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10화 (10/16)
  • 10.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벳시아는 그가 자신에게 키스한 이래로 계속 흔들렸다. 그 사건을 잊어버리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는데도 그 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몸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심지어 베갯잇 속에 신선한 지푸라기를 집어넣는 지금까지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벳시아는 화가 나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뒤 혐오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성을 배신한 손가락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그가 자신에게 영향을 마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약해지면 모든 것을 잃게 돼. 의심스러운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게 오랫동안 싸워 왔어. 난 그것보다는 강해, 벳시아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지하 통로가 완성될 때까지만 그 힘을 유지 하면 돼. 그런 다음에는 브리스를 무찌르고 아버지를 구해 낼 거야. 그러고 나서 사이먼 드 부르그를 포함한 어떤 남자의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나만의 자유를 누릴 거야. 벳시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떨리는 다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허벅지를 두 손으로 눌렀다. 한참이 지나 다리가 다시 회복되자 그녀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을 하면 그래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장소라 할지라도 사아먼 드 부르그와 함께 말을 타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은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녀는 버려진 광부의 오두막집을 찾아내어 새 짚으로 이엉을 얹고 수리를 했다. 사이먼의 크고 단단한 육체의 유혹을 떨쳐내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혼자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지난 며칠 동안 부하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사이먼을 받아들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여럿 되었다. 그리고 펄민을 비롯해서 두세 사람은 드러내놓고 적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마치 적으로부터 성을 보호하듯, 그녀 둘레에 장막을 치고 숨을 틀어막으며 그녀 자신도 이미 오래 전에 부서졌다고 생각한 장벽을 쌓아 올리려고 안간힘이었다. 사이먼 덕분에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명령의 권위도 조끔 손상되었다. '당신은 나를 믿어야만 하오.' 빌어먹을! 벳시아는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간 손짓으로 새 지푸라기를 밀어놓고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칼 솜씨나 싸우는 기술을 두려워했지만 사이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보다 더 강했다. 그런 생각들이 불러일으킨 혐오감과 흥분 때문에 벳시아는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당황해서 울퉁불퉁한 짚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야만 해! 벳시아는 사이먼 드 부르그와 같은 영주가 여자들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는 어떤 남자의 정부가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름도 힘도 없는 놀림의 대상은 절대로 되지 않을 거야. 이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혼자서 똑바로 설 수 있는 독립성과 경제력이지, 순간의 덧없는 쾌락이 아냐. 밖에서 들려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벳시이는 깊이 빠져들었던 상념을 떨치고 재빨리 일어났다.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얼른 활을 집어들었다. 열린 문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간 벳시아는 자신의 부하 두 사람 사이에 축 늘어져 있는 사이먼 드 부르그를 보고 놀란 나머지 문지방에서 걸음을 딱 멈추었다. 벳시아는 반으로 접히다시피 한 거대한 기사의 몸을 응시했다. 그가 쓰러지다니...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느꼈던 분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혹은 죽어 간다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죠? 그가 어디에서 다친 건가요?]

    그녀는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머리에 흑이 하나 났을 뿐입니다.]

    광부들을 돕고 있는 윌이라는 사내가 대답했다.

    [삽에 맞았어요.]

    [삽?]

    벳시아가 놀라서 되물었다.

    [펄민과 그렇게 가까이 서 있지 말았어야 했어요.]

    다른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벳시아는 뜨거운 분노가 몸 속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두 남지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사이먼의 부상은 우연한 사고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보복이 이어질 것은 확실했다. 게다가 한 남자의 바보스럽고 악의에 찬 행동은 그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그녀의 무서운 시선을 받고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벳시아는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 발자국 물러났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 기다려야 했다.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침상에 눕히고 갑옷을 벗겨줘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지시했다.

    [하지만 여기는 당신이 머무는 곳이잖아요.]

    윌이 말했다.

    [그래요.]

    벳시아는 윌이 먼저 눈길을 떨어뜨릴 때까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미 붉어진 윌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곧 의식을 회복할 겁니다.]

    다른 남자는 급히 만든 침상에 사이먼의 몸을 눕히면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회복되어야만 해요.]

    벳시아는 부하들이 사이먼의 갑옷을 벗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배더슬리의 영주이며 웨섹스 남작의 동생이자 캠피온 백작의 아들이 이곳에서 죽는다면, 브리스 스컬베인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재앙이 닥칠 거예요.]

    두 사람은 눈에 띌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가 버렸다. 벳시아는 사이먼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정복할 수 없는 강인한 기사가 누워 있는 모습에 새로운 충격을 느꼈다. 비록 그가 한때 자신의 명령에 손발이 묶인 적은 있지만,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묶여 있는 맹수처럼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길게 누운 그의 강인한 육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은 꼭 감겨 있고, 검은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 사이먼의 모습을 보자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다행히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벳시아는 자신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주저하면서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의 몸에 손을 대야 해. 그렇지 않고서 그의 상처를 돌볼 방법은 없어. 벳시아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머리카락은 가정 섬세하고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천보다도 부드러웠다.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면서 상처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손가락이 혹에 닿았을 때 사이먼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사이먼, 내 말 들려요? 다른 곳이 아픈 것은 아닌가요?]

    사이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신음 소리만을 냈다. 벳시아는 괴로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넓은 어깨와 팔을 쓰다듬은 다음 튜닉을 들어올렸다. 그의 가슴은 넓고 단단했다. 한복판에 난 겁은 털은 하체로 내려갈수록 점점 가늘어져 바지 속으로 사라졌다. 벳시아는 얼른 매끈한 살갗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오래된 흉터만 있을 뿐 새로 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의 가슴에 귀를 대보았다. 심장 고동 소리가 더욱 빠르고 크게 난다는 것과 피부가 뜨거워졌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의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이라면? 벳시아는 고개를 들고 공포를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솟구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단단한 그의 다리를 아래위로 만지면서 또 다른 상처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사이먼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했다. 벳시아는 멈칫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살폈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의 몸을 훑어보던 벳시아의 시선이 갑자기 불룩하게 올라온 바지 앞가랑이에 쏠렸다. 뼈가 부러지거나 피를 흘린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벳시아는 갑자기 솟아오른 천을 보자 의심스런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얼른 사이먼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탐욕스러운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상처를 입은 것은 당신의 단단한 머리통뿐인 것 같군요.]

    벳시아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다른 곳도 무척 아프단 말이오.]

    사이먼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화가 나 있지 않았다면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그래요, 사이먼, 불쌍한 사람 같으니...난 당신이 얼마나 퉁퉁 부었는지 알 것 같아요.]

    벳시아는 문제의 부위를 주먹으로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사이먼은 극도로 화가 난 그녀를 보고 귀에 거슬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나의 고통을 줄여 줄 수 있소.]

    그가 말했다.

    [어떻게요?]

    벳시아는 대답을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거기에 키스를 해주시오, 벳시아. 그러면 내 고통이...줄어들 거요.]

    그녀는 뻔뻔스러운 기사의 말을 듣고 분노와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벳시아는 머리 속으로 떠오른 광경을, 몸을 기울인 자신이 사이먼의 바지를 벗기고 그에게 손을 대는 상상을 애써 떨쳐 버렸다. 그의 멋진 몸을 상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단단한 근육과 힘은 그녀를 유혹했다. 벳시아는 지난 몇 주일 동안 사이먼 드 부르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는 은근히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의 오만함과 때때로 보이는 완강한 고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솔직한 태도에 찬사를 보냈다. 능력 있는 전사로서 드문 지성을 겸비했고,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진정한 기사였다. 그는 그녀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그녀와 손을 잡았을 뿐 아니라, 성급한 전사의 기질을 누르고 시간을 두고 생각하여 공격 방법을 선택했다. '당신은 나를 믿어야만 하오.' 벳시아는 우연히 다가온 깨달음에 흠칫 놀라며 숨을 훅 들이마셨다. 많은 낮과 밤이 흐른 지금, 그녀는 사이먼 드 부르그와 그가 말한 모든 것을 믿기 시작했다. 그 깨달음에 압도당한 벳시아는 마치 그것을 피하려는 듯 급히 일어났다. 사이먼이 그녀를 위협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내려다보던 벳시아는 자신의 감정이 두려움으로 확대되고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맨처음 뉘여 놓은 자리에 정지한 듯 누워 있었다. 위로 말려 올라간 튜닉 아래로 아름다운 가슴이 드러나고, 반쯤 감은 눈까풀 속으로 표정은 감추어졌지만, 벳시아는 깊고 강렬한 욕망이 그와 함께 누워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절망이 불러온 낮은 신음 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불현듯 벳시아는 엄청난 힘과 선량함과 열정을 가진 사내의 단단한 육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벳시아는 남자에게 자신을 주어 버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독립성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데다가, 아무리 강한 유혹을 받는다고 해도 순간의 쾌락을 위해 사랑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도 없었다. 벳시아는 자신의 모든 의지를 동원하여 사이먼과 그가 제안한 모든 것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런 욕구를 해소시켜 줄 만한 하녀는 이곳에 없어요.]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오두막에서 걸어나갔다. 사이먼은 침상에 털썩 누우면서 신음 소리를 냈다. 벌떡 일어나 벳시아를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졸음이 왔다. 벳시아의 반응이 자신이 원하던 것과 다른 지금,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지만 사이먼은 대답을 찾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어떤 여자에게도 말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고, 어떤 여자에게도 원하지 않던 것들을 원하게 만든 것은 아마 머리의 상처 때문일 거야. 절망감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사이먼은 팔꿈치에 몸무게를 싣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심한 두통 때문에 신음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한동안 음부로 전해진 통증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지금은 상처의 고통이 너무 심했다. 그는 손으로 상처 난 부위를 만져 보았다. 피가 조금 엉겨 있었다. 그는 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중심을 제대로 잡을 때까지 벽을 손으로 짚고 버텨냈다. 기분이 나빴다. 피를 많이 흘렸거나 위험한 일격을 당했을 때 느끼는 것과는 다르지만, 내부에 공기처럼 들어앉은 어떤 새로운 감정이 부패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상처를 찾는 사람처럼 가슴을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문가로 다가갔다. 벳시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목구멍으로 뭔가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솟아오른 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거부를 당한 거야.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사이먼에게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여자들과 시시덕거리거나 희롱한 적이 없는데 지금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이런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 것은 머리에 난 혹 때문일 거야. 어쩌면 플로라안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어떤 질병이 새로 난 상처 때문에 약해진 나를 더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는 서둘러 오두막에서 나와 숲 속으로 향했다. 만약 정말로 병이 든 것이라면 치료사를 찾아야 해. 심지어 집사의 어리석은 충고마저도 귀가 솔깃해졌다. 그는 자신을 꽉 채운 고통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마만 그 고통은 머리에 난 상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갑자기 배더슬리가 자신의 힘을 벌충할 수 있는 천국처럼 여겨졌다. 사이먼은 다리 사이에 꼬리를 감추고 집으로 도망가는 개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애써 억누르면서 몸에 힘을 주고 말을 맡겨 둔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부터 배더슬리까지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성에서는 내가 없어진 사실에 난리가 났겠지...

    [하지만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요!]

    플로리안이 빈 일광욕실에서 만난 세 사람의 기사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드 부르그 영주님이 그리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은 아니오. 불과 며칠이니까.]

    켄틴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플로리안은 입술을 오므렸다.

    [전에는 2, 3일 정도였죠.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행방 불명이란 말이에요. 나는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특히 영주님의 나쁜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산적들도 있소. 그들이 또 숨어서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오.]

    톨킬이 말했다. 그는 젊은이다운 혈기를 곤두세우면서 실종된 사이먼 드 부르그를 위해 금방이라도 전투 에 돌입할 태세였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 가서 그를 찾는단 말이오.]

    레오핀은 불만스런 목소리로 투덜거린 다음 치즈 조각을 베어 물었다. 뚱뚱한 기사는 언제나 부스러기들을 남겨놓기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한두 마리의 개가 꼬리를 치며 쫓아다녔고, 플로리안은 이 회의를 위해 강제로 문을 닫아 개들을 막아냈다. 그는 기사의 버릇과 말에 혐오감을 느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고 실종된 채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웨섹스의 늑대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자신의 동생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가 보일 반응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몸서리가 납니다!]

    비록 플로리안은 던스탄 드 부르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세 사람의 기사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집사는 웨섹스의 늑대를 들먹이면 기사들이 행동을 취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운 눈길만 주고받을 뿐, 플로리안이 기대한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웨섹스의 늑대에게 전갈을 띄우고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레오핀이 중얼거렸다. 켄틴은 마치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럽게 헛기침을 했고, 플로리안은 초조한 한숨만 내쉬었다.

    [사실은 사이먼 영주님이 길을 떠난 이후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소.]

    켄틴이 털어놓았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플로리안이 분통을 터뜨리며 다그쳤다. 켄틴은 어색하게 목청을 다듬었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랬소. 그는 미음의 한 선술집에 갔소. 그리고...음...그러니까 한 늙은이와 매우 친한 듯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플로리안은 켄틴의 말투에서 풍기는 의미를 알아듣고 숨을 헐떡거렸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점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집사는 몸집이 당당한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톨킬이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늙은이가 대체 누구요? 그리고 왜 선술집에서 만난 거요?]

    [아무도 모르오. 혹은 적어도 그들은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소.]

    켄틴이 대답했다.

    [정말 이상하군요.]

    레오핀이 중얼거렸다.

    [치즈 뱉는 짓은 그만두세요, 제발!]

    플로리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레오핀의 행동보다도 톨킬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대체 무슨 병에 걸린 뭐요? 어쩌면 치료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잖소.]

    톨킬이 제안했다.

    [선술집에서요?]

    플로리안이 기가 막히다는 듯 묻자 켄틴이 키득거렸다. 톨킬은 얼굴을 붉혔다.

    [영주님은 뭔가 정보를 찾고 있거나 그런 지식에 해박한 노파들이 사는 곳을 알아내려고 했을지도 모르오.]

    [아니면 그저 술을 마시러 갔을 수도 있소!]

    레오핀이 우물우물 씹으면서 제안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플로리안이 말했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장소에 자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사는 잠깐 말을 멈추고 턱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가 숲 속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군요. 아무래도 이번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영주님의 부하 가운데서 그날 일에 대해 말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켄틴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고, 플로리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집사 역시 그 일에 대해 한 가지도 알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 선술집에서의 일은...마침내 플로리안은 켄틴이 실수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여자들에 대한 사이먼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집사는 죽었다고 알려졌으나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한 여자가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전 약혼자인 브리스 스컬배인은 그녀가 죽었다고 발표하지 않았던가? 혹시 산적들을 추적하는 중일까? 체스판 위의 말처럼 플로리안은 그들을 모두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위치나 배더슬리의 영주와의 관계는 짐작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우리는 그 때의 일들을 알아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플로리안이 확고하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그 산적 가운데 한 명과 연락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켄틴이 코웃음을 치자 폴로리안은 화가 났다. 저런 주제에 스스로를 기사라고 칭하다니! 그들은 늙은 노파처럼 벌벌 떠는 것 대신 밖으로 나가 자신들의 영주를 보호해야 해!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마을을 뒤져 보아야 합니다. 누군가 이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좋소.]

    켄틴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은 웨섹스의 늑대에게 전갈을 보내지 마시오. 던스탄 드 부르그는 멍청이들을 추적하는 일에 그리 친절하지 않을 테니까.]

    사이먼을 찾아나서는 일은 바보스러운 일일까? 플로리안은 확산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곳을 방문한 영주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슬쩍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걱정도 되었다. 배더슬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평온하게 처리하는 것이 집사의 임무였다. 그런데 사이먼 드 부르그에 관한 무엇인 가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사이먼은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았다. 플로리안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난 곧 위대한 기사가 만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거야. 하지만 플로리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적의 기사에게서 잠과 입맛을 빼앗아간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벳시아는 하루종일 바쁘게 지냈다. 정찰병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냥을 하면서 사이먼 드 부르그의 단단한 육체와 장난스런 말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 이미지들이 나의 관심을 끌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가 한 말을 들으면 화가 나면서도 내부에 존재하는 무엇인가에 끄기 힘든 불이 붙었다.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고모에게 간 이래로, 벳시아는 여자의 매력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하인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다. 몇몇 방문객들이 벳시아를 보고 흑심을 품기도 했지만 충실한 조카를 잃고 싶지 않던 귈다는 남자들의 시선으로부터 벳시아를 가려주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브리스에게 강제로 떠맡겨졌다. 그는 잘생긴 외모조차 뻔뻔스런 본성에 밀려 빛을 잃는 남자였다. 벳시아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를 따르는 다른 남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이먼 드 부르그를 처음 본 순간 그녀는 뜨거운 생동감을 느꼈다. 왜? 어떻게 그가 나의 감각과 욕망, 그리고 나 자체를 바꾸어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를 필요로 할까? 화가 나서 혼자 중얼거리던 벳시아는 마침내 하루종일 골머리를 썩이던 걱정거리를 포기해 버렸다. 저녁식사 시간이 거의 되었으나 그녀는 메리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았다. 그녀는 요리를 해주는 과부였다. 오늘 아침 벳시아는 메리엘을 보내 사이먼을 돌보라고 했다. 물론 불쑥 튀어나온 바지 가랑이가 아닌 머리의 상처를 돌보라고.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벳시아는 그가 잘 있는지 궁금했다.

    [음,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요.]

    벳시아는 메리엘이 진한 스튜를 젓고 있는 화덕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원래 말이 적은 메리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벳시아는 갑자기 기사의 소식이 궁금해서 안달이 났다. 더 이상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자, 말해 봐요. 그는 괜찮던가요?]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지만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 않았다. 메리엘은 냄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아가씨.]

    [아무도 없다고요?]

    벳시아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면서 되물었다.

    [그가 어디로 갔단 말이죠?]

    비록 아주 심각한 부상은 아니지만 사이먼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환자였다. 아직 일어나서 돌아다닐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저도 모릅니다, 아가씨.]

    벳시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메리엘이 뭔가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오두막으로 향했다. 아마 그 과부가 장소를 잘못 찾아갔거나 혹은 사이먼이 볼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거대한 기사의 성격으로 보아 아무리 그를 위하는 일이라고 해도 자신 옆에서 법석을 떠는 것은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눕혀 놓은 작은 건물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웠던 자리에 지푸라기 눌린 자국이 남은 것과 머리가 있던 곳에 묻은 핏자국을 제외하고는 그가 거기에 있었다는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벳시아는 걱정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도망가지 말고 그를 돌보아 주었어야 했는데...아무래도 그의 행동이 이상했어. 만약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아무런 목적 없이 숲 속을 헤맬 수도 있고, 자신의 부하 가운데 하나가 성급하게 그를 해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사이먼이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섰는지도 몰라. 벳시아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가 재빨리 내쉬었다. 만약 싸움이 벌어졌다면 소리가 들릴 거야.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어. 벳시아는 주변을 조사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배더슬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떠난 그에게 이유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되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 사이먼은 나의 부하도 아니고, 또 그가 자신의 행방을 나에게 보고할 아무런 이유가 없잖아. 그는 어디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 생각을 하자 벳시아는 우울해졌다. 그녀는 야영지로 돌아와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사이먼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펄민과 몇몇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퉁명스런 궁수에게 기사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물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바보 같은 기사가 일을 하는데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벳시아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 건가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궁수의 붉은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신의 오두막에 있잖소!]

    [없어요.]

    벳시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가 배더슬리로 무사히 돌아간 것 같지만, 난 그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요. 제레미, 마을로 가서 살펴보도록 해요. 윌, 앤스퀴스로 가서 양치기들에게 물어 보세요. 그리고 펄민, 이번 사건은 당신에게 책임이 있으니까 오늘밤 두 사람 대신 망을 보도록 해요.]

    벳시아는 투덜거리는 펄민을 무시하고 지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브리스에게서 앤스퀴스를 구해낼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이 바로 사이먼 드 부르그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야 하나요?]

    그녀가 주변을 바라 보았다.

    [우리는 그가 없어도 잘할 수 있단 말이오.]

    펄민이 중얼거렸다.

    [무엇을 한다는 건가요?]

    벳시아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요, 우리는 브리스의 공급 물자를 가로채고 그의 주머니를 털었어요.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은 가하지 못했죠. 겨울이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런 메마른 숲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펄민은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광산으로, 농장으로, 양치는 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족과 삶의 터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브리스를 내쫓아야만 했다. 이런 무법의 산적질을 계속하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는 우리를 잡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올 거요. 내가 삽으로 그의 머리를 때린 것에 보복을 하기 위해서 말이오.]

    벳시아는 사이먼이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사이먼 드 부르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오려고 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궁수를 쏘아보며 말했다. 게다가 사이먼은 한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벌을 내릴 그런 사내가 아니었다. 그가 우리들에게 화가 났을까? 아니면 자신과 함께 오두막에서 머무르길 거부한 나에게 화가 난 것일까? 벳시아는 재빨리 그런 생각들을 지워 버렸다. 사이먼 드 부르그 같은 기사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보다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자를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야영지를 다시 이동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벳시아.]

    존이 말했다. 비록 그녀의 심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벳시아는 아직도 사이먼을 의심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했다.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일단 해산합시다. 하루나 이틀쯤 지하 통로 만드는 일을 중단하고 그 근방을 감시하도록 해요.]

    벳시아는 어서 통로를 파서 하루라도 빨리 앤스퀴스로 입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억누르고 부하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벳시아는 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돌리면서 일을 잘 처리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뱃속에서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일이 지연됨으로써 느끼는 안달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기사에 대한 걱정이 다른 사람들의 불신에 동조함으로써 그를 배신했다는 불편한 감정과 함께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배더슬리는 천국이 아냐. 사이먼은 그곳에 도착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플로리안의 시끄러운 잔소리와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향한 이상한 눈길들과 쑥덕거림에 진저리가 났다. 숲 속에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을 뻔했군, 그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벳시아를 떠올리면 목구멍이 조여 오고 왠지 불편해졌지만 그것을 견디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사이먼은 지금까지 어느 순간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그는 드 부르그 가문의 남자이며 그 이름만으로도 특권과 존경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먼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던스탄이 이룬 업적과 필적할 만한 공로를 세우기 위해 항상 노력했고, 힘이나 전투 기술에서도 다른 형제들을 쉽게 능가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아주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바보처럼. 게다가 배더슬리의 사람들은 우울한 그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이먼은 자신의 인생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사이먼이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지를 때까지 그의 건강에 대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현저하게 떨어진 그의 식욕과 불면증을 두고 한 마디씩 해댔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대단한 식욕을 자랑하며 맛있게 먹어도 사이먼은 어떤 음식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우아하고 부드러운 침대조차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낮에도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싸움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지만 싸울 상대가 없었다. 그런 상태가 길어질수록 그는 더욱 화가 났다. 비록 플로리안이 체액의 불균형이 가져 오는 결과에 대해 불길한 증상들을 나열했지만 그는 의사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이먼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해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한순간 그는 돌아가서 지하 통로 파는 일을 감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이 없어져서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며칠을 보낸 사이먼은 거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배더슬리의 담 안에서 단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냥터로 돌아갈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화가 난 사이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말을 타고 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마을도 그의 나쁜 기분을 달래주지 못했다. 이른 오후의 태양이 오래된 도로를 내리쬐었고, 그 위를 여행객들과 들판으로 향하는 농노들, 자신의 조그만 농장을 돌보려는 자유민들이 이따금 지나갈 뿐이었다. 사이먼은 고통스럽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나의 내장 기관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라. 마치 삼킨 음식들이 넘어가지 못하고 목구멍에 들러붙은 기분이었다. 그는 말을 대장간에 맡기고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을 지나 마을의 가장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주의를 끈 것은 닭에게 모이를 주는 젊은 여자였다. 엷은색 머리카락을 닿아 등뒤로 늘어뜨린 모습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지금 벳시아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무사할까? 은신처와 먹을 것을 찾아냈을까? 자신의 생각에 불만을 느낀 사이먼은 혼자 투덜거렸다. 벳시아는 나보다도 사냥을 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이먼의 시선은 여자를 따라 우아한 팔의 움직임과 엉덩이 둘레로 퍼진 스커트 주름으로 향했다. 가느다란 발목이 흘끔 보였을 때 예상치 못한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며 몸 속으로 퍼졌다. 마치 사이먼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는 보통의 처녀들이 그러하듯 조심스럽게 한 손을 치마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은 채 천천히 돌아섰다. 그 여자가 그를 마주 보았다. 순간 사이먼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벳시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낯이 익은 이유가 따로 있었군. 벳시아...사이먼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여자의 옷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본 충격으로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강인한 전사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남자의 튜닉 속에 감추어졌던 부드러운 곡선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사이먼은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입 속이 바싹 말라오면서 공기가 점점 뜨겁고 무겁고 진해졌다.

    [좋은 날이군요, 기사님.]

    벳시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턱을 약간 쳐든 자세는 그녀가 아직도 두려움 없는 전사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요?]

    사이먼은 용기를 내어 다그쳤다.

    [오, 나에게는 당신이 모르는 은신처가 많이 있죠.]

    속삭이듯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사이먼은 조금 화가 났다.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움켜잡고 마구 흔들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도록, 모든 것을 내놓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는 툴툴거리면서 그녀 뒤에 있는 조그만 집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곳에 혼자 있는 게 아니군.]

    그것은 질문이 아닌 단정이었다. 비록 사이먼은 벳시아가 무기를 잘 다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런 보호도 없이 숲 속 가까이에 사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하들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요.]

    벳시아가 대답하는 순간 오두막집 문가에 나이 많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이먼은 그녀가 산적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던 요리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메리엘과 함께 지내요. 이곳은 그녀의 집이죠.]

    사이먼은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얼른 억눌렀다. 그녀가 늙은 여자와 함께 산다고 생각하자 핏줄로 피가 세차게 흘렀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오.]

    그는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내 몸 하나쯤은 내가 보호할 수 있어요. 당신도 잘 알 거예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가냘픈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사이먼의 주의를 끌어당겼다. 땋은 머리카락이 너무나 풍성하고 매끄럽게 보여 손으로 만지고 싶었다. 그녀가 머리를 휙 등뒤로 넘겼을 때는 거의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만약 당신이 논쟁을 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라면 당신의 성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예요.]

    벳시아가 쏘아붙였다. 사이먼은 적절한 대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 동안 벳시아는 도도하게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미 익숙한 자세였으나 목과 부드럽게 튀어나온 가슴팍의 하얀 피부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이먼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갑자기 그녀가 입은 여자의 옷이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꾸짖었다. 입 속이 바싹바싹 마르고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피부를 드러낸 그녀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그곳에 손이나 입술을 대고 싶었다. 모이를 먹던 닭들이나 지켜보는 과부가 있는데도 사이먼은 그녀의 치맛자락을 들추고 풀밭에서 그녀를 탐하고 싶었다. 뜨겁고 매끈하고 단단한, 고동치는 자신의 몸 일부를 그녀와 뒤섞고 싶었다. 욕망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오는 바람에 사이먼은 현기증을 느꼈다. 오두막집이나 메리엘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오직 벳시아를 갖고 싶다는 욕구뿐이었다. 벳시아 역시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입에서 번뇌의, 아니면 거절의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낮고 작은 목소리를 들은 사이먼은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움켜잡고 싶었다. 그녀가 돌아섰을 때 그의 시선은 땋아 내린 머리채에 쏠렸다. 머리채가 치맛자락과 함께 흔들렸다. 늘 헐렁한 튜닉에 감추어져 있던 가느다란 허리를 보자 그는 땀까지 흘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녀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하지만 벳시아는 이미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가고, 메리엘만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와 욕구 불만에 휩싸인 사이먼은 하늘을 향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앞에 있는 도로가 희미하게 보이고 말이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도무지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벳시아가 있는 곳에서, 특히 그녀가 여자 옷을 입고 있는 이곳에서 단 한순간도 더 머무를 수 없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근육이 긴장되었기 때문에 어색한 걸음걸이로 길을 가로질러 사냥터로 갔다. 숲 속으로 들어간 사이먼은 뛰다시피 해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까지 간 다음 나무줄기에 몸을 털썩 기댔다. 허파는 타는 듯하고, 머리 속은 위험스럽게 빙빙 돌았다. 병에 걸린 게 틀림없어, 그는 아직까지 기능을 다하고 있는 뇌의 일부분을 사용하여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숲 속의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확실히 알 수 없는, 자신을 괴롭히는 무엇인가를 내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벳시아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특히 드레스 위로 드러난 목과 가슴 부분의 살결이 그를 자극했다. 그녀는 여자였고, 그는 그녀를 원했다. 벳시아...과거에 잠자리를 함께했던 어떤 매춘부도, 궁정의 숙녀도, 농가의 처녀도 아닌 벳시아...그런데 그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사이먼은 벳시아의 손이 자신에게 닿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의 손가락과 입술, 매끈한 다리가 자신의 몸에 감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이먼의 입에서는 또다시 절망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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