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16화 (16/16)
  • 16.

    벳시아는 불안감에 쌓인 채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왔다. 그녀는 낮동안 바쁘게 지냈다. 아버지를 돌보고 집안 살림을 감독하고 브리스가 해놓은 일들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마치 헌신이나 의무가 아닌 허약한 자신을 잊기 위해 일을 한 가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지 말고 손님인 드 부르그 가문의 형체들을 만나라고 종용했을 때, 벳시아는 억지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겁쟁이였다. 사이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제의 일로 아직 감정의 상처가 낫지 않았다. 오, 그녀는 거대한 기사와 누렸던 아름다운 만남이 언젠가 끝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결말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두막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그녀를 동등하게 대했다. 하지만 어제는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면서 자신의 진짜 색깔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소지품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몇 달 동안 자유롭게 살아온 벳시아는 또다시 노예가 될 생각이 없었다. 벳시아는 조그만 자신의 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뜨거워진 눈시울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그녀는 사이먼 드 부르그에게 몸과 마음을 기꺼이 주었지만 영혼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것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그를 다시 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야. 왜 그는 떠나지 않는 것일까? 그가 가버린다면 잊기가 한결 쉬울 텐데...그러나 드 부르그 형제들은 모두 남아서 장원의 창고에 든 식량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벳시아는 아버지 병을 핑계로 뒤에 숨어 있는 것도 이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젠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야. 벳시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쳐든 다음 어깨를 쭉 펴고서 커다란 홀로 향했다. 그녀는 계단 아래에 도달했을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놀라 발을 멈추었다. 비록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커다란 홀이나 테이블도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아 보였다. 비슷비슷한 사내들이 여러 명 있는 것을 보자 그녀는 숨이 탁 막혔다. 그렇게 크고 건장한 기사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은 다르지만 똑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모두 사이먼보다도 잘생겼다. 사실, 그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험상궂은 편이었다. 그 점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형제들 틈에 끼여 있는 그를 보자 벳시아는 사이먼의 오만함이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저렇게 강한 사내들 사이에서 자라난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녀의 눈에도 그들은 무적의 용사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멍하게 바라보는 동안 그들은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나 장난스럽게 서로 어깨로 밀쳐댔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가장 크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말했다. 벳시아는 그가 배더슬리의 영주인 늑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예의바르게 말했지만 벳시아는 주저했다. 비록 그녀가 사내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들을 사로잡았으나 이들 일곱 형제는 천하 무적처럼 보였고, 오늘 저녁 그녀는 유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벳시아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사이먼이 아직도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는 앞에 놓인 나무접시를 밀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이먼은 험상궂은 시선으로 그녀를 보더니 저만큼 걸어가 버렸고, 여섯 개의 머리통이 그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가 가버리자 다시 여섯 쌍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벳시아는 움찔했다. 벳시아는 바닥으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뒤로 물러설 곳도 없었다. 오직 앞으로 나갈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기 위해, 사이먼의 경멸 어린 시선과 형제들의 호기심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기 위해 모든 용기를 짜내야 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테이블에 마련 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들기 시작했다, 만약 두 통이 나지 않았다면 벳시아는 자신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 그들을 향해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그들의 이름조차 몰랐다. 마침내 늑대가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지른 뒤 하나씩 소개를 했다. 조프리, 스티븐, 로빈, 레이놀드, 그리고 니콜라스. 그들은 벳시아가 반갑게 인사하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드 부르그 가의 형제들은 모두 예의 바르고 반짝이는 갑옷처럼 명예로운 사내들이었다. 만약 내가 한때 사이먼을 비웃고 조롱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안다면, 아마도 나를 그토록 반기지는 않을 거야. 드 부르그 형제들은 배불리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벳시아는 음식을 가지고 깨작거릴 뿐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고, 사이먼의 가족들을 보자 허전함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포기를 한 사람은 바로 나야. 이들 사내들의 가족이 되는 것보다 나의 자유가 더 소중했으니까...벳시아는 마침내 음식을 밀어놓았다. 그러자 오른쪽에 앉아 있던 드 부르그 형제가 그녀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말을 걸어왔다.

    [뭐든 도와드릴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아가씨.]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사이먼 형은 거칠고 성질도 대단하지만 또한 매우 헌신적이랍니다.]

    벳시아는 부드럽게 말을 건 사람의 말을 믿고 싶은 유혹을 느끼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조프리.]

    그녀가 겨우 대답했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보았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죠. 아마 두 사람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요.]

    그가 점잖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머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머문 이유가 바로 그것이란 말인가? 나의 고통을 더 늘여 주기 위해서? 벳시아는 궁금했다. 그녀는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벳시아는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무뚝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만 떠나세요. 당신들이 머무를 이유가 없어요.]

    벳시아는 드 부르그 형제들이 말에 올라타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창문을 등지고 섰다. 그녀는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던스탄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앤스퀴스를 구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사이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형제들 기운데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직도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모두 떠나는 게냐?]

    아버지의 쉰 목소리를 들은 벳시아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아직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아는 그녀는 침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네. 그들은 곧 모두 떠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미안하다, 내 딸아.]

    그녀의 아버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벳시아는 무릎에 손을 얹었다. 지금 입은 노란색 드레스가 자신의 눈에도 낯설었다.

    [지금까지 말씀하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아버지, 이제 그만 하세요.]

    [그래.]

    버넬 경은 중얼거리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너의 기사는 내가 너를 괴롭혔다고 비난하더라.]

    [사이먼이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벳시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래.]

    버넬 경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가 옳다. 널 귈다에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그때 난 네 어머니의 죽음으로 제정신이 아니어서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 상태에 있던 나에게 귈다는 널 잘못 키웠다고 비난했고, 난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 후회를 했지. 네가 몹시 그리웠거든...]

    벳시아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절 그리워하셨다고요? 그럼 왜 저를 다시 데려가거나 제가 보낸 편지에 답장하시지 않았죠?]

    아버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네게서 아무런 편지도 받지 못했단다, 벳시아. 난 네가 새로운 생활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

    귈다였어. 벳시아는 화를 내기에 너무나 지친 상태였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귈다가 편지를 가로챘군요.]

    [그렇다면 내기 보낸 편지도 보여 주지 않았겠군, 그렇지?]

    버낼 경이 물었다. 벳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고통스러웠겠구나, 내 딸아. 모두 내 잘못이다.]

    [아니에요.]

    벳시아가 중얼거렸다.

    [저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짐작해야 했어요. 그러니 제 잘못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괜찮아요. 잘 먹고 잘 입고 잠자리도 따스했어요.]

    벳시아는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브리스의 일은 모두 내 책임이야. 난 그가 머무르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 마침내 너도 돌아왔으니 말이다.]

    버넬 경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벳시아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사이먼이 그녀에게 한 조각의 심장이나마 남겨 놓았음을 깨달았다.

    [난 네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겠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벳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네가 듣고 싶어하던 말이야, 그렇지 않아, 벳시아? 너는 늘 자유를 원했잖아?

    [하지만 너의 기사는 달라.]

    아버지가 말했다.

    [난 네가 그의 청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주길 바란단다. 그는 좋은 사람이야. 게다가 강인하고 명예로운 기사야.]

    벳시아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는...사이먼의 도움에 무척 고마워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와 결혼할 수는 없어요.]

    아니, 어떤 남자와도 결혼할 수 없어요. 벳시아는 자신이 자연의 돌연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로서의 인생에 걸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을 아버지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아버지는 그녀에게 남자들만의 기술을 가르친 자신을 탓할 것이다. 벳시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저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요. 물론 저를 존경하는 척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흔해빠진 아내의 역할이에요. 그러고 저는 그렇게 변할 수 없어요.]

    버넬 경은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사이먼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제가 브리스를 죽인 후, 그는 제게 원하는 것을 분명히 밝혔어요.]

    [내 딸아, 그것은 네가 지닌 기술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너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니?]

    버넬 경이 물었다.

    [자존심이 있는 남자라면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너도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진 것을 보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되지 않니?]

    벳시아가 멍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사이에 버넬 경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녀는 사이먼의 분노를 그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넬 경은 정곡을 찔렀다. 벳시아는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방을 향해 급히 발을 옮겼다. 그녀는 부주의하게 광산으로 들어간 사이먼의 행동에 대해 미친 듯이 화를 내었던 것을 기억했다. 벳시아는 자신을 돌보지 않던 그에게 화를 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사랑했다. 그녀와 사이먼은 많은 면에서 비슷했다. 우리는 서로를 걱정해서 화를 낸 것일까? 방에 들어간 벳시아는 아버지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사이먼과 함께 한 번도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미래를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음을 깨달았다. 아주 오래 전에 죽어버렸다고 믿었던 흥분과 희망이 솟구쳤다. 벳시아는 더 늦기 전에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드 부르그 형제들은 모두 가버리고 없었다. 사이먼은 한때 숲 속에서 느꼈던 평화로운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앤스퀴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틀 밤을 고통 속에 지새운 사이먼은 마침내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을 벳시아와 맺어 주려는 형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은 던스탄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고, 그 역시 빨리 떠나고 싶다고 말이다. 던스탄은 동정심을 표현하면서 동생의 뜻에 동의했다. 벳시아는 그를 보러 오지 않았다. 물론 사이먼은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했지만, 주인의 의지를 배반한 마음 일부에서는 그녀를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젠 너무 늦었어. 커다란 군마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앤스퀴스는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 벳시아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여자의 존재가 떠도는 숲 속을 저주했다. 던스탄은 사이먼의 바람과는 달리 숲 속으로 난 길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사이먼은 참을 수 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형제들과 일행이 앞서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나뭇잎 속에서 자신을 보고 웃었고, 자신과 싸움을 벌였다. 벳시아와 같은 여자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사이먼은 걸 건너에서 던져진 것처럼 보이는 잡목 한 묶음 앞에 멈추어 서서 바보처럼 그것을 바라보았다. 왜 던스탄과 다른 사람들은 장애물을 치워버리지 않았을까? 일행이 지나간 뒤에 떨어진 것일까? 그 순간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사이먼은 위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밤색 옷을 입고 낮은 가지에 앉아 있었다. 사이먼은 깜짝 놀라 눈만 끔벅거렸다.

    [멈춰 서서 이곳에 온 용건을 말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이먼은 마치 고통을 느끼는 듯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그는 갈망하는 눈길로 남자의 옷을 입은 나긋나긋한 몸매를 살펴보았다. 강한 팔에는 활이 들려 있고, 화살은 정확히 그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요. 천천히, 그리고 당신의 무기를 내려놓아요.]

    그녀가 명령했다. 사이먼은 분통을 터뜨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닥 희망으로 전율이 몸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사이먼은 안장에서 내려와 가까운 바위 위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단검도.]

    그녀가 말했다. 뭐라고?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놀랍게도 그녀는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바로 앞에 나타났고, 사이먼은 자신의 손목에 로프가 김긴 것을 보았다. 쉽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뭘 하는 거요?]

    그가 물었다.

    [앉아요.]

    벳시아는 명령하며 그를 그루터기에 주저앉혔다.

    [우린 이야기를 해야 해요, 사이먼 드 부르그.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당신을 보내주지 않을 거예요.]

    사이먼은 이상하게도 친밀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나와 결혼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만약 당신이 유순하고 복종적인 아내를 원한다면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과 같은 전사예요.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없어요.]

    사이먼은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 물론 그 역시 바보스럽고 쓸모 없는 여자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여자라면 얼마든지 널려 있다. 하지만 나의 찬사와 흥미를 잡아끈 여자는 단 하나야. 그리고 그 여자는 지금 칼을 빼어든 채 눈앞에서 낯익은 자세로 서 있었다.

    [바보 같으니! 나는 바로 당신을 원하는 거요, 다른 여자가 아니란 말이오.]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가 변하길 원하지 않나요?]

    그녀가 다그쳤다.

    [절대 아니오!]

    그가 으르렁거렸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묶여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빼내려고 꼼지락거렸다.

    [당신의 부하들과 함께 훈련을 받도록 해주겠어요?]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요란스런 요구를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하지만 그녀가 다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한 그렇게 해줄 수 있었다. 훈련은 그녀의 근육을 잘 유지시켜 줄 테니까, 그는 벳시아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좋소.]

    그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할 말이 있어요, 사이먼. 나에게 명령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벳시아는 강조하듯이 그의 심장에 칼끝을 겨누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벳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사이먼은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좋아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아직도 날 원한다면 말이에요.]

    [당신을 원하오.]

    사이먼이 대답했다.

    [이제 이 밧줄을 풀어 주시오.]

    그녀는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좀 곤란하군요. 이 상태도 괜찮아 보이니까요.]

    사이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를 나뭇잎 쌓인 바닥으로 쓰러뜨리고는 그를 타고 올라앉았다.

    [내가 항상 갑옷을 입고 다니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요?]

    벳시아는 그의 튜닉을 가슴패기까지 들어올리고 손을 넣으면서 놀려댔다.

    [그리고 당신이 묶여 있는 동안 고백할 말이 있어요.]

    그녀는 단단해진 그의 남성 위에 올라앉았다.

    [숲 속에서 당신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어요.]

    사이먼은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밧줄을 마구 잡아당겼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솟구치는 동안 그녀가 몸을 기대왔다.

    [그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사이먼은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가슴을 애무하자 그는 마치 불 위에 올라앉은 기분이었다.

    [날 풀어 주시오, 벳시아.]

    그가 명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고, 바지 끈을 잡아당겼다.

    [벳시아...]

    그가 경고했다.

    [불쌍한 사이먼! 정말 잔뜩 긴장해 있군요.]

    그녀가 말했다. 화가 난 사이먼은 그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알고 있죠.]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애무를 계속했다.

    [날 놓아 주시오, 벳시아.]

    사이먼이 다그쳤으나 이미 늦었다. 그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이먼은 한참 동안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다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날 놓아 주시오, 벳시아.]

    벳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길로 그를 보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당신이 덜 오만하고 좀더 순종적이면 좋겠어요.]

    그들은 노란 여름 햇살이 들판에 내리쬐는 가운데 앤스퀴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이먼의 형제들은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배더슬리에 남았다. 비록 벳시아는 정성 들여 만든 우아한 드레스를 입었지만, 사이먼은 그녀가 늘 입고 지내던 튜닉과 바지를 입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사이먼은 그녀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지내길 바랐다. 바로 오늘밤처럼 말이다. 사이먼은 그들이 얼마나 빨리 장원 바깥과 커다란 홀에서 어슬렁거리는 하객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홀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그는 첫날밤을 어서 맞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는 법적으로 진짜 첫날밤을 기다리며 애타는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더 기다려야 힐 것 같았다. 사이먼은 던스탄을 비롯한 형제들이 건넨 축하의 말을 들으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형제들이 해주는 축하보다는 그들의 조롱에 더 익숙했다. 게다가 던스탄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뭐가 그렇게도 좋죠?]

    스티븐이 물었다.

    [나는 사이먼을 배더슬리에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던스탄이 말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사이먼의 등을 애정 어린 손으로 토닥거렸다.

    [이제 너는 캠피온으로 가지 않을 테니 나의 영토를 돌보도록 해라.]

    사이먼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있을 곳은 앤스퀴스입니다.]

    [하지만...]

    늑대의 얼굴을 본 사이먼은 빙그레 웃었다.

    [배더슬리는 너무 커요.]

    그는 당황스러워하는 형의 모습을 즐겼다.

    [사람들도 너무 많고요. 플로리안은 아마 한 달 만에 나를 미치게 만들 겁니다.]

    [하지만...]

    던스탄은 반박하기 위해 허둥거렸지만 사이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배더슬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냐. 그는 더 이상 형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만의 꿈과 욕망을 가지고 싶었다. 그것은 앤스퀴스와 벳시아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사 아내 이외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 되도록 내버려두자,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누가 나를 위해 배더슬리를 돌보지?]

    던스탄은 옆에 있는 드 부르그 형제들을 둘러보았다. 예상한 대로 스티븐은 못 들은 척하며 컵만 응시했고, 레이놀드는 물러나서 아픈 다리를 문질렀다.

    [내가 하겠어요, 던스탄 형님, 만약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에요.]

    로빈이 나섰다. 사이먼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비록 자신보다 일곱 살이 어렸지만 로빈은 이제 스무 살이 지나 훌륭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리고 그 나이 때의 다른 드 부르그 형제들만큼 무기를 잘 다루었다. 하지만 장난을 좋아하는 그가 의무를 잘 수행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던스탄에게 의심스런 시선을 보냈으나 던스탄은 별로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고맙다, 로빈. 네가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겠다. 너는 물론 할 수 있어. 그리고 사이먼이 가까운 데 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게다.]

    던스탄이 말했다. 그는 사이먼을 노려보다가 곧 능글맞은 미소를 보냈다.

    [형제가 옆에 있다는 것이 불편할 것 같으냐?]

    [하! 난 누구하고도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아요. 모두들 나에게 나쁜 일만 안겨 주니까요.]

    사이먼이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혼자만의 길을 가려는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늘 함께 있었다.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는 아버지의 걱정과 조프리의 훈계, 던스탄의 충고를 고맙게 생각했다. 또한 스티븐의...사이먼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사이먼의 일부였다. 갑자기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애정이 솟구쳤다.

    [사실 가장 다급한 순간에 조프리의 경고가 떠오르더군요.]

    사이먼이 인정했다. 여섯 개의 검은 머리통이 깜짝 놀란 듯 움찔했다. 특히 조프리가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말은 절대로 듣지 않았잖아!]

    조프리가 투덜거렸다. 형제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사이먼은 조프리를 보았다.

    [그래도 얼굴을 보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던걸.]

    [그렇다면 언제 우리는 다시 형의 찌푸린 얼굴을 보게 되는 거죠?]

    스티븐이 묻자 사이먼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넌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새 신부를 보여 드려야지.]

    던스탄이 말했다.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때 우리 모두 집으로 오길 바라실 게다. 물론 그렇게 하라고 부탁하지는 않으시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손주가 또 하나 태어나길 바라실 거야. 그러려면 아마 부지런히 서둘러야 할걸.]

    스티븐은 어깨를 으쓱하며 벳시아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다른 결혼식도 보고 싶으실 텐데...]

    조프리가 빙그레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네 명의 형제들은 마치 그가 칼이라도 휘두른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조프리는 아직도 결혼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의 약점을 정곡으로 찔렀다.

    [그래.]

    던스탄은 안절부절못하는 동생들의 얼굴을 보며 능글능글 웃었다.

    [다음은 누구 차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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