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14화 (14/16)
  • 14.

    [공격이다!]

    커다란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지자 플로리안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공격? 무슨 공격?]

    그는 소리를 지른 소년에게 다그쳤다. 소년이 자신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자 플로리안은 옷자락을 붙잡고 달려가는 소년을 멈추어 세웠다.

    [오! 어서 놔주세요, 플로리안 집사님. 제발요!]

    소년은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 그런 말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놀라게 만드는지 이유를 말하면 놓아주겠다.]

    플로리안이 말했다.

    [우리는 곧 공격을 받게 돼요.]

    그가 주장했다.

    [제 동생이 봤대요, 무장한 병사들이 말을 타고 북쪽에서 다가오는 중이랍니다!]

    플로리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네 이름이 테드릭 맞지?]

    그가 묻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그 일행이 배더슬리를 향해서 온다고 해도, 반드시 이곳을 공격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렇게 마구 소리를 지르기 전에 좀더 확실하게 알아봐야지. 이제 문으로 달려가서 정말로 무슨 일인지 알아보거라. 그리고 내게 보고를 해. 즉시!]

    공식적인 명령을 받은 소년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플로리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테트릭의 동생이 정확하게 무엇을 본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만약 방문객이 오는 중이라면 접사인 그는 아무것도 준비해 둔 것이 없고, 저녁 식사도 모두 끝마친 뒤였다. 발을 돌린 그가 보초를 막 부르려는 순간, 켄틴이 의미심장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여기에 있었군, 집사!]

    그가 말했다.

    [누가 오는 겁니까?]

    플로리안이 다짜고짜 물었다.

    [나는 누가 온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누가 우릴 공격하는 건가요? 그 건방진 브리스는 아니라고 말해 주십시오! 그가 숲 속의 산적들을 없애기 위해 고용한 용병들이 아닙니까? 그가 감히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이곳으로 그들을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켄틴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레오핀이 느릿느릿 다가왔다.

    [용병도 아니고 침략자도 아니오. 지금 오는 사람은 웨섹스의 늑대와 그의 일행이오.]

    기사가 말했다.

    [창고에 식료품들이 많이 남아 있길 바라오. 그들을 모두 먹이려면 무척 많이 필요할 테니까.]

    [늑대...]

    플로리안이 중얼거렸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자신의 동생이 사라진 것을 알고 왔을지도 모르오.]

    켄틴이 아는 척을 했다. 플로리안은 초조해졌다.

    [분명히 말씀드렸죠. 사이먼 드 부르그 영주님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 이곳에 안 계실 뿐이죠.]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되었소?]

    켄틴이 물었다.

    [한 2, 3일 됐을 겁니다.]

    플로리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켄틴도 잘 알다시피 그들은 사이먼에게서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플로리안은 두 손을 맞잡고 쥐어짜듯 비틀었다.

    [오, 맙소사, 남작님께 뭐라고 말씀드리죠?]

    그는 마치 구조대를 기다리는 듯 문을 응시했다. 그러나 곧 그는 웨섹스의 늑대, 던스탄 드 부르그에게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늑대와 그의 부하들은 갑옷을 철거덕거리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홀로 들어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커다란 몸집으로 눈에 띄는 웨섹스의 남작은 자신의 별명답게 모여 선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동생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사이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플로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우린 영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듣지 못해서...죄송합니다만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즉시 방을 준비하고 늦게나마 저녁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자네! 자네가 이곳의 집사인가? 플로리안이라는?]

    늑대가 성급하게 물었다. 그는 사이먼보다 크고 태도도 더 당당했다. 그의 동생은 냉정한데 반해 던스탄은 사납고 훨씬 더 위험스러웠다.

    [그렇습니다.]

    플로리안은 처음으로 배더슬리의 살림을 맡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동생은 어디에 있나?]

    늑대가 다그쳤다.

    [영주님,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만...]

    플로리안은 상대방을 달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늑대는 쉽게 달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녹색 눈동자로 방안을 훑어보는 태도가 사이먼과는 많이 달랐고, 화난 목소리도 으르렁거리는 듯이 들렸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영주님의 동생분은 가셨습니다.]

    톨킬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플로리안은 멍청하다시피 한 그의 무모한 용기에 감탄했다. 하지만 그 기사는 캠피온에서 왔고, 따라서 드 부르그의 분노에 익숙할 것이다.

    [네, 그는 왔다가 갔습니다.]

    레오핀이 말했다.

    [맞습니다.]

    켄틴이 쿨룩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늑대는 어슬렁거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모여선 사람들의 한가운데 서서 가늘게 뜬 눈으로 훑어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야수 같았다.

    [내 동생이 여기에 없다는 것은 알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레오핀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만...]

    [우리도 정확히 모릅니다.]

    플로리안이 얼른 끼여들었다.

    [하지만 사냥터에 계시는 것 같습니다. 내일 찾아 나설 수 있을 겁니다만...]

    [아니면 마을에다 메시지를 남겨놓아도 될 겁니다.]

    켄틴이 덧붙였다.

    [사이먼이 혼자 갔소?]

    또 다른 사내가-드 부르그 가문의 형제 가운데 하나가 분명한-앞으로 나섰다.

    [시종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플로리안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늘 그렇게 혼자 다니거든요.]

    [늘 그렇게 다닌다니?]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이지적인 얼굴 위로 흐트러진 한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늑대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조프리 영주님.]

    톨킬이 말했다.

    [이곳에 온 이래로 여러 번 왔다갔다했습니다.]

    [네, 정말입니다.]

    플로리안이 확인시켰다.

    [하루 동안 이곳에 머물다가 일주일 동안 자리를 비우셨죠. 대부분 밖에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만...]

    플로리안은 좀더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늑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겐가?]

    늑대가 소리치며 조프리라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이먼 형답지 않군요.]

    조프리가 말했다.

    [우리는 그가 병이 든 것은 아닌지 염려하고 있습니다.]

    레오핀이 말했다.

    [이곳에 도착하신 이래로 그의 행동은 좀 이상했습니다. 음식도 거의 드시지 않았고요.]

    [그래요.]

    켄틴이 맞장구쳤다. 플로리안은 그런 이야기를 꺼낸 두 사람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솔직히 말해서, 영주님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플로리안이 말했다. 하지만 준비된 그의 미소도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선 기사들의 시선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두 손을 꽉 잡았다.

    [상사병입니다.]

    여섯 개의 검은 머리통이 동시에 그를 향했고, 놀라 크게 뜬 눈동자들이 그를 주목했다. 그리고 곧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드 부르그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플로리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한 번도 웨섹스의 늑대를 만나 본 적이 없지만 마치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자신들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면서 갑작스런 웃음을 터뜨리는 드 부르그 형제들이 미워졌다. 플로리안은 우우거리며 야유하는 소리를 넘어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사이먼 영주님께 웃음보다는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요즘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거든요. 아마 일이, 그러니까 마음의 문제가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플로리안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음모를 꾸미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마도 성공시킬 기회를 잡으려는 것 같습니다.]

    형제 가운데 한 명이, 보는 사람의 숨을 앗아갈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커다랗게 코웃음을 쳤다.

    [사이먼 형이? 그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소. 어떤 것에도 져본 적이 없단 말이오.]

    [맞아.]

    조그만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스티븐 형과는 달랐어. 여자에 대해서나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한 번도 마음을 써본 적이 없잖아.]

    플로리안은 화가 나서 입을 다물었다. 사이먼의 형제들이라면 조롱하는 것 대신 동정심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 불쌍한 남자가 그렇게 경직되고 굽힐 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어쨌든 저는 사이먼 영주님이 벳시아 버넬과 힘께 있다고 확신합니다. 앤스퀴스가 아닌 버넬 가의 사냥터에서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늑대는 조프리를 쏘아보았고, 흥미롭던 형제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형이 보낸 편지에 나오던 이름이군.]

    가장 작은 남자가 말했다.

    [불쌍한 사이먼...]

    늑대가 중얼거렸다. 조프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장 강한 사내가 이렇게 쓰러지다니...]

    [하! 정말 믿을 수 없어.]

    스티븐이 말했다.

    [거기 예쁜 아가씨, 나에게 와인을 좀 가져다주면 고맙겠소.]

    그는 한 하녀에게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플로리안은 눈썹을 불쑥 들어올렸다. 이것은 그가 걱정하던 일이었다. 그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면서 고게를 수그렸다.

    [네, 앉으십시오, 영주님들. 저녁식사는 끝났지만 즉시 음식을 대령하겠습니다.]

    그가 손바닥을 치자 하인들이 흩어졌다.

    [내일 사냥터로 나가 사이먼 영주님을 찾도록 하죠.]

    스티븐을 선두로 하여 다섯 형제들은 의자로 향했으나 던스탄은 홀 안을 계속 걸어다니면서 모여선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레오핀 앞에서 말을 멈추었고, 레오핀은 숨을 훅 들이마시면서 얼굴을 붉혔다. 마침내 늑대가 몸을 홱 돌렸다.

    [아더는 어디에 있나? 그리고 할은?]

    그가 물었다.

    [기마병들은 모두 어디로 갔지?]

    던스탄은 혼란스러운 플로리안의 표정을 보더니 다시 레오핀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사이먼과 함께 온 병사들은 어디에 있지?]

    살찐 기사는 고개만 가로저으며 사라진 사내들을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플로리안은 화가 난 던스탄의 표정을 보고 얼른 부엌을 향해 달려갔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은 하루가 끝났음을 알려주었고, 그것을 본 거대한 기사는 크게 욕설을 내뱉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군요.]

    조프리가 말했다.

    [그래.]

    늑대가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비가 그쳤다. 여름비는 땅을 살짝 적실 정도로 내렸다. 벳시아는 공격 날짜가 연기되길 바라는 마음을 애써 부인하며 동이 틀 무렵 일어났다. 급하게나마 그와 관계를 갖는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사이먼의 부하들이 오두막집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녀가 불안해하는데도 그는 존과 의논한 뒤에 부하들을 불러왔고, 그들은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하여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벳시아는 담요로 몸을 가리고 남자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칼을 준비했다. 사이먼의 비난이 날아오리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단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본 다음 무뚝뚝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뒤로 물러나 있으시오.]

    벳시아는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녀는 집 잃고 헤매는 개처럼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기사들은 말을 대장간에 남겨놓았고, 따라서 그들, 그녀가 예전에 손과 말을 묶어 손수레에 실어 배더슬리로 보냈던 열 두 명의 병사들은 모두 걸어서 사냥터로 들어왔다. 비록 그들은 사이먼 앞에서 그녀에게 드러내놓고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벳시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았다. 펄민이 배신한 다음부터 몸에 배어 있던 본능적인 경계심이 더욱 강화되었고, 그녀는 자신과 사이먼 두 사람을 위해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들이 지하 터널에 도달했을 때는 광부들이 거의 일을 마친 상태였다. 사이먼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그를 따라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가 벳시아에게 맨 끝에 오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애써 불평을 자제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부하에게 그녀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자 결국 벳시아는 조그만 목소리로 불평을 터뜨렸다. 하지만 중요한 전투가 코앞에 있는데 사이먼과 다툴 수는 없었다. 사이먼은 사닥다리를 내려갔다. 얼마 전 함정에 빠졌던 광산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벳시아는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그가 지닌 힘이 이른 아침의 햇살 속에서 거의 손에 잡힐 듯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벳시아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병사들이 그가 가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벳시아는 자신이 선발한 궁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가 부하들을 이끌기 위해 나섰을 때 사이먼이 자신을 보호하라고 명령한 병사와 맞부딪쳤다.

    [비켜요.]

    벳시아가 화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고는 그를 옆으로 밀어내고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벳시아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전율을 느꼈다. 저 앞이 바로 앤스퀴스였다. 그녀는 사이먼이 바로 이곳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내 그들은 이동했고, 그녀 앞에 있는 병사들은 무기를 꺼내들고 터널 저쪽 끝의 아침 햇살 속으로 돌진했다. 벳시아 역시 칼을 휘두르며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이먼과 그의 부하들은 위협적인 자세로 안뜰에 정렬했고, 그들 앞에는 몇몇 하인들이 모여들었다. 사이먼을 보고 공포에 질린 그들은 브리스를 데려오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벳시아는 긴장했다. 그 겁쟁이 남자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게 될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그는 한 번도 스스로 싸움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리스에게는 이곳에 도착할 때 데려온 병사들이 있고, 그 후 더 많은 병사들을 모았다. 벳시아는 물러서서 기다렸다. 사실 브리스가 직접 나타날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놀랍게도 화려한 차림을 한 브리스가 곧 도착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아버지의 돈으로 장만했을 화려한 옷을 입고 브리스는 공격을 받고 염려하는 표정이 아니라 아침 배변 시간을 방해받은 귀족처럼 느릿느릿 다가왔고, 그 뒤로 네 명의 호위병이 따라왔다. 분명히 더 많은 병사가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다. 벳시아는 조그만 목소리로 궁수들에게 건물 뒤로 빠져나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게 뭐지?]

    브리스가 향수 뿌린 손수건을 코에 대며 물었다. 마지 땅 아래에서 나온 그들에게서 악취가 풍긴다는 몸짓이었다. 그 꼴을 본 벳시아는 앞으로 달려나가 그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사이먼을 생각하고 억지로 참았다.

    [팔을 내리시오, 이분은 사이먼 드 부르그 영주요.]

    기사 기운데 한 명이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브리스의 반응에 쏠렸다.

    [영주님!]

    브리스는 번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벳시아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는 그의 이중성을 소리 높여 폭로하고 그가 달콤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구워삶기 전에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극도의 의지력을 발휘하여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영주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브리스가 사이먼을 향해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전갈을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저주받을 산적들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에드워드 왕이 산적들을 쳐부수기 위해 무장한 병사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려고요.]

    [에드워드 왕?]

    사이먼의 기사 한 사람이 되뇌었다.

    [네. 저는 그의 아이들을 가르쳤죠. 제가 궁정에서 일할 때 말입니다. 그들과 몇 년 동안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브리스의 거짓말을 듣자 벳시아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럼 대주교의 조언자였다는 말이오?]

    존이 비웃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니콜라스 교황을 낳았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궁수 한 명이 중얼거렸다. 브리스의 매끈한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너같이 하잘것없는 천민이 나의 생활을 이해할 리가 없지.]

    그는 손을 내저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사이먼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드 부르그 영주님, 아마도 당신은 에드워드 왕의 계획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그분의 신임을 받으실 테니까요, 그렇죠?]

    벳시아는 브리스의 계략을 알아차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먼 역시 쉽게 속을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벳시아는 굳게 다문 사이먼의 입을 보고 그가 브리스의 가짜 매력이나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왕은 이곳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소.]

    사이먼이 말했다.

    [하지만 난 그에게 전령을 보내 당신의 못된 행동에 대해 알릴 거요.]

    브리스는 음흉한 미소로 사이먼의 위협을 교묘히 받아넘겼다.

    [영주님,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으실까 봐 걱정되는군요. 저는 이곳에 절친한 친구를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당신이 죽이려고 했던 여자의 아버지 말이오?]

    사이먼이 물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알랑거리는 미소로 비난을 뭉개 버리려는 브리스를 바라보았다.

    [제 적들이 그런 소문들을 퍼뜨렸을 겁니다. 그 불쌍한 소녀는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브리스는 몹시 슬프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저는 아직도 그녀를 애도하고 있습니다.]

    벳시아가 분노를 삭이고 있는 동안, 사이먼은 솟구치는 성질을 억누르기 힘들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죽은 나사로가 부활한 것처럼 부활한 그녀를 보면 무척 기뻐하겠군.]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기회를 포착한 벳시아가 앞으로 나서서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뒤로 넘겼다. 주위에 있던 사림들의 입에서 놀람의 탄성 소리가 새어 나왔다. 브리스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변하더니 곧 도망갈 구멍을 찾는 들쥐처럼 주변을 흘끔거렸다. 미소는 사라지고 회유적인 태도도 자취를 감추었다.

    [공격!]

    브리스가 소리치자 뒤에서 기다리던 병사들과 문 가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사이먼을 향해 달려들었다. 벳시아는 브리스가 달아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조그만 집들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던 벳시아는 커다란 홀을 향해 달아나는 브리스의 화려한 옷자락을 흘끔 보았다. 브리스는 계단을 향해서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기 위해서 가는 것인지, 아니면 몰래 빠져 달아나는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벳시아는 단지 그를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멈춰 서라, 이 겁쟁이!]

    벳시아가 소리쳤다. 어깨 너머로 뒤를 흘끔 보던 브리스는 조롱하듯 눈썹을 불쑥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발을 멈추고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간 그녀를 보았다.

    [오, 벳시아! 그런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알아보기 힘들군.]

    그가 놀려댔다.

    [하지만 당신과 놀고 있을 시간이 없어.]

    [널 죽이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벳시아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커다랗게 웃어댔다.

    [벳시아, 벳시아. 당신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브리스는 마침내 화려한 동작으로 칼을 꺼내 들고 그녀를 향해 칼끝을 겨누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아무리 남자처럼 행동해도 남자를 이길 수 없어.]

    벳시아는 그의 호언 장담을 무시한 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브리스는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그는 앞으로 몸을 던지며 공격을 시도했고, 벳시아가 가볍게 피하자 깜짝 놀라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당신의 숲 속 친구들이 칼쓰는 법을 가르쳐 준 모양이군. 그런가, 벳시아?]

    그가 물었다. 벳시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칼을 겨누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이동했다.

    [당신은 나와 침대를 함께 쓸 수도 있었어. 그런데 그런 지저분한 오합지졸과 흙 위에서 나뒹구는 것을 선택했군. 난 당신이 그렇게 더러운 여자인 줄 몰랐어.]

    그가 다시 칼을 내질렀으나 벳시아는 슬쩍 피했다.

    [지저분한 여자 같으니, 남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가 앞으로 돌진했다. 벳시아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싸우는데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사이먼을 상대로 이길 수 없지만 브라스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의 기술에는 한계가 있고 아무리 잘난 척 해도 그렇게 강한 사내가 아니었다. 벳시아의 칼이 훨씬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브리스는 곧 숨을 헐떡거렸고, 지쳐가는 눈동자에 광란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 잘하는군. 자, 벳시아, 어서 와 봐.]

    그가 뒷걸음질 쳤다.

    [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칼을 내리면 나의 막대한 재산을 나누어주지.]

    그녀는 사이먼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칼을 휘둘러 그의 팔을 베었다. 브리스는 울부짖는 아기처럼 상처 난 팔을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자비를!]

    그가 울었다.

    [자비를, 벳시아, 당신에겐 내가 필요해! 칼을 내려놓으면 당신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주겠어!]

    벳시아가 잠깐 멈칫하는 사이 브리스가 말했다.

    [날 살려주면 당신 아버지가 먹은 독약의 해독제를 주지.]

    브리스가 아버지의 병을 유발시켰을지 모른다고 의심해 온 벳시아는 망설였다. 그녀는 치료에 대해 잘 몰랐다. 만약 브리스가 아버지의 회복에 꼭 필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면...?

    [그래, 착하지.]

    그가 말했다.

    [내가 피를 멈출 수 있도록 해줘. 오, 나는...]

    그는 현기증이 난다는 듯 잠깐 비틀거렸고 벳시아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설 때 브리스는 그녀의 배를 향해 칼을 찔렀다. 칼끝이 벳시아의 살갗을 살짝 스쳤지만 상처를 내지는 못했고, 그는 기회를 잃었다. 그녀는 몸을 피하면서 그의 심장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브리스는 비틀대다가 뒤로 넘어졌다. 비열한 행위와 거짓말도 그와 함께 스러졌다. 그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벳시아는 몸을 수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감정적인 소모도 엄청난 데다가 싸움을 하느라고 모든 근육이 긴장한 상태라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막 숨을 돌렸을 때 커다란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벳시아!]

    사이먼...그가 살아서, 멀쩡한 몸으로 이곳에 왔어. 그녀는 반가웠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그를 본 벳시아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과 미주쳤다. 사이먼은 쿵쾅거리면서 다가오다가 널브러진 브리스의 시체를 보고 갑자기 멈추어 섰다. 다음 순간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흉포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바보 같고 고집만 센 여자 같으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요? 뒤에 물러나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의 말을 듣자 벳시아도 화가 났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쭉 폈다.

    [당신은 날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사이먼 드 부르그.]

    사이먼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를 잡았다.

    [내가 그럴 수 없다고? 당신은 내 것이오, 내 말 알겠소? 내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당신을 위태롭게 할 수 없소!]

    그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면서 소리쳤다. 두려움에 떨며 그를 쳐다보던 벳시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이먼은 다르다고 생각해 왔는데...그 역시 다른 남자들과 똑같았다. 그는 여자를 한 전사로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뒤에 처져 그의 명령만 듣는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들 사이에 생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에게 절대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날 놓아줘요, 바보 같으니!]

    벳시아는 소리치며 몸을 뒤틀어 빼낸 다음 칼을 꺼내 들고 휘둘렀다.

    [나에게 다시는 손대지 말아요!]

    전에도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 사이에 분출된 열정의 힘으로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했다. 그의 변절에 대한 상처와 굴욕과 분노가 벳시아의 내부에서 싸움을 일으켰다. 그녀는 씩씩대며 서서 또 다른 적과 대면할 준비를 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지며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벳시아, 빨리 와요!]

    벳시아는 문으로 달려가고 사이먼도 뒤를 따랐다. 앤스퀴스의 성벽 바깥으로 많은 병력이 모여 있었다.

    [용병이군!]

    벳시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당황하며 사이먼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다가 군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그가 놀리듯이 말했다.

    [왜죠? 오,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벳시아가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사이먼이 소리쳤다.

    [뭐라고요?]

    벳시아는 그가 미친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그들의 보잘것없는 병력을 단번에 짓밟아버릴 수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왜죠?]

    [저들은 용병이 아니오.]

    사이먼은 미소를 지었다.

    [내 형제들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