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12화 (12/16)
  • 12.

    벳시아가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은 황혼 무렵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소리를 죽이려는 노력은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사실 그 소리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요란하여 마치 화난 거인이 쿵쾅거리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막 침상에 누웠던 벳시아는 재빨리 일어나 칼을 집어들었다. 다급하게 서둘렀는데도 완전히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노크도 없이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그러고는 곧 거대하고 위협적인 인물이 문지방을 넘어섰다. 벳시아는 그가 자신을 공격하기 전에 오랫동안 단련된 기술로 크고 검은 형체를 향해 칼을 디밀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귀에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얼른 무기를 내렸다.

    [오, 이런, 사이먼!]

    벳시아는 깜짝 놀라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지금 뭘 하는 거요? 날 죽이고 싶소?]

    그는 그녀의 손가락이 튜닉을 찢자 거칠게 말했다. 그의 비난을 듣자 그녀의 당황은 분노로 바뀌었다. [어째서 갑옷도 입지 않은 거죠?]

    그녀가 쏘아붙였다.

    [공격받을 것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거칠게 대꾸했다.

    [당신은 언제나 공격에 대비해야 해요.]

    벳시아는 구멍난 튜닉 위로 흐른 피를 느끼면서 반박했다.

    [이런, 내가 당신을 찔렀군요!]

    공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허리띠를 풀러 먼지 많은 바닥에 떨어뜨리고 상처를 보기 위해 튜닉을 걷어 올렸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벗겨낸 튜닉을 침상 위로 던졌다.

    [자, 환한 곳으로 와요.]

    벳시아는 거대한 그의 몸을 문 쪽으로 잡아끌었지만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그만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사이먼은 그녀 뒤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벳시아는 가만히 있는 사이먼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유순하지. 아마도 상처 탓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두운 속에서 내가 자신을 찌르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어. 불이 활활 타오를 때 벳시아는 돌아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숨이 탁 막힐 것 같았다. 앞에 선 사이먼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처럼 보였다. 부상당한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벌거벗은 근육질의 어깨는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넓은 가슴패기는 검은 털로 뒤덮여 편편한 복부로 내려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벳시아는 얼어붙는 듯했다. 순수하게 아름다운 그의 육체를 보자 움직이거나 말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복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 역시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들리는 것은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맥박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새로 검게 얼룩이 진 그의 옆구리로 주의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의 상처에 대해서만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처를 살펴보았다. 손으로 피를 닦아낸 그녀는 상처가 깊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긁힌 것뿐이오.]

    사이먼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내 몸에 난 당신의 이빨 자국만큼의 흔적을 만들고 싶었소?]

    벳시아는 속삭이듯 깊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숨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곧 처음으로 자제력을 잃었을 때를 기억해 내며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마구 덤벼드는 이미지들을 상대로, 바로 이곳 오두막집에서 벌어졌던 기억들, 그의 입술이 자신의 가슴에 닿고 자신의 손이 그의 단단한 엉덩이를 움켜잡았던 모습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벳시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만약 그가 지금 나에게 손을 댄다면 어떻게 거부한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가 말했다.

    [차가운 금속보다는 당신의 이빨 쪽이 더 낫소.]

    오만한 목소리가 차라리 고마웠다. 제멋대로인 그의 말을 듣자 벳시아는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그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까? 얼마나 자주 <노>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대체 왜 이렇게 나를 시험하려는 것일까? 몸을 쭉 펴고 일어났는데도 벳시아는 너무나 불공평하게 자신을 가지고 놀려는 남자를 보기 위해서 턱을 쳐들어야 했다.

    [내가 세게 찌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무뢰한 같으니!]

    벳시아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쏘아붙였다.

    [감히 노크도 없이 뛰어들다니...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

    그는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나를 미치게 만든 것은 당신이오.]

    그가 중얼거렸다. 눈동자가 맹수처럼 빛났다. 벳시아는 그가 두 손으로 어깨를 잡자 깜짝 놀랐다. 손을 대게 해서는 안 돼. 특히 나의 시선이 그의 벗은 가슴에 고정 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녀는 그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뒤로 물러서서 튜닉을 집어 올려 힘껏 던졌다. 그러나 사이먼은 옷을 받아들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고, 벳시아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타닥거리면서 타는 불꽃 소리만을 들었다. 그를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태워 버릴 듯한 사이먼의 강렬한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잘 알았다. 절망감이 그녀를 무뚝뚝하게 만들었다.

    [옷을 입고 여기서 나가요, 사이먼! 당신에게 더 이상 희롱 당하지 않을 거예요!]

    벳시아는 외치면서 주먹으로 그의 단단한 배를 때렸다. 하지만 사이먼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벳시아는 한 줄기 공포가 등뒤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냉담함이나 거친 말투 혹은 칼의 위협을 받아도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벳시아는 그를 무시하거나 속이거나 싸움으로 그를 능가할 수 없었다. 만약 또다시 나에게 손을 댄다면? 벳시아는 빈약한 결심이 스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아직 너무 가까이 있었다. 난로의 열기가 그녀의 등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방출되는 뜨거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너무나도 남자다운, 너무나도 독특한 그의 체취만 느껴져 현기증이 날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와 결혼합시다.]

    그가 말했다. 벳시아는 충격을 받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잘못 들은 게 분명해.

    [뭐라고요?]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거칠고 그림자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그가 되풀이 말했다. 벳시아는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동맹을 위한 열정 없는 제안이야.

    [그럼 당신은 아기를 가지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요. 만약 아기가 생기면 내 이름을 주겠소.]

    그가 간단히 말했다. 벳시아는 죄 없는 아기를 향한 그의 무책임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가 고집스러운 말투로 말을 잇는 바람에 반박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는 브리스를 내쫓고 앤스퀴스를 탈환할 거요. 실수란 있을 수 없소.]

    그가 약속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드 부르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오겠소.]

    벳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상처를 받은 이유는 애정 없는 청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불명료한 감정을 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열정이 아닌 전투에 대한 언급 때문에 놀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로 인해 열정이라는 약점이 드러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듯 바라보는 사이먼의 시선이었다.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소망들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투 때문이었다. 심지어 앤스퀴스를 위한 계획을 말할 때도 그녀를 위해서라는 언급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당신과 당신 형제들이 내 아버지를 구해 내는 동안 나는 배더슬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라는 뜻인가요?]

    벳시아가 물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이먼은 그녀의 질문을 듣고 놀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오.]

    벳시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옴 힘을 기울여 두 손바닥으로 그를 밀어냈다. 예상하지 못한 힘을 받은 그가 비틀대는 틈을 타서 그녀는 그를 문 밖으로 떼밀었다.

    [나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나가란 말이에요!]

    벳시아는 당황한 그를 무시한 채 헐어빠진 문짝을 잡아 세게 닫았다. 남자들이란 다른 사람은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생각하는 종족이야. 지저분한 문에 기대어 씨근덕거리던 벳시아는 한 남자에게 자신과 자신의 영토를 지배할 힘을 절대로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결코 다른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 내가 누릴 수 있는 조그만 자유를 빼앗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일생을 예속되어 살아갈 수는 없어. 의지와는 달리 사이먼 드 부르그를 존경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물론 일은 어렵겠지. 하지만 만약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해도, 아니, 사이먼이나 다른 남자의 의지에 복종할 뜻은 조금도 없었다. 투덜거리는 낮은 목소리와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 왔을 때, 벳시아는 자신의 침상에 털썩 누우면서 굳게 결심했다. 기나긴 밤 동안, 벳시아는 정신 무장을 철저히 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했고, 오두막집의 외로운 어둠 속에 의존하는 버릇이 생겼다. 또한 힘든 일과 압박감으로 일관된 잃어버린 세월들에 관한 기억은 그녀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사이먼은 귈다처럼 죽도록 일을 시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벳시아는 자유를 원했다. 성벽 속에 갇혀 지내면서 한정된 사람들만 만나고, 사이먼이 원하는 곳에서 지내며 그가 시키는 일만 할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가끔 강한 힘을 가진 기사와 동맹을 맺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벳시아는 포기해야 할 일이 뭔지 알았다. 물론 따뜻한 침대에서 그와 함께 지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의 능력을 존중해 주지 않고 단지 쾌락만을 구하려고 할 거야. 만약 사이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약간의 장식품을 원한다면, 왜 궁정에 있는 많은 숙녀 가운데 하나를 골라 결혼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어째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벳시아는 처음으로 알게 된 진짜 기가를 향해 엄청난 이끌림을 받는 자신을 세차게 비난했다. 나는 자유를 절대 잃지 않을 거야. 남자들은 성미가 급하고 건방진 존재들이야. 사이먼은 나의 거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가 나서 나를 배반할까? 벳시아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실하게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날 오후 늦게 광산에 나타난 사이먼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도 차가운 사이먼의 표정을 보자 고통스러웠다. 마치 적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친구였나? 벳시아는 그와 함께 토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전술과 명령, 무기들과 산적 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날 밤을 떠올리며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른 기억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벳시아는 처음에 그를 사로잡았을 때와 그 이후 서로 충돌하면서 보았던 반항과 증오가 가득한 사이먼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거의 완성되었소.]

    그가 입구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좋아요.]

    벳시아가 말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문제를 끄집어내는 데 필요한 힘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벳시아는 그의 냉혹한 표정을 보며 말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고통으로 번뜩거린 걸까? 벳시아는 단단히 다물린 그의 입술을 보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의 거친 웃음소리가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오합지졸을 가지고 기사들과 싸우겠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는 오만하게 중얼거렸다. 벳시아는 그의 모욕을 무시했다.

    [당신의 약속을 빌미 삼아 당신을 붙잡을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말을 하자마자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방출하는 분노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것은 용광로의 열기처럼 뜨거웠다.

    [나는 드 부르그요.]

    그가 완고하게 말했다.

    [나의 의무는 회피하지 않소.]

    그의 말은 그가 한 청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결혼도 다른 의무들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벳시아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뱃속이 이상하게 스멀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몸을 돌렸다. 사이먼은 돌아서서 가는 벳시아를 무시한 채 광산으로 돌아와 지하 통로에서 나온 흙더미를 치웠다. 그녀는 아직도 나를 내쫓으려 하고 있어! 나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의 청혼을 거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완전히 제거해 버리려고 해! 하지만 그 여자에게 만족감을 안겨 주지 않을 거야. 그녀가 얼마나 모욕을 하든 나는 앤스퀴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릴 수 없어. 그리고 그녀가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해서 숨어 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어. 게다가 사이먼은 지난밤에 시도를 해보았다. 배더슬리로 돌아가 보았다. 심지어 플로리안의 호들갑마저도 반갑게 느껴졌다. 벳시아에게 청혼을 거절당하자 난타당하고 멍든 기분이 들었다. 친숙한 환경이 그리워서 배더슬리로 돌아갔지만 성도 생각만큼 편안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지하 통로와 앞으로 닥칠 전투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그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벳시아의 거절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모든 것에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만약 무엇인가가 잘못 된다면 누가 그녀를 돕겠는가? 그녀에게 거절을 당했는데도 벳시아의 안전이 머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는 밤새도록 그 문제와 씨름을 벌였다. 마침내 그는 집으로 전령을 보내어 자신의 아버지에게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던스탄은 아내의 소유지에 생긴 조그만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을 꼬박 지샌 사이먼은 동이 트자마자 전령을 보냈다. 그러곤 이제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는 들판을 말을 타고 달렸다. 지금까지 거기에는 용병들이 온 흔적은 없었다. 앤스퀴스는 조용했지만 그는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싶었다. 이 작은 전투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는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의무는 다한 셈이지, 사이먼은 단호하게 결심했다. 벳시아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앤스퀴스에 정착하게 되면 나는 배더슬리를 떠날 거야. 그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아버지에게 보낸 서신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던스탄처럼 에드워드 왕을 위해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캠피온 백작은 모든 아들들이 왕과 합류하기를 거부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사이먼은 비록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 해도 자신만의 길을 떠나겠다 고 결심했다. 한때 무척이나 소중했고 세상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던 아버지의 소망들도 이제는 의미가 별로 없었다. 에드워드 왕의 기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자 어느 정도 냉정해졌다. 전투들, 승리와 보상도 더 이상 그를 흥분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 위안을 받기 위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한다 해도 형제들에게 비웃음만 살 것이다. 게다가 어디를 둘러보아도 벳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이곳에 머무를 생각도 조금도 없었다. 이곳은 그녀의 집과 너무 가까웠다. 말을 타고 나오는 그녀를 볼 가능성이 많았다. 그럼 분명 그녀가 결혼하는 것도 보게 되겠지...그런 생각을 하자 사이먼은 날카로운 칼에 베이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놀랄 만큼 격렬한 감정이었다. 그녀의 거절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그 여자 때문에 자존심이 다시 상처받았을 뿐 아니라, 마치 플로리안이 추천한 외과 의사가 와서 자신의 창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도려낸 것처럼 내부가 텅 빈 기분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음부의 고통은 사라졌다. 잘된 일이야. 다시는 여자를 원하는 상상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어떤 상상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사이먼은 브리스 스컬베인에 대한 분노를 애써 억누르면서 사냥터로 돌아왔다. 통로의 완성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이먼은 직접 광부들을 도울 생각도 했지만 어둡고 축축한 통로에 들어갈 생각을 하자 숨이 탁 막혔다. 그래서 땅위에서 흙을 나르는 몇몇 궁수들을 도왔다. 그는 벳시아가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힘든 노동을 계속했다.

    [영주님!]

    사이먼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급히 갔다.

    [영주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곳에 내려와서 보시겠습니까?]

    사이먼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만약 적들이 이 통로를 발견했다면? 혹은 바위가 많은 단단한 지점에 부딪힌 거라면? 비록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보러 직접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곳은 기사가 들어갈 곳이 아니었다. 사이먼은 튜닉 차림의 벳시아가 땅 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좁은 사닥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주변에 어둠이 깔렸다. 사이먼은 목을 조여오는 폐소 공포증과 싸움을 벌였다. 그는 축축한 벽이나 땅의 무게를 불안하게 떠받지는 버팀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신 숨을 훅하고 들이마시면서 벳시아를 생각하며 계속 나아갔다. 벳시아의 부하가 등불을 들고 있었다.

    [윌이 끝에 있는데 그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을 지켜 주시겠습니까?]

    그 사내는 서둘러 등불을 건네주고는 사이먼이 대답도 하기 전에 가버렸다. 사이먼은 정적이 감도는 통로에 멈추어 섰다. 내가 직접 윌을 데려올걸...하지만 지금 여기서 나간다면 아마 겁쟁이로 보일 것이다. 사이먼은 혼자 투덜거리면서 몸을 웅크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이 지시한 대로 통로가 조금 위쪽으로 경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들이 통로로 들어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사이먼은 어떠한 돌발 사태에도 대비하는 것이 좋다고 믿었다. 불행히도 그는 축축하고 숨막히는 어둠 속을 지나갈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구역질 나는 냄새가 그를 공격했다. 문득 자신이 덫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에 굴복하길 거부하면서 사이먼은 벳시아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이 지하 터널 작업이 빨리 완성될수록 그녀는 원하는 것을 더 빨리 얻을 수 있어. 비록 벳시아가 나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거야. 나는 드 부르그 가문의 사내야. 약속은 꼭 지킬 거야. 사이먼은 너무 빨리 통로의 끝에 도달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서둘러 무기를 빼어 들고 앤스퀴스로 쳐들어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고 땀이 솟았다. 이것은 더위 때문이야. 그런데 끝 쪽에서 일한다는 광부는 어디에 있지? 사이먼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손수레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통로가 워낙 좁아서 가장자리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 바람에 등불이 떨어졌고, 세상은 곧 암흑으로 바뀌었다. 젖은 흙더미가 손수레에서 그를 향해 쏟아졌다. 순간 그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마구 몸부림을 쳐서 몸을 덮은 흙을 헤치고 일어나 허겁지겁 부족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현기증이 일어나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내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사이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정심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언제 튀어니올지도 모를 적을 맞이하기 위해 칼자루에 손을 뻗는 순간, 사이먼은 버팀 목우로 사용하고 있는 목재가 우지끈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천장이 무너질 때 땅바닥에 구르며 머리를 감쌌다. 무거운 흙덩어리가 등으로 떨어지고 입 속에 흙이 가득 들어 왔다. 암흑과 흙이 그를 짓눌렀다. 흙이 무너지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사이먼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희미한 웃음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다. 펄민...사이먼은 증오로 가득한 궁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말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그가 일부러 지하 통로를 무너뜨린 것일까? 무엇 때문에?

    [자, 지금 기분이 어떻소, 기사님?]

    궁수가 놀려댔다.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경고했는데도 당신은 그 더러운 손을 그녀에게서 떼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의 잘난 이름과 두둑한 돈지갑, 그리고 당신이 거느린 군사들 때문에 그녀 역시 당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소, 그렇지 않소?]

    사이먼은 대답조차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펄민은 미친 사람처럼 길길이 뛰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제 그녀의 오두막집에 있는 당신을 보았소. 반쯤 벌거벗었더군. 그리고 그녀를 제멋대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이라도 하듯 문도 열려 있었지.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그가 소리쳤다.

    [아무도 다시는 이곳을 파려고 하지 않을걸. 그리고 그녀는 내 것이야! 내 말 들려, 이 개자식아? 잘 들어. 내가 그녀에게 하려는 것을 모두 말해 줄 테니 말이야.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질 거야. 네가 여기에 누워 마지막 숨을 거두는 동안 그녀는 오직 나만을 위해 암캐처럼 몸을 열게 될 거야.]

    사이먼은 귓가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몸을 누르는 흙더미 속에서 희미하나마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 몸부림을 쳤다. 사이먼은 더 이상 펄민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벳시아...그녀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려왔다. 그를 죽이시오, 벳시아. 사이먼은 정신을 잃었다.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벳시아는 될 수 있는 대로 사이먼을 피해 다녔다. 지금 그녀는 혼자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나았다. 피곤했다. 살피는 듯한 부하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위안이었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별을 보자 사이먼이 청혼을 함으로써 깨어진 전날 밤의 평화가 떠올랐다. 그때 바깥에서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이상한 즐거움이 뒤섞여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날 혼자 내버려두라고 했잖아요!]

    그녀는 소리를 지르다가 놀라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랑은 사이먼이 아니라 펄민이었다. 희미한 빛 속에 드러난 그의 얼굴이 이상스럽게도 흉포하게 보였다.

    [무슨 일이죠? 문제가 있나요?]

    그녀는 사이먼 드 부르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없소.]

    펄민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불행히도 벳시아는 그를 달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무슨 일인가요?]

    [나는 처음부터 당신과 함께 있었소.]

    펄민이 한 발자국 다가서며 말했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지하 감옥에서 썩든지, 아니면 브리스와 결혼했을 거요. 나는 한 번도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당신의 명령에 따랐소. 하지만 이제 충분히 기다렸소.]

    벳시아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혹시 그가 술을 마신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펄민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무엇인가에 잔뜩 동요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더 이상 생각하기도 전에 펼민이 앞으로 달려들어 그녀의 등을 오두막집 벽에 대고 자신의 몸으로 마구 눌러대기 시작했다. 벳시아는 놀라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입술에 밀리고 말았다. 벳시아는 목구멍까지 닿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온 그의 혓바닥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혀를 깨물려고 했다. 하지만 펄민은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두 손을 눌러 꼼짝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녀는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무거운 그의 몸무게에 눌려 칼에 손을 뻗칠 수도 없고, 발로 찰 수도 없었다. 벳시아는 그가 술에 취해 잠깐 착란 증세를 보일 뿐 심각한 위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당신을 가질 거야. 늘 원해 오던 일이지. 이제 드 부르그는 잊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말했다.

    [내가 손을 좀 봐줬거든.]

    그가 중얼거렸다. 벳시아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들어올려 그의 발을 세게 밟았다. 그리고 그가 몸을 웅크리는 순간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갈긴 다음 칼을 뽑아 들었다. 이제 좁은 공간에서 뒤로 물러설 사람은 펄민이었다. 그녀의 칼이 그의 복부로 향했다.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벳시아가 침착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펄민이 욕설을 퍼부었다.

    [어쨌든 상관없어. 그 자식이나 그 바보 같은 지하 터널 말이야. 그 멍청이와 함께 모두 사라졌으니까! 이제 넌 내 거야!]

    그는 또다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벳시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마해 온 무기를 휘둘렀다. 그녀의 칼이 자신의 복부에 들어온 것을 보면서도 펄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펄민의 배에서 피가 펑펑 솟구쳤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칼을 휘둘렀다. 잠시 뒤 벳시아는 부하들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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