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15화 (15/16)
  • 15.

    사이먼은 형제들의 모습을 보자 끓어오르던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그의 성질이 잘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심지어 그의 형제들조차 요즘 들어 더 험악해진 자신의 화내는 모습을 보면 놀랄 것이다. 그러나 사이먼은 혼자 브리스를 따라가는 벳시아를 흘끔 본 순간부터 분노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좌절감이 그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적들이 달려오는 바람에 그녀를 부를 수도, 뒤를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는 맞부딪친 사내 두 명을 즉시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 다른 적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싸움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던 사이먼은 처음으로 전투의 순간을 저주했다. 만약 벳시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사이먼은 마치 가슴을 도끼로 맞은 듯한 고통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곁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벳시아가 적을 뒤쫓아갔다는 사실만이 그를 괴롭혔다. 다칠지도 몰라. 어쩌면 죽을지도...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불안감이 그를 갉아먹었다. 사이먼은 미친 듯이 싸웠고, 싸움은 곧 끝이 났다. 브리스에게 직접 고용된 사람을 제외하면, 주인의 군주와 딸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브리스의 부하들이 쓰러지자마자 무기를 내려놓았다. 사이먼은 얼른 벳시아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머리 속에는 그녀에 관한 온갖 불길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펄민과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사이먼은 그녀를 캠피온에서 가장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해결된 다음에는 그렇게 하리라고 맹세했다. 만약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이먼은 정지한 듯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순간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핏속에서 마구 끓어오른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조금이라도 알까? 브리스는 필사적이었을 것이고 그런 남자는 두 배나 더 위험했다. 사이먼의 불안감은 브리스의 시체를 목격한 뒤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그에게서 천둥 같은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그는 그녀를 마구 흔들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싶었다. 사이먼은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는 그런 감정에 익숙한 사내가 아니었다. 너무나 강하게 밀려드는 감정 속에서, 사이먼은 그녀에게 어떤 것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사이먼은 옆에 서서 형제들이 도착하는 것을 바라보는 벳시아를 흘끔 보면서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말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그렇게 부주의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도저히 허락할 수 없어, 사이먼은 점점 더 커지는 불안 속에서도 말없이 맹세했다. 벳시아는 그가 자신을 소유할 수 없노라고 말했지만, 사이먼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곧 그녀에게 증명해 보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냐. 분노가 모두 소모되어 버린 지금, 그는 이 상황을 더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벳시아...]

    사이먼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벳시아는 이미 저만큼 빠져나가 계단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걸 거야. 사이먼은 결론을 내리고 갑옷으로 감싼 가슴을 손으로 문질렀다. 한동안 그녀의 뒤를 쫓아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사이먼은 벳시아가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역시 형제들을 만나야 했다. 사이먼은 참을성 없이 투덜거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가 바깥에서 커다란 홀로 들어오는 입구로 나서는 동안 형제들은 말을 타고 안뜰로 들어왔다. 던스탄 형과 조프리, 그리고 나머지 동생들도 모두 캠피온에서 왔다. 사이먼은 형제들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벳시아와 격렬한 대화를 나눈 뒤라서 그런지 형제들이 반가웠다. 던스탄이 그를 포옹했을 때 사이먼은 처음으로 형에게 경쟁심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그 순간을 더 연장하고 싶었다. 형의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밴 애정이 너무나 돈독했는지 오히려 던스탄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아무래도 그 바보 같은 집사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늑대가 중얼거렸다. 사이먼이 무슨 뜻이냐고 던스탄에게 묻기 전에 조프리가 그를 포옹했기 때문에 질문을 할 기회를 잃었다. 아버지 캠피온 백작을 제외하곤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사이먼은 가장 어린 니콜라스가 무척 자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두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사이먼이 형제들을 보며 말했다.

    [너의 마지막 편지를 보고 걱정을 했다. 나는 마리온이 우리 집안에 가져온 이 골치 아픈 영지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던스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마침 조프리가 엘렌과 웨섹스를 방문했는데,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우더군.]

    [그럼 제수씨를 형수님과 함께 두고 온 거야?]

    사이먼이 묻자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렸고 자신의 기괴한 아내에게 이상스럽게도 신경을 쓰는 조프리는 신경질을 부렸다. 사이먼은 몸을 돌려 다른 형제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너...스티븐, 레이놀드, 로빈, 니콜라스?]

    스티븐은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했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오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형에게 우리가 필요하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로빈이 설명했다. 평소 같으면 불쾌하게 여겼을 테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의 염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런데 대체 무엇과 싸워야 하는 거죠?]

    니콜라스가 물었다. 반짝거리는 새 갑옷을 입은 그는 싸움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사이먼은 무엇인가가 목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싸움이 크게 번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사로서의 경험을 쌓기에 니콜라스가 너무 어린 것처럼, 또한 사이먼은 자신이 갑자기 너무 늙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싸움은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군.]

    조프리가 안뜰을 살피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싸움이 없단 말인가요? 이건 불공평해요!]

    니콜라스가 항의했다.

    [그리고 형도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걸.]

    그가 비난을 퍼부으며 사이먼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아프다고? 사이먼은 멍청이 같은 집사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나는 아프지 않아!]

    사이먼이 벌컥 화를 냈다.

    [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스티븐이 말했다.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양 술을 가져 오라고 소리쳤다.

    [사이먼 형은 약간 창백해 보이기는 해. 어쨌든 말해 봐요, 형의 내장을 뒤집어놓았다는 여자는 어디에 있죠?]

    사이먼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동생들을 마구 두들겨 패주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해결해야 할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많았다. 브리스와 그의 부하들을 묻어 주어야 하고, 살아남아 집안 어딘가에 숨은 그의 심복들도 색출해야 했다. 버넬 경이 살아 있다면 건강 상태는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벳시아를 위해...사이먼은 스티븐에게서 몸을 돌리고 부하들을 불렀다. 다른 형제들은 사이먼 모르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정말로 병이 든 모양이군.]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스티븐은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사이먼은 언제나 놀려대기 좋은 형제였다. 그는 별것 아닌 말을 듣고도 늘 흥분을 하고 형제들과 엎치락뒤치락 싸우기 일쑤였다. 그는 타고난 싸움꾼으로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말싸움을 하다 말고 물러서다니...스티븐은 형이 분명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사이먼에게 대단한 변화가 생겼든지 플로리안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 불굴의 전사가 사랑에 빠졌을지도...스티븐은 하인에게서 컵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솔직히 이번 여행에는 따라오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흥미가 발동했다. 그는 근처에 있는 다른 의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몸을 기댔다. 앞으로 보게 될 재미난 일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피어났다. 벳시아는 그를 피했다. 비록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이긴 했지만 사이먼은 그것을 눈치챘다. 그는 싸움이 끝난 뒤 뒷정리를 지시하고 광부들에게 지하 터널을 다시 메우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던스탄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늑대는 즉시 궁수들을 용서했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더 이상 산적이 아니었다. 사이먼은 그들이 모두 잘 살아가길 바랐다. 사이먼은 벳시아가 아직도 아버지와 단둘이 있다는 말을 하인한테서 전해 들었다. 장원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브리스는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늙은 남자에게 독을 먹여 왔다. 그래서 버넬 경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고, 판단력도 흐려졌다. 아마도 브리스는 버넬 경의 목숨만 겨우 유지시켜 그가 아직도 앤스퀴스를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이먼은 어떤 종류의 독약이 사람의 정신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하지만 처음에 브리스를 맞아들이고 자신의 딸을 짐승 같은 사내와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한 버넬 경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저녁식사를 모두 마치고 하인들이 형제들을 위해 잠자리를 마련하고 나자, 사이먼은 어디서 잠을 자야 할지 망설여졌다. 저녁 내내 형제들은 자신을 흘끔흘끔 훔쳐보며 벳시아를 보여 달라고 소리 없이 강요했다. 하지만 사이먼은 벳시아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날 아침에 화를 낸 것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죄책감을 느꼈고, 그런 감정은 벳시아와의 대면을 더욱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형제들이 휴식을 취하러 모두 올라가자 사이먼은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스티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벳시아가 있으리라고 추측되는 주인 침실로 향했다. 어린 시절에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 앞에 불려갈 때처럼 긴장되었다. 사이먼은 문을 지키고 선 호위병들을 보고 투덜거렸다. 비록 벳시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한 병사들이기는 해도 화가 치밀었다. 지금 그는 앤스퀴스를 탈환했고, 더 이상 복도에 병사들을 배치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특별히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은 말이다.

    [버넬 가의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이먼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병사는 울상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본 사이먼은 더욱 화가 났다.

    [날 들여보내란 말이다, 이 멍청아!]

    그가 다그쳤다. 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영주님.]

    그가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저...그러니까 영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뭐야?]

    사이먼이 고함을 질렀다. 그는 비싹 마른 병사가 하는 말을 믿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서 벳시아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어. 사이먼은 그를 옆으로 밀어내며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병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이제야 조금 현명해진 것 같군. 사이먼은 혼잣말을 중얼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벳시아는 머리가 하얀 남자가 베개에 등을 기대고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벳시아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촛불에서 나온 빛이 주변을 밝혔다. 벳시아의 머리카락은 그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사이먼은 가슴과 몸의 곡선을 드러낸 옷을 입은 그녀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입 속이 갑자기 마르는 것 같았다.

    [나가요!]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는 휴식을 취해야 한단 말이에요. 보면서도 모르겠어요?]

    [누구지, 벳시아?]

    늙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사이먼 드 부르그예요, 아버지. 배더슬리 영주의 동생인 기사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이곳을 되찾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그녀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사이먼은 마치 그녀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린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렇지, 나를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야? 사이먼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가라앉혔다.

    [나는 사이먼 드 부르그요.]

    사이먼은 그녀의 아버지를 보며 이젠 자신의 주장을 밝힐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의 딸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오.]

    버넬 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사이먼은 낮게 들이마시는 벳시아의 숨소리를 들었다. 벌떡 일어나는 그녀의 몸 동작이 전사답게 유연했다. 사이먼은 저도 모르는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도.

    [안됐지만 당신은 실수를 하고 있는 거예요.]

    벳시아가 차갑게 말했다.

    [아버지, 그에게 청혼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사이먼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낮게 투덜거렸다. 그는 화가 났다. 그녀를 잡고 방금 내뱉은 말을 취소할 때까지 흔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충동에 휘말릴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사이먼은 길고 떨리는 숨만 내쉬었다. 지난번 그녀가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녀에게 애걸하지 않을 거야. 나는 드 부르그 가 사람이고, 약속을 지키는 사내야. 지금은 퇴각할 시기야. 사이먼은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리는 자존심을 그러모으려고 노력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홱 돌려 방에서 걸어나갔다. 스티븐은 아직도 홀에 앉아 있었다. 비록 그들은 한 번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지만, 그가 함께 술 한잔하자고 했을 때 사이먼은 반갑게 받아들였다.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벳시아의 표정 없는 얼굴을 지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괜찮았다. 그녀는 그를 또다시 피했다. 이런 상태에 익숙해져야 해, 사이먼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함께 지내고 나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만약 벳시아가 앤스퀴스를 되찾기 위해 나를 이용한 것이라면? 그는 끙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술을 들이마시고 스티븐이 술을 더 따르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비록 처음부터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지만 사이먼은 자신이 한 번도 벳시아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뿐, 벳시아가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형이 쓰러지는 것을 상상한 적이 없어.]

    스티븐이 중얼거렸다. 사이먼은 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그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어 주고 영혼을 달래줄 술이 담긴 컵을 집어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늘 여자들을 많이 사귀어 보라고 말했잖아. 던스탄 형이나 조프리도 마찬가지야. 지금 자신들을 좀 보라구!]

    스티븐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이먼은 혼자 중얼대며 컵을 앞으로 내밀었고, 스티븐은 술을 부었다.

    [집사가 형이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을 때 우린 모두 웃어 버렸어. 하지만 그가 설명을 시작했을 때에는...]

    사이먼은 동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라고?]

    스티븐은 깜짝 놀라며 뒤로 기대어 앉았다.

    [배더슬리의 집사가, 그러니까 이름이...]

    [플로리안.]

    사이먼은 중얼거리면서 지독히도 참견하는 집사를 어떻게 혼내 주면 좋을까 생각했다. 비가 오던 날, 오두막집에서 사랑을 나누던 기억들이 맹렬하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감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나에게 애원을 했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베개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잠에서 깨어났지. 그의 목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가 주던 뜨거운 쾌락과 취한 듯한 즐거움이, 낮고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벳시아는 여자이며 전사였고, 연인이자 친구였다.

    [지금은 너무 늦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형을 동정하는 것뿐이야.]

    스티븐이 중얼거렸다.

    [나는 어떤 사람도 사랑 하고 싶지 않아.]

    사이먼은 동생의 말을 듣고 고개를 홱 들었다. 정말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일까? 내가 정말 벳시아와 사랑에 빠진 것일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사이먼은 벳시아가 처음 자신을 공격한 이래로 알게 된 것과 똑같은 종류의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스티븐은 정곡을 찔렀어. 그리고 던스탄이 나와 똑같은 일로 우울해하는 모습도 보았고, 괄괄한 엘렌 피츠휴가 사라졌을 때 조프리가 아기처럼 우는 것도 본 적 있어. 설령 가슴이 타는 듯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사이먼은 벳시아 때문에 울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나는 다른 형제들보다 강해, 심지어 늑대보다도 강해. 수많은 전쟁에 참가해서 이겼어. 여자 산적 하나가 나를 괴롭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앤 스퀴스와 배더슬리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면 에드워드 왕의 군대에 들어갈 계획을 추진할 거야. 결코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한동안 술을 더 마시게 되겠지. 사이먼은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든 그는 앤스퀴스의 홀에 놓인 테이블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늑대가 고함을 질렀다.

    [글쎄요,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죠.]

    스티븐의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던 사이먼은 의자 옆에 무릎을 찧었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다리보다 통증이 더 심한 머리로 손을 올렸다.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가 술을 이기지 못한 겁니다.]

    스티븐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넌 대체 사이먼에게 무슨 짓을 한 게냐?]

    던스탄의 목소리를 들은 사이먼은 누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보기 위해 몸을 홱 돌렸다. 다른 형제들이 모두 뒤쪽에 늘어서 있었다. 사이먼은 다시 신음 소리를 냈다.

    [봤나요?]

    스티븐이 혀를 끌끌 찼다.

    [슬픈 일이죠. 하지만 나는 우리가 모두 같은 재능을 나누어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넌 사이먼이 이곳에서 밤을 새우도록 내버려둔 거니?]

    던스탄이 화를 내며 다그쳤다. 스티븐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잠자리를 찾는 것도 힘드니까요. 그리고 사이먼 형은 술잔에 얼굴을 박은 채 있는 것이 더 편안해 보였고...]

    마침내 동생의 계략을 깨달은 사이먼은 비틀거리면서도 스티븐의 말끔한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몸이 흔들리고 머리가 마구 쑤셨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좀더 명확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사이먼은 불안정하게 눈을 깜박이면서 드 부르그 가문의 악한을 살펴보았다. 오늘 아침에는 전혀 쓸모 없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목욕을 해라.]

    던스탄은 사이먼을 보고 충고했다.

    [냄새가 지독하군! 네 여자에게 그런 꼴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사이먼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혀가 딱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몸을 바로잡고 천천히 돌아서서 형제들을 차례대로 노려보았다.

    [내 여자는 없어.]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호! 그건 무슨 뜻이야?]

    로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런...]

    조프리가 중얼거렸다. 던스탄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래서 갑자기 술을 마신 게로군.]

    [하지만 집사 말로는...]

    니콜라스가 말을 꺼냈다가 사이먼의 분노 서린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이먼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시선을 교환하는 형제들을 보았다. 그러나 상세하게 설명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자상하게 신경을 써준 형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목욕을 할 겁니다, 던스탄. 하지만 그만 여길 떠나고 싶으니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

    [떠난다고?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조프리가 말했다. 사이먼은 대꾸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렇지 않나요, 던스탄?]

    조프리가 던스탄을 슬쩍 찔렀다.

    [무슨? 오, 그래.]

    던스탄이 대답했다.

    [우리는 버넬 경이 충분히 회복할 때까지 떠날 수 없어. 적어도 2, 3일은 있어야 하고 더 걸릴 수도 있지.]

    사이먼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던스탄의 표정은 단호했고, 사이먼도 형과 다툴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계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며칠 동안이라고? 그는 이곳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사이먼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순간 그는 자신이 사용할 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던스탄의 지시를 받은 하인이 그를 향해 서둘러 달려왔다. 아마 형제의 방 하나를 나누어 쓰게 될 것이다. 이 빌어먹을 장소를 되찾기 위해 싸운 사람이 바로 나 사이먼인데도 말이다! 혼자 투덜대던 사이먼은 아래쪽 홀에서 이어진 대화를 듣지 못했다.

    [좋아요, 양보하죠. 하지만 좋은 성이 있는데 우리가 왜 이런 조그만 장원에서 머물러야 하죠? 그다지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작아요.]

    스티븐이 던스탄에게 말했다.

    [그래요, 왜죠?]

    로빈이 물었다.

    [날 보지 마. 이것은 조프리의 아이디어야.]

    던스탄이 투덜거렸다.

    [사이먼 형을 보지 못했어? 아주 절망에 빠져 있다고!]

    조프리가 말했다.

    [우린 사이먼 형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주어야 해.]

    [사이먼 형을 돕는다고?]

    스티븐이 코웃음을 쳤다.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아?]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어젯밤 사이먼 형에게 술을 그렇게 많이 준 거지?]

    조프리가 반박했다.

    [뭔가 잘못된 거야.]

    스티븐이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우리에게 원한 게 그거야? 우리 형제에게 짝을 찾아 주는 것?]

    로빈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그건 배반이나 다름없어.]

    [만약 네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게다.]

    조프리가 말했다.

    [말도 안 돼.]

    레이놀드가 투덜거렸다.

    [불쌍한 사이먼 형. 정말 안됐어.]

    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동감이야.]

    니콜라스가 다른 형제들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아마 사이먼 형의 등에 칼을 꽂는 게 더 나을걸.]

    스티븐이 컵으로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그 여자는 어디에 있는 거지? 불굴의 전사를 쓰러뜨린 여자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하군.]

    그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 강력한 군주이신 던스탄 형님, 그 여자를 불러올 사람은 형님뿐입니다.]

    스티븐이 놀려대었다. 던스탄이 화를 내며 으르렁거렸지만 스티븐은 더 커다랗게 웃었다.

    [자, 이제 불러 와요.]

    그가 말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머리가 쑤시지 않았다. 그는 조그만 방에 달린 좁은 창문을 흘끔 보았다. 목욕을 한 다음 그는 잠에 빠져들었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보아 저녁 식사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상관없어. 그는 형제들이나 앤스퀴스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고통이 다시 몰려들었다. 마치 새로운 상처가 생긴 듯했다. 사이먼은 혼자 투덜거리면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동을 무시하려고 노력해도 상처는 어떤 것보다 더 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먼은 잊고 싶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움직였다. 이제 다시는 제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했던 발 밑의 세계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기대감이 앞으로 내달았다. 벳시아가 아닐 거야, 그는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래, 맞았어. 그의 날카로운 눈길 안에 들어온 것은 기가 팍 죽은 하인이었다.

    [버넬 경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주님이 좀 오셨으면 좋겠답니다.]

    하인이 말했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벳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으므로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주인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문을 지키고 선 병사들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잠깐 망설였다. 차라리 광산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편이 더 나을 듯했다. 정말이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 했다. 방은 어둠침침하고 조용했으며, 베개에 몸을 기댄 늙은 남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이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어쩌면 실망일지도 모르지.

    [오, 드 부르그 영주님!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발 가까이 오셔서 옆에 앉아 주십시오. 제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요.]

    버넬 경은 쉰 목소리로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이 든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생명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버넬 경이 낮은 의자에 앉은 사이먼에게 말했다. 사이먼은 그곳에 앉아 있던 벳시아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 딸이 돌아오도록 도와주셨다는 겁니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신은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소. 나는 내 형님의 가신으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늙은 남자는 쿨룩거리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 그의 엷은 갈색 눈동자가 벳시아와 닮아 있었다.

    [당신의 많은 도움에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제 딸과 언제 결혼식을 올리실 겁니까?]

    사이먼은 나오는 욕설을 씹어 삼키며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실수요. 당신도 그녀가 한 말을 들었을 거요. 그녀는 날 거절했소.]

    사이먼은 뭔가 뜨거운 것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드 부르그가 그리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테죠?]

    늙은 남자의 물음에 사이먼은 움찔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늙은이의 주름진 얼굴을 살펴보았다.

    [게다가 드물게 괜찮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사이먼은 주먹 쥔 두 손을 옆구리에 꼭 붙이고 끓어오르는 성질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자신의 딸을 내버린 남자에게서 나온 말치고는 이상하군요. 게다가 당신은 그녀를 브리스 스컬베인 같은 쓰레기와 결혼시키려고 하지 않았소?]

    사이먼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자신의 조롱을 들은 늙은 남자의 얼굴에 스쳐지나간 그림자를 보자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물론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버넬 경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그것을 바로잡고 싶어할 겁니다. 그럴 수 없겠습니까?]

    그가 지긋한 시선으로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그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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