡은 고양이 두 마리를 또 놓치고 말았으니 그게 유감이오"

    그것은 실수였다. 조금 전의 품위없는 자세를 떠올린 그녀는 목덜미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새빨개지고 말았다. 노란 잔머리가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귀엽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저 머리카락. 런던에서 한창 유행하는 짧게 땋은 머리나 화려한 머리 장식에 비교하면 실로 경탄할 만한 머리였다. 맥시밀리언은 그런 머리를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머리카락은 좀체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듯 그녀의 얼굴 주위에서 굽이치며 사방팔방으로  곱슬거렸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 맥시밀리언은 그 묘사가 괜찮은 것 같다고 결론 내렸지만 다음 순간 속으로 부인했다. 정말이지 그도 점점 나이를 먹어 고리타분해지는 것이 분명했다.

    "쯧쯧."

    그녀의 아버지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갈색 머리에 안경을 끼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목사는 정신이 산란한 표정이었지만 미소만은 친근했다.

    "백작님께선 그런 사소한 실수 정도는 용납해 주시겠지. 위클리프 백작님이 맞으시지요?"

    "그렇습니다. "

    "존 트로브리지라고 합니다. 백작님께서 그레이트하우스에 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제쯤 이곳을 방문해 주실까 다들 기다리고 있었지요."

    아버지를 바라보던 샬로트는 깜짝 놀라며 훤칠하고 살갗이 가무잡잡한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위클리프 백작이라고? 1주일 내내 백작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이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가 백작이라니 정작 믿기가 어려웠다. 소문을 듣고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닳지 않은 남자였다. 헤스비 씨가 돌아가신 이래 그들은 위클리프 백작에 대해 필요 이상의 갖가지 말을 들었다. 위클리프 백작이 오면 만사를 제대로 바로잡을 거라는 말이 들려왔다. 정작 그가 도착하자 그레이트 하우스의 고용인들은 완전히 발칵 뒤집어졌고 하녀들은 서로에게 매무시를 단정히 하라는 둥, 안 그러면 그 자리에서 백작님께 내쫓길 거라는 둥 수군댔다. 모두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그는 아주 똑똑하고 정확하며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영지를 제대로 원활하게 관리해 주리라 기대했고 그레이트하우스를 개축, 보수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소문들로 미루어 보아 그는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하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동전 한 닢까지도 어디에 쓰였는지, 그리고 그 출처는 어디였는지까지도 파악하고 있는 남자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샬로트는 백작을 답답하고 따분한 늙다리 정도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서른도 안 되어 보였다. 그것도 용모가 아주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녀가 여태껏 만나본 남자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만나본 남자란 어퍼비드웰과 그 주변 지역 주민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시인해야만 했다. 그나마 농부나 상점 주인, 퇴역 군인, 이웃 마을의 지주들 정도였고 그 중에는 백작과 견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의상은 맵시나 재질에서 시골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부유한 분위기가 풀풀 풍겼고 몸을 가누는 그의 태도에는 미묘한 고상함이 배어 있어서 그가 자신에게 냉큼냉큼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며 살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분위기만으로도 그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매력에는 그 이상이 있었다. 세상에, 그 이상이라니‥‥‥‥그의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 위로 두툼하게 휘어 올라간 검은 눈썹이며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등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 입술을 보자 샬로트는 왠지 모를 전율을 느꼈다. 검은색에 가까운 그의 진갈색 머리카락은 유행을 전혀 따르지 않고 목덜미에서 묶여 있었다. 그의 명성에 걸맞아 보이는 유일한 점은 상대를 감정하고 평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어느 것도 그의 예리한 눈길을 피할 수 없을 듯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깨로 기어올라와 작은 앞발톱을 옷자락에 박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그를 무례할 정도로 빤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시선을 피한 것과 때맞춰 캐리가 쏜살같이 거실로 달려 들어왔다.

    "그 애들 찾았어?"

    캐리가 숨가쁘게 물었다. 캐리는 항상 숨가빠했다.

    "두 마리는 있어."

    샬로트는 여동생에게 새끼고양이들을 건네 주었다.

    "나머지 두 마리는 좀‥‥‥ 더 있어야겠구나."

    샬로트는 감히 위클리프 경 쪽을 곁눈질할 수조차 없었다. 좀전에 자기가 취했던 자세가 떠오르자 벌써 볼에 뜨거운 핏기가 올라왔던 것이다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했다!

    "어디 내가 한번 붙잡아 볼까요?"

    달래듯 그윽하게 제안하는 백작의 목소리를 듣고 샬로트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얼른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극히 진지해 보였다. 이 멋있고 아름다운 남자가 소파 밑으로 기어 들어가 고양이를 잡겠다고 자청하다니‥‥‥‥ 샬로트의 심장이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아니, 괜찮습니다. 백작님."

    샬로트는 캐리의 불평을 제압하며 대답했다.

    "배가 고파지면 녀석들도 기어 나을 거예요. 고양이들은 바둑이 때문에 겁을 먹은 거예요. 바둑이가 집 안에 들어왔었던 게 분명해요. 개 이름이 바둑이에요"

    그녀가 설명했다.

    "이미 만났답니다."

    백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샬로트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면서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사방으로 펄떡거렸다. 아아, 세상에. 끔찍하군! 생전 처음으로 만난 매력적인 귀족 남자 때문에 이렇게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라면 정작 런던으로 간 뒤에는 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 쟁반은 치우는 게 좋겠어요"

    샬로트는 파이가 아직 남아 있는 쟁반을 있던 곳에 다시 올려놓던 중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백작의 젖은 바지에 돌리고 말았다. 저 남자다운 허벅지에 내가 정말로 손을 댔단 말인가? 얼굴이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홍당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샬로트는 되도록 고개를 푹 파묻었다.

    "만나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백작님."

    그녀는 우물우물 말했다.

    "즐겁게 계시다 가시길 바랍니다. "

    가지 말아요. 그 말이 입술 끝에서 맴돌았지만 그는 억지로 삼켜 버렸다. 이 아가씨를 넋 놓고 바라볼 권리 따위는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행실 나쁜 여인네부터 세련된 아녀자들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이 떼거리로 포진해 있을 런던으로 돌아갈 것 아닌가. 그런 여자들은 그가 던지는 추파를 즐거워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겠지. 하지만 그 여자들은 목사의 딸이 아니었다.

    "곧 돌아오실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맥시밀리언은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충동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으며 여자꽁무니나 뒤쫓는 부류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반응은 놀라는 동시에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망설이는 기색까지? 맥시밀리언은 그 반응에 다소 놀랐다. 스스로를 뻐기는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매력에 이끌리지 않는 여자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대도시에서나 그렇지 서식스의 촌구석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목사의 딸을 상대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웠다. 세파로부터 보호받고 자란 순진해 빠진 아가씨니만큼 자기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귀족 신사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분별정도는 갖추고 있으리라. 어쩌면 좀더 강하게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에게 매력적인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미소에 응답하긴 했지만 당혹한 표정을 눈에 띄게 드러내며 줄행랑을 놓아 버렸다.  맥시밀리언은 방에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목사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일곱 자녀를 두셨습니까, 트로브리지 목사님?"

    "여덟이랍니다. "

    목사는 정정해 주었다.

    "앉으십시오 이 집에선 예의범절을 자꾸 소홀히 하는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백작님."

    소파 아래 진치고 있을 고양이들도 있고 가구의 불안한 모양새를 고려한 맥시밀리언은 고친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튼튼해 보이는 안락의자를 택했다. 목사는 맞은편에 앉으며 자랑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제일 큰애 사라는 지난 겨울에 시집가서 지금은 읍내에 살고있답니다. 하지만 나머지 애들은 다 보셨겠지요?"

    "예, 여기저기에서."

    맥시밀리언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목사는 미소를 지었다.

    "버릇없는 녀석들이지요. 저도 알지만 좀 극성스러워서요. 단호하면서도 다정하던 레티의 보살핌이 아쉽습니다. "

    그의 미소에서 힘이 빠졌다.

    "애들 엄마는 막내 제니를 낳다가 세상을 떴답니다."

    "유감입니다."

    맥시밀리언은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백작님. 저도 유감이에요"

    목사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존 트로브리지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맥시밀리언이 제대로 본 것이라면 양떼들을 성실하게 보살피는 바람직한 성직자였다. 요즘은 성직자들도 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힘든 때가 아닌가. 맥시밀리언은 목사 때문에 슬슬 화가 치밀려 하자 그 점을 단단히 새겨 두려고 애썼다. 트로브리지 목사가 지각보다는 따스한 마음 쪽에?더 소질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 안 가 뚜렷해졌다. 그는 회계 장부에 대해서는 아무 개념도 없었고 목사관의 재정 문제에 대해서 완전 깜깜했으며 어떤 세상사에도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바로 맥시밀리언이 절대 참고 견딜 수 없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자녀분들 중에 목사님을 도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맥시밀리언은 절박한 나머지 이런 제안을 해보았다. 목사는 한숨을 쉬었다.

    "오래 전부터 사라가 그런 일들을 맡아서 처리했지요, 기특한 것. 하지만 이젠 그 애도 남편 장사를 도와야 하니까요. 제 문제까지 그 애가 맡아 주길 기대할 수는 없답니다."

    "그럼 샬로트는요?"

    맥시밀리언은 물었다. 어감이 좋은 이름이지만 눈부신 머리카락을 지닌 찬란한 미녀에게는 너무 평범했다. 트로브리지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샬로트는 그런 일에는 전혀 소질이 없답니다."

    맥시밀리언은 아가씨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일정 선에서 고정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해도 그 사랑스러운 초록빛 눈동자에서는 지성이 넘실대고 있었건만!

    "우리 샬로트는 식구들 가운데 제일 예쁘지요"

    트로브리지의 말은 사람들이 샬로트에게 기대하는 것이라고는 그게 다라는 듯한 어조였다.

    "게다가 그 앤 어차피 얼마 안 가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맥시밀리언은 몸 안의 피가 온통 머리로 쏠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아가씨에게 아픈 데라도 있는 걸까?

    "백작님도 아시겠지만 그 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뭔가 속셈이 있는 듯한 트로브리지의 미소는 그에게도 세속적인 즐거움이 있다는 최초의 증거였다. 맥시밀리언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은 탓에 현기증까지 날 지경이었다. 물론 그 아가씨가 죽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단순히 결혼해서 이 집을 떠나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사교계 데뷔일까?

    "런던 시즌 때문에요?"

    맥시밀리언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그렇습니다. "

    트로브리지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교계에 데뷔해야 하니까요. 그 애는 제 엄마의 미모를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이랍니다"

    그는 귀엽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애는 정말 그런 말을 들을 만하지요"

    정신을 차려 보니 맥시밀리언은 그 소식으로 인해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혹감을 느낀 스스로에게 경악하고 있었다. 물론 젊은 아가씨라면 누구나 사교계 생활의 상징인 런던 시즌에 데뷔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왠지 그는 대도시에서도 칠칠치 못하게 굴 그녀를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 않았다. 배가 고파 날뛰는 개떼, 그것도 굶주린 수캐들에게 배다커를 던져 주는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었다.

    "샬로트를 후원해 줄 사람은 있습니까?"

    맥시밀리언은 속마음보다도 다소 발끈한 태도로 물었다.

    "제 할머님뻘 되는 친척인 오거스타 서굿 양이 있지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는 고개를 기웃하고 목사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의상은 물론이고 장신구며 갖가지 사교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입장권을 마련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 비용을 다 감당할 능력은 있으신 겁니까?"

    그는 퉁명스레 물었다. 살짝 미소짓는 모습으로 보아 목사는 이런 사적인 질문에 기죽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이때를 대비해서 마련해 둔 비상금이 있지요"

    그 비상금이란 아마 목사가 평생을 두고 저축한 돈일 것이다. 그런 돈이 단순히 딸의 여흥을 위해 낭비될 턱이 없었다. 맥시밀리언은 짚이는 바가 있자 냉소를 머금었다. 낭비는 커녕 투자였다. 샬로트가 런던으로 가는 것은 단순히 그녀를 먹여 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까지도 거둬줄 수 있는 충분한 수입원을 가진 적당한 남편감을 물색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왜 마음에 걸릴까? 맥시밀리언은 세상 물정을 알고 있었다. 비록 지나치게 계산적이긴 하지만 편의상의 짝짓기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애정 넘치는 눈을 보면 트로브리지 목사는 딸이 원치 않는 혼처를 억지로 강요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적당한 상대를 찾아내게 될까? 맥시밀리언은 마음속으로 그가 알고 있는 적당한 총각들을 죄다 훑어보았지만 불안감은 전혀 덜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중 어느 누구도 샬로트의 상대감으로 고려할 생각이 없었고 샬로트 역시 그와 같은 신분의 상대를 겨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에겐 작위를 얻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미인이라 할지라도 안락한 생활 수준의 상인이나 군인, 혹은 귀족의 삼남이나 사남 정도가 그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상대일 것이다. 물론 내가 세상 모든 남자들을 꿰뚫고 있는 건 아니지, 맥시밀리언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친절하고 매력적이고 재산도 어느 정도 있는 총각이 분명 어디엔가 있을 거야.

    "나중에 그분의 주소를 꼭 알려 주십시오."

    맥시밀리언은 날카롭게 말했다.

    "따님을 살피러 들르는 것은 제 의무라고 생각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트로브리지는 얼굴을 빛내며 말했다.

    "정말로 친절하시군요! 하긴 백작님에 관해 들려온 무성한 소문들로 미루어 세상과는 동떨어진 이곳도 머잖아 운이 트이게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답니다. 제 여식을 백작님께서 보살펴 주시겠다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말로 다 할 수 없군요"

    맥시밀리언은 박장대소를 하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눌렀다. 목사는 그를 마치 천사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샬로트 트로브리지처럼 탐나는 열매를 두고 천사 노릇을 하다니! 목사는 맥시밀리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세상사에 까막눈인 듯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의 주인공이 입구에 나타났다. 맥시밀리언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 쪽을 쓱 한 번 훑어보았지만 그 눈길은 점점 집요하게 변해갔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핀으로 정돈하려 했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아 자잘한 노랑곱슬머리가 이미 몇 올 삐져나온 상태였다. 머리채가 죄다 아래로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 주위에서 노란 크림 거품처럼 물결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저 머리를 완전히 짧게 쳐서 얼굴 주위에 곱슬거리게 만든다면 모양에 상관없이 아무 모자나 써도 사교계 입성은 너끈할지 모른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그 머리채에 가윗날을 갖다 댄다는 생각만으로도 겁에 질렸다. 그 머리카락을 만진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그는 상상해 보았다. 고양이털처럼 부드럽고 폭신할 것 같았다. 그는 초조하게 양다리를 꼬았다. 그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바보 천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로트! 네게 어떤 행운이 찾아왔는지 상상이 가느냐? 백작님께서 네가 런던에 있는 동안 주의해서 보살펴 주겠다고 말씀하셨단다. 백작님, 덕분에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릅니다. 제 할머님도 좋은 분이긴 하지만 딸자식에 대한 걱정이란 어쩔 수가 없어서‥‥‥‥"

    하지만 맥시밀리언이 보기에 샬로트는 그 소식에 안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소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안심시키려는 뜻임을 최대한 나타내려 애쓰며 미소지었다. 그녀는 동요한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 순간 몸을 곧추세우고 미소로 응답하는 기특한 모습을 보였다.

    "더 있다가 저녁 식사까지 하고 가시지요, 백작님."

    목사가 말했다. 맥시밀리언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고는 이번 방문에 할당했던 30분이 쥐도 새도 모르게 흘러간 것에 놀랐다. 하지만 아직 저녁을 먹을 만큼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이 목사관의 시간 관념이란 여느 시골 생활의 시간 관념과 다른 듯했다. 맥시밀리언은 슬그머니 미소를 감추고 사과의 말을 꺼낼 준비를 했다. 영지에 온 뒤로 그는 매일 저녁 7시에 칼같이 정찬을 들었다. 그는 캐스털리 저택의 요리사와 상의한 뒤 승인한 1주일 간의 식단 덕택에 오늘 저녁 메뉴에 포도주에 재운 쇠고기 필레와 싱싱한 송어 요리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가난한 목사가 그보다 한결 군침 도는 음식을 내놓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이 집의 상태와 규모로 미루어 보아 묽어 빠진 수프와 갈색 빵이 전부일 것 같았다. 나중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그때 그는 그만 샬로트를 바라보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녀는 잔뜩 기대하며 흥분된 모습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도시에서 만난 여인들의 얼굴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그 표정이 왠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하지요"

    맥시밀리언은 대답했다.

    "같이 식사를 하면 저도 기쁘겠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미소지었지만 속으로는 움찔했다. 누구 다른 사람이 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가? 그는 즉석에서 받은 초대를 수락한 적이 절대 없었다. 그의 일정은 극도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항상 사전에 며칠 전부터 짜여져 있건만‥‥‥맥시밀리언은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며 목사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어쩌면 이런 변화를 가져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항상 시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의 생활 태도를 지적하곤 했다. 예정에 없던 저녁 시간이야말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결론 내리며 맥시밀리언은 머리카락 몇 올이 핀에서 삐져나온 금발의 뒤통수 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목사 가족과 정찬을 하는 것도 신선한 자극이 되겠지, 그는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그것도 상당한 자극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